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5

독도를 누가 지킬 수 있나 군인인가, 시인인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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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누가 지킬 수 있나
군인인가, 시인인가?

2008-08-14 (목) 00:00

이학종 | urubella@naver.com


허우성 교수(경희대)가 ‘재미있는’ 제목의 논문 한 편을 썼다. 어쩌면 재미라는 표현보다는 ‘의미심장한’, 아니면 ‘튀는’ 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릴 지도 모르겠다. 논문의 제목은 ‘누가 독도를 지킬 수 있을까. 시인인가 군인인가?’다. 일단 제목부터가 심상찮다. 사실 이 제목이 기자가 이 논문을 읽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허 교수의 발제는 관념적이고 감정적이고,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는 결코 독도를 지킬 수 없으며, 반드시 일정한, 적어도 자기자신을 지킬 수 있는 세력을 갖추어야 함을 만해의 일관된 소신과 입장을 통해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 논문이 시인들이 만해마을 옆을 흐르는 하천의 돌들 만큼이나 많이 운집한 만해축전의 ‘21세기 국제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됐으니, 허 교수의 이 못말리는 ‘튐’은 용기인가 만용인가?

허 교수는 한 발 더 나아가 ‘국가’편에서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자고 주장한 이래 시인의 역할에 대해 수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플라톤을 대변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어 시인들의 감상적 안일함을 논박한다.

“진리에 비해 저열한 것을 제작함으로써 그(시인)도 화가와 같으며, 혼의 최선의 부분이 아닌 같은 수준의 (저열한) 부분과 함께 지냄으로써 이 점에서 닮게 되네. 이래서, 훌륭하게 다스려질 국가에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게 이제 정당하게 되었는데…”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을 대변해 시인을 ‘화가처럼 실재 이하의 것을 제작하고 혼의 저열한 부분을 일깨우고 강화하면서 이성적인 부분을 파멸시킨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시인은 측정하는 것, 계산하는 것, 계량하는 작용에서 부족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지적 능력이 모자라다는 것인데, 사람의 혼에도 최선의 부분, 곧 이성적 부분으로 헤아리는 기능이 있고, 이것이 개인에 있어서나 국가에 있어서나 다른 저열한 부분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민감한 대목을 논문에서 소개한 허우성 교수의 ‘노림수’는 무엇일까. 막연한 절창만 나열할 것이 아니라 근현대 최고의 시인 만해가 주창한 것처럼 세력의 중요성을 오늘날의 적지않은 시인들이 간과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파헤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허 교수는 예서 그치지 않고 2005년 역시 독도문제가 불거졌을 때, 독도를 찾아간 시인들의 모습을 자신의 논문으로 불러들인다.

“동해바다에 있는 독도를 지키기 위해, 2005년 한국의 시인들은 떼를 지어 배를 타고 독도를 둘러보고 시집 한 권을 남겼다. 강은교 외 한국시인협회 회원 시인들이 펴낸 이 시집의 제목은 『내 사랑 독도: 독도 바위를 깨면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문학세계사)이다. 이 시집에서 민족시인 고은을 비롯해 강은교, 신경림 등 시인 44명은 이구동성으로 독도사랑을 외치고 있다. 시인들이 독도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하다. 우리 땅, 조국, 우리의 혼, 겨레, 막내 자식, 아기, 혈육, 피, 국토의 분신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는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마치 주석처럼 덧붙인다.

“한국의 시인들은 신체의 일부인 독도를 지키자고 민족감정을 부추기고 의분과 용기를 일으키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태부족이다. 독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외교술과 해군술의 강화도 요구했어야 했다. 독도가 우리 자체의 일부임을 노래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지킬 만한 세력을 양성할 대책도 수립했어야 했다. 의분만으로 그치게 되면, 그것은 자칫 우리에게 실제로 없는 힘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파토스만 부추기고 계산하고 따지는 이성적인 부분은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시인이 있다면, 그런 시인은 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할 것이다.”

허우성 교수는 결론을 내리는 부분에서 다시 만해를 끌어들인다.

“망국에 대한 만해의 울분과 한은 깊었다. 그는 조선이 패배자가 된 일에 대해서도, 그런 처지를 견디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도 끓어오르는 통분을 억제하지 못했다. 만해는 조선인에게 자유의 수호신인 세력이 없었으므로, 자유와 생명 그리고 민적(民籍)에의 권리를 빼앗겼다고 보고, 민족이 자신의 독립 국가를 세우고 영위해 나가는데 필수적인 세력을 갈망했고, 세력의 상징적 인물로 전략과 전술이 특출한 이순신과 을지문덕을 내세우기도 했다.”

요즘 만해를 계승한다고 하는 자들은 생명과 평화가 귀하다고 말하면서도 세력의 필요성에 대해 별로 발언하지 않는다고 일침을 가한 허 교수는 “생명과 평화는 칭송하는 것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오늘날 만해를 계승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단정한다.

허우성 교수가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 쓴 문장은 어쩌면 해당되는 시인들에 대한 뼈아픈 할과 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마지막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기사를 맺는다.

“만해에게 강자와 채권자의 권리주장이 만들어 내는 인과의 힘은, 한겨울에 살을 에어 낼 것처럼 휘몰아치는 북풍과도 같았다. 만해는 그것을 절절히 느끼면서 동양 평화를 위해서라도 자기를 보존할 만한 세력은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강자들이 힘으로써 우리의 자유와 생명을 앗아가기 전에 그것들을 지키는 것은, 나중에 망국의 한을 품거나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것보다 백번 나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물어보는 것이다. 누가 독도를 지킬 수 있을까, 시인인가 군인인가? 그런데 오늘날 야만적 문명이 정말 끝이 났다면, 시만 읊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