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카로 가는 길 - 이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적 가르침
무함마드 아사드 (지은이),하연희 (옮긴이)루비박스2014-11-05
원제 : The Road to Mecca (1980년)





























미리보기
책소개
유럽 출신의 저명한 무슬림 작가 무함마드 아사드의 자전적 이야기로, 독일 일간지 기자로서 이슬람 세계를 방문했던 그가 진정한 이슬람을 만나 매료되고, 그들의 일부가 되기로 결심하는 과정을 세심하게 그리고 있다.
이슬람을 미화하고자 하는 의도도, 이슬람교를 포교하려는 목적도 없다. 무슬림인 동시에 기자, 지성인으로서 지은이 역시 석유가 가져다준 막대한 부와 국가 간·민족 간의 갈등, 권력 다툼, 코란의 잘못된 해석과 인습, 무지와 독선으로 인해 이슬람 세계가 본래의 정신과 창의력을 상실하고 쇠락하고 퇴색되었음을 한탄한다. 그에 의하면 이런 상황은 무슬림이 이슬람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지 결코 이슬람이란 종교의 결함 때문이 아니다.
목차
어떤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1 목마름
2 길의 시작
3 바람
4 목소리
5 영혼과 육신
6 꿈
7 길의 중간
8 지니
9 페르시아에서 온 편지
10 다잘
11 지하드
12 길의 끝
용어 해설
책속에서
P. 38 벌써 사흘째 물을 한 방울도 못 마셨다. 낙타는 닷새째다. 낙타는 하루 이틀 더 버틸 수도 있겠지만 나는 불가능하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공포가 뒤엉켜 서로를 점점 증폭시킨다. … 우리는 천천히 고통스럽게 서쪽으로 움직인다. 서쪽이라니 우습지 않은가! 이렇게 기만적인 모래언덕의 바다에서 ‘서쪽’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도 나는 살아야겠다. 그래서 계속 나아간다. …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눈을 감을 수도 없다. 눈꺼풀을 움직일 때마다 눈동자를 뜨거운 쇠로 지지는 것 같다. 갈증과 열기. 참담한 적막. 메마른 적막에 귓속 혈관을 따라 피가 흐르는 소리와 낙타 숨소리가 도드라진다. 이 세상 마지막 소리인 것 같다. 낙타와 나는 지구상에 남은 최후의 생명체다. 접기
P. 52 쏟아지는 별빛 아래 사막의 침묵 속에서 부드럽고 미지근한 바람이 모래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동안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가 뒤엉켰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나는 그 이미지를 따라 기억의 여행을 계속한다.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은 그 시절을 집어삼킨 어두운 기억이다. 이후로 다시 사랑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메카에 묻혀 있다. 아무... 더보기
P. 111 나는 처음부터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촌을 만든다는 구상이 불합리하다고 느꼈다. 이는 별 탈 없는 나라에 유럽 사회의 풀리지 않는 난제들을 이식하는 꼴이었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귀향이 아니다. 유럽식 사고, 유럽식 목표에 따라 이곳을 고향으로 변모시키려 한 것이다. 이 성문 안에서 그들은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랍인들의 결연한 저항에서 어떤 모순도 찾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 한복판에 유대인의 고향을 만든다는 구상과 맞설 뿐이었다. 부당한 상황에 맞서 정당하게 싸우고 있는 쪽은 아랍인이었다. 접기
P. 412 검은 천으로 덮인 정육면체 건물(‘카바’는 아랍어로 정육면체란 뜻이다)은 드넓은 사원 한가운데 뜬 고요한 섬과 같았다. … 선과 형태를 최소화한 정육면체의 극단적인 단순미는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인간이 어떤 미를 창조하더라도 신 앞에 내놓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만이다. 따라서 신의 광영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가능한 한 모두 덜어내라.”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형태는 단순하지만 그 엄청난 규모에서 인간의 오만함이 드러난다. 카바는 규모조차 인간의 무욕과 신에 대한 복종을 나타낸다. 이 작은 건축물에서 풍기는 겸허함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접기
추천글
19세기 ‘인디아나 존스’ 리처드 버튼 경에 견줄 만한 지식과 ‘아라비아의 로렌스’ 토마스 E. 로렌스를 방불케 하는 모험이 가득하다. 무함마드 아사드는 용감무쌍한 행동력과 세밀한 관찰력을 보여준다. 또한 이슬람의 해석과 서술에 있어 지금까지의 어떤 선학들도 능가한다.
- 텔레그램 (추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솔직 담백하게 써내려간 자전적 이야기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읽는 이의 세계관까지 바꾸어놓는 작품.
- 뉴욕 포스트
이슬람 세계를 둘러싼 심오한 문제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힘 있는 서술이 친근하면서도 날카롭게 마음을 파고든다.
-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던 이슬람 세계의 다채로운 단면을 조명하는 작품. 설득력 있고 진중한 문체가 독자를 사로잡는다.
- 세인트루이스 글로브데모크랫
흔히 볼 수 없는 영적 자서전과, 모험과 미적 체험으로 가득한 좋은 여행기의 결합!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한 인간의 사려 깊은 목소리로 근동 지역의 주요 관심사에 대해서 듣는다.
- 이달의 북클럽 뉴욕
그의 저술이 탁월한 것은 이 책을 읽는 독자가 거의 예외 없이 이슬람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는 데 있는데, 이는 그가 이 책을 쓴 목적이기도 하다. … 이 책은 반세기 전에 쓰여졌다. 그러나 서양과 이슬람 세계 간에 상존하는 이해의 간극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책에 담긴 그의 안목은 더욱 값진 것이 되었다.
- 톰 버틀러 보던 (《내 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50》)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14년 11월 6일자 새책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4년 11월 8일자 '새로나온 책'
저자 및 역자소개
무함마드 아사드 (Muhammad Asad)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저널리스트 겸 저술가. 1900년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가정에서 레오폴트 바이스Leopold Weiss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빈 대학에서 예술사와 철학을 공부하다가 중퇴하고 기자의 길로 들어선 후, 독일의 권위 있는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자이퉁>의 외신부 기자로 아라비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곳곳을 누볐다. 26세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 이븐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 깊은 친분을 맺었으며, 이후 인도로 건너가 시인이자 사상가인 무함마드 이크발Muhammad Iqbal과 함께 파키스탄 건국 과정에 참여했고 파키스탄의 UN 주재 전권공사로 활동했다.
52세에 외교관을 사직한 이후 집필 활동에 전념했는데, 자서전이기도 한 이 책 <메카로 가는 길>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예순부터는 코란 번역 작업에 몰두하였고 이는 그의 나이 여든에 <코란의 메시지The Message of The Qur'an>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992년 스페인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
서구 출신의 무슬림으로서 평생을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고 이슬람의 진정한 정신과 문화를 알리는 연구, 저술, 강연에 힘썼던 그를 기리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 있으며, 파키스탄 기념우표가 발행되기도 했다.
이 책은 1932년의 그의 마지막 사막 여행을 무대로 하고 있으며, 한 유럽인이 이슬람을 알게 되고 동화되어 가는 과정, 영적 깨달음이 스며들어 있는 그의 필생의 명저이다. 접기
최근작 : <메카로 가는 길>
하연희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영과를 졸업했습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옮긴 책으로는 『너무 무서워서 잠 못 드는 공학 이야기』 『어느 노과학자의 마지막 강의』 『프랑스 아이들은 왜 말대꾸를 하지 않을까?』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뜯어먹는 영어일기』가 있습니다.
최근작 : <흥이 나고 신이 나는 노래놀이> … 총 3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 세계에서 읽히는 고전, ‘이슬람’의 가르침과 정신세계를 다룬 영혼의 클래식, 국내 첫 출간!
이슬람 세계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통해, 지금의 이슬람 문제를 바라보는 바른 시각을 갖는다.
재미와 감동, 세상을 보는 통찰력과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책!
메카로 가는 길, 진정한 이슬람의 심장을 찾아서
지금의 이슬람, 어떻게 볼 것인가 ,
2014년 현재, 이슬람 세계로부터 여느 때보다 자주 들려오는 소식들은 하나같이 끔찍하고, 불안하며, 공포스럽다. 테러 단체 IS의 잔혹함, 끝없는 종교 분쟁과 내전, 인권 유린 당하는 여성들, 테러와 학살…. 한때는 이슬람도 서구 세계보다 더욱 진보적이고 찬란한 시절을 구가했다. 과학, 문학, 예술의 신기원을 열며 폭발적으로 세계로 뻗어나갔으며 황금기를 누렸던 이슬람이 이처럼 지구촌의 골칫덩이로 전락해 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작금의 현상만 봐서는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슬람에 대해 거시적이고 균형 있게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바르게 이해하고 진단할 수 있고, 나아가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그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이슬람의 진정한 뿌리, 바로 이슬람 그 자체이기도 한 이슬람의 종교와 정신세계를 아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 눈을 가린 공포심과 편견의 장막을 거둬내고, 이슬람에 눈을 맞추고 이슬람의 심장을 깊숙이 들여다볼 때다.
