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철학자들 : 바르트리하리와 만다나 미슈라
여기에서 논의되는 언어철학자들은 바르트리하리(7세기)와 만다나 미슈라(8세기)가 이끌었던 문법학자들이다. 특히 후자는 쿠마릴라의 제자로 알려져 있지만 미망사 학파와는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문법학자들은 미망사 학파처럼 언어와 의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요경전으로는 바르트리하리의 〈바키아파디야 Vkyapadya〉('文章單語篇'), 만다나의 주요작품으로 〈브라마 성취 Brahmasiddhi〉·〈스포타 성취 Spoa-siddhi〉·〈명령본성탐구 Vidhiviveka〉 등이 있다.
바르트리하리는 그의 최초의 원리로서
- 미망사와 니아야 실재론의 한 원리, 즉 사물자체와 접촉한다는 비개념적 지각이 존재한다는 원리를 부정한다.
- 그에게는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지식은 말에 의해서 관통되며 밝혀지기 때문이다.
- 따라서 모든 지식은 언어적이며 대상의 차이는 말의 차이로 환원된다.
- 형이상학적 어불이론은 이 이론에서 멀지 않다.
- 즉 한 단어의 본질은 인간의 상상적 구성력(kalpan)에 의해서 명색(名色)의 세계로 나타난다.
- 형이상학적으로 바르트리하리는 샹카라의 불이론이나 법칭과 같은 불교철학자의 학설과 매우 유사하다.
- 이 형이상학이론은 다른 또하나의 이론, 즉 스포타('의미가 거기에서 발생하게 되는 그것') 이론을 이용하고 있다.
- 대부분의 인도철학자들은 말이나 문장이 지닌 의미의 정확한 담지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 만일 음절들이 일시적이며, 우리가 한 단어의 음절들에 의해서 생긴 음성을 듣는 데 있어서 각 음성이 그 다음 음성에 의해서 대체된다면, 어느 누구도 그 단어를 전체로 파악할 수 없다.
- 그러면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까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 문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미망사 학파는 음성의 영원성을 상정했고 영원한 음성 및 음성복합체(단어와 문장들)를 그것들의 화현에서 구별했다.
- 문법학자는 그 대신에 단어와 음성을 구분했고 단어 자체를 의미의 담지자로 간주했다. 이런 면에서 단어는 스포타인 것이다.
- 음성은 공간적이며 시간적 관계를 갖는다. 즉 상이한 화자(話者)에 의해서 다르게 산출된다. 그러나 의미담지자로서의 단어가 크기와 시간적 측면을 지닌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분할불가능하며 영원하다.
- 스포타와 구별되는 것으로는 추상적 음성모형(prktadhvani)과 발화된 음(viktadhvani)이 있다. 나아가 바르트리하리에게 문장이란 단어의 집성이나 그것들의 질서 있는 계열이 아니다. 단어는 오히려 문장에서 추상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 스포타가 의미의 1차적 단위이다. 단어도 역시 프라티바로 불리는 순간적 직각에 의해서 한 단위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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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단타
샹카라 이전의 망두키아 송(頌) 단편들
샹카라와 라마누자가 보다야나와 우파바르샤에 의해 지어졌다고 여겨지는 〈평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나, 샹카라 이전에 지어진 〈베단타 수트라〉에 대한 주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샹카라 이전에도 경전에 대한 일원론적 해석가들은 있었다. 바르트리하리·만다나·가우다파다가 그중에서 중요하다. 샹카라는 가우다파다를 그의 스승인 고빈다의 스승으로, 베다에서 불이론(advaita)을 발견했던 사람으로 칭송하고 있으며, 샹카라 자신은 가우다파다의 주요저작인 망두키아 우파니샤드 송에 대해서 주석을 달았다.
가우다파다 송은 4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제1부는 우파니샤드 자체에 대한 설명이며, 제2부는 세계의 허망을 수립하고, 제3부는 실재의 유일성을 옹호하며, 제4부는 고(苦)로부터의 해탈 상태를 다루고 있다. '불타는 연료의 지멸'이라는 제4부의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가우다파다의 철학적 견해는 불교의 중관철학, 유식학파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는데, 그의 기본목표 중의 하나는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 불교관념론자들의 주요이론과 부합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주요 철학적 원리에는, 만물은 꿈속에 보여진 것처럼 비실재적이며, 실재에는 생성도 소멸도 없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변화와 인과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용수를 상기시킨다. 이분법이란 망상의 생산력인 마야가 유일의 실재 위에 부탁(附託)한 것이다. 진정한 생성이란 없으므로, 가우다파다의 철학은 흔히 무생론(無生論 ajtivda)으로 불렸다. 여기까지 그는 불교의 유식학파에 동의하지만, 유식학파에서의 마음(citta)이 실재하고 정신적 관념의 실재적 흐름이 있다는 주장은 거부하고 있다.
샹카라는 가우다파다의 극단적인 환영주의(幻影主義)를 완화시켰다. 비록 그는 현상세계를 잘못된 현상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꿈을 비유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세계의 객관성을 꿈과 환영의 주관성과 대조시키고 있다. 둘 다 초월적인 것과는 반대되지만, 경험계와 환영계의 차이는 그의 사유방식에 중심적인 것이었다.
