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귀현, 『신유물론이다』(도서출판날, 2024)
공동체 제작소에서 어제 늦은 저녁까지 함께 읽은 책이다.
하나의 철학사상의 영향이 50년에서 100년 이상 지속되었는데, 20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그 수명이 20년도 못 가는 것 같다. 5,60년 전 실존주의 신학과 실존철학을 시작으로 네오마르크스 사상인 비판이론, 구조주의와 영미의 언어분석철학, 해석학, 현상학, 탈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던이즘을 소화하기에도 바쁘게 최근 ‘인류세의 철학’, ‘객체지향적 존재론’, ‘사변적 존재론’ 혹은 ‘신유물론’이라는 이름의 사상이 한국 정신계에 썰물처럼 밀려들고 있다. 서양 번역서들이 판치고 있는 독서계에 한국인 철학자 심귀현이 이들을 소화해 복잡하고 방대한 사상을 간결하게 서술한 책이라서 새로운 개념들은 어렵지만 읽기는 수월하다. 신유물론을 대변하는 사상가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 현상에 관한 철학적인 분석과 대안을 제시하는 사상이다.
기후위기는 지난 400년 산업화를 달성하기 위해 무한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면서 자연의 무분별한 착취가 초래한 결과이다. 근대과학과 기술에 기초한 산업은 자연을 죽은 물질로 여겼다. 점증하는 지구 온난화가 계속되는 기후 비상사태는 이제 물질이 더 이상 죽은 사물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위한다. 신유물론은 물질의 반란을 달래듯 죽었다고 생각한 물질을 보듬고 제격을 찾아 대우한다. 신유물론은 고전적 원자론이나 맑스주의적 유물론이 아니기 때문에 ‘신’자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신유물론은 데카르트적인 정신/물질의 이원론을 버리고 인간만이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물질 또한 활동적 주체임을 선언한다. 신유물론은 물질과 마음 사이의 경계를 없앤다. 신유물론은 존재를 단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다자적으로 연결된 집합체로 본다.
이 책에 소개된 철학자는 5명인데 라투르를 빼곤 4명이 모두 여성이다. 이것은 이원론을 강하게 거부하는 신유물론이 자연은 여성 문명은 남성, 몸은 여성 정신은 남성 식의 이원론을 거부하는 페미니즘과 밀접함을 말해준다. 이들은 글쓴이와 동시대를 사는 인물들로서 세계적인 이론가가 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문명의 위기에 대처할 만한 한국인의 큰 이론이 제시되지 못하고 서양의 이론을 수입하여 번역하거나 소개해야만 하는 처지가 유감이지만 짊어지고 가야 한다.
첫 사상가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2022)이다. 라투르의 저서는 10권 이상 우리말로 번역되었고 연구서도 여러 권이다. ‘행위자 연결망 이론’이 라투르의 명찰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가 행위자이며, 따라서 세상은 무수한 행위자가 북적대면서 목소리를 내고, 힘도 겨루는 곳이 되었다고 본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을 중심에 놓고 세계를 줄 세울 수 없다. 인간은 자신으로 인해 위험에 처한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비인간 존재들의 능동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라투르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은 비인간 존재들의 목소리를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행위 능력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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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실재 전체는 행위자들(actors)의 연결망, 피행위자는 없다. 모든 것들은 분자, 원자, 소립자들에 이르기까지 행위자들이다. 바라드의 ‘얽힘’도 그렇고 화엄의 연기론으로 이런 원리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참여자A는 말했다. 신유물론자들은 철저하게 이원론을 거부한다. 그러니 주객 대립, 주체와 사물의 대립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행위자들의 연결망이라도 모든 사물이 동시에 행위자들인가? 때로 행위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수용자이기도 한 것은 아닌가? 행위자들 간의 작용, 반작용, 상호작용이 아니라, 행위와 수용, 능동과 수동의 부단한 길항작용이야말로 세상을 더 역동적이게 만들지 않는가? 행위만 말하면 때때로 쉬고 싶을 때 쉴 틈이 없다. 받아주는 홈(home)이 있고 환영하는 고향(Heimat)이 있고 부르면 응답하는 벗들이 있는 세상이 살맛 나는 세상 아닐까. 서양인들이 동양을 수동성의 나라라고 했다가, 사물들은 인간 주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객체라고 했다가, 이제 다 주체로, 행위자로 풀어주면서, 객관적 과학적 실재관을 내세워 무한 경쟁을 해보자는 속내는 아닌가?
신학자 요하네스 메츠(Johannes Metz)를 모시고 싶다. 그는 그리스도 ‘수난의 기억’(memoria passionis)로 유명하다. 수난은 수동의 의미다. 예수는 수난사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주로 능동자, 행위자였는데, 수난사화에서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고난을 고스란히 당하는 수동자이다. 그래서 그는 수난당하는 자들과 함께하는 위로자이며 구원자이다. 이런 수난(passion)은 열정(passion)이고 무한한 사랑이다. 세계를 행위자들의 연결망으로 중립화(neutralization)할 것이 아니라 차이나는 것들을 개성화(individuation)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가.
