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5

디지털 시대의 선정성과 폭력성 / 허우성 < 디지털문명과 불교 < 불교평론

디지털 시대의 선정성과 폭력성 / 허우성 < 디지털문명과 불교 < 특집 < 기사본문 - 불교평론

디지털 시대의 선정성과 폭력성 / 허우성
기자명 허우성   입력 2012.09.06

특집 | 디지털 문명 시대와 불교 : 붉은 세상을 파랗게 만들 수 있을까?

허우성
경희대 교수


서론
고타마 붓다의 출현 이후 2천여 년이 흘러서 21세기가 되었지만, 중생은 삼독과 십악을 줄이는 일에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시장경제가 과학과 기술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디지털 시대, 정보의 시대, 또는 컴퓨터 시대는 도래했다. 이 시대의 특성은 전에는 불가능했거나 어려웠던 정보에 즉각 접근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컴퓨터의 소형화, 개인용 컴퓨터의 출현, 생활 전 분야에 걸친 신속한 기술의 진보, 그리고 범지구적 통신과 네트워킹과 함께 정보의 시대 곧 정보사회는 왔다.

정보사회는 경제활동에서 이윤의 창출이나 증대 수단으로서의 지식과 정보를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이다. 정보화에 대해 가장 빨리 반응하는 행위자 집단에는 이윤 창출을 노리는 기업과 정보를 게걸스럽게 받아먹는 일반 사용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정보사회는 정보의 생산, 소비, 유통, 광고, 시장 등의 개념들이 서로 얽혀 있는 사회이다. 그 사회는 범지구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자본주의 문명의 일부, 곧 풍요, 성장, 소비와 경쟁을 앞세우고 상당한 정도의 폭력성까지 안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의 일부이다.

이 글은 5장으로 구성된다. 1장에서는 2천 년 전 중생이 가진 삼독과 십악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들을 없애면 바로 열반에 이른다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제시하며, 2장에서는 현대 한국의 폭력적 상황이 2천 년 전에 비해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추정하고, 3장에서 초기불교의 경전이 말하는 폭력의 원인들을 논의하고, 4장에서 디지털 시대는 감각적 쾌락 최다라는 사실을, 그리고 넷의 사용으로 우리가 잃은 것이 무언가를 검토한 다음, 이 시대의 특성을 붉은색과 검은색을 이용하여 상징적으로 표시해 본다. 5장에서는 현대 소비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비판을 소개하고 이를 불교와 관련지어서 논의한다.

디지털 사회에 대한 필자의 진단과 전망은 어둡다. 폭력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는 감각적 쾌락(까마)을 즐길 개인적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길이 없다면, 쾌락의 향유에서 오는 일탈 행위를 법으로 다스리면서, 소비사회가 가져오는 폭력은 상당 부분 견뎌 나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불교적인 대안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교육일 것이다.  

 1. 2천 년 전 중생의 삼독과 십악

초기불교의 경전은 탐욕(rāga), 욕망(lobha, chanda), 증오(dosa)와 미망(moha)과 같은, 나쁜 행위의 뿌리(akusalamūla)들을 지적하면서, 이것들이 서로 엉켜 있는 것으로 다룬다. 탐욕을 채우는 데 실패하면 쉽게 분노나 증오심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증오와 분노, 폭력이 온 세상에 퍼져 있는데도 한국의 출가자들을 포함하여 불교학자들은 이런 사회 현상을 종종 무시해왔다. 초기불교의 《법구경(Dham-mapada)》 〈분노품(kodha-vaggo)〉에서 다음 한 구절을 살펴보자. 

탐욕(rāga, 婬)만 한 불길은 없고, 증오(dosa)만 한 포수(捕手)도 없고 무지(moha)에 비할 그물도 없고, 갈애(taṇhā) 같은 격류도 없다.(Dhp.251)
 
이 시구에 나오는 ‘라가’는 보통 탐욕, 욕정, 흥분, 열정의 뜻이면서 동시에 색깔, 색조, 색칠하기, 염색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한역 《법구경》은 이를 음(婬)으로 옮겨서 특히 욕정의 부분을 부각시키고 있다. ‘라가’ 즉 음란을 상징하는 색이 있다면 붉음일 것이다.

《법구경》에 〈몽둥이품(daṇḍa-vaggo)〉이 있는데, 이 품은 초기불교 내에서 폭력이 갖는 중심적인 위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 한 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은 몽둥이를 두려워한다. 생명은 모든 이에게 귀중하다.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생각하여, 남을 죽이지도 말고 남에게 누군가를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Dhp.130) 

이 시구는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모든 사람은 폭력을 두려워한다는 점이고, 둘째 생명(jīvita)은 모든 존재에게 귀중하므로, 타인을 자신으로 여겨서 죽여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을 부추겨 누군가를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고 권유한다.

