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5

알라딘: 허접한 꽃들의 축제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소疏 2011

알라딘: 허접한 꽃들의 축제







허접한 꽃들의 축제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소疏
한형조 (지은이) 문학동네 2011-03-09
정가
25,000원

8.8
100자평 6편
세일즈포인트 583
양장본
504쪽


동양철학을 삶의 문제로 귀환시킨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해설서 두 권이 나왔다. 이번 <허접한 꽃들의 축제>에서는 반역의 정신으로 <금강경> 원전과 육조 혜능의 목소리를 번역한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과 함께 이 두 권의 책은 오래된 자기 소외를 벗고,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일러준다.

자아의 오래된 감옥을 성찰하고, 벗어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사물은 객관적 계기의 연대, 혹은 소통으로 태어나고, 우리는 그때 더불어 꽃피기 시작한다. 여기가 법계 우주의 실상이고, 불국토의 이상이 있는 곳이다. 그때 수많은 인간 군상은 ‘미망’과 ‘차별’을 벗고, 각자 그리고 더불어 꽃피기 시작한다. 거기가 있어야 할 모든 것이다. 요컨대 우리 모두는 신분, 직업, 귀천, 인종, 빈부에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이 완전한 우주를 화엄, 즉 꽃으로 장식하는 주인공들이다. 그 자부와 관용으로 사는 삶이 불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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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공덕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보살에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다. 사회의 미덕은 이런 사람들의 훈훈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학창 시절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학자금을 지원받은 사람이 나중에 직장을 갖게 되거나, 사업을 운영하게 되면 그 은혜를 자신도 모르는 어느 어려운 학생을 위해 베푼다. 보시는 그래서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이 다른 것이 아름답다.”
법정 스님은 언젠가 산속의 토굴 생활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겨울 한 철 나려고 들어가보면, 쌀독에 쌀이 그득한 것이다. 한 철 염치없이 공양한 다음, 날이 풀려 내려올 때, 그 쌀독을 다시 채워 놓고 내려온다고 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게 자연과 인간세의 실상 아닐까. 주고받음은 비대칭적이고, 교환exchange은 특수하게가 아니라 ‘일반적general’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예를 들면 ‘내리사랑’이라 부모의 은혜는 대체로 갚지 못하고, 자기 자식에게로 내려가고, 내 생존은 나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땀과 피의 네트워크 위에 서 있다.
생각해보라. 우리의 주고받음을 엄격하게 경계지을 수 있는가. 작은 도움들, 협력들, 배려들은 계산할 수 없고,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 가령 하늘과 땅 등이 가장 크게 간여한다. 또 그것을 따지지 않는 문명일수록 사람 사이에 정이 있다.



지혜의 눈 법안法眼은 이미지와 소문, 매스컴과 선전,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휘둘리지 않는 차가운 통찰력이고, 사물을 자기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전체와의 연관 속에서,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우주적 개방성이다. 불교는 이 곡절을 휘몰아 공空이라는 한마디 말로 압축했다!
공空이란, 혜능의 표현을 빌리면, ‘유有와 무無사이에서의 오랜 방황’을 끝내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그렇다”와 “아니다”의 부저를 신경질적으로 눌러대는 분별分別, vikalpa의 뿌리 깊은 습성, 즉 이변二邊을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 토대를 떠나기를 두려워하지만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불교는 다독인다. 공空은 이처럼 자신을 비우고 오랜 습관을 넘어서는 작업이지만, 또 한편 불공不空이라, 가득차 있기도 하다. 『대승기신론』이 이 두 측면을 동시에 다루는 것을 기억할 것인데, 혜능은 이 불공의 반야바라밀을 특유한 돈교 어법으로 표현했다. “자심여래自心如來는 자오자각自悟自覺이라, 번뇌와 망념을 여읜 이 마음에서, 복락이 스스로를 무한히 펼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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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한형조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노강서원.화양서원>,<느낌, 축복인가 수렁인가>,<문헌서원.심곡서원.도봉서원> … 총 38종 (모두보기)
동해안의 바닷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산의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불교로 동양학에 입문하여, 일상에서 구원을 모색하는 유학을 공부했다. 다산 정약용의 고전해석학(經學)을 다룬 "주희에서 정약용으로의 철학적 전환"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동안 띠풀로 덮인 동아시아 고전의 옛길을 헤쳐왔다. 고전을 통해 삶의 길을 배우고, 문명의 비평적 전망을 탐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왜 동양철학인가>(2000), <왜 조선유학인가>(2008)>, <조선유학의 거장들>(2008), <붓다의 치명적 농담>(2011)>, <허접한 꽃들의 축제>(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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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금강경, 그 빛나는 ‘삶의 기술ars vitae’
철학과 종교를 뛰어넘어 인생에 대한 통찰을 열어주는 우리 시대 불교의 의미

