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6

동양포럼 김태창 노철개벽 일기 / 4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4 |: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3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6.07 21:08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2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5.24 20:17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1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5.10 19:46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10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4.26 19:56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9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4.12 20:13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8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3.22 19:28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7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1.12 20:07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6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2.22 19:26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5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2.08 20:33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4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1.24 19:56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3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1.10 21:12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2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0.27 20:12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4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9.11.24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7월 9일 오전 9시 32분

공자가 말했던 불혹(不惑)은 나 자신의 체감, 체험, 체인한 바에 따라서 영혼이 자유롭게 되는 시기라고 뜻풀이 한데 대해서 30세(나에게는 50세)에 확립한 자기관점과 입장에서 흔들리거나 방황하지 않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맞는 말이다. 그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나는 ‘혹’(惑)이라는 한자를 ‘땅에 금을 긋고 줄을 쳐서 구획하고 그것을 무기로 지키는 마음가짐’이라는 원래의 뜻에다가 아니 ‘불’(不)이라는 글자를 첨가해서 이루어진 뜻글자라는 점을 감안해서 특정이념, 사상, 학설의 테두리 안에 굳게 갇히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로부터 과감히 탈출하여 활짝 열린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 성숙, 진화되는 과정의 시발점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것을 중장년에서 노숙년으로 바뀌는 시기(공자40세, 나의 60세)에 일어나는 각성체험의 특징으로 뜻풀이한다. 바로 이 시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다음에 이어지는 노숙년기(70, 80, 90세)의 각성과 자각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만약에 이 전환기의 특징을 ‘흔들림이 없는 관점과 입장의 확정’이라고 보는 입장에 서게 되면 노숙년은 그렇게 확정된 관점과 입장에 따른 자기통합, 자기실현, 자기완결을 매듭짓는 (마지막 불꽃을 피우는) 과정으로 여기고 거기에 진력하게 된다.

그러나 나의 느낌과 생각은 다르다. 내게는 이 전환기(공자의 40세, 나의 60세)가 자기중심에서 자타상생으로 삶의 기축이 전환되는 시기이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나이듦의 과정이 자기개방, 자기탈출, 자기초월을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깨닫고 얼을 통해서 내 목숨이 하늘 목숨에 이어져서 마침내 거기에 돌아가게 되는 단계다.

삶의 차원이 훨씬 더 높아지고 깊어지고 넓혀지는 것이다. 불꽃을 마지막에 또 한 번 피우는 (최종의 자기실현의)시기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생명의 불꽃을 온전히 사르어서 생명자체의 향상, 진화, 개벽에 보탬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기다.



7월 10일 오전 9시 26분

공자는 50세가 되어 하늘의 명하심을 알았다고 했다. 대다수의 유학자 또는 논어 주석가들이 하늘의 명하심(天命)을 도덕적 최고선 또는 도덕적 지상명령으로 해석, 해설,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70대에 들어서 몇 번 극심한 병고를 겪은 바 있는데 견디기 어려운 아픔과 괴로움 속에서 나 자신의 목숨=개체생명을 넘어선 아주 커다란 생명과 그 놀라운 힘=우주적근원적 생명에너지가 나의 살고 죽는 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이치, 진실, 사실에 눈뜨게 되었다.

그때 어려서 할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셨던 하늘의 명하심이라는 것이 내 목숨이 하늘 목숨과 서로 통하게 되어있는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삶의 진실을 몸으로 깨닫는 것이 '하늘의 명하심을 알다'(知天命)의 참뜻이 라는 각성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하늘의 명하심을 도덕적 최고선=지상명령이 아니라 생명철학적 공동선=지상명령이라고 뜻풀이하고 ‘안다’를 ‘서로 통함을 깨닫는다’는 말로 바꾸어서-지천명을 통천 명으로 바꾸어서-노년기에 들어서는 처음단계=초로(初老)의 각성특징으로 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공자의 짧지만 고농도의 자기이야기(self-storytelling)에서 특히 50세에 이르러 알게 되었다는 천명을 도덕철학적 해석과 관점과 입장이 아닌 생명철학적 의료철학적 해석과 관점과 입장에 서게 되었다. 나의 의철학적 사고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중장년기에서는 주로 도덕철학적 자기정체성의 탐구와 확립과 완성을 추구했으나 노숙년기에 들어서면서 나이듦의 의미와 가치를 생명철학적 의철학적 자기재점검을 통해서 자기라는 틀을 풀고 열어서 남들과 서로 잘 통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자타상화, 자타상생, 자타공복을 함께 이루어가는데 전력투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공자가 50세에 알게된 도덕적 각성체험이요 내가 70대에 들어서 깨닫게 된 생철학적, 의철학적 각성체험의 실상이다.



