2023/09/02

[추적] 韓明淑과 남편 朴聖焌은 통혁당 당원이었나? : 월간조선 05 2006

[추적] 韓明淑과 남편 朴聖焌은 통혁당 당원이었나? : 월간조선

[추적] 韓明淑과 남편 朴聖焌은 통혁당 당원이었나?
「朴聖焌은 통혁당 소조책」(당시 中情 발표) 韓明淑, 통혁당 사건으로 실형

[지금까지의 해명]
박성준 :『통혁당 같은 조직에 가입한 적 없다』
한명숙 :『남편 옥바라지만 했을 뿐 (통혁당 사건을) 알지 못한다』

통혁당은 북한 조선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지하당이었다. 金鍾泰·金瓆洛·`李文奎는 越北해 조선노동당에 입당했고, 통혁당원 이진영·오병헌은 1968년 4월22일 越北해 교육을 받던 중 19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에 머물렀다. 통혁당 서울시당 위원장 金鍾泰는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金日成을 면담하고 美貨 7만 달러, 韓貨 3000만원, 日貨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A-3지령을 167회 수신했다.
그동안 통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공판과정이나 그 이후에도 별다른 고문·조작 시비가 없었다. 이 사건은 2005년 2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우선 조사대상 사건으로 선정한 7개 사건(KAL858기 폭파, 민청학련·인혁당 사건, 동백림 사건, 김형욱 실종사건, 金大中 납치 사건, 정수장학회, 중부지역당 사건)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金成昱 미래한국신문 기자
엇갈리는 朴聖焌의 해명
2001년 박성준 교수의 61회 생일을 맞아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이는 한명숙 총리지명자 부부.
열린당 의원 韓明淑(한명숙)씨가 국무총리에 지명된 후 남편 朴聖焌(박성준)씨의 사상편력이 화제가 되자, 朴씨는 과거 통혁당 가입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그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선노동당이나 통혁당 같은 조직에 가입한 적도 없고 포섭된 적도 없다』(4월3일 동아일보), 『사건에 연루된 申榮福(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 본 게 전부다』(3월27일 오마이뉴스), 『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申榮福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3월27일 조선일보) 『申榮福 선생으로부터 책을 빌려 받은 것이 전부인데 15년형을 받았다』(3월25일 문화일보)고 밝혔다.

朴聖焌씨의 이 같은 해명은 자신이 이전에 한 설명과 다르다. 2001년에 발간된 季刊(계간) 「새길이야기(3호)」의 박성준 인터뷰 기사는 「마르크스 경제학 책을 번역, 그가 조직한 경제복지회 회원들에게 유포해서 옥살이를 했다」고 보도했다.

관련 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기자: 박성준 선생님 이력을 보면, 서울大 경제학과 졸업, 릿쿄오(立敎)대학 신학박사…, 그런데요, 감옥엔 왜 이렇게 오래 계셨어요?

박성준: 함석헌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의 발꿈치에 채여서랄까…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지요. 한편으론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한반도의 운명이 감옥에 쉽게 갈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도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요? 기사의 분량이 어느 정도 되나요?

그는 한국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두 살 아래인 동생과 함께 고아가 됐다. 그의 나이 열 살 때였다. 책을 살 돈이 없어, 친구들 교과서를 빌려 헌 종이 묶음에 베껴 쓰면서, 그에겐 무슨 책이든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생겨났다.

대학 시절, 그는 성서를 읽기 시작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경제학도로서 여러 경제학 책을 섭렵했다. 미국 경제학은 사회의 모순을 설명해 내지 못했다. 「함께 잘사는 세상」, 복음과 사회과학을 결합시키는 대안을 모색하던 그는, 당시 금서였던 마르크스의 경제학을 읽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했고, (어릴 때부터 익힌, 「빌린 책을 단숨에 베끼는」 재주를 발휘해) 일어로 된 책들을 번역, 그가 조직한 「경제복지회」 회원들에게 유포했다. 이는 당시, 국가보안법 1조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는, 같은 서클 후배였던 한명숙과 결혼한 지 7개월 만에 투옥, 13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다>



ADVERTISING



2005년 6월14일 오후 평양 개선문거리에서 열린 민족통일대행진에 참가한 한명숙 총리 지명자.



