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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게 적이 되었다: ‘적대의 계보학’의 종착지
기사승인 2024.02.14
- 적의 계보학 ①
적의 계보학
나에게 ‘적’(敵)은 누구이고, 적대성의 원천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너희와 갈등하는가. 전쟁을 비롯한 모든 폭력적 사건의 근저에는 자기중심성이 있고, 갈등은 자기중심성에 도전하는 세력을 적대시하면서 생긴다.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 배경 연구자들의 국제적 모임인 ‘아시아종교평화학회’에서는 나와 우리의 적은 누구이고 적대성의 원천은 무엇인지, 적대성은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지 다각도로 성찰하며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자기중심성의 근간을 돌아보고, 적과의 관계를 조화로 역전시키기 위한, 종교적으로는 ‘사랑과 자비’의 윤리의 기초를 확보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다.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사회적 과정의 근간이기도 하다. 오늘부터 정기적으로 ‘적의 계보와 현상’을 두루 정리한다.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 특히 인간이 몸으로 경험하는 직접적 폭력에는 가해자-피해자 도식이 작동한다. 그런데 폭력을 먼저 행사한 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래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여기거나, 자신이 도리어 피해자라고 주장하곤 한다. 서로가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자기를 우선 변호하는 과정에 폭력적 분위기는 계속된다. 서로 자기중심적으로 주장하면 할수록 서로를 더 적대시하게 된다. 같은 세력끼리 ‘동지’를 맺으며 투쟁을 이어간다. 토마스 홉스는 이런 현상을 ‘자연상태’,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규정한 바 있다. 칼 슈미트는 ‘적’을 이질적 타자로 보고, ‘적과 동지의 구별’을 ‘정치적인’ 행위로 규정했다. 상호 적대시는 일종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셈이다.
▲ 이찬수 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안과 밖을 기준으로 적과 동지를 나누는 ‘정치적’ 행위는 고대 유대교의 계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령 십계명의 여섯째는 “살인하지 말라”이다. 이때의 살인 금지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 윤리가 아니다. 그 계명을 지켜야 할 대상은 어디까지나 ‘내집단’이다. 다른 신을 믿는 외집단에는 이 계명이 적용되지 않는다. 외집단에 대한 살인을 정당화하고 장려하기까지 한 사례가 더 많다. 외집단은 잠재적 위협이자 제거의 대상이며, 그런 이들을 죽이는 것은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집단의 생존을 위한 수단에 가깝다. 이런 계명은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전제한, 내집단 중심의 ‘정치적’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시대는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반한 ‘정치적’ 행위가 지배적이었다. 적과 투쟁하면서 나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이질적 세력에 대한 방어력을 키워가는 시대였다. 이 시대 폭력의 양상은 적과의 관계 정도에 따라 몇 단계로 나뉜다. 장 보드리야르가 규정한 ‘적(敵)의 계보학’이 이 단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적의 계보학’의 첫 단계는 적이 늑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단계이다. 늑대는 노골적으로 공격해오는 외부의 적의 비유로서, 사람들은 적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고 바리케이트를 친다. 둘째는 적의 몸집이 쥐처럼 작아지는 단계이다. 쥐는 지하에서 활동하기에 벽이나 철책으로는 당해내지 못한다. 새로운 위생 장비를 갖춰 쥐가 퍼뜨리는 위험을 예방하려 한다. 셋째는 적이 바퀴벌레 같은 벌레의 형태로 나타나는 단계이다. 벌레는 삼차원의 틈새에서 공격해온다. 이 역시 각종 방역 장비로 막아야 할 대상이다. 넷째는 적이 미세한 ‘바이러스’ 형태로 출현하는 단계이다. 바이러스와 같은 기생충은 몸 밖이 아닌 몸 안을 공격하며, 시스템의 심장부 안으로 들어온다. 안에 있기에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러면서 미세한 적은 마치 유령처럼 경계를 넘어 전 지구로 확산되고, 혈관을 타고 퍼지듯 도처에 스며든다. 이 적은 시스템 안에 둥지를 틀었다가 어느 순간 활성화되면서 적대적 활동을 개시한다. 이들은 ‘내부 속의 외부’를 형성하며 내부 시스템을 공격한다. 이 공격은 시스템 외부에서 막아내기 힘들다. 그것이 바이러스 같은 적의 특징이다.