삼독과 떨어질 수 없는 십악(十惡)은 장아함의 《소연경(小緣經)》에 나온다. 이 경에 따르면, 선을 수행하지 않는 중생(衆生, puthujjana)은 흔히 열 가지 악행[akusala]을 범한다. 그것들은 살생, 훔치기[盜竊], 음란(淫亂, kāmesu micchā-cāri), 거짓말[欺妄], 이간질[兩舌], 욕설[惡口], 꾸민 말[綺語], 인색과 탐욕[慳貪], 질투(嫉妬, vyāpanna-citta), 사견(邪見)이다. 십악에는 물리적 폭력, 언어폭력, 음란 행위, 부정적 감정, 잘못된 견해 등이 들어있다. 카스트를 이루는 모든 중생은 각자 자신들의 행위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 ‘질투’를 의미하는 빨리어 ‘브야빤나 칫따’가 진에심(瞋恚心)으로도 한역된 것을 보면, 질투 안에는 이미 분노와 증오가 있어서 그것은 언제든 폭력으로 변할 수 있다. 《소연경》의 입장에서 보면 십악의 치유 방법으로서 왕을 세워서 왕으로 하여금 분노, 처벌, 추방을 통해서 중생을 다스리게 하는 것보다, 열반으로 안내하는 지계와 선정 수행이 보다 근본적인 대책일 것이다.

《법구경》 134는 “열반(nibbāna)을 얻게 되면 어떤 적대감(sārambha)도 네 속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므로 적대감을 극복하는 최선의 길은 초기불교의 최고선인 열반을 이루는 것이다. 금생에 아라한이 성취한 열반계(nibbānadhātu)를 “탐욕의 지멸(rāgakkhaya), 증오와 미망의 지멸”이라고 설명한 곳도 있다.

그런데 열반을 이루기 위해서는 승가라는 공동체로 출가하여, 계(戒), 정(禪定, jhāna, samādhi), 혜(paññā)의 삼학을 닦아야 한다. 붓다는 공동체의 유지에 계율이 필수라고 보았는데, 이 계율의 주요 목표의 하나는 감각적 쾌락을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심신 안에서 작동하는 모든 인과 연쇄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기능이 바로 반야 지혜이다.

2. 현대 한국의 폭력적 상황

한국 시민은 2천여 년 전 인도의 중생과 비슷하게 삼독이 있고 십악 중 하나 이상에 쉽게 빠지므로, 시민의 대다수는 중생이다. 이들 ‘시민 중생’은 도덕적으로 진보하기는커녕 고대 인도의 중생보다 더 사나워 보인다. 그리고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뒤 1천 수백 년이 지났건만 우리 민족에게서 분노의 기질이나 폭력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의 텔레비전과 신문은 폭행, 강간, 살인, 자살 관련 뉴스와 더불어 욕설과 막말을 연이어 보도하고 있다. 2012년 3월 15일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범죄 발생건수는 2000년 이후 정체 상태를 보이고 있지만, 2010년 발생한 형사범죄(재산범죄, 강력범죄, 위조범죄, 공무원범죄, 풍속범죄 등)는 45만여 건으로 지난 2000년보다 58%, 20년 전인 1990년과 비교하면 무려 248% 급증했다. 형사범죄 중 강력범죄로 분류되는 살인은 2000년 964건에서 2010년 1,262건, 강간은 2000년 6,982건에서 2010년 19,939건으로 10년 만에 2배 이상 늘어났다. 폭행상해는 2000년 49,838건에서 2010년 180,365건으로 증가하여 10년 전보다 360% 이상 폭증했다(〈헤럴드경제〉 2012. 3. 15). 영국 경찰이 2009~2010년 10만 명당 강력범죄 발생률을 국가별로 분석한 자료에서 우리나라는 OECD 34국 중 살인은 6위, 강간은 11위로 나타났다.

 반면 일본은 살인 33위, 강간은 34위로 안전한 편에 속했다고 한다. 살인은 멕시코가 월등하게 1위였고, 미국은 3위였다(〈중앙일보〉 2012. 6. 1).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31.2명으로 세계 1위이다. 타인에 대한 공격과 자신에 대한 공격이 좀 다르지만 양자가 흔히 공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고의 자살률은 강력범죄의 증가와 함께 우리 사회에 폭력이 널리 펴져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이다. 위증과 무고(誣告)가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수백 배 많다는 통계 앞에 대한민국은 ‘거짓말 공화국’이 되었다.