재판정에 선 통혁당 사건 관련자들. 가장 오른쪽이 주범 김종태, 그 옆이 김질락.


「朴聖焌은 비밀 지하당 소조 조직책」



한명숙 총리 지명자의 남편 박성준 교수.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발표에 따르면, 朴聖焌(당시 서울大경제학과 4년. 25세)씨는 1967년 6월 申榮福에게 포섭된 「黨 小組責(당 소조책)」으로서 妻 韓明淑 및 朴璟鎬(박경호), 金國柱(김국주) 등을 黨 小組로 포섭했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서울 商大를 위시한 각 대학 출신 및 재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을 모체로 결성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를 주도하여 資本主義(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비판하고 소위 사회주의적 복지경제를 주장하면서 북괴의 경제제도를 찬양, 이를 연구 보급했다』고 했다.

중앙정보부는 朴聖焌씨가 주도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 등 8개 서클을 통혁당의 「민족해방전선」 산하 조직 가운데 하나라고 발표했다.

당시 수사발표에 따르면, 통혁당은 金鍾泰(김종태)를 黨首(당수)로 하여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의 양대 조직으로 지도부가 구성됐었다. 「민족해방전선」은 金瓆洛(김질락)이 책임비서, 申榮福이 조직책임비서, 이진영이 교양책임비서를 맡았고,「조국해방전선」은 李文奎(이문규)가 책임비서, 尹相煥(윤상환)·吳炳哲(오병철)이 교양책임비서를 맡았다.

「민족해방전선」은 다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를 비롯해 「새문화연구회」, 「청년문학가협회」, 「불교청년회」, 「동학회」, 「민족주의연구회」, 「경우회」, 「청맥회」의 8개 서클을 조직했다. 8개 서클은 대중조직으로서, 서클의 책임자들은 서클 속에서 쓸 만한 사람들을 포섭해 黨 小組로 조직해 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신영복(現 성공회大 교수).
당시 수사발표를 정리하면, 朴聖焌씨는 「민족해방전선」 산하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라는 서클의 책임자이자, 「黨 小組責」, 즉 小組책임자라는 통혁당 간부로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 소속 회원 중 韓明淑, 朴璟鎬, 金國柱 등을 「黨 小組」로 포섭 또는 포섭을 시도했다는 것이 된다.

공안전문가 A씨는 小組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의 지하당에서 入黨(입당)한 黨員(당원) 중 최소 조직을 세포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3명의 黨員이 1개 세포를 이루며, 3개 세포가 1개 小組를 이룬다. 小組와 세포는 지하당 활동의 최소 조직을 가리킨다』

그는 『지하당의 小組와 세포였다는 것은 당연히 지하당에 입당한 黨員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黨 小組責이란 이러한 小組와 세포를 관리하는 간부급 당원』이라고 말했다.

중앙정보부는 朴聖焌씨를 서클 회원들을 「통혁당 黨員」으로 포섭한 黨 小組責, 즉 「통혁당 간부」로 판단했고, 법원 역시 이를 받아들여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에서 朴聖焌씨가 포섭했다는 黨 소조원 朴璟鎬씨는 2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고, 金國柱씨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부인 韓明淑씨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살았다.

韓총리지명자는 여성부 장관 시절이던 2003년 月刊朝鮮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中情 발표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남편이 연루돼 있었기 때문에 아내로서 옥바라지한 것뿐이다. 알지도 못하고, 평가하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었다



통혁당 사건 관련자들. 가장 오른쪽이 주범 김종태, 그 옆이 김질락.


