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 아제 바라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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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임권택 감독 장편 연출 작품 (1980년 이후 제작) |
아제 아제 바라아제 (1989) Aje aje bara aje आजे आजे बारा अजे Come, Come, Come Upward | |
장르 | 드라마, 종교 |
감독 | |
원작 | 한승원 - 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 |
각색 | |
제작 | |
기획 | |
주연 | |
촬영 | 구중모 |
조명 | 차정남 |
편집 | 박순덕 |
음악 | 김정길 |
미술 | 도용우 |
소품 | 김호길 |
분장 | 조경애 |
동시녹음 | 이성근, 오기삼 |
음향 | 김병수(녹음), 양대호(효과) |
조감독 | 김영빈, 오병철, 김의석, 박광인, 지성현 |
스틸 | 양기주, 구본창(사진협조) |
현상 | 영화진흥공사 |
색보정 | 김광운 |
제작사 | |
개봉일 | |
화면비 | 1.85:1 |
상영 시간 | 134분 |
대한민국 총 관객 수 | 145,241명 |
상영 등급 |
1. 개요[편집]
2. 등장인물[편집]
3. 설정[편집]
- Come Come Come Upward (1989)Korean nameHangul 아제 아제 바라 아제Revised Romanization Aje aje bara ajeMcCune–Reischauer Aje aje para aje
4. 줄거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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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성의 아픔 만을 남기고 떠난 아버지 운봉스님, 돈과 성에 눈이 먼 어머니 제주댁, 어머니와 내연의 관계이면서 자신을 겁탈한 중년의 사내, 현종 선생과의 오해로 인한 이별 등으로 속세의 아픔을 느낀 순녀(강수연)는 여승이 되고자 덕암사에 찾아온다. 자살하려던 남자 박현우를 구한 일을 계기로 그녀는 파계를 하고 다시 속세로 내려간다. 그나마 박현우(한지일)가 죽자 만행 중인 선배 여승 진성(진영미)을 만나 노화도의 병원에서 간호원 생활을 시작한다. 자신을 희생하여 송기사를 구하려 하지만 송기사 마저 죽고 순녀는 자신의 업보를 깨달으며 다시 덕암사를 찾는다. 출처: 다음 영화 |
5. 수상[편집]
- 1989년
- 제16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 최우수 여우주연상, 성조지 동메달 (강수연), 성조지 금메달 (임권택)
- 제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여자연기상(강수연), 음악상(김정길) , 녹음상(김병수), 신인연기상(진영미)
6. 흥행[편집]
145,241명의 성적을 거두었다.
7. 기타[편집]
- 상술하였듯이 강수연이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는데, 당시에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가 가지는 위상이 상당히 큰 편이었고, 1989년 당시만 해도 한국의 배우가 세계 무대에서 수상하는 일이 흔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강수연은 1987년 씨받이를 통한 베니스 영화제 수상에 이은 이 수상으로 사실상 월드 스타라는 칭호를 굳히게 된다.[1]
25. 임권택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
기자명 문학산 교수
문학산의 시네마 다르마
입력 2020.01.28 법보신문
가장 세속적인 곳에서 중생을 보듬는 보살행
한승원 소설 원작…거장 임권택 감독의 ‘대승불교관’ 드러낸 영화
수행 매진하는 진성 스님과 세간 속 순녀의 대승적 수행 비교 구도
은사 스님의 열반 후 다시 저잣거리로 향하는 순녀로 대승 지지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한승원 소설을 원작으로 1989년 제작된 임권택 감독의 불교영화다. 진성 스님과 순녀의 삶을 통해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를 보여준다. 사진은 영화 캡쳐.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소설가 한승원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한승원이 각색한 영화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고유한 색과 음이 존재한다고 한다. 영화도 동시대의 풍경과 공기를 프레임에 담는다. 시대적 풍경과 분위기를 담는다는 명제에 충실한 영화가 바로 ‘아제 아제 바라아제’다.
이 작품은 두 개의 화두를 담아낸다.
