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포럼/ 일본에서 열린 국제회의 일본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노년철학老年哲學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0.02.09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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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문명과 ‘나이 듦’의 의미
― 문명론적 고찰(Think Big!) ―
오오하시 겐지(大橋健二, 스즈카의료과학대학(鈴鹿醫療科學大學) 비상근강사(非常勤講師)
글로벌리즘이라(globalism)이라는 이름의 신자유주의· 시장원리주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현대문명은 국가· 사회뿐만 아니라, 개개인에 대해서도 우승열패의 경쟁주의와 비의존적(非依存的)인 자조(自助)· 자기결정 능력을 요구한다. 그것은 경제 원리에 구동(驅動)된 활동주의(전진· 확대· 합리· 효율· 속도· 유용· 능동· 건강· 젊음)를 기조로 하는 한없이 <강함>를 지향· 추구하는 문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지지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 지배를 당연시하는 유태· 기독교의 전통(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과 정신/ 물질을 양분하고 자기와 타자를 분단하는 데카르트적 2원론, 자아의 무한 확대를 추구해고 철두철미 자기에게 고집하는 ‘파우스트적 자아’ 등 이른바 <서양근대>의 논리이다.
메이지시대 이래로 <서양근대>를 세계의 어느 곳보다 열심히 천진난만하게 추구해온 현대 일본사회에 드러난 여러 가지 왜곡들과 병리 현상들─인격의 존엄성을 짓밟는 경제격차의 확대와 빈부의 고정화, 지역경제의 파괴와 전통적 공동체의 소멸, 인간적 ‘연결’의 희박화(稀薄化)에 따른 고립· 고독사(孤獨死)· 무연사회(無緣社會), 중고년 층까지 확대된 ‘은둔형 외톨이(ひきこもり)’, 약자를 업신여기고 배제시키는 사회풍조, 그리고 세계최대 규모의 ‘노인대국’ 출현─는 이와 같은 <서양근대> 즉 <강함>의 문명에서 발생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노인대국’ ‘노인선진국’이다. 금세기에 들어가면서 인구 급감과 저출산 고령화가 진행되고 국가 규모로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초고령사회’(65세 인구가 총인구의 21%를 넘는 사회, 2007년의 일본이 최초)가 되었다. 일본을 능가하는 빠른 속도로 한국· 대만이 뒤따라오고, 그리고 중국이, 조금 늦게 전 세계가 따라온다. 그러나 인류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초고령사회’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사회적 또는 세대 간의 대립이 격화되는 것으로 예상되는 등 곧 장미색 미래라고는 할 수 없다.
<약함>이라는 인간적 본질
사회학자 울리히 벡(1944-2015)은 산업혁명에 의해 19세기에 출현한 산업사회를 ‘제1의 근대’라 하고, 이에 대해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 경제의 글로벌화에 따른 근대를 ‘제2의 근대’라고 부른다. 이것은 근대화의 근대화, 즉 근대의 첨예화, ‘재귀적(再歸的) 근대화’이다. 여기서는 인간이 철저하게 ‘개인화’되는 점에서 세계가 ‘위험사회’로 변모한다.(“Reflexive Modernization: Politics, Tradition and Aesthetics in the Modern Social Order” 1994). 벡에 의하면 이와 같은 ‘재귀적 근대화’에 있어서는 번영과 사회적 안정의 반면으로 공황과 대량실업, 내셔널리즘, 세계 규모의 빈곤, 전쟁, 새로운 난민과 같은 2항 대립적 상황이 필수적으로 출현하게 된다. 사회적인 ‘연결’은 한없이 융해(融解)되고 사람들은 ‘개인화’된다. 핵가족조차 분해되는 결과 경제활동에서 무력한 고령자는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고령자는 경제적 번영과 과학기술의 혜택을 받는 반면에 오늘날의 ‘글로벌 근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비정하고 냉혹한 ‘위험사회’라는 큰 위협 속에서 나머지 인생을 영위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글로벌 근대=‘위험사회’ 속에서 비의존적 ‘자립’에 입각하는 현대인의 ‘의존으로부터의 초월’이라는 삶의 방식에서 엿보이는 것은 인간이 ‘상처받기 쉬움(vulnerable)’과 ‘망가지기 쉬운 유약함(fragility)’을 지닌 <약한> 존재임을 잊어버린 부자연스러운 비인간성이다. 현대일본에는 타자에게 의존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의존하기(dependence)를 극단적으로 두려워하는 풍조가 강하다. 일본인들은 2항 대립적인 데카르트적 패러다임(Cartesian paradigm)에 의해 형성된 ‘비의존적 자기(independence self)’를 당연하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약한> 존재임이 인간 고유의 존재방식이다.