한국인의 형사범죄는 대개 십악의 하나이거나 그 변형이다. 십악의 하나인 절도는 재산범죄로 되고, 살생은 살인으로 되고, 거짓말은 심하면 사기죄로 변하며, 이간질과 욕설은 명예훼손죄나 모욕죄가 될 수 있고, 음란 행위는 강간을 낳는다. 강력범죄인 살인, 강간, 폭행상해는 쾌락을 제공하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탐욕이나 공격과 깊이 관련된 경우가 많다.

3. 초기불교의 경전이 말하는 폭력의 원인:     감각적 쾌락, 느낌, 분별

고대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군주제는 그때, 그곳에도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구조적 폭력’은 평화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평화연구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온 요한 갈퉁(Johan Galtung, 1930~  )이 주로 유통시킨 개념인데, 그는 “구조적 폭력의 부재는 우리가 사회 정의로 불렀던 것이고, 사회 정의를 긍정적으로 정의하면 ‘권력과 자원의 공평한 분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초기불교도들은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 정의가 아니라, 주로 개인적, 의도적, 물리적 폭력에 주목했다. 다만 그들은 출가와 새로운 공동체 설립을 통하여 나름대로 구조적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필자가 이 글에서 주목하는 폭력의 원인은 감각적 쾌락(까마, kāma)이다. 까마는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을 종종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고, 우리 시대는 까마가 아주 널리 확산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 《중부경전》에 나오는 《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큰 경》에서 붓다는 감각적 쾌락에서 온갖 종류의 폭력 행위가 일어난다고 하고 욕망과 탐욕을 버릴 것을 가르친다.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을 원인(hetu)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을 조건(nidāna)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을 바탕(karaṇaṃ)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을 원인으로 하여 왕들은 왕들과 싸우고(vivadanti), 귀족들은 귀족들과 다투고, 브라만은 브라만과 싸우고, 주인은 주인과 싸우고, 어머니는 아들과 싸우고, 아버지가 아들과 싸우고…… 친구는 친구와 싸운다.
그때에 그들은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고, 서로 주먹으로, 흙덩이로, 몽둥이로, 칼로 싸운다. 그리하여 죽음에 이르거나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맛본다. ……감각적 쾌락을 원인으로 하여 ……사람들은 칼과 방패를 들고, 활과 화살통을 몸에 차고, 화살이 쏟아지고, 창이 날아다니고, 큰칼이 번쩍이는 가운데 양쪽으로 진을 치고 있는 전장으로 돌진한다. ……또한 감각적 쾌락을 원인으로 하여 ……사람들은 가택을 침입하고, 약탈하고, 도둑질하고, 매복했다 습격하고, 남의 부인을 폭행한다. 그러면 왕들은 그들을 붙잡아 여러 가지 형벌을 가한다. ……감각적 쾌락을 원인으로 하여, 몸(kāya)으로, 말(vācā)로, 마음(manas)으로 악행(duccaritaṃ)을 범한다.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제거함(chandarāgavinaya)이고, 그 욕망과 탐욕의 버림(chandarāgappahānaṃ)이다.  

이 인용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 때문에 중생의 세계에서 만인은 만인과 싸우고, 갖가지 폭력을 낳는다. 폭력에는 전쟁, 살인, 가택 침입, 약탈, 도둑질, 매복 공격, 남의 부인 폭행하기 등이 포함되고, 폭력의 도구는 수없이 많다. 주먹, 흙덩이, 몽둥이, 칼, 화살, 창 등이 그것들이다. 이에 왕들은 폭력 행위자를 붙잡아 처벌한다.

우리는 감각적 쾌락을 향유할 때마다 폭력을 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론을 펼 수 있다. 하지만 다음 인용문이 말하는 대로 감각적 쾌락은 느낌(受, 또는 감정)에서 오고, 사람이 느끼기 위해서는 접촉할 사물이나 사람을 반드시 소유해야 하고, 그 소유를 위해서 경쟁이 필수적이라면, 쾌락에서 폭력이 발생한다는 주장도 충분히 이해된다.

 2) 아래 대화는 붓다와 아난다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느낌에서 출발하여 온갖 종류의 악행으로까지 나아가는 인과적 연쇄(連鎖)를 설명하고 있다.

