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4

Philo Kalia - 성해영, 『수운 최제우의 종교체험과 신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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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다시읽기”(박길수 대표)에서 성해영, 『수운 최제우의 종교체험과 신비주의』를 읽었다.
원광대학교 박병훈, 조성환 두 분 교수님이 발제하고 참여자들이 함께 토론했다.(이 글은 발표와 토론과 제 견해가 섞여 있는 글임을 말씀드린다)
⑴최제우의 종교체험을 수운의 『동경대전』/『용담유사』(1860~63) & 수운 이후의 『도원기서』(1880), 『천도교창건사』(1933) 등의 자료에 나타난 종교체험을 신비주의로 본다.
⑵신비주의는 서양의 종교전통에서 나온 개념이지만 “‘체험, 수행, 사상’이라는 신비우의의 세부 구성 요소의 관점에서 볼 때 동학은 신비주의적 종교 전통이다.”(26) 신비주의는 세계종교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개념이라서 각광받는데, 종교 전통의 현실적 차이점을 간과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⑶성해영은 신비주의에 대한 비합리, 반이성, 초자연주의, 이단, 나쁜 종교, 개별 종교 전통의 독특성과 독자성 은닉, 비밀(밀의)주의 등의 불신과 비판을 변호한다.
⑷종교체험, 개인에게 의미심장한 의식 변화를 유발, 이를 통해 개인이 보이지 않는 차원과의 관계를 강렬하게 인식한다. 변형된 의식상태를 통해 비물질적 차원에 대한 직접적 앎을 획득하는 사건이다. 동학은 체험과 사상과 수행에서 신비주의다.
⑸성해영은 경신년 상제와의 첫 만남을 이원성의 체험이라고 말한다. 자료의 근거로 ①포덕문, ②논학문과 ③도원기서, ④천도교창건사의 기록을 검토하는데, ③④는 직접적 서술이 아니라 후대의 서술이기 때문에 수운의 체험 자체를 분석하는 데 문제가 있음이 지적되었다. 다만 ③④를 통해 수운의 종교체험이 어떻게 수용, 해석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겠다.
⑹성해영은 ①상제와의 대면이나 천사문답을 통해 나타난 이원성의 종교체험이 ②‘오심즉여심’ 혹은 ‘천심즉인심’의 체험을 통해 신비적 합일을 드러냈다고 본다. 다시 말해 ①에서의 이원성이 ②에서 숙고와 수련의 과정을 통해 일원론으로 내재화되고 성숙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②또한 상제의 말인즉, 동학론에 있는 ‘侍天主’체험에서야 철저한 내재, 일원론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심즉여심’은 동학 수행의 첫 단계에 지나지 않고, 수행을 깊게 하다 보면 天語나 하늘의 降語은 사라지고 온전한 나에 집중하여, 내면의 소리만 듣게 되는 단계에 이른다는 것이다. 신이나 신과의 합일의 체험인 신비체험은 사라지고 온전한 인간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득도의 순간이 곧 완성인지 아니면 수련을 계속 해도 완성에 도달할 수 없는지, 頓悟인지 漸修인지, 기독교의 칭의 교리도 무량한 신의 은총의 역사만이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은총을 힘입어 계속 갈고 닦는 인간의 수행(수련)이 중요한 것인지, 경건주의 전통에서는 한 구원 사건의 여러 차원으로, 즉 칭의-중생-성화-완전-일치(영화)로 보는 경우도 있고, 단계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후자가 교육하기에는 좋다.
존재론적 일치, 이 점이 기독교의 신비체험과 다른 점이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존재론적 신비체험인 unio mystica보다 대화적 신비체험인 communio mystica를 기독교 신비체험으로 말한다. 하느님 – <‘사랑’이라는 공간> - 인간, 사랑 안에서의 신비체험, 사랑의 신비체험, 사랑방 교제인 것이다.
신비주의를 말하려니까 신과 인간, 혹은 신과 세계의 이원론에서 일원론을 말하는 것인데, 서양의 이원론이든지 일원론이든지, 존재론적 개념이다. 둘이 팽팽하게 맞서든가 둘 중 하나는 한쪽에 흡수되어 사라져야 할 판이다. 그러나 동학의 논리는 애초부터 큰 우주 안에 작용하는 生成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誠敬信을 받드는 인간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神이나 신비주의를 말하는 것은, 다 서구적 개념에 오염된 사고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수운의 문헌 자체를 세심하게 검토하는 것이 먼저다.
상제와 수운 사이의 대화나 종교체험을 일, 이원론의 범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상대방을 내 안에 품고 있는 대화론 혹은 음양론 혹은 “신과 인간 사이의 역설적 교호결합의 관계”(김지하)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겠나 싶다.
