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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광복을 맞이하지 못한 한국교회의 현실
기사승인 2024.08.14 03:2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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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신명기 32:1-7)
▲ 1943년 일본 나라(奈良) 신궁 참배 후 한국 목회자들의 기념 사진 ⓒCBS-TV
남원시 기독교연합회 8.15 광복절 기념예배에 참석하신 목사님들과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인도하심이 늘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교파, 다른 교단의 교회들이 한 지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연합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가 속한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며 성령의 은사가 역사하는 교회입니다.
교리와 전통이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일에는 한 목소리를 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에는 상호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가운데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는 적극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8.15 광복절을 앞두고 8.15 광복절을 기념하며 여러분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남원시 기독교연합회가 어느 지역의 기독교연합회보다 모범적이고 선도적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우리는 8.15 광복절을 기념한다고 여기 남원제일교회에 모였지만, 우리 민족이 진정 광복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광복’이란 빛을 다시 찾았다는 말입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는 말입니다. 1946년 이후 8월 15일이 되면 매년 광복절을 기념하고 있지만, 우리가 광복절을 별생각 없이 기념하면, 우리 민족의 실제 현실을 스스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은 광복을 왜곡한 분단된 한반도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1910년 한일병탄 이래로 35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 속국으로 살았습니다. 억압과 착취, 차별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우리 선조들은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강제징병자와 강제징용자로, 위안부 성 노예자로 끌려가 개 돼지처럼 취급당하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죽지 못해 살아야 했던 험한 시절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무조건 항복했을 때, 우리 민족은 피해당한 피식민지 국가로서 당연히 해방되어야 했습니다. 주권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전에 전쟁을 선포한 소련이 그들과 국경을 접한 한반도 전체로 밀고 들어오면, 전쟁을 종전시키는 데 실제로 기여한 미국이 자신들의 실리를 찾기가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자본주의를 대표하던 미국은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소련을 견제하고, 한반도의 정치적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 분할 점령을 급하게 제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 육군 대령 딘 러스크(Dean Rusk)와 육군 대위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el)이 그 실무자였습니다. 소련의 입장으로 볼 때, 그들은 손해를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은 해방의 기쁨보다 분단의 슬픔을 맛보며 살아야 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우리 민족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해방군으로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승리자로서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점령군으로 들어왔던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일장기가 펄럭이던 자리에 성조기와 소련기가 대신 펄럭였습니다. 1945년 8월 9일, 북쪽에 먼저 들어온 소련 군인들 중에는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성폭행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자기 나라에 필요한 공장 기계들을 해체해서 반출하기까지 했습니다.
1945년 9월 8일, 소련군보다 한 달 늦게 한반도 남쪽에 들어온 미국 군인들은 군정을 실시하며 행정과 치안을 담당했습니다. 그들은 행정 체계를 새롭게 구축하고, 교육제도를 개혁하며,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나름은 공헌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미국 자신의 이익과 자본주의 진영 확장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미국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 국가로서 단순하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가 미국의 실체를 보지 못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분단을 계획한 미국과 그에 응한 소련은 한반도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각축장(角逐場)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한반도는 세계 냉전의 최전선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남쪽에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안보 이데올로기, 그리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금까지 작동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는 소련의 해체와 함께 이데올로기의 냉전이 사라졌지만,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은 여전히 냉전적인 사고와 적대적인 행동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여차하면 친북 좌빨이라고 비난하고, 여차하면 빨갱이라고 규정합니다. 여차하면 북쪽 김정은의 명령을 받았다고 가짜뉴스를 남발합니다. 지금도 극우주의자들은 5.18 광주민주화항쟁을 북쪽의 고정간첩들이 책동한 것이라고 왜곡하고, 2022년 할로윈 축제 당시 안전을 위한 준비를 하지 않아서 발생했던 10.29 이태원 참사를 좌파 언론들이 의도적으로 부추긴 결과였다며 음모론을 운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반도가 분단된 것도 억울한 데, 진실을 왜곡할 뿐 아니라, 남북 간 긴장과 갈등 가운데 서로 대립하고 원수처럼 살도록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남쪽 내부의 남남갈등까지 강화하고 있는 것은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그래서 남쪽 사회에서는 수시로 불필요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에 쓸 수 있는 국가 재정을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미국의 값비싼 신형무기를 구매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군대는 자신들의 동북아전략에 따라서 한반도 남쪽에 주둔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가 군사기지를 건설해 주고, 그들의 주둔에 필요한 비용마저 상당 부분을 부담해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주체적인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의 처분만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처지에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주권은 유보된 상태에 있습니다. 아직 우리가 명실상부한 광복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설교의 서두에서 분단의 현실과 관련한 무거운 이야기를 해서 마음이 불편한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앞의 무거운 이야기를 전제로 해서 한국교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했을 때, 한국교회는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자행했던 과오를 청산해야 했습니다. 과거의 과오를 청산해야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단 상황에서, 미군정 아래서 한국교회는 과거를 제대로 돌아볼 기회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과오를 은폐하거나, 자기변명에 몰두하면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자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최근 강성오 작가가 저술한 《한국 기독교 흑역사, 열두 가지 주제로 보는 한국개신교 스캔들》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한국교회가 어떤 잘못을 범했는지, 과오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교회가 어떤 질병 가운데 지속적으로 처해 있는지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일제하 한국교회는 일제의 강제적인 요구가 있었지만, 공교회가 교파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자발적으로 수용했던 과오가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기독교인들은 순수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과 이후의 삶이 확실히 달랐습니다. 1895년 콜레라가 조선 백성의 생명을 위협할 때는, 기독교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환자 치료와 시신 처리에 사랑으로 봉사했습니다.