이슬람을 선택한 유럽인의 눈으로 진정한 이슬람을 들여다보다
1954년에 세상에 나온 후 여전히 이슬람교를 다룬 대표적인 서적으로서 전 세계에서 읽히고, 교재로 사용되며, 영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20세기의 위대한 저술로 손꼽히는 책이 있다. 진정한 이슬람의 ‘메카’로의 안내서 《메카로 가는 길》이다. 이 책은 유럽 출신의 저명한 무슬림 작가 무함마드 아사드(1900-1992, 개종 전 이름은 레오폴트 바이스)의 자전적 이야기로, 독일 일간지 기자로서 이슬람 세계를 방문했던 그가 진정한 이슬람을 만나 매료되고, 그들의 일부가 되기로 결심하는 과정을 세심하게 그리고 있다.
이 책에는 이슬람을 미화하고자 하는 의도도, 이슬람교를 포교하려는 목적도 없다. 무슬림인 동시에 기자, 지성인으로서 지은이 역시 석유가 가져다준 막대한 부와 국가 간·민족 간의 갈등, 권력 다툼, 코란의 잘못된 해석과 인습, 무지와 독선으로 인해 이슬람 세계가 본래의 정신과 창의력을 상실하고 쇠락하고 퇴색되었음을 한탄한다. 그에 의하면 이런 상황은 무슬림이 이슬람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지 결코 이슬람이란 종교의 결함 때문이 아니다.
이슬람은 어떻게 변질되어갔는가
지금의 IS와 같은 극단적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이슬람 사회의 혼란을 외세와 타종교 이념 탓으로 돌리며 이슬람 외의 모든 이념을 악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지하드(聖戰)라고 여긴다. 그리고 이슬람 내부를 다른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결한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의 진정한 가르침과 무관하며 대다수의 무슬림들의 신앙과도 같지 않다. 코란 어디에도 잔혹한 물질주의 세계관은 담겨 있지 않다고 이 책은 말한다. 본래 이슬람은 성분, 인종, 성별 등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고 누구나 평등한 권리와 의무, 기회를 부여하는 종교다. 계급의 개념이 없고 사제와 같은 신과 신도 사이의 중재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칼의 종교라는 편견과 달리 지식 추구를 신성한 의무로 여기며, 지하드 역시 자기 방어를 위해서만 지도자에 의해 선포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초기 이슬람은 지역과 인종을 초월하여 공통의 이상향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된 합리적인 공동체 건설을 목표로 하며 폐쇄적 사회 대신 이념을 바탕으로 한 최초의 개방적 사회를 제시함으로써 인류사의 새 장을 열었다.
그러나 수백 년에 걸쳐 본래의 이슬람 정신은 서서히 잊혀졌다. 부족 간 권력 다툼이 일면서 인간의 자유라는 덕목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슬람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왕권 세습이 버젓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 와중에 음모와 대립, 부족 간 탄압이 이어지며 종교는 정치권의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이는 평생을 무슬림으로서 참된 이슬람에 대한 계몽과 이슬람 세계의 발전을 위해 살았는데, ‘이슬람’이야말로 그가 찾은 안식처이자 혼미한 현 세대를 위한 해답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변질되지 않은 순수 이슬람의 아름다움과 정신세계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마주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더 균형 있는 시야를 가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영적 깨달음과 내적 변화를 다룬 20세기 영혼의 클래식
이 책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한 유럽인의 메카를 향한 23일간의 여행의 기록이다. 여행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 이슬람의 정신세계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책으로, 위대한 영적 고전을 소개하는 책 《내 인생의 탐나는 영혼의 책 50》(톰 버틀러 보던 지음, 오강남 옮김, 흐름출판, 2009)에 소개되기도 했다. 국내 최초로 번역, 출판된다.
《메카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이 내포하고 있는 ‘여행’은 두 가지다. 표면적으로는 실제로 그가 동행인 자이드와 함께 낙타를 타고 메카로 향하고 있는 외적 여행으로 작품의 틀을 이룬다. 두 번째는 내적 여행이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차 세계대전 이후 윤리적 가치가 붕괴되고 새로운 가치관이 확립되지 못한 ‘영적 진공 상태’를 겪은 그가 이슬람 안에서 해답을 찾아가는 내면의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이 두 개의 여행은 완벽하게 하나로 맞물리며 이야기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고 깊은 울림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서술은 서정적이면서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며 읽는 이에게 어떠한 강요 없이 자연스럽게 그의 여정에 동참하도록 손을 내민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무지와 편견으로 가려져 있던 안개가 걷히며 이슬람의 정신과 문화에 한 발짝 다가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가슴 뛰는 모험담이자, 생생한 이슬람 리포트, 그리고 영적 자서전
‘현재(1932년)’ 시점에서 지은이는 개종한 지 7년째에 접어들어, 아랍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고 낙타 안장도 더 이상 불편하지 않으며, 메디나에 아내와 아들을 두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 이븐 사우드의 신임을 얻어 그를 도와 열강의 정치적 음모를 파헤치기도 했고, 이탈리아군에 대항하는 사누시파의 무자헤딘을 돕다가 몇 차례 죽을 고비도 겪었다. 그렇지만 그는 정든 아라비아를 뒤로하고 또다시 여행을 떠나야 할 시점임을 직감하고 있다. 긴 여정이 시작될 것을 알기에, 그는 자석에 이끌리듯 메카로 향한다. 메카야말로 전 세계의 무슬림들의 영적 구심점, 키블라(무슬림들이 기도하는 방향)이자 그에게 있어 새로운 삶의 문이 열린 곳, 영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무대는 황량한 사막, 오아시스, 예언자의 도시 메디나의 모스크와 북적이는 바자르(시장)이지만, 그 가운데 수없이 상념에 젖으며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 지은이의 인생 여정을 오가게 된다. 수많은 왕과 왕족, 유목민족, 친구와 적들의 매력적인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 가운데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중동 국가들의 근대 역사,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 영토 분쟁,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 등 주요 쟁점들을 외신부 기자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과 관점으로 다룬다. 여행의 끝에는 지은이가 찾은 결코 가볍지 않은 해답이 기다리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슬람에 관한 몇 가지 견해
1. 현세를 위한 종교 이슬람
이슬람에서 ‘현세의 선’은 ‘내세의 선’에 우선한다. 코란에서 ‘내세의 선뿐만 아니라 현세의 선을 누릴 수 있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달리 원죄라는 개념이 없고, 육신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육체적 욕구 역시 신이 내려주신 인간의 한 속성일 뿐이므로 이겨내기보다 영적 욕구와 조화되는 삶을 지향한다. 미래보다 현재를 중시하고, 아무리 작은 것도 허투루 여기지 않으며, 구성원들의 사회 계약을 전제로 하는 이슬람의 성격 때문에 이슬람은 종교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생활, 제도, 정치 등 인간의 모든 문제에 깊숙이 관여한다.
“무함마드는 영혼이 세속의 삶과 분리 혹은 대립된다고 보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영혼과 육신은 하나의 현실, 즉 인생이 지닌 양면이었다. 그랬기에 그저 개인의 도덕적 관념을 보살피고 다듬는 데 멈추지 않고 이를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정신적?물리적 안녕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로 승화시키는 데 목표를 두었던 것이다.” p.327
“처음에는 코란에 너무 시시콜콜한 일상과 관련한 내용이 많아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육신과 영혼이 하나의 완전체를 이루는 만큼 그 어떤 부분도 ‘시시콜콜’하지 않다고 여긴다는 사실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p.148
2. 이슬람과 여성, 결혼
2014년 5월 27일 파키스탄의 한 여성이 아버지와 오빠의 돌에 맞아 숨졌다. 허락 없이 결혼하여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였다. 이슬람 사회에서 빈번하게 자행되는 ‘명예살인’과 투석형 등을 이유로 이슬람은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라고 여겨지지만, 이는 오해이다. 코란 어디에도 ‘명예살인’에 대한 구절이 없으며 오히려 여성을 평등하게 여긴다. 일부일처를 권장하며 여성에게 자유롭게 결혼?이혼할 권리, 상속권을 부여한다. 현재 이슬람의 여성 인권 문제는 코란의 가르침이 변질된 단적인 예이다.
“남편의 결혼에 동의하지 않는 아내는 얼마든지 이혼을 요구하고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다. … 무슬림 쇠락기 수백 년간 여성들이 율법에 보장된 이혼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는 종교가 아니라 관습의 문제였다. 여성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행태도 마찬가지다. 무함마드의 가르침이나 코란을 아무리 살펴봐도 이를 권장하는 대목은 없다.” p.320-321
“(무함마드는) 신 앞에 남녀가 평등하다는 당시 아무도 들어 보지 못한 주장을 펼쳤다. 여기에 더해 … 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사업을 할 수 있고 자유 의지에 따라 결혼할 수 있다는, 메카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발언까지 일삼았다.” p.327
3. 사막과 종교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가 된 뒤로 유일신 신앙은 모두 사막에서 생겨났다. 모세가 신의 음성을 들은 곳도 미디안 사막이었고, 예수가 신의 메시지를 받은 곳도 황량한 유대 사막이었으며,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도 메카 부근 사막의 히라 동굴에서 처음 신의 부름을 받았다. 이는 순수하고 단조로우며 절대적 존재에 순응하게 만드는 사막만의 고유한 특징 때문이다.
