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5

오강남 교수의 종교다원주의적 기독교를 평가한다 < 설교마당 < 연재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오강남 교수의 종교다원주의적 기독교를 평가한다 < 설교마당 < 연재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오강남 교수의 종교다원주의적 기독교를 평가한다
오강남 교수의 논리적 허구를 밝힌다
기자명 성기문
승인 2001.08.24 


(저자주: 오강남 교수의 책에 대한 평가를 준비하다보니, 어느 덧 한 달이 다 지나갔다. 그 와중에 이 작업을 빨리 마무리지을 수 없는 상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강남 교수의 '종교다원주의' 신드롬이 잠잠해질 무렵에 이 글을 내놓는다는 것이 다소 신선감(?)은 떨어지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반드시 다루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늦게나마 이 글을 독자들에게 내어 놓는다.)

서론
知己知彼면 百戰百勝!?

우선적으로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염두에 두면서 본인의 서평을 읽어주길 바란다.
1) 우선 나의 입장이다. 서평자는 성경신학을 10여년 연구한 복음주의적 구약학도로서, 기독교의 절대적 진리를 믿는 입장에서 오강남 교수의 글을 읽고 평했다.
2) 서평자를 포함해서, 하늘 아래 그 어떤 사람도 그 논리가 철저하게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저자가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스스로 완벽한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 속에 다소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논리적 진리와 허위가 항상 함께 한다는 점을 모든 독자들은 인정하길 바란다. 누구의 논리든지 독자는 항상 저자와 함께 대상을 읽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멀리 서서 그 이론을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사고하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가 진리의 잣대로 상대방을 전면부정하든지, 자신의 잣대로 자신을 완전히 긍정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서평자는 그러한 입장과 기준과 전제하에서 오강남 교수의 글을 읽고 거기에 나타나는 장단점들을 찾아보려고 했다는 점을 밝힌다. 결론적인 이야기지만, 오강남 교수의 성경해석에는 문제점이 있으며 비논리적인 부분이 많이 드러나기 때문에,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오히려 실망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평자의 결론적 판단을 가능한 한 오강남 교수의 글에서 세부적으로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한다. 본 서평은 전반적으로 주제별로 다시 재배열 정리하기보다는, 대부분 순차적으로 논의하려고 한다.

진실을 찾아서...
필자가 보기에, 오강남 교수의 주장들 중에 다음의 몇가지는 매우 정확하고 정당한 평가라고 본다:
첫째로, 소위 보수적 신학대학원과 교회들에 신앙적 자유가 허용되지 않고 교권주의의 자의적 잣대로 내려지는, 출교(黜敎)나 이단, 자유주의의 정죄선언이 넘쳐난다는 저자의 주장(p. 34)은 사실이다. 물론 사람들마다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할 수 없을 수도 있는 일이긴 하지만.
둘째로, 저자가 인정하듯이, 성경의 자귀(字句)에 연연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 모두 문자주의적 오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p. 29). 그러나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문자주의가 아니다. 인간의 모든 말과 문헌들이 그렇듯이, 성경의 자구도 100%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아이러니하게도, 근본주의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오강남 교수 자신도 스스로가 '문자주의의 오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 자유주의적 신학의 결과물들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혹은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 점은 차차 논하기로 한다.
셋째로, 저자가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창조론>을 믿는 자들이 환경오염의 주범 내지는 공범(지난날 소위 보수적 교회들이 앞 다투어 행했던, 그린벨트의 훼손, 땅투기 등)이라는 점은 보수적 기독교의 추한 진실을 말해주는 일면이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p. 78). 마치 한때 목회자들의 사모들이나 기독교인들이 낙태가 피임의 한 종류로 여겨 낙태시술을 이용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무신론자들이나 타종교인들이 오히려 지구를 사랑하고 기독교인들이 지구를 미워(?)한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또한 정통기독교인들이 섹스와 돈과 물질과 명예라는 잡신들을 섬기면서 말로는 유일신론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모순이다(pp. 131ff.). 그 점에서 오강남 교수의 지적은 정당하다. 마치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배금주의와 기복주의로 교회가 물드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마지막으로, 결과적으로 그 의도야 어쨋든, 오강남 교수의 도전은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적" 신앙관에 "신선한 그리고 치명적인" 충격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반성과 개혁의 정당한 몫은 오강남 교수보다는 기독교의 <절대적 진리>를 믿는 우리에게 있다고 서평자는 믿는다.