근래의 인류학 연구에 따르면 초기인류(700만~20만 년 전)는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Man the Hunter(사냥하는 인간· 사냥꾼)가 아니었다. 반대로 수많은 대형 육식동물들(호랑이· 사자· 표범· 퓨마· 늑대· 하이에나· 뱀· 악어 등)에게 잡아먹힌 매우 취약한 피식종(被食種), 즉 Man the Hunted(사냥당하는 인간· 사냥감)이었다. 그 신체적 <약함> 때문에 뇌를 크게 하고 집단생활을 선택하고 언어=의사소통능력을 향상시키며 타자와 협력하고 타자를 생각하고 돌보는 상호부조의 사회성을 발달시켰다.(드나 하트 외, “MAN THE HUNTED” 2005). 인류는 날카로운 이빨도 손톱도 뿔도 없고 재빨리 도망치는 발도 없으며, 포식자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나날에 공포를 느끼고, 밤을 무서워하는 신심의 <약함> 속에서 오랜 역사를 살아 왔다. <약함>이 인간 고유의 본질이며 인류 진화의 원동력이었다.
신체적· 본질적으로 <약한> 존재인 인간은 타자와 밀접하게 ‘연결’하고 관계를 맺는 ‘상호의존적 자기(interdependent self)’라는 것, 홀로는 살지도 죽지도 못한 <약한> 존재자임을 고령자는 체험적· 필연적으로 알게 된다. 많은 노인들은 이제야 비로소 자기들이 불가피하게 능동성이 없어지고 수동성으로 사는 존재자, 타자의 호의와 조력에 감사하는 <약한> 존재로 새로운 자기를 발견한다. 현대문명의 <강함>에 속박되고 오만함과 협애한 시야 속에 갇혔던 자아는 <약함>을 깨달아야 비로소 타자에 대하여, 넓은 세계로 해방된 큰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의존적인 이성적 동물(Dependent rational animals)
의료계 대학에서 내가 담당하는 「철학과 사생관(死生觀)」(1학년 대상, 매년 300명가량이 수강함)의 2019년도 시험에서 “어떤 노후(老後)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가?”라는 논술 문제를 낸 바 있다. 그러자 거의 예외 없이 모두가 자기 ‘건강’을 중시하는 것과 더불어 가족· 주위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는” 노후가 이상적이라고 대답했다. 학생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폐를 안 끼치는” 이상적 노인상은 현대일본에서 유행되는 고령자의 ‘종활(終活; 인생 종말의 준비활동)’과 마찬가지로 현대문명이 강조하는 <강함> 지향· 추구와 병행적인 관계에 있다. 일본인의 집합적 무의식(Archetypus)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비의존’적 정신· 감성의 배경에 깔려있는 것은 ① 겐지(源氏)・ 헤이시(平氏)주) 이래의 무사(武士)문화에 의해 길러진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사회풍조, ② 메이지시대(明治時代) 이래 세상에 널리 환영받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독립자존(獨立自尊)’적 가치관, ③ 1980년 전후부터 영미의 정치가들·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현대세계를 뒤덮기에 이른 신자유주의─끊임없는 경쟁· 자기혁신· 자기결정· 자기책임이라는 ‘강한 자기’ 전제로 하는─의 무조건적인 수용, ④ 제2차세계대전 이전의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에 입각하여 제정된 ‘교육기본법’(1947년 시행)이 중점을 둔 ‘개인의 존중’─개인주의 혹은 ‘독립한 자기’ ‘자립한 개인’의 강조─를 근본가치로 삼는 전후(戰後) 교육의 성과 등이 생각된다.
