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이커-박성준 강연 : 네이버 블로그
퀘이커-박성준 강연
산지니
2006. 4. 27
박성준 교수 -또다른 통영 선배 | 통영, 東湖文化 2006/04/17
http://blog.naver.com/buttrace/150003532050
총리 지명자 남편분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에 대하여 말들이 많다.
지난 토요일 나의 주례선생님으로부터 박성준 교수가 통영출신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고아로 내버려다 시피 통영에서 지내고, 강원룡 목사가 진행했던 크리스찬 아카데이미에서의
이야기를 간간히 전해져 온다.
아래 이야기에서 확인되는 대로, 사회주의자였던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동 시대 또 다른 통영 선배이다.
아래는 원불교 청년학교에서 밝힌 박성준 교수의 지상녹음.
<애 키울 때>
제가 살다보니까, 눈깜짝 할 사이에 나이가 60살이 되었어요. 별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정신 차리니까 이 나이가 되었어요. 그런데. 이 나이가 되니까 좀 자유로와지는 것이 있기는 해요.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와져요. 이제는 조금은 알겠어요. 제가 요즘 알게 된 것 중에 한가지는 여러분에게 부탁을 받아서 앉아 있지만, 제가 여러분들에게 뭔가 가르칠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오히려 여러분들을 만남으로 해서 제가 얻어갈 수 있는 것이 없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모임에 가면. 자리 타령을 가끔 합니다. 앉는 방식에 대해서요. 교회의 예배 구조가 비복음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초대교회에는 그렇게 앉지 않았을 거예요. 사람들이 어느 자리가 지도자의 자리, 가르치는 자리, 스승의 자리라고 만들어 놓는데 그렇게 하면 서로 소통이 안되요. 교회도, 시민단체도 친목 단체도 어떤 단체나 마찬가지입니다. 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굉장히 권위적인데 테크놀로지를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진 권위와 파워를 많이 느낍니다. 어떤 의사 선생님은 반말하시는데, 몸에 배어서 그렇습니다.
저도 시민단체의 공동대표를 이것 저것 합니다만,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단체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법, 말하는 방식 등이, 그것 때문에 민주화를 위해 애를 쓰고, 그 사람 자신이 그것을 위해서 일하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빼 닮았는지 모릅니다. 몸에 배어 있습니다. 우리가 반대해서 싸우는 것을 그대로 자신이 체화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이 구조를 좀 바꿔놓자고 합니다. 교회의 변화라는 것이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작은 모임들이 뒤집어 엎어야 합니다. 작은 모임들은 간섭을 하지 않잖아요. 우리끼리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마주보고 있고, 여러분끼리는 뒤를 돌아보아야 볼 수 있는 구조는 옳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죠. 제가 절실하게 그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떤 모임에 가도 제가 어디에 가서 앉아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처럼 빙 둘러앉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니면, 제가 여러분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서 앉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평소에 자기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
오늘 생명과 평화 이야기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제가 할 일은 평소에 여러분들이 저런 것에 대해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그것을 듣고 싶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의 역할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야기가 자연적으로 흐름을 만들면서 냇물이 흘러가듯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면, 오늘의 생명과 평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앰프시설로 마이크 써야 되는 곳은 강연을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습니다. 그런 곳은 제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작은 모임에 많은 시간을 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기 육성으로 소리를 지를 필요도 없고, 친구들하고 이야기하듯이 이야기하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라는 것도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알게 되는데도 시간이 꽤 걸리더라구요. 전에는 앞에서 말도 많이 하고 그랬습니다. 잘 모르면서도요.