고문·조작 시비 없던 통혁당 사건

통혁당 리더들 가운데 북한에 다녀온 金鍾泰·金瓆洛·李文奎는 사형을 당했다. 申榮福·李在學(이재학)·吳炳哲·申光鉉(신광현)·鄭鍾韶(정종소)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金鍾泰의 아내 林寧淑(임영숙)은 1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기타 인물들은 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았다. 朴聖焌씨는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중앙정보부는 당시 통혁당이 합법·`非합법, 폭력·`非폭력의 배합투쟁을 통해 1970년까지 소위 「결정적 시기」를 조성, 민중봉기함으로써 공산정권 수립을 획책해 왔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통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공판과정이나 그 이후에도 별다른 고문·조작 시비가 없었다. 이 사건은 2005년 2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우선 조사대상 사건으로 선정한 7개 사건(KAL858기 폭파, 민청학련·인혁당 사건, 동백림 사건, 김형욱 실종사건, 金大中 납치 사건,정수장학회, 중부지역당 사건)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金瓆洛, 『통혁당은 北 지령받는 지하당』

통혁당은 중앙당인 북한 조선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地下黨(지하당)이었다. 金鍾泰·`金瓆洛·`李文奎는 越北(월북)해 조선노동당에 입당했고, 통혁당원 이진영·`오병헌은 1968년 4월22일 越北해 교육을 받던 중 19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에 머물렀다.

통혁당 서울시당 위원장 金鍾泰는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金日成을 면담하고 美貨 7만 달러, 韓貨 3000만원, 日貨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다.

그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집단 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揚陸(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띠고 있었다.

북한은 통혁당에 대한 검거망이 좁혀오자 金鍾泰 등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공비를 남파하기도 했다. 북한 753부대 소속 무장 공작선은 1968년 8월20일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우리 軍警(군경)과의 교전 끝에 14명 중 12명이 사살되고 이관학, 송승환 등 2명은 체포됐다.

이들 무장공비들은 金鍾泰를 구출하여 월북시킨 뒤, 북한정권 수립 20주년 기념일인 9·`9절에 남한대표로 金日成 앞에서 연설하게 할 예정이었다.

주범 중 한 명인 金瓆洛은 옥중 遺稿(유고) 「주암산」에서 『통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비밀지하당 조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리 없고, 통혁당의 조직상황과 활동상황이 金日成에게 직접 보고됐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고 썼다.

그는 같은 책에서 越北 당시 『중앙당인 조선노동당에게 우리 통혁당은 남조선 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地下黨임을 자처하고,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힘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각계각층에 대한 군중공작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고 기록했다.

康仁德(강인덕) 前 통일부 장관은 자신의 저서 「공산주의와 통일전선」에서 조선노동당과 통일혁명당은 指令(지령)을 내리고 받는 中央黨(중앙당)과 地下黨 관계라고 규정했다.

『통일혁명당은 출발부터 북한 중앙당의 하부조직으로 발생한 것이다. 통일혁명당 창건의 필요성, 그리고 조직적 사상적 준비는 모두 북한 조선노동당이 계획한 것이다.…당원은 제각기 독립된 인자로서 핵심을 유지하며 평양에서 발신하는 지령에 따라 단독으로 활동하면서 그 경과를 중앙당 對南사업담당부서에 보고하는 형태이다. 따라서 남한 내 지하당은 「남조선 혁명의 참모부」가 아니며 한낱 「말단 초소」에 불과하다』



한명숙 총리 지명자의 전과 조회서.




통혁당은 공산혁명 조직

中央黨 조선노동당의 통제를 받았던 地下黨 통혁당은 당연히 共産혁명 조직이었다. 金瓆洛의 수기 中 1965년 11월초 통혁당 준비위원회 결성 당시 金鍾泰의 제안 설명 중 일부를 인용해 보자.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反帝·`反봉건·`反식민의 민주사회를 거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며…우리의 당은 비단 이북의 노동당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공산당과도 형제당이 되는 것이며 국제 공산당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남반부를 불법 강점하고 조국통일을 방해하는 원수 미제와 그 走狗(주구)들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함에 있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中央黨의 지도 아래 혁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통일혁명당 창당을 선언한다>

통혁당의 이 같은 성격은 1968년 공판당시 언론에도 일부 보도됐다.

金瓆洛은 1968년 11월30일 공판정에서 『反美·`反제국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ABC이다. 나는 「청맥」의 지면을 통해서 광범한 인민대중의 反美·`反괴뢰 투쟁을 선동했다』고 말했다.