오강남 교수의 '종교다원주의의 기독교'관의 대해부(大解剖)!

상업주의는 못말려!
물론 오강남 교수의 종교다원주의적 기독교론을 이해하는데 중요하지 않은 요소이긴 하지만, 특유의 판촉용(?) 과장적 표현이 우선 눈에 거슬린다. 겉표지의 문구에 따르면, 본서가 수십년 혹은 심지어 수백년된 여러 가지 학설들과 이론들을 개괄적으로 정리한 책으로, 마치 "필생의 연구 끝에 찍은 마침표"라고 규정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독자들은 서평자의 이야기를 인내를 갖고 더 살펴보아야 본서에 장식되어 있는 <상업적 문구>의 진위를 정당하게 평가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1. 일반적 방법론의 오류
세부적으로 언급하기에 앞서서, 오강남 교수의 논의방법론상에 문제점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개괄하고자 한다.

그는 논증에 있어서, 이성의 종교와 체험의 종교를 오고간다. 즉 서로 부합하지 않으며, 피상적인 유사상만 존재할 뿐인, 이성적 종교(서양의 합리주의적 기독교)의 방법론과 체험적 종교(동양의 신비주의적 종교)의 방법론과 목표를 혼용하기도 하고 번갈아가면서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론상의 혼돈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타력구원적인 기독교와 자력구원적인 동양의 종교들간의 작위적인 유사점 찾기와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제점들이다. 모든 종교는 혼합되어야 한다거나 기존의 기독교는 타종교에 비해서 열등(劣等)하고 모순(矛盾)된 것이라는 전제를 갖고 접근하는 것 같은 인상을 남긴다. 즉 서양의 합리주의의 산물(특히 역사비평적 방법론)로 전통기독교의 경전의 허구와 모순성을 비판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성경과 기독교를 재구성하고, <종교다원주의적 해석>을 시도할 때는 동양의 체험주의의 산물로 관찰하며, 기독교와 동양종교를 선택적으로 통합시키려 한다. 서평자가 보기에, 저자의 책은 차라리 두 권으로 나눠서, <종교다원주의 개론>과 <서구합리주의적 입장에서 본,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성경의 해석학적 모순>을 다루는 책들로 출판하였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문화사대주의(文化思大主義)?
이 말은 독자들로 하여금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는 문화상대주의 아닌가? 그러나 서평자가 보기에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저자의 글에서 서평자는 그 자신도 <서구문화사대주의> 혹은 <절대주의>의 잣대에서 한국의 ‘근본주의’적 기독교를 평가하는 버릇을 발견한다. 마치 한국교회의 부흥사들이나 일부 목사들이 미국을 유토피아시(視)하는 것이나 복음화가 마치 서구적 문명화의 척도인 것처럼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오강남 교수는 합리주의에 근거한, 현재 서구문명이 갖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혐오 혹은 냉소주의, 혹은 무관심을 '성숙한' 믿음으로, 그와는 반대로,‘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나라’의 근본주의적 믿음을 '미숙한' 믿음으로 나누는 양극화하는 기계적 도식화를 전제로 하여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p. 28, 313).

현재 '꽉 막힌 기독교'는 유럽이나 미국동부에서는 보기 드물고, 오로지 미국에서도 교육수준이나 경제상태가 지극히 저급한 남부일부 지역, 그리고 이 지역출신의 꽉 막힌 선교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한국,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일부 피선교지에서나 서식하는 기형적 현상이다(p. 298).

