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9

조성환 - 주체적 근대의 모색 – 다시개벽

주체적 근대의 모색 – 다시개벽

주체적 근대의 모색

-한국학으로서의 동학

글: 조성환

이 글은 개벽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한국 근대의 출발점은?
일본에서 공부할 때, 또는 일본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공통된 특징 중의 하나는, 전공을 불문하고 거의 대부분이, ‘메이지유신’이나 ‘전전(戰前)’과 같은 일본 역사의 특정한 지점에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는 점이다. 즉 동양학을 하든 서양학을 하든, 그 학자가 일본인이라면 거의 예외없이, 일본 근현대사의 특정한 사건을 화두로 삼아서 자신의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는 근대화의 성취라는 성공적인 기억과 함께 그것이 가져온 비극에 대한 반성이 중첩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좀 더 본질적으로 이 문제를 분석해 보면, 나는 그것이 학문의 출발을 ‘지금 여기’라고 하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현실적인 학문관의 반영인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몇 년 전에 참여한 교토포럼에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지점이 지금은 ‘메이지유신’에서 ‘3·11대지진’으로 이동하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근대라는 지점에 더해서 현대라는 지점이 새로 추가된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지점은, 단지 전쟁에 대한 반성과 회한이라는 성격을 넘어서, 근대문명 자체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결국 정리해 보면, 메이지유신이 일본학자들의 근대에 대한 논의의 출발이라고 한다면, 3·11 대지진은 현대에 대한 논의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예를 하나 더 들면,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유행했던 서양의 모스트모더니즘을 들 수 있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사상가나 학자로 분류되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68년’을 논의의 출발로 삼고 있었다. 1968년에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특정한 사회적 사건이 그들의 문제의식의 출발이 되고, 그 공통된 관심사가 일정한 사조나 학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한국의 학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자신의 전공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주자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주자나 공자 얘기부터, 불교를 연구하는 사람은 붓다나 원효로부터, 칸트를 전공하는 사람은 플라톤이나 칸트의 선배 철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거기에는 지금의 한국이라는 현실은 빠져 있다. 설령 지금 여기라고 하는 현실 문제를 거론한다고 해도, 그것의 기준이 중국의 주자나 조선의 퇴계나 서양의 칸트라고 하는 저 바깥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메이지유신’과 같은 근대를 알리는 논의의 지점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동학이라고 생각한다.