⑺성해영은, “동학은 일원론적 신비주의와 유신론적 신비주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어”(152), 한국의 전통사상(유불선)과도 다르며 서학과도 다르면서, “경신년의 첫 만남이 전적으로 수동적이었다면, 오심즉여심 체험은 수동성과 능동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통합적인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운의 종교체험과 수행과 사상의 전개를 과정적으로 보면 “이원성/일원성, 지고존재/인간, 자력/타력, 인식론/존재론, 동양/서양 등과 같은 일체의 대립 쌍들이 하나로 통합된다”(165)는 결론을 내린다. 수운 종교체험의 독특성은 “동서양 종교의 특성을 아우르는 동학의 독창적인 신관념”(174)이라는 것이다. 반대되는 것들의 통합,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 신비주의의 중요한 능력이다.
⑻동학의 본주문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성해영은 본주문이 ‘侍’로 시작해 ‘知’로 끝나며, ‘시’ 뒤에는 ‘천주’가 따라오고, ‘지’ 앞에는 ‘만사’가 있음에 주목한다. ‘시천주’가 존재론과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우주의 실상을 언급하고 있다면, ‘만사지’는 이 사실을 궁극적으로 알아차리는 그것도 인간세상(萬事) 속에서 알아차리는 인식론적 측면을 지시한다고 본다. 완전한 지고의 존재를 모심으로써 만사에 통달하게 되는 탁월한 ‘인식’ 상태, 다시 말해 탈존적 인식, 황홀한 인식을 말하고 싶은 듯하다.
이 구도는 신학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하느님 믿음’과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를 통달하는 것, 즉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사태의 두 측면이다. 따라서
동학이 侍天主 – 萬事知 라면
기독교는 信天主 -創造愛, 이렇게 동학과 기독교가 상응한다고 본다.
⑼그러나 이 세상에서 神人合一의 경지가 지속되는가? 一切를 心에 종속된 것으로 보는 불교라면 몰라도, 세상의 변혁을 위한 실천을 큰 과제로 생각(사실 大乘도 이런 것인데)하는 동학이나 기독교는 그렇지 못하다.
수운이 죽음을 예감하면서 쓴 不然其然이나 「흥비가」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수운 자신의 무극대도의 깨달음과 수행만으로 다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성해영은 불연과 기연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기연에 내포된 불연이 오심즉여심 체험을 통해 기연으로 전환되더라도 존재 자체가 주는 경이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이 오심즉여심의 궁극 체험을 통해 기연으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무궁한 한울 속의 모든 것들이 나서 생장하고, 운동하는 것은 여전히 놀랍다.”(205)
수운의 ‘오심즉여심’ 체험은 서양적 의미의 존재 물음의 근원 체험과 다른 것이다. 서양철학은 존재 앞에서의 놀람(경이, thaumazein)과 그 체험이 유발하는 존재론적 물음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말하는데, 성해영은 이를 자꾸 끌어들여 생각하는 것 같다. 수운을 움직였던 지속적인 물음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면, 그것은 존재론적 물음이라기보다는 위태위태한 이 나라, 조선 백성들의 가난과 헐벗음, 조선 후기의 정신적인 아노미... 머 이런 것들이 아닐까? 그러므로 신비체험은 의식 차원의 ‘변형의식’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실존적, 무엇보다 사회, 역사적 물음이 수운의 마음속에 꿈틀거리고 있었다고 봐야 되지 않캈는가!
그래서 수운의 종교체험은 지고존재와의 합일만이 아니다. 侍天主는 곧 萬事知, 여기서 ‘지’는 대상지가 아니라 만사를 변혁하고 바꾸는 강력한 능력이 되어야지 않을까, 그래서 신비체험은 무극대도의 득도를 통해 50,000 이후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가는 행위이지 않을까. 그러므로 수운의 신비주의를 말한다면 지성적 신비주의가 아니라 실천(행위)의 신비주의 쪽으로 가닥을 잡았어야지 않을까. 나는 수운의 동학사상은 도로테 죌레의 <신비와 저항>이나 LA 해방신학자들의 <해방하는 영성>이나 김지하의 <신과 혁명의 통일>에 가까운 정치신학이라고 생각한다.
⑽짧은 생각들
-吾心卽汝心과 유사한 체험은 요한복음 14:11, 12의 말씀이 아닐까. 我在父 父在我(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으면...) 卽과 在의 차이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천도교창건사』에 나오는 수운의 시험(119)은 아주 흥미롭다. 광야에서 예수의 40일 금식 이후에 받은 시험목록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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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水雲) 최제우의 종교 체험과 신비주의 
성해영 (지은이)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7-04-28

