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Namgok Lee - 소설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빌려온 네 권 가운데, 한 권을 이틀만에 다 읽었다. 여러... | Facebook

Namgok Lee - 소설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빌려온 네 권 가운데, 한 권을 이틀만에 다 읽었다. 여러... | Facebook

Namgok Lee
52 m  · 
소설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빌려온 네 권 가운데, 한 권을 이틀만에 다 읽었다.
여러 번거로운 생각들을 피하는데는 몰입(沒入)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런데 그 몰입(沒入)이 재미에 치우치다 보면, 뭔가 균형이 깨지는 느낌도 있고 해서 소설 읽기 전에 고전(古典) 한 대목 씩을 본다.
요즘은 논어와 장태원 선배님의 ‘어느 촌로의 노자 읽기’를 읽는다.
 "덕(德)으로써 정치를 하는 것은 마치 북극성이 그 자리에 있고 여러 별들이 그것을 향해 돌고 있는 것과 같다."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而衆星 共之(논어 2/1)
비단 정치 뿐이랴.
하기는 개인의 삶을 경영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정치다.
재승박덕(才勝薄德)이라는 말이 있다.
재능과 덕성이 쌍전(雙全)해야 성공적인 인생을 경영할 수 있다.
그것이 자유와 행복의 길이라는 말이다.
덕(德)이 북극성이다. 여러 분야의 재능은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야  재덕(才德) 쌍전(雙全)이다.
 재능은 사람이 AI를 따르지 못한다. 점점 인간의 가장 뛰어나고 고유한 특성은 덕(德)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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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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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兩) 극단(極端)이 기묘한 형태로 서로를 견제하며, 나라가 한 쪽 극단(極端)의 바다에 침몰하는 것을 막고 있다. 일종의 방파제(防波堤) 역할이다.
우리의 현실을 이렇게 바라볼 수도 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나의 애타는 시각일 수 있다.
문제는  증오와 적대의 퇴행적 편가름이 방파제 역할을 넘어 정치 무대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제를 푸는 길은  새로운 정치력이 그 틈새를 벌려 점차 무대의 중심에 진입하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재구성을 통한 21세기형 선진국가(문명 전환)를 지향하는 연합정치가 그것이다.
이번 총선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의 약진을 기대했지만, 그것이 그 동안 형성된 강고한 관성(慣性)의 벽을 뚫기에는 아직은 턱없이 약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독점적 양당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나라의 운명이 이 힌판 싸움에 걸려 있다’며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싸움에 나서고 있다.
총선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를 위한 틈새가 넓어지기를 바라지만,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어떤 경우라도 지금과 같은 정치로는 21세기 한반도의 꿈을 실현할 수 없다는 국민적 각성이 커질 것이다.
그것이 틈새를 벌려 중원(中原)으로 진출해야할 새로운 정치의 희망이다.
 세기(世紀)를 내다보는 종합철학을 바탕으로  합리(合理)와 양심(良心)의 대결합(大結合)과 허망한 권력을 향한 정치공학의 찌질한 전술이 아닌 ‘The next peninsula’를 바라보는 한반도 대전략(大戰略)으로 제7공화국을 준비하는 ‘진실한’ 정치가 총선 이후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총선에 관한 언급은 이것으로 그치려 한다.
빌려온 소설을 읽으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겠다.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라는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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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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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반야심경이 에고(ego)를 찬탄하는 경으로 들린다.
원석의 에고는 무색 무취다.
(照見般若心經에고讚歎)
노자의 천지불인 성인불인
(天地不仁 聖人不仁)도 이 원석의 에고를 찬탄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 허상의 관념들 (탐진치)이 에고에 색칠과 가공을 하는 것이다.
공자는 이 관념들을 끊어냈다.
제자들이 그것을 가리켜 절사( 絶四 네가지를 끊음; 무의ㆍ무필ㆍ무고ㆍ무아)라고 불렀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이름에서 연상된 것이지만, '허상의 어릿광대 놀음'에서 에고를 해방하라.