7월 11일 오전 6시 49분

나는 지나간 85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많은 아픔을 겪었다. 몸의 아픔, 마음의 아픔, 그리고 영혼의 아픔을 겪었다. 그런데 한참 후에 내가 겪은 모든 아픔의 근본원인은 거의 예외 없이 ‘불통(不通)’이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한국의학사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이기도 한 허준(許浚: 이조중기의 한의학자 1546-1615) 저 ‘동의보감’에 나오는 “통하면 안 아프고 통하지 못하면 아프다 (通卽不痛 不通卽痛통즉불통 불통즉통)”라는 구절에 접했을 때 바로 이것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통하면 안 아프고 안 통하면 아픈 것은 적어도 나 자신이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깨달은 바로는 ‘기(氣)’다. 기가 통하면 심신이 온전하고 기가 안 통하면 심신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이 나이듦의 과정에서 빈번하게 반복된 체감이요 체험이다. 그것은 ‘기통(氣通)’이며 ‘기식(氣息)’이다. 즉 호흡이다. 숨쉬기다. 바로 목숨이다.

나 자신이 여러 가지 아픔을 통해서 스스로 알게된 바에 의하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본래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살아 있게 하는 ‘기’가 나라는 존재 속에도 들어와서 함께 살아있는 생명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기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에너지(生氣)이며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물질에너지(元氣)이며 또 모든 살아있거나 살아있지 않는 존재자들이 올바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지켜주는 위상에너지(正氣)이기도 하다.

그것은 살아있고 움직이고 역전되기도 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나하나의 생명체의 안에서 죽은 기를 밖으로 배출하고 밖-하늘과 땅-에 충만한, 살아있는 기를 흡입하는 것이 숨쉬기이며 호흡이며 기통(氣通)이다.

그것이 제대로 잘 이루어지는 것이 몸과 마음과 얼의 기본적인 건전, 건강, 건녕(健寧)이며 그것이 제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병통, 병고, 병환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기통=기의 유통순환=숨쉬기=호흡이 완전히 멈추어서 기가 하늘과 땅으로 널리 퍼져서 사라지게 되면 죽게 되는 것이다.

태어난다는 것은 하늘 목숨이 내 목숨이 되어 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이 일생, 생애, 인생이고 그것이 끝이 나서 내 목숨이 하늘 목숨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다.

이것이 최한기(崔漢綺: 구한말의 과학철학자 1803-1879)의 ‘기통론(氣通論)’과 연결되는 데서 나 자신의 기통의 철학적 생사관과 노년철학적 인간이해가 어우러져서 기통의 철학적 노년인문학의 단초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7월 12일 오후 2시 18분

나는 여간 해서 병원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가게 될 때마다 의사들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이나 일본의 병원에서 만났던 의사들은 환자인 나와 얼굴을 맞대고 나의 표정을 자상하게 살피면서 나의 말=증상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우선 환자의 기를 살리는 말을 했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1970년대 초기에 내가 독일에서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고 어느 날인가 갑자기 배탈이 나서 병원에 갔었는데 내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나서 나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입안과 목과 혓바닥을 본 다음에 배 언저리를 눌렀다 놓았다 하고 나서 청진기로 몸 안의 상황을 세밀하게 살폈다.

