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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정신철학통편』, 나에게 던진 물음은?
글쓴이 백민정 / 등록일 2023-10-30 09:50:08 / 조회수 415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은 평안남도 출신의 관료였던 서우 전병훈(曙宇 全秉薰: 1857-1927)이 1920년 중국에서 출간한 책이다. 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양철학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첫 세대 한국 지식인들에 대해 공부할 때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들었다. 2000년대 이후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학계에 소개한 연구자들 덕분에 전병훈의 이력과 활동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화서 이항로의 문인 박문일(朴文一:1822~1894)과 친분이 두터웠고, 동래부사였던 강암 이용직, 성재 유중교, 의암 유인석과도 교류했다. 당시 세도가였던 평안도 감사 민병석, 좌의정을 역임한 조병세와도 친분이 있었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전병훈이 올린 시무책과 상소문이 여럿 실렸다. 그는 1898년 고종에게 『백선미근(百選美芹)』과 「만언소」를 올려 자신의 경세적 포부를 피력하였다. 1892년 36세에 의금부 도사를 시작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한 전병훈은 김홍집 내각과의 이견으로 벼슬에서 잠시 물러났지만, 그 후에도 황해도 양무감리(1901), 정3품 통정대부(1904), 양덕군수(1904)와 부령군수(1905)의 직책을 수행했다. 고종 시대에 관리직을 수행하며 정치와 외교, 군사적 실상을 경험으로 목격한 그는 학문과 사유에서도 남다른 통찰력을 보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폐위되자 전병훈은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망명한다. 흔히 20세기 초 한국 지식인들이 일본의 번역어를 통해 서양학문을 접한 것과 달리 생애 후반기를 중국에서 보낸 전병훈은 강유위, 담사동, 엄복, 양계초 등 중국인의 학문적 탐색과 번역을 통해 서양사상을 접했다. 일본과 중국학계, 일본어와 중국어의 의미망을 통해 번역된 서양철학을 접한 한국 지식인들의 사유는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정신철학통편』의 행간을 살피면,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조선후기, 대한제국기에 관료로 활동한 한국 지식인의 고민과 혜안이 엿보인다. 나는 정약용의 국가경영, 정책을 공부하면서 전병훈의 정치사상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전병훈이 이 책에서 『주례』의 예치론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주례』와 예치(禮治)는 다산의 경세학을 푸는 중요한 실마리다. 다산의 『경세유표』는 『주례』에 담긴 중앙정부와 지방향촌의 운영법을 조선의 방식으로 새롭게 구성한 정치서라고 할 수 있다. 다산도 양난 이후의 조선의 피폐한 재정과 곤궁한 삶, 서학(천주학)의 유입을 목격했지만, 20세기 전병훈이 체감한 서구발 제국주의 침략과 서양학문의 위력은 훨씬 더 막강한 것이었다.
방대한 분량의 『정신철학통편』에서 전병훈의 정치관이 잘 드러난 정치철학 분야를 살펴본 나의 소감은 이렇다. 전병훈은 19세기 유학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서양학문의 위력을 목도한 20세기 한국 지식인의 정체성을 모두 보여준다. 정치철학에서도 그는 다산 같은 유교적 경세론자와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관점을 피력한다. 전병훈은 서구인이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구현한 민선제(民選制), 민중의 정치가 선발을 대단히 중시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으로 삼았다. 임금이 관리를 임명하는 것과 서구인이 투표로 정치가를 선발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그도 충분히 인지했다. 다만 전병훈은 관료로서 선배라고 할 수 있는 정약용이 목민관의 추대(推戴)와 방벌(放伐)을 강조한 것처럼, 중국고대의 선양(禪讓)과 추대론을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시원적 역사로 재구성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민선이라는 서구 정치제도에 주목하면서도 여전히 가족 기반의 유교적인 운영원리를 견지하였다. 그는 모든 군목(群牧)의 추대가 아래로 가족 단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다. 가족이 모여 부락을 이루고 부락의 우두머리를 추대하는데 이로부터 여러 관리와 군주를 추대하는 것도 같은 원리로 이루어진다고 이해했다.
