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8

230408 Namgok Lee | 공자

(4) Namgok Lee | Facebook
230408
Namgok Lee
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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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儒家)로서 학문을 시작하였으나 유가와 절연(絶緣)하고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한 묵자가  유가를 격렬히 비판한 배경이 된 것은 유가 가운데 유교의 진정한 원리는 전혀 알지도 못하거나 거기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정치적인 출세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만 몰두한 사람이 너무나 많았던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와 동시에 공자의 사상과 행태에 만족하지 못한 묵자의 급진성(공자는 이런 사람을 狂者라고 부른 것 같다)을 현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공자보다 더 높이 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급진성이 비록 평등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감각에 와닿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인류 보편사(人類普遍史)의 진행에서는 그 영향력이 공자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국소적이다.

그 중요한 차이를 H.G.크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묵자는 자기가 누구보다도 세상의 악을 고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고 믿었으며, 공자와 달리 다른 사람에게 자유로운 선택이나 판단의 여지를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나의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하다. 내 가르침을 버리고 스스로 생각하려는 것은 추수를 포기하고 낟알을 줍는 것과 같다.”
묵자는 빈곤, 무질서 및 전쟁을 비롯한 이 세상의 죄악을 엄격한 권위주의적인 체제로 구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각 집단의 구성원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지도자와 일치되어야하며” 각 집단의 지도자는 다시 그 상급자와 일체가 되는 방식으로 최종적으로는 천자(天子)에게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가운데 다음 구절을 연상케 한다. “통합국가의 헌법을 제정하는 원리는 모든 지도자는 하급자에 대해 권위를 갖고, 하급자는 상급자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공자는 사유에 대한 원칙을 제시하였지만, 진리의 고정된 척도는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개인에게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는 책임을 맡겼고 그것도 각자의 자유에 일임하였다.
그러나 지적(知的) 자유에는 필연적으로 정신적 노고가 따르기 때문에 인간은 대체로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공자가 인간의 정신에 제공한 것은 ‘평화가 아닌 검(劍)’이었다.
제자 가운데 공자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따라서 공자의 시체가 식자마자 제자들이 아늑한 지적 안식처를 세우고 그 안에서 성전(聖典) 및 결코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성인의 권위를 찾기 시작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크릴의 맹자에 대한 다음의 언급도 시대를 넘어 오늘의 유사(類似) 진보주의자들을 돌아보게 한다.
<맹자는 당시의 비교적 우수한 유가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이지만, 유가 특유의 약점 즉  상류사회를 선망하는 속물(俗物)이었다. 그의 생활이나 여행은 사실 극히 사치스러웠지만 그는 훨씬 더 사치스러운 왕후(王侯)들을 크게 선망하였다.
맹자는 정의만 구현된다면 자기도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이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지위나 사치를 경멸하고 덕(德)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척하였지만, (햄릿에 나오는) 귀부인처럼 도에 지나친 항의를 많이 하였다.>


Namgok Lee
1 d
  · 
'일미진중함시방'
내 마음 안에는 내가 싫어하고 반대한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이 함께 들어있다.
몸이 안좋으니까 잘 보인다.
공자가 일관한 것은 오직 '수기修己' 였다는 것.
그의 모든 외적 활동은 그것의 자연스러운 외화外化.
공자 사상이 그 숱한  풍랑과 왜곡을 겪으면서도 고전古典으로 살아남아 미래를 열어가는 메시지로 작용하는 핵심.