왜 사람들은 그토록 수많은 처세서를 읽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인생을 ‘구원’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인가.
‘오늘날’ ‘여기’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부려 동양철학을 삶의 문제로 귀환시킨 한형조 교수의 본격 『금강경』 해설서 두 권이 드디어 출간됐다. 마음과 일상의 차원에서 『금강경』의 기본 정신을 해설한 『붓다의 치명적 농담』, 그리고 반역의 정신으로 『금강경』 원전과 육조 혜능의 목소리를 번역한『허접한 꽃들의 축제』. 이 두 권의 책은 오래된 자기 소외를 벗고,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일러준다.
이 책은 “모던하고, 경쾌하다”. 불교 한문 투에 지친 사람들, 화두라는 일초직입一超直入의 험준에 한숨 쉬던 사람들에게, 가히 가뭄 끝의 단비라 할 만하다.
특히 한형조 교수의 저술은 엽기와 과감을 각오하고 종횡무진, 이 위대한 경전을 자유롭게 풀어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 자유로움은 역설적으로, 그가 모든 원전과 이에서 파생된 다양한 해석을 형형한 눈빛으로 꿰뚫고 있기에 가능했다.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강의’는 ‘종교’가 아니라 ‘인문’으로 불교에 접근한다. 종교적 도그마에 발목 잡히지 않고, 제도 의례의 관습, 집단의 논리를 떠나, ‘불교’ 그것이 알려주는 ‘인간학’에 오로지 집중한다. 그리하여 각자의 종교적·문화적 배경에 상관없이 심금에 닿도록 배려했다. 두 권의 책은 실존의 변화, 작지만 위대한 구원의 불씨를 각자의 가슴에 지펴줄 것이다.

여래는 오지 않는다. 다만 존재할 뿐!
“우리는 누구나, 이미, 깨달음을 갖고 있다菩提般若之智 世人本自有之.”
『금강경』 원전과 『오가해五家解』를 두루 섭렵해 새로운 언어로 탄생한 ‘지금’ ‘여기’의 위대한 경전을 읽는다.

『금강경』은 배반의 텍스트이다. “여래는 없다!” 이 선언은 충격적이다. 육안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 왜냐면 우리 눈에 비치는 사물은 다만 우리 욕망의 투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와 기대를 벗어날 때, 여래는 어느새 우리 앞에 와 있을 것이다. 『금강경』의 유명한 사구게四句揭는 외친다. “여래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그때 너는 여래와 대면할 것이다.” 여래는 우리가 상상도 않던 곳에, 전혀 기대치 않던 곳에 있다. 이 소식을 본격 전하고 있는 경전이『화엄경』이고, 그 경전의 본래 이름이 『잡화경雜花經』, 즉 허접한 꽃들의 축제였다.
“네가 바로 부처이다心卽是佛!”『육조단경』이 전하려던 이 한 마디를, 저자는 동서양의 온갖 사유를 망라하며 새 언어로 번역해 들려준다.

