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의 살림영성
-안도 쇼에키와 동학을 중심으로
글: 조성환, 2021.05.01
이 글은 개벽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쥴리앙이라는 프랑스의 비교철학자는 “한국은 중국철학의 보관소”라고 했다고 한다(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이근세 옮김, 『전략』 교유서가, 2015, 『해제』). 중국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귀중한 사상들을 한국이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인들은 한국이라고 하면 ‘한(恨)’을 떠올린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의 혐한론의 분위기를 타고 더욱 가열되고 있는데, 가령 일본에서 활동하는 황문웅이라는 대만출신 저널리스트의 신간 『恨韓論』(宝鳥社, 2014)이 대표적이다(설령 한국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자 하는 논의의 경우에도 ‘한’은 단골 주제로 등장한다. 가령, 오구라 키조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講談社, 1998)).
이런 외국인들의 평가에서 공통되는 것은 한국사상의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의미를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과 일본의 생명사상에 접근한 것이다.
1. 안도 쇼에키의 활진사상(活眞思想)
안도 쇼에키(安藤昌益, 1703-1762)는 에도 중기에 해당하는 18세기 일본의 사상가로 중국의 유교, 불교, 도교의 이른바 삼교의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 독특한 사상가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의사였으면서도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였고 특히 생명사상을 주창한 사상가로 유명하다. 유불도 삼교의 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니노미아 손토크(二宮尊徳. 1787~1856)와 유사하고, 생명을 철학적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다나카 쇼조(田中正造, 1841~1913)의 선구자라 할 만하다. 그의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는 ‘직경, ‘활진’, ‘자연세’ 등을 들 수 있다.
(1) 직경(直耕=직접 밭을 간다)
안도 쇼에키는 우주의 본질을 ‘경(耕)’, 즉 ‘노동’으로 파악한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다 각자 맡은 일을 함으로써 먹고 산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 하에서 그는, 전통적으로 숭상받아 온 성인들(요순, 석가, 노장 등)을 모두 “불경탐식(不耕貪食)”, 즉 “농사일을 하지 않고 농민들을 착취한 도둑”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점에서 인의나 무위의 실천자로서의 성인이 아닌 ‘일하는 사람’(耕者之謂聖)으로서의 성인관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2) 자연의 원리를 훔친 성인
쇼에키는 우주의 원리는 직경인데, 성인만이(더 나아가서 지배층) 이 원리를 위배한다고 비판한다. 이는 노장사상에서 모든 존재는 무위의 존재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오직 인간만이 여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비판과 유사하다. 다만 그 내용상에 있어서 쇼에키는 무위(=자발)가 아닌 직경(=노동)을 주장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쇼에키의 말을 들어보자: “대개 조, 수, 충, 어에게는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고 동류끼리 서로 먹거나 먹히는 일이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네 종류를 잡아먹는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잡아먹는 관습이 시작된 것은 바로 성인들이 범한 죄로 천도를 훔쳤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성인들은 일찍이 천도를 위배한 것입니다.”(박문현·강영자 번역, 『법세이야기』, 5쪽)
(3) 전도(轉道)와 정도(定道)
쇼에키는 기존의 중국철학의 핵심 개념을 모두 자기 식대로 바꾸고 있다. 가령 ‘성인’대신에 ‘정인(正人)’이라는 말을 쓰거나 ‘천(天)’대신에 ‘전(轉)’을, ‘지(地)’대신에 ‘정(定)’을 각각 쓰고 있다. 그 이유는 천지(天地)에는 상하의 계층적 의미가 들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지 대신에 전정(轉定=회전과 고정)이라는 가치중립적 용어를 쓴다. 그리고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천도(天道) 대신에 전도(轉道)를, 지도(地道) 대신에 정도(定道)라는 말을 쓴다.(참고로 『법세이야기』에서는 편의상 ‘天’을 ‘轉’으로 수정해 놓았다: “본문에는 ‘轉眞’으로 되어 있으나 ‘天眞’으로 일괄해 이해하기 쉽게 했다. ‘轉道’ 또한 ‘天道’로 통일하였다.” 박문현·강용자 『법세이야기』 5쪽, 각주 5)
(4) 활진(活眞) 또는 토활진(土活眞)
‘활진’은 쇼에키에게 있어서 우주의 궁극적 실재와 같은 개념이다. 그가 고안해낸 이 말에는 ‘생명’(活)이야말로 ‘참’(眞)이고, 그것의 근원지가 바로 땅임을 의미한다(土活眞). 아울러 ‘곡령(穀靈)’은 땅에서 나오는 곡물 속에 생명의 엣센스가 들어 있고, 그것을 영성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공공철학자 김태창은 쇼에키의 ‘활진’을 일본의 고신도(古神道)의 ‘산령産靈’(무스히=천지만물을 생성하는 신령)과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마찬가지로 신도학자인 카마다 토지(鎌田東二) 교수는 “자연신도에서는 무스히를 포함해서 자연생성력이 가장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미래공창신문> 제24호). 이것은 쇼에키의 사상이 고대 일본의 생명사상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5) 자연진영도(自然眞營道)
쇼에키에게는 『자연진영도』라는 대표적인 저작이 있는데, 여기에서 ‘진영’이란 우리말로 옮기면 ‘참행위’와 같은 말로,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자연의 생명력을 기르는 직경이야말로 참다운 행위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노동이야말로 참된 ‘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맹자가 말하는 ‘노심자(勞心者)’와 ‘노력자(努力者)’의 위치를 정확하게 뒤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勞心者治人, 勞力者治於人. 治於人者食人, 治人者食於人, 天下之通義也. 『등문공(상)』).
