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30

인간이 호모엠파티쿠스인 이유 : 신은미 김태창

인간이 호모엠파티쿠스인 이유 : 네이버 블로그



인간이 호모엠파티쿠스인 이유
RecycledStardust
2019. 1. 7.

인간이 호모엠파티쿠스인 이유 -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호모엠파티쿠스는 ‘공감적 인간’을 의미한다.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인간 본성의 특징을 ‘공감하는 종(種)’으로 이해한다. 호모엠파티쿠스는 인간 의식의 변화와 인류문명의 우주적 공감을 예견한다.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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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loured Universe
4/3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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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은 태고시대부터 동·식물과 함께 뭇 생명과 공감함으로 자연과 공생하는 원리를 터득해 온 자다. 샤먼은 고대 접신술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의 영
혼과 소통하고, 시공을 초월하는 공감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또한 천체의 움직임과 우주의 근원적 이치를 체득해 순환적 삶의 지혜를 추구한다. 샤먼
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수용하고 치유하는 ‘상처받은 치유자’다. 고통의 공감과 공명 의식을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킨 존재다.
인간의 공감 능력은 인간 내면에 잠재된 원초적인 무의식의 본능이다. 분석심리학자 칼 G. 융(Carl G. Jung)은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에는 고태적인 형
태의 심층인 ‘집단무의식’이 있다고 말한다. 집단무의식은 오랜 기간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축적돼온 ‘신화적 마음’이다. 집단 무의식은 인류의 시초부
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달된 인류 공동체의 ‘원형적 심성’이다.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종교적 유전자가 존재한다. 이는 영적 본능으로 무의식의 창조적 능력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은 이념과 가치를 초월해서 태초의
시간과 순환의 근원적 원인을 추구하는 신비적 마음을 지닌다. 원초적 공감을 회복하는 것은 이처럼 내면의 ‘숨겨진 신성’을 만나는 과정이다. 신성을
만나고, 신성이 돼가는 영적 여정은 개인마다 다양하게 나타난다.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은 인간을 부분적인 삶에서 전체의 삶으로 변화시킨다.
무의식의 세계를 공감의 전체성으로 확장시킨 샤머니즘의 정신은 호모엠파티쿠스의 영성적 뿌리가 된다. 샤머니즘의 영성이란 인간 의식과 무의식의
변형을 다양한 문화적 상징으로 연결함으로 개인의 영적 각성을 고양시키고, 의식변형을 통한 사회변혁을 승화시키는 인간 고유의 내면적 심혼(心魂)
과 영기(靈氣)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개인 수행의 지평을 확대하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사회 변혁을 가능케 하는 미래지향적 시민의식의 바탕이 된다.
호모엠파티쿠스는 개인적 수행을 통한 인격적 성화와 사회적 차원으로의 승화 기제를 융합함으로써 현대사회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증오, 대립, 갈
등의 문명을 화해, 치유, 통합의 문명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공감적 인간의 원형을 제시한다.
네오샤머니즘: 내면의 신성화
한국의 샤머니즘은 고대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시대마다 불교, 유교, 기독교 등의 종교적 외피를 입고 습합돼 왔다. 변천과정에서도 샤머
니즘의 역할과 기능은 각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예를 들면, 고대시대(신석기-삼국시대)의 샤머니즘은 정치, 사회, 개인을 포괄하는 공적 문화였으
나, 중세시대(통일신라-조선중기)의 샤머니즘은 사회, 개인의 범주로 축소돼 기능했다. 근대·현대시대(조선중기-현대)의 샤머니즘은 주로 개인의 길흉
화복에 초점을 맞추는 기복신앙으로 변화해 왔다. 현재 남아있는 샤머니즘은 지극히 축소된 형태로 점복문화와 강신무(降神巫)의 무업이 전수되고 있
을 뿐이다.
네오샤머니즘은 고전샤머니즘과 공통의 종교적 유산을 공유하면서 현대인의 진화된 종교문화적 세계관과 인간의 다양한 의식변형의 경험을 적극적
으로 수용하는 영성운동이다. 네오샤머니즘은 기존의 고전 샤머니즘으로 분류되는 샤먼적 종교경험과 무술(巫術)의 전통을 응용하고 다양한 종교문화
적 요소들을 융합시킨다. 고등 종교의 조직적인 구조가 아니라, 각각의 다양한 영성경험들을 토대로 유연한 영성협의체를 자발적으로 구성한다. 네오
샤머니즘은 마음 치유, 트라우마 극복, 영적 수행의 대중적 필요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는 종교적 교리나 사회적 통념보다는 만물과의 공감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통해 온전한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는 생태적 영성이다.