Namgok Lee
3 d
  · 
H.G.크릴의 공자를 읽으면서 드는 단상 하나.
맹자 대(代)에 오면 유자들 가운데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당당하게 유세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맹자는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조언할 때는 그들을 경멸해야 한다.”고 말하며, 
순자는 “진정한 군자는 천지와 동격이기 때문에 훌륭한 유자가 극도의 궁핍한 처지에 빠져도 왕후는 감히 그와 명예를 다툴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들의 자존감을 높였다.
그런데 어떻게 포악한 군주들이 유자들이 ‘혁명’을 설교하는 것을 그대로 두었으며, 극단적인 모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에게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였는가?
군주들이 전(全) 중국(中國)을 차지하려는 각축전에서 학자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경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맹자는 수십 대의 수레와 수백명의 종자를 거느리고 여행하였고 제후(諸侯) 사이를 전전하면서 식록(食祿)을 받았다.
물론 구성원의 수가 많아지면 뛰어난 사람들이 다수를 점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맹자는 당시 사람들이 인격을 수양하는 유일한 목적이 높은 지위를 얻으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일단 목적을 달성하면 주의주장은 더 이상 불필요한 것으로 내던져 버린다고 말하고 있으며 순자도 자기 자신이 유가이면서도 그가 속유(俗儒)라고 부른 자들을 통렬히 비난하였다.
일찍이 공자는 ‘예(禮)’의 자구(字句)에 얽매여 그 정신을 망각하는 것을 특별히 경고하였으며, ‘도(道)’에 뜻을 두고 있는 척하면서 개인적인 쾌락과 출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비난하였다.
논어 옹야 편에 자하라는 제자에게 소인유(小人儒)가 되지말고 군자유(君子儒)가 되라고 당부하는 말이 나온다.
군자(君子)의 특성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논어 이인편에 나오는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는 말이다.
실제로 인간은 어느 한 쪽으로만 되어 있는 경우는 없다. 다만 이(利)와 의(義) 어느 쪽에 더 끌림이 있는가는  인간을 평가하는데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닌가 한다.
공맹시대의 유자를 요즘 말로 하면 폴리페서(polifessor) 쯤 될 것이다.
맹자나 순자 정도 되는 당당한 폴리페서(polifessor)도 드물지만, 소인유(小人儒)와 비슷한 사람이 많다.
내가 보기에는 진보냐 보수냐 하는 차이보다 군자유(君子儒)와 소인유(小人儒)의 차이가 더 본질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적어도 의(義)에 끌림이 더 강한 지식인이나 정치인이라면 그가 보수건 진보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위기들을 넘어설 수 있는 지혜와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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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6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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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시카고에서 출생한 미국의 학자 H.G.크릴이 ‘개혁가 공자’를 서술하고 있다.
이런 시도야말로  인류 보편의 사상적 거인으로서 또 위대한 개혁가로서 공자의 진면목을 밝히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을 일부 발췌한다. 
“공자가 주장한 개혁이 과연 ‘민주적’이었다고 말해도 좋은지, 또 만약 그렇다면 어느 정도 ‘민주적’이었는가?
오늘날의 민주정치는 19세기말 및 20세기의 산물이며 최근에 확대된 인류의 경험 뿐 아니라 자연과학 사회과학 및 산업화 등과 같은 현대적 혁신에 크게 기초를 둔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처했던 상황이 현대민주주의 옹호자들이 처했던 상황과 크게 상이相異하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사상 사이의 相致點(상호일치점)이 있다면 오히려 특별한 흥미를 자아낸다.
매리앰(C.E.Merriam)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1.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 차별보다는 우애 원칙에 근거한 개성의 보호 및 함양의 중요성, 근거도 없이 또는 과도하게 인간차별을 강조하는 데서 비롯된 특권의 폐지.
2. 인류의 완벽성을 부단히 지향하는 것에 대한 확신.
3. 국가의 수익은 본래 집단적인 수익이므로 크게 지연되거나 지나친 차별없이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전사회에 분배되어야 한다는 가정.
4. 사회의 방향과 정책의 기본적인 문제에 관해 최후 결정을 대중이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 결정을 표현하기 위한 절차를 인정하고 그 결정이 정책으로 반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
5.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합의 과정을 거쳐 의식적인 사회변화를 성취할 수 있다는 신념.
이 가운데 4개의 항목은(4번을 제외한 모두) 기본적으로 공자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 분명하고 어떤 것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것도 있다.
투표와 관련된 나머지 한 항목이 실제로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공자는 대중이 정치를 좌우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앞에서더 지적하였지만 고대 중국에는 투표라는 개념은 없었던 것 같다. 프랑스 혁명이 한참 진행중이었던 1791년 프랑스 헌법이 제출되었을 때, “보통선거안을 부결하는 것이 무산계급은 문맹이고, 투표를 하려면 일정한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변호될 수 있었다면” 기원전 500년경 공자가 중국의 정치를 농민계급에게 넘길 것을 제안하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공자가 이상적인 교육상태나 그 비슷한 상황이라면 대중이 정치를 좌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지의 여부다. 이것은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것을 종합하여 정치 권력에 관한 그의 의견을 체계적인 서술로 제시해보자.(공자가 결코 이런 것을 제시한 일은 없는 것 같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정부의 고유한 목적은 전체 백성의 복리와 행복이다.
이 목적은 정치에 가장 유능한 사람이 국정을 담당할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
위정자의 능력은 가문, 재산 또는 지위와 필연적인 관련성이 없으며, 오직 인격과 지식에 달려 있다.
인격과 지식은 적절한 교육의 산물이다.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교육은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
