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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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4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2020-06-21 동양일보
[동양일보]10월 9일 수요일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70대 후반까지도 완벽주의자였다. 무슨 일이나 그때 그곳에서 완벽을 기하지 않으면 마음이 평온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 자신이 완벽주의자의 문제점을 확실하게 실감한 것은 70대 후반의 일이었다.
며칠 동안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간호사의 한마디가 뜻하지 않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간호사는 내게 병의 완쾌가 더딘 것은 나 자신의 완벽주의적인 고정관념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통사람은 그 정도면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지낼 수 있고, 그 정도면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지나치게 완벽주의적인 편집이 나 자신을 병고에서 해방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간호사는 일본에서는 아주 유명한 간호전문가였다.
그런 일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80대가 되면서 나 자신도 놀랍게 느낄 정도로 완벽주의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서 최선주의자로—어떤 상황이나 조건에서도 완벽을 기하려는 집념을 버리고,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려는 자세─ 바뀌었다.
행복은 완벽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데서 찾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완벽을 기하려는 마음이 너무 강하면 언제나 불만이고 불평과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납득하게 되면 만족의 극대화가(maximization of satisfaction) 아닌 행복의 최적화를(optimization of happiness) 체득하게 된다는 것을 늦게나마 80대가 되어서야 체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10월 10일 목요일
청년철학의 출발점은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다.(Amo, ergo sum. I love, therefore I am) 중년철학은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Consumo, ergo sum. I spend, therefore I am)’ 요약된다. 그러나 노년철학은 ‘나는 비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다.(Vacuo, ergo sum. I empty, therefore I am)’.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철학적 고뇌‧ 사유‧ 상상‧ 언설의 핵심내용이다. 사랑에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이 난다. 삶의 원동력이 거기서 나오고 삶의 보람이 거기서 느껴지고 삶의 지향이 거기서 세워지기 때문이다.
중년에 접어들면, 특히 자본주의 시장경제사회에서는, 돈을 벌고 돈을 쓰는 것에서 사는 맛을 알 수 있고 사는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사는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부자이건 아니건 일상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돈을 버는 일이나 아니면 돈을 쓰는 데서 보내진다.
그러나 노년이 되면 얼마나 비울 수 있는가가, 노년다운 삶의 기본이 된다. 청년이나 중년이 채우는—사랑의 욕구를 채우거나 돈의 소유와 소비로 채우거나— 삶이었다면 노년은 모든 것을 비우고 청년이나 중년의 채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다시 채우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텅 빈 내면 깊숙이 우주생명의 숨결과 원력(願力=지구사회와 인류문명의 보다 나은 미래를 함께 새롭게 열어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힘)을 가득 채우는 데 온 힘을 기울이게 된다. 개체생명이 완전히 비워질 때 비로소 우주생명이 충만하게 되어 아주 다른 새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0월 11일 금요일
청년철학이나 중년철학은 중심과 방향은 다른 데가 있을 수 있지만 그 기반, 터전장소가 의식이라는(意識─consciousness)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내가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기본이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는데서 삶의 기쁨을 얻거나 열심히 돈을 벌어서 마음껏 쓰는 가운데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것은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청년철학이나 중년철학은 모두 의식 중심의 철학이다.
그러나 노년철학은 기반, 터전, 장소가 의식에서 생명으로 이동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의식보다 깊고 넓은, 그래서 의식조차도 거기서 생겨나오는, 생명을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자각하는 것, 자기 삶의 참모습에 눈이 뜨이는 것이다. 남의 삶을 보고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깨닫고 얼을 통해서 보다 큰 생명에 이어져 있고 그것에 의해서 내 삶이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몸과 마음과 넋으로 이루어진 나 자신의 개인적인 삶 =개체생명을 비어가는 한편 나의 삶을 지탱해온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이 빈자리를 채워가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거기에 순응해가는 것이 노년철학의 첫 번째 의미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겪어가면서 청소년세대와 중장년세대와 함께 서로 행복해지는 길을 열어가는 일이 노년철학의 두 번째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년철학은 노년의, 노년을 위한, 노년에 의한 철학이 아니다. 노년철학은 3세대가—청소년세대‧ 중장년세대‧ 노숙년세대— 함께 살면서 서로가 힘을 보태고 지혜를 모으고 능력을 발휘해서 화해와 상생과 공복=함께 행복해하는 좋은 사회를 이루기 위한 철학이다.
