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4

이도흠 / 화쟁기호학의 이론과 실제 1999

이도흠 / 화쟁기호학의 이론과 실제

이도흠 / 화쟁기호학의 이론과 실제
slowdream 2009. 1. 9.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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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이도흠 (지은이)한양대학교출판원 1999




주간동아  [이주일의 책]「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입력 1999-10-19 업데이트 2009-09-23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이도흠 지음/한양대학교 출판부 펴냄/503쪽 15,000원▼

이성 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서구의 형이상학은 정신-육체, 광기이성, 주관-객관, 인간-자연등 이분법에 의존한 야만적인 사유라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지구촌 환경위기도 알고 보면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는 것을 문명으로 잘못 파악하게 한 서구적 패러다임 때문이다.

'차이'와 '상생'에 바탕을 둔 원효의 화쟁(化諍)이 이같은 서구의 이분법적 패러다임을 극복한 새로운 대안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화쟁사상을 통한 형식주의와 마르크시즘의 종합'을 펴낸 이도흠씨는 이렇게 말한다. "화쟁기호학을 한마디로 말하면 화쟁의 사유체계로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세계는 서구적 패러다임에서 주장하듯 대립과 모순의 변증법적 통합이 아닙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이중부정과 이중긍정의 개념입니다. 화쟁사상은 우열이 아니라 차이,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상생의 관계로 보는 21세기의 패러다임이죠."

그가 화쟁에 발을 담근 것은 80년대 초. 국문학자로 향가를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 마르크시즘 비평과 형식주의 비평을 종합하는 이론을 찾던 그는 서구식 이분법적 패러다임에 한계를 느꼈다. 결국 동양사상에서 대안을 찾다가 원효의 화쟁사상에서 그 원리를 발견한 것.

그는 이미 이를 응용한 논문 20여편을 권위있는 학술지에 발표, 학계에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화쟁사상을 원용하면 모든 사회현상의 설명이 가능하죠. 화쟁사상이야말로 서구 인문학자들이 근대성을 반성하며 그토록 찾던 새로운 패러다임입니다."

그는 화쟁기호학을 이른 시일내에 영역, 세계 학계에 소개할 계획이라도 한다.

연제호<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sol@donga.com


책소개


원효의 화쟁사상을 바탕으로 '화쟁기호학'이란 새로운 인문학 이론을 펼친 책.


저자는 이 책에서 실증주의, 맑시즘, 해체비평 등 다양한 서구 문예비평이론의 타당성과 그 한계를 밝히며 서구 이론의 한국적 수용에서 나타나는 오류 등을 분석했다. 또한 화쟁의 의미를 설명하고 자신의 이론을 향가에서부터 현대시, 소설에 이르기까지 여러 텍스트에 적용해 새롭게 분석하고 있다.
목차
1. 화쟁기호학의 이론
1). 서구 문예비평 이론의 방법과 한계, 그리고 한국적 수용 문제
2). 문예비평 이론의 쟁점
3). 화쟁의 의미
4). 화쟁기호학

2. 화쟁기호학 비평과 실제
1). 향가 : (제가매가)
2). 속요 : (동동)
3). 시조 : 홍랑의 (묏버들가)
4). 현대시 : 김수영의 (풀)
5). 현대소설 : 이상의 (날개)
6). '모죽지랑가'의 창작배경과 수용의미
7). <삼국유사>의 구조 분석과 의미 해석
8). <삼국유사> 소재 어휘의 의미 분석
9). 문학 테스트에서 현실의 반영과 굴절의 문제
10). 문학에서 텍스트 와 사상의 관련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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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백련불교아카데미(2000. 11. 4.)

앞으로 연재할 교수님의 논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和諍記號學의 理論과 實際 "를 먼저 읽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주석까지 이해하시고자 하시는 분들은 첨부한 hwp file 을 다운 받아 보시거나 더블 클릭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和諍記號學의 理論과 實際  

- 이도흠(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머리말


 
역사주의나 마르크시즘 비평은 문학 텍스트를 문학 바깥의 작가의 이념, 사회경제적 토대 증 문학 바깥의 맥락과 연관지어 비평을 한다. 때문에 문학의 지평을 확대하고 구체적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반면에 문학성을 상실하고 텍스트 자체의 자율성을 잃는다. 반면에 형식주의는 텍스트를 자체의 구조와 형식 구성원리에 주목하여 내재적으로 비평하였다. 이 비평은 문학 작품의 문학다움을 과학적으로 드러내는 반면에 문학의 지평을 축소시키고 구체적 삶의 진실을 방기한다. 이에 양 비평의 종합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처럼 세계학계의 숙제였다. 바흐찐, 골드만, 크리스테바 등의 시도가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서구의 이분법적 세계관으로는 이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아 원효의 화쟁사상을 통하여 이를 감행한 것이 화쟁기호학이다.

역사주의와 구조주의, 형식주의 시학과 맑시즘의 사회학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는 데서 더 나아가 圓融에 이르게 하고, 기호학적 해독, 텍스트의 내적 구조를 과학적이고 시학적으로 분석한 것과 사회문화적 맥락을 하나의 틀 속에서 종합하여 해석하고 가치평가를 하는 방법은 없는가? ‘낯설게하기’와 ‘세계의 세계화(the worlding world)’를 인간의 자유와 구원이라는 이념에 맞추어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는가? 기호의 의미작용 체계와 사회문화 체계를 종합할 수 있는 방편은 없는 것인가? 이항대립이 야기하고 있는 야만을 해체하고 양자를 평화적으로 공존시키면서도 주체의 자유를 확대하는 텍스트 해석 방안은 없는가?

2. 화쟁기호학 이론 해설

2.1. 진여문과 생멸문의 세계 인식

석가모니께서는 왜 수많은 군중 앞에서 말씀을 안 하시고 꽃만 들었다 놓았다 하셨는가?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못한다. 나는 그 사람을 100을 사랑하는데 그리 말하면 한 7, 80밖에 사랑하지 않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무지개의 ‘빨강’ 색과 주황 색 사이에도 거의 무한대의 색이 존재하는데 ‘빨강’과 ‘주황’의 언어기호밖에 없는 우리는 무지개를 보고 일곱 색깔이라고 한다. 이렇듯 이성과 언어기호로는 궁극적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 그러기에 眞如라고, 差延(différance)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주와 객, 본질과 현상, 음과 양 등 둘로 나누어 본다. 그러나 이 넓은 우주가 한 알의 씨앗이 대폭발하면서 이루어졌듯, 세계의 궁극적 근원이요 만물의 시원, 지극하고 절대적인 도리요 당연한 이치인 一心은 서로 상반되는 두 측면의 통일체로 이루어지지 않는 원리가 없고 미치지 않는 바가 없어 일심이라 이른다. 그러기에 화쟁에서 主와 客, 현상과 본질은 세계의 다른 두 측면이 아니라 본래 하나인 것이다. 眞如門이란 발생도 소멸도 없으며 증가도 감소도 없으며 차별도 없는 절대적 본체인 일심의 본질적 측면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계의 진정한 실체가 重重無盡의 것이라면 깨닫지 못한 대중은 세계의 이해에 이를 수 없고 의미를 만들 수도, 소통할 수도, 세계의 부조리에 대응할 수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철학, 예술과 과학 또한 설 자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석가모니처럼, 내가 진정 깨달은 것을 말로 하면 왜곡이라는 생각에 강의실에 들어가서 서너 시간 동안 입을 꾹 다물고 하늘만 쳐다보다 나온다면 학생들은 “선생님! 오늘 깨달음이 많았습니다.”하고 인사할 것인가? 봄에 산에 오르면 산의 풀들은 나에게 혼돈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것은 취나물이고, 이것은 얼레지라고, 취 중에서도 요것은 개미취요, 요것은 참취며 이것은 곰취고 저것은 미역취라고 가르쳐 주신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다 비슷한 풀일 뿐이다. 나에게는 온통 혼돈이지만 어머니는 그 풀을 이파리 모양과 빛깔, 줄기의 생김 등에 따라 취, 얼레지, 질경이 등으로 가르고, 다시 이것은 날로 먹으며 저것은 못 먹는다고 구분한다. 이렇듯 원래 풀은 하나이지만 우리가 허상이나마 인간의 틀로 범주를 만들어 나누어 놓아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나는 아내에게 종종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 그래야 아내는 사랑을 확인하고 기뻐하니까. 깨달은 자라 할지라도 항상 진여문에 머물 수는 없고 깨닫지 못한 자도 그래야 깨달음의 세계로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인간의 삶의 차원에서는 특수한 경우에나 진여문의 세계 인식을 하고 평소에는 생멸문의 인식을 하는 것이다. 생멸문이란 진여문과 달리 발생과 소멸도 있으며 증가와 감소도 있으며 차별도 있는 일심의 상대적인 현상적 측면을 말한다. 데리다나 라깡 이전의 서구 철학자들이 이성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한 것처럼, 대다수의 인간들은 생멸문의 틀에서 세계를 인식한다. 화쟁이나 삼재 사상의 표현을 빌면, 세계의 실체가 하나임을 알면서도 그리하면 몇몇 깨달은 자를 제하고는 세계의 실체에 이를 수 없기에 본질과 현상, 주와 객, 聖 과 俗 등 둘로 나누어서 보는 것이다.

2.2. 생멸문의 의미작용

화쟁은 道와 언어를 원융하자는 것이다. 앞에서 말하였듯, 언어기호는 필연적으로 세계를 왜곡시키지만 우리 같은 속인들이 도와 진리를 전달하려면 언어기호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교의 높은 진리를 어떻게 미혹한 중생들에게 전달할까 고민한 원효는 文語로는 진리를 왜곡할 수 있으나 義語로는 진리를 부분적으로 드러낼 수 있음을 갈파하였다.

들에 홀로 핀 들국화를 외롭다고 노래하는 것은 시가 아니다. 내가 어떤 여인으로부터 연애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에 “당신이 없는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요, 금붕어 없는 어항이요, 팥 없는 찐빵이요” 식으로 쓰여 있는데 손을 부들부들 떨며 감동하여 그 여인을 만나러 달려가겠는가? 정반대일 것이다. 이 편지가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것은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文語’란, 일상언어의 속성에 집착해 낱말이나 문맥에 얽매이는 세속의 말, 상투적 의미로 언어기호를 이용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義語’란, 국화를 ‘실존’이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와 문맥에 얽매이지 않고 세계의 실체를 파악해 이를 왜곡없이 드러내는 말을 이른다. 즉 문어는 세계를 왜곡하지만, 우리는 의어를 통해 세계를 표명하고, 또 이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장대를

 


초승달이 그와 모양이 유사한 ‘쪽배’의 의미를 갖듯, 은유는 사물 사이의 유사성을 근거로 세계를 유추한 데서 기인하는 세계의 의미화다. ‘달’을 예로 들어 볼 때, 달의 은유는 달의 體相用에 따라 유사성의 유추를 달리 한다. 여기서 체상용은 더욱 俗化하여 꼴과 몸과 짓으로 구분된다. 원효가 말한 것과 조금 거리가 있겠지만, 원래의 뜻을 조금 왜곡하더라도 세계가 어떻게 의미작용을 하는가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해 꼴, 몸, 짓, 참으로 다시 범주화하고자 한다.

“꼴”은 相과 어느 정도 차이를 갖는 것으로 세계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다. 인간이 세계를 드러난 모습 그대로 보는 경지이다. 달의 꼴은 보름달, 초승달, 반달 등 여러 가지 모습을 띤다. 우리가 보름달을 보고 ‘님의 얼굴’을 연상하고 또 보름달을 ‘님의 얼굴’로 노래할 수 있는 것은 보름달과 얼굴 모두 ‘둥그렇다’라는 유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믐달을 그와 모양이 비슷한 미인의 눈썹을 뜻하는 아미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하여 “초승달이 은하수를 지나간다.”라고 말하면 일상의 언술이지만 초승달이 ‘쪽배’와 모양이 유사한 것을 바탕으로 “쪽배가 은하수를 건너네.”라고 말하면 시적 진술이 된다.

인간은 자기 앞의 대상의 꼴만 보지 않는다. 드러나는 현상을 넘어 본질을 파악하려 한다. “몸”은 세계의 꼴 뒤에 숨겨져 인간 주체가 세계의 실체, 또는 본질이라고 파악하는 바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이 달의 몸으로 파악한 이들은 달의 의미를 榮枯盛衰로 보며, 반면에 달이 완전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달의 몸이라 본 이들은 달의 의미를 ‘부활’이라고 본다.