따라서 적절한 교육을 받은 결과 가장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된 사람을 전체 국민 가운데서 선발하여 정치를 위임해야 한다.
이것은 백성 전체가 정치를 좌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결국 일종의 귀족정치 제도이지만, 가문이나 재산에 의한 귀족정치가 아니라 덕망과 능력에 의한 귀족정치이다. 민주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자의 태도에는 가장 유능한 사람이 임용되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없다는 결함이 있지만, 이것은 역사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공자의 제도에는 전체 백성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치란 백성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론은 확실히 백성들에게 막연하나마 ‘이론상’의 거부권을 부여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정부의 형태나 제도적인 장치의 중요성은 과소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형태나 제도의 기초가 될 뿐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데도 필요한 정신이나 철학보다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인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진리는 (또는 적어도 진리의 이해는) 부단히 발전 또는 개화 과정에 있으며 모든 사람이 진리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는데 참여할 수 있다는 신념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반면에, 진리를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실재로 생각하는 철학은 모두 정치적 전체주의의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도 명백해졌다.
(중략)
공자가 절대론의 입장이 아니라 진리의 부단한 탐구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진리를 말하지도 않았고, 절대적인 가치척도를 제시하지도 않았으며, 그들 스스로 진리에 도달하도록 교육하였다.”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하여 목숨을 뺏고 뺏기는 권력투쟁이  공자의 제자를 자처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는 것은 얼마나 빗나간 것인가?
서양의 학자가 본 공자가 그 유명한 주자(朱子)가 본 공자보다 훨씬 공자의 진실에 가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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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 April at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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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릴의 공자를 읽고 있다.
개혁가로서의 공자를 논하는 장(章)의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공자의 교육론이 혁명적 성격을 띄었다는 것은 여러 다른 주장들 예컨대 노자나 한비자와 비교해볼 때 뚜렷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것이 혁명적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자 당시에 그의 정치적 주장에 아무도 경계심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공자가 개혁가로서 상당한 능력을 갖고 있었음을 잘 말해준다. 맹자와는 달리 공자는 결코 폭군을 죽여야 한다거나 제왕과 농민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직선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전체적인 운동은 시작도 되기 전에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좀 더 신중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1세기 뒤에 맹자가 아무 탈 없이 직선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 이것은 확고한 방침에서 나온 것 같은데, 부패한 정부 아래 살고 있는 사람은 기회가 오면 용감하게 행동할 용의를 갖고 있어야 하지만 말을 할 때는( 그 자체로는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없기때문에) 다소 신중해야 한다는 견해를 공자는 표명한 적이 있었다. (憲問 편)”
이 글을 읽으면서 이와 상반되는 상황이 요구되는 시대나 사회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극단적 상황에 극단적 대응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이 극단적 대응 또한 또 다른 극단(極端)이기 때문에 결코 그 자체가 안정되고 평화로운 개혁을 이루기가 어렵지만, 그 후에 나타날 건강하고 조화로운 개혁을 예비하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악순환으로 전체가 붕괴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렇게만 된다면 역사는 거칠게나마  순항(順航)할 것이다.
사후(事後)에는 보이지만, 진행 중일 때는 모르는 일들이 역사 속에는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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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26 March at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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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태 저 ‘공자의 발견’에 이어 H.G.크릴 저 ‘공자, 인간과 신화’를 두 번 째 읽고 있다.
크릴에게서 학자의 진면모(眞面貌)를 느끼게 한다. 
나는 논리적인 성격도 있지만, 직관적인 성향이 강해서 학자의 길에 들어서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요즘은 학자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사람들과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오늘 읽다가 ‘예언자의 신뢰도를 높여주는 것은 백발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는 코멘트 앞에서 혼자 웃는다.
나는 80이 다 되었지만, 흑발(黑髮)이다.
그 말대로라면 나는 예언자의 길을 갔어도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이다.  사이비 예언자의 유혹에서 아예 생래적으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머리 색깔이 아닌 말과 행동으로 사이비 예언자를 감별하는 능력은 다소나마 갖추고 있다는 생각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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