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i Ja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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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당시로서는 극소수인 이른바 운동권 서클이었고 그녀는 자신의 학교에서 기대와 주목을 받아 차세대 리더감으로 키우고 있는 후배였다. 어느 우리들의 모임날에 그녀가 새로운 노래를 배웠다고 우리에게 말하면서 그 노래를 소개하고 바로 따라서 같이 불렀다. 이미 아침이슬 등으로 우리에게 작은 영웅인 김민기의 또 새로운 노래였는데 제목은 <꽃피우는 아이>였다.
아침이슬 비슷한 장중하고 조금 어두운 음조이지만 이땅의 맑고 순결하고 의로운 소년과 소녀- 아이를 사랑하고 기다리는 좋은 내용의 노랫말이 특히 좋았다. 김민기는 문단에 소속되지않은 시인이며 음유가객이었다. 훗날 운동권 여성대표로 다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그녀의 선배는 또 어느 날 우리 모임에 <바람과 나>라는 노래를 소개했다. 그것은 한국의 최초의 히피로 불리우기도 한 한대수의 노래였는데 매우 장자적이고 히피적인 냄새도 났다. 좋은 노래였다.
한대수의 '끝 끝없는 바람..'의 이 노래와 김민기의 <저부는 바람>도 다른 뉴앙스이지만 바람의 제목이며 노래였다. 한대수가 히피의 자유로움과 해방적 몸짓으로 격렬하게 노래하는 <물좀 주소>와 같은 노래도 너무 좋았지만 역사의식은 없는 한대수와는 차원이 다른 노래가 김민기의 노래였고 그의 삶이었다. 그래서 김민기는 비록 전공 또한 원래는 미술학도였으나 크게 우리의 한 시대와 역사와 많은 이들의 슬픔과 꿈과 비원을 담은 노래와 시와 커다란 가수 이상의 인간으로 우리를 껴안으며 뜨겁게 살았다.
우리 모두는 김민기 그에게 마땅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커다란 빚을 졌다고도 생각된다. 천생적으로 겸손한 <뒷것>과에 속하는 김민기 본인은 얼굴 붉히며 손사래를 치며 숨으려고 하겠지만 말이다. 아마도 이점이 누구보다도 한 시대 우리 문화운동에서 친족이상의 형과 아우로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김지하와 김민기의 차이가 아닐까도 생각한다. 시인 김지하는 물론 섬세하고 깊은 시인이었으나 어떤 존재론과 체질로서는 에너지와 자존심이 대단한 대형 수컷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 시대의 엄청난 고난과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는 우리의 영웅이 되었으나 시대와 흐름이 바꾸어지면서 조금은 색이 바래고 조명이 약한 상황에서 그는 결과적으로 매우 쓸쓸하고도 아픈 자신의 내면과 존재의 상처가 깊었다고 보인다. 물론 그가 시대를 초월하여 앞서간 부분도 있었겠으나 한면에서는 "바닥을 기라"는 그의 스스로 우주의 좁쌀 하나로 일컫은 스승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가르침에서는 그는 <체질상 앞것>으로 벗어난 부분도 컸을 것이다.
그에 반하여 김민기는 매우 다행스럽게 한시대의 분명한 아이콘과 영웅의 존재와 모습이었지만 소위 전성기와 젊음이 퇴조한 많은 시간에도 그는 영원한 <뒷것>으로 철저히 살면서 생을 아름답게 살다갔다. 못내 이룬 학전과 그의 작업과 꿈이었던 아이들을 위한 노래와 많은 문화운동의 과제들을 온전히 꽃피우지 못한 아쉬움 속에 말이다.