네오샤머니즘의 사상적 흐름은 과거 고등종교로부터 소외되었던 샤머니즘, 영성주의, 동양철학, 연금술, 신화 등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네오
샤머니즘은 종교 창시자 혹은 교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신학과 의례보다는, 수행자들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회합과 자율적 의례를 강조한다. 공동체
의 운영은 샤먼적 의식과 경험을 지닌 수행자를 중심으로, 자발적 참여에 따라 응집과 해산을 취하는 ‘영적 협의체’ 형식을 가진다. 이런 과정에서 다
양한 경험들이 새롭게 연결되면서 ‘영적 하이브리디티(Hybridity)’와 종교적 ‘절충주의(Eclecticism)’ 현상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즉, 네오샤머니즘은
특정 종교에 속해있지 않으면서도, 내면의 신성함을 복원시키는 수행적 영성운동이다.
네오샤머니즘은 인간 의식변형을 통한 고차원적 인식의 지평을 강조한다. 고전샤머니즘이 ‘신내림’ 현상과 같은 강신무의 전통을 강조한다면, 네오샤
머니즘은 인간 내면세계의 탐색과 성찰을 통한 성스러움의 경험을 강조한다. 신학자 루돌프 옷토는 인간 내면의 성스러운 마음을 ‘누미노제(Numinos
e)’로 표현한다. 누미노제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성스러움의 감정과 공감의 마음이다. 이는 인간의 신화적 마음인 집단무의식에
서부터 출현한 거대한 영적 울림이다. 성스러움의 감정은 일상의 희로애락의 감정과는 구별된다. 누미노제는 우주만물의 원초적 공감을 상호 연결시
키는 본질적인 신비의 감정을 의미한다.
네오샤머니즘은 고대시대부터 내려온 내면의 성스러움을 찾아 인간의 고통을 스스로 치유하고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배양시킨다. 네오샤머니즘은
샤먼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정한 샤먼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샤먼은 두 가지 의식체계를 지닌다. 하나는 ‘의식의 일상의식’이고, 다른 하
나는 ‘의식의 통합의식’이다. 통합의식은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을 의미한다. 융은 인간이 의식 에너지로만 인생을 산다면, 삶의 극히 일부만 사는 것이
라고 지적한다. 융은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다’라고 고백한다.
사실 인간은 이성, 논리, 의식 외에도 감정, 직관, 무의식의 심리적 기제에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무의식의 소외와 억압은 마음의 그림자를 창
출한다. 심리적 그림자는 내 안의 악과 어둠을 타자에게 투사하면서 기생하는 특징이 있다. 타인을 향한 과도한 공격성과 증오는 궁극적으로 내 안의
병든 무의식의 투사일 수 있다. 이런 투사도 자신의 마음의 일부인데 그것을 모르고 밖에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무의식의 그림자는 소수집단이나
개성강한 개인에게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특정 인종, 성(性), 종교 등에 대한 극단적 혐오현상은 집단적 투사의 결과다. 고대종교에서는 동물을 ‘속죄
양’의 제물로 바침으로 집단적 그림자의 투사를 종교의례로 전향시켜왔다.
집단적 투사는 개인과 사회의 선입견과 편견을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공포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무의식의 병든 마음에는 성스러움의 누미노제가 결
코 출현할 수 없다. 마음의 통합의식은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의 승화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영성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진정한 누
미노제의 경험은 개인을 ‘성인다운 성품’으로 변화시킬 뿐 아니라, 고통 받는 이웃과 세상을 향한 봉사와 연민의 감정을 성숙시킨다고 강조한다. 이런
자아변형의 진위여부는 자연스럽게 ‘이웃에 의해’ 알아차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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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내면수행이 부재된 샤먼적 누미노제는 신성과 자아를 동일시하는 ‘자아팽창(Self-inflation)’의 영적 도취에 빠져 스스로를 ‘영웅적 착각’에 빠지
게 한다. 이는 샤먼적 인물 뿐 아니라 역사상 다양한 종교집단의 타락한 종교지도자와 정치인, 시민운동가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자아절대화의
병적 현상이다. 누미노제의 진정성은 개인적 수행이 뒷받침되는 초월적 겸애와 이타적 사랑이 수반돼 맺어지는 사회정치적 열매여야 한다. 이는 누미
노제의 내면적 개인 수행이 외면적 사회적 수행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 원리이기도 하다. 누미노제의 매혹성은 개인적 누미노제의 경험이 사회정치적
공공성과 결별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우주적 미소를 보내는 신성한 유혹인 것이다.
네오샤머니즘은 현대인의 공허감과 소외감을 영적 위기로 진단하며 누미노제의 자아 초월적 경험을 통한 영성의 진보가 일상의 삶 속에서 지속될 것
을 강조한다. 원초적 공감의 회복은 호모엠파티쿠스가 추구하는 치유의 시작이고 과정이며, 또한 완성이다. 존재의 근원과 의식·무의식의 변형을 통한
궁극의 존재 체험은 삶의 고통을 신성화할 수 있는 영성세계를 열어주는 치유의 의식변형이다.