- 하나는 작품 속에서 제시한 ‘달마 대사는 왜 얼굴에 수염이 없는가’이고
- 다른 하나는 1980년대 시대적 화두인 ‘역사의 변화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지식인과 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이 영화가 1989년에 제작됐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 역사와 한국 문화를 씨줄과 날줄로 엮여 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 임권택의 존재가 두 개의 화두를 직시하게 한다. 임권택 감독은 대승불교의 길의 제시를 통해 두 화두를 통합한다.
첫 시퀀스에서 순녀(강수연 분)에게 은선 스님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는다. 고향인 광주 이전에 어머니 뱃속 그 이전에 자신의 근원을 물은 것이다. 순녀는 이 질문에서 출발하여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영화의 이야기는 포크형 구조다.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다. 앞부분은 순녀의 개인 서사가 일직선으로 뻗어간다.
첫 시퀀스에서 순녀(강수연 분)에게 은선 스님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는다. 고향인 광주 이전에 어머니 뱃속 그 이전에 자신의 근원을 물은 것이다. 순녀는 이 질문에서 출발하여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영화의 이야기는 포크형 구조다.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다. 앞부분은 순녀의 개인 서사가 일직선으로 뻗어간다.
- 순녀가 행자 생활을 하는 동안, 회상 장면으로 더 거슬러가서 고등학교 시절 현종 선생님과의 만남과 함께 백제 문화권의 여행과 입산의 과정이 펼쳐진다.
- 순녀는 자살에 실패한 박현우(한지일 분)를 만나서 탄광촌으로 떠난다.
- 이 지점에서 저잣거리에서의 순녀의 삶과 대비되는 진성 스님의 수행과 만행이 평행 편집되어 두 개의 서사로 나누어 진다.
순녀와 인연을 맺은 많은 남성들은 아버지 혹은 아들 같다.
월남전 참전 용사인 부친은 참회를 위해 입산 수도하였으며
순녀에게 하늘의 구름을 보여주면서 “저 구름이 너의 아버지이다”라고 말하고 떠난다.
순녀가 아버지라는 뜬 구름을 찾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갈 것을 돌려 당부한 셈이다.
순녀의 또 다른 아버지는 광주 민중항쟁 때 임신한 아내를 잃은 현종 선생님이다.
순녀의 또 다른 아버지는 광주 민중항쟁 때 임신한 아내를 잃은 현종 선생님이다.
그는 아내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 멸망한 백제와 패배한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한
대서사시를 집필하려고 답사한다.
두 사람의 여행은 학교 당국의 오해로 현종과 순녀의 이별을 야기한다.
두 인물이 아버지를 표상한다면 ‘당신은 나의 빛이며 내 목숨은 스님 것’이라고 순녀에게 애원하는 현우는 아들과 같다.
두 인물이 아버지를 표상한다면 ‘당신은 나의 빛이며 내 목숨은 스님 것’이라고 순녀에게 애원하는 현우는 아들과 같다.
은선 스님은 수행은 산에서만 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순녀를 저잣거리로 내보낸다.
이와 같은 순녀의 행보는 대승불교를 경유하여 불교세계를 녹여내려는 임권택 감독의 의도에 부합한다.
사진은 영화 캡쳐.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길 영화로 대표되며 ‘실패한 자의 떠돌기’라는 임권택의 인물을 작가적으로 특징한다. 세상에서 신산한 삶을 겪으면서 스스로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는 주인공 순녀는 임권택의 실패한 자들이 자기완성의 길을 가는 로드무비의 주인공으로 캐스팅 1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정성일과 대담에서 대승불교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였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길 영화로 대표되며 ‘실패한 자의 떠돌기’라는 임권택의 인물을 작가적으로 특징한다. 세상에서 신산한 삶을 겪으면서 스스로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는 주인공 순녀는 임권택의 실패한 자들이 자기완성의 길을 가는 로드무비의 주인공으로 캐스팅 1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정성일과 대담에서 대승불교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였다.
첫 장면의 천불전 장면에 대해 “천불전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모두 다 부처가 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라며 “대승적 수행이란 바로 중생과 더불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전면에 내세웠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우리의 보편적인 삶은 겉은 정주민이지만 속은 떠돌이라는 임권택 감독의 뿌리 깊은 사유도 드러난다.