인간은 자기 앞의 대상을 정태적으로만 보지 않고 역동적으로도 본다. “짓”은 세계가 관계에 따라 작용하고 기능하며 운동하는 바다. 인간이 달의 대표적 짓으로 본 것은 달이 땅에서 떠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기능이다. 하늘은 또 신의 세계, 천상계나 성스러운 세계, 천국이요, 땅은 인간의 세계, 지상계나 속스러운 세계이니, 달은 자연 이 둘 사이를 오고가는 중개자의 의미를 갖는다. 샤머니즘 시대에 달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나, 불교시대에 달에게 왕생을 염원하는 것은 모두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의미작용이 모두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달의 진정한 의미인 참은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달에서 천 개, 만 개의 낱말을 연상하여 그것을 달의 의미로 삼는다 하더라도 달이라는 세계의 실체 가운데 극히 한 부분만을 드러내는 것이며 오히려 허상과 왜곡이기 쉽다. “참”은 세계의 실체 가운데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인간 주체가 파악할 수 없는, 영원불멸한 것이며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의 진정한 실체를 나타낸다.

체와 상, 용이 각기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결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달의 둥그런 모양과 중개자의 짓이 결합하여 둥그렇게 원융의 모습을 한 부처님의 의미를 만들기도 한다.

한편 거꾸로 다른 사물인데 짓이 같기 때문에 같은 의미로 작용할 수 있다. “달”처럼, “별, 새, 구름” 등은 모두 하늘과 땅 사이에서 떠가는 짓을 행한다. 그래서 이들은 다같이 하늘과 땅, 천상과 지상, 신과 인간, 聖과 俗, 이상과 현실 사이의 중개자의 의미를 갖는다.

환유란 “꽃 - 꽃병”처럼 인간이 세계와 세계 사이의 인접성(contiguity)을 근거로 유추한 데서 기인하는 세계의 의미화다. 환유 또한 꼴, 몸, 짓으로 나누어진다. 환유의 꼴은 환유 가운데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서로 부분과 전체 관계를 가지거나 공간적, 시간적으로 인접해 있을 때 일어난다. 달의 부분인 ‘분화구’가 ‘달’을 의미하거나 ‘달’이라는 낱말로 ‘천문’이나 ‘세월’을 말하는 것은, ‘빵 - 양식’관계처럼 인간의 눈에 보이는 부분의 相을 전체의 相에 연관시킨 데서 유추된 의미작용이다. 여기서 類槪念과 種槪念에 따라 연상이 일어나고 의미 또한 확대된다. 달은 종개념인 초승달, 반달, 보름달, 그믐달 등으로 나뉘어지고 이에 따라 “달을 그렸다.”라는 문장이 “초승달을 그렸다.”, “반달을 그렸다.” 등으로 의미를 확대한다. 반면에 달은 또 유개념인 천체를 나타내기도 하여 “달을 그렸다.”라는 말이 “우주나 천체를 그렸다.”라는 말을 의미하게 된다.

체상용의 인식에서 비롯한 의미작용을 집단적으로 실천하면 문화가 된다. 예를 들어 땅과 하늘을 오고가는 새의 짓은 새라는 사물을 하늘과 땅, 신과 인간, 성스러운 세계와 속된 인간계를 잇는 중개자로 은유의 의미작용을 일으키게 한다. 이를 언어나 문자텍스트의 의미로 만드는 데 한정시키지 않고 집단적으로 의미화하여 의례와 상징으로 만들기도 한다. 티벳 등에서 鳥葬을 지낸 후 죽은 자의 영혼이 독수리를 통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며 사별에서 오는 고통을 영생의 기쁨으로 극복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은 여기서 비롯된다. 성스런 신의 공간의 표지로 왕조차 범하지 못하였던 소도 중앙의 솟대 꼭대기에 있는 새, 샤먼이나 인디언 추장의 새 깃털로 만든 모자나 옷, 새에게 소원을 비는 행위, 청동 거울에 새겨진 새의 문양 등은 모두 새가 하늘과 땅의 중개자라는 새의 짓의 은유에서 비롯된 새의 계열체이다.

내가 한참 이것에 대하여 연구할 때 마침 텔레비전으로부터 재미있는 것을 보았다. <믿거나 말거나>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기이한 문화에 관한 것이었다. 불도저 같은 중장비도 없는 이들이 밀림 사이로 땅을 닦아 활주로 같은 것을 닦고 언덕 높은 곳에는 칡넝쿨 같은 것을 엮어 비행기를 만들어 놓고는 정성을 들여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은 원주민들이 시드니인가 근처 공항에 가서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해설자는 “이들은 비행기가 하늘에서 자기를 구원하라고 보낸 사자인데 중간에 백인들이 가로채 가서 백인들은 잘 살고 자기들은 못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백인들에게 우리 사자를 내놓으라고 시위를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이들 원주민은 비행기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짓’을 하므로 유사성의 유추를 통하여 하늘에서 보낸 사자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리 어머니들이 달에게 정화수를 떠놓고 빈 것 또한 달이 땅에서 하늘을 향해 떠오르므로 달이 인간의 소원을 하늘에 전하는 사자라고 생각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바위를 “큰 돌덩이” 대신 “인간의 의지”라 하고 “별”을 “천체의 일종”이라 하지 않고 “독립의 이상”이라고 노래하는 것이 은유이다. 은유는 대개 지시적 의미를 파괴하고 새로운 의미를 바탕으로 하여 세계를 표명하는 것이자 유사성에 근거하여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달-문수보살”, “바위-의지”에서 보듯, 일단 은유는 기존의 세계를 파괴한다. 세계에 대한 현재의 위상을 파괴하고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언어기호와 관련시켜 버린다. 읽는 주체는 구조적 사유를 통하여 둘 사이의 유사성을 유추, 또는 연상해낸다. 위의 달의 예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은유를 통하여 달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이 접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은유는 근원에 대한 형이상학적 욕망이다. 그러나 “남자는 늑대”라는 은유가 남자의 긍정적 특성을 못 보게 하듯, 은유는 고유한 중심적인 말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처럼 은유는 본질을 왜곡하는 동시에 자유를 확대하며 세계의 지평을 열어제친다.

환유는 인접성의 유추이자, 부분으로 전체를 대치하는 것이다. 시골사람을 그가 입고 있는 부분인 핫바지를 들어 핫바지로 대치하고 나면 핫바지가 전체가 되어 핫바지의 이미지가 시골사람을 대치한다.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라는 속담처럼 환유는 부분을 통해 전체를 유추하게 한다. 환유는 경제적이다. 대신 수억의 떡 가운데 쉰 떡 하나를 먹고 나서 이 세상 모든 떡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유비추리의 오류이듯, 환유는 유비추리의 오류를 범한다. 또 세계를 기호로서 대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기호 자체가 이미지로 전락하며 이 이미지는 현실을 대체한다.

달을 쪽배(相)로 보든, 부활(體)로 읽든, 중개자(用)로 해독하든, 이는 모두 달이란 세계를 지시하기 위한 한 방편일 뿐이며 이것 모두 인간 주체가 마음(一心) 속에서 해석한 결과이다. 따라서 세계와 기호에 절대성을 부여할 수 없을 뿐더러 體가 세계의 절대적 의미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해서 體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 달을 체상용으로 인식하는 것이 계속되듯, 이에 따른 의미작용 또한 끝이 없다. 그러므로 세계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言義는 言相의 사슬 속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2.3. 텍스트와 현실, 反映과 屈折의 화쟁미학

현실의 모방과 반영이 예술이기도 하지만, 작가는 그 현실을 의식을 통하여 반영시키는 동시에 지향의식, 전의식이나 무의식을 통하여 굴절시킨다. 이 굴절이 상상력이든, 표현이든, 존재론적이든, 예술작품을 자율적이게 하는 기초이자 영역이다. 텍스트는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진정한 예술 텍스트일수록 현실을 굴절시킨다.

우리가 아무런 생각이나 선입관과 관념 없이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듯 미는 이념이나 실용성을 떠난 것이란 칸트의 통찰은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낀 그 꽃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심각한 독을 퍼트리는 외래종의 꽃임을 알고서는 더 이상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는다. 칸트의 미학을 계승하여 미를 미 자체로만 보려 한 형식주의적 미학이나 미를 사회경제적 맥락이나 혁명적 목표 속으로 밀어 넣은 맑시즘적 미학 모두 절름발이일 수밖에 없다. 순수미의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며, 미는 또 사회문화적 맥락의 영향을 받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문학을 현실의 반영으로만 보려 한 관점이나 문학을 현실과 유리된 꿈의 양식으로 보려 한 관점, 문학과 미학을 사회문화적 맥락에 종속시켜 해석하는 방식이나 텍스트 외적 요인을 배제하고 텍스트 그 자체만을 분석과 감상의 대상으로 삼는 방식 모두 절름발이일 수밖에 없다. 한 쪽은 텍스트를 현실이나 사회적 맥락에 종속시키고 문학텍스트의 시학적 구성을 회피하여 결국 과학적 객관성과 문학성, 텍스트 자체의 미적 특질을 앗아간다. 반면에 후자는 문학을 현실과 유리시키고 문학해석의 지평을 축소하며 문학에 작용하는 외부 사회적 요인이 문학 자체의 고유요인, 문학의 내재적 발전 요인이자 미적 자질임을 허용하지 않는다.

때문에 화쟁기호학은 텍스트를 反映相과 屈折相으로 분절하고, 각 텍스트에 담긴 세계를 화엄철학의 四法界로 나누어 기호학적 분석을 가한다.

꿈 텍스트조차도 반영상과 굴절상으로 분절해야 해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열쇠로 자물쇠를 여는 꿈을 꾸었다 치자. 꿈을 꾼 이가 곰곰 생각하여 현실-어렸을 때 동네에 커다란 폐가가 있었고 그 집의 문을 열고 안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나 궁금하였는데 무서워서 시도하지 못하였다 - 을 떠올렸다면 그 꿈은 현실을 반영한 반영상이다. 이 꿈 텍스트의 의미는 “(새로운 사업이든 모험이든, 직업전환이든) 내가 지금 문을 열고 - 장애를 극복하고 - 새로운 모험을 하려고 한다.”이다. 그러나 그런 현실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는 굴절상이다. 이의 의미는 프로이트식으로 풀면 “(자물쇠와 열쇠가 남녀 성기의 은유이므로) 누군가와 성관계를 맺고 싶다.”이며, 융식으로 풀면 “(자물쇠와 열쇠가 새로운 세계, 또는 성스런 세계와 합일이라는 집단무의식적 상징이므로) 새로운 세계, 聖의 세계로 비상하고 싶다.” 또는 “자아의 내면과 신과의 합일을 이루고 싶다.”이다.

박노해 시가 한국 노동자의 현실과 한국 사회의 모순을 잘 드러내듯, 반영상은 현실을 반영한 텍스트이다. 반영상에서 실제 현실과 텍스트의 현실은 환유의 관계를 이룬다. 따라서 반영상에 대하여 “작가가 주체로서 세계와 마주쳤을 때 자신의 의식과 경험, 그때까지 접하였던 텍스트를 종합하여 자기 앞의 개별적인 현실을 해석하고 세계를 재질서화하는 원리를 따라 현실을 나름대로 압축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확대시켜 환유화하여 표명하여 구체적이고 생동적인 삶의 보편적 진실과 가능성을 드러내려는 텍스트”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반영상에는 事法界와 理法界가 포개진다. 사법계를 시학에 적용할 때, 사법계는 인간이 마주친 사물이나 현실이다. 땀을 비오듯이 쏟으며 노동하는 노동자나 들에 핀 국화를 다들 아무 관심없이 스치듯 사법계는 세계가 드러내는 事象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경지를 뜻한다. 그러나 그 전부터 그 사물을 접하였던 이든, 처음으로 마주치는 이든, 이들 가운데 몇몇은 그 사물에 관심을 보여 ‘새로운 만남’을 이룬다. 만남을 통하여 주체는 이를 무엇인가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렇게 인간이 세계와 상관을 하여 자신과 마주친 대상에 대하여 “쓰는 주체”로 존재하려 할 경우 그는 이를 사상대로 놓아두지 않고 텍스트로 만들고자 한다. 어떤 쓰는 주체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읽는다. 또 어떤 쓰는 주체는 무서리를 맞아 모든 꽃들이 사라진 뒤 더욱 함초로이 피어있는 국화꽃과 새로이 만나 “저 국화꽃처럼 인간 또한 좋은 조건보다 절망의 상황에서 참다운 실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유추한다. 이렇듯 쓰는 주체는 사물이나 현실을 텍스트로 변형생성하고자 하면서 현실 속에 내재하는 보편 원리나 본질을 발견한다. 이렇게 주체가 사법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사물과 새로운 만남을 이루어 사물에 내재하는 보편원리라고 직관으로 깨달은 경지는 理法界이다.