둘째 사상가는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 1954~ )이다. 브라이도티는 보편적 주체를 거부하고 유목하는 주체를 내세운다. 유목하는 주체란 ‘여자-되기’, ‘타자-되기’, ‘동물-되기’, ‘벌레-되기’ 등, 경계를 넘나드는 변신하는 존재이다. 독립된 개체의 정체성 정립을 교육받은 근대인에게 ‘타자-되기’는 참 난처한 과제로 들린다. 브라이도티는 자연과 문화, 기술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의 ‘포스트휴먼-되기’는 다수와 긍정적인 관계맺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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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여자-되기’ 역으로 여자의 ‘남자-되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일까? 경계를 넘나들면서 변신하는 존재, 숲에 가서 오늘은 나무에게 우선 허락받고 ‘나무-되기’를 시도해 봐야겠다.
셋째는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생태철학자인 제인 베넷(Jane Bennet, 1957~ )이다. 그는 생기적 유물론을 주장한다. 사적 유물론이 자연을 생산 수단으로 본 반면, 생기적 유물론은 자연의 활력에 주목한다. 베넷에게 생기란 사물들이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변형하는 힘이다. 생기는 사물의 역량을 가리키는 말이다. 베넷에게 인간과 사물은 상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가 된다. 인간은 더 이상 물질에 능동성을 부여하는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의 말처럼 “인간은 걷고 말하고 생각하는 무기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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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적 유물론, 도전적이고 참신한 실재관이다. 인간과 비인간은 동등한 관계라는 선언, 폭염, 폭우, 지진 등 기후변화를 경험하면서 인간은 전혀 새롭게 철학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래서 물질도 죽은 사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행동자임을, 인간도 무기질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걷고, 말하고, 생각하는 무기질이라고 한다. 잘 걷고, 바로 말하고, 바르게 생각하자.
넷째, 도나 해러웨이(Dona Haraway, 1944~ )의 이력은 화려하다. 그는 동물학, 철학과 영문학,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하고 최종적으로 생물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85년에 <사이보그 선언>을 발표했는데, 자연과 문화, 남성과 여성뿐 아니라 인간과 기계의 이분법의 경계를 해체한다. 그는 우리 모두가 사이보그, 혼종체(hybrid)라고 말한다. 사이보그는 유기체와 무기체인 기계, 물질과 비물질,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부단히 횡단한다. 해러웨이의 튀는 사고는 계속되는데 다음은 ‘반려종 선언’이다. 반려종은 물질들, 즉 동물, 인간, 사물은 관심을 가지고 서로 얽히는 관계로, 서로의 살 속으로 감염되는 혼종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비인간은 함께 공동생성하고 공진화한다. 그는 인간도 비인간과의 공생을 위해 ‘퇴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퇴비가 된다는 것은 썩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새로운 생성을 위한 준비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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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 그대의 공부 경력은 5명 중 가장 화려하다. <선언>도 경청할 만하다. 인간도 ‘퇴비’가 되자는 말, 성경에 나오는 밀알 비유가 떠오른다. 한 알의 씨앗도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퇴비란 새로운 생성을 위한 죽음이라 말한다. 혼과 몸의 구분 없이 모두 퇴비가 되는 길, 최상의 포식자 위치에서 다른 생물의 피식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살았던 인간, 과연 자신의 몸을 다른 생명을 위한 먹이로 내 줄 수 있을까. 대화자B로부터 불교의 ‘천화’(遷化) 개념을 소개 받았다. ‘천화’란 임종을 앞둔 고승이 홀로 깊은 산속으로 걸을 수 없을 정도까지 걸어가 어느 지점에서 쓰러지면 스스로 나뭇잎을 주워 모아 바닥에 깔고 다시 그 몇으로 자신을 덮어 생을 마치는 형태라고 합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란 가르침을 따르는 경계에서 인간의 몸도 화장하지 말고 자연으로 온전히 돌아가는 ‘천화’를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양자 물리학을 공부한 카렌 바라드(Karen Barad, 1956~ )이다. 그의 새 이론은 ‘행위적 실재론’이란 말 안에 담겨 있다. 행위적 실재론은 존재의 ‘행위’와 ‘생성 능력’을 강조한다. 양자물리학자답게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고 내부-작용을 통해, 다시 말해 물질의 ‘활력’은 물질의 바깥이 아닌, 물질 안에서 발견한다고 말한다. 물질 안에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바라드는 얽힘을 ‘회절’을 통해 설명하는데, 회절적 방법론에서는 반복이나 재현은 사라지고 매 순간 새로운 행위성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바라드는 물질도 느끼고 대화를 나누며, 겪고 욕망하며, 갈망하고 기억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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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절’, 실재에 대한 정말 새로운 사유방식이다. 원형의 반복이나 재현이 아니라, 세계는, 우주는 매 순간 새로운 행위성, 외적인 간섭이나 개입, 혹윽 유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내부작용을 통해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실재관!
저자는 신유물론의 의미를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세계를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거부하고, 둘째, 실체 개념을 거부하고, 셋째, 물질은 ‘실체’가 아닌 ‘얽힘’의 관계 속에서 생성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