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7

希修 - 공동체의 화합을 위한 초기경전의 가르침 - 보디 스님 편찬

(2) 希修 - < 공동체의 화합을 위한 초기경전의 가르침 - 보디 스님 편찬 > . . 아래의 번호들은 Social and... | Facebook

< 공동체의 화합을 위한 초기경전의 가르침 - 보디 스님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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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번호들은 Social and Communal Harmony라는 앨범의 사진 번호.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1557300834641994&ty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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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불교에서의 선악 기준은 자의적이 아니며 (인과라는 자연법칙의 관찰에 의한 것), 공동체의 화합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인 right view와 그를 실천하는 윤리적 행동이 그 전제조건. 따라서 right view와 wrong view를 구분하는 일이 중요. ("분별하지 말라"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미덕이 아님. 흔히 '지혜'라고 번역되는 'paññā'는 'pajānāti'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이 타니사로 스님의 분석이며, 온라인 사전 wisdomlib.org와 wiktionary.com은 'pajānāti'를 '알다, 구분하다'라고 표기. 즉 불교의 '지혜'란 결국 '분별력 = discernment'이라는 얘기. 8정도 수행을 통해 내가 부처님과 같은 안목을 갖게 되면 9단계에서 Rright Knowledge에 이르며, 10단계가 바로 Right Release = 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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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Ignorance가 병의 근원이라면 해결은 당연히 Knowledge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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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불교윤리의 기초는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 그래야 나 자신이 미래와 내세에서 해를 입지 않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세상 모든 존재들을 보호하게 되므로, 그래서 수행 자체가 이타행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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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불교는 고통의 원인을 탐진치로 보는데 탐과 진도 치에서 나오므로 (12연기의 시작도 ignorance) 결국 근본적 해결은 지혜 혹은 Right Knowledge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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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3. 10가지의 대표적 악업. 이 중 5번째의 '분열시키는 말'이라는 것은 '이간질하는 말'을 의미하지 비판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 (#70~71, 110~112, 113 등에서 보듯 바른 비판에는 물론 여러 조건들이 따라붙으며, 무조건 싸우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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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Right Speech의 기준 => '공동체의 화합!을 원한다면 비판!을 잘 하고 또 잘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05043640199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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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쉽게 화내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 것. '어리석은'( =인과를 모르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부적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음 (Sn 2:4). 세상 모든 이들을 감정적으로 사랑/공감하거나 인간적으로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부처님이 가르치신 '자비'와는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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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2. 누군가가 싫거나 미워질 때는 그의 장점/선행을 기억하려 노력해 보고, 떠오르는 게 있거든 사막에서 발견한 오아시스 물인양 소중히 여기고는 떠나라고 하셨음. (내게 수행의 모범이 되어 주고 나의 잘잘못을 분별하여 훈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거든 그를 가까이 하고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 한다면 무소의 뿔처럼 홀로 지내라는 것이 Sn 1:3, MN 128의 가르침. 이건 출가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재가자들에게는 주위 사람들과 두루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셨지만.) 상대의 장점/선행을 기억함으로써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화/미움을 다스리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상대를 계속 가까이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 (누군가의 잘못에 대해 "에이, 좋은 뜻으로 한 일이겠지!"라며 억지로 축소/희석/옹호해 주는 게 아니라, 잘못은 잘못이라고 정확히 판단하되 내가 간과하고 있는 다른 좋은 면은 혹 없는지 살피라는 것. 다시 말해, 부정적인 것은 부정적으로 긍정적인 것은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긍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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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3.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면 나를 때리지 않음을 감사하고, 누군가가 나를 때리면 나를 죽이지 않음을 감사하라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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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부처님은 남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목적의 논쟁은 금하셨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후세에 정확하기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나 다른 전통/스승의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의 논쟁은 장려하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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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15. 