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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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민 연구실 > 생태 연구 > 육식소비를 줄이는 것이 생태를 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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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소비를 줄이는 것이 생태를 살리는 길이다.
2011-04-29

최현민


지난 겨울 우리는 매일 매스컴을 통해 구제역 사태를 접해야만 했다. 구제역 사태는 과연 나와 무관할까? 아니다! 구제역 사태가 일어난 근본원인은 공장식 축산업에 있다. 2008년 자료에 따르면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75.8kg인데 비해 육식 소비량이 35.4kg이라고 한다. 이 엄청난 고기 수요를 충족시키려면 공장식 축산업이 발전할 수 밖에 없다.


고기의 대량생산을 위해 소나 돼지의 사료에 성장호르몬을 주입해 억지로 살찌운다. 돼지의 경우 비대해진 체중을 지탱하지 못한 체 도살장에 가는 도중, 다리가 부러져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이러한 공장식 축산업은 생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전에는 집에서 기르는 소의 배설물을 밭에 거름으로 쓰곤 했지만 오늘날에는 불가능하다. 분뇨 속에 다량의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이 섞여 있어 썩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 분뇨는 바다에 버려져 해양을 오염시켜버린다. 또한 가축의 배설물에서 나오는 이산화질소는 이산화탄소보다 296배나 지구온난화 효과가 크다.


이렇듯 육식 소비는 생명경시, 대기오염, 바다오염 등 상상을 초월할만큼 생태를 파괴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우리 모두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육식소비를 줄여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고기 량의 반을 줄이게 되면 생태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한다. 육식소비가 줄어들면, 공장식 축산업이 줄어들고, 그로 인한 생태 파괴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기를 적게 먹는 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오히려 그것이 나를 포함하여 우리 식구가 건강하게 사는 길이고 우리 사회와 생태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생태위기는 우리 존재의 위기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도록 창조하셨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사람을 만드셨다”고 한다. 사순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사제는 우리의 이마에 십자 성호를 그으며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우리는 흙에서 온 존재이고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다. 첫 조상인 ‘아담(Adam)’의 어원은 히브리어 ‘아다마(Adamah)로부터 왔다. ‘아다마’는 흙이라는 뜻이다. 아담은 흙에서 왔고 우리 모두도 그러하다. 이는 우리가 자연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자연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숨쉬며 살아감은 공기 중에 산소가 있기 때문이고, 그 산소는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렇듯 자연파괴는 우리 존재를 위기로 몰고 간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드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겉모습이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을 부여받았음을 뜻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삼라만상을 잘 관리하라는 소명을 주셨다. 사제와 수도자만이 아니라 평신도인 우리 모두도 그 소명을 부여받았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생태를 살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청지기로서의 소명을 사는 길이 아닐까?


마더씨튼께서는 영원에 대한 갈망이 강한 분이셨다. 그분이 지닌 영원의 영성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영혼에 대한 갈망은 '하느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본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회복하는 길,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사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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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함께 사는 법 
- 영성생활 41호(2011 봄)
                        
최현민 (씨튼연구원 원장)

1. 구제역과 그 이후

 올 겨울은 살벌했다. 혹독한 추위가 그러했고 개인적으로 앓았던 감기 또한 예년보다 훨씬 심했다. 매일 이어지는 영하의 날씨 속에 몸만이 아니라 마음마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혹독한 겨울날씨나 지독한 감기는 참을 수 있었다. 이번 겨울이 여느 해보다 더 힘겹게 여겨진 건 구제역으로 인한 가축들의 살처분 사태 때문이다. 정부는 구제역 대응책으로 340여만 마리의 가축을 생매장하는 살처분 방식을 채택했다. 이렇듯 엄청난 재앙과 반생명적 현실 앞에서 가슴이 막막해짐을 느낀다.
"뒷산에 올라 웅덩이라도 파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자식처럼 키운 소를 생매장한 한 농부가 쓴 글의 한 대목이다.

자신이 키운 소가 팔려가도 눈물이 나서 차마 소를 쳐다보지 못한다는데 하물며 평생 자식같이 키워온 가축을 생매장하고 돌아서는 농부의 뻥뚫린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매스컴을 통해서나 구제역 소식을 접한 나는 농부의 그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도 없다.