물론 서구에 살든지, 아프리카에 살든지, 교육과 문화적 성취와는 무관하게 근본주의적 믿음을 고수하는 자들의 경우도 많이 나타난다는 점(이것은 필자의 경험이다)은 믿음의 내용에 대한 다른 평가와는 무관하게 오강남 교수의 전제와 평가가 과연 옳은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성경은 오히려 율법주의적인 신앙(십일조나 안식일, 의식을 절대시하는 신앙적 경향성)을 믿음의 초보로 여기며 스스로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자유함을 택한 믿음을 어른의 믿음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도 인정하듯이, 근본주의나 자유주의나 심지어 종교다원주의적 믿음도 신앙체계이며 철학적 세계관이라는 점이 자주 간과되고 있다는 점도 밝혀야 한다. 종교가 말하는 바는 역사적 실체보다는 경험과 지향하는 목표라고 한다면, 기독교뿐만 아니라, 종교다원주의 자체도 상대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같고 각 종교의 독특성은 지엽적인 것이며 상대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종교다원주의의 믿음이지, 그것이 보편 타당한 진리로 입증되었거나 사회의 구성원들이 아무런 반대없이 받아들여야 할 사회규범으로 인정된 적이 없다. 그렇지도 않은 상태에서, (우스운 논리지만) 절대적인 것을 배격하는 종교다원주의자가 소위 '절대적' 믿음을 신봉하는 신앙인을 열등한 자나 독선적인 자로 여기는 것도 타종교인들에 대한 종교다원적인 태도는 아닌 것이다.

스스로는 종교다원주의적 신앙관을 전파하면서 타종교인들, 특별히 기독교인들을 비하(卑下)하는 강압적이거나 독선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잘못인 것이다. 또한 보편적인 사랑과 관용과 자비의 가치를 세상의 문화와 체계 중에서 굳이 종교에서 구태여 찾으려는 태도도 편견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서양적 세계관이나 가치관에서 볼 때, 종교적 신념이나 인정된 가치관 자체는 무시되거나 부차적인 가치로 여겨지고 도전받으며, 소위 미신적인 요소들이나 기술이나 과학신봉주의나 물신주의 등 다원화된 가치관과 체계 속에서 다원화되고 비신화화되고 있는 와중 속에서 종교의 다원화를 통한 세계전복(?)의 시도는 무의미해 보인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저자의 이분법적 논리의 비판(pp. 55ff.)은 결국 종교다원주의만이 참 진리라는 비논리적인 설법(說法)의 모순에 빠지지 않는가가 서평자의 생각이다.

성경은 不法複製의 産物이다!?
오강남 교수가 성경의 절대적 가치를 도전하고 허물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론에 문제가 있다.
범.....주의(pan....ism)은 단지 가설일 뿐이다. '성경이 주위의 많은 고등문명들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었다'는 주장은 수백년된 학적 전통이다. 그러나 검증되거나 학계에서 일치된 이론은 아니다. 19세기에 바벨론 문명이 발견되기 시작하자, 일부학자들은 구약성경의 모든 사상들과 종교체계가 바벨론 문명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이것을 범바빌론주의, pan-Babylonianism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수메르 문명이 발견되자, 범수메르주의(크래머 책을 읽어보면 그러한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가, 우가릿 문헌들이 발견되자 범우가릿주의가, 쿰란 문헌들이 발견되자, 범쿰란주의가 절대적으로 인기리에 주장되고 연구되었다.

오랫동안 고대근동의 비교연구는 이웃하는 고대문명의 도움으로 혹은 전적인 의존으로 히브리종교가 뒤늦게 유아기적 종교에서 고등종교로 발전했다고 보는 문명진화론적 개념에 압도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가설(假說)일뿐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은 구약이 상당히 이른 시대에 저술되었다는 견해를 갖게 하지만, 또한 문제는 인접문명의 문화를 그대로 베꼈다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건전한 고대근동의 문명과 경전간의 비교연구는 일방적으로 서구합리주의에 의해서 진행되던 히브리종교의 폄하태도를 불식시킬 뿐만 아니라, 고대근동문화와 문헌들간의 비교연구를 통한 문명간의 상호침투적 요소나 우열의 문제로 접근하였던 과거의 방식들을 재고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과거에 유사성에 대한 과도한 열정은 차이점과 연관시켜서 이해하는 태도들 갖게 하였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문화절대주의를 상대화시켜 준다.
문화절대주의는 과거 고대제국들과 서구 열강들의 사고논리였다는 점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지속적으로 히브리종교가 문화적 열등하에서 존재했다는 사실이 망각되었다. 히브리인들은 오랫동안 법이 없이 지냈으며, 오랫동안 종교제도 없이 지냈으며, 오랫동안 왕정제도 없이 지냈다. 극단적인 반형상주의(aniconism) 때문에, 발전된 문화의 꽃을 피워본 적이 없는 국가였다. 심지어 히브리인들이 선택된 이유는 인종적 우월성이나 숫적, 권력적 강함이나 도덕적 고결함 때문도 아니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야웨신앙은 그러한 점에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단군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면, 예수도 마찬가지다!
단군의 역사적 실존인물이냐의 문제와는 별도로, 단군이 한민족(韓民族)의 단일한 조상(single ancestor)이라는 신화(神話)를 우리는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그가 한민족의 단일한 조상이었다는 주장이 신화임을 안다. 어떻게? 기존의 잔존자료들을 통해서. 삼국시대의 다양한 시조신화들은 단군 자신의 역사성 여부를 떠나서 고대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단군을 통한 한민족의 단일국가기원설이나 단군국조설을 믿지 않았음을 반증해준다. 또 역사적으로 고려시대에야 비로소 단군에 대한 그러한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점을 증거해 준다. 즉 단군신화는 정치적 이유로 해서 한민족의 단일한 조상으로 믿어지게 된 것이라는 점을 오강남 교수는 간과하고 있다.