여러분들과 같이 성가를 부르니까, 다시 향수를 느낍니다만, 저는 요즘 함석헌 선생님이 다니시던 퀘이커교도 모임에 나가고 있습니다. 주일 날 11시쯤 모여서 침묵 예배를 드립니다. 조용하게 앉아서 묵상합니다. 그것도 좋은 점도 있고, 안 좋은 점도 있습니다. 좋은 목사님의 설교를 못 듣고, 함께 성경공부를 못 하고, 찬송가를 못 부르고 합니다. 퀘이커 교도 모임의 특징은 성직자가 없고, 설교가 없고, 찬송을 부르지 않고, 악기를 쓰지 않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과 마주 앉아서 자기 삶을 돌아보고 하는 명상을 하는 방법입니다. 그 나름대로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가끔씩은 여러분과 같은 신앙인들을 만나면, 그런 대로 또 저에게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아도, 의사 선생님들이시니까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계셔서 더 잘 아시겠지만, 생명에 관해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 어제 문화일보인데, 평화철학 강좌 지상 중계라고 해서 박노해 시인이 하는 나눔 문화연구소의 평화 시리즈 강연을 싣고 있습니다. 첫 강의로 서울대 장회익 교수님의 온생명과 삶의 변화라는 강연인데, 여기에 실려있습니다. 이 분이 설명하는 것은 인간은 온생명이라는 태양계를 포함한 생명계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온생명에서 수백만년 진화된 끝에 생명이 탄생하고 인간까지 진화되어 온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인간이 잘못하면 온 생명 자체를 파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천년 이후에 과연 인간이 살아 있을지 아님 비참한 변종으로 살아있을지, 아님 인간이 없어져도 다음의 생명에게 인수인계를 잘 해야하는데, 그 임무를 잘 못할 것 같다는 걱정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 날 대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생태계를 많이 파괴했습니다. 과거에 공산주의도 생산양식 면에서는 대량 생산이고,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니까 닮은 점이 있습니다. 세계화 라고 해서 국경을 없애며, 서구 자본주의 특히 미국식 생활양식을 전지구화 시키는 방식으로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점점 추진되면 인류가 모두 번영을 누리고, 빈곤도 없어지고, 모든 세상의 모순이 다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지만 생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미국식 생산양식, 생활패턴을 전 지구화하는 경우에 예를 들면, 지금 몇 억이 되는 중국이 그런 생활을 한다면 한 개의 지구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고 합니다. 지구가 몇 개 더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지구는 한 개 밖에 없는 것이지, 두 개 세 개가 아니기에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결국 그런 생활양식으로는 장회익 선생이 말하기는 온생명 자체를 파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생명도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안적인 생활양식을 찾게 됩니다.
제가 3년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전 한국에 있을 때는 교회 목회를 하면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한 10년 일했고, 그 전에는 한 10여년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예수쟁이가 되어서 열렬한 전도자로서 전도도 하고, 그러다가 맑스에 빠져서 맑스를 전도하러 다니고 했습니다. 제 학교 뿐만 아니라 이 학교 저 학교로 맑스주의를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그 때 저한테 맑스를 배운 사람들이 한때는 힘들었지만, 공부 열심히 하고 해서 다 성공(?)해 한국 사회의 명사들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런 열광적인 면이 있습니다. 옛날에 저를 알던 사람들은 요즘 보면 깜짝 놀랍니다. 왜 이렇게 기운이 빠졌냐, 왜 평화를 이야기하러 다니냐 그럽니다.
제가 녹색평론을 초장기 때도 읽었는데, 그 때는 그렇게 좋은지 몰랐습니다. 그 때는 맑스주의와 기독교 그리고 아내의 영향을 받아서 감옥에서 공부한 페미니즘 또 생태주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모두 착종하고 있었고, 서로 엉켜있어서 뭐가 뭔지 모르겠고, 이 말 들으며 이것이 그럴 듯하고, 저 말 들으면 저 말이 그럴 듯 하고 그랬습니다. 저 자신이 복잡하고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까 좀 정리가 됩니다. 사실 너무 늦되죠. 지금의 철 든 정도가 한 10년 정도 전 이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벌써 인생을 다 살고 얼마 안 남았어요.
