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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라는 사나이
다가와 겐조 (지은이), 한승동 (옮긴이)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2022-04-30
정가
23,000원
일본의 가장 독창적인 신학자로 손꼽히는 다가와 겐조의 대표작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복음서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는 이 책의 예수의 모습은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표현대로 실로 ‘장관’이라 할 만하다.
예수는 전에 없던 새로운 진리를 설파한 인물이 아니다. 당연히 예수도 역사의 상황에 놓인 한 인간이었다. 유대교가 하나의 종교를 넘어 사회 지배 구조로서 군림하던 1세기 초 팔레스티나의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예수의 언행을 단순한 도덕적 교훈으로 받아들여서는 예수 발언의 진의에 다가가지 못한다.
목차
제1장 역설적 반항자의 삶과 죽음
1 역사의 선구자
2 예수의 출생
3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기도하나?
4 예수 서술의 방법
5 예수는 사랑의 설교자가 아니다
6 ‘십계’ 비판
7 역설적 반항
8 가난한 사람은 정말로 행복한가?
제2장 예수의 역사적 장
1 헤로데가와 로마풍
2 솔로몬의 영화
3 종교사적 배경?
4 예수와 열심당
5 제국의 세금과 신전세(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제3장 예수의 비판- 로마제국과 정치 지배자
1 예수의 상대
2 재난으로서의 로마 지배
3 오른쪽 뺨을 맞으면
4 국민들의 지배자
5 노예에 관하여
6 사회관계와 신 관념
제4장 예수의 비판- 유대교 지배 체제를 향해
1 예언자의 무덤을 짓는 자
2 예수와 구약 율법
3 율법학자 비판
4 ‘더러움’과 ‘깨끗함’- 바리사이파의 생활 지배
5 ‘안식일’ 비판
6 신전 귀족의 권력
제5장 예수의 비판- 사회적 경제적 구조에 대하여
1 날품팔이 노동자의 임금 또는 사회적 평등
2 대토지 소유, 농업 노동자, ‘실업’
3 분수령의 양쪽- 지주의 자선, 하느님 앞의 평등
4 농민 반란- 은유적 표현의 한계
5 자본의 증식과 능력 숭배
6 소작인의 빚을 탕감하라
7 부에 대한 직감적인 반발
제6장 종교적 열광과 종교 비판의 상극
1 예수의 종교적 열광의 자기 상극
2 하느님의 나라- 유대교의 발상
3 하느님의 나라- 세례자 요한의 극한
4 ‘죄의 용서’를 빌고 싶다면…
5 예수와 세례자 요한
6 요한의 죽음
7 윤리 관념의 이상한 확대?- ‘간음’한 여인
8 예수 주변의 여인들
9 ‘하느님의 나라’의 역설적 비판
10 종교적 열광- 병의 치유에 몰두
11 식민지 지배하의 기적 신앙
12 예수의 열광- 이상이 일상에 침투하기 시작하다
13 ‘사람의 아들’- 종말론적 확신
14 ‘사람의 아들’- 한 인간의 확신과 절망
15 예수 수난 이야기
16 십자가 죽음의 고통
후기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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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예수는 살해당한 사나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명쾌하게 살해당했다. 그 반역의 정신을 시대의 지배자는 죽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예수를 말살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를 껴안음으로써 그 정수(精髓)를 제거하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단 보기 좋게 성공했다. 체제에 대한 반항아가 암살당하거나 억압당해 가난 속에서 죽어간 뒤, 체제는 그 인물을 위인으로 찬양함으로써 자신의 질서 속에 짜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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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루카 복음서가 묘사하는 상은 확실히 시적이고 아름답다. 밤에 양치기들이 양을 지키며 노숙하고 있는 곳에 천사가 나타나 구세주의 탄생을 알린다. 그러자 홀연 하늘의 군사들이 나타나 대합창을 우주에 울려 퍼지게 한다. 밤을 새워 일하고 있을 때, 우리도 땅바닥에 넙죽 엎드린 생활에서 우리를 해방해 줄 구세주가 이런 밤에 어딘가에서 태어나 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그것은 다 큰 성인이어서는 안 되니까 방금 태어난 아기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해방은 미래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꿈은 미래의 것이어야 한다. 그럴 때 하늘의 군사들의 대합창이 울려 퍼진다면, 게다가 잠에 곯아떨어진 세상에서 보기 싫은 자들에게는 들리지 않고 몰래 일어나 일하고 있는 우리한테만 살며시 들려오는 대합창이라면, 우리는 그 꿈의 계시에 행복을 느끼고 예전과 다름없이 평생 넙죽 엎드린 채 일을 할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죽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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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의 전승이라는 것은 이런 예수의 갖가지 발언들을 같은 종류의 것들은 하나로 모으고, 짧은 것은 하나의 언사로 만들어 한 장면에서 발설한 것으로 해서 지극히 짧은 단편 전승으로 정리돼 전해진 것이다. 