이렇게 선한 영향력이 전파되면서 기독교인들의 수가 늘기 시작하자 장로교회는 1907년에 최초의 독노회를 조직했고, 1912년에는 장로교 총회를 조직했습니다. 감리교회는 미국 남북감리교 선교회들이 1910년 전후 각각의 연회를 조직했고, 1930년에는 합동해서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공교회의 조직이란 언제나 제도화로 변질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교회가 공교회로 조직이 되자, 교회의 본래적인 목적을 성취하기보다는 조직을 존속하는 것 자체를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신사참배의 결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의 강압과 함께 감리교회는 1936년 6월 양주삼 총리사가 감리회보를 통해서, 감리교 전체는 1938년 4월 회의를 통해서, 그리고 장로교회는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통해서 신사참배를 종교 행위가 아닌 애국적인 국가 의식이라며 각각 수용하고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는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과 충돌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한상동 목사 등을 비롯한 목회자들과 최인규 권사를 비롯한 성도들은 일제로부터 탄압받거나 순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신사참배는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원칙과 신앙적 순수성을 파괴하는 요인이 되었고, 나중에는 교파 분열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사참배를 가결한 교계 지도자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변명했지만, 교회의 본질과 신앙의 순수성을 포기하며 교회와 성도들만을 지키겠다고 한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우리는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하 한국교회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선전하며, 일제가 일으킨 전쟁에 앞장서서 지원한 과오가 있습니다.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통해 한국인들을 일본 제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에 그치지 않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암송하는 것을 받아들여 일본 제국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도록 했습니다.
기독교 교육기관에서는 일본 제국의 교육방침을 따라서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고, 한국교회는 예배와 기독교 교육기관에서조차 일본어 사용을 장려했습니다. 일제가 주최하는 국가적인 기념식이나 제례에도 기꺼이 참석했습니다. 한편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서 전시 동원체제를 가동하며 강제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은 식민지 조선을 탄약, 연료, 병기와 같은 군용물자뿐 아니라, 전쟁 수행에 필요한 노동력과 병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병참기지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한국교회는 국방헌금을 모금하고, 유기그릇을 헌납하며, 조선 사람들을 전시체제로 내모는 일에 한몫했습니다. 교회의 종을 떼어 헌납했고, 종이 너무 커서 떼기 어려웠던 교회에서는 종을 깨뜨려 헌납하는 충성까지 보였습니다. 기독교의 유명 인사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인사들이 친일 행위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연희전문학교 교수였던 백낙준 박사는 조선총독부의 여러 위원회에 참여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정책을 지지하거나 협력했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전파하는 데 공헌했습니다. 그는 글과 강연을 통해서 한국인의 독립의지와 저항의지를 약화시켰다고 합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였던 김활란 박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임전보국단에서 여성 부문 지도자로 활동했고, 여학생들에게는 종군 위안부로 나갈 것을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황국신민화 교육을 실행했고, 신사참배를 권장했으며, 글과 강연을 통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냈습니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구약의 가르침 대신에 “누가 오른쪽 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고, 누가 속옷을 갖고자 하면 겉옷도 벗어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라도 가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폭력을 담은 이러한 가르침으로 인해서 초대 교회의 신도들은 군인으로 복무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미 군인인 신도들은 전쟁에 종사하거나 적을 살상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기독교인들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초창기 성도들이 순교를 당한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일제하의 한국교회는 전쟁물자를 지원하는 일에 앞장섰고,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하도록 사람들을 독려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한국교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일제하 한국교회를 거론할 때는 신사참배만으로 주로 한정해 왔는데, 이는 한국교회의 총체적인 과오를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과 관련한 한국교회의 과오 역시도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드디어 일제로부터 자유로워진 한국교회는 미군정 시기와 이승만 정권 초기에 일제하에서 범한 과오를 철저히 인정하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일반 신도들의 소극적인 참여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더라도, 적어도 교계의 지도자급 인사들과 사회의 기독교인 명망가들에 대해서는 상징적으로라도 징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스스로 거치지 못한 한국교회에 대해서 대한민국 초대 국회가 ‘반민족행위 특별조사 위원회’를 만들어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소위 ‘반민특위’는 교계의 친일파 인사들, 장로교회의 김길창, 김창준, 전필순, 정인과 목사 등과 감리교회의 양주삼, 이동욱, 정춘수, 한석원 목사 등을 검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검거된 기독교 인사들의 친일 내용은 크게 네 가지 유형이었습니다. 