호모엠파티쿠스와 ‘공공 영성’

네오샤머니즘의 원초적 공감은 ‘공공영성’으로 이어진다. 김태창에 의하면 공공영성의 ‘공공’ 개념은 공공철학(Public philosophy)의 번역어가 아니라
‘매개’와 ‘연결’을 의미하는 용어다. 그는 ‘공’과 ‘사’ 사이에 ‘공공’을 매개로 연결해야 한다고 본다. 이때, 연결과 매개는 일회성이 아니라 반복성을 요구
하기에 ‘공공한다’라는 동사형으로 표현된다. 김태창의 공공 개념은 구체적인 실천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삶과 제도 사이의 연결과 매개를 통한 세계의
활성화를 추구한다.
네오샤머니즘의 의식변형과 영적 각성은 궁극적으로 운둔적인 자아소외의 체험이 아니라, 자아, 타자, 공동체의 연결과 공감 확대로 귀결된다. 네오샤
머니즘의 자아치유 개념처럼 인간의 영성적 주체성의 회복은 새로운 인간 주체의 탄생을 가능하게 만든다. 사회구조적 문제와 관련해서 네오샤머니즘
은 인간의 영성적 유산이 문명의 기계적인 성격 때문에 상실돼 버린 사실을 상기시킨다. 인간의 의식변형을 통한 영적 각성은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영적 지성과 야수적 감정을 모두 수용하며 존재의 비극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네오샤머니즘은 비극성이 없는 인간과 이상사회의 존립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비극성을 승화시켜 자연과 우주만물의 모든 존재와 공감하는 호모엠파티쿠스의 원형을 회복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인간형이 사회적 변혁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확산 기제가 마련돼야 한다.
인류의 미래는 현재 살고 있는 어떤 인간 집단의 투쟁에 달려 있기보다는 그들 개개인의 책무에 달려있다. 인류의 미래는 급진적인 집단적 변화보다
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깨달음과 실천을 통해 지속 가능한 문명의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네오샤머니즘에서 강조하는 개인성이란 분절적 개인이
아닌 ‘공화(空化)적 개인’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적 영위를 위한 사회적 변화와 변혁의 첫 시작은 바로 인간의 자기 비움을 통한 초극적 상태임을 의미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은 지속적으로 자아변혁을 시도해야만 하는 영적 각성의 주체자로서 호모엠파티쿠스의 개별성을 지닌다.
궁극적으로 호모엠파티쿠스의 존재론적인 힘은 인위적 학습이 아니라, 주체적 경험에 기인한 의식변형의 주체적 확장에 있다. 네오샤머니즘의 시작이
개인영성과 생태영성의 공감과 연대를 통한 생명운동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개인의 영적각성과 영성 경험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공공영성으로 확대
될 수밖에 없다. 공감의 공공영성은 인간을 속박하고 타인을 억압하는 자기중심성을 억제하는 관용과 ‘거중(居中)의 미덕’을 배양한다. 또한 공감의 공
공영성은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타인의 경험을 내재화하고 주체의 확장을 통해 타인을 수용하고 타인의 고통에 참예(參預)하는 치유의 윤리적 덕성을
가지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은 내면의 무한성을 신성으로 승화시켜가는 ‘신성화(神性化)’의 과정을 경험한다. 이는 상호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공감의 그물
망으로 인간, 사회, 자연의 관계를 유기적인 통합사회로 완성해 나간다. 호모엠파티쿠스의 공공영성은 ‘마음의 정화-누미노제의 출현-공감의 연결-세
계의 신성화’라는 영적 각성의 단계를 거쳐 발전해간다. 인간은 공생의 필연성에 따라 ‘공유된 가치’를 인지하게 되고, 개인성과 공공성이 만나게 되는
지점을 함께 발견함으로써 공감의 과정 자체가 인간 사회의 치유와 통합의 시작이 될 수 있게 한다.

‘페르헤지아’(Parrhesia): 진실의 공수