물론 전승을 모으고 정리한 것은 그리스도교도이기 때문에 거기에 여러 호교론(護敎論)적인 생각, 교조(敎條)적인 선전이 가미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각 복음서의 저자들이 그것을 쓸 때 자신의 사상적 관점에서 다듬었다. 본시 하나로 모으고 짧게 정리한다는 것이 이미 극도의 추상화 작업이다. 인간 삶의 무수한 장면들은 짧게 몇 줄로 다듬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논의를 하다가, 예수는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멘, 그렇다면 당신들에게 분명하게 선언하겠다.’ 사람들을 상대로 긴 연설을 할 때, 도중에 잠시 말을 끊고 ‘아멘, 나는 분명히 말한다’라며 자세를 가다듬고 결정적인 말을 꺼낸다. 아니 애초에 갑자기 사람들 붙잡아 놓고 ‘아멘, 당신에게 말씀드리겠소’ 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래 전해져 온 종교적 권위를 앞세우며 점잖게 나중에 살며시 입을 맞춰 아멘하고 찬동하는 그런 화법을 예수는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얼마든지 있었다. 소리치지 않으면 안 될 것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살아 있다는 건 그런 것이다. 이 사회체제 속에서 수탈당하며 살아가노라면 소리치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또는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덕에 힘이 어느 정도 솟구치면 그것이 소리가 되는 건 당연하다. 그럴 때 어떻게 권위가 실린 발언에 대해서만 살며시 목소리를 합쳐 아멘하고 말해야만 하겠는가. 그건 아니다. 나는 말하겠다. 아멘, 하고 단호하게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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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지는 결국 그 사람이 살고 있던 역사의 장(場)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착한다. 설사 추상적 사상의 언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역사적 인물의 말을 제대로 알아내려면 그 사람이 살고 있던 역사적 장을 봐야 한다. 하물며 예수의 그와 같은 활동을 묘사하려 한다면 이 문제는 빠뜨릴 수 없는 요소다. 이런 문제의식 없이 예수를 묘사하는 것은 존재의 극히 표층적인 부분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표층의 단순한 나열만으로 시종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소재를 그저 나열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결국 자신이 내면 깊숙이 자각하지 못한 채 지니고 있는 현재의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거기에 투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의 장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나름으로 예수를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묘사한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모습을 거기에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의식을 자신이 자각하지 못한다면 결국 체제를 떠받치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자신도 모르게 순응하고 있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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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일본 사상가, 문예평론가): 『예수라는 사나이』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복음서의 의미를 대단히 전도시키고 있어서 일종의 장관이라 할 만하다. 다가와 겐조는 성서학이나 역사학의 성과에 근거하여 그 ‘역사적 장소’를, 예수가 속한 사회관계의 그물망을 읽는다. 그러나 역사적 ‘공간’이 이런 담론들의 ‘장소’가 아님은 자명하다. 다가와 겐조가 한 일은 사실은 그 반대이며 일반적인 성서학자와 달리 예수의 담론의 ‘장소’에서 역으로 그 역사적 장소를 읽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역사적 연구나 신학적 연구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 읽기가 가능한 것은 그가 바로 예수의 담론의 ‘장소’를 읽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다가와 겐조는 역사적인 사실, 예수의 말을 ‘재현’하게 되어 버린다.