[주: 겐지(源氏)・ 헤이시(平氏)는 모두 일본 황실의 후예로 12세기경부터 무사(武士)정권의 동량(棟梁) 가문이 되었다.─옮긴이]
현대세계를 몽땅 뒤덮는 글로벌리즘, 폭력적이기까지 한 신자유주의에 의해 가속화된 분단· 격차 사회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문명은 일찍이 없었던 규모와 깊이로 자립하고 자기 결정하는 강한 개인을 추구하고, <강함>의 논리가 사회뿐만 아니라 개인의 내면을 지배한다. 인간 본래의 상호의존 ‘연결된 자기(interdependent self)’는 구시대적(舊時代的)인 것으로 사회의 배경으로 물러나고, 조각조각 분단된 개인주의 ‘아톰적 자기(atomistic self)’로서 사는 현대인은 의지할 곳의 부재와 깊은 불안감 속에서 미래에 확실한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성장신화로 채색된 경제 지상주의에 입각한 <강함>의 문명은 온갖 <약함>을 멸시하고 필요이상으로 자립 · 자기책임이라는 비의존(independence)을 강조한다. 전후(戰後) 일본의 교육계는 ‘개인 존중’의 이름 아래 아동들 학생들에게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인간이 되라.” 라고 지나칠 정도로 자조노력(self-help)을 장려하고 <강한 개인>의 육성에 주력해 왔다. 현대의 청장년(靑壯年) 층이 신자유주의 · 시장원리주의에 별로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친화적인 까닭이다. 근년에는 ‘고독’을 예찬하는 책들이 잇따라 출판되고 비의존적인 ‘자립’과 ‘의존으로부터 초월’한 삶이 과대하게 찬양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인간이 ‘상처받기 쉬움(vulnerability)’이나 ‘망가지기 쉬운 유약함(fragility)’을 생득적으로 지닌 <약한> 존재임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 호모사피엔스들은 지성이 있기에 정신적으로 상처받기 쉽고(vulnerable) 사람과 사람의 사이이서 사는 ‘상호의존적 자기(interdependent self)’임을 운명으로 부여받은 ‘의존적인 이성적 동물’이다(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Dependent Rational Animals”, 1999). 우리 인간은 타자의 존재와 타자와의 협력이 있어야 비로소 살 수 있는 <약한> 생물임을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가족· 타자에게 필연적으로 ‘폐를 끼치는’ <약한 개인>임을 굳이 감수하는 마음가짐, 바로 여기에 진정한 강함이 드러나지 않을까?
‘양’기의 일극지배(一極支配)
동아시아 세 나라에 공통된 것은 ‘기(氣)’의 사상이다. 자연과 인간, 만물을 구성하는 근원적 물질· 에너지인 ‘기’는 “한 번 음(陰)이 되고 한 번 양(陽)이 됨을 도(道)라고 한다.”(一陰一陽之謂道.─周易 繫辭上傳) “음양이라는 것은 기(氣)의 큰 것”(陰陽者, 氣之大者也.─莊子 則陽篇)이라고 하듯이 음과 양 두 가지로 이루어지고, 음양 두 기운의 상호작용으로 천지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한다. 음양 두 기운 중에서 ‘양’ 기운은 ‘하늘· 빛· 밝음· 강함· 불· 여름· 낮· 삶· 아버지· 겉· 동물· 팽창· 상승· 전진’으로, 그것은 ‘능동· 공격· 활발함· 흥분· 얻음’의 모습을 띤다. 한편 ‘음’의 기운은 ‘땅· 어둠· 유연함· 겨울· 밤· 죽 · 어머니· 속· 식물· 수축· 하강· 후퇴’이고, ‘수동· 방어· 침체· 억제· 털음’의 성질을 가진다. 전자가 남성적인 <강함>의 기운이라면 후자는 여성적인 <약함>의 기운이다. 음과 양은 항상 짝을 이루고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도 존재할 수 없다. 음과 양 두 기운은 만물생성의 원리임과 동시에 서로인 것과 동시에 서로 교감· 순환· 유통· 교체· 생성소멸· 굴신변화(屈伸變化)의 원리가 된다. 주자(朱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지는 오직 한 기운일 뿐인데, 곧 저절로 음과 양으로 나눠지고, 마침내 음양의 두 기운이 서로 감응함이 있으면 만물이 화생(化生)되는 까닭에, 사물에 짝이 되지 않은 것이 없다. 하늘은 곧 땅과 짝이 되고, 삶은 곧 죽음과 짝이 되며, 말은 침묵, 움직임과 고요함도 모두 그렇다.”(天地只是一氣, 便自分陰陽, 緣有陰陽二氣相感, 化生萬物, 故事物未嘗無對. 天便對地, 生便對死, 語默動靜皆然.─『朱子語類』卷53)
우주만물은 음양 두 기운의 상관으로 성립된다. 라틴어 “Contraria sunt Complementa.”(대립하는 양자는 서로를 보완한다)─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이자 양자역학의 창시자인 닐스 보어(1885-1962)가 즐겨 쓴 문구이다. 고향 덴마크의 최고훈장인 ‘코끼리 훈장’을 수여받았을 때, 스스로 지은 문장(紋章)의 한 가운데에 그린 ‘음양태극도’ 위에 “CONTRARIA SUNT COMPLEMENTA”라고 새겨놓은 것은 매우 유명하다─라는 말처럼, 상반된 두 기운(음양)은 상호의존 상호제약· 상호전화· 상반상성(相反相成)과 같은 상관· 상보· 상대적 관계이다. 천지만물이 올바르게 생성· 변화하고 세계가 제대로 운행하기 위해서는 음과 양이라는 상반된 두 기운의 존재가 절대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한쪽의 기운이 부족하게 되면 반드시 편파적인 삐걱거림, 거대한 부조화(不調和)가 일어난다.