● 대승 반야의 핵심 경전, 『금강경』의 의미
『금강경』은 지금도 절간에서 늘 독송되는, 대승 반야의 핵심적 경전이다. 압축적이고 논리적인 『반야심경』에 비해, 『금강경』은 흩은 곡조로 반복되고 변주된다. 촌철살인, 경구 경구마다, 깊은 의미와 통찰력을 갖춘 이 경전은 독자들을 번쩍이는 번개의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 누구나 『금강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금강경』 원전과 『오가해五家解』가운데 혜능과 야부, 그리고 서구의 현대 불교학자인 콘즈E. Conze의 영역까지 모두 책에 담아냈다. 이 모두를 직접 번역하고,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모든 고전이 그 시대의 언어로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면 경전 또한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그동안 낯선 비의적 언어(한문 내지는 인도어)에 갇혀 있던 『금강경』을, 동시대인인 우리가 읽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과감한 번역과 때로 파천황의 표현을 사양하지 않았다.
저자는 불교의 ‘안’에서뿐만 아니라, 더욱 “불교 밖을 통해” 불교를 알려준다. 서양의 그리스, 로마의 철학, 그리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사유는 물론, 설화와 신화, 그리고 일상의 에피소드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내어, 독자적 불교 해설의 경지를 열고 있다. 이를테면 스티브 잡스의 ‘커넥팅 도츠connecting dots’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연기의 인연을 논하는 식이다.
이 책은 모던하고 경쾌하다. ‘모던하다’는 것은 현대적 소통에 철저하다는 뜻이고, 경쾌함은 도저한 장악에서 온다. 시인 정현종이 말했다. “생각하라, 얼마나 무거워야 가벼워지는지를……” 유머와 깊이를 함께 갖춘 책은 드물다. 독자들은 불교의 도저한 깊이, 바로 그 소식에 도달하기 위한 저자의 오랜 순례와 모색에 동참하는 행운을 누리게 될 것이다.

● 허접한 꽃들의 군무
―스스로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모두를 아우르는 상생의 이야기
하여,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가 늘어놓은 촘촘한 해설은 결국 『금강경』의 ‘마음’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시선은 철학과 종교를 뛰어넘은 곳에 닿아 있다.
자아의 오래된 감옥을 성찰하고, 벗어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사물은 객관적 계기의 연대, 혹은 소통으로 태어나고, 우리는 그때 더불어 꽃피기 시작한다. 여기가 법계 우주의 실상이고, 불국토의 이상이 있는 곳이다. 그때 수많은 인간 군상은 ‘미망’과 ‘차별’을 벗고, 각자 그리고 더불어 꽃피기 시작한다. 거기가 있어야 할 모든 것이다. 야부 노인은 말한다. “내 집 안의 보물을 얻고 나면, 지저귀는 새, 산에 핀 꽃들이 온통 봄의 찬양임을 알게 된다.” 요컨대 우리 모두는 신분, 직업, 귀천, 인종, 빈부에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이 완전한 우주를 화엄(華嚴), 즉 꽃으로 장식하는 주인공들이다! 그 자부와 관용으로 사는 삶이 불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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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 (3)
전체 (6)

  알케 2011-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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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읽기의 새로운 경험, 역시 한형조선생. 차안에서 피안을 꿈꾸는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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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약삐약 201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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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각 경전과 특히 혜능 스님의 해석을 비교교차하여 쉽게 설명한 책. 가끔 중간에 딴 이야기가 나오지만 글이 유머스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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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챙이 2011-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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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에 대한 전폭적 신뢰, 마음의 자기 각성, 결국은 자신이 문제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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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Grace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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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금강경 해설을 생각했다면 의외의 해설임을 볼 수 있다.



우선 전체 32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금강경을 14분 까지의 해설로 마무리 한다.



소소한 해설 보다는 전체적인 의미에 더 치중하고자 함을 느꼈으며 그것은 결국 '자신을



믿으라.'는 그의 일침으로 마무리되는 듯 하다.



<스스로를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것이,

나의 바깥에,

저쪽 권위에,

성자들에게,

이른바 선지식들에게,

책 속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천만 경계하시라.

자기 안의 힘과 가치를 믿고 따르라.

인간의 몸은 그 자연 속에 고유한 이성이 거주하고 있다.

그 소리에 다만 귀를 기울이면,

그 자성(自性)이 스스로 길을 열어갈 것이다.

방하(放下),

즉 놓아줄 때 일은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잊어버림으로써 우리는 기억한다.>





<금강경>을 제대로 아는 것도 무척 중요한 일이겠으나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그의 마지막



충고가 무척 훌륭하여 내가 이 경(經)을 공부하는 이유로 아주 합당해 보인다.



<언성을 높이거나,

울컥하는 일이 있거나,

주먹이 올라가다가도,

돈을 따지거나,

명예를 계산할 때,

문득 '아상'이며,

'복덕'이며,

'마음의 항복'이며,

'응무소주이생기심'이 떠오른다.