한겨레: 한겨레 신문 2022년 5월 6일 출판 새책
저자 소개
지은이: 다가와 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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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예수라는 사나이> … 총 1종 (모두보기)
일본의 신약학자. 자신을 ‘신을 믿지 않는 크리스천’이라고 밝히고 있다. 도쿄대 종교사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 서양고전학과에서 공부하다가 1965년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에티엔 트로크메의 지도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부터 1970년까지 도쿄 국제기독교대학에서 가르쳤으나 채플 예배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기도한다’는 내용의 설교가 문제가 되어 학교에서 추방되었다. 1972~1974년까지 괴팅겐대학, 1974-1976년 자이레국립대학 신학부 교수, 1977년 스트라스부르대학의 객원교수로 있었고, 귀국한 뒤 오사카여자대학에서 1999년까지 가르쳤다. 그 뒤 집필 활동을 하면서 효고현 니시미야 등에서 사숙을 주최하고 있다. 루돌프 불트만이 4복음서의 모순을 지적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므로 신을 믿지 않는 크리스천이야말로 진정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고 문헌 비판에 입각한 신약성서의 전통 위에서 그리스도교, 종교, 현대 사회 비판 활동을 벌이고 있다. 『신약성사 번역과 주해』(전8권)는 신약성서 번역과 비평의 기초 자료인 에버하르트 네스틀의 그리스어 원본 성서Novum Testamentum Graece에 기초해 13년 동안 신약성서 전체를 새로이 번역하고 상세한 주를 단 기념비적 저작으로 제71회 마이니치 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그 외 주요작으로 『책으로서의 신약성서』 『예수라는 사나이』 『원시 그리스도교의 한 단면』 『종교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 사상으로의 초대』 『역사적 유비의 사상』 『굳건히 선 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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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한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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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우리는 왜 시국선언을 하는가>,<서경식 다시 읽기>,<사회를 말하는 사회> … 총 64종 (모두보기)
서강대학교 졸업후 《한겨레신문》 창간 멤버로 합류해 도쿄 특파원, 국제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현재 출판기획 및 번역가로 활동하며 《시민언론 민들레》 국제분야 담당 에디터를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지금 동아시아를 읽는다》 《대한민국 걷어차기》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 《국체론: 천황제 속에 담긴 일본의 허구》 《우익에 눈먼 미국》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오키나와》 《종전의 설계자들》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재일조선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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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와 겐조(지은이)의 말
한 사람의 인간은 일생에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나는 다른 것을 할 여유는 별로 없고, 예수를 그리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은 있었다. 그런 만큼 엉거주춤한 채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내 일생의 모든 것을 걸고 쓴다면 죽기 직전에 완성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옳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8년이나 쓰기를 계속한 것은 어쩌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이것은 끝내 버리면 좋을 일이 아니다, 언제까지라도 계속 쓰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직접 붓을 들고 있지 않은 시간에도 계속 예수를 그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한 이 사나이의 무시무시한 삶을 그릴 수 있으려면 자신도 거기에 대응할 수 있을 정도의 삶의 질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도저히 그 정도까지의 삶을 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가능한 한 거기에 근접하는 삶의 질은 지키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그린다는 행위가 예수를 뼈대를 발라내고 부둥켜안는 꼴이 되는, 2천 년간 계속 반복되어 온 행위에 나도 빠져들게 될 것이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예수, 역사의 본질을 짊어진 역설적 반항아
『예수라는 사나이』는 일본의 가장 독창적인 신학자로 손꼽히는 다가와 겐조의 대표작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복음서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는 이 책의 예수의 모습은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표현대로 실로 ‘장관’이라 할 만하다.