“사막은 사람에게 독립심을 불어넣는다. 척박하고 극히 인적이 드문 사막에서 사람은 속임수와 오해로 가득한 삶을 이해해 보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텅 빈 사막은 깨끗하며 타협을 모른다. 사람이 마음속에 간직해 온 환상을 모두 제거하고 무형의 절대적 존재를 받아들이게 해준다.” p.165
“이렇게 순수한 단조로움, 서서히 강도가 높아지는 감정의 끝 간 데를 확인하려는 감각적 욕망이 아랍 성향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대변한다. … 사막인에게만 내재하는 이러한 욕구로부터 초기 히브리인의 일신교와 무함마드의 신앙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 뒤에는 어머니와 같이 든든한 사막이 있었다.” p.154
4. 코란에서 말하는 지하드
IS가 최근 유튜브를 통해 공개한 강도 높은 전투 훈련 영상의 제목은 ‘지하드의 피’였다. 또 기자 참수 영상에 등장하는 인질 관리자의 이름은 ‘지하드 존’으로 불린다. 지하드=테러 활동으로 인식되면서 이슬람 교리를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코란에서 규정하는 신앙을 위한 성전聖戰 지하드는 자기 방어를 위한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개인은 지하드를 선포할 수 없으며,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할 수 없고, 적이 먼저 공격했을 때만 일으킬 수 있다고 코란은 명시한다. 무슬림끼리의 지하드는 불허하며, 이슬람에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을 시 종료된다. 지하드를 명분으로 활동하는 테러조직의 911과 같은 대학살, 한국의 김선일 씨를 비롯한 민간인 살해는 이슬람 교리를 자의적으로 왜곡 해석한 것이다. 지은이는 19세기 말 프랑스와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맞서 싸웠던 사누시파의 활동을 진정한 의미의 지하드로 꼽는다.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적도 아프리카로 남하하며 사누시파의 영향력 아래 있던 지역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평화가 깨졌다. … 진정한 이슬람의 지하드, 즉 코란에서 말하는 자기방어를 위한 전쟁이었다. ‘싸움을 거는 자들에게 대항하여 신의 방식으로 싸우라. 그러나 먼저 공격하지는 말라. 신은 침략자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탄압이 사라질 때까지 싸우라. 적들이 포기하면 모든 적대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p.355
5. 무슬림의 기도방식
무슬림들은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한다. 이슬람에서는 신과 인간 사이에는 매개자가 필요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고 믿기 때문에, 성직자나 조직화된 ‘교회’가 없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단체기도, 결혼식, 장례식 등을 주관할 수 있다. 책에는 개종 전의 지은이가 왜 기도에 기계적인 동작이 필요한지 묻는 대목이 나온다(p.106). 아랍 노인은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겠느냐고 되묻는다. 신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함께 만들었기에 영혼뿐 아니라 육체로도 기도해야 한다고 답한다. 무슬림들은 카바를 향해 섬으로써 신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며, 머리를 조아려 신 앞에 하잘것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고, 용서와 은총, 축복을 구한 뒤, 마지막으로 올바른 길을 가는 동료 무슬림과 인사를 나눈다.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기도한 방식이다.
“성직자나 조직화된 ‘교회’가 없는 이슬람에서 단체 기도는 단지 ‘예배드리는’ 시간이 아니라 진정 신을 경배한다고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다. 이슬람에는 제도화된 성례가 없어서 무슬림은 성인이라면 누구나 단체기도, 결혼식, 장례식 등을 주관할 수 있다. 자격증이나 임명장 따위는 필요 없다. 이슬람의 종교 지도자는 그저 신학과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경의와 명망을 얻은 사람일 뿐이다.” p.244 접기
마이리뷰
구매자 (0)
전체 (11)
리뷰쓰기
공감순

순수 이슬람 여행기 《메카로 가는 길》
서구의 라이프스타일은 현대 라이프 스타일이다. 서구의 기준에 우리의 모든 라이프스타일을 의심 없이 맞춰 왔다. 서구를 기준으로 하여 어긋나는 개념, 제도 등을 모두 열등하다고 치부하면서 자연스레 역사관조차도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진실인양 믿어 왔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적그리스도로 만들어 이슬람의 교리와 이상에 대해 왜곡된 문화를 전파하였다. 이러한 이슬람에 대한 악마적 선입견은 기독교라는 종교적 결속력과 함께 세계인들에게 편견을 심어주었다.
삶을 편견 없이 바라보기 위해서는 다양성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고착화된 이슬람 문화를 편견 없이 바라보기 위해서는 더욱 다양성이란 시각의 문화접근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기독교를 믿어왔던 나 역시도 이슬람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홍익희의 저서 《세 종교 이야기》를 통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대교의 역사가 아주 작은 다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의외의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이슬람이 기독교와 같은 줄기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생소하기만 했던 이슬람에 대한 시각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게 해 주었다.
《메카로 가는 길》의 저자 무함마드 아사드 역시도 유대인 집안에서 자라 서구 중심의 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었다. 파키스탄 외무부에서 저널리스트이자 저술가로 활동하였던 그는 26세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이후 참된 이슬람의 민낯을 알리기 위한 일생일대의 역작을 썼다. 서구 무슬림으로서 이슬람의 참 모습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23일간의 여행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1차 세계 대전 가운데 사회적, 윤리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지나며 노자사상을 탐닉하기도 하였던 그는 삼촌집이었던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머물게 되면서 무슬림의 정신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여행의 동반자 자이드와 함께 이슬람 국가를 여행하면서 뜨거운 사막의 열기와 모래바람을 통해 이슬람과 함께 숨쉬며 내리쬐는 태양의 가혹함 아래 고행의 길을 걷는 순례자로서 사막에 사는 아랍인들에게 세상이라는 의미를 반추해 보기도 한다. 서구의 음악과는 다른 유목민의 리듬에 매혹되는 과정과 대지의 광활함 가운데 낙타와 운명을 함께 하는 순간들을 서정적인 필치로 그려내며 이슬람의 참 모습을 자연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저자는 이슬람국가를 여행하면서 지금의 이슬람국가(IS)와 같은 폭력의 이미지가 아닌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이슬람의 정신세계를 회복하고 있다. 서구에서의 종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지만 이슬람에서는 교회 갈 이유가 없이 언제 어디서나 종교와 삶이 일치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저자는 이슬람인들의 정신과 육체가 서로 대척점에 있지 않고 하나로 통합되는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서서히 자신을 이슬람에 동화시켜 나간다. 황폐해져 가는 서구인들의 정신과 정서는 이슬람에 깃들여 있는 이러한 '정신과 육체'의 일치되는 삶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편견의 더께로 두껍게 쌓여있는 이슬람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각의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 아라비아 곳곳에 배여있는 단순한 삶의 미학이 가슴속에 배여드는 멋진 여행기이다.
- 접기
드림모노로그 2014-12-11 공감(6) 댓글(0)
Thanks to
공감
이슬람 정신과 문화의 본질에 다가서는 기회
우리나라가 중동국가들과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해오고 있어 이미 이슬람과 친숙하신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만, 필자는 그런 인연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카타르 등 중동국가들과 보건의료관리체계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면서부터는 아무래도 관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최근 터키에서 실종된 우리나라 젊은이가 이슬람 무장단체에 가입한 정황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중동지역과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해 말 우리말로 번역된 <메카로 가는 길>은 1954년에 출간된 대표적인 이슬람교의 안내서입니다. 이 책은 유럽 출신의 저명한 무슬림 작가 무함마드 아사드(1900-1992)가 이슬람에 매료되고 무슬림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자전적 기록입니다. 1900년 오스트리아령이었던 폴란드의 르보프(지금은 우크라이나령이라고 합니다)의 유복한 유대계 가정에서 레오폴트 바이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저자는 대를 이어 유대교 랍비가 되는 가풍 덕분에 일찍 유대교의 경전을 공부하게 되었지만,그 결과는 오히려 유대교에 대하여 회의였다고 했습니다. “경전 전반에 걸쳐 강조되는 도덕적이고 올바른 삶, 예언자들의 신심 등에는 물론 경의를 표했지만, 구약이나 탈무드에서 말하는 신은 너무 과도하게 의례에 집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히브리인 외에 다른 민족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71쪽)”
모험과 사건에 관심이 크던 10대 후반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는데 나이가 어려 참전이 불가능했고, 결국은 종전 후에 빈대학에서 2년간 예술사와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서구의 종교가 말하는 ‘신의 뜻’이란 인간의 독단적 판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스스로 신을 ‘정의’할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독선적인 종교수호자들의 자의적 해석으로 인해 세상이 혼란에 빠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그만두고 기자의 길로 선택했다고 합니다. 독일의 권위 있는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자이퉁>의 외신부 기자로 아라비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곳곳을 누비면서 중동 사람들의 시선으로 본 중동의 문제들을 기사로 송고했고, 그의 기사는 유럽사회는 물론 중동국가의 유력자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 유럽인이 이슬람을 알게 되고 그들의 사회에 동화되는 과정을 묘사한 <메카로 가는 길>은 이슬람과 서구 사이의 높은 장벽을 조금이라도 낮추어보려는 의도에서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그리하여 실체를 드러낸 이 책은 인도로 가기 위해 아랍을 떠나기 전까지 리비아 사막과 눈 덮인 파미르 고원, 보스포루스 해협과 아랍 해 사이에 있는 거의 모든 국가를 여행하며 보냈던 시간을 기록하고 있으며, 1932년 여름이 끝나가던 무렵 메카로 향했던 마지막 사막 여행의 시점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15쪽)”고 요약하였습니다. 저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븐 사우드국왕의 요청으로 나즈드와 이라크 사이 국경지대에 위치한 카스르 아타이민에 가게 되었는데, 임무를 마치고 메카로 돌아가는 길에 네푸드사막을 지나 고대 오아시스 타이마에 들러 메카로 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낙타 두 마리가 저마다 한 사람씩 태운 채 터덜터덜 앞으로 나아간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타오르는 듯한 붉은빛 모래언덕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숨 막히는 침묵이 주위를 감싼다. 휘청휘청 걷는 낙타 등에 올라타고 있노라면 최면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태양도, 뜨거운 바람도, 사막도 모두 뇌리에서 사라진다.(18쪽)’라고 시작하는 사막여행에 대한 기록 사이사이에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자가 이슬람에 귀의하게 되는 과정은 물론 진정한 이슬람정신이 무엇인지, 서구와 이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시각의 차이가 무엇인지 등을 적고 있습니다.