그 떠올림은 곧 행동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그것이 어느덧 인격이 된다.

그 인격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맺고,

일을 처리하는 태도를 결정한다.

경전의 사구게는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심원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금강경>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보시하더라도

이 경전의 사구게 하나를 수지독송하는 공덕만 못하다."고 했던 것이다.>



"장로 수보리"라는 단어를 금강경에서 처음 보고는 기독교에서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신기했는데, 그것에 대한 어원의 풀이가 있어 궁금하던 부분이 해소 되었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을 읽을 때도 다소 산만했었는데, 그 이유를 나의 집중력 탓이라 여겼



는데, 이 책도 그러하다. 읽다가 생각이 자꾸만 따로 흘러가버려 끝까지 다 읽는데 애를



먹었다.



저자는 분명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분 같은데 내가 그의 재치를 온전히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요구가 많고 불만이 많은 사람이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래서 말은 늘 위태롭다.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말이 적다. 그렇지 않은가.



*분별은 이 세계 전체의 고통을 산출하는 무지의 핵심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그리고

그 경험 세계에 수반되는 모든 악은 잘못 된 구분에서 비롯된 생각이 구축한 것이다.



*제발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이 상습적 태도가 자기나 남에게 실은 가장 나쁜 독이기 쉽다는

것을 우리 모두 깊이, 깊이 반성해보아야 한다.



*그러니 의존을 그치고, "절벽에서 그만 손을 놓아라!" 나머지는 불성이 자연 길을 인도할 것이

다. 이를 어느 시인은 "잊어버림으로써 기억한다"고 썼다.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은 이 마음의 풍경이 그저 속상하고 안타까웠던 사람들이다. 무의식에서

라도 신호가 왔기에 독자들은 절을 찾고, 명상을 하며, 또 이 허접한 글을 쫓고 있을 것이다.

그 발심만으로 이미 절반은 이루어졌다. 그 신호를 따라 가다보면 절절한 계기와 절차를 거쳐

그리던 평화와 아타락시아에 이르게 될 것이다. 뜻을 굳게 가지시기 바란다.



*풀을 돌로 누르듯이 망념을 제거하려 들지 말라. 그만큼 위험한 시도가 다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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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7-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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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는 트인다, 소통한다는 의미의 한자로,

한문 경전을 글자를 짚어가면서 문리가 트이도록 설명하는 글이다.

중요한 것은 해석이 아니라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일이어서,

이런저런 사람들의 해석을 도모하기도 한다.



금강경을 사경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소의경전이라 할 정도로 그 내용이 심오하다 할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결국, 니가 부처니 그것을 깨달으면 세상은 극락 찾을 것도 없고,

결국 니가 살아가는 그 일이 제일 소중한 것이여~ 하는 말이렷다.

그렇지만, 일상은 늘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곳이다.



불교의 원리는 기독교처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하고 주님에게 비는 것이 아니라,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는 생각 자체가 나의 생각이 만들어낸 망상이다~ 이런 깨우침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큐의 '정신적 승리법'일 때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들은 실체라기보다

감각과 정념, 관심과 인식, 기억과 편견을 토대로 부풀려지고 증폭된 어떤 것.

그래서 자아의 관념이 실체 없는 환상이라고 말하는 것.

이 저간의 소식을 한마디로 '공'이라고...(150)



그러하다.

인간이 다른 인간종을 말살시키고 자기만 살겠다고 다투는 데는 그런 관념이 배경이 된다.



분별은 이 세계 전체의 고통을 산출하는 무지의 핵심이다.(콘즈, 153)



혜능의 설명은 일반인과 수련자에게 다르게 닿기도 한다.

아무튼 금강경은 이 험한 세계의 바다를 건네주는 '뗏목'으로서 가장 큰 것이다.

'반야심경'이 요점정리 암기본이라면, '금강경'은 정석이고 개념원리인 셈.



금강경이 반야심경과 달리 체계적이기보다는 설득적, 반복적.

뗏목이기에 목적은 일깨우는 것.

근기와 상황을 고려하여 같은 얘기를 다른 방식, 다른 어법으로 하는 방편.

불교는 도그마가 아니다.(235)



하나님 붙들면 도그마가 된다.