金瓆洛은 그러나 1968년 12월18일 공판정에서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를 뉘우칠 뿐이며 정당함을 주장할 것이 없다』고 변호인 신문을 거부한 뒤 『그동안 공산주의를 위해 싸워 왔으나 이제는 공산주의자로서 죽고 싶지 않으며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 죽고 싶다』고 후회했다.



북한에서는 통혁당 사건 이후에도 통혁당(한민전을 거쳐 현재는 反帝민전으로 개칭)이 한국 내에 실존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사진은 통혁당 기관지라는「혁명전선」.


통혁당 잔존세력, 黨 재건 기도

통혁당은 1968년 조직원 대부분이 검거됐지만, 북한과 연계된 잔존세력은 이후에도 地下黨 활동을 계속했다.

1969년 8월에는 통혁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통혁당 선언·`강령이 공식 채택되기도 했다. 당시 선언과 강령을 채택한 통혁당 중앙위원회의 실체에 대해서는 異論(이론)이 있다.

통혁당 잔존세력들은 당 재건을 기도하다가 1969~1979년간 9차례나 검거됐다. 1969년 9월 경남 통혁당 재건 사건·`1969년 10월 통혁당 재건 간첩사건·`1971년 5월 호남 통혁당 재건 간첩사건·`1971년 통혁당 조직 사회혼란사건·`1971년 통혁당 재건 3개 망 간첩사건·`1972년 지하 통혁당 조직 거물간첩사건·`1975년 학원 간첩 침투사건·`1979년 삼척 고첩단 사건 등이 그것이다.

당시 공안당국은 이 사건들을 북한과 연계한 잔존세력의 통혁당 재건 사건으로 규정했다.

1969년 이후 등장한 통혁당 재건 조직들은 金日成주의 내지 主體思想(주체사상)을 내걸기 시작했다.

1969년 발표된 통혁당 선언·`강령 역시 소위 『金日成 원수의 위대한 혁명사상, 主體思想을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있다.

선언은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현 시대와 우리 조국현실에 독창적으로 구현한 金日成 동지의 위대한 주체사상이다. 주체사상은 40여 년간의 험난한 혁명의 폭풍우 속에서 완벽함을 과시한 우리 시대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고 주장했다.

선언은 또 『우리 당은 바로 이 위대한 主體思想을 지도이념으로 삼고 있기에 불패이다. 우리 당의 최고 목적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인류의 세기적 숙명이며 최고 이상이다』며 『미군 침략군을 격퇴하고 괴뢰정권을 타도하여 자주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인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북한의 對南 선전매체 「反帝민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한국전위조직운동사」는 『1968년 통혁당 金鍾泰, 李文奎 등 지도 핵심들은 「金日成 선집」, 「金日成 전기」와 평양방송의 방송강좌 등을 이용하여 지도사상을 교양학습하고 지도사상을 조직원 및 대중에게 선전, 유포하면서 생활의 전반에 걸쳐 실제투쟁과 조직생활을 통해 핵심으로의 단련을 거듭해 갔다』고 적고 있다.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삼다

서울시 은평구 대조동에 소재한 도서출판 「대동」의 1989년 출간서적 「통혁당」은 1968년 金鍾泰의 통혁당에 대해『主體思想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남조선의 혁명적 당』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책은 통혁당이 1967년 발간한 비합법 기관지 「혁명전선」을 싣고 있는데 이 중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1964년 3월15일. 역사적인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약속장소에 와서 보니 이미 金瓆洛·李文奎 동지가 와 있었다. 申榮福 동지가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전보다도 훨씬 고조되었다. 金鍾泰 동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전원 모이셨습니다. 민족의 태양 金日成 장군께서 교시하신 주체의 당 창건 방침을 받들고, 그 사이 동지들께서 필사의 노력으로 분투하신 결과 오늘로서 우리는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의 결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임시투쟁 강령과 행동목표에 대한 심의에 들어갔다.