반영상의 텍스트는 현실을 반영하여 생동하는 구체적 현실을 보여주고 이에 담긴 삶의 진실을 드러내지만 그만큼 ‘쓰는 주체’를 현실을 반영하는 “모방적 예술가”로 머물게 하며, ‘읽는 주체’를 텍스트에 담긴 반영상과 현실을 관련시키며 텍스트의 의미를 역사주의 비평식으로 해석하게 하는 “역사적 독자”에 머물게 한다. 형식적인 면에서 보면,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처럼 성공한 리얼리즘에 이른 소설에서조차 전형 등의 닫힌 구조와 형식, 기법이 오히려 읽는 주체의 해독과 상상력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

굴절상은 프리즘이 한 줄기 빛을 무지개로 바꾸듯 현실을 굴절시킨 텍스트이다. 쓰는 주체로서의 예술가는 현실을 반영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데서, 사법계와 이법계간의 괴리나 세계의 부조리를 표상하는 데서 결핍을 느끼며 욕망을 지향한다. 이때 쓰는 주체와 현실 사이에 현전하던 의식의 자리를 지향의식, 전의식과 무의식이 대체한다. 지향의식, 전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결합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현실을 다른 무엇으로 전화시키거나 부정한다.

이때 굴절상은 事理無碍法界, 또는 事事無碍法界를 지향한다. 사리무애법계를 텍스트에 적용할 때, 사리무애법계는 쓰는 주체가 지향의식에 따라 현실과 사물(事), 그리고 이들에 내재하는 원리(理)를 발견한 후 이 원리를 통하여 事를 바라보며 事와 理가 둘이 아니고 서로 서로를 포섭함을, 즉 事를 통하여 理가 드러나고 또 그 역도 성립함을 깨닫는 경계이다. 여기서 쓰는 주체는 현실을 전화하고 부정하여 事와 理, 현실과 이상, 주체와 세계와의 조화와 원융을 지향한다. 예를 들어 쓰는 주체는 늦가을에 핀 국화꽃(事)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는 거기서, 이법계 - 그 국화꽃의 體가 무서리라는 악조건을 이기고 더 아름답게 피어있음이라는 은유 - 의 인식을 한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국화꽃의 체를 자신, 또는 인간의 삶과 은유 관계로 놓고 저 국화꽃처럼 인간 또한 좋은 조건보다 절망의 상황에서 참다운 실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유추한다. 그래서 국화꽃이 바로 실존의 의미를 드러내고 실존의 의미가 바로 국화꽃임을 깨닫고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고 노래하는 경지이다.

事事無碍法界는 현상과 현상이 완전 자재하고 융섭하는 경계로 事가 理의 도움 없이 다른 모든 事 속으로 자유롭게 들어가고 융섭하는, 事와 事가 무애할 뿐만 아니라 萬有 그 자체가 서로를 비추어주고 서로를 침투하여 하나가 곧 세계이고 세계가 곧 하나인 경지이다. 즉 세계는 서로 방해를 하지 않고 서로를 비춰주고 포섭하여 하나로 융합하여 總體性을 지향하는 것이다. 사사무애법계를 텍스트에 적용할 때, 사사무애법계는 주체와 대상, 이상과 현실, 사법계와 이법계, 세계의 부조리와 자아 등 여러 관계에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을 총융시킨 경계이다. 쓰는 주체로서의 예술가가 현실의식의 작동을 완전히 멈추고 지향의식, 전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모든 대립과 갈등을 총융시킨 통찰을 하거나 꿈을 꿀 경우 그 경지는 사사무애법계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사사무애법계에서 산이 곧 물이고 물이 산이며 한 티끌이 곧 전 우주이고 우주가 한 티끌이듯 개별적 事는 理의 도움 없이 다른 모든 事 속으로 자유롭게 들어가고 융섭한다. 이는 이성이나 유물론으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총체적인 깨달음의 세계이다. 그런 세계이지만 사리무애법계를 통하여 이에 이를 수 있다. 텍스트에 적용하여 예를 들면, 국화꽃이 바로 실존의 의미를 드러내고 실존의 의미가 바로 국화꽃임을 깨달은 데서 더 나아가 국화꽃이 젊은 날의 시련과 방황을 이기고 거울 앞에 선 아름다운 누이이자 나라고 깨닫는 경지이다. 그리하여 쓰는 주체는 고통과 시련이란 더 높은 삶의 단계에 이르는 길이란 깨달음을 얻어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라고 노래한다. 이 노래를 이렇게 해독한 읽는 주체는 나와 국화꽃, 비극과 희극, 이상과 현실, 삶의 부조리와 그에 내재해야 하는 당위의 이념간의 대립이 하나로 원융된 세계의 황홀감 속에서 노닐게 된다.

굴절상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을 넘어서므로 그 텍스트는 현실과 거리두기를 한다. 굴절의 강도가 심할수록 현실과의 거리는 크다. 굴절상은, ‘쓰는 주체’를 “내포적 예술가”’로 거듭나게 하여 그가 텍스트를 다양하게 의미화하게 하며, ‘읽는 주체’를 텍스트에 담긴 현실을 다양하게 해독하도록 안내하는 내포적 독자로 기능하게 한다. 따라서 굴절상은 상부구조이기는 하지만 체제부정적으로 기능한다. 반면에 고도의 굴절상이라 할지라도 체제보존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굴절상만 있는 텍스트는 ‘난판된 사람 가운데 거의 누구도 해독하기 어려운 메시지를 담은 병’이다. 학문의 순수성과 고고함을 고집한 독일 지식인이 히틀러의 전체주의를 강화시켜 주었듯, 현실을 소거한 텍스트는 정치적 힘을 잃고 지배체제에 동조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현실과 아무런 상관없이 빚어지는 전위예술이나 순수 모더니즘 계열의 예술작품이 현실에 부정적이면서도 현실을 보는 눈을 단절시키고 예술에서 역사와 정치를 제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유형은 <제망매가>나 <풀>처럼 반영상과 굴절상이 和諍을 이룬 텍스트이다. 이 경우 독자는 반영상을 통하여 현실을 읽어내면서도 굴절상 때문에 역사주의적 해독을 넘어서서 텍스트의 숨겨진 의미를 다양하게 해독하려 한다. 그러기에 시를 통하여 현실의 모순을 읽을 수도 있지만 현실의 굴레를 넘어 다양하게 시의 해독을 하며 꿈을 꿀 수 있다. 반영상은 굴절상이 현실을 버리고 비상하는 것을 붙잡아매고, 굴절상은 반영상이 쳐 버린 울타리를 풀어버린다. 좋은 텍스트일수록 반영상과 굴절상의 이런 상호작용이 1차로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된다. 이렇게 하여 텍스트의 의미는 끊임없이 드러나고 반영상이 야기할 수 있는 닫힌 읽기도, 굴절상이 수반할 수 있는 비정치성과 비역사성도 지양된다.

2.4. 사회문화적 시학으로서 작가와 수용자, 텍스트와 맥락의 화쟁

주체와 대상, 나와 타자, 개인과 집단이 和諍의 관계이므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 또한 화쟁의 관계를 형성한다. 작가와 독자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작가는 글을 쓰고자 할 때 타자로서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쓴다. 모든 담론은 누구인가를 향한 것이고 위한 것이다. 또 작가는 독자로서 수많은 텍스트를 읽고 이를 바탕으로 텍스트를 창조하며 독자는 수동적으로 텍스트를 읽기도 하지만 진정한 주체로 서려고 할 경우 자신이 읽은 텍스트를 바탕으로 텍스트를 다시 구성하고 다시 쓴다. 철저히 사적인 담론을 쓰려고 하는 순수 모더니스트 작가조차 집단의 틀 속에서 텍스트를 창조하며, 집단에서 완전하게 고립되려고 하는 에고이스트조차 집단의 조건 아래 텍스트를 읽는다. 이렇게 작가 안에 이미 독자가 들어와 있고 독자 또한 읽기를 통하여 텍스트를 다시 쓰니 작가와 독자는 둘이 아니다. 반면에 작가는 텍스트를 쓰는 자이고 독자는 텍스트를 읽는 자이니 둘은 하나도 아니다. 이처럼 텍스트를 통하여 작가와 수용자는 끊임없이 서로 소통하고 상호작용을 한다. 텍스트는 타자의 수많은 흔적이 중첩되고 다른 텍스트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형되는 열린 체계이다.

위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앞 장에서 의미작용 체계에 적용하였던 相體用의 범주를 ‘품, 짓, 몸, 참’으로 범주화하여 형식주의와 역사주의, 마르크스 사회학과 구조적 시학, 해석학과 수용미학, 공시태와 통시태를 종합하는 체계로 활용하고자 한다.

‘相’은 體가 드러난 바다. ‘글올의 품’은 글올(텍스트)이 바깥으로 드러내고 있는 양상이다.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텍스트를 해독할 때 텍스트에 대한 간단한 정보와 문법을 바탕으로 한번의 읽기로 파악할 수 있는 텍스트에 동원된 각 언어기호의 언상이 품고 있는 1차적 언의와 감동, 미적 효과이다. 텍스트의 품의 면밀한 분석으로부터 우리는 텍스트가 담고 있는 의미, 곧 體에 다다를 수 있다.

‘體’는 경험과 인식을 떠난, 세계의 본질이자 실체이다. ‘글올의 몸’은 글올이 숨겨져 드러나 있지 않은 양상이다. 수용자가 통사론적으로나 문법적으로 한번에 파악할 수 없는 텍스트의 숨은 의미이자, 텍스트의 품에서 드러난 1차적 의미로는 전체의 맥락을 파악할 수 없어 이를 언상으로 놓고 작가의 입장에서 작가의 의식 및 의도, 텍스트를 생성한 맥락 등과 연관시키며 해석하여 얻어내는 2차적 의미이다. 수용자는 텍스트의 언상와 언의를 통하여 1차적 의미를 생성하고 이 1차적 의미로 텍스트 전체 의미가 파악되지 않을 경우 작가의 입장과 텍스트가 생성된 배경의 맥락의 입장에서 작가의 의도, 사회경제적 조건 등 텍스트외적 조건과 결부시키며 해석하여 새로운 의미를 드러낸다. 이를 텍스트의 몸으로 본다.

이 몸을 캐는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텍스트를 반영상과 굴절상으로 나눈다. 다음으로 작가가 사법계를 보고 어떻게 이법계의 원리를 발견하였으며 이를 어떻게 표상하였는가, 이법계의 원리에 따라 어떻게 이상과 현실의 괴리, 세계의 부조리, 주체와 세계의 대립과 갈등을 事理無碍法界나 事事無碍法界로 승화시켰는가에 대하여 분석한다.
얼핏보면, 쓰는 주체가 이법계를 떠올리는 경우 주체가 상상하는 것이므로 어떤 특정한 사물을 놓고도 이법계가 무한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인간존재가 세계를 세계화하는 세계의 본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세계를 드러낸다. 의미작용과 이법계의 인식이 개인의 연상작용, 직관과 유추에 따라 아무런 규제없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여기에는 어떤 원리가 작용하고 있고 어떤 바탕이 영향을 미치고 있고 구조가 울을 치고 있다.

달이 ‘높이 떠서 들이건 산이건 가리지 않고 두루 비춘다’는 用(기능)을 발하는 것을 보고 불교적 세계관 - 정확히 말하여 화엄만다라 세계관 - 에 있던 신라시대의 良人들은 그처럼 자비의 빛을 귀족이건 良人이건 가리지 않고 두루 뿌린다는 이법계의 인식을 하여 달을 ‘문수보살’로 노래하고 해독한다. 반면에 성리학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조선조의 사대부들은 이를 양반과 서민을 가리지 않고 은총을 베푼다는 이법계의 인식을 하여 ‘임금님’으로 노래하고 해독한다. 이처럼 인간이 의미를 창조하고 해석하는 것을 규정하는 커다란 구조가 있는 것이다.