판단, 저격, 논쟁은 상근기는 안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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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4. 대화 상대로 부적합한 사람: 질문의 형식과 내용에 맞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는 사람, 사실이나 공유된 전제 및 절차에 맞지 않는 얘기를 하는 사람, 대화 맥락을 파악 못 해서이든 자신의 논리가 달려서이든 다른 의도가 있어서이든, 대화 주제에서 벗어나는 얘기를 하며 논점을 흐리고 분위기를 산만하게 만드는 사람, 짜증, 조롱, 공격 (정당하고 적절한 비판이 아닌) 등의 무례로써 타인을 대하거나 이해의 노력 없이 트집만 잡으려고 작정하고 달려드는 사람, 경청해야 하는 것에 대해 경청할 줄 모르는 사람. 대화의 목적은 언제나 무지나 잘못된 견해로부터 스스로 해방되거나 타인을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함 (AN 3: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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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66. 잘못된 대화의 예. 믿음이 없는 이에게 믿음에 대해 말하고, 청정/덕 (계율 준수)에 관심 없는 이에게 청정/덕에 대해 말하며, 배움이 없는 사람에게 배움에 대해 말하고, 인색한 이에게 너그러움에 대해 말하며, 어리석은 사람에게 지혜에 대해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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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지옥으로의 윤회를 이끄는 어리석음의 예. 비난받아야 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칭반받아야 하는 사람을 비난하며, 의심해야 하는 내용을 믿고, 믿어야 하는 내용을 의심하며, 누군가가 믿음에서 준 것을 함부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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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70. 칭찬받아야 할 사람에게 칭찬하지 않는 이, 비판받아야 할 사람에게 비판하지 않는 이, 칭찬받아야 할 사람에게 칭찬 않고 비판받아야 할 사람에게 비판 않는 이, 칭찬받아야 할 사람에게 칭찬하고 비판받아야 할 사람에게 비판하는 이. 이 넷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은 칭찬받아야 할 사람에게 칭찬하고 비판받아야 할 사람에게 비판하는 정확한 사람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 (동양문화에는 알아도 모른 척 해 주고 이러니 저러니 일일이 말하지 않는 것을 '현명'이라 오해하는 경향이 강한테, 이런 견해는 부처님과는 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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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71. 정확한 사실인가,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인가, 그 내용을 말하기에 적절한 시점인가, 적절한 언어로 표현했는가 등이 Right Speech의 요소. 당장은 상대에게 감정적 상처가 될 만한 내용이라도 이 요소들을 모두 충족할 경우엔 Right Spe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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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72. 타인을 꾸짖고자 할 때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정확한 사실인지, 자비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태도)에서 우러나온 동기인지, 표현 방법이 부드럽고 말하기에 적당한 시점인지 등을 고려하여 상대에게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해야. 타인의 꾸짖음을 들었을 때는, 감정이 아닌 사실성 여부에 집중해야 하며, 상대의 말이 사실일 때는 인정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그렇지 않다고 감정 없이 사실만 건조하게 밝혀야. (타인이 나를 모함해도 무조건 묵묵히 듣는 것을 '인욕'이라는 미덕으로 칭송하는 종파도 있지만, 그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님. 내가 비판하는 입장이든 비판받는 입장이든 무관하게 객관적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impersonal한 태도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 대부분의 인간이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하기에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을 '인격자'라고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 두 방식은 personal이라는 동전의 양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신이든 타인이든 동일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not 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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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17. 매사를 판단 없이 무조건 '긍정적'으로 수용/포용하는 것이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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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80. 자신과 남 모두를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하고, 자신을 위해 수행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남을 위해서는 수행하지 않는 사람이 그 다음, 남을 위해 수행 (타인에게 부처님의 가르침 실천을 권고)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수행하지 않는 사람이 그 다음, 자신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수행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열등하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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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85. 