어떤 궁금 많은 학생이,

"세상은 끝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시간은 무한하냐, 세상은 누가 만들었냐?"는 질문에 붓다는,

"화살에 맞은 사람이 당장 해야 할 일은,

화살을 뽑고 독을 치료하는 것이다

쏜 사람의 피부색이 검은지, 밥은 먹고 왔는지는 알아서 무엇하려느냐?고 대답.(195)



인간은 자신의 감옥에서 갇혀 사는 수인이다.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

관자재, 자유롭게 사물을 보게될 때,

전혀 기대치 않던 곳에서 여래와 관음의 얼굴이 떠오를 것.(213)



뗏목을 포스트 모던의 어구를 빌려 '썼다 지워야' 하는 물건(245)이라 했다.



글자에 얽매이면 살 수 없다.

그래서 자유로워지는 길을 매 순간 공부해야 한다.



진리의 수행은 다음 윤회에서 좋은 곳에 태어나기 위한 보험이나 적금이 아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지금 여기 마주친 생사, 그 큰 바다를 건너기 위한 뗏목이다.

한사코 부여잡되, 저 언덕 기슭에 닿았다 싶거든, 버려라.

그래야 계속 길을 갈 수 있다.(혜능, 270)



금강경을 겨우 한 번 사경했다.

반야심경은 사경이 쉽고, 읽으면서 스물 몇 자의 없을 무와 빌 공을 되뇌게 되면서 마음을 갈앉히는데 좋다.

금강경은, 수보리를 여러 번 써야 하고, 어의운하리오... 어떠냐... 이런 말들을 쓰자니 거리는 멀다.

그렇지만, 금강경은 말이 금강경이지, 이것은 진리의 글자가 아님을 깨닫기에는 훨씬 직설적이다.



금강경이 서른 꼭지가 넘지만, 핵심은 맨 앞의 서너 챕터에서 다 드러났고,

계속 부연 설명임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매니큐어를 품평하지 않는 자세다.

달을 우러를 수 있으면, 한 생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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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pediem4580 201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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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법상스님, 원영대사,라즈니쉬,법륜스님의 금강경을 다 읽어봤는데 읽을수록 문자에 갇히게 되었다. 이 책은 접근방식에서부터 다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조금은 편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반야 바라밀로 지혜의 눈이 떠 지길..세세상행보살도를 행하며 살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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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낙소리 2011-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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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는 즉, 마음의 내적 방해물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힘이다. 방해물들이라니? 마음의 방해물들, 그 번뇌, 혹은 망상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고, 그 때문에 우리는 고통 받고 있다. 불교는 이들이 마음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는 점에서 순전히 객관적 분석을 표방하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과는 다르다. 반야는 이 장애물들을 깨부수는 힘이다. 어떤 번뇌나 망상도 이 앞에서 깨어진다. 그리고 이 반야는 워낙 견고하여, 그 무엇에도 부서지지 않는다. : p23



혜능은 깨달은 자의 징표 가운데 하나가 “밖으로 사람들의 실수와 악행을 덜 기억하고 곱씹는 것外不堅靭之過惡”이라고 적어두었다. : p54



여시(如是)에 대한 옛사람들의 해석은 다기다양하다. 지금 야부 노인은 여(如)를 유무(有無)가 불이(不二)라는 뜻으로 새기고, 또 시(是)는 그 여(如)에 시비(是非)가 없다는 뜻으로 읽었다. : p65



『별기』에서, 구분과 차별이 인간의 관심과 욕망의 투사라는 말은 자주 했던 것 같다. : p70



이때, 단단히 주의해야 할 것은 가슴 속에 또아리 틀고 있는 자만심과 허세이다.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거나, “내가 너를 가르치고 도와준다”는 ‘의식’을 갖고 있으면, 공덕을 까먹고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다. 어디 보살뿐이겠는가. 일반적으로, 사람 사이의 대화나 거래에서, 혹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일반적으로 나, 혹은 자아의 심리적 방해가 엷을수록 더 만족스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 p135



나는 나 밖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들에 의존해서야 비로소 존재한다. : p139