아난다여, 이처럼 느낌(vedana)을 조건으로 갈애(taṇhā)가,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pariyesanā)가, 추구를 조건으로 획득(lābha)이, 획득을 조건으로 판별(vinicchaya)이, 판별을 조건으로 욕망(욕탐, chanda-rāga)이, 욕망을 조건으로 탐착(ajjhosāna)이, 탐착을 조건으로 소유(pariggaha)가, 소유를 조건으로 인색(macchariya)이, 인색을 조건으로 수호(ārakkha)가, 수호를 조건으로 하여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분쟁하고 상호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pāpakā akusalā dhammā)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수호가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나는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이 대화에 나오는 인과 연쇄는 느낌에서 출발한 중생이 몽둥이질로 나가는 순서를 보여준다. 먼저 느낌에서 갈애로, 갈애에서 추구로 나가고, 획득, 판별, 욕망, 탐착, 소유, 인색, 수호를 거쳐서 마침내 무기를 드는 데까지 나간다. 그런데 12연기설에 따르면 느낌은 대상과의 접촉에서 일어난다. ‘좋다[快]’는 느낌이 생기면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나 물건을 갖고 싶어 한다. 그리고 소유하고 수호하는 일은 흔히 폭력이 동원된다. 그래서 소유, 소비, 풍요와 경쟁을 기본 원리로 삼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폭력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다.

 3) 다음 인용은 개념이나 판단을 수반하는 사량분별과 생각 안에 이미 폭력의 씨앗이 있다고 밝히고 있어서, 말을 해야 하는 인간에게 폭력은 거의 숙명적임을 논한다. 〈삭까(인드라)의 질문〉(《帝釋問經》)에서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께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존자시여, 신들과 인간들과 아수라들과…… 그 외의 모든 무리들은 비록 ‘증오하지 않고 몽둥이를 들지 않고 적을 만들지 않고 적대감 없이 평화롭게 살리라’고 하지만(averā adaṇḍā asapattā abyāpajjā viharemu averino’ti) 무엇에 속박되어 증오하고 몽둥이를 들고 적을 만들고 적대감을 품고 원망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증오나 폭력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묻는 질문에 대해, 경전은 증오심과 폭력(몽둥이질)을 낳는 최초의 원인으로 사량분별(思量分別, papañca)을 지적하고, 사량분별에서 증오심과 폭력에 도달하기까지 몇 단계를 더 설정한다. 사량분별에서 생각(vitakka)이 나오며, 생각에서 의욕(chanda)이, 의욕에서 호오(piya-appiya)가 나오며, 호오에서 질투와 인색(issā-macchariya)이 나온다. 질투와 인색은 증오, 적대감과 폭력 행위에 가장 가깝고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질투로 번역된 ‘issā’는 질투 이외에, 선망, 악의, 분노로도 번역되고, 질투가 종종 분노를 낳는다는 것은 앞에서도 보았다.

그런데 많은 경우 사량분별 역시 대상과의 접촉에서 시작된다. 사량분별을 설명할 때 흔히 인용되는 아래 구절이 그것을 말해준다.

시각과 색(色)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眼識]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사량분별한다.
 
이 구절에 따르면, 시각, 색(대상), 안식, 셋이 있어서 접촉이 되고, 느낌, 지각, 생각, 그리고 사량분별이 순서대로 생긴다. 보통 접촉이나 느낌까지는 언어 이전의 단계이고 지각에서부터 이미 언어가 동원된 상태로 보인다. 이 경전이 사량분별에서 몽동이질을 하는 단계까지 설정한 것을 보면, 불교는 언어 사용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아주 민감했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없다면 세속 생활도 출가수행도 불가능하지만, 붓다는 언어 행위는 정기적인 명상에 의해서 순화되어야 한다고 믿었을 터이다.

색성향미촉법: 감각적 쾌락(kāma)의 대상

폭력에 이르는 세 가지 경로 중에서, 첫 번째는 감각적 쾌락을 폭력의 핵심 원인으로 꼽았고, 두 번째는 느낌이 온갖 악행의 출발점이었다. 세 번째는 말하기를 수반하게 되는 사량분별에서 시작하여 증오심과 폭력에 이르게 됨을 보여주었다. 세 경로 모두 시청각 자극이 전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초기불교의 경전에는 자극을 낳는 여섯 감각 대상들이 가진 위험에 대한 경고가 곳곳에 나온다. 예를 들면, 《상응부경전》의 〈육처품(Saḷāyatana-vagga)〉에서 붓다는 여섯 감각 대상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기분 좋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까마와 연결된(kāmūpasaṃhita)’, 애타게 하는 형상들[色], 시각에 의해 알려지는 형상들이 있는데,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탐착하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악마의 소굴에 들어가 악마의 지배를 받는 자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귀에 의해 알려지는 냄새가 있는데 ……코로 의해 알려지는 맛들이 있는데 ……혀에 의해 알려지는 맛들이 있는데 ……신체에 의해 알려지는 감촉들이 있는데 ……마음에 의해 알려지는 법들이 있는데……] 만일 ……시각에 의해 알려지는 형상들이 있는데,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으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악마의 소굴에 들어가지 않고 악마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라고 불린다.