예수는 전에 없던 새로운 진리를 설파한 인물이 아니다. 당연히 예수도 역사의 상황에 놓인 한 인간이었다. 유대교가 하나의 종교를 넘어 사회 지배 구조로서 군림하던 1세기 초 팔레스티나의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예수의 언행을 단순한 도덕적 교훈으로 받아들여서는 예수 발언의 진의에 다가가지 못한다. 주의 기도, 그리스도교의 중심 사상인 사랑, 안식일에 대한 비판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등의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은 다가와 겐조의 역사적 장 속에서 예수의 담론을 읽어내는 시도에 의해 완전히 그 의미가 뒤바뀐다. 예수가 말한 수많은 비유와 언행은 유대교의 전통에서는 널리 알려진 상식적인 것들이 많다. 그리스도교가 전매특허인 것처럼 내세우는 교리의 중심 내용은 일반적인 생각보다도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유대교의 유산에 의존하고 있다. J. 예레미아스를 비롯해 많은 신학자들이 예수가 활동하던 팔레스티나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저자 다가와 겐조는 가장 객관적인 예수상을 추구하려는 근대 비판 신학의 한계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저자 다가와 겐조의 역사철학이다. 서양 문화에서 불가결한 전제는 신약성서가 신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성서의 한 대목 한 대목에 대한 정밀한 실증 연구가 이루어져 있으나 서양의 신학자들이 체질화되어 있다시피 한 신앙으로 인해 보지 못하는 한계를 저자 다가와 겐조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본다. 『예수라는 사나이』는 성서학과 역사학의 성과에 근거하여 예수가 있었던 ‘역사적 장소’를, 예수가 속한 사회관계의 그물망을 읽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의 담론의 장소이고 결코 그 자리를 떠나 폭론으로 치닫지 않는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정밀하면서도 대담한 작업을 통해 역사적 연구나 신학적 연구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예수의 담론을 읽어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객관적인 예수를 재현한다. 독자들은 『예수라는 사나이』를 읽으며 ‘예수의 바로 곁에서 그를 목격하는 듯한 현장감을 느끼고 흥분’(작가 시마다 마사히코의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신약성서라는 불충분한 전승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역사 속 실존 인물로서의 예수를 복구하는 것은 루돌프 불트만이 말했듯이 불가능할 것이다. 결핍의 부분이 워낙 많고 복음서 저자들의 관심이 결코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이 묘사하는 예수는 대부분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육체가 지워지고, 현대인인 자신들의 가치관을 투영한 예수상이다. 저자 다가와 겐조는 예수를 그리스도교의 선구자가 아니라 역사의 선구자로 규정한다. 모든 선구자와 마찬가지로 예수도 시대에 반항한 인물이다. 로마 제국과 특히 유대교 지배 체제에 대한 역설적 반항으로 일관한 예수는 결국 권력자들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며 체제에 반항한 예수를 권력은 살려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비판이 어디로 향해 있었는지는 예수의 살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웅변한다. 예루살렘 신전 체제에 대한 비판은 예수 죽음의 직접적인 이유다. 단순히 신전을 정화하겠다는 사나이를 그 신전 체제의 권력자들이 죽일 리는 없다. 예수는 유대교의 신전 체제를 무너뜨리려 했고 바로 그 이유로 죽은 것이다.
종교가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꽁꽁 묶어버리는 상황을 비판한 예수는 결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 그런 활동을 벌인 것이 아니다. 저자는 ‘예수의 죽음에 희망이 있다면 죽음 자체 속에서가 아니라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면서 활동을 계속한 모습 속에 있다’고 마무리하면서 예수의 부활과 그 권위를 내세워 신자들의 내세를 약속하는 지금의 그리스도교에 대해 비판한다. 그리고 묻는다. 예수가 비판한 사제와 레위인은 지금의 누구를 가리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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