유태· 기독교적인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 자기와 타자의 분리· 대립을 옳다고 여기고 끊임없는 전진· 확대를 지향하는 데카르트적 이원론, 파우스트적 자아라는 일종의 오만함을 내재시킨 <서양근대>는 바로 남성적인 ‘양’의 기운이 배타적으로 일극지배(一極支配)하는 <강함>의 문명이다. 메이지시대(明治時代) 이래로 남성적인 ‘양’=<강함>의 문명을 열심히 추구한 일본의 <서양근대>화의 끝에 생긴 것이 바로 로버트 K. 머튼의 이른바 ‘잠재적 역기능(latent dysfunction)’─참여자· 행위자가 의도도 예상도 하지 않았던 부정적이고 해로운 효과· 작용─으로써의 세계 역사에도 유래가 없는 인구급감과 병행하는 ‘노인대국’, 국가규모로는 인류역사상 최초의 ‘초고령사회(超高齡社會)’였다. ‘양’ 기운이 압도적으로 일극 지배하는 밝음과 풍요로움의 이면에, 지금까지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상한 사태, 기이한 사회가 출현하고 있다. 노인대국으로 세계최첨단을 달리는 일본을 한국이 맹속도로 추격하고 곧 추월할 것이다. 앞으로 세계는 하나같이 지구적 규모로 초고령사회가 되어간다. 조만간 전 세계가 노인들로 넘친다. 노인문제는 정치· 사회정책 과제가 아니라 철학문제, 문명문제가 되었다.
<약함>이 지닌 가능성
현대의 <강함> 문명의 주변자(marginal man)로서의 고령자─어린이와 여성, 장애인, 중환자, 각종 차별을 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도 마찬가지─는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약함>으로 ‘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음’ 기운에 해당된다. 오늘날의 고령자는 ‘음’ 기운, 즉 <약함>으로써 여러 가지 일그러짐을 드러내고 있는 오늘날의 <강함>의 문명에 대한 ‘절대 타자’로서 그것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변혁자(變革者)’ 또는 ‘구제자(救濟者)’의 자격을 가진다.
글로벌리즘(신자유주의· 개인주의)은 압도적인 <강자>의 입장에서 서양근대의 부적합자인 <약자>로서의 로컬리즘(지역주의)과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를 전후(戰後) 일본사회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지역에 뿌리내리던 전통적인 공동체(community)는 생득적으로 ‘상처받기 쉬움과 여림’을 부여받고 ‘상호의존적 자기’인 우리들 개개인에게 상호부조의 방식과 인간 존재의 본질을 자각· 환기시켰던 장소였다. 글로벌리즘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강함>의 문명에 의한 일극지배─이것을 상대화하는 것으로 <약함>의 문명을 생각할 수 있다면, 몸과 마음의 <약함>을 피할 수 없는 노인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가진 <약함>과 깊이 연관되는 공동체가 그 핵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공간적인 친밀성· 상호관계적인 공동체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수직적인 시간성 <생명연쇄성>을 특징으로 하는 유학의 ‘효’(孝) 개념과 깊이 결부된다. ‘노’(老; 허리를 굽히고 지팡이를 짚는 노인)와 ‘자’(子; 머리가 크고 손발이 나긋나긋한 유아)의 회의문자(會意文字)인 ‘효’(孝)는 어른(죽음으로 향하는 존재/ 사)과 어린아이(삶을 향하는 존재/ 생)이라는 삶의 방향이 반대된 ‘음양 상반’의 일체화(一體化)이며 이세대(異世代)의 <약한> 자들끼리 결합된 ‘음양 동근(同根)’을 표현한다. 노소(老少)라는 <약한>이세대의 결합체(結合體)인 ‘효’는 ‘Generativity’(세대계승성· 세대간교류· 생명연쇄성)─미국의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1902-94)이 generate(자손을 낳다)와 generation(세대)을 합체시킨 조어─로 자기 발견과 공동체 형성의 철학이 되었다. 데카르트적 패러다임에 입각하는 현대세계는 세대간 대립· 증오를 빚어내고 있지만, 우리가 살만한 사회를 부흥하는 일은 같은 세대 사이가 아니라 노-소라는 다른 세대간의 대화· 교류· 공동(共働) 가운데서 시작될 것이다. 타자 의존적인 <약함>를 공유하는 ‘노인’(senex)과 ‘소년’(puer)을 합친 ‘puer senex’(노인적 소년 혹은 소년적 노인)는 고전 라틴문학에서는 귀현(貴顯)의 사람들에 대한 찬사이기도 했다. 이것은 고대 로마 말기와 고대기독교에서 몇 세기 동안 ‘소년다움과 노인다음의 결합이라는 특색’이 부여되고, 세계의 여러 종교에서 이와 같은 사람들이 ‘구원을 가져오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에른스트 R. 쿠르티우스, “Europäische Literatur und lateinisches Mittelalter” 1948).
