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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3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0.06.07
김태창동양포럼 주간
[동양일보]10월 2일 수요일
6회 노년철학 국제회의 둘째 날 오전 회의는 야마모토 교시 미래공창신문사 사장의 ‘노년철학과 미래공창’이라는 발제강연이 있었고 토비오카 켄 박사의 진지한 질의가 계기가 되어 활발한 대화가 전개되었다.
질의의 요지는 ‘미래공창이라는 구호는 대단히 설득적이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미래공창이냐’는 것이었다.
야마모토 사장의 소상한 응답이 펼쳐지는 과정에서 불교의 인과론적 교리에 관련되는 언설이 나와서 김용환 충북대학 교수가 불교의 기본은 인과론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지만 그것이 반드시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의 미래공창하려는 의지와 행위와 염원이 무의미한 도로가 되지 않겠느냐는 문제 제기다.
야마모토 사장도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고집하려는 의도는 없었고 보다 나은 미래를 함께 열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들의 사고와 행위·이론과 실천·판단과 상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결집·축적·진화되어야 그런 과정을 통해서 보다 바람직한=좋은 미래가 열리지 않겠느냐는 취지였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좋은 원인을 마련하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善因善果, 惡因惡果)이라는 점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나는 현대물리학에서도 고전물리학에서 강조되었던 인과론적 물리를 수정해서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의 여지를 인정하고 확률론(確率論)적 물리관을 제시하고 있다. 결정론적 사고와 자유의지론을 적절하게 융합시키려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요는 물질-물체-무기물의 세계에서는 모든 현상·변화·발전이 철저하게 인과법칙적으로 현현하지만 인간세계는 다소의 자유의지의 발휘· 작동· 작위를 통해서 인과론의 세계 속에서도 비인과의 지평· 차원· 세계를 형성· 건립·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래공창적 사유· 판단· 행위· 실천· 책임 등의 문제 설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글표현으로는 ‘함께 미래를 여는 일’이라는 말을 쓰기로 하고 일본에서는‘미래공창(未來共創)’이라는 말을 쓰기로 함으로써 서로 다른 어감(한국에서는 공창이 여성멸시적인 공창(公娼)이라는 말을 연상시킨다는 일부 참석자들의 의견을 존중했음)의 차이를 넘어설 수 있는 방안을 강구했다.
국제회의는 그래서 여러 가지로 고려·배려·심려해야 할 일이 많다.
10월 3일 목요일
제6회 노년철학 국제회의 셋째 날의 오전회의는 하라다 켄이찌(原田憲一) 지성관대학 전 학장의 ‘비교문명이란 무엇인가?’와 김용환 충북대학 교수의 ‘노년철학과 문명의 대전환’, 그리고 오오하시 켄지(大橋健二) 선생의 ‘노년철학과 신문명론–교육과제’ 등을 주제로 하는 발제가 있었다.
김용환 교수만이 시간 조절을 잘해서 대화를 전개할 수 있었고, 나머지 두 분은 하고 싶은 말이 나무 많아서였겠지만 대화 시간을 남겨주지 않았다.
김용환 교수의 발제에 나오는 봉사라는 말의 내용에 대해서 황진수 교수가 어제의 자신의 발제 내용과 관련시켜서 자원봉사에 대한 법령은 있으나, 시행령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지원체계가 불충분한 점을 지적했다.
거기에 대해서 김용환 교수는 노년의 보수를 기대하지 않는 자원봉사가 진정한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보수를 받고 하는 일과는 근본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는 이 두 분의 논의를 흥미 있게 듣고 노년학과 노년철학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노년학은 노년문제를 대상 인식적으로 접근하고 노년을 지원하는 제도설정에 중점이 주어진다면, 노년철학은 노년을 사는 사람들의 자각의 문제와 청소년이나 중장년이 노년을 어떻게 보느냐는 타자인식을 함께 아우름으로써 보다 나은 3세대(청소년세대·중장년세대·노숙년세대) 사이의 상화· 상생· 공복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역점을 둔다는 데서 서로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회의에서는 김영미 시인의 ‘로마와 경주의 비교에서 보는 노년의 의미’라는 발제에서 세월이 흘러 낡았어도 오히려 더 아름다운 문화유산과 고령자 인간의 모습을 시적 상상력을 살려서 그려보여 주었다.