그저 막막하기만 할 뿐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사막에서도 사람들을 만나고 그와 같은 만남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옛날이야기가 이끌려 나오고 있습니다. 토끼 한 마리가 만들어낸 작은 사건은 저자를 사막폭풍으로 몰아넣고, 사막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폭풍 때문에 길을 잃은 저자는 물 한 방울 없이 사흘 동안 사막을 헤매기도 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저자는 “공포와 굶주림, 궁핍과 실패로 반드시 너희를 시험할 것이다. 그래도 굴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고난 앞에 ‘보라, 우리는 신께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38쪽)”라는 코란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사막은 텅 비어있지만 역설적인 아름다움으로 채워져 있고, 그런가 하면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납치된 일본인 기자들을 처형하겠다고 하는 이슬람국가(IS)의 위협은 결국 인질을 처형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합니다. 중동과 아프리카의 이슬람지역이 이방인들에게는 위험천만한 곳이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이 지역을 누빌 때만하더라도 사막의 베두인족들까지도 이방인들에게 우호적이고,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슬람국가(IS)는 수니파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라고 합니다. 지중해지역원이 <지중해의 전쟁과 갈등; http://blog.joins.com/yang412/13580816>에서 이슬람원리주의에 대하여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1300여년 이상을 아랍민족에게 보편적 삶의 방식을 자리잡아온 이슬람은 정교일치의 지도이념으로 강력한 정치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세에 들어 부상한 서구문명의 영향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서구문명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하여 내세운 아랍민족주의와 같은 세속적 정치이념 역시 실패로 귀결되면서 결국은 이슬람만이 유일한 해결방안이라는 인식이 태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통이슬람이 정치현실에 무관심해지고 부패하면서 무슬림 공동체가 쇠락해진 것이라고 생각한 이슬람사회가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즉 이슬람부흥의 단초를 전통에서 찾아내겠다는 인식을 가졌던 것인데, 세계문명의 용광로 역할을 했던 초기 이슬람의 ‘열린 인식’과는 맥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서구의 발전된 문명을 수용하여 이슬람국가를 개혁해야겠다고 행각한 집권자들의 세속적 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급진적이고 배타적인 행보를 택한 이슬람원리주의가 1970년대 말에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성공하면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특히 일부 급진적 성향의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의 과격한 무장활동은 대다수의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이 테러리스트로 오해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슬람세계가 문화적 쇠락에 빠져있는 원인에 대하여 저자는 카이로 알아자르대학의 신학자 무스타파 알 마라기의 설명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미 몇 세기 전부터 진정한 학자들이 나오지 않고 있어요. (…) 과거 추동력은 거의 소멸됐어요. 발전이 있으려면 남의 생각을 반복하기보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저 암송이니 하고 있으니....(218쪽)” 7세기 예언자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이룩한 이슬람공동체는 다음 세기에는 동으로는 인도북부, 북으로는 카스피해 북쪽, 서로는 아프리카 북부를 거쳐 유럽의 이베리아반도에까지 영역을 넓혔습니다. 이토록 광대한 영역을 다스리기 위한 철학을 세우기 위하여 그리스문명은 물론 페르시아, 인도, 멀리는 중국의 문명까지도 받아들여 의학, 응용수학, 천문학, 점성술, 연금술, 논리학 등 다양한 부문에서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입니다.(정인경 지음,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과학사 106~121쪽, 다산에듀 2014년; http://blog.joins.com/yang412/13572745) 그런데 수백 년에 걸쳐 번창했던 이슬람과학은 정치적으로는 십자군전쟁으로 사회가 분열되고, 종교적으로는 보수화되면서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일면으로는 무슬림 세계가 쇠락한 원인을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두고 있는 서구의 시각이 틀리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나 유대교에 비하면 이슬람은 종교라 부르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이슬람에는 사막 특유의 광신, 미신 숭배, 어리석은 운명론이 뒤섞여 있어 인간을 우민화의 사슬로 옭아매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사회에 들어가 직접 체험한 저자가 보기에 서구의 이런 시각은 왜곡된 것으로 코란은 신의 창조물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지적인 욕구와 육체적 충동, 영적인 갈구와 사회적 필요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슬람세계가 퇴보하고 있는 것은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무슬림이 이슬람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서구문명 역시 인간의 육신과 사회적 필요, 그리고 영적 욕구의 조화를 실현하는데 실패했다고 보았습니다. 자신들이 발전시킨 문명이 세상에 행복과 빛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오만한 서구인들은 18~19세기에는 기독교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매몰되어 전 세계에 전파시키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이제 그들의 종교는 동력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종교를 대신해서 과학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서구식 라이프 스타일’을 전파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신께서 주신 선물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331쪽)’는 것입니다. 순수함이나 자연과의 교감 따위는 잃은 지 오래이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기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형이상학적 방향성을 잃었기에 기계와 기술에 의존하여 실존을 증명하려 애를 쓰게 되었는데, 기계는 새로운 욕망과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기계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심화되었다고 합니다. 애초에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기계를 발명했다는 목적은 사라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기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기계를 탐욕스러운 신으로 탈바꿈시켰고, 기계를 만들어내는 과학자들이 사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슬람 세계의 매력에 빠져들던 저자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프가니스탄을 여행할 때였다고 했습니다. 당시 저자는 눈덮힌 힌두쿠시를 넘어 헤라트에서 카불로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한 신앙심이 먼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타고 있던 말의 편자가 벗겨지는 바람에 쉬게 된 하자라자트에서 만난 하킴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믿음이 확고했던 무슬림들이 불과 한 세기만에 자신감을 상실하고 서구의 이념과 관습에 쉽게 물들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명확하고 단순한 예언자의 가르침이 억측과 말장난에 가려지고, 이슬람의 가치관을 모두 부정하는 아타튀르크 같은 가짜 무슬림이 중흥의 상징이 되어 버린 이유를 묻자, 하킴은 저자에게 ‘당신도 무슬림이 아닙니까?’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저는 무슬림은 아니나 이슬람의 아름다움을 무슬림들이 그저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런다’고 대답하였는데, 하킴은 ‘당신은 무슬림이 맞습니다.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요’라고 개종을 촉구했다고 합니다. 1926년의 일입니다. 베를린으로 돌아와 미루던 결혼을 한 직후에 아내와 함께 전철을 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창 번영의 물결을 타고 있던 시절임에도 전철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지옥 같은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와 펼친 코란에서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탐욕은 계속 커진다. 아니다. 그대는 결국 깨닫게 될 것이다. (…) 그날이 오면, 귀중한 인생을 무엇에 썼느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347쪽)”라는 구절을 읽고는 바로 베를린의 작은 무슬림 공동체 지도자를 찾아가 ‘신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가 그의 전령임을 증언한다.’라고 선언하여 개종을 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슬람을 미화하고자 하는 의도나 이슬람교를 포교하려는 목적으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고, 다만 이 책을 통해 무지와 편견으로 가려져 있던 안개가 걷히며 이슬람의 정신과 문화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했습니다.
- 접기
처음처럼 2015-01-26 공감(5) 댓글(0)
Thanks to
공감
모르면 알기 위해 노력해야, 아니면 입 다물고 있어야.
모르는 것을 안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사회를 유지하는 데 기본이 되는 적정 수준의 상식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다. 어느 사회학자가 그랬듯이 상식과 양식 또한 그 범주와 개념의 양태를 톺아보며 비교 분석해야 할 대상이지만, 관습적으로 대중이 인지하여 사용하는 상식과 양식의 범위는 사실 어렵지 않다. 개인이 살아온 삶의 기록을 종이에 옮겨 놓으면 그것이 상식과 양식일 수 있는 것이다. 종교·문화·지역·교육을 망라한 거의 모든 영역에서 비슷한 듯 다른 개인 간의 차는 갈등을 일으키고 나아가서 분쟁과 전쟁을 불러 오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 편’이라는 강한 연대감을 확인하는 주요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개신교 신자인 내게 이슬람교는 연대나 포용의 감정보다는 적대와 이질감의 감정이 앞서는 개념이다. 이슬람과 무슬림을 구분조차 하지 않던 몰이해를 감추기 위한 자기변명이었음은 근본주의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20대 후반에야 깨달아 알 수 있었다. 상대에 대한 몰이해는 가히 폭력적이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야만적인 인식과 폭력적인 자기합리화는 얼마 전 12월 14일 새벽에 하나님이 한국 땅에 전쟁을 일으킨다는 예언을 한 미치광이 여자 광신도의 그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앞에 나서서 광신도 흉내는 내지 않고 길거리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것’이 아니면 모조리 ‘잘못된 것’이라는 광신도의 탈을 벗을 수 없다.