불교는 불을 꺼나가는 과정이다. 열반nirvana이라는 말의 어원이 촛불을 끄듯이, “(탐욕과 증오, 기만의) 불길을 끈다”는 것임을 유의하자. “자신 속의 불건전한 정념과 무지를 제거하고 조복(調伏)시켜라.” 이 ‘마음의 훈련’은 중대한 결과를 몰고 온다. 자기 의식, 혹은 에고의 중심이 약화되고 흔들린다. 우리가 ‘나’라고 불리는 것들은 실체라기보다, 이들 감각과 정념, 관심과 인식, 기억과 편견을 토대로 ‘부풀려지고’, ‘증폭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그래서 자아의 관념이 실체 없는 환상이라고 말한다. 이 저간의 소식을 한마디로 공(空), 즉 ‘비어 있다’고 말한다. (공sunyata이란 말의 어원은 공갈빵처럼 ‘부풀려진’에서 왔다. 그 빵의 속은 ‘실제’ ‘비어 있다’.)



요약하면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자아의 투사project에 불과하고, 그 자아는 감각과 충동에 연동되어 있으며, 이들은 자기 밖의 영향력과 그 흔적들이라는 점에서 역시 ‘자아’는 없고, 자아가 없다면 ‘세계’ms 실재하기를 그친다. : p149



혜능은 멸도(滅度), 즉 위대한 평정과 자유란 “번뇌(煩惱)와 습기(習氣), 그리고 일체(一切)의 제(諸)업(業)장(障)이 멸진(滅盡)하여 다시 찌꺼기가 없는 경지”라고 썼다. : p160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은 하나이고, 그전에 생사니 열반이니가 아예 성립이 우스꽝스럽다. 그것을 평등(平等)이라고 했다. 평등은 불교의 전문 용어로 사물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 p164



"색성향미촉법의 토대가 없는 보시“도 같은 뜻을 표명하고 있다. 형체, 소리, 냄새, 맛, 촉각, 그리고 의식은 한 인격이 토대를 구성하는 자료들이다. 이들 여섯 대상이 자극을 주면, 신체는 이 자극을 향해 감정적 의지적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반복되고 패턴화되면서 견해(見解)라 부르는 편견(?)이 형성된다. 성격, 혹은 인격은 이 과정을 통한 강화의 결과이다. 다시, 성격은 외계에 대한 자극을 선택하고, 거기 반응하는 양상을 결정한다. 각자는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 속에 살고 있다. : p180



처음 1)우리의 욕망과 그 ‘대상’물이었던 변(匾)계(計)소(所)집(執)의 세계는, 2)사물이 서로 서로 관계하고 있는 의타(依他)기(起)의 세계로 이동한다. 이것은 ‘시선의 혁명적 전향’이다. 그것은 욕망과 그 충족의 전망에서 바라본 시선이 아니라, 유희와 소요의 시선이다. 그로써 돼지의 눈에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해관계를 떠나 사람과 ‘만나는’ 자기 혁명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놀라워라, 거기 남을 비난하기를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여기가 종교적 전회이자 치유의 시작이다. 그는 전혀 다르게 살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자기 마음의 우상을, 토대를, 즉 상(相)을 깨뜨림으로써 얻은 것들이다. : p182



문제는 21세기, 앞으로입니다. 권위와 저항의 대립 시대는 지났으니, 앞으로의 화두는 개인의 삶과 일상의 관계일 것입니다. 거대담론과 정치의 시대는 퇴조하고, 문화와 놀이가 봇물로 소통되고 소비되고 있습니다. 하여, 21세기는 유교와 불교의 시대입니다! 기독교 또한 이념과 당위의 도그마를 권위적으로 설파하는 역사신학보다, 개인의 영성과 각성에 주력하는 영성신학이 설득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 p196



시비(是非), 선악(善惡), 미추(美醜)에서, 생사(生死), 그리하여 최종적 범주인 유무(有無)를 넘어서는 곳에 객관적 사태로서 법(法)이 있다. 그 자리를 대승 중관(中觀)은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그래서 중도는 불가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사(四)구(句)백(百)비(非)라 어떤 ‘판단’도 중도 근처에 갈 수 없다. : p244