『통일혁명당은 민족의 태양, 金日成 동지의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하는 한국 근로민중의 전위조직이다』

▲어디까지나 우리 당이 민족의 태양, 金日成 장군의 혁명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한국혁명의 전위당인 만큼 당원과 각계의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으로 결속해야 할 것이라는 정치활동의 목표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당 기관지를 「혁명전선」이라고 하면 어떤가 하고 생각합니다.

金鍾泰 동지의 제안에 申榮福 동지가 우선 찬동하였다.

『조국통일과 한국혁명이라는 우리 당의 과제도 함축되어 있고 통일혁명당이라는 우리 당의 이름도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전원이 찬성하였다.…철필로 긁은 등사판으로 인쇄된 수십 부밖에 안 되는 신문이었지만 한국에서 발간된 최초의 金日成주의 출판물에 접했던 순간 편집위원 전원의 눈이 잠시 뜨겁게 빛났다.

흥분하여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로 金鍾泰 동지가 입을 열었다.

『동지들, 기관지 창간으로 우리들도 바야흐로 진리의 불모지인 이 한국 땅에 영생불멸의 金日成주의 사상이론을 정력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통혁당의 이름과 함께 역사에 남을 하나의 거대한 사건입니다. 우리들은 이 힘 있는 정치선전 수단으로 보다 많은 金日成주의자를 육성하고 각계각층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 통일혁명의 깃발 아래 강고하게 결집시키도록 합시다!』〉

통혁당과 같은 지하당 입당절차는 文件(문건)이 아닌 口頭(구두)로 이뤄진다. 地下黨은 보안상 문건을 일절 작성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中情, 『地下黨 입당은 中央黨에 등록』

중앙정보부가 1973년 펴낸 「북한대남공작사」에 따르면, 『地下黨 입당은 혁명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맹세하는 형식으로 이뤄지며, 비준은 中央黨인 조선노동당으로부터 당원 비준의 권한을 위임받은 공작원만이 할 수 있고, 최종 결정은 역시 中央黨인 조선노동당에 보고했을 때 이뤄진다. 지하당은 보안상 당증을 발급하지 않지만 中央黨인 조선노동당에 등록돼 있는 일정한 번호를 수여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설명에 따르면 地下黨인 통혁당에 입당했던 이들은 中央黨인 조선노동당의 관련 담당부서에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1974년 金正日이 후계자가 된 후 中央黨인 조선노동당은 노동당旗(기)·`金日成·`金正日 초상화를 걸고 충성맹세를 하는 형식으로 입당절차가 정립됐고, 단순한 충성맹세에 불과했던 남한內 地下黨 입당절차도 中央黨 입당절차를 모방하게 된다.

2004년 말 파문을 일으켰던 李哲禹(이철우) 前 열린당 의원의 1991년 「민족해방애국전선」이라는 地下黨 입당도 이 같은 절차를 따랐다. 李哲禹 의원 파문 당시 기자는 1997년 黃長燁(황장엽) 前 조선노동당 비서와 함께 脫北한 金德弘(김덕홍) 前 여광무역 대표와 장시간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金씨는 『한번 入黨을 하면 영원한 고리가 된다』며 入黨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입당 기록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당원등록과에 등록이 됩니다. 특히 남한內 地下黨 입당은 對南공작활동에 해당하기 때문에 조선노동당 비밀문서과·`해당 공안부서 담당과 등에 기록돼 영구 관리되죠. 아마도 金正日 정권이 무너지면 이 같은 기록들은 모두 공개될 것입니다』

기자는 현재 성공회大 NGO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인 朴聖焌씨와 인터뷰를 시도했다. 통혁당 사건과 관련, 事實(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기자의 요청에 대해 朴聖焌 교수는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이 언론에 보도돼 예기치 못했던 오해가 생기고 있다. 인터뷰는 사절한다』고 했다.

朴교수의 거듭된 固辭(고사)로 인터뷰가 어려워져서, 『팩스로 질문지를 보낼 테니 가능한 범위內에서 답변해 달라』고 요청했다. 朴교수는 『보내 주십시오. 그러나 답변 여부는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라며 통화를 끝냈다.

통혁당 입당 여부, 마르크스 서적 번역 여부 등을 팩스와 이메일로 보냈지만 기사 마감일인 4월16일까지 朴교수의 답변은 오지 않았다.