이 계보학에 의하면, 적의 크기는 계속 작아져 왔지만, 위험은 더 커져 왔다. 늑대에서 쥐로, 쥐에서 바퀴벌레로, 다시 바이러스로... 바이러스라는 적은 내 몸을 숙주 삼아 나의 일부처럼 행동한다. 이 폭력은 미세하고 은밀해서 적대의 지점, 폭력의 출처를 특정하기 힘들다. 그러면서도 ‘늑대의 폭력’이 그렇듯이, 자·타가 구별되고 적대적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구도는 비슷하다.
문제는 이런 ‘적의 계보학’을 새로 써야 할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단계를 경험하고 있다. 적이 바이러스보다 더 작아지다가 급기야 나와 일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적이 나의 DNA가 된, 즉 내가 나에게 적이 된 것이다. 내가 나의 경쟁 상대이자 극복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나에게 폭력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한편에서는 늑대의 폭력에서 바이러스의 폭력까지 중첩되어 있으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폭력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실종된 단계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 끊임없이 적을 재생산해야 유지되는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 ⓒGetty Images
슬라보예 지젝이 ‘체계적 폭력’이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기존의 폭력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 혹은 사회가 비정상적이어서 발생하는 폭력이라면, 체계적 폭력은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데서 벌어지는 폭력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홀로코스트’는 합리성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라, 합리적인 현대사회와 문명의 정점에서 벌어졌다고 말한 것도 이 폭력의 특징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말한다: “홀로코스트는 우리의 합리적인 현대사회에서, 우리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서, 그리고 인류의 문화적 성취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태동해 실행되었으며, 바로 이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그러한 사회와 문명과 문화의 문제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전무후무한 폭력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사회의 작품이다. 사회의 체계가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이자 결과인 것이다.
‘체계적 폭력’이라는 모순적 현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크게 보면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온 결과이다. 자연법칙에서 기술을 발견하고, 그 기술로 자연법칙을 통제하면서 문명을 일으키고, 찬란한 문명이 요구하는 대로 문명의 법칙에 맞추어 살아온 결과이다. 자본의 축적을 찬양하고 이익을 앞세우는 정책에 환호하고 종교마저 더 많이 노동하고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신의 이름으로 축복해온 결과이다. 그 자본주의적, 성과 지향적 삶을 적극적으로 지향하며, 그 구조 속에 자신도 모르게 종속되어온 탓이다. 문명의 체계에 맞추어 스스로를 종속시킨 탓에 문명의 힘은 더 장대해지고, 그에 반비례해 문명을 일으켰다는 주체는 사실상 실종되었다. 인간을 극도의 피로와 자기소외로 몰아가는 힘은 한편에서는 거대한 문명 자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성과를 낳으려 자발적으로 투신했던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폭력은 더 교묘하게 구조화되었지만, 그럴수록 그 원인은 특정하기도 힘들고 따라서 제거하기도 어려워졌다.
사회의 요구와 흐름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다 보니 자연스러움의 이름으로 폭력이 발생한다. 그 폭력은 끝없이 성과를 산출하라고 스스로를 닦달하는 데서 오는 피로함, 자기 소외 결국은 자기 파멸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다. 정확히 말하면, 폭력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사라져버린 상태이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어제의 나를 넘어서 내일의 더 낳은 나를 꿈꾸며, 끝없이 자신을 닦달해온 불가피한 결과이다. 자기를 이기는 것을 최고의 승리로 여기면서, 자기가 자기를 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어제의 나를 넘어서기 위해 자신과 끝없이 경쟁한다. 그렇게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자기 파멸이라는 단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렇게 폭력은 구조화하고 적이 나의 모습으로 내면화되어버렸다.
‘적의 계보학’의 마지막 단계라고나 해야 할까. 이와 관련한 문제를 천착해온 한병철은 최근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라는 책을 냈다. 여기서 그는 혁명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정말 오늘날 혁명은 불가능한 것일까. 내가 나를 넘어서는 데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발견하는, 역설적인 의미의 ‘원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연재에서 하나씩 생각해봐야 할 물음들이다.
이찬수(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종교평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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