상(上)승(乘)법(法)이란 혜능의 돈교를 가리킨다. 여기 닦아야 할 것도 없고, 그만둘 것도 없다. 이루어야 할 해탈도 없으며, 가야 할 서방 극락도 없다. 야부의 노래를 빌리면, 원동태허 무흠무여(圓同太虛 無欠無餘)라, 세상은 ‘이미’ 완전하다. 그 안에서 나는 “하루 종일 바쁜데, 무슨 일이든 마음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이 완벽한 삶의 조건은 무엇인가. 혜능은 두 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무착(無着), 즉 내 마음이 타자에 의해 점령되지 않는 것이고, 둘은 무상(無相), 즉 세상이 나로 인해 구획되거나 시비되지 않는 것이다. : p258



수상행식(受想行識)... 이 말을은 영어로는 각각 감정feeling, 지각perception, 의지volition, 의식consciousness을 가리킨다. 이들 ‘마음’의 여러 상태, 혹은 국면들은 ‘몸’을 나타내는 색(色, body)와 함께 오온(五蘊)의 멤버들이다. : p261



요컨대 불교가 늘 경계해 마지않는 생멸심이란, 자아에 토대(住)를 두고 추동된(生) 상념과 정념(念)의 출몰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기적이면서 인위적이기에, 부자연스러우며, 결국 타자와 교감 없이 냉담하다... 그 이기적 자아의 닫힌 매트릭스 안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生滅) 마음이 왈, ‘생멸심(生滅心)’이다. 이 마음은 뚜렷하고 분명하기도 하지만, 주로는 머릿속을 분주히, 먼지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상념으로 나타난다. : p264



공(空)이란, 혜능의 표현을 빌리면, ‘유(有)와 무(無) 사이에서의 오랜 방황’을 끝내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그렇다”와 “아니다”의 부저를 신경질적으로 눌러대는 분별(分別, vikalpa)의 뿌리 깊은 습성, 즉 이(二)변(邊)을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공(空)은 이처럼 자신을 비우고 오랜 습관을 넘어서는 작업이지만, 또 한편 불(不)공(空)이라, 가득 차 있기도 하다... “자심여래(自心如來)는 자오자각(自悟自覺)이라, 번뇌와 망념을 여읜 이 마음에서, 복락이 스스로를 무한히 펼쳐간다.” : p266



사람들은 대개 이들 꼭두각시들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자아(自我) 혹은 페르소나persona에 익숙하다 보면, 문득 “나는 어디 있지” 하고 돌아보는 때가 온다. 자기 아닌 것에 자신을 맡겨버린 이 일상화된 비극을 현대철학과 종교는 ‘소외alienation'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럼 주인공은 어디 있는가. 불교는 이 물음을 끌어안고 해결을 모색하는 개인화individuation의 순례요 등정이라고 할 수 있다. : p276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법은 없다. 그러나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는 자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마음의 철학 meditations』, 강분석 역, 사람과 책, 2001, 39쪽) : p284



공자가 말했다. “말을 해야 할 사람에게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잃을 것이고, 말하지 않아야 할 사람에게 그 말을 하면, 그 말을 잃을 것이다. 지자(知者)는 사람도 말도 잃지 않는다. : p303



너를 모욕하는 것은 너에게 욕을 퍼붓는 사람이나 때리는 사람이 아니라, 모욕하고 있다고 하는, 이 사람들에 관한 너의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누군가가 너를 화나게 할 때, 너의 머릿속의 ‘생각’이 화나게 하는 것임을 알라. (『엥케이리디온-도덕에 관한 작은 책』, 김재홍 옮김, 까치, 2003, 36쪽) : p313



“불국토는 청정하여 이미지도 형태도 없다.” 삶은 이미 주어졌다. 우리의 삶은 다만, 그 안에서 경영될 수밖에 없다. 푸념하지 말지니, 지혜는 그 ‘위대한 수용’에서 시작한다고 한 바 있다. 그때 문득 세상이 평등하고 화평해지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 p385



혜능은 이 우주적 참여로서의 장엄을 세 가지로 특화했다.



1) 하나는 ‘세간불토의 장엄’이다. 세간불토는 ‘사찰이라는 신성한 공간을 뜻한다. 거기 공양한다는 것은 불교라는 종교에 의식적 의례적(儀禮的)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경전을 베끼고 외며, 절에 보시하고 스님들께 공양하는 행위를 지칭한다.



2) 둘째는 ‘몸으로 하는 불국토 장엄’이다. 이 몸을 경건히 잘 건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 혜능은 이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절간을 번듯이 하는 불사’보다 위대하다고 가르친다.