이 책 「메카로 가는 길」은 한 유대계 유럽인 남성의 이슬람 개종기(記)다. 유럽에서 태어난 백인 유대계 남성.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의 역사는 이미 중세이전부터이니 새삼스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치에 의한 본격적인 유대인 학살이 있기 전이었다. 그 말은 먹고 사는 데는 큰 문제없는 백인 남성이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느닷없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아들, 혹은 친구를 대하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얼마 전 서울시 인권조례 선포를 둘러싸고 보수 기독교계에 박원순 서울 시장이 무릎을 꿇었네 마네 말들이 많았다. 사건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성소수자를 비롯한 차별을 받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인권에 대한 인식이 과거보다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지금에도 당장 내 지인 중 하나가 “나 사실 동성애자야”라고 고백한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려운 이야기 고백해줘서 고마워”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아니,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 그런데, 고백 전 그를 대하는 태도와 고백 후 그를 대하는 태도가 똑같을 수 있을까? 나는 똑같을 수 있다고 자신하지 못하겠다. 이것이 나의 현주소다. 당신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 무함마드 아사드는 그 모든 편견과 차별과 멸시와 비난을 감수하고 이슬람의 원류를 찾아 나선 사람이다. 종교인이기도 하고 모험가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가는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섰다. 이 책은 그 길에 대한 여정기다.
“우리 젊은 세대는 소위 ‘신의 뜻’이 현실과 극명한 대립을 이루는 상황을 목도하고 ‘신이 뜻했다는 바와 세상 돌아가는 원리는 확연히 다르다. 따라서 신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p.73)
“정말 이상했다. 오랜 세월 디아스포라의 비애를 맛보며 인고의 세월을 보낸 민족이 이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른 민족을 부당하게 대우하려 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전례가 없지는 않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니 고통스러웠다.” (p.114)
두 번의 세계대전 후 유럽에 사는 사람들이 겪은 정신적 외상은 짐작할 수 없다. 인간의 문명과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미래를 밝게만 할 것이라는 낙관이 넘치는 시대였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과 욕심은 첨단의 기술과 과학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특히 아무 죄 없는 민간인이 죽어가는 현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하는 현실. 그 절대악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절대악이라고 믿었던 집단의 반대편에 있는 집단 또한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절망감. 이런 것들이 뒤엉킨 시대를 사는 청년에게 희망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아무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나는 이슬람에 대해 그 어떤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4년간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확인한 바로는” (p.341)
저자는 고민과 물음을 머릿속으로만 하지 않았다. 직접 몸으로 떠났다. 전쟁의 참혹함을 피하려 신대륙으로 간다거나 식민지 어딘가로 도피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가지 않았던 아라비아 사막으로 떠난다. 4달도 아니라 4년을 돌아다닌다. 눈으로 확인하고 몸으로 체험하고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곳의 생활에 자신을 녹인다.
“팔을 괴고 누워 별이 촘촘히 박힌 사막의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똥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치를 그리며 떨어진다. 검은 하늘에 아치형 구멍이 난 듯하다.” (p.63)
끝도 없어 보이는 사막에서 베두인족을 만난다. 정처 없이 떠돌며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가진 베두인들에게서도 순수하고 열정적인 종교성을 확인한다. 또한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사막의 밤하늘에서 잃어버렸던 종교성을 발견한다. 그래서 자연이 위대한 것 같다.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다. 몽골의 작은 고비라 불리는 엘승타슬라헤 사막에서의 일이다. 내가 여행했던 2008년도만 해도 수도인 울란바타르에서 엘승타슬라헤로 가는 도로가 따로 없었다. 그냥 초원을 달리는 것이다. 바퀴 자국이 나 있는 초원을 그냥 달리는 것이다. 겨우 도착한 유목민의 게르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밖으로 나와 보니 생애 처음 보는 암흑이었다. 불빛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암흑.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을 처음 경험한 나는 당장 무섭고 앞이 안 보인다는 생각보다 신기하고 설레었다. 처음 만나는 경험이란 그런 것이니까. 잠시 뒤 사막 저편 끝에서부터 조그맣게 빛이 올라왔다. 지평선에서의 일출이었다. 한국에서 본 일출의 대부분은 바다에서의 일출이었다. 그것도 수평선 저 끝에서 아무런 방해물 없이 온전히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보기란 쉽지 않다. 구름에 가려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당연히 한국의 지평선에서 일출을 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건물이 있고 산이 있으니 말이다. 처음 본 사막 끝, 지평선에서의 일출은 경이로웠다. 처음 만나는 자연의 힘 앞에서 나는 한 없이 감동했다. 제대로 믿고 있지도 않던 신에게 감사를 하기도 했다.
잠시 동안의 여행에서도 그런 경험을 했는데, 저자의 4년 동안의 경험은 어땠을까? 굳이 말하지 않고 책에서 자세하게 풀어내지 않아도 짐작할 만하다. 더군다나 아라비아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의 삶 또한 생애 처음 보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탐욕은 계속 커진다.
아니다, 그대는 결국 깨닫게 될 것이다.
아니다, 그대는 결국 깨닫게 될 것이다.
아니다, 깨달음에 다다르기만 한다면
곧 스스로 어떤 지옥에 갇혀 있는지 보일 것이다.
곧 확실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귀중한 인생을 무엇에 썼느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과연 내가 찾아 헤매던 답이었다. 갑자기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 1300년 전 쓰인 이 책이 내가 살고 있는 이 복잡하고 기계화된 시대의 세태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p.347)
4년의 시간 동안, 충분히 이슬람에 대해서 알게 되고 무슬림과 함께 지내며 이슬람으로 귀의 하게 된 것은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내게도 그런 종교적 체험이 있어서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나하고 비슷하구나 생각했는데, 그런 종교적인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또 뭔 얘기야~ 라며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안다. 저게 뭔지. 어떻게 보면 참 애태우기도 한다. 4년 동안 사막과 아프가니스탄, 이란의 고원들을 떠돌며 진정한 이슬람교를 찾기 위해 고생 했는데. 그럴 때 멋지게 사막 한 가운데서 현현하셔서 내가 신이다 라고 하셨으면 멋질 텐데. 갑작스러운 체험으로 그는 완전히 이슬람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간 의식하고 내면화 하고 있었던 종교성이 확신으로 변하게 된 계기다.
“검은 천으로 덮인 정육면체 건물(‘카바’는 아랍어로 정육면체란 뜻이다)은 드넓은 사원 한가운데 뜬 고요한 섬과 같았다.” (p.412)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 카바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내면에서 마치 노래처럼 느껴지는 희열이 서서히 샘솟았다. 카바 주변 바닥에는 눈부시게 햇빛을 반사하는 매끄러운 대리석 관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남녀가 그 위에 올라가 검은 천을 둘러친 신전을 중심으로 둥글게 돌고 있었다. 흐느끼는 이도 있고, 기도를 하며 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도 있고,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오로지 걷기마나 하는 이도 있었다.” (p.414)
모든 무슬림들의 최고 소원이기도 한 메카 방문도 하게 된다. 메카사원에 있는 영물, 카바와 그 주위를 도는 무슬림들을 묘사한 장면이 평화롭다. 며칠 전 있었던 IS의 인질극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파키스탄 총기 난사 사건도 평화롭게 메카 사원의 카바를 도는 무슬림의 모습과는 다르다. 이슬람교와 무슬림에 대한 편견이 많다. 나도 그렇다. TV와 뉴스에 등장하는 이슬람교와 무슬림의 모습은 대부분 테러와 폭력, 야만과 전근대성이 대부분이다. 분명 그런 모습이 일부분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더군다나 나와 같은 개신교도들은 이슬람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고 무슬림들을 전도와 선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라마단 기간에 더 빡세게 기도를 한다거나 이슬람교가 득세한 국가에 선교를 나가는 것을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 마냥 힘든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TV에 보이는 모습이나 보수 기독교계에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이슬람교와 무슬림들의 모습 전부는 아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기독교, 아니 정확하게는 개신교 목사들이 지금 어떤 취급을 받고 있나? 영화 「쿼바디스」개봉을 막기 위해 서울의 대형교회들이 각 언론사나 대형극장에 협조공문을 보내기도 하는 꼴이다. 이미 사람들은 교회를 조롱하고 그들의 도그마를 비꼬고 있는 현실인데, 자기들만 높고 넓고 큰 교회 건물 속에 자리 잡고 앉아서 딴소리나 지껄이고 있으니. 개신교인인 나조차 부끄럽고 답답하다. 내가 믿는 예수님과 그들이 믿는다는 예수님이 같다면, 포용하고 사랑하고 죄를 자백하고 행동을 고치고 너그럽게 이웃을 껴안아야 할 텐데. 기대조차 하기 힘들다.