동학의 정의에 대한 의문
흔히 동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또는 동아시아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동학에 대한 학설은, 그것이 중국의 유불도(儒彿道)나 서양의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 성립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과서에 실린 동학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는 ‘중국의 유불도 삼교의 절충 내지는 종합’이라는 것이고, 최근에 나온 돈 베이커의 『한국인의 영성』에서도 동학 성립에서의 서학(=천주교)의 영향이 강조되고 있다. 동학에서 말하는 ‘한울님’은 일신교에서 말하는 ‘신’과 유사하고, 이러한 신관은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설명들이 한국사상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피상적인 견해라고 생각한다. 즉 ‘한국학’의 부재에서 오는 성급한 결론인 것이다. 그것은 동학을 한국학이라고 하는 거시적인 지평 위에 올려놓고 분석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단편적인 견해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동학의 피상적인 요소만을 가지고 동학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확실히 동학 경전에 보이는 유교적 덕목들, 주술적인 부적, 천주라는 용어나 하늘님의 성격 등은 중국의 유교나 도교 또는 서양의 서학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학’에서의 ‘동’이, 일찍이 최치원이 한반도를 가리켜 ‘동방’이라고 할 때의 그 ‘동’의 함축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그런 점에서 ‘동학’이라는 개념을 오늘날로 말하면 ‘한국학’으로 치환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최제우가 추구하고자 했던 한국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토착적 요소는 방법론상에서 중국적인 것과의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적 패러다임의 종언
구한말의 대유학자 최한기는 ‘성학(聖學)에서 기학(氣學)으로’라는 명제로 중국철학의 성인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학문은 ‘성학(聖學)’, 즉 ‘성인의 말씀에 의한 대중들의 교화’라고 하는 성인 중심의 형태를 띠었다. 이에 반해 최한기의 ‘기학’은 진리의 기준을 성인의 말씀에 두는 것이 아니라 ‘기’라고 하는 구체적인 자연현상에 두겠다는 학문관이다. 이처럼 성학이 성인 중심의 중국적 패러다임이고, 기학이 기를 중심으로 한 최한기적 학문관을 말한다면, 동학을 규정하는 학문적 개념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천학(天學)’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최제우는 자신의 학문을 ‘천도(天道)’라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중국의 그 어떤 주류 사상도 자신의 학문을 ‘천도’라고 명명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중국은 기본적으로 성인 중심의 학문이고, 따라서 학문의 명칭도 성인의 이름을 따라서 붙이기 때문이다. 가령 ‘불도(佛道)’는 ‘붓다가 제시한 길’이라는 뜻이고, 유교의 다른 말은 ‘문무주공의 도’나 ‘공교(孔敎)’, 즉 ‘공자의 가르침’이며, 도교의 다른 말은 ‘노교(老敎)’, 즉 ‘노자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총칭하는 개념이 ‘성교(聖敎)=성인의 가르침’ 또는 ‘성학(聖學)=성인의 학문’이다.
이에 반해 동학은 학문의 근원을 ‘하늘’로 삼았다. 그리고 그 하늘은 중국적인 ‘천’이 아니라 ‘하늘님’이라는 ‘천주(天主)’이다. 즉 자연의 운행을 의미하는 무언(無言)의 ‘천’이 아니라 인격적인 의미가 부여된 계시의 하늘인 것이다. 그래서 동학의 하늘님은, 그것과 합일되어야 할 질서나 원리가 아니라, 모시고 섬겨야 할 공경의 대상이다. 최제우는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사상을 ‘천도’, 즉 ‘하늘님을 섬기는 삶의 실천’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조선왕조 500년 동안의 중국적 사상 형태가 힘을 잃자 한국인들의 궁극적 관심이 드러난 결과라고 생각한다. 즉 성인 패러다임에서 하늘 패러다임으로 사상의 축이 전환된 것이다.

“인간은 성인이다”에서 “인간은 하늘이다”로
중국적 성인 패러다임의 특징은, 일찍이 도널드 먼로가 ‘natural equality’(자연적 평등)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듯이, “누구나 성인이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명제로 압축된다. 그런데 먼로에 따르면, 이러한 평등성이 “누구나 똑같이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평가적 평등(Evaluative Equality)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즉 누구나 성인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누구나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예적(禮的) 질서나 한국의 사농공상의 차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누구나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고 주장하는 동학은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평가적 평등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동학에서 설령 인의예지와 같은 유교적 윤리를 긍정하는 대목이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본래의 유교윤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유교에서는 어디까지나 ‘예’라고 하는 사회적 차등(分) 위에서 상호윤리를 주장하는 반면에(가령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자애한다고 하는 식의), 동학은 시천주(侍天主)라고 하는 평가적 평등 위에서 유교윤리를 실천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학교도들끼리 행하는 맞절의례는 바로 이러한 점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동학에서는 윤리적 덕목의 중심이 ‘경(敬)’으로 이동하게 된다. 즉 이미 모든 존재가 하늘이 된 이상, 그들을 하늘로 공경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윤리의 관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경’이라고 해도 성리학에서의 ‘경’과 동학에서의 ‘경’이 그 내용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즉 성리학에서의 ‘경’이 자신이 성인이 되기 위한 ‘경’이라고 한다면, 동학에서의 ‘경’은 상대를 하늘로 모시기 위한 ‘경’이다. 즉 전자가 ‘극기(克己)’로서의 마음공부라고 한다면 후자는 ‘시인(侍人)’으로서의 타자 윤리인 것이다.