3) 배려로서의 장엄보다 더 근본적이고 위대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불사(佛事)’이다. ‘마음으로 하는 불국토 장엄’이란 내 마음을 언제나 밝고 환하게, 구름 끼지 않게 유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내 마음 하나가 깨끗해지면, 곧 온 세상이 밝아진다. 사람이 남에게 하는 생각과 태도, 말은 곧 스스로의 관심과 수준의 반영이다. 내가 도둑이면 모든 사람이 도둑처럼 보여 경계를 놓지 않게 되고, 자신이 부처이면, 모든 사람을 부처처럼 존중하게 된다. 무소득심(無所得心), 세상에 내가 얻을 것도, 가질 것도 뭐, 별 대수냐 싶은 마음, 그 여유로운 한 마음을 가지면, 세상이 그 가닥을 통해 숨통을 열고, 사태해결의 실마리가 열린다. : p385



그의 마음에는 17세에 들었던 어는 현자의 말이 새겨져 있었다. “매일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그는 어느새 바른 길에 들어서 있을 것이다.” 그는 나이 50이 되도록 매일 매일을 거울 앞에서 물었다고 한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그래도 지금 하려는 일을 하고 싶어할 것인가.” 아니요라는 대답이 자주 나온다면 그것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 p411



삶은 시한부입니다. 그러니 남의 인생을 사느라 자기 인생을 낭비하지 맙시다. 도그마에 붙잡히지 마십시오. 도그마란 다른 사람이 생각해놓은 것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들이 내는 소음에 당신 내면의 목소리가 묻혀버리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데, 당신의 마음과 직관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도록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의 가슴은 당신이 진정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입니다. : p412



불교는 가정적 환경이나 사회적 여건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어떤 잘못된 습관 하나가 오랜 고통과 불행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하여 불교의 ‘지혜’가 실제 작용해서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어떤 잘못된 ‘습관’ 하나이다. 혜능 또한 반야바라밀의 타겟이 ‘우심생멸(愚心生滅)의 제거’라고 분명히 적었다.



‘우심생멸’은 ‘어리석은 마음에 오가는 생멸’이다. 아니 ‘어리석은 심생멸(心生滅)’로 읽을 수도 있다. 짐짓 『대승기신론』의 어법을 차용해서 이 구절을 읽어보기로 하자. : p432



불교는 우리 삶에 아무런 고통이 없다거나, 즐거움만이 가득 차 있다고 사기치지 않는다. 다만 고통을 구성하는 연쇄고리를 보다 분명히 알고, 그 뿌리가 인간의 원초적 무지와 맹목적 욕망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때, 그와 더불어 비로소 사물의 실상이 선명히 잡힐 때, 그 자각이, 그 반야바라밀이 우리의 고통을 덜어주고, 존재에 위안을 주며, 궁극적 평안의 언덕으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가르친다. : p434



혜능이 말하는 ‘어리석은 마음의 생멸(生滅)’이란 요컨대 부자각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활동들을 가리킨다. 이들 ‘소외된 심생멸’은 작은 일에 쉽게 자극받고, 심리적 정서적 자아의식이 강하다. 자기만의 독단을 객관적이라 자부하며 과거의 기억에 현재를 묶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장밋빛 환상을 걸기 쉽다. : p435



사람에 따라 가치의 무게중심이 다르기에 관용이 필요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보다 큰 규모에서 생각하고, 보다 원대한 이상을 갖고 있기에 그들을 존경하고 받들어야 한다. : p442



혜능은 그 요점을 잘 모를 사람들을 위해 친절한 설명을 잊지 않았다. 하나는 “5근(根) 중에 6바라밀을 닦으라”이고, 하나는 의근(意根) 중에 무상무위(無上無爲)를 닦으라“이다. 6바라밀은 감각을 길들이는 훈련이고, 무념무위의 수련은 상념-의지를 길들이는 훈련인데, 이 둘은 수레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처럼 협력 동시(同時)해야 한다. : p451



무상이란... 나의 욕망과 에고의 이해관계를 통해 사물을 가르고 편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무위란 나의 욕망과 이해 관계에 입각해 사태를 편의적으로 이기적으로 처리하지 않도록 하는 훈련을 의미한다. : p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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