북한의 영웅이 된 통혁당 인사들



북한에서는 통혁당 사건의 주범 김종태를 영웅시하고 있다. 김종태의 이름을 딴 작업소조.
1969년 1월25일 金鍾泰와 李文奎에게 사형이 확정되자 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金鍾泰와 李文奎를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金鍾泰는 1969년 7월10일 사형집행이 된 후 金日成으로부터 영웅칭호를 받았다. 1969년 7월12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金鍾泰 추도 결의문」을 채택했고, 같은 해 7월13일부터 19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金鍾泰 추도기간이 설정됐다. 평양대극장을 비롯해 각 시·`도·`직할시·`區분대·`區분대당위원회·`공업기업소 등에 이르기까지 대대적 추도식이 거행됐다.

북한 내각은 金鍾泰에게 영웅 칭호와 북한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 제1급을 추서하고 평양 전기기관차 공장을 「金鍾泰 전기기관차 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金鍾泰 사범대학」으로 개명했다. 평양 시내에는 金鍾泰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났다.

1969년 11월6일 李文奎가 사형당하자 북한은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죽기 직전 공산주의자였던 것을 뉘우친 金瓆洛은 북한정권에게 변절했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살아남은 최고위급 통혁당 간부인 申榮福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1988년 특사를 받아 출감했다. 그는 1989년 이래 성공회大 사회과학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朴聖焌씨는 1981년 출소 후 일본과 미국에서 神學(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언론 인터뷰 등에서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 「평화주의자」, 「퀘이커」 등으로 소개해왔다. 朴씨는 前述한 「새길이야기」 인터뷰에서 출소 후 神學을 한 이유에 대해 『마르크시스트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관련 부분을 인용해 보자.

『1994년 처음으로 여권이 나온 후 3년간 일본에 가서 공부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 「크리스천을 찾아서」라는 글을 연재하면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참다운 크리스천을 만나고 다닌 것이 준비단계였던 것 같습니다. 「마르크시스트 크리스천」으로서 저를 보완할 수 있는 영적 눈이 필요했지요. 그리고 나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유니언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처음에 일주일 코스로 펜들 힐 영성 프로그램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철두철미한 反美



법정에 선 통혁당 주범 김질락.
朴씨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戰·`이라크戰·`북한제재 등에 반대하는 反戰平和(반전평화)운동을 벌여 왔다.

그는 미국의 이라크戰은 『군수산업의 이익을 도모하고, 석유이권과 中東패권을 노려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제물로 삼는 전쟁이 아닌 침략』(2003년 3월25일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으로, 아프가니스탄戰은 『최첨단 신무기를 대거 동원하여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삶의 터전으로부터 내몰고 그 나라의 자연을 마구 짓밟고 완전초토화하는 것』(「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등)으로, 1991년 걸프戰은 『수십만의 젊은 이라크 병사들이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사막에서 살육되고, 미국이 이라크 사회의 인프라 구조를 파괴해 버렸고 생필품의 수입마저 막는 경제제재를 지금도 풀지 않아서 100만 이상의 이라크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 등 병으로 죽어 갔다(「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 등)』고 주장해 왔다.

그는 특히 미국의 對北제재가 한반도에 전쟁을 부른다며, 金正日 정권의 不法행위를 어떠한 형태로도 제재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펼쳐 왔다.

그가 2002년경 쓴 「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는 글의 일부다.

『설마설마 하다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남북한 민중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만에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경각심을 드높여 예의 주시하자.

부시 대통령과 미국 정부에게 화해와 평화를 향한 우리 겨레의 역사적 행보를 방해하지 말라고 단호히 경고하자. 만에 하나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덮쳐 온다면 우리는 휴전선 일대에 평화의 천막을 치고 평화를 호소하는 갖가지 이벤트를 벌인다. 평화음악회, 평화단식·농성 등 행사를 벌이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발산하자』

그는 같은 글에서 『우리의 평화와 우리의 안전을 남의 손, 外勢·`强大國 미국에 맡겨 놓고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한다. 미국의 부당한 간섭과 개입에 맞서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며 미국의 한반도 전쟁 책동을 막고 평화를 지켜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朴聖焌씨는 이슬람의 지하드(聖戰)는 『미국이 아랍세계에 가해 온 폭력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통제된 폭력』이라고 했고, 9·`11 테러에 대해서는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이 당해 싸다」, 「통쾌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다(논문 「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 中)』고 말했다.

