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5

예수는 있다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를 읽고

예수는 있다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를 읽고

그래도 예수는 있다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를 읽고

 

허호익 교수(대전신대 교수, 한국기독교학회 총무)

 

 오강남 교수가 지은 「예수는 없다」를 읽은 이들이 더러 있어, 얼마 전 사석에서 이 책에 대한 얘기를 처음 듣게 되었다. 한 분의 얘기로는 그 책을 읽은 자기 교회의 평신도들의 반응이 찬반 양론으로 상반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입장에서 기독교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의 폭을 넓혀 주고 문자주의적 해석의 한계를 잘 지적하였다는 쪽이고, 다른 한편은 예수에 대한 이해가 편협 되였으며 상술에 편승한 교묘한 반기독교적인 책이라는 주장이었다고 전해 주었다.

오강남 교수를 만난 적도 있고 이름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도대체 어떤 내용을 쓰셨을까 궁금하던 차에, 책방에 가서 그 자리에 서서 대충 읽어보았다. 이 십 년 가까이 기독론을 연구하고 가르쳐 온 필자로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닌데 하는 강력한 충동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부탁 받고 망설이든 끝에, 신학의 일차적인 임무가 변증(Apology)이라는 평소의 신념에 따라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서평이 도발적이라고 느껴지더라도 이 책제목 자체가 도발적인 데서 유발된 것임을 독자들이 널리 양해 주시길 바란다.

오강남 교수를 진지한 학자로서 존경하여 왔다. 그의 글을 더러 읽은 기억이 있다. 그의 어떤 글에서 읽은 "빈 배 이야기"는 큰 깨달음이 되었다. 캄캄한 밤중에 나룻배를 저어 가던 사공이 마주 오는 배와 충돌하는 순간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삿대질을 하고 보니, 그 배는 사공이 없는 빈 배(empty boat)였다는 그런 얘기이다.

빈배에 부딪치고 나서 화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오강남 교수는 "예수는 없다"라는 도발적이고 상업적인 표제의 깃발을 앞세우고 좌충우돌로 돌진하는 것이니, 그래서 점잖게 따지려는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책을 다시 꼼꼼히 정독하였다. 그런데 처음 읽을 때는 눈에 들어 오지 않았던 표지의 그림과 글자들이 시야에 몰려오면서 어떤 전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우선 표지의 그림은 하늘을 향해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을 땅으로 향하게 뒤집어 놓은 것이었다. [예수는 없다]는 제목 아래에 "기독교 뒤집어 읽기"라는 부제를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목 위에는 "원로 종교학자가 필생의 연구 끝에 찍은 마침표"라는 설명을 달았다. "원로 종교학자가 평생을 연구해 보니 예수는 없다"는 이미지가 한 눈에 들어오도록 교묘히 만들어 놓은 듯한 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기독론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신학자가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보고, 참고문헌을 따져 본다면, "예수"에 대한 오 교수의 연구는 원로 교수의 필생의 연구치고는 너무 피상적이고 편협되어 있으며 주제를 포괄적으로 다루지도 못했고, 이미 20세기 학자들 사이에는 반론을 통해 극복된 19세기의 낡은 주장들을 나열하고 있다는 점을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판이 심하다고 느껴지는 분이 있으면, 연륜이 짧은 젊은 학도가 학문을 길에 접어들면서 습작으로 쓴, 예수는 누구며, 어떻게 사셨는가를 다룬 책([그리스도의 삼직무론],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과 비교하여 보길 바란다. 그래도 믿어지지 않으면 시카고 트리분 지의 신문기자였던 리 스토로벨(Lee Strobel)이 쓴 [예수 사건](두란노, 2000)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를 재확인하고 싶으면, 아주 최근의 예수 연구의 결정판인 타이센과 메르츠의 공저 [역사적 예수](다산글방, 2001)도 정독하길 바란다.

원로교수의 필생의 역작인 [예수는 없다]와 일개의 저널리스트가 21개월 동안 13명의 각 분야의 최고의 학자를 직접 인터뷰하면서 [예수 사건]의 역사적 과학적 객관성을 포괄적으로 진지하게 추구한 것을 비교해 본다면, 누구라도 이러한 비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 책 1장에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라는 제목으로 믿음도 유아적인 문자주의의 유치한 상태에서 벗어나 성숙하여야 한다는 것을 그토록 강조하였는데, 앞서 소개한 책을 한 권만이라도 읽어본다면, 오 교수 자신의 예수 이해가 얼마나 제한적이며, 유치하고 미숙한 것인지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문제점은 목차에 그대로 드러난다. 예수를 표제로 다룬 책에서 실제로 예수에 관한 부분은 전체의 5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다. 전체 335쪽 중 67 쪽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예수에 관해 다룬 작은 부분마저도 낡은 자료에 근거하여 편협하게 다루어졌다. 예수에 관한 논의 중에서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서 활발하게 진행되어 온 중요한 주제들, 즉 예수의 생애와 교훈의 특징, 하나님 나라의 선포, 예수의 율법에 대한 전향적인 가르침, 병자와 약자를 치유하고 죄인과 더불어 먹고 마신 삶의 행태(life style), 성전정화 및 십자가 사건과 그 의미, 그리고 부활의 역사성에 관한 논쟁과 부활 신앙 같은 주제들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 성실한 학자라면 무시해 버리는 '예수의 성생활', '예수는 동성애자인가?' 하는 진지한 결론도 없는 주제를 다루느라 아까운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없다"는 명제가 지닌 의미도 전체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간단하고 피상적으로 설명되었다.