그 의사의 태도로 보아 환자의 기분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그리고나서 시간이 좀 지나면 좋아질 거라면서 별 탈이 없으니 그냥 돌아가서 당분간 음식 조심하라는 조언으로 끝났다. 약도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 의사가 말하기를 최상의 치료는 ‘Mundtherapie(Mund=입+Therapie=치료)’이고 영어로는 ‘Dialogical Therapy’라고 자기 나름으로 번역해서 독일어를 잘 모른 사람들에게도 이해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려서나 젊은 시절 그리고 중장년 시절에 만났던 의사들은 대체로 그런 치료를 했었다. 한마디로 대화치료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나자신이 본격적으로 노년기에 들어서면서, 어쩌다 병원신세를 지게 될 때 거기서 만나게 되는 의사들은 대체로 환자의 얼굴은 보지 않고 컴퓨터화면만 보고 사전에 받게 한 검사결과의 숫자를 살펴보고 진단결과를 통보하고 약국에 가서 약을 타가라는 말이 거의 전부다.

사전에 예약을 하고 가도 한 시간 이상 기다리고 나서 진작 의사의 진단과 상담을 받는 시간은 10분 내외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Numeral Therapy=수치치료 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수치치료에서 검사결과에 나타난 수치에 의해서 판단하기 때문에 환자의 기분이나 설명이 거의 필요 없다는 태도다. 그 곳에서 환자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기가 완전히 죽게 되고 특히 노년환자의 경우에 기가 살아서 힘을 발휘하는 자연치유력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 가기 싫은 것이다. 서양의학의 훈련만 받은 요즘의 의사들은 환자, 특히, 연로한 환자의 경우, 기를 살리느냐 죽이느냐는 대단히 중요한데 그것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기통의철학적교양(氣通醫哲學的敎養)’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7월 14일 오전 1시 2분

기통의 철학적 교양의 필요성을 강조했더니 조금만 더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어느 생명부지의 의사로부터 받았다. 반가웠다. 철저한 무관심의 시대를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흐뭇했다.

여러 가지 일들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의사들에게 기통의 철학을 새삼스럽게 공부하고 전문지식을 쌓으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환자를 접하는데 있어서 정상치에서 벗어난 장기기능과 그 정상회복을 위한 치료와 약물처방이나 조치 이전에 기본적인 인간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는 의료현장에서 느꼈던 나 자신의 체감을 말한 것뿐이다.

특히 나이든 환자의 경우에는 인간적인 배려가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말하자면 치료, 치유적 효과를 더 올리기 위해서 고려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라는 노파심을 말해본 것이다. 기통의 철학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된 것은 과학적으로 확증된 데이타-수치데이타-를 중시하는 현대의 과학에 환자의 인간적 생명현상의 실상에 대한 기본 이해를 보완하는 현장의 지혜가 치료, 치유효과를 더 높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환자로서의 기대다.

그렇다면 기통의 철학적 인간이해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은 무엇인가. 우선 세가지를 유념해두면 도움이 될 것 같다.

1. 인간은-어린이나 젊은이나 나이든 이를 막론하고-기가 모여서 태어나고 기로 살다가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

2. 기란 기운이며 그것은 인간이 살아 움직이도록 삶을 받쳐주는 힘=근원적 생명에너지이다. 느낄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는 흐름이다. 생기(生氣), 기력(氣力), 정기(精氣)라는 말들로 거의 같은 뜻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3. 특히 나이든 환자의 경우에는 복잡한 원인, 이유, 사정으로 생기(生氣=살려는 의지)가 약해지고 의기(意氣=적극적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기개)가 꺾여 있으며 그것이 기력(氣力=삶을 이어갈 수 있는 몸과 마음의 힘)이 감퇴 있기 때문에 최우선으로 기운을 돋우는 일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 한마디가 기운을 돋우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기통의 철학적 인간이해의 최소치(Minimum Essential)이다. 나는 나 자신이 실제로 겪은 여러 가지 아픔과 그 치유과정을 통해서 절감한 진실의 한 가지를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약발보다 말발이 더 잘 듣는다”고.



7월 25일 목요일

작가 켄트 너번이 전한 한 아메리카 인디언 원로의 말이 생각난다.

인생을 길게 뻗은 선으로만 보고,양쪽 끝에 있는 어린이와 노인은 약하고 가운데 있는 사람만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만 중요하다고 하면, 어린이와 노인 속에 감춰진 중요한 가치를 놓치고 만다.어린이와 노인이 공동체에 보탬이 안 된다고 해서 그들을 선물이 아니라 짐으로만 여기고 마는 꼴이다.