최근에 장회익 선생님이 온생명을 살리려면, 생활패턴과 소비 문화를 바꾸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하다보면, 헬렌 스콧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이라는 책이 있는데,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그 책을 읽었는데, 한국에 오니까 있더라구요. 전에는 저기서 접하고 나면 이쪽에서 한참 있다가 오는데, 요즘은 저쪽에서 접하고 나서 비행기 타고 오면 바로 여기에도 있어요. 동시대예요. 그런데 다른 것은 저 쪽에는 이미 그 내용을 소화해서 일상으로 삶의 내용으로 바꾸어서 소박하게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닐도 씻어서 여러 번 쓰고, 랩도 한 번 쓰고 버리지 않고, 화장실에서도 바로 물 내리지 않고, 몇 번만에 물 내리고, 설거지 마지막 물도 버리지 않고 다음 설거지 때 쓰는 등의 생활이 몸에 베어 있더라구요. 좀 불편해도 냉장고, 세탁기, TV 등도 그대로 씁니다. 우리는 새 것이 나오면 바로 바꾸기도 하잖아요. 그런 것들이 몸에 베어 있고, 그렇게 해서 절약한 것을 어려운 나라를 돕는다거나, 평화를 위해서 쓸 수 있게 한다거나 합니다. 그런 생활 스타일을 보고 느끼고 하며 돌아왔습니다.
제가 생명, 평화로 여러분을 만나게 되었는가를 설명을 좀 하자면, 과거에는 맑시스트였고, 그것 때문에 감옥살이도 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제가 여섯 살에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고, 그 다음 해에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미군정기였죠. 그 때 서울에서 살았는데, 저희 부모님은 일제시대 때 감옥을 경험하신 분들이셨습니다. 미군정 때는 야간에 급습해서 저희 부모님을 연행해 가고, 우리 집에 머무르면서 우리 집에 방문하는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가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5학년에 한국전쟁이 났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나기 두해 전에, 국민학교 3학년, 9살 때인데, 미군정기가 막 끝나갈 때였죠. 그 때 저희 부모님이 저와 제 동생을 떼어서 고향인 충무 통영에 보냈습니다. 가족들은 다 서울에 살고 있고요. 그 때 이후로 가족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저와 동생은 고아가 되었죠. 제 동생은 제가 감옥살이하는 동안에 못 배우고, 형도 감옥에 가고 해서. 제가 동생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습니다. 한 10 여년 전에 술을 먹고 길을 건너다가 트럭에 치여서 죽었습니다. 처가 쪽은 형제들이 많지만, 저희 쪽으로 는 제가 외톨이입니다. 제가 누구보다도 어떻게 보면 한이 많은 사람입니다. 또 저희 어머님이 가마솥에 물이 펄펄 끓듯이 끓는 사람이었는데, 그 기질을 물려받았던 것 같습니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저에게 패스포트를 주었습니다. 물론 제가 한국신학연구소에 있을 때 열흘 짜리 패스포트를 네 번 주어서, 돌아오면 반납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가 5년 짜리를 주더라구요. 그래서 받자마자 한국을 떠났다가 2000년에 돌아왔습니다. 제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어디에서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고아가 되어서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고생 참 많이 했습니다. 많이 굶주렸고요,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부를 하려고 참 많이 발버둥쳤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오늘 할 시간은 없네요. 그래서 저 자신, 제 안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제 안에 평화가 없어서 갈등이 참 많았습니다. 사실 예수를 편안하게 믿는 사람들은 복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미국이 하는 것을 보세요. 기독교적인 하나의 현상입니다. 십자군 전쟁부터 내려오는. 그런 것을 생각하면 기독교인으로서 평화를 누린다는 것은 뭔가 좀 그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그런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어쩌다가 크리스챤이 되어서, 크리스챤이라는 것을 자기 안에서 스스로 소화시키고, 평화를 얻으려고 감옥 안에서도 갈등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평화가 오지 않더라구요. 그러니까 자기 안에 이야기를 묻어두고, 마음의 평안이 없고 그러니까 제가 한 번도 활짝 웃어보지 못 했습니다. 한번도. 남들이 아주 아무런 뒤가 없이 환하게 웃는 것을 보면 저는 눈물이 났습니다. 너무 부러워서요. 저렇게도 웃을 수 있구나. CCC 그 젊은 사람들하고 수양회에 갔는데, 밤 하늘에 별이 수를 놓아 꽃밭을 이루고 있고, 땅에서는 젊은 선남선녀들이 까르륵거리며 웃고 있는데, 저는 정말 속으로 울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자기 속에 있는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을 떠난 것입니다. 패스포트를 딱 쥐자마자.