그는 “우리가 뿌리 내리고 살고 있다고 믿는 것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쩌면 떠돌고 있는 삶”이라고 말했다. 이는 영화 속 순녀의 삶과도 닮았다. 그녀는 절에서 탄광촌으로, 탄광촌에서 섬으로, 다시 절로 그리고 다시 저잣거리로 떠돈다. 그녀는 연좌제로 인해 막장의 광부가 된 현우와 상이군인인 병자, 병원의 기사인 송기사까지 사회적 타자를 껴안고 살아갔다.
그녀는 많은 인간 군상과 인연을 맺었지만 감독은 “남자들과의 모든 관계도 그런 자비심의 발로이며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수행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현우와 술 취한 순녀가 여관방에서 행한 정사 장면은 순녀의 정서를 드러낸다. 순녀는 현우를 거부하다가 얼굴을 은선 스님이 주신 모자로 가리면서 허용한다. 은선 스님은 모자를 주면서 속세에서도 수행자의 삭발을 가리면서 수행자로 살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몸은 속세에 있지만 정신은 절에 두고 있기를 우회적으로 전한다. 모자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는 애욕의 거부와 수행의 경계 확장으로 읽을 여지를 만들어낸다.
대승불교는 속세에서 보살행하는 순녀를 긍정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순녀를 배척하는 보살들과 진성 스님의 질타는 소승적 입장에서의 거부감을 드러낸다. 은선 스님은 열반을 앞두고 순녀의 손을 들어준다. 은선 스님은 ‘오욕의 진창 속에서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며 순녀의 수행을 지지하고 격려한다.
은선 스님의 다비식을 마치고 진성 스님은 유골을 수습하는 순녀를 미망에 빠져있다고 질타한다. 순녀는 탑 천 개를 만들겠다고 말한다. 진성 스님은 탑을 세우겠다는 욕심을 미망으로 치부한다. “미망을 뒤집어쓰지 않고서 어찌 미망 속에 갇힌 중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순녀는 반문한다.
‘반야심경’의 독경 소리가 들리고 순녀는 저잣거리로 향한다. 순녀는 대승불교의 행보를 이어간다. 대승도 소승도 모두 깨달음을 향한 길에서 우열과 옳고 그름이 없겠지만 임권택 감독은 대승의 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셈이다.
문학산 영화평론가·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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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가 뿌리 내리고 살고 있다고 믿는 것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쩌면 떠돌고 있는 삶”이라고 말했다. 이는 영화 속 순녀의 삶과도 닮았다. 그녀는 절에서 탄광촌으로, 탄광촌에서 섬으로, 다시 절로 그리고 다시 저잣거리로 떠돈다. 그녀는 연좌제로 인해 막장의 광부가 된 현우와 상이군인인 병자, 병원의 기사인 송기사까지 사회적 타자를 껴안고 살아갔다.
그녀는 많은 인간 군상과 인연을 맺었지만 감독은 “남자들과의 모든 관계도 그런 자비심의 발로이며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수행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현우와 술 취한 순녀가 여관방에서 행한 정사 장면은 순녀의 정서를 드러낸다. 순녀는 현우를 거부하다가 얼굴을 은선 스님이 주신 모자로 가리면서 허용한다. 은선 스님은 모자를 주면서 속세에서도 수행자의 삭발을 가리면서 수행자로 살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몸은 속세에 있지만 정신은 절에 두고 있기를 우회적으로 전한다. 모자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는 애욕의 거부와 수행의 경계 확장으로 읽을 여지를 만들어낸다.
대승불교는 속세에서 보살행하는 순녀를 긍정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순녀를 배척하는 보살들과 진성 스님의 질타는 소승적 입장에서의 거부감을 드러낸다. 은선 스님은 열반을 앞두고 순녀의 손을 들어준다. 은선 스님은 ‘오욕의 진창 속에서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며 순녀의 수행을 지지하고 격려한다.