모르면 알아야 한다. 모르면 아는 것처럼 떠벌이거나 마음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슬람교와 무슬림들에 대해서 잘 모르면 입 다물고 있는 편이 마음대로 지껄이고 판단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저자처럼 4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하나의 대상을 알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쏟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지금 같은 시대에는 여건과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잘 모르는 대상을 알아가는 데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누가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떠먹여 주는 것도 아니다. 알고 싶은 것은 찾아서 알아봐야 한다.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간에 제대로 판단하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는 판단은 폭력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접기
lmicah 2014-12-19 공감(4) 댓글(0)
Thanks to
공감
메카로 가는 길
이슬람은 불교와 기독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로 손꼽힌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믿어왔고, 하나의 문화를 이루어낸 종교이지만, 나는 이슬람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다. 뉴스나 역사에서 가끔 접하는 이슬람은 수용하기 쉬운 문화를 갖고 있지는 않은 느낌을 주곤 한다. 특히 여성에 대한 인권문제나 요즘 뉴스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IS에 대한 기사들을 보면 도리어 이러한 행태를 보이는 종교가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러다 얼마전에 이란에 대한 책에서, 외부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슬람문화가 아닌 그들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슬람 문화를 만나보라는 작은 바람을 읽은적이 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내가 갖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지극히 짧은 지식이나 인상마저도 대부분 서양의 뉴스 혹은 서양인의 관점에서 본 칼럼이나 책에서 시작되었다. 과연 그것이 이슬람의 본모습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런저런 책에서 만난 이슬람은 상당히 관대한 종교였다. 지금 보여지는 폭력적인 모습뿐 아니라 학창시절 ‘한 손에 코란 또 한 손에 칼’로 상징되던 호전적인 종교의 모습과도 상당히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잠깐만 생각해도 좋다. 사람들은 제각각이라고 하지만, 또 어느정도의 상식이라는 것을 공유하고 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만약 그러하다면, 세계 3대 종교라는 지위에 오르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이번에 <메카로 가는 길>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가정에서 성장한 레오폴트 바이스의 책인데, 그는 26세에 이슬람으로 개종을 한 후, 파키스탄 건국과정에 참여하기도 하고, 파키스탄의 UN 주재 전권 공사로 활동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세계사가 서구인의 눈으로만 재단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서구의 라이프 스타일은 현대 라이프 스타일의 척도가 되어버렸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 말을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서구의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고, 내가 갖고 있는 지식들의 상당수가 서구의 문화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도리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나처럼 서구문화를 교육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 곳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되었고, ‘메카’로의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까? 흥미로웠던 것은 책을 읽으면서 그 과정에 나 역시 동참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지적대로 그가 만난 이슬람은 지금의 이슬람 문화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원유 수출로 쏟아진 부는 아랍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바꾸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긴 시간을 통해 온 몸으로 부딪치고, 결국 그와 함께하게 된 이슬람의 문화는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혼의 고향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처음 그가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서, “이렇게 기만적인 모래 언덕의 바다에서 ‘서쪽’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내가 받은 이슬람의 의미는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는 모래의 바다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종교라는 것이다.
- 접기
하나 2014-12-27 공감(3) 댓글(0)
Thanks to
공감
신을 향해 가는 길
책 표지가 아름답다. 보고 있으면 알라(신)를 향해 기도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처럼 평온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이슬람은 성전이라는 명목하에 전쟁과 테러를 자행하는 종교로 여겨질 따름이다. 이런 우리의 편견은 서구인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했거나 TV 등 대중매체에서 보도되는 이미지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우리의 편견과는 상관없이 저자가 체험하고 배운 이슬람의 본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는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유대율법을 배우며 자랐고 대학에서는 철학, 예술 등을 공부했지만 그는 어느 곳에서도 정신적 안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베를린에서 기자생활을 하던 중 예루살렘에 있던 외삼촌의 권유로 여행을 하면서 이슬람 사회를 접하게 된다.
저자는 오랜 친구이자 안내자이기도 한 자이드와 함께 사막을 여행하던 중 사막에서 길을 잃고 탈수 증세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에 처한 후 돌연 목적지를 바꿔 메카로 향하면서 겪게 되는 일들과 그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슬람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되었는지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오랜 동반자인 자이브와 함께 낙타를 타고 메카를 향하는 여행은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긴 하지만 아름답다. 인간존재를 돌아보게 하는 심연과도 같은 사막이 있고, 사막처럼 끝없는 별이 있고, 오아시스가 있고, 여행자를 가족처럼 항상 반겨주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 달콤한 대추야자라도 내어주는 유목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메카로의 순례는 이슬람을 받아들인 지 7년이 되는 32살의 그에게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가슴 설레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저자는 독일 일간지의 기자의 신분을 얻어 아라비아의 사막, 이집트, 멀리는 아프카니스탄 등을 여행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슬람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유럽에서의 생활에서 안정을 느낄 수 없었던 그는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옆에서 지켜보며 이슬람에 대해 공부하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이슬람 본연의 모습을 알게 된다.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는 생활양식이라는 것, 신학 체계라기보다 신에 대한 의식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 사회적 행동 양식이며, 이슬람 어디에도 원죄와 구원에 대한 메시지는 없다는 것 등. 기독교가 현세의 삶보다는 내세를, 육체보다는 영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는 다르게 이슬람은 현세의 삶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며 육체와 영혼이 구분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슬람은 여성에게도 이혼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등 여성을 존중하는 종교였고, 지식에 대한 탐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라는 것이다. 지금의 모순된 이슬람은 경전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나쁜 인습으로 인해 변질된 결과라는 것이다.
매일 다섯 번 씩 메카를 향해 기도를 드리는 이슬람인의 모습을 보면 어딘지 광신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거나 그들의 삶이 종교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이슬람은 그들에게는 하나의 생활양식(조선시대에 유교가 생활양식이었듯이)이며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다. 엄격한 의식이나 예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늘 신이 곁에 있다고 믿는 그들의 마음의 자연스러런 표현인 것이다. 순수한 믿음 그 자체다.
저자는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가 된 뒤로 유일신 신앙은 모두 사막에서 생겨났다고 말한다. 이는 순수하고 단조로우며 절대적인 존재에 순응하게 만드는 사막만의 고유한 특징 때문이다. 순수하고 단조로우며 절대적인 사막 앞에서 절대자를 떠올리다는 건 저자의 말처럼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무함마드는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임을 자처하지 않았다. 코란에 따르면 신을 향한 자기 항복은 태고부터 이어진 '인간의 본능'이다. 바로 이 점을 아브라함, 모세, 예수를 비롯한 수많은 예언자들이 전파했던 것이며, 코란은 그 중 가장 늦게 전해진 계시였다. -413-
이 책은 종교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저자가 사우디아라비의 사막에서 지냈던 1920년대부터 30년대 초반까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중동의 정세에 대해서도 현장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저자는 기자의 신분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 이븐 사우드가 잃어버렸던 땅을 다시 되찾는 과정에서 영국이 반군에게 무기를 지원하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하고, 이탈리아군과 맞서는 무자헤딘 지도자와 접촉하여 그들을 이집트로 탈출시키는 것을 돕기도 한다.
