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7

위없는 깨달음과 투리야티타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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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대가 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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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없는 깨달음과 투리야티타  
토대가 되는 글

2016. 11. 2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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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오타마는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 진리를 무아(無我)와 연기(緣起)라며 단순하고 완벽하게 설명을 했다. 그러므로 무아와 연기를 단 한 점의 티끌도 덧붙이지 않고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위없는 깨달음이다. 더 이상 달리 추구할 것이 없으므로 그 결과는 새로운 세계로의 입성이나 수준 높은 경지의 달성이 아니라, 현실(현상계)에 대한 깊은 이해로 드러난다.

라마나 마하리쉬가 '투리야티타'라는 개념을 설명했었다. 사람의 의식은 깨어 있음, 꿈, 잠의 세 가지 형태와 이 세 가지를 초월하면서 세 가지 의식의 본질을 이루는 네 번째 의식의 상태가 있다며 그것이 투리야티타라는 것이다. 넷째의 의식 상태에서는 경험이나 개념이 사라진다고도 덧붙였다. 그런데 그 투리야티타를 순수 의식이나 불멸의 의식으로 해석하고 추구하는 일단의 흐름에 대해서는 조금 비판을 하고자 한다.

사전에서 의식(意識)을 검색해서 추려보면 '대상에 대한 정신적인 작용'이라는 의미로 축약이 된다. 여기에서 정신적인 작용의 도구는 당연히 사고력(思考力), 즉 생각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대상에 대한 생각의 작용'으로 바꾸어 설명할 수도 있다. 사전적 의미의 의식은 생각의 작용이다. 그런데 생각이 없으면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여 인식할 수 없게 되므로 생각이 없으면 의식도 없다.

이 설명에 대한 검증은 매우 쉽다. '나'라는 단어 없이 나에 대해 생각하거나 '시계'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고 시계를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생각을 이용하지 않으면 기억이나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찰나에 단어들로 치환되는 가상현실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멈추어 가상현실이 꺼지면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거기에는 부처도 없고 진리나 행복도 없다. 물질계가 종멸해서가 아니라 인식의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주체와 객체의 분리는 생각으로 가능해진다. 본래 주객이 분리되어 있던 것을 생각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바로 분리의 원인인 것이다.

라마나 마하리쉬가 설명한 세 가지 사람의 의식 중에는 '꿈이 없는 잠'이 있다. 사전적 의미의 의식과 달리, 생각이 작동되지 않는 상태에도 의식이 있다고 한 것이다. 상식적으로도, 잠든 사람에 대하여 의식이 없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인간 외의 다른 생명체들도 의식이 있다. 그러한 의식을 '생명체의 생명유지 상태'라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 같다.

그러므로 의식은 '생명체의 생명유지 상태'인 '무념(無念)의 의식'과 '대상에 대한 생각의 작용'인 '유념(有念)의 의식' 이렇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라마나 마하리쉬가 설명한 세 가지 의식 중에서 깨어있음과 꿈은 '유념의 의식'이고, 잠은 '무념의 의식'이다.

'무념(無念)의 의식' 상태에서는 생각이 없으므로 경험이 불가능하다. 꿈이 없이 잠자는 상태를 스스로 경험할 수는 없다. 모든 생명체와 언어를 배우기 전까지의 갓난아기들은 '무념의 의식' 상태에 살고 있으며 무아의 상태이다. 미숙한 생명체가 아니라 완벽한 특정 형태의 생명체이다. 무아이지만 생명지능에 의한 생명유지현상이 저절로 일어나 환경의 인과에 반응한다.

'무념의 의식' 상태를 달리 표현하면 실상계인데 여기에 생각이 끼어들면 '유념의 의식' 상태로 전환되어 현상계가 된다. 사람의 뇌에 언어기능이 자리를 잡으면 주객 분리가 되고 학습된 가상현실에 적응하게 된다. 주체로써의 '나'가 등장하고, 연기의 과정들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과 사건들로 해석된다.

이런 현상은 전두엽이 발달된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적 선택으로 무아와 연기의 세계(실상계) 위에 관념의 세계(현상계)가 중첩되어 펼쳐진 것이다. 무의식이나 초월 의식도 역시 '유념의 의식'에 포함된다. 그것들도 생각이 있어야만 유의미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로써의 인간은 여전히 '무념의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 자연계에서 벗어난 '유념의 의식'을 따라 산다. 그런데 생각의 기반인 '나'는 가상현실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므로 이를 지탱하기 위한 장치들이 생겨난다. 생명체로써의 자연스러운 욕구들은 사회적 욕망이라는 더욱 강력한 심리적 에너지들로 증폭되고 그 결과로 주체로써의 '나'에게 생로병사와 각종 행복과 불행이 발생한다. 가상현실 세계에 살기 위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가상현실 세계는 '무념의 의식'을 태생적으로 배제하지만, 생명 현상에는 여전히 이 의식의 상태가 유지된다. 사람은 여전히 무아이므로 생로병사가 없고, 연기이므로 생로병사를 겪더라도 저항이나 걸림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유념의 의식'은 이러한 본질을 깨닫지 못하여 생각의 환상이 만드는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무념의 의식'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지만 잠에서 깨어난 직후나 무념의 상태에 잠시 빠졌다가 돌아오는 순간에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있다. 깨달음이란 '유념의 의식'에 '무념의 의식'상태가 의식화되어 실상계를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생로병사의 걸림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투리야티타를 순수 의식이나 불멸의 의식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무념의 의식'인가? '무념의 의식'은 절대로 경험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순수나 불멸과 같은 형용사가 붙을 수 없다. 충만한 의식, 진아, 내가 있음, 우주와의 합일, 삼명육통, 전지전능, 오매불여 등과 같이 상태에 대한 설명이 붙은 것들은 모두 '유념의 의식'이며 여전히 생각이 작동되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무아와 연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사용된 티끌들일 뿐이다. '무념의 의식' 상태를 서술하고 설명하는 모든 행위들은 방편이며 거짓이다.

이러한 방편들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간주되어 버리기 쉽다. 생각은 그렇게 확실하고 위대하고 달콤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목적이 되어 버린 방편들은 '무념의 의식'을 이해하는데 장애물이 된다. 그래서 진리는 이해하여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고 수행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의심 없이 믿고 따르는 종교가 된다.

매일 잠의 상태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늘 '무념의 의식'을 오고 가지만 이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유념의 의식'이 생각에 포착되는 대상들만 상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으로 '생각이 배제된 상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모순적 행위이기 때문이고, 아무것도 없다거나 아무것도 모르게 되는 상태에 대한 지식적 접근은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무아와 연기에 대하여 온전한 이해가 생긴다는 것은 가려졌던 '무념의 의식'이 드러나서 '유념의 의식'과 공존하게 되고 이런 상태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조금만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의식'들이 공존한다는 것은, 온갖 생각들이 날 뛰어도 한편으로는 전혀 동요하거나 불안하지 않는 든든함이 자리 잡는 것이고, 새로운 지식이란 무아와 연기에 대한 스스로의 이해, 그리고 모든 생각들이 환상이라는 정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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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없는 깨달음과 투리야티타|작성자 소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