수다떨기를 좋아하고 마음챙김이 없는 집단은 천박하고, 검소하고 고독을 지키며 수행에 집중함으로써 다음 세대에 모범이 되는 집단은 훌륭. ('조화로운 공동체'라고 하면 우린 흔히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떠올리지만, 함께 생활하더라도 꼭 필요한 얘기 외에는 하지 않고 각자 고독과 침묵을 지키는 것이 수행자 집단으로서의 바람직한 모습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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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수다 (Idle Chatter)가 불교에서 Wrong Speech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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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92. 따뜻한 우정의 10원칙: 청정/덕 (계율 준수),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기억, 서로 서로를 불선에서 선으로 이끌어 주는 좋은 도반이 됨, 타인이 교정해 줄 때 잘 받아들임, 매사 부지런하고 능숙한 일처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즐거움의 원천으로 삼음, 불선을 줄이고 선을 증장시킴, 최소한의 물질만으로 만족, 마음챙김 유지, 지혜. (아무나 무조건 믿어 주고 아무하고나 무조건 친밀하게 지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을 것 같지만, 사실은 세속에서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우정의 조건보다도 더 까다로움. 이런 자질들을 갖추지 못 한 사람과는 서로의 발전에 도움되는 우정이 불가능하다는 얘기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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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94. 수행 공동체가 퇴보하지 않기 위한 7원칙: 법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토론. 수다나 형이상학적 관념적 유희가 아님)을 자주 가짐, 화목,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뭔가를 더하지도 빼지도 않음, 선배 수행자들을 존경, 욕망 제어, 번잡하지 않은 숲속에서 거주, 마음챙김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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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타인을 대할 때의 5금기: 얼굴 정도 아는 사이일 뿐이건만 친한 척, 자신이 갖지 않은 것을 베품, 이간질, 귓속말, 과도한 요구/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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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99. 빠빤쨔 (papañca = objectification)에서 욕망이, 욕망에서 호불호가, 호불호에서 부러움과 인색함이, 부러움과 인색함에서 온갖 적의와 갈등이 일어남. (대상화를 하지 말라는 얘기는 '무엇이 나의 먹이=즐거움=이익이 될 것인가?'를 기준으로 생각지 말라는 뜻이건만, 이걸 '모든 종류의 생각/분별 무조건 금지!'라거나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일원론nonduality적 사고를 하라'는 의미로 오해하는 분들이 너무 많음. 이런 오해는 결국 선-악, 원인-결과, 윤회, 과거-현재-미래 등의 구분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데, 초기경전은 인과를 부정하는 이런 견해를 "사악 evil"이라 표현 - SN 2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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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104. 수행 공동체의 분열!을 일으키는 행위: 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 부르고, 법을 법이 아니라 말하며, 규율이 아닌 것을 규율이라 하고, 규율을 규율이 아니라 간주하며, 부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하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부처님이 말씀하시 않았다 주장하며, 부처님이 실천하시지 않은 것을 부처님이 실천하셨다 하고, 부처님이 실천하신 것을 부처님이 실천하시지 않았다 우기며, 부처님이 처방하시지 않은 것을 부처님이 처방하셨다 하고, 부처님이 처방하신 것을 부처님의 처방이 아니라고 일컬음. 이와 반대로,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고 무엇을 실천, 처방하셨는지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 수행 공동체의 화목!을 위한 일이라는 게 부처님의 말씀. (그러나 현실은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옳고 그름이 따로 없으며 진리는 상대적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은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온다"는 오해가 오히려 진리인 양 왜곡되어 있는 상태. 의도적이든 실수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수행자 집단의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지옥으로의 윤회를 야기하는 악업. 초기경전에서부터 갈라져나간 대승불교야말로 최대의 승가분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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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12. 부처님은 언어/관념/논리에 의한 분별/분석을 금하셨다'
[마성 스님]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대승불교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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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110. 부처님 말씀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든 그 내용의 해석에 대해서든 수행자들 사이에 의견 불일치가 있을 경우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싸움'으로까지 이끌지는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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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12. 타인이 뭔가 과오를 저질렀을 때 (i) 그가 감정적으로 나오거나, (ii)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굽히려 하지 않거나, (iii) 내가 그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안 든다면, 이 3개 항목 모두에 해당되는 경우에는 그 사람과 일정 거리를 두고서 평정심을 유지할 것. 