한마디로 예수를 학문적으로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원로 종교학자의 필생의 연구라는 표제만 없었더라도 필자의 이 같은 비판은 면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이런 생각을 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듯이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도 제대론 된 예수 이해는 없는 것이 아닌가? 어느 코미디언이 한 손으로 눈만 가리고 "영구 없다"고 외치는 우스개가 연상되었다.

예수에 대한 곡해와 왜곡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세기에 셀수스라는 희랍철학자는 예수의 처녀 탄생을 부정하고 예수는 로마 군인 판테라(Pantera)의 사생아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친 것이라는 주장은 이미 마태복음(27:64)에도 기록되어 있다.

오 교수가 예수에 관해 그나마 다룬 것이 있다면 동정녀 탄생에 관한 것인데, 이 역시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동정녀 탄생은 종교사적으로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비보통의 탄생 이야기에 속하는 영웅신화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이미 18세기 서양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리고 그 동안 예수 연구를 통해 이미 비판적으로 극복된 내용들이 대부분이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역사적 예수 이해는 "역사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해석 방법에 따라 적어도 4-5단계에 걸쳐 발전하여 왔다. 그러나 오 교수는 2-3단계에 즉 슈바이처나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회의론에 멈추어 있는 것 같다([역사적 예수], 44쪽). 불트만의 제자들이 스승을 비판하고 역사적 예수에 관한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고, 최근에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제3의 방식과 고고학적 성과로 역사적 예수의 관한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상식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 같다.

그 단적인 예가 예수를 여전히 신과 인간 사이에 테어난 영웅신화의 일례로 본다는 점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제우스 신과 모친 사이의 성관계를 통해 태어난 영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전기는 그가 죽은지 400년 이상이 지나서 플루타크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역사적 신빙성이 결여된 전설일 가능성이 크다. 오 교수가 사례로 들지 않은 것으로 제우스가 알렉산더 뿐만 아니라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를 낳은 이야기와 아폴로가 아스크레피우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를 낳은 이야기 등은 모두 영웅적인 인물의 출생의 특수성을 신과 인간의 성관계를 통해 이뤄진 것으로 주장하는 다신론적 혼음신화 사례이다. 그러나 성서에는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다신론적 혼음신화는 철저히 거부되었다.

그리고 예수의 탄생 설화를 모친의 오른 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부처의 신묘한 탄생신화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지만, 부처의 경우 출생 년도조차 기원전 563?-483?년경 사이의 여러 설이 존재할 정도로 그 역사적 정확성이 떨어지며, 그러나 그에 관한 최초의 전기는 700년이 지난 주후 1세기에 기록된 것이므로 꾸며낸 전설일 가능성이 많다.