은선 스님의 다비식을 마치고 진성 스님은 유골을 수습하는 순녀를 미망에 빠져있다고 질타한다. 순녀는 탑 천 개를 만들겠다고 말한다. 진성 스님은 탑을 세우겠다는 욕심을 미망으로 치부한다. “미망을 뒤집어쓰지 않고서 어찌 미망 속에 갇힌 중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순녀는 반문한다.
‘반야심경’의 독경 소리가 들리고 순녀는 저잣거리로 향한다. 순녀는 대승불교의 행보를 이어간다. 대승도 소승도 모두 깨달음을 향한 길에서 우열과 옳고 그름이 없겠지만 임권택 감독은 대승의 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셈이다.
문학산 영화평론가·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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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아제아제바라아제'강수연진영미,삶의본질에대한깊은성찰
입력 2016.05.15 19:50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 강수연 진영미,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
15일 EBS ‘한국영화특선’에서는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방영한다.
1989년 제작된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강수연, 진영미
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 줄거리
베트남 전쟁의 상처로 승려가 되어 떠나버린 아버지와 육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고리대
금업자 어머니, 자신을 겁탈한 어머니의 애인, 존경하던 선생에 대한 사랑의 상처 등의 업
보를 안고 순녀는 입산하여 절에 머문다.
그러나 자살하려던 남자를 구출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다시 파계하고 속세에 돌아오지만 그
남자는 죽고, 순녀는 또다시 방황을 계속한다. 그 후 간호사 생활을 시작하나 거기에서도
몸바쳐 구하려던 남자가 죽자 자신의 업보의 끈질김을 깨닫고 다시 산사로 돌아온다.
▲ '아제아제 바라아제' 스틸 컷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 주제 및 감상포인트
“강수연의 삭발 열연이 돋보이는 임권택 감독 불교영화의 집대성”
인간의 세속적 불안과 그것으로 부터 벗어나 불도에 귀의하는 한 여성의 삶을 그린 한승원
원작, 임권택 감독, 강수연 주연작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보이지 않는 운명에 이끌려
가는 인간의 불안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에 대한 의지를 한국적인 영상기법으로
표현,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인 작품이다.
1989년 제27회 대종상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강수연은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
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 감독 임권택
‘편스토랑’ 강수정, 어마어
마한 요리실력 ‘홍콩에서
만두 빚는 여자’..아들과
‘신상출시 편스토랑’ 강수정
이 보물 같은 아들과 홍콩
하우스를 최초 공개한다.4 월 28일 방송되는 KBS 2TV
‘팬텀싱어4’ 1‧2위 팀 제
외 모두 탈락후보行 본
1936년 전남 장성 출생. 해방전후 부친과 삼촌의 좌익활동으로 집안의 가세가 많이 기울
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던 유년시기와 학창시절을 지냈다. 한국영화가 양적 풍요로움
을 구가하던 60년대 감독으로 출발한다.
1970년대에 '왕십리'(1976),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상록수'(1978), '깃발없는 기
수'(1979)를 통해 작가적 역량을 축적하여 1980년대로 접어든다. 1980년대는 감독 스스
로 다시 제작하고 싶은 영화라고 부를 정도로 애정을 지닌 '짝코'(1980)를 연출하면서 전성
기를 열어간다.
대표작은 1981년 '만다라' '아제아제바라아제'(1989)가 있으며 1993년 한국영화 관객동
원 100만을 돌파한 기념비적인 작품인 '서편제'와 2000년 칸 영화제 경쟁부분에 초청된
'춘향뎐'등 1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98번째 작품인 '취화선'(2002)으로 제 55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올라섰다. 2011년 그의 101번
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2011)가 완성됐고, 최근작으로 김훈 원작, 안성기 주연의 '화
장'이 있다.
강수연 진영미 주연의 EBS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15일 밤 11시에 방영된다.
===
영원한 깨달음의 세계로 가자.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기자명 고성시사신문 승인 2020.06.26
( 부처님 오신 날에 ‘반야심경’ 이야기 7편 )
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모든 종교는 인간의 생존상황에서의 개별적인 이익과 행복을 최우선으로 한다.