(6) 법세에서 자연세로
쇼에키는 성인이 노동하지 않으면서 노동하는 자들을 착취하는 세상을 ‘법세’라고 한다. 법세는 성인들이 사적인 법(=제도)를 만들어 자연의 원리(=직경) 반하는 착취를 일삼는 세상이다. 반면에 모두가 직경하면서 자급자족하는 세상을 자연세라고 한다. 자연세는 몸소 경작을 함으로써 대지의 생명력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서 타인의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깨우치며 사는 이상세계이다.
(7) 일본적 영성
카마다 토지 교수는 일본적 영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적 영성을 근거지우고 있는 것으로 ‘장소적 논리’가 있고, 이것을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의 말로 하면 대지성(大地性)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이 지닌 커다란 역동으로, 거기에는 생태지(生態智)가 깃들여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생성력으로서 무수히의 힘을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사를 포함한 모든 것을 낳고 만들어 나가는 스스로성과 저절로성이다. 이러한 무스히의 힘이나 자연생성력이 일본적 영성의 근간에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미래공창신문> 제24호)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안도 쇼에키의 활진, 곡령, 직경사상 등은 이러한 일본적 영성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2. 동학의 하늘사상
일본적 영성의 근원에 ‘대지’가 있다고 한다면, 한국적 영성의 바탕에는 ‘하늘’이 있다. 한반도에 관한 최초의 문헌적인 기록은 제천행사를 특징적으로 전하고 있다. 19세기말~20세기초에 탄생한 이른바 민족종교들은 하나같이 제천행사를 부활시키고 있다(동학, 대종교, 증산교).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박재순은 하늘을 ‘한국종교의 원형’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또한 김태창은 최치원이 말한 풍류는 하늘의 노마드적인 속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였다. 아울러 대지와 하늘의 차이가 한국인과 일본인의 심성의 차이를 대변한다고 하였다. 동학은 이러한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 사상적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상이다.
(1) 천도의 부활
최제우는 자신의 학문은 ‘하늘’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천도’라고 불렀고, 이 점에서는 서학과 마찬가지지만 ‘학’의 연원이 한반도(東方)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서학’이 아닌 ‘동학’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마치 쇼에키의 ‘활진’개념이 신도의 ‘무스히’사상에서 나왔다는 견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것은 동학이 우주적 생명력의 근원을 하늘 관념에서 찾고 있다고 한다면, 쇼에키는 그것을 경작이라는 대지 관념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편의상 전자를 천학(天學), 후자를 지학(地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학의 ‘하늘’은 유불도에 나타난 중국의 ‘천(天)’사상과도 본질적으로 다르다. 가령 『논어』에서의 ‘천(天)’은 무언(無言)의 천(天)인 반면에 최제우의 하늘은 가르침을 내려주는 하늘이다. 이러한 차이는 중국사상이 일찍부터 ‘상제(上帝)’나 ‘천(天)’이 아닌 ‘도(道)’라고 하는 인문적 질서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리라. 그런 점에서 중국사상은 도를 정점에 두는 도학(道學)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동일한 맥락에서 서양사상은 God을 가치의 근원에 두는 신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2) 어우러짐으로서의 생명력
동학과 중국사상 또는 서양사상과의 가장 큰 차이는 아마도 천인관계, 즉 하늘과 인간(또는 신과 인간)의 관계일 것이다. 최시형은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천인상여”(天人相與=하늘과 인간이 서로 관여한다)라는 동중서의 말을 빌려 표현하고 있다(“天人相與之機不可須臾離也”- 하늘과 인간이 함께 하는 구조는 잠시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한대의 동중서는 군주가 비도덕적인 정치를 하면 그에 대한 경고로서 하늘이 자연재해를 내린다고 하는 천인감응론 또는 천인상관론의 입장에서 천인상여를 말했다고 한다면, 동학은 하늘과 인간의 상호의존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말을 차용하였다(“하늘은 인간에 의지하고 인간은 하늘에 의지한다.”최시형).