또한 예수의 탄생을 박혁거세의 난생설화와 유사한 특별한 출생의 영웅신화라 했지만, BC 69년에 태어난 박혁거세에 대한 역사적 기록도 역시 11세기가 지나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 이후 동정녀 탄생은 성령의 잉태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처녀 잉태는 예수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유일무이한 사례라는 것은 이미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경우 처녀탄생이라는 표현보다는 성령에 의한 잉태라는 것이 초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에 관한 최초의 전기는 그가 죽은 지 30년쯤 되어서 마가복음으로 기록되었다. 예수의 성령의 잉태에 관해서는 예수가 죽은지 50년도 못되어 마태와 누가에 의해 공개적인 공식 문서로 기록되었다. 그것보다 더 논쟁이 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예수가 죽은 지 24년만에 기록된 것(고전 15장)이므로 그 속보성과 정확성은 다른 고대 문서와 비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13세기가 지난 다음에 기록한 것과 30-50년이 못되어서 기록한 것 사이의 역사적 진정성을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부활 사건이 있은 지 24년만에 이를 공식적인 문서로 작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때에는 예수에 대해 들었거나 친히 만난 많은 사람들이 생존해 있었을 시기이므로, 적대적 목격자의 반론이 가능한 시기에 이런 기록을 공개한 것 그 자체가 예수 부활의 역사적 검증이 되기에 충분한 요소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최근의 역사가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오 교수는 예수의 십자가나 부활 사건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상 부활의 역사성에 관한 문제(부활에 관한 다섯 가지 역사적 정황 증거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예수 사건] 326-341 쪽 참고 바람)가 동정녀 탄생의 역사성보다 더 큰 문제로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행 2:36)고 믿는다면, 그 하나님께서 성령의 잉태로 처녀의 몸에서 그 아들을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오 교수의 동정녀 탄생과 관련하여 제기한 문제들이 지니고 있는 방법론적 약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과 베들레헴 아이들의 학살과 나사렛에서의 성장을 구약성서(렘 23:5, 미 5:2, 호 11:1, 렘 31:15, 삿 13:5)에 근거한 전설로 보느냐 아니면 구약성서의 성취로 보느냐는 문제이다. 1835년 쉬트라우스가 [예수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를 구분하고, 마태 2장의 이 구절은 제자들이 예수의 생애를 전설로 꾸며내기 위해 구약에서 그 근거를 찾아낸 역사적 신화의 사례들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반대로 생각한다. 타이센과 메르츠도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에 비추어 예수에 대한 기억을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근거로 그 기억을 만든 것"(171 쪽)이라는 19세기 이래의 주장을 반박한다. 아주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경향인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제3의 탐구 방법론에 의하면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서를 창조적으로 활용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존의 (불유쾌한) 사실들 - 예수의 처형, 제자의 도주, 성전정화 사건, 예수의 갈릴리 출신 - 에 어떤 의미를 부여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구약 성서적 해석은 그 해석의 대상이 될만한 사건을 전제로 한다."(172쪽)는 것이다.

꾸며낸 전설의 경우에는 과장과 미화가 따르고 불리하고 불유쾌하고 상호모순되는 내용은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통례이다. 많은 성서역사학자들의 주장처럼 이 점에 있어서 성서는 예외에 속한다는 것이다. 오 교수가 제기한 동정녀 탄생의 문제도 여기에 해당한다. 예수가 처녀 잉태하여 베들레헴에서 탄생했고,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그의 출생으로 인해 베들레헴 동년배 아이들이 무참히 죽는 등, 이 비상식적이고 불유쾌하고 모순적인 사실이 역사적 실체적 진실이지만, 이 모든 사건을 복음서의 독자들로서는 다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겼기에 구약성서를 인용하고 기록된 약속의 성취라고 주장함으로써 역사적 검정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역사적 사건을 검증하는 방법과 2000년 전 성서기자가 역사적 사건을 검증하는 방식이 달랐다는 것을 비판적인 서양 역사학자나 성서학자들이 이해하는 데에도 거의 20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을 상기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18세기 이후로 성서의 상호모순된 기록을 역사적 비진정성의 근거로 주장하였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성서의 경우처럼 그 세부적인 모순이야말로 그 사건 자체를 여러 사람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술한 것이므로 그 역사적 진정성이 더욱 확실한 근거로 해석하게 되었다. 날조된 역사일수록 그 내용이 일사불란하다는 문서비평의 결과인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오 교수는 처녀 잉태는 이사야 7:14의 알마(almah, 젊은 여자)라는 히브리어가 70인역 희랍어 파르테노스(parthenos, 처녀)로 오역된 것에 근거하여 꾸며낸 전설이라는 주장을 폈는데, 사실 이 역시 1835년 쉬트라우스라는 독일 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된 낡은 주장이다. 쉬트라우스 주장에 따라 남자를 경험하지 못한 동정녀(virgin)를 뜻하는 희랍어 '파르테노스(parthenos)'는 히브리어 '베툴라(betulah)'에 해당하고, 아이를 낳은 여자도 포함하는 '젊은 여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알마(almah)는 희랍어 '베아니스(veanis)'에 해당한다는 후속적인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나 19세기의 하르낙(A. Harnack)에 이어 20세기의 바르트(K. Barth)도 이에 대해 반박하였다. '알마'의 경우 '젊은 여자(young girl)'를 의미하지만, 그 사용 문맥에서는 분명히 결혼하지 아니한 여자를 가르키는 사례가 아주 많다(창 24:43, 출 2:8, 시 68:25, 잠 30:19, 아 1:3, 6:8)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베툴라' 역시 '처녀'를 의미하지만 때로는 남편 없는 과부(욜 1:8)를 의미하기도 한다. 고대어, 특히 히브어의 경우 각 단어의 의미는 단정적이기보다는 문맥에 따라서 다분히 포용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 7:14절의 '알마'를 '파르테노스'라 번역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동시에 마태가 인용한 단어는 전후 문맥에 비추어 '처녀'의 뜻임이 분명해진다(마 1:18, 25, 눅 1:34)." 따라서 저 쉬트라우스의 오역설 역시 이미 반박된 낡은 주장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마태가 이사야를 인용하였지만, 누가의 기록에 보면 이 인용도 없으며 이 인용과 상관없이 처녀 탄생을 당황스러운 현실로 기록하고 있다. 처녀로서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 자신이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눅 1:34)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엄청난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가장 어려웠던 이는 당사자 마리아였다는 점을 누가는 놓치지 않았다. 남자를 받아들인 적인 없는데 배가 점점 불러오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이 현실을 수용하고 믿음으로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기록한 누가는 직업이 의사였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합리적인 의사로서 동정녀 탄생과 같은 상식적으로 도전 받을 이야기를 생략하고도 얼마든지 유리하게 예수를 증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식적인 문서로 기록하는 모험을 강행했다는 사실이 그 역사성의 한 증거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언급한 32개 나라, 54개 도시, 9개 섬을 면밀히 조사한 고고학적 연구 결과, 하나도 틀림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예수사건], 125-127 쪽). 반면에 몰몬경의 경우 그 책에 나오는 어떤 인명, 국가명, 지명도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성령의 잉태와 동정녀 탄생을 기록한 누가는 당대의 지성인이요 합리적 의사이면서 사실을 정확한 다룬 역사가였음으로 그 진술의 신뢰도를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칼 바르트와 같은 지성적이고 비판적인 신학자도 동정녀 탄생은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유일회적이고 비연속적이고 돌발적인 궁극적으로 새로운 사건이므로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로만 믿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 역사적 신앙적 의미를 자세히 제시하였다. 적어도 현대에 와서 동정녀 탄생의 문제를 거론하려면 칼 바르트의 견해(Church Dogmatics, I-2권 15항) 정도는 언급하여야 하는 것이 신학계의 상식임을 종교학자들은 모르는 것 같다.

