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31

“브라만교의 깨달음은 ‘신에 대한 믿음’” 김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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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만교의 깨달음은 ‘신에 대한 믿음’”
김왕근 | slbu@naver.com | 2016-04-25 (월) 

[김왕근 불교담론] 현대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⓶- 브라만교의 깨달음
브라만교 “아트만은 오직 인간이 지닌 비범한 ‘직관’의 통찰로 ‘각성’되는 것”

 

 깨달음 논쟁에 적극적으로 나서 자신의 견해를 개진했던 김왕근 붓다로살자 편집장이 '현대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를 주제로 자신의 담론을 펼친다. 이에 <미디어붓다>는 김왕근 편집장의 글을 게재하기로 했다. 단 김왕근 편집장의 견해가 미디어붓다의 논지 및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알려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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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

 

1, 깨달음이란?
2. 브라만교의 깨달음
3. 싯다르타의 깨달음
4. 대승불교의 신비주의
5. 현대 불교의 깨달음

 

어떤 사상(思想)도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싯다르타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56억7000만 년 전부터 수행을 하다가 2600년 전 인도에서 깨달음을 얻은 존재’로 인식한다면, 그의 사상은 ‘시대를 초월한 독립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신화일 뿐이다. 
 
이런 신화를 배제할 때, 우리는 싯다르타를 다른 모든 인간들처럼 시대의 다른 사상가들과 ‘대화’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싯다르타는 2600년 전 인도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당시까지 있어 왔던 인도의 사상적 체계 안에서 산 사람이다. 그러면서 당시의 사상과 철학을 상당 부분 계승했고, 동시에 이를 개혁했다. 오늘날 문명인의 눈으로 보면, 개혁해야 했으나 개혁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이것은 싯다르타의 삶이 당시의 시공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당연한 것이다.

 

싯다르타의 사상은, 구체적으로는 싯다르타 탄생 이전부터 있어왔던 당시 ‘브라만 교’의 이론에서 영향을 받았다. 싯다르타가 6년간의 고행을 한 것은 브라만교 이론의 핵심인 ‘아트만’을 찾기 위해서였으며, 그의 깨달음은 브라만교의 질문에 대한 어떤 ‘답’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싯다르타의 사상은 당시 시대사상의 표현이며 시대사상과의 대화이고 이를 통한 후손들과의 대화다.

 

인도의 형이상학

 

싯다르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인도 사상을 일별할 필요성이 있다. 싯다르타 생존 시에 인도의 종교는 브라만교였다. 브라만교, 혹은 이를 이어받은 힌두교의 경전은, 보다 윤리적인 기독교 경전들에 비해 매우 영적이고 관조적이다. 영성(靈性)으로 가득 찬 인도인들은 ‘형이상학’에 관심이 많았다. 기원전 1500년 전부터 이어 내려오는 브라만교의 성전(聖典), ‘베다’ 찬가 중에는 우주론적 사색을 담은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나사디야 수크타(무유아가 無有雅歌)’가 그렇다.

 

그 때에 유(有)도 없었고, 무(無)도 없었으며,
창공도 없었고 그 위의 천계도 없었다.
무엇으로 덮여 있었던가?
어디에서? 누구의 보호 아래?
물은 있었던가, 깊이 모를 물은?

그 때에 죽음도 없었고, 불멸도 없었으며,
밤의 표징도, 낮의 표징도 없었다.
스스로의 충동으로, 저 유일자가
호흡 없이 호흡하였나니,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이 있었으니, 태초에 이 모든 것은 어둠에 싸인 물이었다.
그때 껍질에 싸여 누웠던
저 유일자가 열력(tapas)으로 생겨났다.
(중략)
실로 누가 이것을 알까?
(중략)
이 창조가 어디로부터, 누구에 의해서 행해졌는가를.
혹은 그렇지도 않은가를.
최고의 천상에서 이 세계를 굽어보는 이,
그만이 실로 알고 있으리라.
어쩌면 그도 또한 모를지도 몰라.

