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정
모리스 블랑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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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모리스 블랑쇼'의 [기다림 망각]을 다시 읽으며 예전에 했던 정리를 매만져본다. 블랑쇼 작품들은 볼 때마다 새로운 부분이 보이는 신비로움을 안겨주니, 다음의 설렘도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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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잘 주고받으려는 마음이 오히려 침묵으로 바뀌게 될 때가 있다. 해야 할 말과 할 수 있는 말이 자리 잡고 있지만 마음 속에서 끄집어낼 이야기로부터 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침묵을 선택한다. 다치지 않으려는 의지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피난처와 같은 동굴. 그러나 상대방은 알고 있다.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건지 우리 둘 다 이미 알고 있다.”는 그 사실 마저도 말이다.
작품 속 남녀는 마음이 내킬 때 떠날 수 있다는 보장으로 지금 여기 머물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서로가 서로를 떠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는 실행될 수 없어 보인다. 당장에 떠날 수도 있지만 떠나지 않는 것, 그래서 결국 계속 머무를 것이라는 사실. 이것을 블랑쇼는 ‘기다림’으로 표현했다. 램프를 맴도는 나방처럼 서로의 주위에서 방황하는 주인공들의 기다림. 이번 다시 읽기에서는 망각과 같은 기다림과 함께 지난번 보다 주인공들의 침묵과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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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저와 관계없는 것들을 말할 때조차, 당신의 모든 말은 제게 던져진 물음이에요.", “모든 것이 당신과 관계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관계있는 게 아니에요. 저는 여기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당신에게는 충분하지요.”. “그렇습니다. 그것만으로 제게 충분하지요. 그러나 제게는 당신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저에 대한 확신이 없나요?”, “그게 당신이라면, 있지요.”
- 이 책은 '기다림과 망각'이라는 두 갈래의 이야기다. 그 깊은 곳에는 침묵의 고독이 자리를 잡고 있다. 기다림은 기다린다는 것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역설적으로 어떤 것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기다림의 움직임은 언제나 그 대상을 무한히 앞질러 간다.” 블랑쇼의 말들은 희미하면서 동시에 선명하다. 사실을 말하지도 않고, 어떠한 주장을 펼치지도 않으며 가르치지도 않는, 자기 방식의 해석이 가능한 추상화를 보는 기분을 들게 한다. 그렇지만 곱씹어보면 너무나 그렇구나, 참으로 그렇구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 망각의 사전 의미를 찾아보면. 어떤 사실에 대해 잊어버림으로 나온다. 작품에서의 망각은 이 의미를 넘어선다고나 할까. 무엇을 잊어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잊을 것인지, 잊을 수 있기는 한 건지, 많은 것들이 모호하기에 모든 망각을 포괄해 버리는 모습이다. 망각은 존재 자체를 말하며 그 존재는 망각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의 하나다. 내 눈에 보이는 것과 그것을 보고 있는 나 사이의 관계의 사건 중 큰 한 가지인 '망각'. 블랑쇼는 이를 '현전'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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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더 이상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망각하십시오.” “저는 모든 것을 망각했어요. 당신도 망각했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저를 망각했습니다.” 그들 사이에 실제 대화는 없다. 기다림 속에서만 어떤 관계가, 기다리기 위해 한 말들이, 말들의 기다림이 그들이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이어진다. 아무것도 망각하지 않는 기억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망각에 동의하고 있는 모습이다.
- 이 작품은 모호하지만 특징이 있는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말로는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으니 행위로나마 알아 볼 수밖에 없다고 하면 될까. 그렇다고 연극이나 영화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없다. 블랑쇼 식으로 말한다면 다만 현전하고 있다는 상상만으로 그 느낌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것이 모순 가득한 주인공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어쩌면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 블랑쇼는 소설가라면 누릴 수도 있을 권리 즉 소설의 허구를 스토리에 맞추어 구도를 잡아 꾸려나가는 행위를 아예 버렸다. 또한 교훈적이거나 도덕적인 메시지를 주는 자체도 취하지 않는다. '독자 위에 우뚝 서는' 저자의 모습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데, 이야말로 블랑쇼가 그의 어느 작품에서든 충분히 보여주는 스스로 내려온 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역자는 “기다림과 망각이 하나의 행위라면, 그것은 바로 저자 스스로 행한 사라짐의 행위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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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일 제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말한다면, 우리에게 단 하나의 기억만이 남아 있을 거예요.”, “공동의 기억?”, “아닙니다. 우린 한 번도 공동으로 기억 속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망각 속으로 들어가겠군요.”,“아마도, 망각 속으로.”, “그래요. 제가 망각할 때, 이미 당신과 보다 더 가깝다고 느껴요.”, “가까움 가운데, 하지만 다가가지는 않은 채.”, “바로 그래요.”, “진실 없이, 비밀도 없이.”
