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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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으로 사고하며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의 허무함과 우울
-브라이언 그린, <엔드 어브 타임>을 읽고
우리시대 일급의 과학자, 그것도 인문학적 교양이 넘치는 저자가 이 세상의 시작과 끝, 존재의 의미에 대해 숙고한 결과물을 펼쳐냈다. 그는 컬럼비아대학 물리학과와 수학과 교수이자 우주론에서 중요한 업적을 쌓은 브라이언 그린.
그 명성만큼 현존하는 과학적 성과물을 거의 다 검토하고 철저하게 과학적 사고를 밀고 나간게 보인다. 그래서 문제다. 그와의 대화는 지적으로 풍성한 향연 속에 즐겁지만 책을 덮고 홀로 남겨진 지금 유물론적 존재론과 환원주의적 방법론을 소화시키지 못해 괴롭다.
이 책에서 그는 우주의 역사를 이끄는 두 주인공으로 열역학제2법칙(엔트로피증가법칙), 그 중에서도 엔트로피2단계과정과 진화론을 내세우면서 우주의 기원과 끝, 인간존재의 구조와 의미를 이끌어냈다.
<열역학제2법칙과 엔트로피의 춤>
열역학제2법칙에 따르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입자단계이든 거대 천체수준이든, 물질이든 에너지든 간에 우주 모든 만물은 소모되고, 퇴화하고, 쇠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특수한 상황에서 특정 물리계(시스템)가 형성되면 계 내의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엔트로피 2단계 과정’이라고 한다. 물리계에 흐르는 에너지는 엔트로피를 외부로 방출하면서 새 질서를 유지하고, 심지어는 질서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38억년전쯤 모종의 대 사건으로 우주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빅뱅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균일한 인플라톤장으로 채워져있던 미세영역(지름이 10억X10억X10억분의 1미터)에서 에너지가 분해되어 밀어내는 중력이 작동을 멈췄고, 그 일대의 공간이 입자로 채워지면서 가장 단순한 원자핵이 합성되기 시작했다.
그 후 양자요동에 의해 이 영역의 밀도가 주변보다 더 높아졌고, 입자들이 강한 중력에 이끌려 서서히 한 곳으로 뭉치면서 엔트로피 제2단계과정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질서해지는 우주에서 별과 행성, 인간과 같은 질서 정연한 구조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엔트로피 2단계 과정은 열역학제2법칙 내에서 진행된다. 하나의 물리계 안에서 엔트로피는 감소할 수도 있지만 주변환경의 엔트로피 증가량이 내부의 감소량보다 많기 때문에, 엔트로피의 총량은 항상 증가하는 것이다.
그 엔트로피가 계의 안팎에서 증가와 감소의 춤을 추면서 물질과 생명이 생겨났다.
<진화의 두가지 국면, 분자진화와 생물진화>
빅뱅 후 떠도는 입자구름이 충분히 무거울 경우 중력이 중심부를 안으로 짓눌러서 고밀도-초고온 상태가 되고 가장자리에 있는 물질은 밀도가 감소하면서 차가워지는 현상(엔트로피 2단계과정)이 계속되다보면 결국 중심부의 온도가 임계값을 초과하여 핵융합이 시작된다.
별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핵융합반응과 별들 사이의 충돌을 통해 무거운 원자가 만들어졌고, 이들은 한창 형성되고 있는 행성에 비처럼 쏟아져내렸다.
우리 지구행성에도 안착한 원소들은 분자진화론에 입각하여 점점 더 복잡한 분자로 진화하다가 마침내 자기복제가 가능한 분자가 탄생했고, 무작위로 일어난 변이가 복제를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
엔트로피2단계 과정은 작은 규모의 입자집단보다는 더 큰 규모의 입자집단에 더 유리하게 작용한다. 수억년에 이르는 자연선택에 따라 특정분자계는 더 큰 규모의 입자집단을 형성해왔고 드디어 분자의 복제능력을 획득하여 생명체로 가는 길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40억년젼 정보와 에너지를 추출하고, 저장하고, 전파할 수 있는 분자(원시생명체)가 탄생했다. 단 1개의 세포도 수조개의 원자로 이루어졌으며, 생명은 수많은 세포들(사람의 몸은 30~50조의 세포로 이루어짐)의 집단거동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직은 기본입자들이 특별한 형태로 배열되었을 때 생명이 가동되는 이유는 오리무중이지만 일단 생명체가 탄생한 뒤의 상황은 진화론으로 다 설명이 될 수 있다.
생명활동은 물리법칙으로 완벽하게 설명되는 세포내 분자의 운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포에 담긴 정보가 추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정보는 세포안에서 지시하고 실행하도록 강제하는 행동지침서가 아니라 분자의 배열자체에 들어있다.
분자는 이 배열에 따라 서로 부딪히거나 상호작용을 교환하면서 성장, 치료, 번식과 같은 세포관련 업무를 수행한다. 세포안에 포함된 분자는 의도나 목적 없이 완전히 수동적인 무생물이라 해도 물리법칙에 따라 고도로 특화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지금까지 수집된 증거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의 기원은 40억년전에 나타난 이 최초의 단세포생물로 수렴된다. 즉 지구생명체는 단 하나의 조상세포의 직계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 이유는 세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과정인 정보와 에너지 처리방식, 즉 정보와 에너지를 저장하고 활용하는 방식이 모든 생명체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세포가 수행하는 기능의 대부분은 화학반응을 제어, 촉진하고 중요한 물질을 운반하고, 세포의 형태와 움직임을 제어하는 단백질 분자를 통해 실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 단백질분자를 합성하는 방식이 모든 생명체 속에 DNA를 통해 암호화되어있다.