 날이 풀리면 구제역 침출수, 토사유실로 인한 토양 하천 지하수 오염, 전염병 발생 등 2-3차 오염을 걱정하는 글들이 연일 신문을 메우고 있다. 아, 어쩌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나 싶다. 우리네 삶이 막장을 향해 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살처분을 감행하는 이들에게는 소나 돼지가 그저 먹거리일 뿐이니 전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그들을 처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생태에 관해 말하고 글쓰는 나의 행위들이 이런 현실 앞에 무력하게만 느껴진다.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연대성을 강조해온 나의 생각은 가축을 그저 고기덩어리로만 보는 이들 앞에서 비웃음을 당한 듯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옛날과 비교할 때 우리의 사고가 참 많이 달라졌다. 아니, 우리 자신이 변했다. 정부의 대응책에 대해 원망해 보지만 이러한 현실에 대해 우리는 아무 책임이 없는가? 이런 재앙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2. 동물도 기본권이 있다

구제역으로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이 현실에서 우리에게 성찰할 계기를 마련해주는 한 영화가 있다. 바로 작년에 개봉된 임순례 감독의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영화가 그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구제역과 연관지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는 김도연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불교적 판타지 성향을 띤 영화이다. 그러나 불교지식 없이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건 주인공이 소와 함께 여행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치유해간다는 사실이다. 분명 이 영화는 소가 인간의 식욕을 채우는 '고기덩어리'에 불과한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이 영화감독인 임순례는 동물보호단체 '카라' 대표이기도 하다. 그녀는 동물의 기본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가축들에게도 적절한 음식과 거처와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제공돼야 하고, 위생적인 측면이나 병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고, 인간으로부터 어떤 물리적이거나 심리적인 학대가 없어야 한다."

가축이 음식이나 재산이 아니라 권리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더럽고 좁은 축사, 살만 찌우는 사료, 대량 살처분을 강요하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동물들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가? 이 영화의 스태프들은 촬영 쫑파티에서 소 '먹보'가 슈퍼마켓에서 보던 소고기가 아니라 ‘생명’임을 깨닫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이렇듯 동물의 기본권을 이야기해도 자본논리 안에서 그 해결은 쉽지 않은 것 같다.

 한국과 FTA 협상을 진행한 유럽연합 EU에서는 이미 2000년대초부터 동물권에 대해 언급해왔다. 가축은 '단순한 농산물이 아니라 감수성과 지각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게 동물의 입장을 고려해서 나온 정의라기보다, 건강한 가축을 길러 좋은 값을 받자는 자본주의적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동물권을 보호하자는 EU축산정책 전환이 우리 축산농가의 열악한 현실을 바꿀 동력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설혹 축산농가의 현실이 바뀐다해도 그건 '높은 상품가치'를 지닌 '질높은 고기'를 생산하자는 경제논리에 의한 것이지, 순수하게 동물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자는 것은 아니다. 동물권 그 자체를 인정해 준다는 건 자본주의적 사고 안에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자본주의 논리에서 자유로와질 수 있을까? 그래서 동물도 최소한의 기본권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나는 그 힌트를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영화에서 엿본다.

3.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영화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은 선불교의 심우도(尋牛圖)를 배경에 깔고 있다. 심우도는 자기 본성을 찾아가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보통 자기를 찾아가는 수행과정을 그린 10개의 소그림이라 하여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그 첫 번째 그림은 소를 찾아나서는 것인데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소와 함께 여행을 시작한다. 그는 소를 팔기 위해 소를 싣고 우시장으로 향하는데 이것이 소와 함께 떠나는 여행의 동기가 된다. 소는 자신이 팔려 가는 것을 아는지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고삐를 잡고 애쓰는 그의 모습은 십우도의 제4도를 연상케 한다. 제4도는 소를 발견한 후 소가 말을 듣지 않자 고삐를 잡고 낑낑대는 목동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치 우리가 자신과 씨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보통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면서 살아가려 한다. 영화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인생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체험한다. 십우도에서 '소'는 자기의 본래성을 상징하는데, 영화에서도 주인공 선호는 소를 통해 자신의 마음상태를 깨달아간다. 다시 말해 그는 소를 통해 자기 내면의 문제를 깨닫고 그 안에서 치유되어 간다.
 
영화에서는 느닷없이 한 부자(父子)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막부가내로 자기 아들에게 소를 한번 타게 해달라고 주인공 선호에게 애원한다.  결국 어린 소년은 소를 타게 되는데 이는 자신을 찾고 깨침을 얻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십우도에서 제6도를 떠올리게 한다. 이 그림의 제목은 기우귀가(騎牛歸家)로, 소와 씨름하던 목동이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영화에서는 어린 소년이 동자승이 되어 설법하는 것으로 이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거울이 아름다운 꽃을 비춘다고 거울 자체가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미워할 일을 마음에 비추지 않으면 미워하는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설법은 옛 애인의 배신에 대해 증오와 분노를 지녔던 주인공 선우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여행하던 중  7년전 헤어진 옛 애인과 만나게 된다. 그녀와의 재회를 통해 그는 자신의 마음에 옛 사랑의 번뇌가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고 반듯한 직장도 없이 농촌에서 힘겹게 농사짓고 살아온 그는 그런 현실을 벗어나고자 집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는 여행하면서 옛 애인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현실에서 오는 번뇌를 떨쳐 버리고 치유되어간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 도움이 되었던 건 사람보다 함께 여행한 '먹보 소'와 아름다운 산골풍경이었다. 곧 그는 소와 여행하면서 '소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인 제10도는 입전수수(入廛垂手, 세상에 들어가 덕을 베풀다)이다. 깨침을 얻은 후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 자비행을 베푼다는 의미이다. 영화에서 주인공도 자신과 세상과 화해하고 다시 자기 현실로 돌아간다. 자기가 떠났던 그 '현실' 속으로 되돌아가지만 그는 종전의 그가 아니었다. 미움을 떠나 보내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로서 돌아온 것이다.