- 만남에서의 완전한 자유는 그 상대를 망각해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인공들을 끈덕지게 따라붙는 것이 있는데, 바로 ‘망각의 말’이다. 망각의 말이라는 게 성립이 되는 표현이긴 한 걸까. 이게 가능하다면, 이것들이 망각될 수 있는 것들이긴 한 걸까. 그게 또 가능하다면, 모든 것들이 망각되는 그 순간은 어떻게 망각이 되는 것일까. “망각이 망각 속에 묻힌다”는 블랑쇼의 이 말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 블랑쇼는 독자를 위해 어떤 것도 정의 내리지 않는다. 이는 그만의 침묵 방식이다. 명쾌한 말을 원하는 우리들은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의 행위로 대상을 접하며 경험을 쌓는데, 이때의 망각은 우리를 지치게한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망각으로 들어가기를 요구받았고, 당연히 보고 말하는 것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기다림은 망각을 견디는 움직임이며 무한의 기다림이다. 끊임없는 기다림이 그들 ‘사이’에 놓여지고, 그 사이에서 그들은 ‘사랑’의 과정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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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마저 정리할 이 멋진 [기다림 망각]의 뒷부분. 이미 아는 이야기임에도 설레고 또 좋다. 출판사 그린비와 옮긴이 박준상이 고맙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모리스 블랑쇼는 말할 수도 없이 너무나도!
(정리 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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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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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모리스 블랑쇼'와 '밀란 쿤데라'로 페이스북 방을 꾸민 기념(!)으로 블랑쇼의 [기다림 망각] 예전 포스팅을 다시 들추어 보았다. 비록 부분 독서지만 새로움이 또 느껴지니 이어질 다음 설렘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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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군가와 말을 잘 주고받으려는 마음이 오히려 침묵으로 바뀌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내 안에 해야 할 말과 할 수 있는 말이 풍부하게 자리 잡고 있지만 마음속에서 이끌어 낼 이야기로부터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 침묵을 선택한다. 다치지 않으려는 의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피난처와 같은 동굴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안다. “그 말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그것을 잘 알고 있다”는 그 사실 마저도 말이다.
작품 속 남녀는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안전한 보장 덕분에 지금 여기에 머물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 그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서로가 서로를 떠나는 일, 하지만 실행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보인다. 당장에 떠날 수도 있지만 지금 바로 떠나지 않는 것, 그래서 결국 계속 머무를 거라는 것. 이것을 블랑쇼는 ‘기다림’으로 표현했나보다. 불 밝은 램프를 맴도는 나방처럼 서로의 주위에서 방황하는 주인공들이다. 작품을 다시 만날 때마다 그 전보다는 좀 더 주인공들을 이해할 수 있는 내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다행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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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저와 관계없는 것을 말할 때조차, 당신의 말은 제게 던져진 물음이에요.” “모든 것이 당신과 관계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관계있는 게 아니에요. 저는 여기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당신에게는 충분하지요.” “그러나 제게는 당신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저에 대한 확신이 없나요?” “당신이라면, 있지요.” 이 책은 기다림과 망각이라는 두 갈래의 이야기다. 그 깊은 곳에는 침묵의 고독이 자리를 잡고 있다. 기다림은 기다린다는 것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역설적으로 어떤 것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기다림의 움직임은 언제나 그 대상을 무한히 앞질러 간다.”