우리는 모양(色), 소리(聲), 향기(香), 맛(味), 촉각 대상(觸), 법(法)으로 된 육처 또는 육진(六塵)들로 둘러싸여 살아간다. 이것들은 각각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육근의 대상이다. 중생에게 육처는 “기분 좋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까마와 연결된’, 애타게 하는” 대상이다. 육처는 우리를 유혹하고 악마의 노예로 만들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욕망, 경쟁, 획득과 수호가 폭력으로 나간다는 통찰은 반드시 불교만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고, 홉스, 프로이트, 콘라드 로렌츠 등의 서양학자들에게도 충분히 보인다.

4. 감각적 쾌락 최다의 디지털 시대:     깊은 생각, 공감, 동정심의 상실

디지털 시대 즉 정보사회는 인류 역사상 색성향미촉이라는 감각적 쾌락 대상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시대로 보인다. 그 결과 우리는 아주 산만하게 되었고, 문화는 선정적이고 외설적으로 변했다. 이런 시대의 단초는 20세기 중반에 미디어 혁명이 열었고, 인터넷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의 《천박한 자들(The Shallows)》에 따르면, 이와 같이 산만한 시대는 중세 이래 지난 550년 동안 우리의 지적 생활의 중심을 차지해 온 책조차 이제 변두리로 내몰고 있다.

이 변화는 20세기 중반 라디오, 영화, 오디오, 텔레비전 등 초기 전기전자 미디어가 제공하는 오락물에 우리의 시간과 주의를 빼앗기면서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미디어 혁명은 데스크톱, 노트북, 휴대용 기기 등 컴퓨터가 우리의 지속적인 동반자가 되고, 인터넷이 글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고 공유하는 수단이 되면서 그 정점에 도달하고 있다. 카는 말한다. “넷은 텔레비전, 라디오, 조간신문보다 훨씬 강력하게 우리의 주의를 지배한다.”라고.

카의 이러한 분석이 옳다면, 넷의 반복적 사용은 폭력의 확산에도 기여하는 것 같다. 그것에 따르면, 웹에 등장하는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다 보니, 사람들은 시각적인 초점을 바꾸는 속도가 빨라지고, 주의력이나 집중력이 감소하고, 건너뛰며 읽는 습관이 배양되었다. 결과적으로 “훑어보고, 건너뛰고, 멀티태스킹을 하는 데 사용되는 신경 회로는 확장되고 강해지는 반면, 깊고 지속적인 집중력을 가지고 읽고 깊이 사고하는 데 사용되는 신경 회로는 약화되거나 사라지고 있다”고 카는 추측하고 있다.

인터넷과 SNS 매체에 대해 사용자들은 습관적으로 신속하게 반응하면서, 고요하고 주의력 깊은 마음을 상실하고, 사람됨과 인간성을 서서히 침식당하고, 깊은 생각, 공감과 동정심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카는 이와 같은 고차적인 감정이 ‘본질적으로 느린’ 신경 처리 과정에서 생겨난다는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의 설명에 깊이 공감한다. 사람의 뇌는 물리적인 고통에 대해서는 빨리 반응하지만, 상대방의 심리적이며 도덕적 상황을 이해하고 느끼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카는 여기에서 “인터넷이 우리의 도덕감을 훼손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성급”하다고 하면서도 넷이 성찰의 힘을 감소시킨다는 점은 시인했다. 넷의 반복적인 사용으로 깊은 생각이나 성찰의 힘, 공감과 동정심이 줄어든다면, 언어폭력이나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개연성은 높아질 것이다. 한국의 시민 중생이 보여주는 세계적 수준의 악성 댓글은 세계 최고 수준의 IT 산업, 세계 제1위의 가구 인터넷 보급률(96.8%, 2010년)과도 분명히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봐서 카의 우려는 미국보다 한국에 훨씬 더 잘 맞는 것 같다.

검붉은 세계

‘까마와 연결된’ 행위 중에 가장 위험한 행위는 무엇일까? 색과 소리 등의 자극에 대해 우리의 반응이 가장 뜨거운 행위, 곧 뇌의 수많은 뉴런(신경세포)에 불꽃이 가장 많이 이는 성행위일 것이다. 그래서 초기 율장의 하나인 《십송률》에서는 성행위를 “결박근본부정악업(結縛根本不淨惡業)”이라고 불렀다. 사람을 결박하고 더럽게 만드는 행위 중에 성행위가 근본이라는 뜻이다. 