이 부분에서는 그는 비슷하게 떠오르는 권정생 선생을 떠올리게 한다. 동화작가와 아동문학에서 이 땅의 최고의 위치와 영향력을 끼친 권정생은 그러나 평생을 가장 누추한 모습으로 살다갔다. 나 자신도 생전에 그와 친한 관계였던 북산 최목사와 더불어 안동의 조탑리에 권선생님을 찾아가뵌 일은 지금도 그 감동과 여운이 또렷하고 깊다. 나중에 사망하고 나신 후에 그가 남긴 재산은 결코 적지 아니한 큰 규모였고 그는 그 재산을 남북한의 소년 소녀들을 위해 써달라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그렇게 소졸하다 못해 누추한 상황과 모습으로 살지 않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어쩌면 그가 사랑했던 어머니와 더불어 일본의 오사카 밑바닥과 천형의 병고를 짊어지고 젊은 날 핍절하고 고통스러웠던 그의 삶을 살았던 그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자 그는 그렇게 바닥을 기면서 평생을 살고 생을 마감했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데 행태와 류는 조금 차이가 나지만 본질에서는 이번의 김민기가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보인 행태들이나 죽음에 임해서도 그의 장례에서 일체의 조위금이나 화환 따위를 받지 말라고 한 것들도 정말 김민기 다운 면모라고 생각되어진다. 보나마나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이들의 다수는 서민대중이며 그의 문화가족과 후배들일터인데 물론 그의 품과 학전을 통해서 명성을 누리고 돈도 스타들로 많이 벌어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않기도 하지만 아직도 어렵게 살아가는 다수의 소위 딴따라ㅡ참된 문화의 꿈과 삶과 운동으로 살아가는 동료나 후배들의 가난한 삶들을 그는 충분히 감안하고 배려했을 것이다.
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김민기에게 많은 빚을 졌다. 나의 젊은날의 절친에게서 그의 노래 아침이슬과 스텐카라친과 백치 아다다를 듣고 그것들은 한 시대 나의 노래가 되었다. 그것들은 노래 이상의 나의 젊은 날의 몸부림이자 삶이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 날의 나의 친구도 떠나가버렸으나 나는 김민기의 노래들을 계속 사랑하면서 나의 삶도 치열하며 심화될 수 있었다.
감성적으로 나 자신은 김민기의 <아하 누가>라는 노래가 참 좋았다. 그 멜로디도 그렇고 노랫말도 너무도 존재론적이며 시적이었다. 고향 전주의 다방에서 디스크로 클라리넷과 기타가 반주로 나오는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춤을 추고 싶어했다.
나의 운동권의 동지이자 마음의 절친이 된 고 김경남 목사의 십팔번은 김민기의 <저 부는 바람>이었다. 그는 사수로 서울법대를 들어갔고 그 반가운 소식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의 장남이자 가장이 되었으나 출세길이 아닌 운동권의 운명을 선택하고 그는 고난의 삶을 살고 민중목자의 삶을 살가다 갔고 몇년전 망월동 제이묘역에 안장되어있다. 나는 그의 묘역에서 가슴으로 김민기의 노래를 불러주려고 한다.
그의 푸른 날에 애절하게 가슴으로 부르던 애모의 노래가 <저 부는 바람>이었다. 당시에 그는 박형규 목사님의 제일교회 대학생부 회장이 되어 지내는 상황에서 연대사학과를 다니던 청순한 부회장을 사랑하였다. 그런데 그 청순한 주인공은 우리의 김경남 벗에게 도무지 마음을 주지 않아 그는 항상 홀로 마음을 애태우다가 김옥에 가서 서로 결국 헤어지고야 말았다. 김민기의 노래는 우리 커다란 싸움에 자신의 청춘과 삶을 걸었던 시대의 많은 이들에게 힘을 주면서 아울러 그 속의 미세한 주인공 하나 하나들에게도 설움과 아픔과 그리움과 꿈을 달래주는 노래였고 힘이고 에너지였다.
우리의 푸른 젊은 날에는 자신을 성자와 혁명가처럼 산화한 한국의 예수 전태일이 있었고 시인 김지하가 전설처럼 싸우며 감옥에서 버티고 있었고 정치적 고난의 화신 김대중이 있었고 영원한 청년운동의 상징과 깃발이던 김근태나 변신하기 전의 서울법대 운동권의 장기표나 채만수 들이 있었다. 집안에서 출세의 선망과 기대를 모으던 김경남이 나와 둘이 박형규 목사의 추천으로 한국신학대 학사편입학을 하였다.
고통스러우나 아름다운 청춘의 시절이었다. 짦은 한국신학대 동산과 시간에 그리고 나의 삼십대 전반 독일유학에 오를 때 까지 많이 불렀던 그의 노래가 <강변에서>와 <공장의 불빛>이었다. 나 자신도 잃어버린 추억이었지만 한신시절의 사랑하는 후배 목사가 몇십년이 지난 얼마전에 나에게 형님의 한신 시절에 많이 부른 노래가 <강변에서>였다고 말해서 기억이 새로와 졌었다. 맞았다.