그렇지 않고 0~2개 항목만 해당되는 경우라면, 상대방이 지금 당장은 약간의 감정적 상처를 입는다 해도 가급적 상대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해 볼 것 -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상대에게 훨씬 더 큰 이익이 되므로. (남이 무슨 얘기를 하든 무조건 "니가 옳고 내가 틀리다"고 하는 것이 부처님이 가르치신 자비 혹은 겸손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사실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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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남을 비판할 때 주의할 점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한 목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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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120. 훌륭한 공동체에서는 선배도 후배를 바로잡아 주고 후배도 선배를 바로잡아 주며, 타인의 훈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과오에 대해 책임을 지고서 그 결과를 감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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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25.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아 달라고 누군가가 요청한다 해도 그가 비판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교정하는 데에 익숙치 못 한 사람이라면 (오만하다거나 비판받을 때 변명을 늘어놓는다거나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이 아예 없고 무례하다거나 등등), 동료 수행자들은 그를 바로잡아 주지 않을 것이며 신뢰하지도 않을 것. 그러므로 나 역시 동료 수행자들로부터 신뢰받을 만한 사람인지를 늘 성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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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128. 재가자가 불선할 경우 출가자는 그 재가자의 보시를 거절할 수 있으며, 출가자가 불선할 경우에도 재가자는 그 출가자에 대한 신뢰를 잃었음을 공표할 수 있음. 모든 출가자를 모든 재가자들이 반드시 신뢰, 존경해야 하는 것은 아님. (#103, 104에서 보았듯이, 공동체의 '분열'을 일으킨 책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히 전달/실천하는 데에 실패한 사람에게 있지 그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함으로써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지 않음. 그러나 도둑이 아니라, "도둑잡아라" 외치는 사람이 오히려 "잘난 척한다," "불화를 조장한다"는 틀린! 비난을 받는 것이 인간계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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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31. 자신의 과오를 지적받을 때 회피하거나 변명하거나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 자신의 과오를 교정, 개선하려는 노력에 게으른 사람은 아예 공동체에서 내보내라고. 병든 보리가 발견될 경우 즉시 뿌리째 뽑아서 버려야지 그러지 않으면 밭 전체의 보리가 병들게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이유 (AN 8:10). 강도가 내 팔다리를 자르는 와중이라 해도 절대로 상대에게 해를 입히지 말고 미워하지도 말라는 것이 부처님이 가르치신 '자비'이고, '용서'라는 것도 상대를 미워하거나 상대가 불행해지기를 바라지 말라는 얘기.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상대의 과오를 무조건 부인, 옹호, 희석해 주거나 상대와 계속 친밀하게 지내라는 얘기도 아님. 인간의 탐진치는 마치 바이러스와도 같으며, 바구니의 사과들 중 단 한 개만 병들어 있어도 이내 모든 사과들이 병들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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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134. 수행자들 사이에 청정하지 못한 사람이 있어 부처님이 법문하기를 거부하시자, 목갈라나 존자가 그에게 나가라고 3번 말함. 그가 계속 모른 체하자 목갈라나 존자가 그를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걸어잠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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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143. 누군가를 섬기거나 누군가에게 뭔가를 베푸는 일을 통해 나의 믿음, 청정, 너그러움, 지혜 등이 증가한다면 그 일을 하되,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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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146, 147. 누군가가 농부가 되는 것도, 장인이 되는 것도, 상인이 되는 것도, 하인이 되는 것도, 살인자가 되는 것도, 정복자가 되는 것도, 모두 그 행동에 의한 것. 누군가가 천하게 되는 것도 성스럽게 되는 것도 역시, 타고나는 신분이 아닌 오직 그 행동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 (부처님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하신 적이 없음. 인간의 귀함과 천함은 출생이 아닌 본인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셨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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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154. 상대주의와 일원론은 옳고 그름의 '초월'이 아니라 '재정립'에 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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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출가자 공동체 안에서의 갈등해결 절차에 대해 부처님이 율장에 정해 놓으신 것을 타니사로 스님이 "Purity of Heart"라는 책의 'Reconciliation, Right & Wrong' 챕터에서 해설하신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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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는 갈등 당사자들이 자신의 의도에 대해 깊이 성찰한 후 과오를 저지른 쪽!의 인정과 반성을 필수! 조건으로 한다. 그러고서 추후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서로 확인/합의하고 실제로도 충실히 이행해야만, 이 전제가 충족되어야만 그제서야 비로소 신뢰회복이 가능해진다. “Beginner’s mind가 Zen mind이니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모두 잊고 새출발!“ 같은, 시비분별을 포기해야 겸손이고 자비이며 용서이고 화해라는 식의 얘기들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오히려 정반대!인 것이다. (Zen은 부처님의 가르침보다 도가와 힌두교에 오히려 더 가까운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주관적인 생각.) 심지어 초기경전은 자타의 고통만 가중시키는 어리석은 이에 대해서는 측은지심을 갖되 (AN 5:162) 멀리하거나 끊으라고 말한다 (Sn 2:4, SN 17:3, Ud 8:7). 