베단타의 여러 학파들
베단타가 흔히 하나의 철학체계로 지칭되지만, 여기에는 서로 매우 다른 여러 학파들이 존재한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일련의 공통경전에 대한 충성일 것이다. 이들은 〈우파니샤드〉·〈베단타 수트라〉·〈바가바드기타〉 즉 베단타의 3개의 근본경전(prasthna)이다. 베단타의 여러 학파들은 모두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이들 3가지 근본자료들에 주석을 달았다. 그 차이점들의 핵심이 되는 문제 속에는 브라만의 본성, 현상계의 지위, 유한한 개인과 브라만과의 관계, 해탈의 본성과 수단이 포함되어 있다. 주요학파로는 샹카라의 무제한적 불이론(uddhdvaita), 라마누자의 제한불이론(viidvaita), 마드바의 이원론(dvaita), 바스카라의 불일불이설(不一不異說 bhedbheda), 그리고 동일과 차별을 다른 방식으로 강조하는 님바르카·발라바 학파들이 있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샹카라는 해탈의 유일한 수단으로써 형이상학적 지식을 찬양하고 신의 관념조차도 잘못으로 간주하고 있다. 라마누자는 반면에 지식에 수반된 박티(bhakti 信愛)의 길을 추천하고, 베다의 제식주의에 대해서 보다 관용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마드바·님바르카·발라바는 모두 인격주의적 유신론을 주창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인격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최고로 여겨졌다. 비록 인도철학에 대한 샹카라의 영향은 다른 학파들이 따라갈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실제의 종교적 삶에서는 유신론적 베단타가 샹카라의 추상적인 형이상학보다 훨씬 큰 영향을 행사했다. 샹카라 철학의 근본주장은 자아(유일하고 보편적이며, 영원하고 자증적인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아의 본성은 초월적인 관점에서는 주관(raya)과 객관(viaya)이 없는 순수의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리하리의 어불이론(語不二論 abddvaita), 불교도의 식불이론(識不二論), 가우다파다의 무생불이론(無生不二論)과 나란히 샹카라의 불이론은 자아불이론(tmdvaita)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현상계와 유한 개별적 자아는 경험적으로 실재하지만 고차적인 관점에서는 단순한 화현(化現)일 뿐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샹카라는 논증과 성전의 해석에 의존했다. 그의 방법론적 원리에 의하면, 이성은 성전에 나타난 진리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해서 주로 부정적 용법이었다. 그는 적수의 이론들을 반박하는 데 탁월한 논리적 기술을 보여주었으나, 그의 제자들은 불이론의 주장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성적 토대부여를 시도했다.
샹카라의 형이상학은 실재의 기준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공식화될 수 있다. 실재는 부정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 기준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것은 의식이다. 왜냐하면 의식의 부정도 부정하는 의식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은 상호부정(차이)이거나 부재일 것이다. 부재는 생성 이전 또는 소멸 이후의 어떤 사물의 부재이거나 또는 어떤 다른 장소에서의 부재일 것이다. 의식의 부정은 생각될 수 없으며, 어떤 종류의 부정도 의식의 술어가 될 수 없다. 의식은 자증적이다. 모든 다른 대상의 현현은 의식에 의존해야 한다. 의식에는 차별성도, 다(多)에 대한 의식도 없다. 복수의 의식 중심체들로 보이는 것은 화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의식 이외에 진실로 존재하는 프라크리트 같은 것은 없다. 그런 것은 비실재적 타자이다. 의식에는 내적 부분들이나, 복수의 의식적 상태란 없다. 푸름의 의식과 노랑의 의식의 차이는 의식 내의 차이가 아니라 대상 사이의 차별이 의식에 부탁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상키야·불교유식론·니아야 - 바이셰시카의 다원론은 반박되었다. 실재는 유일, 무한, 영원, 자기조명적 정신이다. 이것은 어떤 한정도 갖지 않는다. 한정은 곧 부정이기 때문이다.
샹카라 철학의 근본문제는 순수자아가 어떻게 일상적 경험에서 '나의 의식'이라는 방식으로 개별화될까? 또는 '푸름에 대한 의식'에서처럼 의식이 어떻게 대상과 관계를 맺을까 하는 점이다. 어떤 것이 경험적 사실이나 동시에 그것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면, 그것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샹카라의 오류이론에 따르면 잘못된 화현(예를 들면 뱀으로 보인 새끼줄)은 적극적인 것이며, 제시된 실체이므로 존재도 비존재도 아니다. 오류는 따라서 둥근 4각형 같은 허구가 아니다. 샹카라는 존재·비존재라는 범주 이외에 오류라는 또하나의 범주를 설정했다. 세계와 제한된 개인들은 이런 의미에서 오류인 것이다. 이들은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들은 브라만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또한 그들에 대한 경험은 브라만에 대한 명지(明知 vidy)로 지양(止揚)되는 것이다. 그들은 무명(avidy)에 의해서 브라만의 존재 위에 부탁된 화현인 것이다. 무명은 무시(無始)이며, 실재의 본성을 숨기고 그 위에 오류의 화현을 제시하는 어떤 적극적인 것이다.
샹카라에 따르면 해탈은 획득해야 하는 완전은 아니다. 자아의 참된 본성을 숨기고 있는 무명의 파괴를 통해서 그것이 실현되는 것이다. 신(神)이란 세상을 참으로 간주하고 그 창조주와 지배자를 찾으려고 하는 무명의 마음을 가진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종교적 삶은 인간과 신, 덕과 악, 금생과 내생이라는 이분법적 관념들에 의해서 유지된다. 해탈의 상태에서는 이러한 이분법은 극복된다. 해탈이 육신을 지닌 상태에서 가능하다는 것도 샹카라 신념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지고의 상태를 가져오는 것은 무명의 파괴이므로 신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정신에 대한 비실재적 한계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