열반은 쾌락이나 증오심에 의해서 뉴런이 흥분되는 것이 최소화된 상태이고, 오관에 자극이 전혀 없는 ‘맑은 의식’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데서 성취된다고 해보자. 열반을 가져다주는 명상의 관점에서 보면, 명상에 비교적 가까운 것이 경청이나 독서이고, 그다음이 말하기, 그보다 더 먼 것이 인터넷에 몰입하는 것, 가장 먼 것은 성행위일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누리꾼들이 시청각 이미지를 즐겨 받아먹고, 흥분하고 취하여 뉴런에 불꽃이 많이 일면 일수록, 이는 욕정을 자극하는 선정적(煽情的)인 것이 되면서 성적 쾌락을 닮아간다. 말하기는 독서보다 사람의 공격성을 더 쉽게 자극하는 것 같다. 그래서 크게 신장된 언론 자유와 인터넷 사용의 증가는 거짓말 유포, 욕설과 막말의 확산과 관계가 깊다. 열반을 성취한 사람은 반드시 평화적인 인격일 것이다. 성관계의 색이 새빨간 색이라면, 명상 상태는 붉음이 최소화된 상태일 것이다.

앞에서 탐욕이나 음란(라가나 까마)에 색이 있다면 붉을 것이라고 했다.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지극히 역동적인 한국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은 붉음이 아닐까 싶다. 프랑스 역사학자이면서 서양의 상징 전문가인 미셸 파스투로(Michel Pastoureau, 1947~ )는 색의 상징성과 사회적 의미를 다룬 책에서 맨 먼저 빨강의 상징적인 의미를 논하고 있다. 그는 빨강이 거의 언제나 피와 불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기독교 문화에서 피의 빨강은 생명을 부여하고, 더러움을 정화시키며, 영혼을 성스럽게 한다고 한다. 반대로 나쁜 피의 빨강은 불순, 폭력, 죄의 상징이고, 분노, 더러움, 죽음의 상징이다. 적어도 서양에서 빨강에는 성령의 빨강과 같이 태양처럼 휘황찬란함, 따뜻함, 비춤을 나타나는 것도 있고, 그 반대로 악마의 빨강, 즉 불태우고 상처 주고 파괴하는 지옥의 불꽃 같은 빨강도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성(聖)과 생명의 빨강이 아니라 대립과 분노, 폭력, 죽음의 빨강을 생각해보자.

대립과 폭력을 상징하는 붉음은 동지와 적을 선명하게 나누는 ‘정치색’이다. 애국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 조각 붉은 마음’이 가진 분열의 열정은 우리 편이나 우리 민족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다른 민족에게는 배타성과 편협성을 보이면서 본질적으로 공격적이다. 수많은 나라의 국기에 붉음이 들어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국민, 국가는 국민이나 민족의 붉은 피와 열정을 먹고 산다. 열정이 너무 뜨거우면 우리는 이기고 싶은 적의 정체, 책략, 계산법도 파악하지 못한다. 2012년 총선 때 새누리당은 빨간색, 민주통합당은 노란색, 통합진보당은 보라색을 상징색으로 각각 선택했지만, 색깔과 관계없이 분열, 대립, 열정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까마의 붉은색을 닮아 있다.

이러한 붉음과 상반되는 색이 있다면 파랑일 것이다. 파스투로의 설명에 따르면, 파랑은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색이고 우주, 하늘, 대기의 색이다. 성모 마리아의 색, 공격성이 없는 애정의 색이고 평화의 색이며, 따라서 대규모 국제조직을 상징하는 깃발의 색이다. 그런데 열반의 색은 무슨 색일까? 무색일까, 아니면 파랑이나 회색이나 흰색에 가까울까? ‘색즉시공’은 붉음에서 파랑과 같은 색으로 가자는 주문으로 볼 수 있다.

5. 현대 소비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비판

디지털 시대는 현대 소비사회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소비사회를 지극히 비관적으로 보는 사상가로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가 있다. 그에 따르면, 소비주의가 만연하고 잘 보호받고 있는 현대사회에는, 인간의 주체라고 할 만한 것은 사라지고 사물과 같은 것만 남게 되고, 폭력은 널리 퍼져 있다.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 그 신화와 구조》의 마지막 장을 〈풍요 사회의 아노미〉로 명명하고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소비사회, 그것은 배려의 사회인 동시에 억압의 사회이며, 평화로운 사회인 동시에 폭력사회이다.” 그에 따르면, 이 폭력은 풍요와 나란히 가고,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함께 분석해야 한다. 풍요와 연결된 폭력은 ‘목표도 없고 대상도 없는데(sans fin et sans objet)’ 스톡홀름의 청년 집단 사건, 몬트리올의 폭동, 로스앤젤레스의 집단살인 사건 등을 그 사례로 제시한다. 그는 풍요와 성장 자체가 이미 강제와 억압을 낳는다고 본다.