그 노래는 소위 화곡동 시절의 운동권 김학민의 십팔번 만이 아니라 최자웅과 우리 모두의 운동권과 그렇게 순수한 개혁의 꿈을 안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 날의 살아있는 노래 이상의 노래였다. <공장의 불빛>도 마찬가지 노래였다. 그 노래의 아름다움과 실현을 위해서 비록 좌절되었지만 독일 유학 전에 사제의 몸으로 나는 어렵사리 공장에 몸을 던지기도 했고 문래동 벌집촌에서 지내기도 했고 노가다와 미장일로 민중의 삶의 거리를 배회하고 살기도 했었다. 비록 교단적이며 현실적인 한계와 어려움으로 인해서 중단되고 다시 일반 사목으로 돌아와서 지내다가 나는 그 좌절을 독일유학 공부로 만회하려고도 했다.
독일로 가서 생활하고 공부하던 상황 속에 자연스럽게 독일에 광부와 간호부로 정착한 분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나중에는 학업 자체를 위해 집중하게 되었지만 루르의 그들과 한시절 뜨겁게 어울리며 지냈다. 멀리 빠리에서 외로움에 몸을 떨면서 독일로 달려오던 홍세화형도 그 날에 있었다. 그 날과 그 삶의 자리에 김민기의 노래가 우리들의 노래로 어떤 신비로운 요소와 힘으로 살아있었다.
나는 종종 지금도 김민기의 노래를 혼자 많이 부르고 연주하기도 한다. 우리 한국의 숨은 빈센트 반 고흐로 내가 명명해드리는 귀한 인물로 고 이신 박사가 계신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와 선구자로 이땅의 진정한 신학자였고 목회자였고 또한 탁월한 쉬르 레알리즘의 그림을 그린 화가였고 시인이었다. 정말 존재론적으로 미켄란제로와 같은 종합적 인간상이었다. 그는 뛰어난 만큼의 고독하고 불우한 삶으로 아까운 나이에 삶을 마감하였지만 불행중 다행으로 그의 유지를 휼륭하게 이어가는 따님 이은선 교수와 사위 이정배 교수와 아드님 이경 목사가 있으며 이들의 노력으로 이신박사 선양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나도 짧지 않은 이신박사에 관한 논문을 쓴 후에 그 출판 기념회에서 나는 기타를 들고 추모의 노래로 기타를 연주하면서 쉐난도와 더불어 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을 불렀다.
내가 각별히 좋아하는 조동진의 <제비꽃>과 더불어 내가 연주의 자리 등에서 자주 부르는 노래가 <아름다운 사람>이다. 가수 나윤선이 <섬집 아기>와 <아름다운 사람>을 즐겨부르는 가수여서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인정한다. 그런데 그 노래의 연조로는 나윤선 이상으로 깊은 가슴과 오랜 세월 속에서 그 두 노래들은 나의 외로움과 꿈과 그리움을 달래주던 고마운 나의 노래와 우리들의 살아있는, 우리를 인간답게 살게하는 노래들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숨결과 진짜 눈빛이나 얼굴이나 음성을 기억할 수 없는 나에게 섬집 아기는 그리운 어머니의 노래였다. 그리고 나는 <아름다운 사람>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너무 좋아해서 후배 강영원이 부산에서 결혼하는 자리에 서울에서 박형규 목사님 일행과 더불어 대절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그 긴 시간 내내 속으로 이 노래 <아름다운 사람>을 웅얼거리며 부르며 간 행복한 추억이 있다. 아, 정말 노래는 노래 이상의 존재와 그리움의 원천과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사람을 만든 김민기가 갔다. 그가 있어 우리의 시대가 그리고 삶이 황량하지 않고 따뜻했다. 이제 고인이 되셔서 그는 김민기 선생이 되셨지만 그러나 선생이 아닌 선생 이전의 푸른 날의 청년 김민기를 너무도 그리워한다.
남북한을 통털어 아니 우리 민족을 뛰어넘어 이 지구촌과 세계에서 가짜 사회주의와 탐욕의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인간형이 꼭 나와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어쩌면 그러한 전형의 하나가 우리의 김민기 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은 오늘의 제도적이고 모순에 찬 교육이 아닌 근본적인 교육혁명으로 어쩌면 가능할 것이다.