원혜영 충북대학교 강사는 ‘성차(gender)와 나이듦(aging)’이라는 발제를 통해서 스피박과 보부아르의 문헌을 살피는 가원데서 여성철학과 노년철학의 상관연동성을 밝혀보려 했다.
그리고 전체토론으로 들어갔는데 주로 11월에 있을 일본 시즈어까(靜岡)현 주최의 국제회의에 대한 준비로 하라다 켄이찌 비교문명학회 회장의 취지 설명을 듣고 질의문답이 있은 후에 내가 한국 측 참가자들에게 두 가지 참고사항을 유념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시즈오까현에서는 ‘노년’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장수’라는 말로 통일하고 있기 때문에 장수철학이라는 말로 통일했으면 좋겠다는 것과, 시즈오까현에서는 무병장수 또는 건강장수를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 동양포럼에서는 행복장수를 장수철학의 기본으로 삼고, 평균수명과 건강수명은 행복수명과의 상관연동에서 성찰한다는 점을 의식해 달라는 말을 함으로써, 3일간의 국제회의를 마감했다.
정상혁 보은군수와 관계 직원 여러분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10월 4일 금요일
어제 10월 3일은 ‘하늘이 열린/열리는 날’이라는 뜻의 개천절이었다. 서울에서는 한국역사상=단군 이래 최다인수가 참가한 조국규탄, 문재인 퇴진 대규모 시민궐기가 있었고 그것이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을 보도를 통해 알았다.
속리산 숲마을에서 있었던 노년철학 6회 국제회의(2019년 10월 1~3일)를 보은군과 공동주최하고 나 자신이 주관해서 끝까지 충실하게 성공적으로 끝맺기 위해서 전력투구하느라 그쪽에 관심을 둘 새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의 정치상황이 더없이 어렵고 국민은 극단적 대립, 분열, 갈등으로 더없이 아파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조이며 그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은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자유민주주의를 나의 정치적 신념으로 삼고 사회민주주의나 인민민주주의를 수용하지 않는다. 정치사상이나 체제원리로서 그런 것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나 자신은 그런 사상에 공명하지도 않고 그런 체제 속에서 살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선호를 구태여 말한다면 친북좌파정권보다는 한미일 안보체제 속에서 우리나라의 안전보장을 공고히 하고, 열린 국제관계 속에서 자유무역을 통해서 경제발전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국익에 실질적으로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공직자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음가짐과 자세정립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건전한 법치가 공평하게 시행되는데 있어서 최고책임자인 법무부장관은 다른 것은 몰라도 투철한 준법정신이 몸에 배어있기를 기대한다.
10월 5일 토요일
오늘은 심신이 몹시 피로하고 위와 장의 상태가 아주 나쁘다. 그래서 오늘 하루는 철저하게 휴식을 취하는 쪽으로 일정을 조정했다.
3일간 계속되는 학술회의를 연달아 주관, 주재하기 위해서 정신적으로 긴장했고 육체적으로 무리를 해서 그 폐해가 고스란히 쌓여 몸이 반발을 하고 마음이 심한 불평을 표시하는 것 같다.
젊을 때는 하루 밤 자고 나면 거뜬했는데 80대 중반의 노년에 이르고 보니 확실히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약화되었음을 실감한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의사들로부터 나의 회복탄력성이 나이에 비해서 아주 좋은 편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번에는 피로감이 말끔하게 씻기질 않는다. 그저 가만히 쉬어야겠다. 특히 머리를 쉬게 해야 할 것 같다. 평안히 잘 자야지.
Good night! Have a good sleep!
10월 6일 일요일
어제부터 장상태가 좋지 않다. 아프고 쓰리다. 배변을 몇 번씩 하고나서도 여전히 아프고 쓰리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병원에 갈 수 도 없고 집에서 푹 쉬면서 나를 찾아준 이 불편함의 메시지를 헤아려 보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서 청소년기와 중장년기를 거치면서 노숙년기의 중반(80대에서 90대에 이르는 중간지점)에 이르게 된 지금까지 장 때문에 골치를 앓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특히 80대에 들어서면서 나의 사고와 판단과 행위가 뇌에서 보다는 장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아니다. 뇌에서 이루어지겠지만 장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 같다.