블랑쇼의 말들은 희미하면서 동시에 선명하다. 사실을 말하지도 않고, 어떠한 주장을 펼치지도 않는, 다시 말해 자기 방식의 해석이 가능한 추상화같다. 망각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실에 대한 잊어버림인데, 작품에서의 망각은 이 의미를 넘어선다고나 할까. 무엇을 잊을지, 무엇을 어떻게 잊을지, 잊을 수는 있는지, 많은 것들이 모호하기에 모든 망각을 포괄한다. 망각은 존재 자체를 말하며 그 존재는 망각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것과 그것을 보고 있는 나 사이의 관계 중 큰 사건 한 가지는 바로 망각! 블랑쇼는 이를 '현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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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말하지 마세요. 모든 것을 망각하세요.” “저는 모든 것을 망각했어요. 당신도 망각했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나를 망각했어요.” 그들 사이에 실제 대화는 없다. 기다리기 위해 한 말들이 그들의 말들 가운데 계속 이어진다. 아무것도 망각하지 않는 기억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망각에 동의한다. 말로는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으니 행위로 그 뜻을 알아 볼 수밖에 없다고 하면 될까. 그렇다고 연극이나 영화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없다. 블랑쇼 식으로 말한다면 다만 현전한다는 상상만으로 그 느낌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모순 가득한 주인공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어쩌면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블랑쇼는 소설가이기에 누릴 수 있는 권리 즉 소설 속 허구를 스토리라인에 맞추어 짜임새 있게 꾸려나가는 행위 자체를 아예 버렸다. 또한 독자들에게 철학적이거나 도덕적인 메시지를 주는 자체도 결코 취하지 않는다. 그들의 머리 위에 우뚝 서는 저자로서의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블랑쇼의 어느 책에서든 발견할 수 있는 블랑쇼가 지극히 추구했던 스스로 내려온 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역자는 말한다, “기다림과 망각이 하나의 행위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저자 스스로 행한 사라짐의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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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말한다면,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기억만이 남을 거예요.” “공동의 기억?” “아뇨. 우리는 공동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망각 속으로 들어가겠군요. 내가 망각할 때, 이미 당신과 보다 더 가깝다고 느껴요.” “가까움 가운데, 하지만 다가가지는 않은 채.” “그래요. 진실 없이, 비밀도 없이.” 만남에서의 완전한 자유는 그 상대를 망각해야 얻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들은 자신들에게 남은 공동의 것으로부터 갈라놓을 것이 있는데, 이는 바로 망각의 말이다.
망각의 말이라는 게 성립이 되는 표현이긴 한 걸까. 그게 가능하다면 망각될 수 있기는 한 걸까. 그게 또 가능하다면 모든 것이 망각되는 그 순간은 어떻게 망각되는 것일까. “망각이 망각 속에 묻힐 것이다.”라는 블랑쇼의 말은 무엇을 말하고 싶던걸까. 앞서도 살짝 말했지만, 그는 작품을 대하는 독자들과는 정의도 교훈도 그 어떤 것도 주고받지 않음을 강조한다. 이는 수많은 것들 중 블랑쇼만의 침묵 방식 중 하나일 것이다. 명쾌한 말과 밝은 시선을 원하는 우리들은 보고 말하는 행위로 대상을 접하며 경험을 쌓아간다. 그 현실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망각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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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주인공들은 망각 속으로 들어가기를 요구받았으며, 당연히 그들은 보고 말하는 것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기다림은 망각을 견디려는 움직임이며 무한으로 떠넘겨진 기다림들 속의 기다림들이다. 끊임없는 기다림들이 관계에서 ‘사이’로 놓여지고, 그 사이에서 주인공들은 그들 방식으로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기다림'의 과정을 이어간다.
기다림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세워본다. 상황이 흐르는대로 두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기다림 속 시간들, 그 속에서 우리들은 기다림의 시간을 맞이하고 그렇게 그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기다림이 아니다. 나를 마주치기 위한 시간의 흐름, 그 사이에 그저 상대와 상황이 놓여 있을 뿐. 그래서 기다림은 충분히 가능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기다림의 연속선 상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블랑쇼가 작품에서 말하려던 기다림이 나의 기다림 정의와 다를 수는 있지만, 상관은 없겠다. 블랑쇼는 너와 나의 명쾌한 일치를 바라지는 않았으니까.