‘사랑’이니 ‘자비’니 하는 것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상적 세계이며 개인적 욕구의 최종단계인 구원이나 성불(成佛)을 중요시하게 된다. 그것은 누가 대신해서 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모든 문제는 우리가 살아있을 때의 논의에 불과하다. 불교라는 것도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는 게 목표인데 부처님께 소원을 비는 모양새로 변질 되고 있으니 무척 당황스럽기도 하다. 기독교의 예수도 불교의 석가모니도 욕심을 버리라고 했는데, 우리는 거기다 대고 자기의 욕심대로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한 빌고 있으니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예수나 석가는 인간들의 행복과 바른 자각을 깨우치기를 바랐지만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을 신격화해서, 극락왕생한다느니 천국으로 간다느니 하는 말 같지도 않은 허황된 논리로 교인들을 세뇌시켜 엉뚱한 짓을 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반야심경을 요약정리하면 “관자재보살이 오묘한 ‘반야바라밀다’를 닦으실 때 몸과 마음의 욕망이 모두 공(空)한 것임을 비추어 보시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의 바다를 건너셨느니라. 사리자여, 물질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空)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空)이요, 공(空)이 곧 물질이니,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 또한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공(空)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空)한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이 ‘반야바라밀다(깨달음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공(空)에 대한 지혜’ 혹은 공(空)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통해 도달한 열반의 상태 즉 지혜의 완성을 의미)’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완전한 깨달음)’를 얻느니라. 잘 알아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아무것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며 허망 되지 않느니라.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 대신주, 시 대명주, 시 무상주, 시 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知 般若波羅密多, 是 大神呪, 是 大明呪, 是 無上呪, 是 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고설 반야바라밀다 주 즉설주왈,(故說 般若波羅密多 呪 卽說呪曰).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요약해서 풀이하면) 이것은 가장 큰 신비로운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다. 이보다 더 높은 주문은 없으며 이와 비교하여 견줄만한 주문도 없다. 모든 괴로움을 완전히 없애주는 진실하고 거짓 없는 주문이다. ‘이제 반야바라밀다(깨달음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공(空)에 대한 지혜’ 혹은 공(空)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통해 도달한 열반의 상태 즉 지혜의 완성을 의미)’ 주문을 말하노라. 가자, 가자 피안으로. 피안으로 아주 가자, 영원한 깨달음으로.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고지(故知:그러므로 알라.)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시 대신주(是 大神呪:크게 신묘한 주문이며), 시 대명주(是大明呪: 크게 밝은 주문이며), 시 무상주(是 無上呪 : 위없는 주문이며), 시 무등등주(是無等等呪: 비교할 대상이 전혀 없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최상, 최고의 주문)이니라. 대명(大明)할 때, 명(明)은 지혜라고 하는 뜻이에요. 경에 보면, 우리가 지혜라고 붙여 쓰지만 지혜 지(智)자와 지혜 혜(慧)자를 따로 분리해서 이야기하기도 해요. 밝을 명(明)자도 쓰고, 빛 광(光)자를 쓰기도 하고. 무상(無上)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뜻이며 ‘아뇩다라’를 번역하면, 무상(無上)이 된다. 여기에서 ‘반야바라밀다 주’(般若波羅蜜多 呪)를 찬탄하는 게 아니라,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찬탄하는 것이다. 왜 ‘반야바라밀다’를 주(呪)에 비유했을까? 이 주(呪)를 최고로 여기기 때문이다. 대신주(大神呪)라는 것으로, 크고 신비로운 주문이라는 것이다. 대명주(大明呪)로서, 크게 밝은 주문이며, ‘무상주(無上呪)’로서, 이 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최고의 경지의 주문이고, ‘무등등주(無等等呪)’라 하여, 비교될 만한 것이 없는 최상의 주문이라는 의미다. 