변혁자· 구제자로서
오늘날의 <강함>의 문명은 그것을 상대화시키고 제동을 걸어주는 ‘타자’의 부재 속에서 출현한 것이다. 자조노력· 자기책임이라는 근대적 ‘자아’에게 구애된 자본주의가 지닌 ‘비인칭성(非人稱性)· 무차별성(無差別性)· 익명성(匿名性)의 폭력’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지구적으로 확산되고 무자비하게 타자를 침식해 나가는 자아의 이기주의’이다. 야만스럽고 비정(非情)한 자본주의가 제한도 없이 글로벌화와 욕망이 노출된 신자유주의로 마구 달려가는 것은 그를 상대화시키고 제동을 거는 ‘타자’가 없는 것이 원인이다. 자본주의에 대해 ‘외부’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타자’, 즉 ‘절대 타자’의 소실(消失)이야말로 이러한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세계가 존립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이다. 20세기에 세계를 풍미한 공산주의· 사회주의 혹은 각층 시민들로 구성되는 여러 가지 ‘시민운동’도 모두 자본주의적 전체성의 ‘내부’에서 발생한 것인 이상, 강력한 자본주의를 앞에 두고 그것을 상대화시킬 만한 ‘절대 타자’가 될 수 없다. 오늘날의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 것은 ‘시민’이나 ‘시민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전체성의 ‘내부’에 환원되지 않는 ‘절대 타자’의 존재, 외부의 ‘타자’를 전제로 해야만 가능하다.(青木孝平, 『「他者」の倫理学 ―レヴィナス、親鸞、そして宇野弘蔵を読む―』, 社會評論社, 2016)
현대세계에 대한 ‘절대 타자’ 혹은 ‘외부의 타자’를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 혹은 민주주의와 인권사상 등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한다면, 야만하고 비정한 자본주의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는 ‘타자’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자본주의세계의 ‘내부’에 사는 ‘시민’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이 세계를 상대화시킬 ‘타자’가 될 수 없다. ‘내부’에 있으면서 그 자격을 가진 자는 노인들이나 어린이들 ─여성들과 병자들· 장애인들도─ <약한 개인>일 것이다.
밝음과 풍요로움, 경제적 번영의 뒷면에서 경직화되고 뒤틀린 길을 삐걱거리면서 나아가는 현대문명에 대해 변혁과 궤도수정을 촉구할 수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와 사회체제 따위가 아니라, 현대문명의 한구석에 몰린 고령자들과 어린이들, 병자들과 장애인들─현대일본사회에서는 여성들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등 <약함>를 안고 사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그들 ‘약한 주체’는 스스로 상처받기 쉽고(vulnerable) 약한 존재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문명 즉 <강함>의 문명을 상대화시키고 변혁시킬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강함>의 반대 극을 이루는 <약함>밖에 없다. 육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약자인 노인은 필연적으로 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약함>에 있어서 비의존적인 <강함>를 핵으로 삼는 현대문명의 ‘내부’에 환원되지 않는 ‘절대 타자’로서의 자격을 가진다. 현대의 <강함>의 문명과 반대 극에 위치하는 <약함>을 체현(體現)한 노인은 ‘절대 타자’로서 여러 가지 왜곡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오늘날의 <강함>의 문명(신자유주의· 시장원리주의· 비의존적 개인주의)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유력한, 유일한 존재가 아닐까?
현대에 사는 노인의 사명
젊은 세대가 선행세대에게 돌리는 분노와 의념과 불신감, 세대간 대립. 한국에서는 예전부터 말해져왔다는 ‘세대간 증오’라는 말이 최근에 와서 일본에도 등장했다.(「リア充のまま死んでいく高齢世代への拒絶“老害”に潜む世代間憎悪」, AERA 2019년 9월 23일호) 고도경제성장기의 혜택을 누리고 풍요로운 노후를 사는 노년세대에 대해 현대의 격차사회에 고민하고 저임금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의 의심과 증오가 현대일본에서 남몰래 무르익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노소라는 서로 <약한> 다른 세대의 결합체인 ‘효’와 현대세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원리주의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된 지역사회의 공동체는 모두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가장 가까운 희망이다. 한없이 이기적인 ‘개인’으로 닫히고 분단되며 인간 상호간의 관계성이 희박해져가는 현대문명은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와 노소가 서로 손잡고 살아가는 ‘효’(생명연쇄성Generativity)이라는 현대사회가 계속 간과해온 반근대적인 ‘연결’을 단초로 하여 인간들이 참으로 살 만한 세계로 변용되어 갈 것이다.