생명이 에너지를 처리하는 과정의 핵심인 ‘산화환원반응’ 역시 식물과 동물에서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동물과 식물의 차이점은 ‘전자의 출처’뿐이다.
동물은 전자를 음식에서 얻고, 식물은 물에서 얻는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가 에너지를 얻는 과정은 전가가 점프하면서 진행되는 일련의 산화환원반응으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 어려운 문제>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의식이다. 두뇌의 역학관계는 접근이 쉽지만 인간의 의식은 과학적 접근이 어렵다. 최초로 지구상에 나타난 원시생명체는 오랜 진화를 거치면서 구조가 점차 정교해지다가 드디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의식을 지닌 특수한 입자집단, 인간생명체가 등장했다. 이것이 진화론적인 인간인데, 진화에도 목적이 없듯이 입자에게도 목적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주관적 세계를 경험할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한다는 확실한 느낌을 갖고 있다. 이 의식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데카르트도 그 확실한 느낌에 기초해서 생각을 전개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다른 모든 것은 환상일수 있지만 사고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객관세계와 주관적 내면세계는 분리되었다는 관점에 입각한 말이다.
그러나 20세기 미국의 작가 앰브로즈 비어스는 데카르트의 언명을 이렇게 뒤틀었다.
“나는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물질은 의식을 창출하고 자율적인 의식은 물질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두뇌와 몸을 구성하는 물질에 물리법칙이 적용된 결과일 따름이라는 생각이 읽힌다.
결정론적인 고전물리학과 달리 양자물리학의 방정식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않고 ‘발생할 확률’만을 예측한다. 그러면 양자물리학은 고전물리학과 달리 결정론을 벗어나 인간의 선택의지를 긍정하는 쪽으로 가는 것일까?
브라이언 그린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양자역학은 예견되는 미래가 많다는 것일뿐 수학체계는 결정론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둘 사이의 차이점이라곤 이론에서 예측된 결과의 ‘가짓수’일뿐이다. 두 개다 물리법칙에 끈이 묶인 신세는 똑같기 때문에 자유의지에 관한한 두 가지는 별 차이가 없다.
우리는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 작용하는 법칙을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이 자유의지를 발휘한 결과라고 믿는다. 인간의 무딘 감각으로는 입자세계에 적용되는 법칙을 느낄 수 없을 뿐 자유의지의 산물처럼 보이는 생각과 행동은 물리법칙의 결과일뿐이다.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절대적인 것도 없다. 모든 생명은 일시적이며 우리가 애써 이해한 내용도 언젠가는 모두 사라질 것이다. 인간의 운명도 마찬가지이다.
아,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물질에 불과하며 죽으면 원소로 돌아간다는 유물론적 결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브라이언 그린은 입자가 진화하여 세상을 인식하고 자기존재를 느끼는 것의 경이와 아름다움에 만족하라고 했지만, 이 책을 읽은 후 엄습한 우울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과학적 사고와 결과물이라는 것은 지속적인 연구와 수정작업을 거치면서 객관적 진실에 다가가고 있는 과정의 산물일뿐 아니던가. 저자의 결론은 현재의 과학수준에서 지적정직성을 가지고 불가피하게 도출할 수 밖에 없는 결론이지만 동시에 이 시대의 한계내에 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과학적 결론과 사고는 브라이언 그린의 말마따나 “한 세대에 진리로 통하던 것이 다음 세대에 완전히 폐기될 수도 있고, 더 큰 밑그림의 일부로 판명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책의 결론은 뒤집어질 수 없는 최종심급의 지식이 아니고 꼭 받아들여야 할 필요도 없다.
브라이언 그린의 과학논리에 반박할 수준이 안되는 나는 이 시대 물리학의 한계를 넘는 더 진전된 과학적 가능성과 철학적 종교적 진리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다. 브라이언 그린 또한 “겉보기에 3차원이 분명한 우리의 현실이 더 높은 차원의 단면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가.
스스로를 이렇게 다독였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안에 쌓인 우울과 허무는 제대로 극복이 되질 않는다(대학시절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할 때 느낀 그 우울과 허무감이다). 해독제가 필요하다.
이 책에 따르면 양자물리학의 태두 슈뢰딩거는 1943년 유명한 강연,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마치면서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마쳤다고 한다. “우리는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영원한 존재의 일부이며, 우리가 발휘하는 자유의지에는 신성한 힘이 반영되어있다. “
슈뢰딩거는 브라이언그린의 스승이면서 브라이언그린과는 다른 관점으로 과학을 바라본 사람이다. 과학자로 인해 존재의 무상함과 허무함을 얻었으니 과학자에게서 그 치유책을 찾아보려 한다(아는게 독이다).
브라이언 그린의 <멀티유니버스>를 사놓았지만, 이 다음 읽을 책으로는 슈뢰딩거를 다시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