또 인간은 세계의 부조리에 대하여 집단무의식적인 대응양식을 취한다. 인간은 세계의 분열이 상존하는 한 삶의 평형을 이룰 수 없기에 나름대로 분열에 대응하여 삶의 평형과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란 세계의 분열을 맞아 새에게 시체를 쪼게 하여 천상계와 지상계의 중개자인 새가 죽은 이의 영혼을 천상계로 실어 날랐다고 하면서 삶의 평형을 되찾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집단에서는 그가 극락정토로 왕생하였으니 곧 만나게 되리라는 노래를 불러 그의 죽음으로 야기된 분열을 극복하고 다시 조화를 모색하고자 한다. 이런 대응은 구조적이자 집단 무의식적이다.

이처럼 인간의 의미작용과 이법계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구조가 있고 인간 주체의 세계에 대한 대응양식을 집단적으로 규정하는 체계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를 ‘세계관’으로 명명한다. 세계관은 집단적이고 무의식적이기에 작가가 의식하고 텍스트에 투영할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투영된다. 주체가 대상에 대하여 여러 유추를 하여 理法界를 형성할 수 있는데 ‘무서리 속에 피는 국화 = 志節’처럼 이법계를 한정하는 것, ‘높이 떠서 산과 들을 가리지 않고 비춘다’는 달’의 用이 화엄만다라 세계관에서는 ‘문수보살’, 성리학 세계관에서는 ‘임금님’으로 해독되듯, 의미작용의 원리로 작용하는 것이 세계관이다. 때문에 세계관은 비유양식을 제한하며, 이념과 달리 텍스트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도 관여한다. 사뇌가계의 향가가 형식에서 三句六名의 구조, 반영상과 굴절상의 유기적 결합을 이루고 事事無碍法界를 지향하며 높은 조화의 세계에 다다른 것은 작가층이었던 낭승들의 華嚴蔓茶羅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한 시대에 주동적 세계관, 잔존적 세계관, 부상적 세계관 등 여러 세계관이 공존할 수 있으며 한 텍스트에 여러 세계관이 포개질 수 있다.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이념이 강요될 수는 있어도 이것이 현실적으로 유일한 인간의 실천으로 기능을 하는 사회문화 집단이란 스탈린 체제와 같은 전체주의 사회에서도 불가능하다. 또 신라사회가 화엄만다라의 세계관 아래 미륵사상, 미타사상 등 다양한 이념을 추구하고 현대 사회의 대중 대다수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을 자기 집단의 대응양식으로 하면서도 사회주의자나 자본주의자, 칸트주의자나 헤겔주의자로 나뉘듯 인간 개인은 세계관 아래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념과 사상, 종교를 추구한다. 또 세계관이 변하기는 어렵지만, 이념이나 사상, 이데올로기는 한 개인의 차원에서도 다양한 편차를 보인다. 이를 무시하고 한 사회문화 집단을 하나의 틀로 재단할 경우 오류를 범한다.

이 문화와 세계관의 맥락은 수용자의 해석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수용자라는 개인도 문화의 맥락과 세계관이라는 틀 내에서 텍스트를 해석하고 의미를 파악하며 메시지를 전달받는다. ‘用’은 한 사물과 다른 사물과의 관계, 다른 사물에 대하여 작용하고 기능을 한 것이며, 사물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운동한 것이다. ‘텍스트의 짓’은 텍스트와 수용자가 만나 텍스트와 美的 相關을 하여 수용자가 자신이 접한 텍스트, 이념, 세계관에 대한 입장과 태도에 따라 미적 가치를 평가하고 해석한 것이자 담론의 사회적 실천이다. 이는 시학적으로는 텍스트와 수용자가 만나 텍스트와 상관을 하여 수용자가 미적 가치를 해석한 것이다.

수용자는 다양한 세계관과 이념을 가지고 텍스트를 해독하며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이나 이념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세계관과 그 하위체계라 할 사상과 이념, 이데올로기, 사회문화 구조가 서로 역동적인 작용을 하는 가운데 그 틀 속에 있는 인간주체가 어떻게 세계와의 분열에 맞서 세계를 의미화하며 이를 어떤 체계에 따라 약호화하여 텍스트를 만들었는가, 또 수용자는 어떤 세계관과 어떤 이념을 가지고 텍스트를 해독하며, 이것이 인간의 구원이라는 문학의 소명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라는 관점에서, 대신 과학적으로 텍스트를 해명해야 한다.

세계관의 구조 아래 인간은 텍스트를 생성하고 해석하는 다양한 개인 전략을 구사한다. 이 개인 전략이 계급적 이해관계에 충실할 경우 개인은 이법계 중 어느 한 가치를 당위의 가치로 파악한다. 이 경우 개인은 이데올로기적 의도를 가지고 텍스트를 생성하거나 텍스트를 이데올로기적으로 해독한다. 작가가 이데올로기를 노골적으로 표출할수록 문학성과 미학적 가치는 떨어진다. 이때 작가가 집단이나 계급의 이해관계에서 텍스트를 제작하였을 경우나 수용자가 집단이나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텍스트를 해독할 경우 텍스트의 의미 덩어리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 텍스트는 신화적 기능을 하며 허위의식을 텍스트 안에 담는다.

세계관과 주어진 문화체계 안에서 읽는 주체는 약호를 해독하여 의미작용을 일으키는데 주체가 자신의 취향과 입장, 이데올로기, 의식, 태도, 발신자와의 관계 등을 종합하여 어디에 더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텍스트는 크게 나누어 지시적 가치, 문맥적 가치, 표현적 가치, 사회역사적 가치, 존재론적 가치를 갖는다.

“절망에 잠긴 내 눈가로 별이 반짝였다.”라는 언술을 예로 들면, 수용자가 지시적 가치를 지향하면 이의 의미는 문장 그대로의 뜻이다. 문맥적 가치를 지향하면 수용자는 앞 뒤 문맥을 살펴 “절망에 잠긴 내 눈 앞 하늘에서 천체의 일종인 星이 반짝였다.”, “절망에 잠긴 내 눈 앞에 벼랑이 (달빛 등에) 드러났다.”, “절망에 잠긴 나의 눈(雪) 가장자리로 별이 빛났다.”, “절망에 잠긴 나의 눈 가장자리에 벼랑이 (달빛 등에) 드러났다.”로 해독한다. 표현적 가치를 지향하면 이의 해독은 “절망에 잠긴 내 눈가로 눈물이 반짝였다.”, “절망에 잠긴 내 눈 앞에 더 큰 장애가 나타났다.”, “절망에 잠긴 나의 눈 가장자리에 더 큰 장애가 나타났다.”이다. 사회역사적 가치를 지향하면 “절망에 잠긴 내 앞에 장군이 보였다.”, “절망에 잠긴 내 앞에 별과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절망에 잠긴 내 앞에 인기 연예인이 나타났다.”이며, 존재론적 가치를 지향하면 “절망에 잠겼던 내가 희망을 품었다.”, “절망에 잠긴 내 앞에 신과 인간, 성스런 세계와 속된 세계의 중개자가 나타났다.”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으로 텍스트의 의미가 모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의 진정한 體는 드러날수록 감춘다. ‘글올의 참’은 글올의 품, 몸, 짓이 서로 화쟁을 이루면서 텍스트의 숨은 의미를 드러내는 경지이다. 텍스트의 내적 구조를 분석하고 이에 텍스트의 품과 몸과 짓으로 얻은 의미를 대입하여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숨은 의미를 찾는 것이다. 텍스트의 품과 짓, 몸은 가변적이다. 품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도구, 수용자의 텍스트의 분석력 등에 따라 변한다. 몸 또한 텍스트와 작가에 관련된 새로운 사실이 추가됨에 따라, 텍스트가 놓인 시공간에 따라 변한다. 짓은 수용자에 따라, 수용자가 놓인 사회경제적 맥락과 수용자가 접한 텍스트에 따라, 또 텍스트가 수용되는 시공간과 그 시공간의 이념과 세계관, 텍스트가 사회적으로 실현되는 양상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변수인 텍스트의 품, 짓, 몸이 변하므로, 텍스트의 진정한 體는 인다라망의 보석처럼 重重無盡으로 드러내고 숨는다.

고도의 텍스트 분석력을 가진 비평가가 텍스트의 품, 몸, 짓의 의미를 여러 입장에서 제시하였다고 해도 이는 텍스트가 품고 있는 의미의 일부분만 드러낼 뿐이다. 體라고 파악한 것, 곧 텍스트의 참은 텍스트가 숨기고 있는 의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원효의 비유대로 ‘진여의 절대적 의미’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體라고 파악한 것 또한 相과 用에 비교해서 세계의 본질에 좀더 가까이 간 것일 뿐이지 이 또한 세계의 부분, 또는 허위일 뿐이다. 원효의 말대로 어떻게 말로 할 지 알지 못하여 그렇게 불렀을 따름이다. 이것 모두 인간 주체가, 세계가 차이를 통하여 구조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고 一心 속에서 해석한 결과이다. 따라서 세계와 기호에 절대성을 부여할 수 없을 뿐더러 體가 세계의 절대적 의미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해서 體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 우리가 진리라고 파악한 것에도 허위가 들어있고 허위의식이라고 결정을 내린 것 속에도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진리 또한 허위가 있기에 허위와 차이를 통하여 드러날 뿐이다.

이처럼 텍스트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 자체가 差延으로서 차이에 의해서 드러나고 맥락에 따라 변한다. 텍스트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보다는 작가와 텍스트, 수용자간에 重重無盡으로 일어나는 읽기의 과정을 통하여 읽는 주체를 자유롭게 한다. 인간 주체는 중중무진의 읽기를 통하여 이미 낯익은 세계를 낯설게 만나고 세계의 숨겨진 의미에 다가가며 자신을 억압하던 관념에서 해방되어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된다. 대신 텍스트가 담론으로 변할 때 항상 이데올로기를 품게 되므로 열린 읽기를 하되, 여러 읽기 가운데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우선적으로 수행하여야 텍스트에 숨어있는 이데올로기의 장막을 걷어냄은 물론 주체 또한 자유로울 수 있다.
문학과 예술이란 세계를 새로이 인식하고 이것을 독특한 형식으로 짜아내어 세계의 숨겨진 의미와 진실을 드러내고 미적 감동을 주는 양식이다. 그러니 해석 또한 詩的이고 미학적이어야 한다. 이로 인간 주체는 세계를 끊임없이 새롭게 보게 되며 텍스트의 해독을 통하여 기대의 지평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의미를 찾는 황홀한 실존과 미적 감동에 접하게 된다.

2.5. 疏通의 화쟁기호학

                          (제망매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대체)

제2편: 화쟁기호학의 실제-제망매가

죽고 사는 길은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갑니다 말도 못 이르고 가나닛고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져

아, 아! 미타찰에서 만나리니
내 도 닦아 기다리고다.

이 노래는 월명사사 죽은 누이의 49재를 지내면서 부른 노래이다. 이 노래에서 반영상은 初句와 承句이며 굴절상은 結句이다. 이를 화쟁기호학으로 분석하면 아래와 같다.

글올의 품: 初句 “죽사릿 길은/예 있으매 머뭇거리고”의 의미는 간단하지 않다. 외견상으로 볼 때는 삶 또는 죽음에 대해 인간이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은 작가가 생과 사에 대해 외경심을 갖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만은 없게 하는 첫째 요소는 이 노래를 부른 시공간이다. 신라시대에 장사를 지낼 때 노래를 불러 鎭魂했음은 《後漢書》나 《三國志》같은 중국문헌뿐 아니라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화랑 奚論이 죽자 세상사람들이 애도하지 않는 자 없이 長歌를 지어 조의했고, 金歆運이 죽은 소식을 듣자 陽山歌를 지어 부르며 슬퍼했다.