이것은 인간이 자연의 원리를 일방적으로 본받는다고 하는 중국의 도가사상이나 쇼에키의 직경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이다. 즉 동학은 인간도 하늘을 죽일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어린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하늘님을 해치는 것이다.”최시형) 인간의 주체성과 영향력을 훨씬 강조하고 있다. 동학에 이르면 하늘은 인간처럼 인격화되고 인간은 하늘만큼 존귀해진다. 동학의 생명사상은 하늘과 인간의 하나됨(合一)이 아니라 ‘어우러짐’(相與)을 통해 완성된다(이것을 김용우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호혜’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동학이 하늘과 인간의 불상리(不相離)를 말하고 있다면, 『중용』에서는 도(규범)와 인간의 ‘불상리’를 주장하고 있다(道也者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또한 『팡세』에서는 신과 함께 하는 행복(Happiness of man with God)과 신과 함께 하지 않는 불행(Misery of man without God)을 대비시키고 있다. 스즈키 다이세츠는 대지로의 회귀를 일본적 영성의 특징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역시 천학(天學)과 도학(道學) 그리고 신학(神學)과 지학(地學)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언설들이라고 생각한다.
(3) 어우러짐의 한국철학적 배경
조선성리학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권근은 『천인심성분석지도(天人心性分釋之道)』에서 성리학의 ‘태극’이 아닌 ‘하늘’을 정점에 위치지우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권근은 ‘天’이라 글자를 ‘大’와 ‘一’로 분해한 뒤, 각각을 다시 리와 기의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天爲一大. 一者, 以理言無對, 以行言無息; 大者, 以體言無外, 以化言無窮. 하늘은 ‘一’과 ‘大’를 말한다. ‘一’이란 원리의 측면에서 말하면 짝이 없다는 것이고, 운행의 측면에서 말하면 쉼이 없다는 것이다. ‘大’란 형체의 측면에서 말하면 밖이 없다는 것이고 변화의 측면에서 말하면 끝이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 그림 참조).
권근이 성리학적인 태극이나 리가 아닌 ‘천’을 최고의 범주로 설정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가령 리기론적 범주만으로는 실천철학적인 함축, 즉 ‘외천’(畏天)으로서의 경(敬)을 확보하기가 어려웠을지 모른다. 반면에 ‘천’을 리와 기를 아우르는 범주로 설정함으로써 존재와 당위, 사실과 가치를 포괄하는. 이것을 리와 기의 어우러짐으로서의 하늘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주자학에서는 하늘을 대신해서 태극이나 리가 최고범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면, 권근의 경우에는 그러한 사유체계를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하늘이 여전히 최고범주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리와 기의 묘합으로 우주를 이해하는 생각은 이후에 율곡 등으로 이어지는데, 가령 율곡은 리와 기의 관계를 ‘묘합’으로 보았다고 한다(“理氣之妙.”‘묘합’에 대해서는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김동희 박사의 논문 『율곡 이이의 리기지묘 사유에 대한 재고찰』(2015)로부터 계발을 받았다. 김박사는 서양의 이원론적 사유, 중국의 일원론적 사유에 대해서 한국의 묘합적 사유를 특징으로 파악하고 있다. 실제로 김동리의 형인 김범부는 한국사유의 특징을 ‘묘합’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월간 『공공철학』에 실린 야규 마코토씨의 글을 참고하였다). 리와 기의 묘합적 존재방식은 마치 양자역학에서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인 것과 유사하다(이 점에 대해서는 한동대학교 기계과의 이재영 교수로부터 계발을 받았다). 빛은 관찰자가 보고 있으면 입자처럼 움직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파동과 같이 행동한다고 한다. 여기서 입자와 파동의 이중적 존재방식은 이원론이나 일원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선후나 본말이 있을 수 없다.(게슈탈트심리학에 대해서는 Brook Ziporyn 교수가 중국철학의 ‘리’를 coherence로 해석하면서 드는 예를 참고하였다)