공수란 신이 샤먼을 통해 내리는 신성한 메시지다. 내면의 신성이 부활한 호모엠파티쿠스는 오직 진실만 내리는 공수를 전한다. 네오샤머니즘은 개인
의 신성화 없이 사회의 신성화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네오샤머니즘은 신성의 주체화와 인식 에너지의 재구성을 통해 자아의 영적 진보와 사회적 진보
를 동시에 추구한다. 사회적 통합의 근본에는 인간의 내면적 통합이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 오늘날 개혁과 진보를 부르짖는 많은 이들의 혁명적 구호
속에는 성스러움이 결여돼 있다. 외적 인격인 페르소나와 자신을 동일시해 정의에 대한 독점의식과 근거 없는 특권의식, 자아 팽창의 콤플렉스에 사로
잡혀 있다. 불안한 인격성으로 사회개혁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거기에는 연민의 공감과 감동의 신비로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정한 샤먼은 누구인가? 그는 더 이상 영적 능력을 부여받은 소수의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 일상의 삶을 오직 진실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수많은 ‘상처받은 치유자’들이다. 호모엠파티쿠스는 인간이 신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신성한 공감을 회복하는 네오샤먼이 되는
것이다. 사회변혁으로 연결되는 영성 체험은 더 이상 개인의 복을 비는 기복이나 축신 행위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우주
사이의 영적 통일성을 회복해 좀 더 숭고한 영성 세계로의 전이와 고양된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호모엠파티쿠스의 네오샤머니즘 영성은 문명의 과정에서 상실한 원초적 공감을 회복해 자아와 타자, 동식물, 우주만물의 모든 존재들과 소통하며 공
감하는 유기적인 통합의 공수를 전하는 존재다. 진정한 공수란 신과 인간이 영적 공감을 나눈 통합주체로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비판해 말하는 ‘페르
헤지아’의 의례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거짓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뿐 아니라, 어떤 위험 앞에서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신성한 공수의 윤리다.
호모엠파티쿠스는 종래의 신을 믿고 의지하는 호모렐리기우스에서 진화해 신과 동등한 관계에서 상호 공감하고 소통하는 신인간의 공명상태를 추구
한다. 또한 공감할 수 없는 신적 개념들을 소멸시키고, 신과 인간 사이의 신성의 공감대를 재창조한다. 신과 인간은 공동의 창조자다. 호모엠파티쿠스
의 치유란 고통을 제거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고통의 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서 고통이 전제된 근원적 깨달음을 얻는 ‘통각’(痛 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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覺)의 영성을 의미한다. 호모엠파티쿠스는 개인의 영적 수행을 통한 원초적 공감의 회복은 무한한 우주의 사랑 에너지를 빛의 인식으로 확산하며 생과
생을 통합시키려는 도덕적 요구를 수용한다.
이는 라인홀드 니버의 표현처럼 진정한 자아는 내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전념해야 하며, 스스로 다른 자아들과의 통합을 위해 그들과 조화를 이뤄야
만 한다. 인격의 조화는 ‘완벽함’이 아니라, ‘원만함’이다. 호모엠파티쿠스의 네오샤머니즘 영성은 누미노제의 복원, 원만한 인격성, 공감적 연대를 통해
개인과 사회 속에 구현될 수 있는 주체적 각성을 강조한다. 고통의 해석학으로 통각의 치유와 비판, 과정적 통합을 수용하고, 상호적 공명 관계를 통해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페르헤지아’의 공공영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당신 내면의 신’께 인사드립니다