같은 글에서 일부를 인용해 보자.

『우리가 이번의 사태(9·`11 사태)를 보면서 「오만한 미국의 콧대를 꺾었다!」, 「미국도 당해 봐야 한다」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 무슨 짓을 했기에 테러리스트들이 그토록 처참한 보복을 생각해 내게 되었는지, 그들의 사무친 한과 절망과 증오의 뿌리가 무엇인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알게 합시다』

朴聖焌씨의 反美는 反戰(반전) 평화를 축으로 하고 있지만, 테러 행위나 金正日·`후세인 등 독재자에 대한 비판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그의 주장에는 金正日 정권을 제재하는 미국에 대한 비판만 있을 뿐, 金正日 정권의 심각한 인권 탄압과 테러, 마약·핵무기 개발 등에 대한 비판은 찾을 수 없다.



韓明淑씨의 일관된 反美 친북 입장



2004년 7월 열린당 국가보안법 폐지 간담회에 참석한 한명숙 총리 지명자.
『남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해 온 韓明淑 총리 내정자의 이념성향도 「反美 親北」이라는 점에서 朴聖焌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韓총리내정자는 17代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소속 의원으로 일하면서 金正日 정권을 옹호하고, 美國을 비판하는 일관된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2004년 11월17일 국회에서 盧대통령의 『북한의 核 개발도 일리 있다』는 LA 발언을 지지한 이래, 金正日 정권의 주장을 사실상 대변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그녀는 2005년 6월27일 국회에서 북한의 核무기 보유에 대해 『북한 나름대로의 국익이 있기 때문』이라며 『미국에 對北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을 요청하라』고 정부 측에 촉구했다.

국회 속기록에 기록된 그녀의 발언이다.

『北은 北 나름대로의 국익이 있고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의 국익이 있기 때문에 北核문제가 쉽게 해결되리라고 보지 않는다.…北核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미국이 동시 제안이라든지 對北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진전된 案을 내놓도록 우리가 요청한다든지 제안을 강력하게 정부가 해야 한다』

韓총리내정자는 2005년 9월22일 『러시아 핵무기 폐기時 미국이 수십억 달러를 지원했던 前例에 따라 北核 폐기 비용을 미국이 주도적으로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같은 해 10월11일에는 북한의 「先경수로 제공」 주장을 지지한 뒤, 『對北 경수로 건설시점에서 요구되는 미국의 역할은 경수로 제공비용의 분담과 핵심기술 및 설비제공』이라며 미국에 「先핵무기 폐기」 요구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했다.



라이스의 北 위폐 문제제기에 美 비난



수감되는 한명숙.
韓총리내정자는 지난 2월13일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미국이 제기한 북한산 슈퍼 노트 문제에 대해 『미국은 6者회담의 성사 이후 모처럼 마련된 평화정착의 기운에 증거 없이 찬물을 끼얹고 있다』고 비난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美 국무장관이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북한 정권의 성격은 자명하다』고 발언한 직후인 2005년 6월21일 『라이스 장관의 발언은 모처럼 조성된 6者회담 재개의 긍정적 분위기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적절한 행동이다. 韓美 외교채널을 통해 적극적인 시정을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은 6者회담 복귀 자세를 갖춘 북한에 또다시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자, 韓美 정상 간 합의정신에도 반하는 것이다. 국내적으로도 장관급회담 북한 대표단이 들어올 때 보수단체가 자극적인 플래카드를 붙이고 시위를 했는데, 우리 국민도 예의를 지키고 南北관계가 발전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金正日 정권을 규탄하는 보수단체를 『예의 없다』고 했다.

韓총리내정자는 1968년 통혁당 사건 이외에도 1979년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으로 反共法을 위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