스스로 노력 않는 사람의 탐진치를 제거해 주는 일은 심지어 부처님도 못 하시며, 내가 상대의 악한 면을 알면서도 외면/부정하여 스스로 피해자가 되는 것은 상대의 악업을 오직 enable & perpetuate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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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가르치신 의미의 화해와 신뢰회복에 실패할 경우엔 따로 따로 각자의 길을 가되, 그렇다 하더라도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다. 용서란 상대가 고통 받기를 기원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 관계회복을 의미하지도 상대의 과오를 부인, 희석, 변명해 주는 일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잘못한 쪽의 명확한 인정과 깊은 반성 및 사과가 없는 억지 봉합에는 아무런 의의도 없을 뿐 아니라, 실은 'abuse'이기까지 하다는 것이 타니사로 스님의 말씀. 세상을 '선 vs. 악' or '옳음 vs. 그름'으로 구분하는 것이나 '일원론 vs. 이원론'으로 구분하는 것이나 이분법이기는 마찬가지이며, "옳고 그름이라는 것도 상대적"이라는 관점은 사실 옳고 그름의 초월 (transcendence)이 아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재정립/재배열 (realignment)일 뿐이라는 것이 타니사로 스님의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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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친구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싸우면 되니? 니네 둘 다 잘못했으니 빨랑 화해해!" 식의 전혀 공정하지 않은 닦달은, (i) "부도덕은 나쁘다" 식의 기존 관점을 "판단/분별은 나쁘다"라는 판단/분별로 단순히 바꿔치기한 내로남불이고, (ii) 문제의 본질로부터 시선을 분산시킬 뿐 여전히 이분법적인데다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 하며, (iii) 시비에 대한 혼란과 위선을 조장함으로써 진실된 관계로 나아가는 일에도 오히려 방해만 되고, (iv) 이왕 하게 된 경험으로부터 배움/성장조차 얻지 못 하게 만들며, (v) 무엇보다, 시비분별과 반성이라는 어렵지만 필수적인 과정에 대한 ‘회피=화=진瞋’ (이건 일묵 스님의 견해)이다. 그러므로 '옳음 vs. 그름'을 완전히 포기하는 상대주의적 혹은 일원론적 관점은 갈등해결이나 화합에 전혀 도움되지 않으며, 대신 옳고 그름의 기준에 대한 합의와 그 적절한 운용이 중요하다는 얘기인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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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공동체 안에서야 가치기준이 명확하고 절대적인데 비해 사회에서야 그렇지 않으므로 다양한 관점에서 매사를 바라보는 일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합리성의 우열을 완전히 포기한다면 그 사회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정글이 될 것이므로 (경쟁을 통해 선택된 ’우월한 = 보다 합리적인‘ 의견이 권력을 갖지 못 하는 공동체는 완전한 무질서 혹은 물리력에 의해 지배됨),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가치기준을 종종 변화시켜 나가는 유연성이 필요할 뿐, 기본원리는 부처님이 제시하신 방향이 사회에서도 최선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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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이라 해도 무수한 종류의 회색들 간의 차이를 분별해야 하며, 흰색과 검은색의 존재 자체에 대해 완전히 부정하는 일은 특히, 눈뜬 장님으로 또는 인간의 뇌 낭비하고 축생으로 살겠다는 얘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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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잘못을 보면 꾸짖어 주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거든, 보물을 발견해 그 위치를 네게 알려 주는 것이라고 여겨라. 이런 류의 현자를 가까이 해라. 그러면 발전뿐 퇴보는 없을 것이니.
그런 현자가 너를 훈계하고 가르치고 잘못된 행동을 멀리하도록 지도하게 해라. 지혜로운 이는 바른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울 것이고, 바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부드럽지 않을 것이니."
-- 법구경 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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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eong Gi Yi
    귀한 말씀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希修
    수행자들의 몸은 각각이어도 마음은 하나인 것.처.럼. ("우린 하나"라고 단정짓지 않았음) 생활하고 있다고 Anuruddhas가 부처님께 말씀드리는 장면이 MN 31에 나오기는 하지만, 이건 수행자들 각각이 conceit = selfhood를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철저히 충실하게 생활한 결과이지 "본래 나와 남의 구분도, 부처와 중생의 구분도 없다" 같은 自他不二 (자타불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남과 둘/별개가 아닌 하나"라는 것도 결국 'I am X'라는 자기정체성-10 족쇄들 중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가는 그룹의-일 뿐이기도 하고.) 세상을 '선 vs. 악' or '옳음 vs. 그름'으로 구분하는 것이나 '이원론 vs. 일원론/비이원론'으로 구분하는 것이나 이분법이기는 마찬가지이며, "옳고 그름이라는 것도 상대적"이라는 관점은 사실 옳고 그름의 초월 (transcendence)이 아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재정립/재배열 (realignment)일 뿐이라는 것이 타니사로 스님의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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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16. 이원론이 아닌 비이원론적/일원론적 사고를 하라'
  • 希修
    시비분별의 회피는 어렵지만 중요한 과정에 대한 ‘화=진瞋’일 뿐.
    괴로움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면, 조건에 대한 지혜가 생긴다ㅣ일묵스님ㅣ제따와나선원 월요소참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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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로움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면, 조건에 대한 지혜가 생긴다ㅣ일묵스님ㅣ제따와나선원 월요소참 161.
    괴로움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면, 조건에 대한 지혜가 생긴다ㅣ일묵스님ㅣ제따와나선원 월요소참 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