하늘과 인간의 상호협력
동학이 기존의 중국적 패러다임, 또는 유학적 세계관에서 탈피했다고 하는 증거는 시천주의 인간관뿐만 아니라 천인관(天人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적 천인관의 기본은 “인간은 하늘을 본받는다(人法天)”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일찍이 동중서의 ‘천인상여(天人相與)’나 노자의 “인법지(人法地), 지법천(地法天), 천법도(天法道), 도법자연(道法自然)” 등으로 표현되었다. 동중서의 ‘천인상여’는 “하늘과 인간이 서로 함께 한다”는 뜻인데,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군주가 부도덕한 정치를 하면 하늘이 자연재해를 내린다”고 하는 천인감응설 또는 천인상관설을 말한다. 한편 노자의 ‘도법자연’은 ‘천’을 저절로 그러하게 운행하는 무목적적인 자연으로 해석하여 인간은 그러한 자연의 운행을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에 반해 최시형이 말한 ‘천인상여(天人相與)’는 “인의천(人依天), 천의인(天依人)” 즉 “인간은 하늘에 의존하고 하늘은 인간에 의존한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천인상여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과 하늘의 상호의존성을 말하는 천인상의(天人相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늘이 인간에게 벌을 내린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동중서의 천인상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최시형의 천인상여는 하늘도 인간의 힘을 필요로 한다고 하는 불완전한 하늘관을 전제로 하고 있는 반면에, 동중서의 천인상여에서는 하늘은 인간이 범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일찍이 최제우에게서 ‘노이무공’이라는 말로 표현된 적이 있다. 최제우의 천어(天語) 체험에 나타난 하늘님은 “개벽 후 5만년 동안 노력은 했는데 공이 없다가 너를 만나 공을 이루었다”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제아무리 하늘님일지라도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세상을 구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최제우는 하늘님의 계시와 하늘님으로부터 받은 무극대도를 통해서, 하늘님은 다시 최제우라는 인간의 포덕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천인관은 이후에 증산교나 통일교에서 ‘신인합발(神人合發)’이라는 형태로 이어진다(홍범초, 노길명, 윤승용 참조). 신인합발이란 인간계와 신령계가 힘을 합쳐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상으로, 동학의 천인상여사상과 그 발상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개벽과 민중사상
최제우나 전봉준과 같은 동학사상가를 비롯하여 증산교와 같은 일제시대의 자생종교, 그리고 구한말의 독립지사들, 심지어는 조선왕조실록에서까지 공통적으로 보이는 한국정치사상의 슬로건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보국안민은 때로는 보국안민(保國安民)으로도 쓰는데 한국의 민중사상 내지는 정치철학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보국’은, 『대학』의 ‘치국’과 대비될 수 있는 말인데, 나라가 위태로우면 민중들이 나서서 나라를 구제한다고 하는 민중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 사상을 나타낸 말이다. 반면에 『대학』의 치국은 정치의 주체를 위정자로 보고 위정자가 중심이 되어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상의 표출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국이 민중 중심의 개벽사상과 통한다고 한다면 치국은 위정자 중심의 개화사상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보국이 정치의 주체를 ‘민’으로 보고 있다면 치국은 정치의 주체를 ‘관’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안민’은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인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일찍이 신라 향가의 「안민가」에서 그 용례가 보이고, 사상적으로는 『논어』의 ‘안인’과 상통한다(“修己以安人”). 세종이 한글창제의 목적을 ‘편민’, 즉 “백성을 편안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천명하거나, 일제시대의 민세 안재홍이 한국정치철학의 핵심을 ‘다사리’, 즉 “정치란 백성들을 모두 따뜻하게 하는 것”이라고 본 것 등은 모두 안민사상의 표출이다.
반면에 『대학』에서의 ‘친민(親民)’(왕양명)이나 ‘신민(新民)’(주자)은 위정자가 백성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논한 것이지, 그 자체가 정치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즉 『대학』에서의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치국·평천하’라고 하는 질서유지에 있고, 그것의 일환으로 친민이나 신민이 요청되는 것이다.
보국안민은 논리적으로 안민이 실현되지 못할 때 ‘민’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보국을 해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나라의 존재 의의,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안민’에 있고, 정치의 주체는 민이라고 하는 사상의 표현이다. 동학의 개벽은 이와 같은 한국의 민중사상과 안민사상이 응집되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자는 혁명사상의 표출이다. 다만 동학이 추구한 혁명이 오늘날 정치학에서 말하는 혁명과 다른 점은, 그것이 영성과 수양을 동반한 혁명이었다는 점이다.