오 교수는 서론에서 '21세기의 역사적 과학적 문헌학적 정보 시대의 새로운 예수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려고'(20 쪽) 이 책을 쓴다고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오 교수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가 19세기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스스로 드러내 보인 셈이 되고 말았다. 그 구체적인 증거를 더 알고 싶으면, 인구조사와 베들레헴 탄생, 베들레헴 영아 학살과 나사렛의 존재에 대한 오강남 교수에 낡은 견해 대한 최근의 역사적 연구의 통쾌한 반박이 [예수 사건] 130-136 쪽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지면 관계상 이 책에서 다룬 구약과 관련된 창세기 이야기, 부족신관, 율법주의 신관 등에 관한 문제를 일일이 다 비판할 수 없지만, 이에 관해서는 [성서의 앞선 생각 I](한국장로출판사, 1998년)의 창조의 하나님, 조상들의 하나님, 히브리의 하나님, 계약의 하나님을 주제로 다룬 최근의 신학적 연구 결과들을 참고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없다]는 표제 아래에 "예수를 안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이 그릇 믿는 것이다. 예수를 바로 믿지 않는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다."라는 김진홍 목사의 글을 구호처럼 내걸었다. 표지만 보면 의도적으로 "예수는 없으니,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다"라는 무의식적인 암시를 주는 듯하다. 정말 오랫동안 필자는 곰곰이 이 말의 숨은 뜻을 생각했다. "예수를 바로 믿지 않는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는가?" "정말 그런가?" 엄격하게 따지면 그 누가 "나는 예수를 제대로 바로 믿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런 말은 한 김진홍 목사도 그렇게는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이 주장을 일반 명제로 환원하면 "바로 하지 않을 바에는 안 하는 게 낫다"는 논리가 되는데, 정말로 타당한 논리인가? 전부 아니면 전무의 미숙한 논리가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흑백논리의 선봉이요, 궤변의 극치요, 오만과 편견의 발로가 아닌가? 적어도 불교에 심취한 바 있으며,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종교학자가 내세울 논리인가?

이는 기독교들에게 신앙의 성숙을 질타하는 오 교수의 자신의 논리와도 배치된다. 교육학적으로도 맞지 않는 말이다. 처음부터 누가 바르게 잘할 수 있는가? 고쳐가면서 잘해지는 것이고, 그 누구도 절대 완벽하게 잘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점수(漸修)와 성화(聖化)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는가?

오 교수가 책 앞면과 뒷면의 표지에 인용한 김진홍 목사의 논리가 맞는 말이라면, 그 논리대로 이렇게 말하는 것도 맞는 말이 될 것이다.

"책을 안 쓰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이 그릇 쓰는 것이다. 책을 바로 쓰지 않는다면 차라리 쓰지 않는 게 낫다.

출처: 허호익 교수의 [신학 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