그러나 어린이와 노인은 서로 차원이 다른 선물이다. 노인에게는 경험에서 얻은 지혜가 있다.인생의 먼 길을 여행해 왔기에 우리 앞에 놓인 길에 관한 지혜를 들려줄 수 있다. 우리가 막 배우려고 하는 것을 그들은 이미 삶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나이든 이에게 선물이고,나이든 이도 어린이에게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가? 아침과 저녁이 하루를 완성하듯이 어린이와 노인이 인생의 여정을 완성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재고하게 된다.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욥기 12:12)

오늘날의 노년에게서 지혜를 기대하고 장수자에게서 명철을 감득할 수 있을까? 젊은이들과 만나서 기탄없이 대화를 나누어보면 나이 듦이 고루한 생각을 굳히고 장수가 시대착오적인 집착을 강화할 뿐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아서 불통을 개탄한다.



7월 26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동양일보사 3층 회의실에서 충북대학교 지역교육연구소 연구원 김혜련 박사의 하곡정제두의 노년기 사상을 주제로 유성종 운영위원장 · 김용환 교수와 네 사람이 오붓하게 철학대화를 나누었다.

우선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사람치고는 놀라운 장수(88세)를 누렸고 오늘의 화두가 되었던 <심경집의」(心經集義)>는 그가 63세 때 저술하고 79세 때 최종적으로 수정한 것이어서 가히 하곡 노년철학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김혜련 박사의 발제로부터 나 자신이 듣고 생각해본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진리와 물리와 생리 중에서 특히 생리를 양명학적 양지와 같은 것으로 보고 그것을 ‘인(仁)’과 결부시키고 다시 남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에 감통하는축은지심의 근거로 삼았다.노숙년에 이르면 감통하는 생리와 물리보다 더 중요하게 된다.

② 한국사람과 한국사회는 상대적으로 이학적 사유보다 심학적 대응이 더 강하다.어떻게 합리적으로 생각하느냐보다 어떻게 피부로 느끼느냐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두드러지다.특히 작금의 현실상황을 신중하게 볼 때,이학적 사유의 냉철함으로 사회적 광기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정제두의 이학이 오늘의 현실이 갖는 의미를 재삼 상고해볼 필요가 있다.

③ 무엇보다도 나이 들어갈수록 공자의 ‘사절(四絶)’이 필요함을 하곡과 함께 오늘날의 우리들도 늘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첫째 무의(毋意)-사사로운 뜻을 고집함에서 벗어남.

둘째 무필(毋必)-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뜻에 너무 집착하지 않음.

셋째 무고(毋固)-고집불통인 상태에서 벗어남.

넷째 무아(毋我)-이기심에 사로잡히지 않음.



오후 6시부터 7시 10분까지 우민아트센터에서 중원포럼 주최의 중국철학과 인생이라는 주제로 한국외국어대학 박정근 명예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주역(周易)>에 담긴 역철학(易哲學)의 핵심이 되는 ‘역(易)’을 만물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살아 있는 것-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으로 풀이하고 생명적 우주관을 제시하는 그것을 기본을 하는 인생론을 폈다는 점이다.

그래서 토론과정에서 삶이 나이 듦이며 나이듦이 낡아짐(老古)이나 쇠약해짐(老衰)이나 추해짐(老醜)이 아니라 새로워짐(老新)이며 무르익어감(老熟)이며 멋있어짐(老美)이라고 노년관 혁신의 또 하나의 동양철학적 전거(典據)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역시 남의 말을 잘 듣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또 한 가지 논의된 것은 박 교수가 죽음을 ‘입사’(入死=죽음에 들어감)라는 말을 써서 노자의 죽음관을 설명한 데 대해서 오히려 노자의 ‘귀원’(歸元 =본디로 돌아감)이 나의 죽음이해 -즉 죽음=귀천(歸天 =하늘로 돌아감)-과 서로 통하는 바라 있어서 더 선호하다고 말했더니 자기 생각도 다르지 않다고 해서 대화가 기분 좋게 끝났다.

다만 노자에게 있어서의 본디(元=始元=根元)는 어디까지나 ‘도’(道)인데 비해서 나의 경우에는 ‘기’(氣 =元氣 =生氣 =宇宙生命)라는 점이 서로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구태어 부언하자면 생사관에 있어서는 노자보다는 장자 쪽이 나 자신은 더 친근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