문명텍스트 총서 32권.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의 종교 체험을 신비주의의 개념을 통해 분석하여 동학이 지닌 독특하고 창조적인 측면을 조명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동학 역시 여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창시자의 개인적인 종교 체험이 자연스럽게 제도 종교로 발전된 것이라는 기존 연구의 전제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수운이 상제(上帝)에 대해 표한 두려움과 불만, 의심과 당혹감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문제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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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 수운 최제우의 종교 체험과 동학, 그리고 신비주의

I. 서론: 수운의 종교 체험과 신비주의의 비교 연구
II. 종교 체험과 신비주의
1.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2. 종교 체험과 신비주의
3. 동학은 신비주의인가?

III. 수운 종교 체험의 유형과 해석
1. 문제 제기
2. 수운 종교 체험의 유형과 전개 과정
1) 이원성의 체험: 상제와의 첫 만남
2) 천사문답의 전개와 상제의 권위 수용
3) 오심즉여심 체험
4) 수운 종교 체험의 전개 과정
3. 비교종교학과 수운 종교 체험의 해석
1) 종교학의 종교 체험 연구와 수운의 체험 유형
2) 체험과 해석 틀의 상호 관계에서 바라본 수운의 종교 체험

IV. 수운 종교 체험의 의미
1) 독특한 지고 존재 개념
2) 이원적 관계에 대한 예민성
3) 자연스러운 드러남의 수행
4) 적극적인 사회 참여적 윤리관
5) 불연기연(不然其然)과 소진되지 않는 존재의 경이로움

V. 결론: 신비주의와 경계 가로지르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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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총서 발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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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6
개인적인 체험이 종교 사상으로 발전한다는 관점에 설 때, 우리는 한 가지 중대한 의문에 봉착한다. 왜 초기 경전에는 수운이 상제를 의심하며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빠짐없이 등장할까? 심지어 일부 초기 자료에는 수운이 자신을 시험한 상제에게 절식(絶食)으로 불만을 표시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상제의 계시를 동학이라는 종교 사상으로 자연스럽게 발전시켰다는 관점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사실들은 수운이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전해 받는 과정을 극적으로 만드는 장치였던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첫 만남에서 수운이 토로했던 의심과 두려움, 그리고 당혹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P.19
수운의 사례는 종교 체험이 특정한 해석 틀에 완벽하게 포섭되거나, 수행과 교리 체계와 같은 해석 틀이 특정 유형의 종교 체험을 필연적으로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수운 종교 체험은 그가 지녔던 세계관과 같은 해석 틀과 전적으로 부합한 것은 아니었으며, 양자 사이에는 간과하기 어려운 내적 긴장이 발견된다. 달리 말해, 수운 종교 체험은 수운의 해석 틀과 불일치한 까닭에 그에게 새로운 해석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P.103~104
경신년의 첫 만남에서 지고 존재가 자신을 상제라고 밝혔지만, 수운의 당혹감과 두려움이 즉각 해소되었을 리 만무하다. 몰락한 유학자의 후손으로 유교는 물론이거니와 불교, 도교와 같은 동양 종교의 세계관과 수행법에 밝았던 수운으로서는 인격적 지고 존재가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실제로 개인에게 나타난다는 사실이 쉽사리 수용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P.178
내재성과 초월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지고 존재와의 상호 관계는 다양한 차원에서 전개되는 이원적 관계에 대한 동학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발전한다. 이원적 대립 쌍이 빚어내는 역동성을 동학이 어느 종교 전통보다 잘 포착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예민성 역시 이원성과 일원성을 아우르는 수운의 종교 체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P.215
수운의 중심 찾기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내면에서 근원적 중심을 찾아내는 것이므로 중심의 개념 자체를 소거시키는 역설적인 시도이다. 그의 역설적 중심 찾기는 사변에 머무르지 않았다. 수행을 마친 수운이 자신의 부인에게 절을 올리고, 노비 두 명을 면천(免賤)해 수양딸과 며느리로 삼았다는 것은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파격이었다. 이는 당대에 만연하던 차별과 불의, 그리고 불평등과 폭력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수운의 단호한 선언이었다.