수양과 구원
중국 종교의 특징은 철저하게 수양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데에 있다. 즉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성인이 되고, 그렇게 해서 된 성인이 타인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초월적인 신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반면에 서양의 기독교의 핵심은 수양론이 아니라 구원론이다. 그리고 그 구원은 창조주로서의 신의 도움에 의해 이루어진다.
중국의 수양 중심의 학문관을 단적으로 나타낸 말이 도학(道學) 또는 심학(心學)이다. 도학은, ‘수도(修道)’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닦는다’고 하는 수양 중심의 학문관을 대변하는 말이다. 동학에서 “닦아야 도덕이다”(『용담유사』「교훈가」)라고 할 때의 ‘도덕’ 역시, 오늘날 말하는 지켜야 할 규범으로서의 도덕이 아니라, 자기도야라는 의미에서의 수양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로는 수양의 중심에 ‘마음’이 자리 잡게 된다. ‘심학’이라는 말은 학문의 핵심은 마음공부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퇴계나 동학에서는 자신의 학문을 ‘심학’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동학이 천도라고 하는 하늘님 중심의 사상 체계를 지향했다고 하는 것은, 수양 중심의 중국 종교에 부족한 구원의 문제를 보완하려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최제우는 하늘님의 계시를 통해서 천도를 창시하였고, 천도는 마음속에 하늘님이라는 영적인 존재를 믿고 모시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학에서는 하늘님이라는 인격적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서 인간의 자기구원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이것은 천인상여의 구원론적 측면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학은 심학이라는 수양의 요소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공부 없이 하늘님의 강령이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至氣今至願爲大降). 그래서 ‘수심정기(修心正氣)’와 ‘시천주(侍天主)’는 수양과 구원이라는 동학의 두 축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동학에 이어서 나온 증산교와 원불교는, 증산교가 상대적으로 상제 중심의 구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한다면, 원불교는 마음공부 중심의 수양의 문제를 강화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동학이 추구한 근대
전봉준과 동시대의 일본의 생명사상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다나카 쇼조는 동학을 ‘문명적’이라고 극찬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문명화’라는 구호하에 일본이 추구하던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간접적 비판으로, “살생하지 마라”는 기치를 맨 앞에 내건 동학의 살림사상과 평화사상에 대한 공감의 표현이다. 다나카 쇼조는 부국강병이 아니라 생명과 살림을 참다운 문명의 기준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나카 쇼조와 동학이 비판한 서구적 근대의 근본적인 한계가 일본의 대지진과 한국의 세월호사건으로 표출되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이 현대의 논의의 출발점을 3·11 대지진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면, 한국의 그것은 아마도 4·16 세월호사건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월호는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 하에 추구해 왔던 일본적 근대화의 종언을 알리는 사건으로, 생명과 인권을 대가로 추구해온 경제성장 패러다임의 한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과연 잘 산다는 것이 무언인지를 철학적으로 반성하게 한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동학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학은 성장보다는 살림에 가치를 두면서, 영성과 수양이 동반된 인문혁명을, 민중이 중심이 되어 주체적으로 모색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여러 곤경들의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해 줄 수 있는 한국사상사의 중요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김용옥, 『독기학설 – 최한기의 삶과 생각』(통나무, 2004)
노길명, 『한국신흥종교연구』(경세원, 1986)
박맹수,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모시는사람들, 2014)
윤승용, 「한국 신종교의 생사관과 상장례」(『신종교연구』23, 2010)
조성환, 「천도의 탄생 – 동학의 사상사적 위치를 중심으로」(『한국사상사학』44, 2013)
조성환, 「‘생명’의 관점에서 본 동학사상사」(『역사연구』28, 2015)
Donald Munro, The Concept of Man in Early Chin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