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평론가] 혜강 최한기의 ‘기학’을 읽고 - 포항공대신문
[나도 평론가] 혜강 최한기의 ‘기학’을 읽고
김응상 / 생명공학연구센터
승인 2004.10.13
자기이론 고집않고 수정 인정한 ‘열린 학문자세’ 견지
전통유학에 서양 자연과학 접목시켜 자신의 사상 ‘기학’으로 집대성
“빛은 파동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데 어떻게 알 수 있나?” “막시즘(Marxism)은 탈냉전 시대에 어떤 형
태로 자본주의 경제정책에 영향을 주고 있을까?” “과거사 재정립에 필요한 역사의식은 어떤 것인가?”“미술에 있어 입체파와
초현실주의는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나?”
만약 위와 같은 질문을 인문학 분야에 있는 친구로부터 듣게 된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학부 때부터 과학기술 분야에서 공부를 해오다 보면, 자칫 소홀해지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여러 인문학 분야에 대한 관심과 진
지한 고민이다. 필자도 이런 경향에 있어 예외는 아니다. 자연현상에서 찾은 원리와 논리, 그리고 그 현상을 모사하는 수식에 익
숙해지다 보면 문학, 역사, 철학, 그리고 예술 분야의 책들이 생소하게 여기질 때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팽개치고 인문학과 관련된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인문학 분야 사람들이 물리학, 수학, 화학, 생명과학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어 이제 서로 협력관계에 놓인 수많은 공학 분야를 잘 모른다고 해서 그들에게 이공계 분야를 강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서로 담을 쌓고 교류를 뜸하게 한다면 그것은 한 개인뿐만 아니라 개인이 속한 사회 공동체의 이분화만 야기할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혜강(惠岡) 최한기(催漢綺)를 소개하면서 그의 학문 자세에 대해서 함께 말하려고 한다. 필자가 정규 학업과정(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에서 배운 조선후기에 관해 설명한 교과서와 교재에서 혜강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혜강은 최근 인문학계에서 재해석하고 있는, 19세기에 이 산수(山水)에 산 인물이다.
19세기 초반인 1803년에 태어나 1877년에 생(生)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대단한 책벌레였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관료계로 나서지 않고 학파를 만들지도 않은 채 거의 혼자서 유학(儒學)과 자연과학에 관련된 많은 서적을 섭렵하였다. 그가 이렇게 여유로운 학술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선조들 가운데 관료 출신이 있었고, 그의 아들 병대가 관직에 종사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그가 접한 자연과학 서적은 당시 청나라를 통해서 수입된 번역서였다. 그가 읽은 자연과학 서적에는,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유럽 대륙을 흥분시킨 과학혁명과 그 이후 산업혁명의 불씨가 된, 천문학과 뉴턴 역학 그리고 기계공학에 관련된 책들이었다. 중국을 통해 번역되었고 또한 그 책들이 한양에 들어오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지금처럼 금방 전자 저널로 접할 수 없었지만 한 번 그 손안에 들어온 책들은 그의 열린 인식체계를 더 강화시켰다. 결국 그는 55세에 그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기학(氣學)’이라는 대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거기서 그는 전통 유학사상을 기반으로 서양의 자연과학을 접목시켰다. 그는 조선의 성리학을 비판하기에 앞서 성리학의 뿌리가 된 유학의 근본 개념들을 정립한 후, 정성적(定性的) 아닌, 인식이 가능한 것에 대한 정량적(定量的)인 기술을 바탕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서양의 자연과학 개념들을 흡수하였다.
필자가 혜강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우리학교 안에 만들어진 고전강독회(古典講讀會)에 참석하면서부터였다. 그 전에 서점에서 우연히 최한기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 그를 소개한 글을 보았는데 단지 그를 조선후기의 실학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만 여겼을 뿐, 그의 책 내용에 대해 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고전강독회에서 그의 대표적인 저서, 명남루수록(明南樓隋錄), 신기통(神氣通), 기측체의(氣測體義), 추측록(推測錄), 인정(人政), 기학(氣學) 등을 읽고 토론하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많은 저서 가운데 지금 제목만 전해져오는 책들도 많았다. 이 모임에서 인문학 분야에서 재해석되고 있는 최한기의 사상을 자연과학자와 공학자의 입장에서도 바르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가 20대 후반에 농업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후 기학을 탈고하기까지 그의 학문 분야는 상당히 광범위하였고 그런 가운데서도 활동운화(活/動/運/化)로 설명되는 기(氣)의 개념으로 유학과 자연과학을 바라보았다. 그가 서양의 자연과학을 수용한 것은 단순히 구국강병을 위한 수단이 아닌, 자연현상과 인간에 대한 근본 원리를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필자가 혜강의 저서를 읽으면서 가장 도전받은 것이 그의 허심탄회(虛心坦懷)한 학문 자세였다. 혜강은 그의 대표작인 기학에서 자신의 식견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면 후손에 의해 충분히 수정될 수 있음을 밝히고 그의 견해가 그러한 학문 진보가 있게 하는 거름이 되기를 밝히고 있다. 그는 그의 학문체계만이 대동(大同)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뭇사람들의 인식의 범위와 깊이가 변화하면서 근본 원리와 그 원리의 유용한 활용에 의해 대동은 다시 그려진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혜강은 전생애를 통하여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즐겼으며, 돈을 아끼지 않고 동서고금의 여러 책들을 구입하였으며, 후학들에게 그것들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혜강의 저서에서 살펴보면 그가 이해한 자연과학 내용 가운데는 지금 이공학 분야에 있는 우리가 읽으면 유치하게 여길 부분도 없지 않다. 하지만 자연과학에 대한 체계적 교육이 있지 않았던 조선후기의 상항을 고려한다면 그 부분을 가지고 그의 모든 학문 세계를 흠잡는 것은 무리이다. 그리고 그의 학문 체계를 마치 절대 진리로 생각하고 새로운 인식 체계를 혜강의 인식 체계에 맞추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억지일 것이다.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깊이 있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청나라와 일본 그리고 서양 열국의 영향이 점점 한반도에 밀려오던 19세기에 성실한 학자의 모습을 보여준 혜강의 정신이 우리학교 공동체 가운데 전수되어지길 바란다. 학제적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자신이 공부하는 분야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열린 학자의 눈으로 좁게는 다른 학과, 넓게는 인문학 분야까지도 볼 수 있길 바란다. 모든 분야를 섭렵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야에 충실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주변의 학문에 관심을 가지며 그를 단순한 지식의 탐험이 아닌 인간과 자연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고찰을 할 수 있는 혜강 정신을 배우자는 것이다.
혜강은 번역서를 통해서도 조선에서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적은 수의 인문학 강좌만을 탓할 수 없는 노
릇이라고 생각한다.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도서관과 인터넷 그리고 작은 토론 그룹을 만들어 함께 노력한다면 21세기 이 한반도에서도 혜강을 능가하는 석학(碩學)들이 등장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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