만일 풍요(성장)가 강제라면 이 폭력도 저절로 이해될 수 있으며 풍요의 논리적 귀결로 간주할 수도 있다. 이 폭력이 거칠고, 대상이 없고, 무형식인데, 그 이유는 그 폭력이 도전하는 강제들 자체가 무형식이고, 무의식적이고, 막연하기 때문이다. 그 강제들은 ‘자유’라는 강제, 관리된 행복을 획득하도록 하는 강제, 풍요라는 전체주의적 윤리의 강제이다.

이와 같이 풍요라는 강제가 모든 유형의 폭력을 낳고, 아노말리, 우울 상태, 또는 도피 등의 간접적인 증상도 낳는다. 보드리야르는 풍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풍요 사회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폭력은 “빈곤, 궁핍화, 착취에서 생겨나는 폭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는데, “이 폭력은 필요(besoin)가 가진 철저한 긍정성에 의해서 생략되고 은폐되고 검열당한 욕망(désir)의 부정성이 행위로 표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긍정밖에 없는 필요는 욕망의 부정성을 생략하고 은폐하고 검열하지만, 이 부정성은 어느 순간 행위로 나타나서 폭력이 되고 만다. 이 폭력은 “생산성과 소비성이라는 지상명령을 거부하는 파괴성(죽음의 충동)이 드러난 것”이고, 이를 떠맡을 관료기구는 없다. 삼독이라는 불교 술어를 빌리면, 우리 사회에 널리 펴져 있는 필요, 생산, 소비, 풍요에 대한 욕망[貪]은, 지상명령이나 강제가 되어서 폭력[瞋]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눈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아노미 현상 이외에도 미국에 나타난 LSD 환각제, 플라워 파워(히피족), 선(禪), 팝 뮤직 등이 이런 풍요와 안정, 이윤 추구를 목표로 하는 사회의 거부로 비쳤다. 하지만 이것들은 현대 사회 질서 전체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의 변모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는 소비사회의 진정한 대안에 대해 상당히 비관적이었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소비사회의 풍요는 우리 사회에 아래와 같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아래 인용에서 ‘사물’이라는 개념이 특히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사물(또는 객체, objects), 서비스 및 물적 재화의 증가에 의해 이루어진 소비와 풍요라는 놀랍도록 선명한 사실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인류의 생태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풍요 시대의 인간들은 지금까지의 어떤 시대와도 달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인간들의 일상적인 교류는 더 이상 동료 인간들과의 교류가 아니라, 통계상으로는 증가곡선을 그리면서 재화 및 메시지의 수용과 조작과의 교류가 되고 있다.

사람을 둘러싸고 있다는 이 ‘사물’은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기분 좋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쾌락과 연결된, 애타게 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다.

보드리야르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 소비사회를 더욱 철저히 비판하면서, 소비 위주의 포스터모던 사회를 사물(또는 객체) 패권(supre-macy of objects)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는 〈사물의 패권〉이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우리는 항상 주체(subjects)의 영광과 객체(또는 사물 objects)의 빈곤에 의지해서 살아왔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주체이고,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것도 주체이다. 개인적 주체 또는 집단적 주체, 의식의 주체, 무의식의 주체, 그리고 모든 형이상학의 이상은 세계 주체의 이상이다. 주체성으로 가는 왕도에서 객체는 오로지 우회 도로에 불과하다. ……욕망에 대한 우리의 철학에서는, 주체는 절대적 특권을 보유한다. 욕망하는 것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유혹을 생각하게 되면, 만사가 역전된다. 욕망하는 것이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유혹하는 것이 객체이다. 만물이 유혹에서 시작하므로, 만물은 객체에서 와서 객체로 돌아간다. 주체의 태곳적부터의 특권은 전복되었다.
 
디지털 시대는 ‘사물의 패권’ 시대이고, 사물이라고 부르든 객체라고 부르든 쾌락의 대상이 강력하게 횡행하는 시대이다. ‘사물 패권’의 시대에 주체는 “세계를 일관성 있게 표상할 수 없고” “오늘날 어느 누구도 세력, 지식, 역사의 주체로 간주될 수 없다.” “가능한 유일한 입장은 사물의 입장이고, 유일한 책략은 사물의 전략”인 국면에 도달했다고 한다.