齋란 齊가 변해서 된 것으로 齊가 인간끼리의 만남에 중점을 둔다면 齋는 이것이 변모하여 인간과 신의 만남이 강조되면서 이루어진 인간의 실천의례이자 세계에 대한 대응양식이다. 월명사가 郎僧이고 미타여래는 죽은 자의 追善回向에서 등장하므로 월명사가 망매를 영재한 의식은 불교의식에 따라 거행되었다. 이미 죽은 자를 위하여 죽은 뒤에 하는 齋로서 행하는 불교의식이라면 七七齋다. 칠칠재는 사람이 죽은 뒤 첫 칠일에서 일곱번째 칠일 동안에 죽은 자의 영혼이 現生과 當生의 중간영역인 中有에서 극락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정하지 못하고 떠돌며 심판을 기다리므로 경문을 읽고 공양을 하면서 죽은 이의 善業을 고하여 명복을 빌며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기원하는 의식이다.

칠칠재를 올리는 시점이니 누이의 영혼은 중유를 떠돌고 있다. 이 중유에서 떠도는 것을 두고, 영혼이 혼동하는 정도가 크므로 불교에서는 다시 생사를 반복한다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죽고 사는 길’은 누이가 중유에서 태어나고 죽는 길이며 ‘예’는 월명사가 칠칠재를 올리는 시공간을 말한다. 또 이 진술은 동시에 그의 누이가 중유에서 떠돌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죽고 사는 길’과 ‘예’를 해석하고 나면 작품의 시공간과 관련서사의 “爲亡妹營齋”의 시공간은 일치한다. 곧 ‘죽고 사는 길’은 임종 순간에 살고 죽는 길이 아니라 중유에서 태어나고 죽는 길이다.

이렇게 할 경우 뒤의 ‘머뭇거리고’의 진술 또한 쉽게 풀린다. 이는 칠칠재의 관습대로 하면 누이가 중유에서 떠돌며 아직 緣處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가 할 일은 그의 복을 빌고 선을 고하여 연처로 가도록 하는 것이다. 누이가 중유에서의 방황을 멈추고 좋은 곳에 태어나라고 재를 올리고 있는 월명사로선 당연한 진술이다. 또 이승과 저승의 중간에서 머뭇거림은 아직 이승에 대한 미련이 많아서이다. 이는 실제 누이가 그러는 것이 아니라 월명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누이의 사별을 안타까워 하는 월명의 마음이 담겨있다.

관련서사에 보면 갑자기 바람이 불어 지전을 서쪽으로 날렸다고 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舊唐書》, 列傳 第八十 王璵傳 등에서도 볼 수 있다. 西天으로 飛沒했다는 紙錢은, 이 시기에 唐의 불교의식에서 퍽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원왕생가〉에서도 西方은 서방정토를 뜻한다. 〈郁面婢念佛西昇〉조에서 욱면이 서승하며 〈二惠同塵〉조에서 惠宿 또한 입적한 후 서쪽으로 간다. 이로 볼 때 서쪽은 서방정토를 가리킨다. 이것은 누이가 월명사의 齋로 중유에서의 방황을 멈추고 서방정토로 왕생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이 재는 칠칠재 중에서도 마지막 재이며 누이가 영영 이승과 단절하는 시점이다.

한 신앙인으로서 누이가 서방정토로 왕생한다는 일은 소망이 실현됨을 뜻한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볼 때 누이가 왕생하는 것은 이승과 현생의 중간 지점인 중유에서 떠나 이승과 완전히 결별함을 의미한다. 아무리 신앙심이 깊은 월명사라 하더라도 저승에서의 극락왕생이 이승에서의 만남만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월명사가 누이를 다시 살아나게 할 만한 힘을 가진 것도 아니다. 이별은 이미 둘 사이에 내려진 당위이다. “나는 갑니다 말도/못 이르고 가나닛고”란 누이의 죽음이 갑자기 예상도,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순간에 닥친 것임을 나타낸다. 그러기에 그 슬픔은 더욱 크다.

이 슬픔은 나뭇잎의 비유를 통하여 죽음의 문제로 눈을 돌리게 된다. 죽음이라는 단절이 있기에 유한성을 절감한다. 삶이 유한한 데서 빚어지는 세계의 부조리인 사별에 대하여 인간 주체는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다. 그러기에 承句에서 이별의 서러움은 더욱 고조된다.

그러나 대응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유한성의 인식을 통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실존적 삶을 추구하게 된다. 여기서 월명사는 俗에서 聖으로 영원한 삶을 지향하여 죽음의 불안에서 벗어나고 누이의 사별로 인한 삶의 부조리를 극복한다. 미타찰의 왕생을 통하여 누이는 다시 살고 나 또한 그리로 가 누이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미타찰을 통하여 사별로 빚어진 세계의 분열은 조화로 통하고 삶은 다시 평형에 이른다.

글올의 몸: 여기서 반영상은 初句와 承句이다. 事法界는 누이가 간다는 말도 못한 채 임종을 맞고 서로 사별의 고통을 해야 하는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이승과 저승이 대립하는 현실의 세계이다.

“나는 갑니다 말도/못 이르고 가나닛고”엔 갑자기 닥친 누이의 죽음으로 인한 세계의 분열을 맞은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월명사가 맞는 당혹감과 함께 영원한 이별에 대한 恨의 情理가 잘 투영되어 있다. 누이의 往生을 승려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한 바램이 실현되는 것이지만 한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승과 완전히 결별함을 뜻한다.

완전한 결별이 맞은 고통으로부터 월명사는 이에 내재한 죽음의 의미를 깨닫는다. 월명사는 누이의 죽음이라는 개별적 현상을 통하여 인간의 삶과 죽음에 내재하는 보편원리를 理法界로 떠올린다.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존재의 유한성을 절감한다. 죽음은 또 언제 올줄 모르는 것이기에 인간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 불안과 유한성의 깨달음 속에서 인간은 삶의 의미와 자기 존재의 의의를 발견하고 ‘세계 속의 존재’로서 실존하려 한다. 이런 깨달음은 화엄이나 실존주의가 다같이 인식했었던 인간과 삶의 본질에 대한 자각이다. 죽음을 통해 生의 의미를 깨닫고 重重無盡의 不死의 道를 추구하는 것이 화엄의 생사관이다. 월명사 또한 누이의 죽음을 통해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세계의 모습을 본다. 자기 앞에 있는 사물은 모두, 어머니없이 자식이 존재하지 못하듯 다른 사물과 緣起하지 않고 홀로 존재하는 것도(無自性), 어제 본 꽃과 오늘 본 꽃이 같지 않듯 항상 같을 수만(無常)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空한 것이다(一切皆空). 그 속에서의 자기 존재도 自性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며, 때문에 자신의 존재 또한 空한 것이다.

월명사는 자신이 깨달은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내지 않는다. 證으로서는 覺으로서 느낀 세계의 진실을 그대로 드러낼 수도 없거니와 阿賴耶識으로 본 세계를 迷妄의 언어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다. 석존이 靈山會上에서 연꽃을 들어 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의 진리를 깨닫게 한 것 또한 이와 같은 이치이다.

承句에서 비유의 핵심은 나뭇잎이다. 월명사는 나뭇잎으로 은유화하여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나뭇잎은 한 가지에 나고 가을에 떨어지는 用을 갖는다. 이것과 유사성의 은유관계를 이루는 것은 한 가지인 부모에게서 나고 기약없이 사라지는 가족이다. 一卽多 多卽一의 화엄의 명제처럼 세계는 한 조각 나뭇잎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삶의 모습과 나뭇잎을 은유화할 수 있는 유사성의 원리는 둘 다 탄생하고 한 가지에서 생을 영위하지만 곧 소멸한다는 體를 지닌 점이다. 즉 色이 있으나 自性이 없으니, 존재하다고 본 모든 사물들이 결국 空한 것이다(色卽是空, 畢竟空).

가지는 잎을 낳게 하는 것이니 잎이 형제라면 가지는 자연히 부모가 되며 이 가지가 모인 나무는 사회가 된다. 가을은 모든 사물, 또는 잎들을 떨구는 계절이니 임종의 시간이며 바람은 이를 실제로 실행시키는 시련이나 病苦 등인 것이다. 이들 은유화한 사물은 다시 ‘처럼’이라는 조사에 의해 직유로 이어진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이 갖고 있는 속성은 한 가지에 나고도 가는 곳을 모른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대로 인간의 삶과 유사성을 갖기에 직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직유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세계의 실체는 한 몸에 났으면서도 운명을 달리 한다는 점이다. 이 진술 속에는 한 형제임에도 각기 다른 시간에 죽음을 맞이하여야 하는 운명에 대한 야속함과 자신보다 어리면서 먼저 임종한 누이에 대한 안스럽고 미안함, 가는 곳을 전혀 모르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두려움과 불안, 나뭇잎처럼 가고마는 인간존재의 무상감 등이 내포되어 있다. 만물이 무자성하고 무상하다고 인식하는 순간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無常이 곧 苦이고 苦를 통해 비로소 자신을 볼 수 있음은 이 때문이다.

이런 苦를 통한 인식 속에서 비로소,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세계와 주체간의 갈등과 대립을 화해시킬 수 있는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苦는 진정 괴로운 업보이지만 苦가 있기에 인간의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이며 그것을 滅할 길(道)을 모색하면서 인간으로서 실존할 수 있는 것이다.

월명사는 이런 苦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는 세계를 마련한다. 그것은 미타찰이다. 미타찰이란 글자 그대로 풀면 아미타불이 있는 界이다. 아미타불이 있는 界란 서방정토이다. 극악한 자는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고 극선한 자는 바로 왕생하기 때문에 중유에는 극악하지도 극선하지도 않은 자들이 머무는 곳이다. 그런 보통사람들로서 당대 신라인들이 이승의 삶에서 열망했던 곳은 미타정토이고, 또 이곳은 아미타불을 염송하기만 해도 他力인 아미타불의 大悲, 願力에 의하여 十惡罪가 소멸하고 서방으로 十萬億國土를 지나서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신앙이다. 미타사상은 聖道門이 아니라 미타불의 이름만 외워도 他力인 미타불의 힘에 의해 왕생할 수 있는 淨土門이다. 그리고 일단 最劣의 불토인 서방정토에 왕생하면 더 나아가 최상의 불토인 연화장 세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화엄정토만다라의 세계관이다. 이렇게 당대 신라인들은 삶과 죽음과의 대립을 쉽게 화해시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던 것이다.

중유에 머물렀던 누이는 재를 올림에 따라 서방정토로 왕생하는 것이고 승려인 월명사 자신 또한 미타불을 염송하고 있으니 서방정토로의 왕생은 가능한 영역이다. 그러니 월명사는 누이와의 이별을 미타찰에서의 만남으로 극복하고 현실에서 빚어지는 사별의 아픔을 만남에 대한 기대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깨달음은 ‘아 아’라는 탄성으로 표출되었고 미타찰에서 만날 것이라는 차분한 각성은 ‘도닦아 기다리고다’란 실천을 낳는 것이다.

여기서 事法界는 누이가 간다는 말도 못한 채 임종을 맞고 서로 사별의 고통을 해야 하는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이승과 저승이 대립하는 현실의 세계이다. 초구는 사법계의 형상을 노래하고 있다. 理法界는, 일체 존재는 無常하고 서로 緣起되어 있어 自性이 없이 空하다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諸法無常, 諸法無我의 원리인 것이다. 승구는, 가을날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한 가지에 나고 서로 가는 곳을 모른다며 一切皆空한 이법계의 원리를 읊고 있다. 事理無碍法界는 낙엽이 바로 一切皆空을 드러내고 一切皆空이 바로 낙엽임을 깨닫고 승구처럼 노래하는 경지이다. 사리무애법계의 인식을 통하여 사사무애법계를 깨닫는다. 事事無碍法界는 미타찰로의 왕생을 통해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이별과 만남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고 원융을 이룬 涅槃寂靜의 세계이다. 결구는 사사무애법계의 세계를 꿰뚫은 뒤의 깨달음과 이에 따른 실천을, 미타찰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도를 닦으며 기다겠노라고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결구는 현실을 뛰어넘어 굴절상을 이루며 事事無碍法界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미타찰로의 왕생을 통해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이별과 만남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고 圓融을 이룬 涅槃寂靜의 세계이다. 곧 이 노래는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의 대립을 미타찰에서의 왕생에 의한 만남의 기대로 극복하여 세계와의 대립을 화해하고 사별에서 오는 고통을 승화시키고 있다.

글올의 짓: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고 자아가 세계와 마주쳐서 이루어진 감동을 안으로부터 표현하고 있기에, 이 노래를 이념적인 것으로 해독하기 어렵다. 종교적이나 존재론적으로 해독된다.