능제일체고 진실불허(能除一切苦 眞實不虛)는 이 주문이야말로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주며, 진실하여 조금도 헛됨이 없다는 의미다. 텅 비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며, 집착할 바가 없는 반야 공(空)의 이 도리야말로 위대한 주문인 까닭에, 일체의 모든 고통과 불안,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다 소멸해 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고 본래 텅 비어 무소득이며, 무자성이고, 공(空)이요, 무아, 무분별인 본바탕에 또 다시 어떠한 허망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신세계(수상행식:受相行識)와 물질세계(색:色)가 모두 공(空)하였으니, 따로 허망할 것이 없는 것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로 본래 나고 죽음이 없으므로 생멸에 따른 온갖 괴로움도 여의었고, 불구부정(不垢不淨)으로 더럽고 깨끗한, 부귀하고 천한 등의 관념을 여의었기에 상대세계의 모든 분별을 타파할 수 있으며,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 더하거나 줄어들 것이 없으므로 ‘내 것, 네 것’ 하며 나누어 서로 많이 소유하고자 다투고 투쟁하는 이 모든 분별을 여의게 된, 더없이 맑고 밝아 허망하지 않은 진실한 주문이라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반야심경의 핵심 구절인 ‘조견오온개공(照見 五蘊皆空)도일체고액(度 一切苦厄)’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도일체고액(度 一切苦厄)’의 경지, 즉, 일체의 고통과 액난을 뛰어넘었으므로 진실하여 조금의 헛됨도 없는 경지를 다시 한 번 설함으로써 지혜의 완성을 마무리 짓고 있는 것이다. 지혜의 완성된 경지는 직접적으로 공의 이치, 반야의 이치를 설한 도리이기에 진리로서 허망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고지(故知)는 '그러므로 알아라.'는 뜻이다. ‘반야바라밀다’가 어떻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다. 시(是)는 '이것은' 이라는 말로 ‘반야바라밀다’를 가리킨다. 대(大)는 '크다'는 말인데, 대(大)와 소(小)라는 관념을 초월한 절대의 대(大)를 말한다. 신(神)은 '거룩하다',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영역이라서 측량할 수 없다'는 뜻이다. 주(呪)는 범어로 한역(漢譯)하면 주문(呪文), 이라 한다. 중국의 주(呪)와 같은 뜻으로 쓰였기에 주문(呪文)이라 한 것이며 가장 신비한 주문이라고 한 것이다. 대명주(大明呪)는 범어로 밝고 수승한 지혜라는 뜻이다. 대명(大明)은 무명(無明)을 멸하여 내외명철(內外明徹)하고 일체가 확연(廓然)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는 거울과 같은 마음자리가 지혜 광명으로 가득함을 말한다. 광명으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는 주문의 뜻이기도 하다. 무상주(無上呪)는 무엇 가운데 최상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을 초월한 절대최상이니 위없는 진언(眞言)이라는 의미에서 가장 높은 주문이라 한 것이다. 무등등주(無等等呪)는 범어로 등(等)은 평등의 뜻인데 무등등(無等等)이라 함은 같음이 없으면서도(無等) 평등(等)하다는 말이다. 이는 일체와 같으면서도 모든 것을 초월한 일체와 둘이 아님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무등 등주(無等等呪)는 비교할 데가 없는 주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라 한 것이다. 주(呪)는 진언(眞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진리 자체라는 말이다.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 주(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蜜多 呪)의 의미는 능히 일체의 고(苦)를 제거하며 진실하여 거짓되지 않으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한다.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의 의미는 능히 일체의 고(苦)를 제거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다. 반야바라밀다의 주문(呪文)은 주문 가운데 거룩하고 불가사의한 영역이라 측량할 수 없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라 하여 대신주(大神呪)요, 지혜광명으로 가득한 가장 밝은 주문이라 하여 대명주(大明呪)라 하며, 이 보다 더 수승하고 높은 것은 없다는 절대최상의 가장 높은 무상주(無上呪)이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주문인 무등등주(無等等呪)인 것이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는 최상최고(最上最高) 유일무비(唯一無比)한 주문으로 언어를 떠나 있어 언어로서는 어떠한 설명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주문인 것이다. 주의할 점은 ‘반야바라밀다’를 중요시 한 것이지 ‘반야바라밀다 주’를 중요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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