불교의 무아설은 욕망의 주체나 쾌락의 향유자로서의 주체를 부인한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사물 패권론은 사물의 유혹 앞에 지식의 주체나 역사의 주체 같은 것을 부정하고, 동시에 세계를 표상하고 역사를 선도하는 행위자로서의 주체를 내세우는 모든 형이상학을 버렸다. 이제 포스트모던의 극치에 이른 것이다.

 결론: 세상을 파랗게 만들 수 있을까?
 
붓다는 중생의 일상생활에 폭력이 있음을 인지하고, 그 주요 원인으로 감각적 쾌락, 느낌, 사량분별을 지목했고, 삼독의 불을 줄이거나 끄기 위해 계율과 명상을 처방했으며, 그 최종적인 수행 목표로 열반을 제시했다. 오늘날 인도 당시보다 쾌락의 대상은 무한정 늘어났다. 쾌락과 폭력이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초기불교의 통찰은 우리 사회의 범죄와 자살의 증가, 심각한 학교폭력을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우리 사회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적 소비사회, 쾌락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곳,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이 쾌락의 대상을 무수히 생산하는 곳이다. 메시지, 정보, 패션, 여행, 하이퍼리얼리티와 같은 사물들이 색성향미촉법의 모습을 하고 TV, 인터넷, SNS 매체, 영화, 신문 등 온갖 종류의 매체를 통해서 우리를 유혹하고 취하게 하고 흥분시키고 마침내 붉게 물들이는 곳이다.

현대의 정보사회는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이 수많은 사물들이 강력한 힘으로, 항상 인간의 의식을 위협하고 수시로 침투해 온다. 세계의 저편에서 일어난 일도 정보고속도로를 통하면 오늘,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마음을 더럽힐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상의 모든 정보는 나에게 잠재적인 유혹자이고 권력자이다. 정보사회의 목표가 미디어를 무한히 확장하여 우리의 의식 공간을 온갖 정보로써 가득 채워,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까마의 대상을 무한히 공급하여 소비하게 하는 사회라면,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의 이행은 진보라고 하기 어렵다. 

인터넷은 이제 우리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고, 예외자를 찾기 어려울 만큼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띠면서 우리의 두뇌까지 변화시키고, 깊은 생각, 공감과 동정심을 크게 훼손한다고 했다. 그래서 넷 시대는 디스토피아(dystopia)로 보인다. 개개인이 더욱 사악해졌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PC, 인터넷, 휴대전화, 태블릿 PC 등이 우리를 산만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탐욕이나 증오심을 표출할 기회는 더 많아지고 그 수단은 아주 편리해졌다는 의미에서이다. 참으로 우려할 만한 일은 소비사회에서 인간 주체의 모든 기획이 불가능해졌다는 보드리야르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대로 지식의 주체도 역사의 주체도 사라졌다면, 갈퉁이 ‘권력과 자원의 공평한 분배’로 이해한 사회 정의를 이룩할 길이 없음은 물론 구조적 폭력의 전모를 파악할 수조차 없게 된다.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붉은 까마와 검은 폭력을 줄일 수 있을까? 소비사회와 정보사회의 성격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쾌락의 감소, 법치의 확립, 자기 교육 등이 있다. 쾌락의 감소는 엄격한 사회 통제와 자유의 제한을 의미하므로, 이는 정치경제학의 영역이고 현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남은 방법의 하나는 쾌락의 탐닉에서 폭력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끊는 것, 즉 수범수제(隨犯隨制)의 정신으로 법을 제정하는 길이 있다. 하지만 불교도로서 더 중요한 일은 자기를 교육하는 것, 즉 명상을 통하여 감각적 자극을 줄이고, 사물의 유혹을 극복하고 말도 순하게 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되고, 역사의 유연한 주체로서 내 안에 먼저 평화를 이루고 그것을 세상에 돌려주는 일이다. 이렇게 자기를 교육하는 것은 불교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을 실천하는 일이 아닐까?

파랑이나 하양을 평화와 순진무구의 색이라고 해보자. 어린 시절 다음 노래를 불러본 기억이 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우리의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을 잃어가며 점점 오염된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입시 경쟁이 주는 강제와 스트레스 그리고 넷의 사용으로 말미암아 마음은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연애라도 하게 되면 본격적인 쾌락을 맛보면서 심신은 더 붉어지고, 어른이 되면 돈벌이, 선명한 정치적 이념과 일편단심 애국심으로 새빨개진다. 여름엔 파란 하늘을 보고 겨울엔 하얀 눈을 보자.

“세상을 파랗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세상과 자신의 해방이 가능한가의 질문이다. ■
 

허우성 / 경희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미국 하와이대학교 철학박사. 현재 경희대 비폭력연구소 소장, 《철학과현실》 편집위원, 한국일본사상사학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지 편집위원장

 허우성 woohu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