불교용어가 나오고 작가의 신분이 승려이므로 수용자가 불교의 입장에서 불교적으로 해독하기 쉽다. 불교적으로 읽으면 누이의 죽음에서 오는 한 인간의 苦를 통하여 諸法無常, 諸法無我, 一切皆苦 등 불교적 진리를 깨닫는 동시에 개인의 슬픔을 미타찰에서의 왕생으로 승화시켜 涅槃寂靜을 이룬 노래이다.

수용자가 불교적 입장을 거부하고 존재론적으로 해독하면 자아가 누이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깊이 인식하고 이에서 오는 불안을 극복하고 실존적 자각 - ‘세계내존재’로서 의미있는 삶을 구현 -을 한 노래이다.

글올의 참: 이 노래는 반영상과 굴절상을 함께 갖고 있기에 다양한 의미를 드러낸다. 물론 이 노래의 주요 메시지는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의 대립을 미타찰에서의 왕생에 의한 만남의 기대로 극복하여 세계와의 대립을 화해하고 사별에서 오는 고통을 승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를 의미분절했을 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三元構造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상적 공간으로 분절하면 부정항은 누이가 죽어서 가고 월명사는 갈 수 없어 이별의 고통을 낳는 저승이요, 긍정항은 누이와 내가 행복을 누리고 사는 이승이다. 양자를 매개하는 것은 중유이다. 그러나 월명이 불교적 관념의 세계에서 만든 관념적 공간으로 분절하면 고통의 바다인 이승이 부정항이요 누이가 이런 고통을 끊고 해탈을 이룬 서방정토는 긍정항이다. 이때 인간을 서방정토로 이끄는 것은 道이니 매개항은 道이다. 이렇듯 일상적 공간과 관념적 공간은 서로 대립한다. 가고 헤어지는 월명사나 누이의 행위가 부정항이라면 오고 만나는 것은 긍정항이며, 양자는 길을 통하여 이루어지니 매개항은 길이다. 비유로 사용한 나뭇잎의 경우 낙엽이 되어 떨어져 죽는 것이 부정항이라면 봄이 되어 다시 싹을 틔우는 것이 긍정항이며 이러도록 다리를 놓는 것은 계절의 순환이다.


 


初句에서 ‘生死路’라고 노래하고 있다. 길이란 가고 오는 곳이며 지속성을 갖는다. 생사에 매개항인 길을 붙임으로써 이미 죽음과 別, 이승과 저승, 이승과 서방정토간의 단절은 극복되고 둘은 서로 오고 갈 수 있는 곳으로 변모한다.

承句의 매개항은 가을과 환유관계를 갖는 계절이다. 계절은 순환성을 갖는다. 가을이 와서 모든 잎이 지는 것 같지만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 싹이 돋는 것이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잎이 짐은 새 싹이 돋음을 잉태하는 것이며 죽음은 탄생을 예비하는 것이다. 이렇게 초구와 승구에서 긍정항과 부정항으로 대립을 보이면서도 각각 매개항을 설정함으로써 서로 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런 구조가 結句에 와서 모든 것을 융합할 수 있는 道와 미타찰이란 기호를 만나면서 완전한 통합을 이룬다. 이 노래는 내포적으로 삶과 죽음, 이별과 만남 사이의 대립항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을 매개하는 것은 道이다. 道를 닦음으로써 시적 화자 또한 왕생할 수 있고 왕생한다면 이미 왕생한 자와 만나기 때문이다. 왕생한다면 누이와 월명사 모두 고통의 바다인 이승에서의 삶을 마치고 영원한 삶을 얻게 된다. 미타찰에서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이승과 저승간의 대립은 원융되는 것이다.

한 평범한 사람으로서 일상적 공간관으로 보면 저승은 부정적 공간이며 누이의 죽음은 恨이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관념적 공간관으로 보면 이승은 오히려 고통의 바다이며 누이의 죽음은 모든 고통을 끊고 해탈을 이룬 것이다. 월명사는 어느 쪽을 부정하지도 폄하하지도 않고 있다. 이 노래가 관념시에 그치지 않고 높은 서정성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원융의 구조를 통하여 관념적 공간에서 종교인이 달한 높은 깨달음의 경지와 일상적 공간에서 한 평범한 인간이 느끼는 슬픔의 정서를 잘 교직시켰기 때문이다. 월명은 불승이라고 해서 죽음을 해탈한 지고한 경지만을 읊은 관념시를 짓지 않았다.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고뇌할 수밖에 없는 사별의 아픔을 사법계의 현상으로서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이 한 인간의 푸념이나 넋두리로 전락하지 않고 높은 문학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이별에 대한 고통과 슬픔, 죽음에 대한 불안의식을 부정하거나 초월시키지 않고 인정하는 가운데 만남에 대한 기대와 영원한 삶의 추구로 승화시킨 데서 기인한다. 더불어 이 노래는 生과 死, 가고 옴, 만남과 이별, 이승과 저승, 이승과 서방정토 사이에 길과 道와 계절, 中有가 있어 이어주듯 삶이란 단절이 아니며 순환임을 드러낸다. 이 모든 대립이 모순과 투쟁의 관계가 아니라 화쟁의 관계-씨와 열매와 같은 不一不二의 관계-임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이 텍스트에서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등 모든 대립은 투쟁과 모순 관계가 아니라 매개항을 다리로 하여 서로 화쟁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만남이 있기에 이별이 존재한다. 그러나 언제인가 이별할 것을 알기에 사람들은 마지막처럼 상대방을 아껴주며 사랑을 불태운다. 처절하게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이별은 없으며 이별을 전제하지 않는 사랑은 모든 것을 던지지 않는다. 이승이 있어 저승이 있고 저승이 있어서 이승이 있다. 삶이 있어 삶의 끝인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사람들은 유한성을 인식하고 하루 하루를 의미로 채우려 한다. 죽음이 없다면 이승은 아수라장으로 변하였을 것이며, 삶이 없다면 저승은 아무 의미도 빛도 없이 싸늘한 어둠세계였을 것이다. 그리고 낙엽이 떨어진 자리에 봄이 오면 싹이 돋고 꽃이 피듯 삼라만상은 순환한다. 낙엽이 떨어졌다고 하여 그 나무가 아주 끝났다든가, 죽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육체가 소진하였다고 죽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며 이별이라고는 더욱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제망매가는 多聲의 목소리를 갖는다. 이 노래가 삶에 대한 깊은 사색을 서정적 틀에 잘 용해시켜 사상과 정서의 융합을 이루며 다양하게 해독되는 것은 이 텍스트가 三句六名의 틀 속에서 반영상과 굴절상을 결합시켰기 때문이며, 근원적으로 당대 신라인이 현실에 굳게 발을 디디고 이상을 지향하려는 화엄만다라의 세계관을 통하여 현실을 표상하였기 때문이다. 이 노래가 누이의 七七齋에서 부른 의식가요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서정성을 지닌 것은 바로 이런 구조에서 기인한다.

<제망매가의 화쟁기호학 모형>

(복사물로 대체)

월명사는 누이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맞는다. 이 현실은 월명사에게 반영되고 이 반영된 현실에 대한 반응은 초구에서 월명사 스스로 드러내었듯 참을 수 없는 슬픔이다. 그러나 월명사는 세계의 분열에 대해 조절의 태도를 취한다. 때문에 그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 여기에 화엄만다라라는 세계관이 작용하여 월명사는 누이의 죽음이라는 사법계의 현실로부터 일체 만물이 무상하다는 것과 이 슬픔을 미타찰에 왕생하는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음을 이법계로 깨닫는다. 월명사는 이렇게 세계1을 굴절시킨다. 월명사는 수신자를 상정하고 이런 전언을 담는 형식으로 향가를 선택하고, 텍스트의 형식에 맞게 수신자를 고려하여 약호를 만든다. 여기서 약호의 원리로 작용하는 것은 자연현상과 인간의 삶이 은유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월명사는 이에 나뭇잎의 비유를 통하여 누이의 죽음으로 맞은 분열의 승화와 깨달음의 세계를 <제망매가>에 담아 보낸다. 이의 1차 수신자는 텍스트 상으로는 월명사 자신과 죽은 누이이나 이것이 의식가요로 불린 것을 고려하면 현실의 장에서는 49재에 모인 사람들이다. 이들도 화엄만다라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고 현실을 공유하고 있고 통로도 大氣이므로 잡음이 끼기 어렵다. 때문에 1차 수신자는 제망매가의 약호를 간단히 풀어 세계3을 형성한다. 이 세계는 월명사의 세계와 거의 일치하기에 세계2의 영역은 넓다. 이들은 거의 같은 수준에서 이 노래의 정서에 공감하고 메시지를 수용하여 미적 감동을 한다.

2차 수신자는 그 장소 바깥의 신라사람이다. 이 경우 세계관이 같더라도 맥락이 다르기에 다른 해독을 할 수 있다. 그들이 이 텍스트를 통하여 형성한 세계3은 세계1과 많은 차이를 갖는다. 그들이 이 노래를 수신한 맥락이 이별의 현장이라면 그들은 이 노래를 이별의 슬픔을 미타찰에서의 만남으로 승화시킨 노래로 들었을 것이요, 재를 행하는 자리라면 죽음의 한과 불안을 미타찰에서의 영원한 삶으로 승화시킨 노래로, 불전의 자리라면 무상의 삶, 속스러운 삶을 성스러운 삶, 왕생으로 승화시킨 노래로 해독하였을 것이다.

3차 수신자는 일연이다. 그는 신라 문화 바깥에 있으나 고려가 문화적으로는 신라를 철저히 계승하였고 일연은 화엄과 밀교에 다같이 기울어져 있어 국통까지 지낸 정통승려이기는 하나 샤머니즘적 세계관에 적대적이지 않다. 때문에 그의 세계관은 화엄만다라와 유사하며 그에게도 누이의 죽음이란 세계의 분열에 대해 노래를 불러 “지금 여기에서” 다시 삶의 평형을 가져온다는 대응이 하등 이상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일연이 가장 강렬하게 해독한 메시지는 노래를 불러 그 주술적 힘으로 세계의 분열에 대응하여 다시 삶의 평형을 이룬 것이다. 이 노래를 한 주체(월명사)가 지고한 수행정진을 하여 초월적 존재(아미타불)를 감응시켜 신이한 영험을 구현한 실례를 보여주려는 감통 편의 편목에 집어넣은 것은 이 텍스트의 메시지가 감통 편의 다른 텍스트의 메시지와 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노래와 관련설화는 독립된 것이 아니라 <월명사 도솔가> 조에 도솔가와 같이 들어가 있다. 이는 노래의 작가가 동일한 것보다 도솔가와 유사한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특히 관련설화의 핵심 메시지를 잡아 일연이 노래한 찬시를 보면 “바람은 종이돈 날려 죽은 누이의 노자를 삼게 하고/젓대소리 저 달에 울려 姮娥의 걸음 멈추게 하였네/하늘 저 쪽 도솔천이 멀다고 하지 마라/萬德花 한 곡조로 즐거이 맞으려네.”라 읊고 있다. 일연이 볼 때 이 노래의 중심 메시지는 누이의 죽음, 삶 자체가 苦인 이승의 삶에서 오는 무상감을 미타찰이라는 영원하고 성스러운 세계를 지향하는 노래를 부르고 실천을 하여 결국 그 청정하고 常樂我靜한 세계, 도솔천에 이르리란 것이다.

제4차 수신자는 오늘날의 우리이다. 이 노래가 우리에게 전달되는 통로는 삼국유사이다. 이 통로의 잡음은 삼국유사 자체의 誤植과 향찰의 오독이다. 그러나 제망매가는 오식이나 오독이 다른 향가에 비하여 사소하기에 전체 메시지를 해독하는 데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우리의 지배적 세계관은 근대적 세계관, 즉 과학적 합리주의이다. 이 틀로 보면 주술적 요인은 비합리적인 것으로 인지된다. 수신자는 이것을 제거시켜 버리고 제망매가에 관련된 설화와 노래 텍스트의 약호를 합리적 잣대로 분석한다. 이 세계3은 당연히 세계1과 많은 차이를 갖는다. 때문에 샤먼적, 풍류도적으로 짜여진 원래 노래의 약호는 근대적으로 풀린다. 다만 이별과 죽음이라는 시대를 뛰어넘는 정서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현대적 이별과 죽음의 한으로 이 텍스트의 의미를 해독하려 한다. 그러기에 “누이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미타찰에서의 만남에 대한 기대로 승화한” 노래로 가장 흔히 해독한다. 이 가운데 불교적 이념을 지향하는 수신자는 삶의 고통과 무상을 미타찰의 왕생으로 승화한 노래로 본다. 그러나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화엄만다라의 세계관으로 들어가면 제망매가가 전혀 다른 약호로 짜여있고 그래서 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2강 과학기술의 도구화
게놈프로젝트, 과학기술은 구세주인가, 악마인가: 신과학운동 對 一心의 體用相

손빨래를 할까요, 세탁기를 돌릴까요?