누미노제의 감정은 개별적인 신비성과 주술성으로만 기능할 수 없다. 인간은 직관적 공감을 통해 신과 인간이 궁극적으로 합일되는 원초적 공감을 회
복함으로, 인간의 역사 속에 새롭게 개입하는 성스러움의 역사성을 구현해야 한다. 원초적 공감의 회복이란 문명화 이전의 상황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
미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문명화된 현재의 삶 안에서 원초적 영성을 회복하는 관계적 공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감의 누미노제는 한 개인이 어떤 신비적 경험을 했는가의 경중보다, 얼마만큼 개인이 우주적인 신성의 세계로 변화하고 승화했는가에 관한 자기 수
양적 ‘무위(無爲)의 공감’을 강조한다. 이는 개인의 에고가 신비로운 전율과 성스러움의 감정 속에 스며들어 동거하는 ‘케노시스(kenosis)의 공감’이기
도 하다. 자기 비움의 공감은 삶의 억압적인 가치들을 전도시키는 사회개혁정신과 신성한 인연을 맺는다.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신비주의는 저항이
다’라고 말한다. 공감의 누미노제는 저항정신을 내포하고 있고, 저항정신은 누미노제의 신비성에 기초하고 있다.
개인의 영성이 체험되고, 깊어지고, 승화되면, 그 깨달음의 절정은 개별적 자아추구를 넘어, 공동체가 함께 참여하는 세계의 지속적 창조로 나아가게
된다. 이는 지배문화의 폭력을 제어하고 생명의 힘을 복원시켜 내적인 저항과 사회적 저항을 연결시키는 누미노제의 전일성을 의미한다. 누미노제의
전일성은 개인의 직접적인 참여방식 외에도 영향력 있는 이들에 대해 더 깊은 영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비폭력적 저항을 포함한다. 각각의 수행
자는 ‘정치적 신비가’로서 신성한 저항에 참예하는 성례전의 삶에 동참해야 하는 성스러운 책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새로운 공감적 인간상이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릴 때, 갈등과 감정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가 진정한 화해와 치유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향해 진실한 ‘나마스테’를 고백할 수 있다. ‘당신의 내면의 신께 인사합니다.’


글·신은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수피즘: 신의 유혹』(2016) 등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수행과 마음치유 워크숍 <누미노제>를 운영하고 있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