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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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열반 | |
법호 | 정산(鼎山) |
종법사 재임 | |
1. 개요[편집]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
정산종사 게송
2. 일생[편집]
"송 규는 보통 사람의 지량(知量)으로 능히 측량할 인물이 아니다. 내가 송 규 형제를 만난 후로 그들로 인하여 크게 걱정하여 본 일이 없었고, 무슨 일이나 내가 시켜서 아니한 일과 두 번 시켜 본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이 되고 그들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되었다" - 소태산 대종사, 대종경 신성품 18장 |
" 내가 이 세상에서 본 한국인의 얼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익산 원불교 총부에서 본 송정산 선생의 얼굴이었다.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사람의 얼굴이 얼마나 닦고 닦았으면 지혜와 자비로움이 넘치는 그런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에 감동했다" - 숭실대 고 안병욱 교수 (동아일보 기고, '가장 아름다운 얼굴' 에서) |
1900년 8월 4일 경상북도 성주군 유곡면 구성리(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박실마을)에서 아버지 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와 어머니 연안 이씨 준타원 이운외(準陀圓 李雲外)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 송도군(宋道君). 8세부터 족손(族孫) 송준필의 문하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인류를 구제하는 인물이 되겠다는 뜻을 품고 스승을 찾아다녔는데, 마땅한 인연을 찾지 못하고 전라도까지 건너오게 되었다.[7]
1917년에 정읍 화해리에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를 처음으로 만났고, 이듬해 대종사가 있는 영광으로 찾아가 사제의 연을 맺었다. 당시 제자들 중 나이는 가장 어렸으나 수제자로 인정받았으며 대종사는 송규를 "우리 회상의 법모(法母)"라고 칭찬했다.
이후 대종사를 보필하여 원불교의 교리를 제정하고 기반을 닦는 데 공헌을 하였으며, 1943년 대종사 열반 후 뒤를 이어 2대 종법사가 되었다.
일제 말기 어려운 시국에서 원불교를 지켜내었으며[8], 해방 후 '원불교' 교명을 확정하였다.[9] 해방 직후 혼란한 사회에서 전재동포 구호사업을 펼쳤고, 6.25 전쟁 등 험난한 시기를 이끌었다. 1961년 4월에 삼동윤리를 발표한 뒤 이듬해 열반했다.
정산종사의 법문을 수록한 정산종사 법어는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집인 대종경과 더불어 원불교 교서로 쓰인다.
그 외 시자 박정훈이 기록한 법문집 <한울안 한이치에>, <원각가>, <불법연구회 창건사>, <건국론>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정산종사 종법사 추대식
3. 삼동윤리[편집]
- 동원도리: 세계 모든 종교가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근본적 진리는 모두 같다는 의미
- 동기연계: 모든 인류와 생령들이 이름은 다르지만 한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라는 의미.
- 동척사업: 각종 사업과 주장이 서로 다르고 모순되어 보이지만 궁극적 목적은 더 좋은 세상의 개척으로 동일하다는 의미.
정산종사의 대표 사상으로, 이렇게 모두가 하나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화합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 동기연계: 모든 인류와 생령들이 이름은 다르지만 한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라는 의미.
- 동척사업: 각종 사업과 주장이 서로 다르고 모순되어 보이지만 궁극적 목적은 더 좋은 세상의 개척으로 동일하다는 의미.
정산종사의 대표 사상으로, 이렇게 모두가 하나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화합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4. 여담[편집]
- 대종사 사후 원불교 교명을 확정하고 대종사의 언행을 모은 '대종경'을 발행함을 비롯하여, 원불교 기도식에 쓰이는 '영주'를 짓는 등, 현재 원불교의 기본 틀은 정산종사 시기에 대부분 갖추었다.
[1] #[2] 충숙공파(고산리)-단구공파 30세 홍(鴻) 항렬.[3] 본명 송인기(宋寅驥). 자는 치원(致遠), 법호는 구산(久山)이다. 1876년 경상도 성주목 유곡방 고산리(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서 아버지 송성흠(宋成欽, 족보명 송성흠宋性欽, 법명 송훈동)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인엽(李仁燁)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나 박중빈의 권유로 1919년 10월 20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현 백수읍) 길용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이후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로 이주하여 살면서 불법연구회 진안군지부 교무 겸 전도를 역임하다가 1939년 한반도 남부 지방에 큰 가뭄이 들자, 그해 7월 14일 '조선에서 재해가 빈발함은 요임금과 탕왕의 시대에도 없던 일로 천황은 은사를 베풀고 천지신명께 기원하라'는 취지의 편지를 쇼와 천황에 보냈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40년 3월 13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불경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바 있다.#[4] 연안 이씨 이병균(李炳均)의 딸이다.[5] 누나가 전주 이씨 정석군(貞石君) 이융생(李隆生)의 후손인 이해철(李海哲)과 혼인했는데, 슬하 셋째 딸이 박동묘와 혼인하였다.[6] 대부분의 신흥종교가 창시자 사후에 분열되거나 멸망했음을 생각하면, 역사적으로도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그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7] 이 과정에서 증산 계통의 종교 중 하나인 보천교의 교조 차경석을 만나기도 했으나, 올바른 도인이 아니라 판단하고 떠났다. 또한 강일순의 외동딸 강순임을 만나 정심요결(正心要訣)이라는 도교의 내단수련서를 전해 받았다고도 한다. 강순임은 훗날 남편과 함께 증산법종교를 창시하였다.[8] 대종사 열반 당시 일제에서는 "불법연구회(원불교)는 이제 끝" 이라 생각했다. 당시 대부분의 신흥종교가 창시자 사망 후 망하거나 제자들의 갈등으로 분열되는 양상을 생각하면 당연한 판단이었다. 정산 종사 취임 후 대종사 열반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운영되는 불법연구회의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9] 대종사 당시의 공식 명칭은 '불법연구회'였다.[10] 유학자 집안 출신인 정산 종사와 달리, 대종사는 어릴 때 서당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글에 밝지 못했다.[11] 소태산 대종사의 사위이자 정산종사의 동생으로, 대종사의 법문을 기록하여 남기는 등 원불교 초창기 기틀을 다지는 데 공헌을 많이 하였다. 해방후 전재동포 구호사업의 총책임자였는데 이때 병을 얻어 40세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