▲ 이 도 흠      
    
1958년 제천 생. 한양대학교 국문학 박사

저자는 원효의 화쟁사상을 바탕으로 형식주의 비평과 마르크시즘을 종합한 우리 인문학 이론인 '화쟁기호학'을 창안한 인문학자이다.

이 이론으로 향가와 시조, 소설 등 문학테스트를 분석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으며, 본서는 이 이론을 삼국유사에 적용한 것이다.

현재 한양대 등에 출강하고 있으며, 한겨레문화센터 담임강사로 '문학, 문학이론의 쟁점', '기호학과 텍스트 읽기' 등 인문학 이론을 강의하면서 문화비평가를 양성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인물과 사상>에 '이도흠의 한국 대중문화와 미디어 읽기'를 연재한 바 있으며, 저서로는 <화쟁기호학-이론과 실제>, <동양철학에세이-왜 착한 사람이 더 고통받을까>등이 있다
우리가 어렸을 적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안방 머리맡에 둔 자리끼가 꽁꽁 얼었으니 밖은 얼마나 더 시린 겨울이었을까? 무명바지 헤진 사이로 칼바람은 잘도 헤집고 들어와 여린 살을 꽁꽁 얼려놓고 도망갔고 잔뜩 곱은 손으로 팽이를 돌리고 얼음을 지치다 보면 손등은 어느덧 쩍쩍 갈라져 코끼리 등이 되었다. 한강이 얼마나 깊이 얼었으면 강물이 풀리는 봄날에 그를 배 삼아 타고 놀았을까?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겨울 날 가장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가 이불을 빠는 일이다. 볕이 제법 포근한 날을 골라 커다란 함지박에 이불을 넣고 물을 가득 퍼담고 양잿물을 푼 다음 발로 콱콱 밟는다. 그러면 시커먼 구정물이 금세 함지박을 채운다. 새 물을 붓고 다시 밟고 또 물을 바꾸는 일을 오전 내내 하다보면 그 추운 날에도 가슴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다리는 천여 미터 산을 오른 이마냥 후들거린다. 안쓰러워 그만 하라고 외치는 어머니와 좀더 원하는 목표치에 도달하려고 이를 악무는 아들 사이에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인 끝에 빨래를 멈추고 물을 짠다. 짜고 또 짜도 솜은 왜 그리 물을 많이 먹었는지 팔에 경련이 일도록 짜도 주먹만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물 짜는 일만큼은 에누리가 없다. 빨랫줄이 무게를 못 이겨 끊어지면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꽤 말끔히 짜서 널면 이불은 설악산 용대리 황태처럼 얼었다 풀렸다를 되풀이하면서 날이 계속 좋으면 사나흘, 그렇지 않으면 족히 대엿새는 걸려서야 다시 안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밤새 도둑눈이 소복소복 이불 위에 내려 빨랫줄을 끊고 이불을 진창에 패대기치면 어머닌 아침 아궁이를 지피시며 눈 오는 소리를 듣고도 깨지 못한 당신을 연신 나무라셨다.

이불 하나 빠는 일만도 이리 어려운 일인데 세탁기와 캐시미론 이불은 어머니와 우리 가족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 주었는가? 일손만 덜어준 것이 아니다. 세탁기로 빨래를 돌리는 일은 남자도 할 수 있으니 가사를 공동 부담하면서 가정의 평등이 이루어진다. 가사노동에서 해방된 여성들이 사회로 속속 진출하니 여성들은 수천 년 동안 그들을 억압하고 통제하였었던 가부장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실현을 이룬다.

이처럼 과학기술은 인류의 구세주였다. 인류를 중세의 무지몽매함에서 해방시키고 60억이 먹고 살 만한 물질적 풍요를 안겨 주었던 것도,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도, 인류가 한 마을[global village]이 되고 지구 밖 외계로 나아가게 한 것도, 안방에 앉아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월드컵 축구경기를 관전하고 뉴욕의 증시에 투자할 수 있게 된 것도, 노동의 구속에서 벗어나 여가를 즐기게 된 것도 모두 과학기술의 힘이다.

그러나 세탁기는 소음을 낸다. 중성세제는 강물을 오염시킨다. 여가시간이 엄청 늘었는데도 세탁기 탈수조처럼 모든 것이 빨리 돌아가니 자신을 돌아볼 시간은 없다. 양심과 도덕과 정의는 달리기 선수의 발목에 매달린 모래주머니에 지나지 않는다. 기계로 대체된 노동은 빨래를 하며 오순도순 나누었던 모자간의 대화를, 이불을 밟고 짜면서 부딪혔던 그 살의 부드러움을 허기진 그리움으로 바꾸어 버렸다.

인간이 업을 주재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최근에 깊은 관심을 끌고 있는 게놈프로젝트이다.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이중 나선구조를 발견한지 47년 만에 인류는 30억 쌍의 유전자 지도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인류는 이제 생명의 비밀에 거의 근접하였으니, DNA칩을 이용해 질병을 진단하고 예방하며, 유전자에 담긴 정보를 풀어 암과 알츠하이머 병 같은 난치병을 치료할 수도 있으며, 인간의 간이나 폐를 돼지나 원숭이에게 키워 다시 인간에게 이식할 수 있다. 인류는 자신을 고통과 불안으로 몰아넣은 질병을 거의 정복할 단계에 이른 것이다. 더 나아가 복제인간을 합성할 수도 있고, 얼굴은 디카프리오, 몸은 마이클 조던, 머리는 아인슈타인 식으로 맞춤아기를 생산할 수도 있다. 기독교식으로 보면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는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불교로 보면 業(karma)의 주재자가 되었다고 착각할 만한 일이다.

유전공학자들의 말대로라면 인간이 업의 질서에 간섭하겠다고 덤비는 꼴인데 그것이 가능한 일이고 그럴 경우 우주 삼라만상의 질서는 어찌 되겠는가? 필시 부처님 손바닥에 놓인 손오공 꼴이 되리라. 그러기에 유전자 공학은 장밋빛 미래만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 공학은 우주 삼라만상의 질서를 깨는 일이며, 인간의 질서에도 근본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우선 인간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희미해진다. 유전자로 마구 인간을 복제하고 半獸半人을 만들고도 사람들은 인간 존재를 존중하고 생명을 존엄한 것으로 여기겠는가? 배아 간세포를 이용해서 실험하다가 필요한 부분만 절단해서 쓰고 나머지를 버린다면 생명체를 죽인 것인가, 아닌가? 실수로 인간의 내장을 달고 있는 돼지를 잡아 순대를 만들어 먹었다면 이는 짐승의 고기를 먹은 것인가, 인육을 먹은 것인가? 이렇게 경계와 구분이 모호해지는데 과연 생명존엄이나 인간 존중의 정신이 깃들이겠는가?

유전자 공학은 더욱 갈등과 불평등을 첨예화하고 사회적 차별을 강화할 수 있고 전체주의로 가는 지평을 연다. 남보다 뛰어나고자 하는 욕구와 이를 바탕으로 열등한 자를 경멸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 유전자공학과 결합할 경우 나치즘의 우생학과 같은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열등한 유전자, 질병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산업시대의 인종, 민족, 성별 이상으로 시험, 면허, 보험, 복지 혜택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차별을 받을 것이다.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자가 엘리트 그룹을 형성하여 혼인이든 아니든 그들끼리 유전자를 교환하면서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자들을 영구히 지배하는 사회가 도래할 수 있다.

선진국과 약소국의 격차와 갈등도 더욱 심화할 것이다. 유전자 지도 자체가 인류의 공동 유산임을 들어 이의 공유를 표명하였지만, 이를 응용한 기술에는 특허를 부여하고 있다. 벌써 셀레라 제노믹스사는 6,500여 건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다. 유전자 공학이 신약개발이나 장기 공급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가치를 지녔기에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는 더욱 심화할 것이다.

인간의 획일화 또한 강화한다. 어머니의 유전자와 아버지의 유전자가 업의 원리에 따라 섞이면서 다양한 개성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 태어나 이들이 다채로운 문화를 창조한다. 쌍둥이마저도 다름을 가지고 태어나며 지문과 홍채도 제각각 달라 이것으로 사람을 식별할 정도이다. 20세기에 다른 육체와 정신을 가진 인간도 쉽게 획일화하였는데 같은 몸과 정신을 가진 인간은 얼마나 더 그럴까?

유전자 공학은 한 예일 뿐이다. 과학기술은 더 이상 구원이 아니라 악으로 나타나고 있다. 로봇 공학은 생산성을 증대하고 위험하거나 불필요한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지만 인간의 노동을 빼앗고 지배할 수 있다. 핵무기는 지금도 언제나 지구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다. 유전자 조작식품은 수십 억 년 간 유지돼 온 지구 사회의 생태계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다. 실험실에서 잘못 합성된 신종 바이러스가 전 인류를 사망시킬 수 있다. 컴퓨터 공학은 개인을 더욱 소외시키고 있으며 인간을 감시하고 관리, 통제하는 시스템을 강화하며 아주 사소한 실수로도 수억 명의 목숨을 앗아갈 위기를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더구나 고도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과학기술은 도구화하여 인간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이데올로기이자 메커니즘으로 전락하였다. 나치주의자들이 유태인 수용소에서 인간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대량으로 죽일 수 있는 방편을 모색할 때, 자본가들이 몰래카메라를 장치하고 전자감응센서를 달아가면서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철저히 통제하여 생산성을 최고로 높이는 방안으로 활용할 때, 국가가 대중들을 조작하고 관리, 통제하는 기제로 이용할 때, 미국이 MD를 강행하여 다른 나라의 도전을 무력화시키고 안으로는 군산복합체를 살찌우고 밖으로는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약소국을 마음대로 수탈하고 유린할 수 있는 교두보로 삼을 때 과학기술은 더 이상 구세주가 아니다. 이제 정치기구와 밀접하게 결합된 과학기술은 인간의 무의식마저 지배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과학운동: 아무리 좋은 것도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신과학운동론자들은 뉴턴의 기계론적 물질관과 데카르트의 心身二元論을 비판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과학기술이 빚은 병폐의 근본 동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세계를 분석적, 환원주의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과학운동은 기계론적 세계관이 파기해버렸던 서구와 비서구의 전통사상을 결합해 대안을 모색한다.

미국의 한 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멸종 위기에 놓인 사슴을 보호하고자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다. 천적인 퓨마를 없애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여 유명한 사냥꾼들을 불러모았다. 천적이 사라지니 민가 가까이에서도 사슴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해 봄 엄청난 숫자로 늘어난 사슴들은 닥치는 대로 식물의 새순을 먹어댔다. 곧 숲은 사라지고 사슴들은 먹이가 없어 굶주려 죽어버렸다.

달과 지구의 인력에는 가까이 있는 화성을 비롯하여 우주에 있는 수조개의 별들과 암흑물질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근대의 과학자들은 다른 것은 무시하고 달과 지구만을 대상으로 삼아 달과 지구 사이의 인력이 얼마라고 자랑스레 내놓았다. 이처럼 분석적으로 부분만을 보는 것이 근대적, 기계론적 세계관이라면 모든 것을 서로 영향을 주고 영향을 맺는 시스템으로 보고 전일적, 유기체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신과학운동이요, 생태적 세계관이다. 사슴을 보호한다면서 사슴을 죽인 것처럼 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을 모두 파괴한다. 생태적 세계관은 사슴과 숲과 퓨마와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사슴과 숲과 퓨마가 적정 규모에서 공존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발전이란 이름으로 실은 자연과 문명의 쇠망을 이끈다면 생태적 세계관은 균형 속에서의 공존을 모색한다. 우주를 역동적이고 나눌 수 없으며 언제나 본질적인 방식으로 관찰자를 포함하는 전체로서 체험하곤 한다(Capra: 1975, 81).