그리고는 일본으로 해서 미국을 거쳐서 6년만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 때 제가, 오늘 나누어드린 '움직이는 학교'를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우연히 펜들 힐 이라는 곳에 가게되었는데, 거기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 300년 된 Divinity Center입니다. 가족들이 일년에 한 번씩 다녀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한달에 일주일씩에 머물다 가기도 하고 그런 곳입니다. 평화와 사회정의를 위해서 헌신적인 활동을 하는 NGO 활동가들, 라틴아메리카에서나 팔레스타인, 코소보 등에서 지내는 분들이 한 6개월씩 일을 하다가 잠시 쉬러 펜들 힐에 옵니다. 펜들 힐이 퀘이커의 명상센타 같은 곳인데. 매일 아침 30분씩 침묵의 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지만, 거기서 2년 동안 매일 아침, 저녁으로 경험하게 되는데, 침묵 속에서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가끔씩 일어나서 증언을 하기도 하고, 퀘이커의 방식은 아주 짧게 2분여 정도에 합니다. 굉장히 말을 갈무리하고 갈무리하고 해서 압축된 감동적인 시같이 표현합니다. 처음에는 영어가 서툴러서 잘 못 알아듣고, 하지도 못 했는데. 조금씩 영어가 되면서 그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제가 그 사람들의 부탁으로 처음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 시간 반 정도에 걸쳐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끄집어 내서 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그것도 서투른 영어로 하느라고 고생을 했는지...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한 것이 저에게 큰 힘이 되었고 어떤 변화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하얀 백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고도 막 싸우게 되잖아요. 예배라는 것이 은혜롭지 않고, 막 싸우게 되요. 그런데, 여기는 침묵으로 하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기를 내 맡기고 휴식을 취하다 보면, 별별 소리가 다 들립니다. 내면의 소리도 들리고, 자기 살아 온 소리도 들리고, 새나 곤충들의 소리, 바람 소리, 멀리 차 소리 등 안 들리던 소리가 다 들립니다. 귀가 섬세해 지면서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거울 앞을 지나는데, 왠 사람이 활짝 순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봤더니 '저' 였습니다. 그래서 '야, 박성준 너도 웃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귀국을 준비하면서 나도 이제 빈손은 아니니까 무언가 선물을 준비하자는 생각을 해서 구상한 것이 움직이는 학교입니다.
움직이는 학교는 경청의 학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기 보다는 자기가 하려고 하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노래도 그렇고, 음식도 먹어도 그렇고, 책을 읽어도 그렇고 그렇습니다. 제가 드린 거룩한 책읽기라는 것도 그래서 드렸는데, 경청의 방법으로 어떻게 책을 같이 읽을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읽은 글에서 예언자적인 경청(prophecy listening)은 예언자적 말하기(prophecy speaking)에 못지 않게 나를,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말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만나게 되니까, 뜨거운 것을 확 잡은 것처럼 움찔 놀라게 되더라구요. 제가 살아온 것에 비추어 보면, prophecy speaking은 아주 많이 접합니다. 각 집회도, 국회도 그렇고, 평화를 위한 시위에서도 다 그 방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prophecy listening은 경험하지 못했어요. 교회도 그렇고, 시민단체에서도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prophecy listening과 speaking이 서로 잘 조화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런 모임의 방법으로 구상한 것이 움직이는 학교입니다. 움직이는 학교는 작은 모임에서 만나고 서로 소통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선물이라고 3년 전에 한국에 들고 온 것입니다. 이것을 평화운동이라고 생각하고 하고 있습니다.