오로지 <강함>에만 집중했던 종래의 시각 축을 <약함>의 방향으로 돌려보면, 지금까지 전혀 인연이 없었고 시야에도 안 들어갔던 ‘타자’와 만나게 된다. 스스로의 <약함>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데에 출현하는 ‘새로운 자기’를 발견하는 놀라움, 그리고 기쁨도 거기서 생길 것이다. <강함>의 문명으로 인해 없어져가는 이러한 것들을 <약함>은 현대사회와 인간의 정신 속에서 되찾아줄 것으로 나는 믿는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조만간 21세기만큼 인간이 가진 <약함>의 가치를 다시 보게 되고 요구된 시대는 없었다고 기록될 날이 올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노인들이 해야 할 일은 건강과 자립· 비의존의 <강함>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약함> 속에서 새로운 자기를 발견하고 <약함>를 공유하는 타자와 널리 연계· 연대하는 것이다. 이 세기에 세계 전체가 ‘초고령사회’─2018년에는 일본· 이탈리아· 포르투갈· 독일 등 여섯 개 나라였지만, 2060년에는 100개국이나 된다.─를 향해 일직선으로 전진한다. 현대의 <강함>의 문명과 별개로, 혹은 그것을 내포하면서 뛰어넘는(包越) 새로운 철학, 경제적 성장· 번영 이외의 가치관,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의 건설, 즉 세대간의 증오· 대립이라는 악몽을 끊고 김태창(金泰昌) 동양포럼 주간이 제창하는 ‘노약호존사회(老若互尊社會)’를 구축하고 새로운 대문명(大文明)의 길을 보여주는 인류의 큰 과제에 대해, 노인대국으로 선두를 질주하는 한일 양국에 사는 고령자들은 다른 <약한 개인>과 서로 연계연대하고 공동(共働)해서 이 과제를 맡을 의무가 있을 것이다.
(번역: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야규 마코토柳生眞)
한일 양국에서 ‘미래공창未來共創’ 시동
야마모토 쿄시(일본 미래공창신문 사장)
미래공창신문사 주최로 지난 8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 1회 노년철학 국제회의가 교토(京都) 시내에서 개최되었다.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개최되는 노년철학 국제회의이지만, 재작년부터 한국 충청북도 보은군(정상혁鄭相赫 군수) 주최로 김태창(金泰昌) 동양포럼 주간이 제창 ・프로듀스해서, 개최된 제1회 이래 한국에서 여섯 번에 걸쳐 개최된 노년철학 국제회의를 합치면 통산 일곱 번째가 된다. 한국의 회의는 모두 동양일보사(조철호趙哲鎬 회장)의 동양포럼이 주관하였다.
일본에는 비교문명학회(比較文明學會, 하라다 겐이치原田憲一 회장)가 있다. 이 학회는 비교문명학(比較文明學)의 창시자인 이토 슌타로(伊東俊太郞) 국제비교문명학회 종신명예회장이 보살펴주고, 서양과학문명을 대전환시키는 언론활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비교문명학회와 시즈오카현(靜岡縣; 가와카쓰 헤이타川勝平太 지사)의 공동 개최로 작년 11월 7, 8일의 이틀간, 시즈오카 시내에서 제1회 장수철학 국제회의도 개최했다. 일본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노년(老年)’, ‘장수(長壽)’의 이름을 띤 두 개의 국제회의가 연달아 개최된 셈이다. 미래공창신문사는 시즈오카 회의에는 협찬했다.
이 두 개의 국제회의는 한국과 일본의 유식자들이 참여하고 이루어진 것이다. 한일 간의 정치 차원의 반목을 무릅쓰고, 양국의 사람과 사람의 우정과 학술교류와 연대를, 철학적이고 장기적인 시야에서 공고히 하자는 신념과 신념이 결합된 증표이다. 일본을 거점으로 한 ‘미래공창(未來共創)’이 겨우 본격적으로 시동을 하게 된 것이다. 미래공창신문사(未來共創新聞社)는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의 국제회의에 전면적으로 협찬하고 참가해 왔지만, 이것으로 일한· 한일 양국에서 ‘미래공창’이라는 개념이 국제적으로 인지되었다. 또한 교토에서의 이번 회의는 ‘제1회 미래공창포럼’의 명칭도 함께 띠고 개최되었다.
왜 ‘노년철학’인가? 불로장생(不老長生)은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꿈이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서복(徐福)을 시켜 그 선약(仙藥)을 동방의 일본에서 찾아오게 한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사람의 수명은 30세 정도였다. 일본인의 평균수명이 50세에 달한 것은 1947년. 지금부터 70 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현재는 ‘인생 100년’이라 일컬어지고, 일본의 평균수명은 세계에서 으뜸가고 있다. 게다가 65세 이상 고령자가 28%이나 되면서, 초고령사회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2019년). 한편으로 저출산의 흐름도 있다.