에고는 생명의 원초적 에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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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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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常識)과 도덕(道德)은 바뀐다.
천동설이 상식이었을 때는 지동설은 괴설(怪說)로 취급 받았다.
대륙(大陸) 이동설(移動說)도 언젠가는 상식이 될지 모른다.
도덕이나 정의관도 바뀐다.
왕에 대한 충성은 근대 국가에서는 더 이상 도덕이나 정의가 아니다.
시대와 사회적 조건에 따라 구체적인 상식과 도덕은 바뀌지만, 공통점이 있다.
그 시대나 사회를 지탱하는데 그 시대의 상식과 도덕이 조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인류라는 종(種)이 존속하고 번영하는 동안은 그 상식과 도덕이 인류라는 종(種)의 가장 큰 특성인 지성(知性)의 진화와 방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어짐과 단절의 섞임 속에서,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지성(知性)의 진화가 면면히 작용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이 진화적 낙관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 사항이고, 수많은 종(種)들이 멸종한 것처럼 인류라는 종(種)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다만 지금까지의 어떤 종(種)보다, 자연선택의 과정에서 살아남아 번영할지 아니면 쇠퇴하여 멸종에 이를지가 스스로의 인위적 선택에 많이 달려 있다는 것이 다를 것이다.
물론 우주적 차원에서 한 점 먼지에 불과한 지구, 그 지구의 시간에서도 이제 막 탄생한 인류를 생각한다면, 인위적 선택이라는 것의 미미함을 느끼게도 되지만, 우주와 생명의 신비를 인식하는 지성을 가진 ‘나’가 ‘주체적 선택’으로 스스로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종(種)의 위대성을 느끼기도 한다. 
개인 뿐 아니라, 여러 공동체들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어제 원불교 총부를 산책하다가 돌에 새겨진 지과필개(知過必改)라는 문구를 보았다.
그런데 ‘개(改)’의 글자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좀 다르게 새겨져서 처음에는 제대로 읽지를 못해 궁금했다. 
마침 지나가는 원불교 대학원생에게 물어보아서 알게 되었다.
눈빛이 얼마나 형형하고 평온한지, 한 번 지나친 인연이지만 그 인상이 머리에 남았다.
어제 활짝 피어나는 봄 꽃도 좋았지만, 이 청년을 만난 것이 정말 좋았다.
‘지과필개(知過必改)’ 잘못을 알면 반드시 고친다.
잘못을 알아도 고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논어에서도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이야기 한다.
그런데 나는 그 이전에 ‘지과(知過;잘못을 알아차리는 것)’가 어려운 것이 더 큰 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게 된다.
그 원인이 바로 우리 시대의 ‘상식과 도덕의 혼돈’이 아닌가 한다.
내가 ‘붕괴’라고 말하지 않고 ‘혼돈’이라고 하는 것은 낡은 상식과 도덕이 붕괴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고, 그러나 우리 시대에 맞는 새로운 상식과 도덕이 인간의 지성의 진화에 선순환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혼돈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성(知性) 면에서 영향력이 큰 사람들, 이른바 선도(先導) 층의 극단과 혼돈이 큰 원인으로 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총론(總論)과 각론(各論), 대관(大觀)과 세찰(細察)이 서로 어긋나는데,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혼돈이고, 어느 한 쪽 편에 치우치는 것이 극단이다.
태양이 내일도 뜨리라는 믿음은 지구라는 행성이 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로 그 운행을 계속하리라는 믿음에 다름 아니다.
총론(總論)이나 대관(大觀)이 구심력이라면, 각론(各論)이나 세찰(細察)은 원심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상식과 도덕’이 과도기적 혼돈을 벗어나 인간 지성의 진화에 맞게 새롭게 정립되는 것이 사회와 나라 나아가 인류라는 공동체가 살아남아 번영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윤소영이 풀어쓴 ‘종의 기원, 자연선택의 신비를 밝히다’를 읽으면서 오버랩되는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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