그리고 시오니즘이 한창이던 때 저자는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내기도 했다. 저자는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이 정복자로서 들어와 살기 전부터 그 땅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과 유대인이 떠난 후 2000년 동안이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완전히 무시한 채 오로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당시 저자의 이런 생각은 유대사회에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었다. 저자의 말대로 몇 천 년 동안이나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는 시오니즘은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래로 지금까지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책이다.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 혹은 잘못 알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거나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고, 저자가 경험한 많은 일들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 접기
블루베리 2015-08-31 공감(3) 댓글(0)
Thanks to
공감
체험과 사색을 통한 이슬람교도의 삶
20세기 가장 위대한 무슬림 저술가라는 소개의 말이 무색하지 않게 이 책은 자서전의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이슬람과 서양의 인식에 대한 많은 지식들과 생각할 거리를 가득 담고 있다. 한 유럽인이 이슬람을 알게 되고 그들의 사회에 동화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기저에는 역사와 철학, 그리고 종교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이 존재한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저자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듯 싶다.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으로 아버지가 변호사였으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것과 함께 빈 대학에서 예술사와 철학 공부했다는 것부터 그렇다. 개인적으로 지난 5월말과 6월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19세기말과 20세기 초 빈을 중심으로 한 지성과 예술의 새로운 변화의 역사를 몸소 보고 왔는데, 바로 그 때 이 책의 저자가 그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빈 대학에서 예술사를 공부한 것은 그 당시 영적인 진공 상태를 어떻게 해서든 채워보려고 했기 때문이라는데, 그 당시 전쟁으로 인해 수세기 동안 면면히 계승된 윤리적 가치가 무너졌고 새로운 가치관은 채 확립되지 않았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예술사가들도 형식이라는 문제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었고, 또 다른 탈출구로 여겨졌던 정신분석학도 기대에 못 미쳤다고 한다. 인간 자아의 신비를 그저 신경유전적 반응으로 치부하는 오만함이 거슬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유대교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졌으며 탈무드에서 말하는 신은 너무 과도하게 의례에 집착하고 선택받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부족 신처럼 여겨진다고 생각했으며 처음부터 시오니즘에 대해 반감이 강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제도화된 종교를 모두 거부하는 불가지론자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삼촌의 편지를 받고 중동으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만난 베두인이 자신에게 케이크 한 조각을 나눠준 일로 호의적이 되었으며, 이후 그들의 삶을 보면서 유럽인의 삶을 그토록 추하게 만드는 영적인 분열과 공포, 탐욕을 찾아보기 어려웠기에 무슬림의 정신세계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순수함이나 정신적 방황이 바로 저자가 이슬람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라 할 수 있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듯 그 이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무척이나 많은 경험들과 함께 역사적 현장에 서 있었다. 막심 고리키 부인의 특종 인터뷰를 따내서 독일 신문사에 정식 기자로 취직한 이후 중동관련 전문 취재원으로 활동을 시작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븐 사우드 국왕과의 친분을 통해 중동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각종 내전에 참여하며 비밀임무까지 수행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절반은 칼릴 지브란의 경건한 책을 읽는 것 같고, 나머지 절반은 아라비안나이트를 읽는 것 같았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슬람에 대해 잘 몰랐던 많은 부분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오늘날 이슬람에 대한 서구인들의 인식과 정서는 과거 십자군 전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을 하나로 묶는 기독교 국가란 개념이 바로 유럽인들에게 문화적 자의식과 동질감을 심어 준 반면 이슬람에 대한 선입견이 발전했다면서 그 때부터 이슬람 교리와 이상은 의도적 왜곡되었고 무슬림 선지자 무함마드는 적그리스도로 낙인찍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무함마드는 신앙에 대한 유일한 접근법이 이성임을 강조했으며 반계몽주의 대신에 지적 탐구를, 침묵 대신에 행동을, 금욕주의 대신 활기찬 삶을 추구하라고 가르쳤기에 이슬람은 인류의 문화적 성취에 커다란 동기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한편 다성음악이 발달한 서양에 비해 단조로우면서도 강렬한 노래 가락의 아라비아의 노래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척박한 사막과 스텝 지대에 사는 그들에게 감정의 황혼이나 극적인 반전들이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고, 내면 깊숙한 곳까지 완벽히 자유롭기에 아랍 가정이 모든 손님들을 극진히 보살피고 대접할 수 있다는 것,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는 생활이며, 신학 체계라기보다 신에 대한 의식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 사회적 행동 양식이라 봐야 한다는 것, 원죄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 기독교는 신의 영역과 카이사르의 영역은 다르다는 오랜 원칙에 얽매여 사회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기에 현실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지 않아서 모든 종교의 기본적 역할이라 할 수 있는 올바르게 사는 법을 알려주는데 실패했다는 것, 이란에서 토착 범신론이 유일신을 믿는 이슬람으로 대체되면서 반발작용으로 나온 것이 수니파와 시아파라는 것 등이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 내용들은 육체적 욕망의 합리성을 부인하면 결국 도덕적 가치를 부정하게 된다면서, 욕망, 유혹, 갈등이 있고, 그래서 옳고 그름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때 비로소 영혼을 가진 도덕적 존재가 나올 수 있다고 언급한 것과 일부다처제가 인간 본성에 초점을 맞추는 이슬람 율법으로 결혼의 사회생물학적 기능을 보호하고 있다는 언급이었다. 원래 남편과 아내가 자유롭게 이혼하고 재혼할 수 있는데, 무슬림 쇠락기 수백 년간 여성들이 율법에 보장된 이혼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는 것도 함께 언급되고 있다. 그 밖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집은 들어가 살기 위한 공간인 만큼 집 외관에는 별달리 신경 쓰지 않지만 실내를 꾸미는 데 치중한다는 그들의 관습과 해질녘에 뱀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관습, 그리고 라바이크, 알라후마, 라바이크라고 메카를 향해 외치는 구호가 아브라함에게서 나왔다는 것 등이 그렇다.
- 접기
강수철 2014-12-27 공감(2) 댓글(0)
Thanks to
공감
메카로 가는 길
이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적 가르침이란 부제를 가진 책, 메카로 가는길. 저자 무함마드 아사드는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이지만 성인이 된 이후 자발적으로 이슬람교로 개종 후 이슬람문화권의 곳곳을 방랑한 사람이기도 하다. 기독교와 비교했을 때 어느 종교가 더 우월하다라는 입장이 아니라 그동안 유럽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나 올바른 이슬람 문화와 종교를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슬람문화에 대해 그리고 종교에 대해 강박에 가깝게 다가올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됨을 미리 말해두고 싶다. 오히려 이 책은 우리가 사는 동안 그토록 방황하는 이유, 왜 한 곳에 정착하질 못하는지에 대한 답과 우리가 머무는 문화만큼 다른 문화 또한 존중해야 된다는 깨달음을 던져 줄 뿐이다. 아니 이것도 무거운 짐이 될 것같다. 읽어보면 알게되겠지만 이 책은 그저 메카로 가는 그 여정일 뿐이다.
모순이지만 이런 방랑벽은 모험심보다는 나만의 안식처를 찾겠다는 갈망에서 비롯되었다. 유럽에서 나고 자란 자에게 주어지는 전형적 운명을 거부하고 관점과 외형 모두 판이하게 다른 세계를 찾아 떠나도록 만든 동력은 바로 이 내적 발견에 대한 갈망이었다. p.34
32세 때 자이드와 함께 떠나는 여정 사이사이 그가 이슬람교로 개종하기 전 후의 과정이 함께 등장하는데 우선 사막에서 방랑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의 첫 만남과 그가 베풀어준 다양한 혜택을 묘사할 때는 그동안 유럽에서 단순한 흥미위주의 관심을 떠나 적대적이기 까지했던 사실을 깨닫게 했다. 물론 유럽 뿐 아니라 이슬람외에 아시아인들이 던지는 오해와 선입견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국왕과의 일화 이후 모래폭풍을 맞이하는 정도야 예사고 사흘이 넘게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죽음 직전에 닿아 사경을 헤매이는가 하면 눈을 감고 달리다가 늪도 아닌 곳을 늪이라 착각하고 정신없이 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자연이 그 상대가 되기에 크게 긴장감이 들진 않았지만 영국 탈영병이라 오해받는 다던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함께 탈출을 감행했던 동료가 생포되어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들 앞에서는 숙연해질 수 밖에 없었다. 긴장감이 덜한 철학적인 방랑으로 화제를 돌리자면 흥미롭게도 그가 이슬람교 이전에 노자사상 등 다양한 종교와 사상을 공부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방랑하는 모험심이 단순히 물리적 방황이 아니라 정신적 방랑도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노자사상을 처음 '발견'했을 때와 달리 오히려 이슬람교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당시만 하더라도 편견에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케이크 나눔으로 인해 아랍에 대한 오해가 서서히 풀리는 장면을 보면 결국 어느 종교나 문화를 전파할 때 아주 사소한 배려와 '먹거리'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진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각종 테러와 학살에 의한 피해의 시초가 되는 유대인 정착촌과 관련된 부분이 그러하다. 밸푸어 선언에 의한 이 정책은 지난 유럽사에 관련된 책을 읽을 때 제대로 알 수 있었는데 이 책에서도 역시나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어쩌면 저자가 유대계였기에 더더욱 이 부분을 진지하게 다룰 수 있었던 것 같다. 좀 더 깊게 생각해보자면 유럽을 비롯한 서구사회와 그들의 문명을 빠르게 받아들인 나라가 개발이란 명목하에 자행된 침략과도 같은 경우는 쉽게 우리나라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함부로 외부 세력이 개입하면 한 국가의 질서는 무너진다. 한데 중동사를 공부한다는 학생들이 이 점을 깨닫지 못하는 문제도 심각하다. 열강들이 식민지에 건설한 철로만 눈에 들어오고 속절없이 짓밟힌 그 식민지의 사회 구조, 자긍심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p.123
종교적인 부분을 좀 더 꺼내보면 이슬람교의 경우 지나치게 절제를 강조하고 이분법적인 다른 종교에 비해 긍정적인 면이 많다는 것이다. 육신은 버리고 갈 것이라는 기독교와 달리 신의 창조물인 것은 영혼과 다름없기에 동등하다고 믿는 것도 그러하며 가장 민감하며 대다수의 비종교인들이 부담을 갖는 '원죄'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것도 그렇다. 오히려 인간은 선천적으로 순수하며 앞서 말했던 영혼과 육신 자체를 분리하지 않는다. 다만 신을 믿지 않을 경우 후천적 잘못에 의해 잘못될 수 있기에 신을 믿으라고 코란은 말한다. 결국 신을 믿고 겸손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뿐 아니라 그 어떤 종교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얼마전 방한했던 교황의 말씀처럼 종교를 믿지 않을 경우 양심에 따라 살아가라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험했던 저자의 사건사고와 방랑여정 그리고 이슬람교와 문화에 대해 알지못했던 부분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지만 결국 우리가 원하는 종교, 원하는 삶의 방향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속박되는 것도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반대로 우리가 신념을 갖고 있는 그 무엇이든 타인에게 강조해서도 안되며 오히려 그럴수록 이해하는 열린 사고를 가져야 된다는 점이다. 저자가 서구와 이슬람문화를 비교하며 이야기를 한 것처럼 기회가 된다면 이슬람 뿐 아니라 다른 종교를 구체적으로 비교하며 제대로 된 문화를 알려주는 저서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슬람이란 종교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란에서도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열었다. 고대 카스트 제도를 타파하고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건설했으며, 오래도록 휴면 중이었던 문화 에너지를 일깨웠다. p.312
- 접기
에디터D 2014-12-28 공감(1) 댓글(0)
Thanks to
공감
메카로 가는 길 - 이슬람에 대해
지구는 크게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나눈다. 각 지역에 대한 구분은 유럽인의 관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랍과 우리를 같은 아시아로 묶는다는게 이해되지 않는다. 유럽인들에게 아랍은 지근거리에 있는 아시아였고 후에 만나게 된 중국도 같은 땅덩어리에 있으니 아시아로 엮어 버린 것이 아닐까 한다. 유럽은 지들끼리 서로 지지구 볶고 하니 이해라도 되는데 아랍과 우리는 같은 아시아로 묶어 취급하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본다.