(정리 1 끝)
박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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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뭉크(Edvard Munch)는 1902년에 그의 첫 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주변 환경부터 작품에까지, 나아가 찰나 속 자신의 모습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찍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셀카! 아래 사진들은 뭉크가 자신의 모습을 찍은 셀카일 것이다. 현재 남겨진 보통의 뭉크 사진은 누군가가 찍어준 갖추어진 모습이지만, 이 사진들은 셀카가 확실해 보인다. 각도가 그런...
절규, 질투, 상처, 배신, 고뇌, 죽음 등의 키워드로 그와 그의 작품을 판단하지만, 의외라 생각될 만큼 밝은 면과 개구쟁이 면도 많았던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이 셀카들이라는 생각 ㅎ
셀카를 거의 찍지 않는 나에게 그의 이런 의외 모습은 흥미롭다. 한편으로는 안심도 되는 게, 깊은 우울의 그의 모습 속에 이런 셀카들이 존재했음에서 느끼는 다행스러움이라고나 할까.
그의 삶과 그의 작품들은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오묘하다. 그래서 더 빠지게 되고 그래서 더 좋아진다. 혹시나 셀카가 아니더라도, 이 사진들 속 그의 다양한 멋스러움에 감탄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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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나도 셀카를 찍어볼까 싶다. 뭉크만큼 멋지진 않더라도 나다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딱 한 장의 셀카-
박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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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다. 비밀스레 느끼는 무력감. 시는 무력감에서 탄생한다는 말을 건네는 '존 버거'를 다시 만났고, 그는 이번에도 ‘그럴 수 있다’며 [아픔의 기록: 시 소묘 사진 1956-1996]을 통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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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부터 시를 썼다. 시는 무력감에서 탄생한다. 그러므로 시의 힘은 무력감에서 나온다.” 사는 동안 사실들과 상황들에 타협을 할 수밖에 없다. 무언가가 나를 제어하면, 움직이지 못할까봐 염려를 한다. 달려야만 하는 경주마가 되었을 때는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시를 쓰는 동안 현재 일어나는 일을 제외한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인다.” 지금 이곳에 없는 것에 말을 건네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시가 아닐까.
모리스 블랑쇼의 다음 말에 위안을 얻으며 책 속 존 버거의 시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몇 편을 옮겨본다. “문학은(시는) 독자에게 자신을 완전하게 내비치지 않는다. 독자가 언어를 넘어 어떤 담론의 중심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존재가 아닌 부재를 목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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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시 1
한마디 한마디 나는 묘사합니다.
당신은 하나하나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렇게 자신에게 묻습니다:
그의 말이 진실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연이어 펼쳐진 사절판 크기의 하늘,
소금기 배인 하늘,
별들로 구멍이 뚫린
다른 하늘에서 인쇄하듯 옮겨 온 잔잔한 눈물로 덮인 하늘,
말리기 위해 펼쳐 놓은 페이지들,
글자와도 같은 새들이 날아가고 있습니다.