비행기 헌납 운동이나 교회종 헌납 운동을 통해 침략전쟁에 매우 협력한 유형, 언론매체나 출판물을 통해 징병제와 위안부 제도를 찬성하고 적극 선전한 유형, 전쟁협력기구인 조선임전보국단이나 조선전시종교보국회의의 간부로 활동한 유형, 신사참배를 반대하거나 반일적인 설교를 한 목사나 교인을 일제 경찰에 밀고한 유형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과 당시 여당이었던 한민당의 방해 공작으로 반민특위의 활동은 무산되었습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강제적으로라도 징계를 받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잃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해방 후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지도 않았고, 일제하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승만 독재정권과 야합하는 또 다른 과오를 범했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격려와 영락교회 청년회 회원들로 주축을 이룬 서북청년회가 제주 4.3 사건을 촉발시켰고, 그들은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반대하는 제주 도민들을 학살하면서 이승만 정권의 창출을 도왔습니다. 드디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고, 그가 집권을 연장할 때마다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 주는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 자발적인 부정선거를 도모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삼선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주도했고, 그의 종신집권을 위해 3.15 부정선거를 기획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의 당선을 노골적으로 지원했고, 장면 부통령을 탈락시키고자 천주교를 형편없는 종교로 폄하(貶下)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자신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권력자들 측근에서 그들을 지지하며 협력하는 유사한 전통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자로서 지지표를 얻고자 했을 때, 대통령이 된 후 궁지에 몰렸을 때, 교회를 먼저 찾았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찾았고,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 때는 성북 영암교회를 찾았으며, 22대 국회의원 총선 때는 명성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때마다 한국교회와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그를 환대하고 축복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천공과 건진법사 등 무속신앙인들과 연계해서 정치를 하고 있는데도, 사이비 이단인 신천지나 통일교와 정치적으로 밀착되어 있는데도, 개의치를 않았습니다. 심지어 전광훈이 주도하는 극우 태극기 집회에 참석해서는 특정인을 지지하고, 특정인을 배제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분의 뜻이었을까요?
이제 우리는 한국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역사 속에서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 개인 또는 집단이 저지른 죄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시절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해서 징계를 받았던 사실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징계의 사실을 기억할 때, 선조들의 죄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독일에서 유학할 때, 독일 사람들이 유태인의 회당과 상점, 주택을 파괴했던 ‘정화의 밤’(Kristalnacht)을 기념하는 행사를 목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김나지움(고등학교) 학생들이 그날의 “폭력을 잊으면 다시 반복된다”는 표어 아래 눈물로 행사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할아버지 시대에 있었던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기를 원했고, 진지하게 사과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주역이 된 시대에는 할아버지 세대가 자행한 폭력과 과오를 결단코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며칠 후 광복절 79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한국교회도 일제하 한국교회의 과오를 기억하고, 선배 성도들이 간과했던 참회를 이제라도 대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한국교회도 선배 성도들이 범한 유사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고난의 여정 속에서 베풀어진 공의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가 해방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집트 군대가 쫓아올 때, 홍해를 건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행군했지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진군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만 하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습니다. 동족 간에 무시무시한 전쟁을 치렀고, 매년 봄이 오면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습니다. 그런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이제는 가난한 국가들을 지원하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시어서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이끄셨고,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설사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할지라도 소망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거짓이 없으시며, 공의로우시고 바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우리에게서 온전히 기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으시고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악에 대해서는 모양이라도 거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사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그분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고 사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진실해야 합니다. 거짓을 거부해야 합니다. 공정과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한반도의 긴장과 갈등, 대립을 해소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이자 희망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남원시 기독교연합회에 속했다는 이유 하나로 광복절 기념예배에 참석하신 존경하는 목사님과 성도님 여러분, 우리가 일제하 한국교회의 과오를 기억하고,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순수한 신앙을 지켜나갑시다. 그동안 분에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우리의 지역 남원시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을 나누고 사는 진실한 이웃이 됩시다. 오늘 광복절 기념예배에 참석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한반도와 남원시 지역사회에서 희망차게 전개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정종훈 교수(연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