나의 어린 날 성장기와도 비슷한 면모도 있는 김민기의 중고교 학창시절은 그가 자유로운 미술반과 현대판 화랑과도 같을 수 있는 보이스카웃 -당시로서는 다소 특권적으로 생각되던 -활동을 통한 자연과의 건강한 교감 속에서 그의 정신이 익어간 것이 나는 너무도 중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록 그룹 부활이 아닌 김민기의 <부활>을 꿈꾸는 것은 부질없는 망상일까? 아니다. 쉬운 일은 아닐지라도 김민기는 그의 노래와 존재의 씨앗을 뿌리고 갔다. 함석헌 선생의 말씀이 아니어도 그 씨알과 씨앗은 결코 죽지 않고 이 땅에 뿌리내리며 열매가 맺고 꽃피어날 것이다.
케이 팝의 세계를 뒤흔드는 현상과 흐름을 보면서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그러나 어디엔가 자본주의 일반의 탐욕과 세속주의와 기획과 기업의 본질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그 차원을 뛰어넘는 참 노래와 음악 자체의 가치와 진실로 진정한 케이 팝과 포크의 주인공과 영웅들이 우리에게 있었다. 일찌기 민족의 엘레지와 가요로부터 신중현으로부터 이어지는
음유 포크가수 조동진이 그렇고 송창식이 그렇고 김민기가 우리들의 진정한 세계에 부끄럽지 않은 영웅들이다.
한국 포크와 참 노래의 본류들을 꽃피우라. 그리하여 진정한 노래와 혼으로 낡은 세계를 뒤엎고 새로운 폭풍으로 휘감으라.
김민기의 영전에서 슬픈 조의의 인사만이 아닌 그를 사랑했던 이들의 새로운 결의와 꿈과 선한 싸움과 행진을 다지는 <그의 부활>을 그리움으로 기다리는 엄숙하고 귀한 계기와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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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Philo Kalia, Yoo Jung Gil and 203 others29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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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 relevant
김명연
휴가와서 친구보다 더 친구같은 사람이 떠났다니 슬프네요 .바다 앞에서 ’백구‘를 듣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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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림
감사하고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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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
시대의 아픔에 고통받던 사람들에게 다시 불끈불끈 일어날 힘을 주었고 서로 어깨 걸고 나갈 수 있는 노래들이었지요. 부디, 서러움 모두 버리고 아침이슬처럼 평안히 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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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
존경하는 최자웅 신부님의 김민기 선생에 대한 추억과 소회를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공감합니다.
김민기 선생은 스스로 '뒷것'으로 자처하셨지만, 우리들의 숨어있는 '영웅'이었습니다.
삼가 애도하는 마음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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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 Park
암울한 시대를 회상케 하는 최 신부님의 글을 접하니, 암울한 시대의 최전선에 젊음을 던진 이들에게 김민기의 노래는 연대와 위로, 올곧은 정신의 표징이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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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lhwa Yu
가슴 속에 들어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우리를 같이 인간답게 노래하고 춤추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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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숙
한 인간이 남기고 간 대장편서사시처럼...유장한 글 잘 읽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더욱 노래를 사랑하시는 신부님의 가슴 속 이야기들과 김민기와의 끈끈함...그의 노래를 사랑하신 신부님의 그 노래에 대한 소중한 추억...그 안에 우리 현대사가 돌올하게 소환되기까지 이 아침의 예술적 기운 청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신부님!!
언제 또 노래 부를 시간 가까이 만들어 봐야 할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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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kwon Cho
역시 신부님이십니다. 누가 이 깊숙한 글을 쓸 수 있겠습니까....
그때 그 시절 제가 가장 자주, 잘 불렀던 노래는 <강변에서>와 <친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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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표
김민기는 시대의 한 지팡이로 민중들을 품는 어머니 같은 토대의 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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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희
넘 존경했던 김민기선생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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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숙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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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준
신부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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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한편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그렇게 이미 불려졌었군요. 잘 새기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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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 Jung Gil
잘읽엇습니다.. 언제 추모의 밤으로 <김민기 부르기> 자리를 한번 만드시면 어떨까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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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수
김민기는 어려운 시대의 강을 잘 건너게한 우리들의 영웅이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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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ul Lee
최신부님의 글에 뭉클한 감동이 몰려옵니다.
김민기님의 노랫말의 깊이와 넓이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우리 속에 노래를 남기고 가신 길이 한없이 넓고 길게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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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강
시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