일본의 한 웹진 ‘생명과학정보실’의 대표이사이자 편집자이자 기자인 나가누마 타카노리(長沼敬憲)가 쓴 ‘장뇌력’이라는 책에 의하면 100세시대를 살아낼 힘은 뇌가 아닌 장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장뇌력을 갈고닦아 본디의 생명력을 회복하자고 외치고 있다. 그는 “뇌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장이 이끄는 대로 느끼며 살자”고도 한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 자신이 요즘에 와서 나날이 체감하는 것은 장의 상태가 좋으면 뇌작용도 활발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발생학적으로 뇌보다 훨씬 오래전에 장이 생겨났고 생명작용의 중추적인 역할을 뇌보다 장이 훨씬 더 오래 담당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뇌를 발달시킨 덕에 고도의 지성을 갖추었으나 언제부터인가 뇌가 주인행세하기 시작한 탓에 목숨 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작동하고 있는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상당히 멀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장을 모체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데에 나는 동감이다.
10월 7일 월요일
새벽 3시 20분, 마침 트로이 윌슨 오건(Troy Wilson Organ)의 ‘Philosophy and the Self: East and West(Selinsgrove: Susquehanna University Press:1987)’를 읽다가 젊은 때는 시를 쓰는 시기이고 나이든 때는 철학하는 시기라는 언급이 있어서 눈여겨보았다.
그것은 쇼펜하우(Arthur Schopen-hauer·독일의 염세철학자, 1788~1860)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그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교를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청춘—시: 노년—철학이라는 대비에 직접 연결되는 것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젊은 때 / 나이든 때
의지보다 지성 / 지성보다 의지
행복의 시기 / 불행의 시기
세상사를 멀리서 봄 / 세상사를 가까이서 봄
만족을 모르는 행복추구 / 불행할까봐 두려움
시간이 늦게 간다는 느낌 / 시간이 빨리 간다는 느낌
죽음은 안 보인다 / 죽음이 가깝다
인생은 길다는 느낌 / 인생은 짧다는 느낌
계획을 많이 세움 / 추억 속에서 삶
소유욕은 적다 / 소유욕이 더하다
주위에 과민 / 주위에 둔감
세상사 외면에 관심 / 세상사 내면에 관심
지력이 왕성 / 지력이 쇠퇴
자기인식 부족 / 자기인식이 시작됨
지식을 축적 / 지식을 반성
불안의 시기 /휴식의 시기
좋은 일을 위해 분투 / 체념
환상 /환멸
글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나는 쇼펜하우어의 나이든 때의 모습과 특징에 공감 할 수 없는 면이 많다. 거의 내 견해와는 맞지 않는다. 그의 철학이 대체로 염세적인 경향이 있는데, 노년관도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젊어서는 시를 쓰고 나이 들어서는 철학한다는 말은 마음에 든다. 내 경우에는 젊어서는 (사회)과학을 했고 나이 들어서는 철학(공공철학과 노년철학)을 하게 되었지만 시에도 남다른 관심을 쏟았으니까. 역시 나이 들어 철학하는 삶이 제격인 것 같다.
10월 8일 화요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나이 들어가면서 생각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다가 마침내 죽어가게 되어 있는데, 나 자신이 가장 나다운 때가 언제일까? 생각할 때일까, 느낄 때일까, 괴로울 때일까, 아니면 즐거울 때일까?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을 수 있겠지만 나 자신의 경우에는, 그것도 85년을 살아오면서 여러 번 반복해서 체험‧ 경험‧ 증험‧ 효험해본 바로는 내가 아플 때, 아주 심하게 아플 때, 이 세상 어느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는 오직 나만이 겪어야하는, 견디어 내야하는 바로 그때,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의식이 한계상황에서 나 자신이 아직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각은 다른 사람과 교류‧ 교환‧ 공유할 수 있다. 즐거움이나 기쁨은 함께 나눌 수 있고 서로 통할 수도 있다. 함께 나누고 서로 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즐거움과 기쁨이 크고 넉넉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픔은 홀로 겪어야하고, 견디어 내야하고, 이겨내야 한다. 불교는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그리고 죽는 것은 네 가지 괴로움(四苦)이라고 규정하고 거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또 괴로움과 아픔을 합쳐서 고통(苦痛)이라 말하는 경우도 많지만, 나 자신은 괴로움도 남과 함께 나누고 서로 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즐거움이나 기쁨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그 어느 것과도 다른 것이 아픔이다. 아플 때, 심히 아플 때, 나는 가장 깊은 뜻에서 ‘나’ 일 수 있다. 그래서 감히 나는 단언한다.
‘나는 아프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