저자 소개
지은이: 성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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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내 안의 엑스터시를 찾아서>,<동학의 재해석과 신문명의 모색>,<수운(水雲) 최제우의 종교 체험과 신비주의> … 총 22종 (모두보기)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서울대에서 종교학 석사학위를, 미국 라이스대학에서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의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과 논문으로 『수운 최제우의 종교체험과 신비주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탄트라의 종교 사상 비교」, 「‘무종교의 종교’ 개념과 새로운 종교성」 등이 있다. 종교체험의 비교 연구를 통해 영성과 종교성을 탐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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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신비주의 개념을 통해
수운水雲 최제우의 종교 체험과 동학을 읽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의 종교 체험을 신비주의의 개념을 통해 분석하여 동학이 지닌 독특하고 창조적인 측면을 조명하는 책.
이 책에서 저자는 동학 역시 여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창시자의 개인적인 종교 체험이 자연스럽게 제도 종교로 발전된 것이라는 기존 연구의 전제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수운이 상제(上帝)에 대해 표한 두려움과 불만, 의심과 당혹감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문제의식이다. 저자는 『동경대전』, 『도원기서』, 『용담유사』 등 동학 1차 문헌들을 폭넓게 인용하면서, 수운의 종교 체험이 신비주의 개념을 활용해 적절히 분석될 수 있음을 보인다. 나아가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의 비교 연구가 발전시켜 온 종교 체험의 연구 방법론과 성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수운의 종교 체험을 재구성·유형화함으로써 ‘독특한 지고 존재 개념’, ‘이원적 관계에 대한 예민성’, ‘자연스러운 드러남의 수행’, ‘적극적인 사회 참여적 윤리관’, ‘불연기연(不然其然)과 소진되지 않는 존재의 경이로움’이라는 동학의 독특하고도 창조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Kletos 2021-09-04
메뉴
수운선생의 상제체험을 분석함으로써 계시체험과 합일체험의 조화를 모색하고, 이를 통해 유불선 삼도와 서학 사이에서 동학만이 가지는 독자적 요소를 추출하고자하는 논문이다. 일원성과 이원성 사이에서 이어지는 묘한 긴장을 파고드는 독특한 기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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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1-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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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을 인의(仁義)를 모르는 존재로 간주하는 동양인들이나, 동양을 문명화할 야만으로 여기는 서양인들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삼아 타자를 주변화하는 태도로서, 이는 천도에 반하는 것이었다. 수운은 이런 자기중심적 편견이, 모든 인간은 한울님을 모신 존귀한 존재이므로 궁극적인 우주의 중심이라는, 상제가 전해 주고 자신이 직접 체득한 오심즉여심의 무극대도(無極大道)에 어긋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_성해영, <수운(水雲) 최제우의 종교 체험과 신비주의> , p214

깨우친 이들 또는 종교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신비로운 체험을 한다. 하늘의 목소리 또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깨어나는 경험을 하고 이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는 체험.우리는 역사 속에서 종교적 체험의 사례를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종교적 체험에서 이뤄지는 계시는 큰 줄거리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계시는 종교체험자가 '선택받은 자'로서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고, '선택받은 자'는 그를 따르는 '선택받은 집단'을 이끌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다는 결론으로 흐른다. 대체로 큰 종교의 창시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경험은 '선민'과 '비(非)선민'의 구별이라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대표적인 유일신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나타는 배타주의는 구별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최제우의 동학(東學)의 진행 방향은 조금 다르게 흘렀다. 같은 계시, 다른 결론. 수운 최제우의 종교적 체험은 이전 선지자들과는 어떤 점에서 달랐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리뷰에서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뜻밖에도 사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알 수도 없고 말로 형언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물은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라고 하셨다.(p90)... 너는 무궁 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_ 성해영, <수운(水雲) 최제우의 종교 체험과 신비주의>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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