 

우주의 기원, 인간 존재의 본질, 영혼과 자아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인도인들은 깊이 사색했다. 이런 사색은 인간의 ‘구원’과 관계된다. 이런 사상 체계의 특성은, 카스트 등을 통해서 생겨난 현실의 어려움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싯다르타도 “인생은 고(苦)다”라고 했지만, 인도 철학은 대체로 염세적인 경향을 띠었고 근심 걱정 없는 경박한 즐거움을 비난했으며 인간의 영적인 목적에 대한 성찰을 일깨웠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과 윤회, 그리고 이로부터의 해탈은 원래 브라만교의 핵심 주제였다. 그렇다면 브라만교는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고 있는가?

 

범아일여(梵我一如), 브라만과 아트만

 

인도인들은 인간을 영적(靈的) 존재로 파악한다. 영적 존재란, 무상하게 이 세상에서 살다가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죽을 운명에 있지만, 그러나 무상(無常)을 극복하려면 죽음 이후에도 죽지 않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직면한 문제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브라만교는 독특한 인간론과 우주론을 만들어냈다. 브라만교는 우선 우주와 인간의 존재가 “있다”고 설정한다. 그 ‘존재’는 ‘비존재’로부터 비롯된다.

 

“실로 처음에 비존재가 있었다. 실로 그로부터 존재가 생겨났다. 그 자신이 영혼이 되었다. 그리하여 ‘멋지게 만들어졌다’고 불린다. 실로 그 ‘멋지게 만들어진 자’야말로 존재의 본질이다. 이 본질을 깨닫게 되면 누구나 환희를 누린다.”

 

그러나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말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베다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도 있다.

 

“처음에 존재만이 있었다. 이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누군가 말하기를 ‘처음에는 비존재만이 있었고 그 밖에 다른 것은 없었다. 그 비존재에서 존재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실로 내 아들아, 비존재에서 존재가 어떻게 생겨나겠는가? 내 아들아, 처음에는 오히려 존재만 있었고 그 밖에 다른 것은 없었느니라.

그 존재가 생각했다.

‘내가 여럿이 되어볼까, 내가 태어나볼까’하고.

그리하여 불이 생겨났고, 불이 생각하기를 ‘내가 여럿이 되어 태어나볼까’ 했다. 그리하여 물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원하면 물은 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물이 생각하기를 ‘내가 여럿이 되어 태어나 볼까’ 했다. 그리하여 음식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비가 내리면 어디나 음식이 풍성해진다. 먹는 음식은 오직 그 물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생각이 고대 인도에서는 유행했다. 고대의 인도 철학은 그 ‘존재’의 본질을 ‘브라만’이라고 규정한다. 브라만이란 ‘우주의 생명’이며 ‘위대한 실재’다. 그것은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인간의 언어로 “브라만은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브라만은 다만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라는 ‘부정’의 형식으로만 표현된다. 혹은 ‘진리 중의 진리’, ‘생명의 숨’ 같은 추상적인 표현이나 “진실로 먼저 브라만이 있었다. 그는 오직 그 자신에 대해 ‘나는 브라만이다’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되었다.”식의 신화적 설명만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브라만을 아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봄으로써 가능하다. 브라만은 온 우주에 두루 퍼져 있고 또한 인간의 마음에도 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알면 브라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인간의 마음은 ‘영혼’으로서의 아트만이다. “우주의 본질이 곧 인간의 본질과 일치한다”는 이런 사상이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는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선언으로 표현돼 있다.

 

“만물의 근원인 그 미세한 존재를 세상 만물이 아트만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진리다. 그 존재가 아트만이다. 그것이 바로 너다. 슈베타케투야.”

 

브라만이 곧 아트만이며 아트만은 곧 마음이고 영혼이라는 사상, 즉 우주와 내가 같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은 브라만교의 현자(賢者) 야즈나발키야의 대화에도 표현돼 있다.