전병훈은 서구근대 정치의 주요한 특징으로 민의에 기반한 계약[民約]과 법률 그리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적용한 지방자치제를 꼽았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주례』에서 향촌의 운영원리로 제시된 향례(鄕禮)와 향약(鄕約)을 유교적 지방자치제의 모델로 재해석한 점이다. 전병훈은 『주례』의 규정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향촌에서 덕행과 도의가 있는 자를 민중이 공개적으로 선발해서 지도자로 삼고, 향민이 함께 지킬 자치규약을 관리가 낭독하는 독법(讀法)을 정기적으로 시행할 것과 덕행 및 과실에 따른 상세한 포상과 처벌 조항 등을 제안하였다. 그는 독법이 비록 금지조항을 법으로 단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것을 예치의 일종으로 간주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향례에 포함된 자치규약을 스스로 지킴으로써 강제적 형벌이 필요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이 예치의 목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치규약을 마련할 때 민의에 따른 암묵적 합의가 반영된다고 보았다. 향약에서 보이듯 효제 중심의 가족적 윤리, 향촌의 인륜을 밝히는 규범이 핵심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다산과 마찬가지로 서우에게도 예치는 기본적으로 윤리적 규약과 의례 수행에 참여하는 민중의 자발성을 가장 중요한 전제로 삼았다.
나는 전병훈의 향례론이 19세기 후반 민중에 대한 변화된 정치적 관심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기존의 향례가 민을 치자의 교화 대상으로 간주한 것에서 나아가 민을 단순한 학습의 대상이 아닌 독법 규칙의 자발적 수행자, 향촌의 윤리적 경영에 참여한 마을 운영의 주체로 평가하였다. 그는 향례와 향약 운영에서 보이는 윤리적 실천의 자발성이 정치적 행위의 자발성, 정치 주체로의 성장과 긴밀히 연동된 점을 숙고하였다. 현실적으로는 군주・목민관, 지방 사족과 가부장이 오랜 시간 정치와 교육의 주체였고 민중은 수동적인 계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향촌에서 서당의 증설과 서적의 보급, 주자학 교육의 확산은 민중이 스스로 배움의 주체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나아가 이런 자발적 배움의 주체야말로 유교적 맥락에서 정치의 주체, 즉 윤리적 규약을 맺고 스스로 실천하는 정치적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민중이 가족과 향촌 공동체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마을의 윤리적 경영에 주도적으로 간여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로 성장한 것은 법이나 공권력의 강제성 때문이 아니라 교육과 배움의 자발성이 큰 몫을 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전병훈의 정치사상 부문을 살펴본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소회는 이러했다. 배움이란 무엇일까? 유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쳤고 어떤 유산을 남겼을까? 어떻게 백성은 스스로 윤리적 주체로, 향촌 운영의 주인으로 자신을 자각하기에 이르렀을까? 여기에 다산과 서우가 몸 담았던 유학은 모범이 되었을까, 아니면 넘어서야 할 반면교사에 그쳤을까? 이것이 내가 자신에게 던진 물음들이다. 정치의 주체가 무엇이며 주체라는 범주마저 탈각해야 한다는 비평이 난무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정치의 주인으로 살 수 있을지 답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과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것, 자신의 무의식과 욕망을 마주하는 것, 때로 자신을 넘어서고 포기하는 것, 이 모두를 아우르는 자기 배움의 과정이 없이 정치를 말하는 것은 돌파구 없는 미로를 헤매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오히려 나는 이 점에서 유학을 새로 보고 유학의 유산이 가진 잠재력이 무엇인지 다시 묻고 싶다. 19세기 사회 저변으로 널리 확산된 뜨거운 교육열에 유학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많은 민중들이 기성의 유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바라봤다면 그들의 비판의식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어떤 배움과 교육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도록 추동했는지 그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자문해본다. 서양학문과 마주한 『정신철학통편』은 근대 정치가 제시하지 못한 이런 자기 이해의 물음을 깊이 고민하게 만든다.
글쓴이 : 백민정(가톨릭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