아, 우리도 날아가게 해주오,
알 수 없는 글자 같은 새들의 보루 가까이
물 위에서 원을 그리다 그 위에 자리 잡게 해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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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르모리앙에서 (2)
나비 한 마리가 낱알 하나를 일깨우고
그 낱알이 또 하나의 낱알을 일깨우고 있어요
먼지 속에서 마찰이 일고
잉태한 돌 위에
하늘이 푸른 젖을 흘릴 때까지
하루가 탄생합니다
열린 눈들의 위태롭고 가파른 시선 아래로
나무들이 이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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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르모리앙에서 (3)
손끝이 닿는 곳 밤의 높이에서
풀들은 항상 자라겠지요
내 이파리의 이파리도
하지만 아주 이르게
그리고 꼿꼿이
나무들을 따라가노라면
내 팔목의 정맥을 간질이던
거미줄이 부서지는 것이 느껴지고
마침내 밤의 모든 연계선이 끊어집니다
그리고 나는 홀로 발걸음을 앞으로 옮깁니다
첫 손님의 눈 그 홍채 위에 비친
벌꿀빛 반점이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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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르모리앙에서 (6)
내가 오르는 동안
산이 땀을 흘립니다
심장의 고동은 빨라지고
돌마다 방울져 맺힌 물기가
등뼈를 타고 소리내어 흐릅니다
계곡에서
강어귀는 소문을 전하듯
들판의 귀에 속삭여 물을 흘립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이 정상으로부터 나의 산이여
당신은 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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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죽은 이들의 세계에 관한 명제들
(1) 죽은 이들은 살아 있는 이들을 둘러싸고 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죽은 이들의 핵심부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이 핵심에는 시간과 공간의 차원이 존재한다. 핵심부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는 시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2) 핵심부와 그 주변부 사이에는 주고받기가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명료하지 않다. 모든 종교는 그와 같은 주고받기가 어떤 것인지를 명료하게 밝히는 데 관심 가져왔다. 종교의 신비화는 그와 같은 주고받기를 체계적으로 생산하려는 노력의 결과다.
(3) 선명한 주고받기가 드문 것은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은 채 시간과 시간의 부재 사이의 경계를 건널 수 있는 것이 드물다는 데서 기인한다.
(4) 죽은 이들은 한때 개개인으로 존재했지만 여전히 개인으로 보게 되면 그들 본질이 모호해진다. 집합적으로 바라보라. 집합적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어 생성된다. 집합적인 것에는 일찍이 삶을 산 모든 이들이 포함된다. 그리하여 죽은 이들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5) 끊임없이 새롭게 시작되는 형성의 순간, 그것도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형성의 순간 속에 죽은 이들이 존재한다. 형성은 어느 순간에도 확인되는 우주의 상태다.
(6) 삶에 대한 그들의 기억에 의거해, 죽은 이는 형성의 순간이 또한 붕괴의 순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안다. 살아 왔기에 죽은 이들은 무기력할 수 없다.
(7) 죽은 이들이 존재하는 순간 속에서 산다면, 어떻게 그들이 기억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단지 시간 속으로 던져졌다는 사실만을 기억한다.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 죽은 이과 태어나지 않은 이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는 죽은 이가 바로 이 기억을 소유하고 있다는 데 있다. 죽은 이들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이 기억의 크기는 커진다.
(9)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죽은 이의 기억은 상상력의 한 형태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신과 가까우며 신 안에 거주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지는 모른다.
(10) 살아 있는 이들은 종종 시간의 부재를 체험한다. 잠에 취한 순간, 황홀경의 순간, 극도로 위험한 순간, 성적 오르가슴의 순간, 그리고 죽음을 체험하는 순간이 해당된다. 이 순간에 살아 있는 이들의 상상력은 개인적 삶이나 죽음의 경계를 넘는다.
(11) 미래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것은 그들의 상상력이 관여하여 만들어내는 구축물이다.
(12) 산 자들은 어떻게 죽은 자들과 함께 사는가.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은 상호의존적인데, 이를 깨뜨린 것은 어느 시대에도 존재하지 않던 현대 특유의 자기중심주의다. 그 결과 불행히도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을 제거된 자들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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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존의 시와 소묘 그리고 사진이 합체된 모음집이며 그의 다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책 두께가 얇다는 것. 더 두꺼웠으면 좋았겠다는 건 물론 나의 욕심이다.
'블랑쇼'의 말을 보탠다. “우리는 각각의 작품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이 애매함은 작품을 읽는 경험에 내재적으로 들어 있다. 결국 매 순간의 감상 경험은 정의에서 빠져나간다.” 따라서, 존의 시와 소묘에 대해 분석하지 않는다. 아니, 분석해서는 안 된다.
다만 마음이 가는대로 가 볼 것. 그래서 아픔을 또 다른 나만의 결로 느껴볼 것. 그때의 녹아내리는 응어리들에 안도할 것. 그리하여 또 다시 생길 필연적인 무력함에 (더 이상) 두려워 하지 않을 것.
잘 읽었던 책, 이번에도 참으로 좋았다.
(정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