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일지. 2020.04.29] 모두가 사는 <중도>의 길을 찾아서
팬데믹이라는 지구적 위기상황에서 전 세계가 한국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서양에서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작동시킨 채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한국사회의 도전에 연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개방성을 유지하면서 전염성을 억제시킨다”는 것은 일견 모순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거리를 두지만 거리를 없애지 않는 ‘사이좋은’ 상태에서 바이러스와 대처하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최근에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는 국회의원 선거까지 치러내서 다시 한 번 찬사를 받고 있다. 이처럼 한국은 재난이라는 위기상황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일정을 소화해 내는 이상적인 ‘새생활’(뉴노멀)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이렇게 대응한 것은 아니다.
이번 전염병에 대응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리었다. 하나는 사람들의 왕래를 차단하여 바이러스의 전염을 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여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왕래를 차단할 경우에는 개인의 자유가 훼손되고, 개인의 자유를 누릴 경우에는 사회 전체가 위태로워진다. 동아시아의 공사(公私) 개념으로 말하면, 전자는 공을 위해서 사를 희생시키는 것이고, 후자는 사를 위해서 공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자유)를 살리면서도 공(공동체)을 유지할 수 있을까? 즉 공동체의 생명과 개인의 자유를 모두 살리는 길은 없을까? 일찍이 공공철학자 김태창은 이것을 ‘활사개공’(活私開公), 즉 “사를 살려 공을 연다”고 하였다. 그리고 ‘공공(公共)’이란 이런 활사개공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공공철학대화』). 이렇게 보면 한국은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면서 <공공의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활사개공의 ‘공공’이 모순적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공과 사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양자를 마치 바이러스처럼 넘나들 수 없도록 봉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소태산은 “간격을 만든다”고 하였다. 그리고 간격을 타파할 수 있는 ‘융통’의 태도야야말로 양자를 모두 살리는 ‘큰살림’이자 ‘새생활’(뉴노멀)의 길이라고 하였다: “어찌 본래의 원만한 <큰 살림>을 편벽되이 가르며, 무량한 큰 법을 조각조각으로 나누리요! 우리는 하루 속히 이 간격을 타파하고 모든 살림을 융통하여 원만하고 활발한 <새 생활>을 전개하여야 할 것이니 그러한다면 이 세상에는 한 가지도 버릴 것이 없나니라.”(『대종경』 「제8 불지품(佛地品)」 21장)
지금 식으로 말하면 자유와 공동체, 공과 사 사이에 장벽을 세우지 않고 양자를 융통시키는 것이 모두가 사는 ‘중도’의 길이라는 것이다: “(대종사님께서는) 일체 법도를 일원의 진리에 입각해서 양면을 다 활용케 하셨으니 이는 <중도(中道)>라야 능히 천하를 고르고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를 다 같이 잘 살게 하는 천하의 대도가 되기 때문입니다”(『대산종사법문집』 제2집 제4부 신년법문 「화동(和同)하는 길」) 이것은 소태산의 사상이, ‘일원(一圓)’이라는 말로부터 알 수 있듯이,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것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공공(公共)을 지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가 인간에게는 바이러스지만 지구에게는 백신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문명이 잠시 멈춤으로써 자연이 숨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도에서는 창문 밖으로 히말라야산이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연일 미세먼지가 좋은 날이 계속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갈라서, 자연을 단지 인간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는 문명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이번 사태가 인간과 지구가 함께 사는 ‘공공의 길’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월간 원광』549호, 2020년 5월, 10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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