4. 소와 함께 사는 법

앞서 구제역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분명한 건 구제역 재앙을 초래한 배경에는 육식위주의 식문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0년 이후 소득이 증가하면서 육류 소비도 크게 증가했다. 2008년 기준으로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75.8kg인 반면, 1인당 연간 육류 소비량은 무려 35.4kg이나 된다고 한다. 이 엄청난 육식 소비를 뒷받침하려면 수십마리의 소를 몰아넣고 풀 아닌 사료를 주는 공장식 축산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이 좁은 땅에서 많은 가축을 키우기 위해  밀집사육환경이 될 수 밖에 없기에 예방차원에서 다량의 항생제를 쓰게 되고 결국 가축들은 질병에 취약해 질 수밖에 없다. 구제역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연쇄과정에서 발생되는 것이다.

 이 '불편한 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정부의 부실한 대응을 비판하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비난하기 전에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스스로 책임감을 느낄 때 비로소 구체적으로 내가 무얼 실천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강우일 주교님은 주교회의 누리집에 구제역 사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성찰을 촉구하는 글을 올렸다.(2011 1월27일 한겨레신문 25면) 거기서 주교님도 이 끔찍한 사태의 진정한 배후엔 '과도한 육식문화'가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수천만명이 기아에 시달리는데도 육류생산을 위해 자국 곡식의 3분의 1가량을 가축의 사료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 후진국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그저 먼 나라 이야기일 뿐, 나와 무관하다고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육류를 소비하면 할수록 악순환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육류섭취를 줄인다면 산업구조가 바뀔 수 있다. 먹는 고기 양을 조금씩만 줄여도 공장식 축산업을 감축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를 '기회'로 삼자. 문제를 단순히 문제로만 본다면 눈앞에 닥친 과제해결에만 급급하게 된다. 그러나 당장의 문제가 사라졌다 해도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또다시 같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하여 문제를 단순히 없애는 차원이 아니라 근원적 치유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물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동물에 대한 인식전환이 될 때 우리는 보다 인간답게 살게 된다. 동물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바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삶의 의미가 무언지에 대한 문제와 연관이 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소를 영물(靈物)이라 했다. 그래서 어른들을 소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농부들에게 소는 고단한 노동을 함께하는 동료이며 벗이고 가족이었다. 앞선 말한 영화에 나오는 '소와 인간'의 관계가 본래 우리가 소와 맺고 살아온 관계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너무 멀리 그 본래 자리로부터 벗어나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늑대나 사자가 송아지나 어린아기와 어울리고 딩굴고 장난하며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없는’ 생명평화 공동체의 이상을 꿈꾸었다. 그런 이상적 공동체는 차치하고서라도 최소한 생태적 타자에 대한 도덕적 무감각함에서 깨어나야 하지 않나 싶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너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떨쳐 버리고 다시 자기 현실로 되돌아가 먹보 소와 함께 밭을 일군다. '먹보' 소와 함께 다시 땅을 일구는 선호에게서 나는 목우자(牧牛子)의 모습을 본다. 불가(佛家)에서 목우자는 한 걸음 한 걸음 마음을 닦아 가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보조국사 지눌(知訥)은 자신을 목우자라 칭했나보다. 자기 본래면목이 무명(無明)에 가려 있을 때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무명을 벗겨내려면 소와 함께 땅을, 곧 우리의 마음밭을 일구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일은 너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자각함에서 시작되지 않나 싶다.

 “소비자들의 '윤리적 소비'는 지구 환경을 살리고, 제3세계 사람들의 기아문제를 해결하며, 농촌과 농민을 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구제역과 같은 가축 전염병의 대재앙을 막을 수 있다.”라는 홍하일(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 연대 대표)의 발언에 깊이 공감한다. 우리 각자가 자각하고 실천할 때 희망은 있다. 지금이 바로 그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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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Rolling Home with a Bull

감독 임순례

개봉일 2010년 11월 3일
시간 108 ~ 110분
언어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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