이것은 반(反)단군적 믿음의 결과라거나 기독교도의 광란적 반대논리의 도구가 아니라, 학문적 연구의 결과에 대한 인용일뿐이다. 단군의 존재와 단군에 대한 믿음은 별개일 수 있다는 점이다. 단군이 실재했느냐의 논의보다는, 단군의 정신을 통하여 한국인다운 한국인을 키워내는데 주력해야 한다(p. 98)는 오강남 교수의 믿음은 실제 한국적 컨텍스트를 도외시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오강남 교수가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에게 행하도록 권면되는 "실존적 결단"의 각성은 오히려 그들보다는, "역사성과 의의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우(愚)를 범하는 근본주의적 단군지지자들에게 더 설파(說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나를 뺀 모든 사람들은 왜곡된 성경관을 갖고 있다구?
모든 사람들이 선이해(先理解)를 갖고 성경을 읽는다는 점과 항상 왜곡될 수 있다는 오강남 교수의 주장은 사실이다(p. 102). 이 문제는 항상 서평자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종교다원주의자들을 뺀, 근본주의자들에게만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항상 상대적이려고 하는 것 같지만, 항상 자신들을 제외하는 이중적인 잣대와 항상 상대방보다 더 우월적인 위치에서 가르치려 한다는 것이다. 항상 자신들과 다르면, 자신들의 <절대적인 잣대>로,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잘못된 성경이해와 오해라고 여기며, 다른 사람들의 신앙은 <유아기적 미신>이나 신념으로, 자신들의 것은 "과학"적인 태도로 "대다수의 건전한 의견"으로,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서 가르치고 교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우리에 대한 교훈'은 곧바로 그 자신에 대한 교훈으로 전환된다.

무엇보다 '나를' 교훈하지 않고, '나를' 책망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남을' 교훈하고 '남을' 책망하고, '남을' 바르게 하고 '남을' 의로 교육하려 하고 남과 싸워 이기려 하는데 문제가 생긴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도 똑같이 성경으로 나를 훈계하고 책망할 것이다. 내가 인간인 이상 성경을 아무리 객관적으로 읽으려 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나의 구체적인 상황과 이해정도에서 보는 나의 '해석'일 수밖에 없다. 결국 나는 내가 이해한 대로의 성경, 내가 받아들인 대로의 성경을 절대화하게 되고 만다. 따라서 스스로 '성경대로'에 충실하다고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남의 말에 귀기울일 수가 없게 된다. 남이 성경을 가지고 하는 말도 내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모두 성경대로가 아니기 때문이다(p. 103).

끝없는 온정주의
오강남 교수의 글을 읽다보면, 어린이들을 깨우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것이 서평자가 발견한 오강남 교수의 온정주의적 태도다. 훈계와 관심이 지나쳐 교정하고 강요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항상 그는 우화(寓話)와 어릴 적 어린이들의 시각과 마음자세에서 교훈거리와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다. 마치 그는 비유(比喩)로만 말씀하셨다던 예수의 태도를 갖는 것 같다. <비유는 비유일뿐, 그 역사적 정황에 대해서는 믿음을 갖지도 묻지 말라>고 어리석은 학동(學童)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랍비 같아 보이기도 한다. 동생과 싸운 철수가 엄마 앞에서 갖게 되는 마음의 변화나 산타 클로스의 정체에 대한 철수의 인식의 변화. 산타 클로스가 부모였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결국 부모가 되어 산타 클로스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산타 클로스의 역사적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실존적 의미의 전통을 이어나가려는 애틋한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것일까?