 

“사칼리야가 말했다.
‘아즈나발키야여,.. 브라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나는 신들과 신들의 기반이 되는 사방의 방향을 알고 있소.’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그대가 신들과 그 신들의 기반이 되는 방향을 안다면 동쪽 방향은 어떤 신이라고 생각하오?’
‘태양신이오.’
‘그러면 태양신의 기반은 무엇이오?’
‘눈(眼)이오.’
‘눈의 기반은 어디요?’
‘형태(色)요.’
‘형태의 기반은 어디요?’
‘마음이오. 마음을 통해 형태를 알 수 있기 때문이오.’오직 마음에만 형태가 기반할 수 있는 것이라오.

 

누구든, 신이든 현자(賢者)든 혹은 다른 일반 인간이든 이 사실을 진실로 깨달은 자는 곧바로 브라만이 된다. 신들도 이같이 브라만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인간은 깨달음을 통해서 우주의 실체, 즉 브라만을 보고 그때 브라만과 하나가 되며 구원을 받는다. 그 깨달음이란 인간 영혼으로서의 ‘아트만’에 대한 깨달음이다. 아트만은 브라만과 동일체이며 동시에 인간 내부에 있는 지고한 영혼으로, 나약하고 이기적이며 아집에 가득 찬 육신을 통제하는 주체다. 그 주체를 보는 자, 즉 ‘깨달은 자’는 윤회의 고통에서 해방된다. 브라만교에서 ‘깨달음’이란 곧 ‘아트만을 봄’이다. 브라만교의 경전 우파니샤드의 다음 구절은 아트만과 깨달음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아트만(자아 自我)을 육신이라는 수레에 앉아 있는 주인으로 알고 붓디(buddhi, 覺)를 마부로 알며, 마음을 그 고삐로, 감각들을 말(馬)로, 감각의 대상들을 마차가 달리는 길로 알아라.... 그러나 사려 분별이 없고 의지가 약한 자의 감각들은 마치 마부가 다루기 어려운 말처럼 길길이 날뛴다. 사려분별이 있고 의지가 강한 자의 경우에는, 그의 감각이 마치 마부가 잘 다룰 수 있는 훌륭한 말과 같아서 잘 제어된다. 판단이 흐리고 생각이 깊지 못하며 부도덕한 자는 결코 불멸을 얻어 영적인 무형의 세계에 이를 수 없으며, 다만 생사의 윤회를 거듭할 뿐이다. 그러나 분별 있고 판단이 바르며 마음이 청정한 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상태에 도달한다.”

 

아트만은 모든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지속하는 주체다. 그것은 일체 만유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모든 피조물에 편재(遍在)한다. 그것 외에 제2의 것이란 있을 수 없으며, 별도의 다른 술어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만물의 중심 생명이다. “숨 쉴 때 호흡이라 불리고, 말할 때는 언어, 볼 때는 눈, 들을 때는 귀, 인식할 때는 의근(意根)이라 불리는 이 모든 것은 다만 그의 작용에 대한 이름일 뿐이다.”라고 말해진다.

 

지켜보는 자아는 의식을 비추지만, 그 자체는 결코 의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보는 모든 것의 제1원리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보편적인 자아는 지각될 수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영혼은 불가해한 것이다. 왜냐? 그것은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아트만은 인간의 감각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러나 이 보편적 자아, 즉 아트만은 영적(靈的)인 존재이며 그러므로 ‘의식(意識)’의 존재임에 분명하다. 감각이 없을 경우 혹은 감각이 활동을 정지한 때에도 인간의 몸속에는 여전히 지속하는 보편적인 의식이 실재한다고 가정된다. 이 실재는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모든 것의 전제가 되는 근본적인 주체이기 때문이다.