그럼 한국은 어떨까? 2019년의 고령화 비율은 15%로 일본보다 꽤 낮지만, 저출산 고령화의 속도는 일본 이상으로 가속하고 있어, 2045년에는 한국이 고령화 비율 세계 제1위를 차지하고, 대만‧ 일본이 그 뒤를 따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14억명 가까운 인구가 있는 중국도 비슷비슷한 추세이다. 즉 우리 동아시아의 나라들은 ‘초고령화’로 세계의 선두주자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연령별 인구구성 비율이 장수자가 많고 젊은 층이 적은 역삼각형으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50세~60세부터는 은거(隱居)로 청장년(靑壯年) 층에게 기대면서 ‘여생(餘生)’을 보낼 수 있었던 시대는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고령자에게는 사회적인 역할이 요구되지 않거나, 혹은 비생산 인구로 간주되면서, ‘연금’이라는 약간의 생활비를 받고 나며지 긴 인생을 근근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면, 노년세대는 비참하고 가혹하기까지 하다.
의료, 노동, 교육 등의 사회구조는 인생 50년 시대 그대로 별로 바뀌지 않고 있다. 이 모순이 노년세대의 삶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재산이 있고 건강한 Super노인은 자기 인생의 봄을 구가하며 관광여행이나, 맛있는 음식이나, 연극 관람 등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그들은 장년들과 젊은이들의 차가운 시선을 알기나 하는가? 작가의 이츠키 히로유키(五木寬之) 씨는 ‘혐로사회(嫌老社會)’의 도래를 고하고 있다.
초고령화 사회 미래클 고령화사회가 전 지구적으로 펼쳐지는 현실은 동아시아를 갑자기 엄습한 해일과 같이 우리 행복을 파괴할 것인가? 만약 우리가 과거의 연장선상에 미래를 그리고 초고령화라는 역사의 도전에 대해 하나도 맞서 싸우려 하지 않는다면, 동아시아는 비참한 노인들이 떠돌아다니는 변경지대가 되고 만다. 초고령사회는 비관적인 현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실제로 그렇게 지적하는 서적들이 세상에 넘치고 있다.
그러나 ‘노년철학’은 이와 같은 상황을 거꾸로 긍정적으로 보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노년세대들이 깊고 높은 차원의 철학으로 삶으로써, 노년세대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공복(共福) 실현을 선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노년철학에는 있다. 다른 각도로 말하면 우리는 ‘노년철학’을 보조선으로 삼고, 지난 약 400년 동안 세계를 이끌어온 서양근대과학문명을 장래세대의 관점에서 내려다보고, 극히 일부의 강자들만이 번영하는 ‘사이비 문명’으로부터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원 대상으로 삼는 ‘진정한 문명’(다나카 쇼조田中正造)으로 위상을 전환시키는 전대미문의 보편적 철학을 낳을 수 있지 않을까. 김태창 씨가 ‘노년철학’을 제창한 참뜻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철학을 나는 ‘미래공창철학(未來共創哲學)’이라고 부르고 싶다.
여기서 ‘미래공창’에 대해 한 마디 보태고자 한다. 미래공창신문의 창간은 2012년 4월 1일이다. 그 전년의 동일본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제1 원자력발전소가 노심융해 사고를 일으켜 십여만 명이 다른 현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오염된 물이 지금도 바다에 흘려보내지고 핵 쓰레기는 갈 곳을 잃고 연료 풀은 큰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 씨가 설파한 바와 같이 이것은 바로 문명재(文明災)인 것이다. 위기는 곧 호기이다. 나는 근대서양과학문명으로부터 “산이나 강을 황폐화시키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진정한 문명”을 창조할 때가 왔다고 확신하고 언론인들과 기업경영자와 정치가와 행정 등등이 지혜와 힘을 모아 ‘미래창조’하기 위한 미래창조신문(未來創造新聞)의 창간을 계획했다.