10월 12일 토요일
친구와 만나기 위해 시내로 나가려고 택시를 탔다. 그런데 중년의 여성운전기사가 내가 과거에 대학교수였다는 것을 안다면서, 평소에 궁금하게 생각해온 것들이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다음 질문들을 했다.
1) 왜 살아야 하는 거지요?
2) 무엇이 있으면=가지면 행복하게 될 수 있나요?
3) 행복은 나 자신 밖에서 찾아지는 게 아니라, 나 자신 안에서 찾아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그런가요?
요즘에 들어서 상당히 유식한 운전기사들이 운전하는 택시를 종종 타게 된다. 그때마다 나누는 대화는 아주 유익하다.
나의 개인적인 견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놓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1) 태어났으니까 살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고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 행복이란 무엇이 있다거나 가지고 있다는 조건에 따르는 결과가 아니라 나의 삶이 삶답게 가꾸어지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자각이요 각성이다.
3) 행복은 나의 밖이나 나의 안에서보다는 나와 너 사이에 나타나는 일=현상=사건이다. 나만의 행복은 불충분 할 수밖에 없고 자기와 타자가 함께 나눌 수 있는 행복일—그러니까 공복(共福)—때 충분하고 온전하고 충만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만의=나 홀로의 행복이 무시‧ 소외‧ 희생되는 데서는 어떤 행복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이렇게 내 의견을 나눴다. 말하는 사이에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귀한 말씀 고맙습니다. 저의 작은 성의를 담은 수업료라고 여기시고 택시 요금은 안 받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떠나갔다. 일순 훈훈한 행복이 저만치 가고 있는 운전기사와 나 사이에 출현했다.
10월 13일 일요일
오후 3시 30분, C대학의 L교수와 전화로 이야기를 하던 중 요즘 행복에 관한 책들을—주로 한국에서 출판된 한국어 서적들─ 읽었는데 서양학자들의 행복론 또는 행복학설의 번역‧ 소개‧ 인용뿐이고, 막상 저자 자신의 생활체험이나 심사숙고에서 나온 견해나 소신이 들어있지 않아서, 매우 아쉽고 허전했다는 그의 소감을 토로했다.
나의 노철 개벽일기도 읽고 있으며, 특히 어제 쓴 부분을 읽고서 자기가 마침 생각해 온 문제와 동시성(Synchronicity=우연히 같은 생각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현상‧ 사실‧ 상황)을 느꼈다고도 했다.
나도 일본에서 공공철학대화운동을 주관하고 있을 때부터, 행복에 관해서 여러 나라에서 출판된 여러 권의 전문서와 교양서를 읽어보았고, 또 여러 나라의 대표적인 행복학 전문가들과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나 나름대로의 현시점에서 나 자신이 깨달은 바를 최소한의 명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고, 언젠가는 자세한 내용으로 펼쳐보려 한다는 나의 의중을 이야기했다.
1) 행복에 관해서는 기본적으로 지성적 행복이해, 감성적 행복이해, 영성적(또는 근원생명력적)행복이해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깨닫는 행복, 느끼는 행복, 통하는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2) 행복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 그 차체라는 것이다. 가령, 재산이나 명성이나 지위처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서─존재의 차원에서─깨닫거나 깨우치거나 눈뜨는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요 자각이요 기통(氣通=막혔던 생기=생명에너지가 확 뚫려서 거침없이 통하게 되는 현상)이다.