 

브라만교 이론에서 인간의 영혼은 세 가지 상태를 지닌다. 이들은 각성위(깨어있는 상태), 몽면위(꿈의 상태), 숙면위(숙면 상태) 그리고 투리야라고 불리는 제4위이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아는 자기 바깥의 일반적인 대상들을 의식한다. 꿈의 상태에서 자아는 각성 상태의 경험들을 토대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며 영혼은 육신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린다. 숙면 상태에서는 꿈도 의욕도 지니지 않으며 영혼은 일시적으로 브라만과 하나가 된다. 숙면 상태에서 우리는 모든 욕망 위로 떠오르며,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다. 이른바 모든 대립은 이 대상 없는 순수 인식 주체 상태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숙면위는 순수한 무의식과 혼동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영혼의 제 4위’가 필요했다. 이것은 순수 직관 의식이며, 내적이거나 외적인 대상에 대한 그 어떤 형태의 지식도 없는 상태이다. 이것이 바로 아트만이다. 

 

“제4위는 주관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며, 객관을 의식하는 것도 아니며, 주관과 객관의 양자 모두를 의식하는 것도 아니며, 순수의식도 아니며, 아주 감각적인 물질도 아니며, 완전한 어둠도 아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초월적이며, 불가해하며, 추론할 수 없으며, 상상도 할 수 없으며,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아가 지닌 의식의 유일한 본질이며, 세계의 완성이며, 영원한 평화와 행복이다. 실로 이것은 아트만이다.”

 

그렇다면 이 아트만을 보기 위해서, 즉 ‘깨닫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행해야 한다. 수행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제사, 베다의 연구, 그리고 비움-나눔, 이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의 길은 스승의 집에 머물면서 거룩한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다. 세 번째의 길은 스승의 집에서 금욕적으로 자기 자신의 육체를 엄격히 통제하는 것이다.

 

브라만교의 경전인 우파니샤드는 숲속에서 금욕적인 고행, 엄격한 수행을 거친 스승으로부터 제자나 맏아들에게 비밀스럽게 전수된다. 이때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열등한 교사의 가르침으로는 참되게 이해할 수 없다. 그 자신이 브라만임을 아는 스승이 가르쳐야만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생각해보게 되는 그 존재에 대해 바르게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은 파악하기 힘들며, 어떤 미세한 존재보다 더욱 미세하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라는 말 자체가 산스크리트어로 '(사제 간에) 가까이 앉음'이란 뜻으로, ‘(스승의 발아래에) 가까이 앉아 스승에게 직접 전수받는 신비한 지식’이라는 뜻이다.

 

돈오, 브라만교의 ‘깨달음’

 

인간은 어떻게 ‘아트만’을 볼 수가 있는가? 즉, 어떻게 깨달을 수가 있는가? 깨닫기 위해서는 수행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파니샤드’의 설명을 보면 ‘깨달음’, 즉 ‘아트만에 도달함’과 ‘수행’의 선후 관계가 불분명하다. 때로는 “깨달은 자는 평온해진다”고 하고 때로는 “마음의 평온을 유지해야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초기 우파니샤드인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에서는 “브라만을 아는 자의 이 영원한 위대성은 행위로 말미암아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브라만을 아는 자의 위대함 그 자체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자는 악업으로 얼룩지지 않는다.”고 한다. 현자 야즈나발키야는 자나카 왕에게 베다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그러므로 이것을 깨닫는 자는 평온해지며, 자기를 억제하며, 비우게 되고 인내하며, 집중하여 그 자신 내부에 있는 아트만을 보고, 아트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봅니다. 악이 그를 이기지 못하며, 그가 모든 악을 이깁니다. 악이 그를 불사르지 못하며, 그가 모든 악을 불사릅니다. 악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얼룩짐에서 자유롭고,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브라만을 아는 자가 됩니다. 왕이시여, 이것이 브라만 세계요, 왕께서도 거기에 도달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자나카 왕은 ‘존경하는 분이시여, 비데하 왕국과 제 자신까지 그대에게 바칩니다.’ 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분석해 보면, ‘현자 야즈나발키야’는 “‘브라만을 아는 자’란 아트만이며 아트만을 보면 브라만을 알게 된다”는 식의 ‘순환 논리’에 빠져 있음이 발견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깨닫는 자는 평온해진다”는 구절이 눈에 띈다. 마음의 평정이나 비움 같은 것은 수행의 전 단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기보다는 깨달음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는 마음의 평정은 깨달음의 전제 조건으로 간주된다. “악의 길을 단념하지 못한 자,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한 자,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는 자,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자는 올바른 지식으로도 아트만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보다 더 후기의 문서인 ‘문다카 우파니샤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빛과 순수의 본질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이 아트만은 진리와 고행과 (아트만을 아는) 올바른 지혜, 그리고 꾸준히 정숙함을 유지하는 것으로 얻어진다. 불완전한 것들을 떨쳐버리는 금욕적인 수행을 통해 그는 아트만을 보게 되리라.”