그러나 그의 이러한 사랑의 메신저의 역할이 오강남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오히려 그가 '여러가지 이유나 이해관계에 따라 의식적으로 억누르는 태도'(p. 111)를 갖고 독자들을 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무조건 산타 클로스로부터 선물을 받아야만 한다는 아이들의 암묵적 기대감이나 산타 클로스가 되어 자녀들에게 선물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권리가 산타 클로스와 선물이라는 유대성(solidarity)을 오랫동안 지켜주는 억압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설령 거룩하고 고상한 애정표현의 발로(發露)든, 상업주의에 물든, 부모 자식 양자 모두의 희생(犧牲)의 결과든, 우리는 산타 클로스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인가? 그리고 산타 클로스의 선물이 도대체 성경에 대한 이해와 예수에 대한 이해에 대한 진전된 바른 이해를 갖게 만드는데 유용한 비유인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역사비평적 연구를 언급하면서, 그는 서양신학계와 교회들의 대다수의 논리와 훌륭한 학문적 업적에 의존하여 문자주의의 폐해(弊害)에 대해서 언급한다(pp. 113ff.). 자주 그러하듯이, 마찬가지로 문자주의에 의해 희생된 사람과 문자주의에 맹신했던 사람들의 예를 곁들인다. 또한 그는 이러한 문자주의를 유아기적 신앙이라거나 철이 덜 든 사람으로 범주화한다.

구약의 하나님은 누구인가?(pp. 119ff.)
저자는 바벨론 포로기를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야웨신앙의 변천사의 한획을 그었다는 관점으로 구약의 신관(神觀)을 논한다. 그에 따르면,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승리의 신은 바빌론의 신들에게 어처구니없이 패배하여 자기 백성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했던가?

이에 대한 반성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관이 부족신에서 우주적 신으로 전환되었다고 오강남 교수는 주장한다. 오강남 교수의 이러한 사건이 우리에게도 또 다시 발생해야 한다고 본다. 설령 이런 기회를 통하여 부족신 야웨가 우주적 신으로 승격했다손 치더라도, 이러한 사고방식의 전환은 오강남 교수의 논증과는 거리가 멀다. 이 우주적 신은 야웨의 특정 지역적(팔레스타인), 특정 종족적(이스라엘) 장벽을 넘어서는 우주적 유일신으로 탈바꿈하게 한 계기가 된 것으로 종교다원주의가 지독하게도 반대하는 주장을 더 강화시키게 된 것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주적인 신에서 부족신으로?" 종교다원주의에 따르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기독교인들만의 하나님(물론 "배타적인" 의미로는 말고!)이어야지, 우주적으로 온 세상을 지배하는 유일신, 혹은 적어도 최고신이어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 같다. 궁극적으로 평화와 환경보호를 위한 범신전(凡神殿)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무신론자들은 "신은 없다!"고 말하고 극단적인 범종교주의자들은 "모든 종교는 하나다"라고 말하지만,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지만, 하나로 합칠 필요는 없으되, 모든 종교는 싸우지 말고 화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대 범신전의 현대판이 현대의 종교다원주의가 있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주장일까!

몇가지 차이점들은 고대의 군주적 수직체계가 수평적 민주체계로 바뀌었다는 점과 고대의 신들이 길흉화복과 우주질서를 각각 분담해서 맡았던 것을, 현대는 각각의 종교지도자들과 구성원들이 지구의 평화와 환경파괴를 위해서 각각 분담해서, 혹은 한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는데 있다.

하나님은 남자인가?
종교다원주의자들이나 여성신학자들은 주기도문을 "하늘에 계신 우리 부모님"이라고 외운단다. 이 얼마나 민주적인가?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문법적으로 남성 3인칭 단수다. 가끔 아버지(father)라고 불린다는 점에 동의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야웨가 남자의 1, 2차 성징(性徵)을 공유하고 있는 신적 존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신화적인 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신(들)을 번식과 성적 쾌락을 탐닉하는 남성신과 여성신으로, 혹은 동물이나 식물들로도 묘사했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달랐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관용적인 표현이지만, 오히려 그를 성경에서는 야웨나 하나님, 혹은 여러 가지 부수적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더 일반화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문화에 따라서 구별하기는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 이것은 그 누구도 쉽게 구별해 낼 수 없는 것이다.