3) 행복이란 자기 밖 먼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안의 깊숙한 곳에서 근원적 생명에너지가 제대로 작동할 때 생성되며 그것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감동적이고 감사할 일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4)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개인 속에 갇혀있는 불완전한, 온전치 못한, 부족한 행복이다. 자기 속에 일어나는 기적 같은 생명의 충만, 충일, 충전이 타자 속에서도 일어나서 자기와 타자사이에 공명(共鳴=함께 울리다), 공진(共振=함께 진동하다), 상통할(相通=서로 거침없이 통하다) 때, 비로소 자타간 공복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온전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0월 14일 월요일
오랜만에 C대학의 K교수를 만났다. 여러 가지 지내온 이야기를 하던 중에 장수개벽일기를 읽었다면서 솔직한 감정표현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옳은 지적이다. 나 자신이 감정노출을 극력 자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이 담겨있지 않으면 공감의 통로가 막혀버릴 수 있어서 삭막한 글이 되기 쉽다고도 했다. 역시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D대학의 K교수와도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동안 함께 해온 노년철학에 인간적 온기와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시(詩) 문학적 감성을 더함으로써 인문학적 품격을 갖춘 노년철학으로 잘 다듬어서 한권의 책으로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는 생각도 공유했다.
우리가 함께 추구해온 노년철학은 3세대–청소년세대, 중장년세대, 노숙년세대–간 상화, 상생, 공복을 실현시킬 수 있는 좋은 사회건설을 지향하는 철학대화운동이다.
그 운동에너지의 원천은 동양포럼참가자들의 지성과 감성과 영성의 교향악적(Symphonic) 화합(和合), 융합, 조화에 있다. 정연한 논리가 있고 따듯한 감동이 있고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이 어우러지는 가운데서 공감에너지가 적정화될 수 있을 것이다.
노년철학은 논리가 바로선 언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마음 깊숙한 내면에 와 닿는 시가 있으면 더 좋다. 그러나 거기서 한발 전진 할 수가 있다면 지역간, 남녀간, 세대간, 상호존중, 상호화합, 상호격려를 깊고 넓은 차원에서 성취할 수 있는 영성의 역동이 더해지게 되면 좋겠다. 시에는 그런 힘이 있다는 데는 인식을 같이했다.
10월 16일 수요일
정오(정확하게는 12시 15분)에 유성종 선생, 김용환 교수와 만나 점심을 함께하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김용환 교수의 큰아들이 결혼을 했다고 해서 축하하는 뜻을 전했고,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국가공무원으로 특채되어 매우 흐뭇한 것 같았다.
그 젊은이는 오늘의 우리나라에서 일반시민들의 역할기대를 저버리고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법기술자가 되지 말고, 참다운 법률가가—판사이든 검사이든 변호사이든 국가공무원이든—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절실하다는 뜻을 전해 달라고 했다. 그런 뜻을 담고 인문학적 교양을 강조하는 책 한 권을 선물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책이니까.
그리고 유성종 선생과 나는 2019년 12월 31일부로 동양포럼의 운영위원장과 주간의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한다는 우리의 의중을 밝혔다.
우선 김용환 교수가 운영위원장과 주간 중 어느 쪽을 계승해 주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주간 쪽을 맡고 싶다고 해서 그러면 운영위원장은 유성종 선생이 권유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확답을 단시일 내에 받기로 하고, 두 분이 힘을 합쳐서 잘 키워달라는 간곡한 부탁도 했다.
유성종 선생과 나는 4년간 정말 최선을 다했고, 어느 정도 새 길을 열어놓기는 했으나 앞으로 연부역강한(年富力强=나이가 넉넉하고 힘이 강하다) 김 교수의 활동을 기대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30년간 외국에 나가있었기 때문에 국내에 학맥이(學脈) 다 끊어져 버렸고, 그래서 좋은 사람들을 모시는 데 여러모로 역부족이었다. 그 점 스스로 인정한다.
그래서 김 교수가 우리나라 실정을 잘 감안해서 좋은 인선을 하고 좋은 성과를 내서, 노년철학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켜주기를 당부했다.
나 자신은 더 자유로운 입장에서 일본과 한국을 아우르는 쪽으로 노년철학대화활동을 계속해 나가겠다. 정권주체들이 극단적인 반일태도를 취하고 국민에게도 직간접적으로 ‘반일은 애국이고 친일은 매국’이라는 식으로 마구 몰고 가는 가운데서, 한일철학대화를 계속한다는 것이 김 교수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내가 그 몫을 담당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설명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