화이트헤드(A.N. Whitehead)의 과정철학으로 보면 자연은 현재라는 시간에 적응하기 위해 움직이는 과정과 형태이다. 자연은 자기 스스로를 조직하는 거대한 생태계(ecosystem), 퓨마와 사슴에서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온 생명들이 고정되고 고립된 것이 아니라 우주의 목적에 따라 서로 소통하고 의존하고 서로를 보완하는 가운데 자신을 창조하고 초월하면서 보다 나은 수준으로 진화해 가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과학의 객관성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며 과학적 활동은 합리적이고 가치중립적(Value-free)이며 과학은 누적적으로 발전한다는 과학관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임을 깊이 깨닫게 된다.

엔트로피 이론은 발전 지상주의나 과학기술만능주의에 경종을 울린다. 사막에 빌딩이 들어서고 길이 바둑판처럼 들어차면 우리를 이를 발전이라, 질서라 불렀다. 그러나 이 빌딩에 난방을 하고 자동차를 달리게 하려면 다른 곳에서 나무를 캐고 석탄과 석유를 가져와 태워야 한다. 한 곳에서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려면 외부에 그보다 더 큰 정도로 엔트로피를 증가해야 한다. 엔트로피 이론을 통해 우리는 자연세계에서 인공적 변화란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불가능한 형태로 바꾸면서 주위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밖에 일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는다. 그러므로 전지구가 경쟁적으로 벌이는 경제성장이란 사용 가능한 자원을 사용 불가능한 쓰레기로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결국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되는 종말로 치닫는 질주일 따름이다. 이처럼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어느 곳에 질서와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다른 곳에 그보다 더 큰 무질서와 쓰레기가 생긴다는 것을 절대진리로 천명한다.

우리는 신과학운동과 엔트로피이론으로부터 두 가지 진실을 발견한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많을수록 무조건 더 좋은 것은 아니다”와 “전체 시스템이 원활하게 순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 안의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길이요 진정한 발전이다”라는. 퓨마와 사슴의 관계에서 보듯 어느 한 부분의 효율만을 극대화하면 이것은 다른 부분의 파괴로 나타난다. 그런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경제구조와 사회구조를 전체 시스템의 차원에서 적정한 규모의 수준으로 조절하여 재편성하여야 한다. 대형 댐을 건설하여 주변의 산과 숲, 공동체를 파괴하고 강물과 거기에 사는 생물들을 죽이고 이를 관리하기 위하여 한국전력과 같은 관료체제를 만들어 유지하기 위하여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면서 생산한 전력의 평균 30%를 낭비하는 것이 전자의 방식일 것이다. 공동체나 주변 자연과 공존하는 마을 댐을 지어 자급자족식으로 전력을 사용하는 것이 후자의 대안일 것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엄청난 쓰레기를 낳았던 것이 전자의 문명이라면 소규모 공동체를 바탕으로 빗물은 냇물로 보내고 생활하수는 자연 정화하여 밭으로 돌리듯 모든 것을 순환체제의 속에 놓는 것 후자의 문명일 터이다.

體는 用을 통해 드러나고 用은 相을 만든다

며칠 전 경주 남산의 불상을 찾았다. 골짜기마다, 바위마다 부처를 새긴 신라인의 불심을 읽어보았다. 용장사 마애여래좌상 앞에 섰다. 부처님께선 구름처럼 덩실 솟아오른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한 채 항마촉지인을 하고서 계셨다. 당당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곱게 흘러내린 승기지와 가사의 옷자락으로 하여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고 두툼한 두 뺨은 보름달과 같은 턱의 곡선을 타고 원융미를 드러낸다. 지긋이 감은 눈, 눈썹을 타고 맵시 있게 흘러내린 코 아래로 꽉 다문 입, 그 입가로 잔잔히 파문처럼 번지는 미소! 말로, 인간이 내는 짓으로는 眞如의 實體에 다다를 수 없음을 알고도 이를 방편으로 삼아 불법을 드러내려 한 신라인의 마음이 가슴에 다가온다. 그들은 돌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돌 속의 부처를 드러낸 것이라는 어느 시인의 표현이 하나도 과장이 아니었다. 산을 내려와서도 그 파문은 연하여 가슴에 밀물져왔다. 이처럼 돌도 佛性을 담고 있는데 생명체야 말하여 무엇하리? 크든 작든 모든 생명체가 業에 따라 빚어지고 서로 緣起되어 있는데 덜 중요한 것은 무엇이며, 업과 연기의 질서를 깨고 생명체를 죽이는 과학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신과학운동은 기존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넘어서서 많은 대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가장 큰 약점은 업과 연기처럼 이를 뒷받침할 철학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 이를 체계화할 사유구조나 원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의 원효 사상에 그것이 숨어 있을까?

《大乘起信論≫ <立義分>에서 馬鳴은 一心을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나누고 진여문에 體大, 생멸문에 用大와 相大를 두어 一心 二門 三大의 체계를 정립하였다. 원효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세계를 구조적, 전일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방편을 열었다.

“만약 常住를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體라 하고, 無常을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생멸하는 것을 相이라 하니 체는 常이요 相은 無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일심이 무명의 연을 따라 변하여 많은 중생심을 일으키지만 그 일심은 항상 스스로 둘이 없는 것이다.…비록 심체가 생멸하나 늘 심체는 상주하여 이는 심체가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는 심체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성질이며 움직임과 머뭄이 같지도 않으면서 다른 것도 없는 성질인 것이다.”(《大乘起信論 別記≫, <解釋分>)

體는 증감은 물론 늘 변함이 없으며 앞에서 나는 것도 뒤에서 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大智慧光明, 自性淸淨心, 常樂我淨의 뜻이 있는 모든 불변을 여읜 것이다. 여래장 중에 한량 없는 性功德의 相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相大의 뜻이며, 또 여래장의 불가사의한 業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用大의 뜻이다. 둘째는 진여가 일으킨 染相을 相이라 이름하고 진여가 일으킨 淨用을 用이라 이름한다.

세계는 원래 하나이나 常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궁극적인 것과 無常하여 이루어지고 찰나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전자가 眞如의 모습인 體이며, 후자는 生滅因緣하는 相과 用이다. 體는 영원불멸한 것이며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의 실체를 나타낸다. 따라서 體는 相과 달리 사물이 드러내고 있는 것을 넘어서서 사물의 실체로 깨달은 것이다. 반면에 세계의 경험되고 드러나 나고 멸하는 것을 相이라 한다. 相은 體가 드러나 生滅因緣하는 바다. 또 세계는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한다. 인간으로 보면 실천이, 진정한 깨달음의 측면에서 보면 자비와 덕을 베푸는 것이 用이다. 따라서 用은 한 사물과 다른 사물과의 관계, 다른 사물에 대하여 작용하고 기능을 한 것이며, 사물이 시공간에서 운동한 것이다.

그럼에도 體用相의 원리는 서구철학처럼 대립적이지 않다. 體用相이 세계의 각각의 모습이나, 모두 一心에 의한 것으로 일심의 세 가지 의미에 불과한 것이다. 원효는 이에 대해, “一心이라 하는 染과 淨을 포괄하는 法은 그 本性이 둘이 아니요, 참되고 참되지 않음에도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一이라 하는 것이다. 이 둘이 아닌 곳에 여러 법이 적중하여 열매를 맺어 허공과 같지 않아 本性이 스스로 신비한 이해력을 갖고 있어 心이라고 한다.…따라서 일심은 일체 世間의 법과 出世間의 법을 포괄한다.”라고 말한다.

우주 삼라만상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참 과학이다

그럼 一心의 體用相을 과학기술과 관련지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갈릴레이나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서 물질의 실체에 좀더 가까이 다다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기존의 본질에 비하여 조금 더 실체에 이른 것뿐이지 물질의 진정한 실체에 접한 것은 아니다. 연구를 진행할수록 새로운 소립자가 계속 발견되어 원자의 구조 또한 달라지고 이에 따라 물리나 천체의 원리가 달라진다. 그러니 지구과학이 앞으로 수만 년 더 발달한다 하더라도 물질의 진정한 실체인 참에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 이처럼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서 보면 누구도 궁극적 진리에 이를 수 없다.

봄날의 산은 나에게 혼돈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것은 취나물이고, 이것은 얼레지라고, 취 중에서도 요것은 개미취요, 요것은 참취며 이것은 곰취고 저것은 미역취라고 가르쳐 주신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다 비슷한 풀일 뿐이다. 나에게는 온통 혼돈이지만 어머니는 그 풀을 이파리 모양과 빛깔, 줄기의 생김 등에 따라 취, 얼레지, 질경이 등으로 가르고, 다시 이것은 날로 먹으며 저것은 못 먹는다고 구분한다. 이렇듯 원래 풀은 하나이지만 우리가 허상이나마 인간의 틀로 범주를 만들어 나누어 놓아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다. 세계의 실체는 원래 하나이지만 우리는 그러면 알 수 없으니 이를 주/객, 본질/현상, 이성/감성 등 둘로 나누어 인식한다. 그러나 실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고 이용하기 위해 그리 나눈 것뿐이다. 분별이요 허상이다. 그러니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이 用이라면 셋을 통하여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體이다.

나무의 실체는 영원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탄소동화작용이나 광합성 작용을 통하여 나무의 실체를 잠시나마 엿본다. 그리고 탄소동화작용이나 광합성 작용이 나무의 형상을 꼴 짓는다. 잎은 햇빛을 충분히 받아들이도록 넓게 벌어지고 바람에 살랑거리며 공기를 내뿜고 열을 발산하도록 부채 모양에서 참새 혀 모양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 형태를 갖는다. 나무는 자신이 서 있는 자연 속에서 두 작용을 가장 수월하게 할 수 있는 형상을 갖는다. 이처럼 體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나 用을 통하여 드러나고 用은 相을 만들고 相은 쌓여 體를 이룬다.

일심의 체용상을 통하여 우리는 현대 과학기술이 빚은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석굴암의 예는 21세기의 과학기술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석굴사(석굴암)의 불상을 부식시키는 습기를 제거하기 위하여 현대과학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지금도 습기 제거기를 돌리고 있으나 그 진동으로 석굴사의 그 아름다운 불상들은 하나 둘 부스러지고 있다. 그러면 천여 년 동안 그것은 어떻게 해풍이 강한 동해 변에 있으면서도 조금의 마모도 허용하지 않았을까?

답은 지하샘이었다. 사람들은 석굴사를 하필 차디찬 샘물이 솟는 곳에 앉힌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동해에서 불어온 습기 많은 해풍은 석굴사에 들어왔다가 샘물로 냉각된 바닥의 돌을 지나면서 이슬을 맺는 것이었다. 지상의 공기는 수분을 빼앗겨 건조해진다. 이러니 본존불을 비롯한 모든 유물들은 자연스레 보존되는 것이다. 엔트로피가 거의 제로의 상태인 방안일 뿐 아니라 완벽한 순환의 체제이다. 8세기의 신라인들이 어찌 현대과학보다 높은 지혜에 도달하였을까? 업과 연기의 원리에 따라 우주 삼라만상의 體, 一心에 도달하려 하였기에 그런 깨달음이 온 것이 아니겠는가?

서양의 과학자들은 나뭇잎을 떼어내 현미경 앞에 놓고 분석하여 이를 생물학이라 내놓는다. 그러나 살아서 생동하면서 숲의 다른 나무, 같은 나무의 다른 잎들과 서로 의존하며 인과의 다발로 맺어졌던 관계에서 떨어져 나와 이미 죽은 나뭇잎 하나가 나무 전체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줄까?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과학이 아니다. 석굴암처럼, 업과 연기의 원리를 알아 그 順理를 따르는 것이 진정 새로운 과학의 길이 아니겠는가? 우주 삼라만상을 인간의 잣대로 억지로 질서화할 것이 아니라 用을 통하여 그 무질서에 가까이 가려해야 21세기의 과학은 실증적 사실을 넘어 진정한 실체에 다다를 것이며 인간과 전 우주가 하나로 공존하는 길을 열 것이 아닐까? 우주 삼라만상의 알 수 없는 體를 用을 통하여 터득하여 그 원리에 부합하는 과학기술을 개발하는 것, 그것이 진정 21세기 과학기술이 지향해야 할 참다운 길이 아니겠는가?

 http://www.sunslife.com/bbs/view.php?id=4004&no=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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