창간준비호는 2012년 1월 1일에 나왔으나, 이것을 보신 김태창 씨가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오셨다. “야마모토 씨가 하고자 하는 것은 미래공창(未來共創)이 아닙니까?” 맞다. 나는 공동발기인인 하라다 겐이치 씨와 최고고문인 우메하라 다케시 씨의 찬동을 얻어 같은 해 4월 1일에 ‘미래공창신문(未來共創新聞)’으로 창간했다. 이렇게 해서 미래공창신문은 창간 시점부터 일본인과 한국인에 의한 ‘공창(共創)’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미래창조’라는 말의 출처는 내가 쓴 미래공창실천학입문(未來共創實踐學入門) part I.에도 밝힌 바 있다. 경제학자인 노나카 이쿠지로(野中郁次郞) 씨가 기업이 올리는 ‘이익’을 정의하여 “영속적(永續的) 발전을 위한 미래창조비용”이라고 한 것에 의거한다. 예를 들면 기업이 종업원들에게 지불하는 급여는 ‘경비’(회계 처리상은 경비이지만)로 받아들이지 말고 회사 발전을 위한 ‘미래투자’라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기업이 그렇게 ‘이익’을 인류 사회가 영속적으로 발전하고 평화와 공복(共福)을 실현하기 위한 비용(미래투자)으로 쓴다면, 기업의 이익은 단순한 ‘이윤’(자기 이익)일뿐만 아니라, 아울러 훌륭한 미래사회를 창조하기 위한 비용으로써 적극적인 의의를 가지게 된다.
우리들은 학교에서 ‘이윤의 추구’가 기업의 존립 목적이라고 배워왔지만, ‘이윤’(=이익)의 의미 전환은 기업을 ‘이기주의의 화신’으로부터 ‘사회의 영속적 발전을 실현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하는 조직’으로 환골탈태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한 회사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 회사에서 할 수 있다면 ‘미래창조’도 괜찮지만, 뜻을 같이하는 수많은 대소의 기업들이 그 이익의 일부를 할애해서 영속적으로 발전하는 사회를 열기 위한 비용으로 활용한다면, 그 기업들이 올리는 이익은 ‘영속적 발전을 위한 미래공창비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미래공창신문의 ‘미래공창’은 근대서양문명의 한계를 돌파하고, 영속적으로 발전하는 사회와 문명으로 탈구축(脫構築)하는 것, 즉 그런 미래를 동지들과 연대해서 만들어간다는 의미를 지닌다.
적어도 일본의 대신문은 문명재에 조우했음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탈구축을 지향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철학의 부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서양근대의 탈구축을 지향하는 언론매체를 일으키려고 결의해서 미래공창신문을 창간한 것이다.
‘노년철학’으로 다시 돌아오자. 재작년 8월의 제1회 노년철학 국제회의의 주제를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한국인과 일본인은 삶과 죽음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로 정했다. “죽으면 끝인가?”라고 물음을 던진 것이다. ‘죽음’과 ‘삶’은 실은 철학과 종교의 근본 문제이다. 작년 8월의 교토회의의 주제는 「사생학과 노년철학의 교차로」이었다. 공교하게도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최초로 개최된 노년철학 국제회의가 ‘죽음’과 ‘삶’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노년철학이 삶과 죽음을 포섭하는 ‘생명’의 근원을 묻고 생명의 존엄(尊嚴)에 눈을 뜨는 실천을 수반할 때, 노년철학은 미래공창철학으로 지향(指向)된다. 미래공창철학이라는 큰 나무줄기 또는 큰 가지가 노년철학인 것이다.
그럼 미래공창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존엄성의 철학이고, 존엄(尊嚴)하는 실천의 철학이며, 행복공창철학(幸福共創哲學)이다. 그 구체상(具體相)에 대해서는 다시 글을 쓰고자 한다.
시즈오카현(靜岡縣)의 가와카쓰 지사는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75세 이상을 후기 고령자라고 부릅니다만, 시즈오카현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66세부터 76세까지는 장년숙기(壯年熟期)라고 합니다. 77세부터 80세까지는 초로(初老)의 장년(壯年)이고, 81세부터 87세가 중노(中老)이며, 89세부터 99세가 장로(長老)입니다. 100세를 넘으면 ‘백세자(百歲者)’라고 하여 축하하고 존경합니다”라고 말했다. (<未來共創新聞>, 2016년 11월 21일호)
시즈오카현은 건강장수의 현으로 일본 전국에서 1, 2위를 겨루고 있다. 시즈오카에는 특산의 차(茶)가 있고 영봉(靈峯)으로 알려진 후지산(富士山)이 있다. 온화한 기후도 건강장수에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노년세대를 축복하는 가와카쓰 지사의 장수자에 대한 따뜻한 눈길이 훌륭하다. 현재 시즈오카현은 한국의 충청남도와 자매관계를 맺고 한일 민간교류에 공헌하고 있다. 건강장수의 선진현(先進縣)인 시즈오카현이 장수철학· 노년철학을 갈고닦아서, 건강장수에 더하여 ‘행복’의 현으로 동아시아의 미래공창에 대한 역사적 역할을 맡아주기를 기대하여 마지않는다.
(번역: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야규 마코토柳生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