 

감각으로는 알 수 없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아트만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평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마음의 평정은 아트만을 보아야 이룰 수 있다. 이런 모순된 순환 논리가 ‘우파니샤드’에 내재한다.

 

‘아트만’론은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닮아있다. 플라톤은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이념형, 즉 이데아의 복사물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수많은 ‘나무’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다만 가현(假現)이며 실재가 아니고, 실재는 이데아다. 그렇다면 그 이데아는 어떤 모양인가? 그것은 생멸을 거듭하면서 변화되어가는 무상한 그 무엇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항구여일할 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트만도 변화하는 것 가운데 있는, 변하지 않는 ‘존재’(being)이지 무상한 존재로서의 ‘되어가는 존재’ 즉 생성(becoming)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상한 생성의 존재가 변하지 않는 ‘존재’를 아는 과정 즉 해탈의 과정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것이다. 깨달음이란 이미 내재하고 있는 바가 ‘드러난 것’일 뿐이기 때문에 ‘돈오(頓悟)’적이고 ‘돈수(頓修)’적이다. 아트만을 보는 자는 그 순간 스스로 우주적 존재로서의 브라만/아트만임을 알게 되어 더 이상 업보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헛된 욕망도 사라지고 고통도 없어지며, 수많은 위험에 처해질 필요도 없으며, 해탈을 방해하는 수많은 분별지의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는 어리석음도 없게 된다.

 

깨달음은 경험적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직관으로 가능한 것이고, 지혜로운 스승에게서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경험적 측면에서 볼 때 아트만은 이해될 수 없는 존재다. ‘유일 실재’로서의 아트만은 오직 인간이 지닌 비범한 ‘직관’의 통찰로 ‘각성’된다. 그 각성은 ‘아트만의 자기 발견’이 될 것이고, 자아를 발견한 아트만은 자신이 세계임을 다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파니샤드가 가르치는 해탈 방정식이다.

 

이것은 지식이나 이성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곧 ‘종교’의 영역이고 믿음의 영역이다. 인간은 자기 속에 내재한 무한자의 압력을 느끼며, 궁극자를 움켜잡기 위하여 손을 뻗고 기도한다. 이때 신과의 합일을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이상이다. “모든 새들은 둥지가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간다. 이와 같이 이 모든 것은 궁극자에게 간다.” “오 주여, 당신이 그런 것처럼, 내가 당신에게 깃들게 하소서. 오 주여, 당신이 내게 깃드소서... 오 주여, 내가 청정해지도록 하소서.” “당신은 나의 안식처입니다.” 이렇게 ‘우파니샤드’는 노래한다. 브라만교에서 ‘깨달음’은 ‘신에 대한 믿음’이다. 

 

반면에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지금, 여기’의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싯다르타는 당시에 엘리트들의 관심을 끌던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답하지 않으며, 현실의 삶을 영위하는 방법, 마음을 내는 방법에 집중한다. 싯다르타는 철저히 현실의 고(苦)와 고의 소멸에만 관심을 갖는다. 브라만교가 철학이라면 불교는 심리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