(4) 종교와 종교의 어우러짐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가설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사유의 특징 으로 ‘어우러짐’을 들 수 있고, 그것이 동학에서는 ‘상여(相與)’의 호혜행위로, 권근이나 율곡 등에서는 ‘묘합(妙合)’의 존재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또한 이런 맥락에서 일제시대 종교사가인 이능화의 “세계의 모든 민족종교는 하늘을 중심에 두고 있다”(悉皆以天爲主, 『백교회통』, 1912)는 말을 이해하면, 모든 종교를 어우러지게 하는, 즉 조화되게 하는 작용으로서 하늘이 설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종교’를 신도와 불교 그리고 기독교의 세 개로만 한정시키고, 나머지는 ‘유사종교’라는 이름으로 단속과 통제를 가한 것에 비하면 대단히 대조적인 이해이다. 서양에서도 종교다원주의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이 19세기 말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능화의 “백교회통론”은 대단히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과는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이런 논의가 일찍부터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능화의 심성에는 종교와 종교 간의 장애가 아닌 소통(通敎)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보았기 때문이리다. 한편 최치원은 이러한 통교적 사유방식을 ‘포함’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 삼교를 포함하고 군생을 접화한다”). 여기서 ‘풍류’는 중국의 유불도 삼교를 어우러지게(包含) 하는 하나의 사유방식을 말하고, 그것이 한국인의 ‘멋’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단지 삼교의 조화나 백교의 조화를 논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들을 어우러지게 하여 하나의 새로운 ‘도’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는 중국과도 다르고 이능화와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시대에 이러한 종교간의 어우러짐을 표방하고 나타난 종교단체가 원불교이다. 가령 원광대학교의 한복판에 있는 수덕호에는 둥그런 호수 주위에 원불교 창시자의 동상 대신에 소크라테스와 예수 그리고 공자와 석가의 동상이 놓여 있다. 이것은 최치원의 ‘포함’사상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원불교의 전신인 불법연구회 제2대 회장을 지낸 조옥정은 구한말에 유학자로 시작했다가 동학도로 전향하고 다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원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기독교 성직자들로부터 불교를 신봉한다는 비난에 대해서 “한 눈보다는 두 눈이, 한 손보다는 두 손이 한 발보다는 두 발이 더 유익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것은 복수의 종교적 아이덴티티를 인정한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복수의 종교적 아이덴티티를 가치 있는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5) 한국인의 영성
나는 바로 여기에 한국인의 영성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즉 “복수의 종교적 아이덴티티”를 인정하는 경향이다. 그것을 한글로 표현하면 ‘하늘’이나 ‘한’으로 나타낼 수 있고(‘크다’, ‘많다’는 의미에서), 이미지로 그리면 ‘○’이 되고, 한자로 표현하면 ‘通’이나 ‘風流’가 될 것이다. ‘한’이나 ‘円’은 타자를 수용하는 ‘바탕’이나 ‘마당’또는 ‘터’를 형용한 것이고, ‘풍류’는 그것이 ‘미적’이라는 가치를 표방한다. 살림은 이러한 영성의 발현을 통해서 실현된다. ‘한’은 맺힌 ‘恨’을 풂으로써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을 어우러지게 하는 살림행위를 말한다. ‘한살림’은 ‘큰살림’이라는 뜻이다. 권근은 그것을 ‘天’으로 표현하고, 그 의미를 다시 ‘大’와 ‘一’로 담아냈다. 큰살림을 방해하는 것은 하늘의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작고(小) 구분된(二) 인식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의 전시체제에서 와츠지 테츠로는 ‘공공’을 국가 영역으로 축소시켰다. 이것은 ‘공공의 세속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스즈키 다이세츠는 1940년대에 『일본의 영성』(1944), 『일본적 영성의 자각』(1946), 『영성적 일본의 건설』(1946), 『일본의 영성화』(1947)를 발표하여 일본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일본식 근대화를 추구해 온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마 최근에 한국에서도 조금씩 영성에 대한 논의가 일기 시작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일 것이다. 아마도 한살림운동의 근저에는 근대화과정에서 잊혀진 한국적 영성에 대한 성찰이 깔려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생명학연구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