폭력적이면 남성, 비폭력적이면 여성인가? 적극적이면 남성, 소극적이면 여성? 폭력적인 남성신에 대한 해결책은 여성신인가? 요약해보자. 인간이 그러하듯이, 모든 인간은 그 내면에 여성성과 남성성을 공유하고 있다. 호르몬도 그렇고 내면세계도 그렇다. 물론 외모도 혼동스러울 수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에 대한 신인동형론적 표현들을 곰곰히 살펴보면, 그 속에도 여성성과 남성성이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형상이 없으시고 인간이 아니신 하나님을 여성의 1, 2차 성징을 갖고 있는 여자로 보거나, 남자로 보거나 아니면 남녀의 혼합적 존재로 보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를 가진 아버지로 나타나지만, 궁극적으로는 야웨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그것이 남성우월주의의 산물이든, 그에 대한 반작용에 의한 것이든, 하나님이 남자냐, 여자냐의 논란은 무의미한 것이다. 오히려 오강남 교수의 주장을 따른다면, 인간은 양성성징(兩性性徵)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어야 한다.

주전 7-6세기의 고고학적 발굴을 보면, 야웨 하나님과 아쉐라 여성 하나님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야웨 하나님은 남성의 2차 성징을, 아쉐라 하나님은 여성의 2차 성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마도 가나안 문화 자체가 신들이 부부로 존재하거나 성생활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 수염나고 남성기(男性器)가 달린 야웨를 묘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정통적 야웨신앙에서는 그 자신이 아비로 불릴 뿐, 아무런 형상이나 남성숭배의 징후들이 없는데, 혼합종교에서는 남성적 형상과 남성숭배의 징후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증거들이나 교회사적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하나님을 인간의 성적 기준에 따라서 구별하는 것은 잘못임이 확실하다.

게다가 학자들 사이에 여전히 논란이 있는 몇몇 단어들의 어원적 추론을 갖고 여성 하나님을 주장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엘'과 '엘로아', '엘 샤다이'가 그런 경우다). 어원학(etymology)을 구약이나 신약연구에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해석자의 선입관이나 주관이 너무 많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는 점과 어원과 실제의 본문에서의 단어가 그 정황이나 용례, 혹은 문법적으로 전혀 다른 의도와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엘 샤다이의 경우에 산의 하나님, 혹은 들의 하나님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바알신화에 근거하여 젖가슴의 하나님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증될 수 없는 추론일 뿐이다(p. 123). 결과적으로 오강남 교수도 인정하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젖가슴이 달린 어머니 하나님일 수는 없다(p. 125).

그런데 더 심한 논리적 모순은 지속된다(p. 125). 그의 논리를 정리해보자: "남성과 여성은 다르다. 구약에서 영(혹은 신)이나 지혜(잠언)는 모두 문법적으로 여성이다. 그러므로 그 존재 자체는 여성이다." 오강남 교수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인도 유럽어도 마찬가지로 셈족어에는 문법성이 있다. 심지어 나라들마다 한 단어에 대한 문법성이 교차되어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문법적 성은 문화적이며 관습적이다. 또한 문법성은 문법성일뿐, 성징(性徵)과 100%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다. 시대별로 문법성이 바뀌었다고 남성적 억압으로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신자의 아버지로, 교회를 신자의 어머니로 보았던 교회전통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실제적 다신론을 주장한다
오강남 교수는 성경상의 절대적 유일신론보다는 실제적 다신론을 주장한다(pp. 128ff.). 모든 신들은 하나이거나 같은 존재들이다. 또한 그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일종의 다신론적 표현으로 이해한다. persona라는 말은 가면놀이에서 나왔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이 말이 여전히 가면, 허식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영어로 person, 혹은 personal이 의미하듯이, 하나의 다른 객체, 혹은 인격 자체를 의미하는 말로 그 의미가 변화되었고 삼위일체에서 사용되는 person(위격)이라는 말은 하나의 신이 여러 개의 가면을 쓴다는 식(양태론)으로 이해해서는 안되고 전통적인 개념의 측면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이것도 또한 오강남 교수가 어원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