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08

적과 나의 경계를 넘어서: 인드라망세계관으로 보는 적과 나 - 에큐메니안

적과 나의 경계를 넘어서: 인드라망세계관으로 보는 적과 나 - 에큐메니안
적과 나의 경계를 넘어서: 인드라망세계관으로 보는 적과 나적의 계보학⑪
이명호(인드라망생명공동체 인드라망연구소) | 승인 2024.07.03 04:31댓글2


▲ 이명호 연구원


연기(緣起)법을 핵심 교리로 하는 불교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그물’에 비유한다. 『화엄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인도 토착신인 제석천(인드라신)이 머무는 궁전 위에는 그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사방으로 끝없는 이 그물의 모든 그물코에는 보배구슬이 달려 있다. 이 보배구슬에 다른 모든 구슬이 비치고 그 구슬은 동시에 다른 모든 구슬에 비춰진다. 그 구슬에 비춰진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다시 다른 모든 구슬에 거듭 비춰진다.

관계의 이어짐이 끝없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펼쳐진다. 구슬들은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고 서로서로 투영을 받아들인다. 이처럼 인드라궁에 있는 그물(인드라망)의 구슬들이 서로서로 비추어 끝이 없는 것처럼 세계의 모든 현상과 존재들도 중중무진하게 관계를 맺으며 연기하고 있다는 인식이 바로 불교의 인드라망세계관이다. 인간의 구슬은 자연의 구슬에 투영되고 자연의 구슬은 인간의 구슬에 투영된다. 나는 너에게 투영되고, 너는 나에게 투영된다.

우주에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모든 것은 그물코에 달려 있는 구슬처럼 중중무진의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서로 의지하고 있고, 서로서로 영향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존재한다. 본래부터 하나로 분리된 개체로서 나[我]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무아(無我)로, 그리고 무아들의 관계 및 연결로 이어진다.

너와 나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에게만 편안한 일이나 좋은 일은 가능하지 않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모두 연결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남의 고통을 모른체 할 수 있을까? 불교의 문구로 이야기하면, 천지는 나와 한 뿌리, 만물은 나와 한 몸(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1)이기에,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고통을 대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보살은 ‘중생이 아프며, 나도 아프다’라고 이야기하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성불을 늦춘다. 모든 불교인이 보살의 삶을, 보살행의 실천을 목표로 하는 이유이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등을 향하는, 즉 다른 존재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해하고 소통하는 보살행, 혹은 자비행을 대부분 사람이 큰 저항 없이 실천한다. 나의 구슬에 비치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타인의 고통에 자신도 어느 정도 기여했음을 인정하기도 한다. 소위, 공업(共業)의 개념을 논리적,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고, 고통의 감소 혹은 해소를 위해 기꺼이 노력한다.

인드라망세계관에 따라 연기법을 철저하게 논리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고통을 대하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향하는 우리의 자세는 ‘적’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나의 구슬에 비치는 사람들은 이웃, 친한 사람, 동료, 선한 사람뿐만 아니다. 이해관계가 상충하여 혹은 가치가 달라서 대립하는 사람들, 하나의 목표를 두고 경쟁하는 사람들, 여러 이유에서 다투는 사람이나 집단도 나의 구슬에 비치고 있다. 그들과도 나는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 특정한 종교적 세계관을 벗어나더라도 세상은 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서로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 ⓒGetty Images


틱낫한 스님은 <부디 나를 참이름으로 불러다오>라는 시에서 ‘작은 배로 조국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가 해적한테 겁탈당하고 푸른 바다에 몸을 던진 열두 살 소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사람’도 ‘나’이고, ‘열두 살 소녀를 겁탈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해적’도 ‘막강한 권력을 움켜잡은 공산당 정치국 요원’도 ‘나’라고 하였다. 내가 일하고 있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도법스님도 불교 내 진보 진영에서 지지받지 못하는 총무원장 체제에서 소임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평소 지론인 ‘화쟁’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소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고통받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마음과 재산, 시간을 기꺼이 내놓는 사람들도 자신과 대립, 투쟁하는 사람들, 그래서 적으로 규정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두 스님 모두 세상의 범부들에게 질타와 지지 철회, 비판을 받았다.

우리는 적과 나를 구분하고, 나는 선이요 적은 악이라고 분별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이는 적은 곧 나이며, 나도 곧 적이라는 연기론적 사유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인드라망세계관에서는 선도 악도 연기(緣起)되어진 것이고, 그와 연관된 적과 나도 연기된 존재이다. 소녀와 해적, 정치국 요원과 수용소의 수용자, 총무원장과 도법스님, 적과 나 모두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상호연결되어 의존하는 관계이다.

나와 너는 분리되어 있다는 전도몽상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일반인들의 노력이 바로 이 지점에서는 중지된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었던 무경계의 사유가 적에게는, 나와 가치가 다른 사람/집단에게는, 대립하고 투쟁하는 사람/집단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나와 너를 분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나와 그들을 분리하는 개체론적 사고가 지속된다. 나는 그들과 격리된 선한 세계에 존재하고, 적들은 나와 아무 연관이 없는 악한 세계에 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있다.

인드라망세계관의 본질은 관계의 이어짐이며 관계를 통한 소통이다. 일반적으로 소통을 위해서는 이해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해는 적과 나의 관계가 끊어져 있음을 인정하고 끊어진 관계를 복원하려는 노력 이후에나 가능하다. 지금 당장은 깊은 심연을 넘어설, 분리된 두 세계를 이어줄 다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은 너에게도 나에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 또는 조건에 있다. 적을 제거한다고 지금의 상황이, 문제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직면해 있는 문제 혹은 실상을 그대로 들여다볼 용기가 필요하다. <나를 해체해다오>라는 시에서 언급된 틱낫한 스님의 당부는 바로 이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지혜를 말하는 듯 하다.

“당신들이 나를 돌보려면 / 많은 인내심과 냉정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 나는 알고 있다. / 나는 또한 당신들 안에도 / 해체시킬 폭탄이 있음을 안다. / 그러니 왜 우리는 서로를 돕지 않는가?”

미주
(1) 『조론( 肇論)』 「열반무명론(涅槃無明論)」


이명호(인드라망생명공동체 인드라망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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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 신이 사는 궁전 지붕에는 그물이 드리워져 있고, 각 그물코마다 영롱한 구슬이 달려 있답니다. 그 구슬이 어찌나 영롱한지 작은 구슬이 전 우주를 비추고, 다른 구슬이 비춘 우주를 다시 비춰냅니다. 이 장면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서로 겹치고 겹침이 끝없이 계속되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세계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비유입니다.
이명호 박사가 쓴 "적의 계보학"(11)에서는,
'적'은 수술하듯 도려내는 방식으로 극복되기 보다는,
끝없이 이어지는 관계의 논리에 대한 통찰과,
적과 나를 연결지을 수 있는 심층에 대한 지혜,
그것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물론 상대성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을 그냥 잊고 넘어가라는 얘기는 아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