녹색평론의 이야기는, 결국은 자본주의적인 세계화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삶의 양식을 다 받아들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는 지구에 미래가 없고, 생명이 없고, 이것은 해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씩 쓰고, 덜 공해를 만들고, 더 정신적으로 맑아지고, 마음이 더 맑고, 기쁨이 차게 되고, 서로 소통이 잘 되고, 가르치기보다는 배우려고 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눈을 맞추고, 서로 양보하고 나누어주면서 우리가 조금씩 가난해 지고, 사회가 조금씩 변화되는 방향을 녹색평론에서 말하고 있더라구요. 최근에 WTO 체결에 반대하는 농민운동가의 자결이 있었는데, 농업, 농민 문제를 자본주의화 방향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상당히 중요합니다. 저는 이제야 좀 알았습니다. 한살림 같은 곳에서 도시 한 가구당 유기농으로 생산하는 쌀 한말 사기 운동이 있고, 더 나가서 1년에 쌀 한가마를 산다고 60가구가 약속하면 60가마인데, 그러면 귀농한 한 가정이 자립할 수 있습니다. 교인이 600명인 교회는 귀농하신 분 여섯 가정이 자립할 수 있습니다. 식량 무기화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선적으로는 그 땅에서 난 것을 먹어야 건강해진다고 합니다. 요즘 아토피를 가진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고, 학생들이 점점 더 참을성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부모들이 아이들을 잘못 키우 것이 아니라, 아이들 체질이 바뀌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체질은 먹거리 때문입니다. 오염된 식품, 인스턴트 식품 때문에 체질이 바뀌어서 집중력이 떨어지고 학습능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애아 출산율도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세계화가 되어도 먹거리만은 WTO의 개방에 맡기지 않고 그 땅에서 나는 것을 먹게끔 허용하는 세계화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운동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녹색평론 등에서 관련된 내용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평화 문제가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 이라크 파병 문제가 있습니다. 911테러가 저기 태평양 건너에서 생긴 문제인데, 바로 우리의 문제가 됩니다. 우리 젊은이들을 파병하게 되잖아요. 며칠 전 KBS에서 월남전 참전 기념 프로가 했는데, 그 때 유행하던 노래를 들려주면서 당시에 대형 군함를 타고 손을 흔들며 참전하러 가는 모습을 방영하더라구요. 그것이 반복되게 생겼어요. 세계의 문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의 문제가 남의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한반도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되고 세계 평화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데, 이렇게 작게 모이는 이런 모임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한 공동체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지구 공동체, 또 장회익 선생님처럼 태양계까지 포함한 공동체입니다. 북한 핵문제, 한반도 전쟁 위기 문제 이런 것도 여기 모인 분들의 문제로 여겨,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같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움직이는 학교에서처럼 한바퀴 돌면서 함께 이야기 해 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1분 이내의 짧은 발언을 하시면 됩니다. 말을 꼭 안 해도 됩니다. 말은 안 하는 것과 하는 것이 저희 움직이는 학교에서는 같습니다. 말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잘 하려고 생각하다가 진실이 세어 나갑니다. 경쟁적으로 논리를 세우려고 하고, 설득시키려는 부담에서 벗어나시면 됩니다. 말은 진실을 담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지, 말을 하기 위해서 진실도 없는데 일부러 만들어 내지도 말아야 합니다. 말이 잘 안되서 중간에 그만두어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뭘을 말할까 생각하지도 마세요. 자기 차례가 돌아오면 무얼 말할까 생각하느라고 다른 사람의 말을 안 듣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희 움직학교에서는 나이, 성별, 직업 등에 관계없이 '-- 씨' 라고 부르는데, 해방감도 느껴지기도 하고 그럽니다. 오늘은 처음이니까 '--님' 이라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