아랍과 우리는 만날 일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유럽과 아랍은 서로 만나기라도 하고 존재라도 의식하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그로 인해 동아시아는 여러모로 손해를 많이 본다. 엄연히 아랍과 동아시아는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유럽이 발달하며 유럽의 문명은 어느덧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친숙하다. 미국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에게도 유럽의 문물은 너무 자연스럽다. 아랍은 전혀 친숙하지 않다. 굳이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아랍은 불행히도 한국의 눈으로 본 시선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편향적인 스펙트럼으로 본 시선이다. 특히나 헐리우드가 자신들의 이익과 재미를 위하여 가공한 이미지로 우리는 아랍을 대하고 있다. 문명의 4대 발상지이고 전 세계의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슬람 문화와 종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극히 없다. 코란이나 모하메트와 같이 자주 들리던 단어들이나 친숙하지 그 외에는 이슬람에 대해서는 테러라는 아주 부정적인 이미지만 남는다.
지적인 궁긍증 차원에서 이슬람에 대해서는 배우고 싶다는 평소에도 했다. 그동안 이슬람에 대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봤다. 이슬람에 대한 역사였다.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한 때 세계를 지배했던 이슬람의 역사에 대해 언제 한 번 책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럽인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것도 유럽인들에게 이슬람의 정보를 알려준 유럽인이라니 특이하다.
시대 배경은 1990년대이다. 이 당시의 배경을 말하자면 사우디아라비아가 탄생한다. 저자의 이력도 특이하다. 저자는 유대인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이지만 종교가 없다. 신에 대해 무신론자였다. 신문기자가 된다. 이스라엘에 있는 사촌 형의 초대로 이슬람과 만나게 된다. 단순히 잠시 쉬로 간 이슬람과의 만남은 한 남자의 운명을 송두리째 변화시킨다. 무신론자라고 하여도 기독교적인 사회에서 살아온 저자는 어쩔 수 없이 유럽적인 관점으로 이슬람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미지는 최근에 만들어진 이미지라 이때만해도 지금과 같은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여전히 유럽인들이 이슬람을 폄하하고 낮춰보며 자신들보다 모자란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들에 대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려 했고 이슬람도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고 새롭게 국가가 태동하던 시기였다. 이럴 때 저자는 이슬람을 방문하게 되었다.
저자가 이슬람을 방문하여 놀란 점은 이들이 순진무구할 뿐만 아니라 유럽인에 비해 정이 넘치고 함께 나누려 한다는 점이었다. 유럽인들은 내것 네것이 명확하지만 이슬람은 형제로써 함께 무엇이든지 나누려고 한다. 또한, 서로 상대방의 잘난점을 인정하지 않아 어려울 때는 뭉쳐도 위기를 극복하면 또 다시 서로가 반목한다. 끊임없이 자신들끼리도 끊임없이 국가가 세워지고 있던 때라 더욱 심했던 것으로 보였다.
크게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이 당시에 아쉽게도 이슬람은 기독교적인 요소가 삽입이 된다. 이슬람은 원래 종교라고 해도 이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현세와 내세를 함께 믿지만 내세는 미래에 발생할 일이고 현세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기에 내세보다는 현세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신비주의적인 요소도 거의 없었다. 이성을 통해 신을 만날 수 있는 종교였다. 연금술이 발달하고 천문학이 발달한 이유가 바로 이슬람은 이성을 중시한 종교라 그렇다.
불행히도 이슬람은 점점 이성을 중시하지 않고 기독교적인 신비주의를 받아들인다. 이슬람은 원래 사제가 필요없다. 너도 나도 다 사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점점 이슬람은 사제들이 힘을 갖게 되고 이들이 자신의 힘을 키우고 유지하기 위해 이슬람을 변질시킨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교묘히 조종한다. 이것을 모르고 사람들은 코란이 알려준 본질보다는 엉뚱한 면에 집착하고 받아들여 이슬람에서 오히려 더욱 멀어졌다고 한다.
저자는 우연히 가게 되었던 이슬람 나라에 대한 정보를 독일의 신문에 기고를 한다. 냉정하게 이슬람에 대해 유럽인의 편향적인 관점이 아닌 객관적인 관점을 기사로 송고한다. 당시에 사우디아라비아를 세운 왕과 알게 되고 그를 돕기도 한다. 유럽인이지만 점점 이슬람에 동화되면서 이슬람 사람보다 더욱 이슬람의 근본적인 본질에 대해 집중하고 이슬람 사람들에게 잘못된 점을 지적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이슬람 사람입니다."라는 소리까지 듣는다.
무신론자이고 유대인이며 기독교적인 사고를 하던 저자는 이슬람을 개종을 한다. 게다가 아랍 모든 나라를 전부 돌아다닌다. 아프카니스탄까지 돌아다닐정도로 아랍과 이슬람의 모든 유적지와 성지까지 돌아다니며 이슬람에 대해 종교적으로 귀의를 한다. 단순히 종교적인 귀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인들에게 이슬람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는 전달자의 역할까지 한다. 당시로써는 유일한 사람인 듯 하다. 책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럽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걸 보면.
유럽에서 넘어온 유럽인이자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이슬람의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추구를 한 인물이라 아랍의 여러 민족들과 왕족들은 그를 융성하게 대접한다. 이 당시는 아직까지 아랍나라들도 제대로 국가로써 제대로 갖춰지기 전이라 그가 가는 곳마다 역사적인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직접 왕에게 부탁을 받고 사명을 수행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책에서 당시의 왕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각각 건국의 아버지들이다. 저자도 사진이 나오는데 나중 사진을 볼때면 유럽인이 아닌 아랍민족으로 느껴진다.
저자는 이슬람의 순수한 종교적인 본질에 동화되고 이슬람 사람들의 유럽인들과 다른 면에 개종을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 저자가 이슬람의 좋은 점이라 이야기하는 부분은 동아시아라고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따지면 아랍과 동아시아를 아시아로 묶은 점이 어색하지 않게도 보인다. 책을 읽어보니 유교는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유교도 충분히 종교로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게 보였다. 이슬람도 내세보다는 이성이 더 강조된 종교라고 하니.
이 책인 <메카로 가는 길>은 유럽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 계기와 여정만 있지 않다. 저자가 살았던 당시의 이슬람 국가들의 상황과 그들이 유럽과 반목하며 - 당시는 제국주의가 번져가던 시기 - 각자의 국가를 세우는 역사를 알게 해 준다. 지금과는 다른 당시 아랍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친숙하지 않은 지식은 익숙해지고 머리에 들어오는데 시간이 걸린다.
<메카로 가는 길>은 그나마 저자가 기자로 활동을 했기에 보다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과 묘사가 있어 그나마 많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 그럼에도 꽤 오랫동안 여러 이유로 읽었던 책이다. 이슬람은 여전히 나에게는 미지의 공간이자 어려운 영역이다. 우연히 읽게 된 이 책으로 인해 조금 더 이슬람에 대해 - 그것도 근본적인 본질 - 알 수 있게 되었다.
함께 읽을 책(사진클릭)
- 접기
핑크팬더 2014-12-15 공감(1) 댓글(0)
Thanks to
공감
메카로 가는 길
크리스마스 이브 잊고 있었던 책을 꺼냈다
메카로 가는 길~
크리스마스가 내일인데 나는 이슬람교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저자는 오스트리아인으로 무슬림으로 개종한 전직 기자이며 외교관이며 정치적인 활동도 괘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한다
무슬림이라고 하면 으례히 중동지방이나 동남아시아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유럽에도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도 무슬림이 괘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과격파들이 벌어는 테러행위로 인해 이슬람교도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기 쉽지만 적어도 내가 책에서 읽고 많은 다큐멘터리에서 본 이슬람교는 세계에 존재하는 종교 가운데 가장 너그럽고 이상적인 종교였다
어느 종교나 다 그렇듯이 분파가 나눠지고 그 안에서도 같은 교리를 다르게 해석하는 이들이 벌이고 있는 행위만 보고 그 종교 전체를 무슨 테러집단인양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 생각된다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
이슬람교도인 무슬림들은 평생에 한 번은 이곳으로 성지순례를 떠나야 한다고 예전에 어느 책인지 다큐멘터리인지에서 본 기억이 난다
하루 5번 메카를 향하여 기도하며 술을 금지하는 종교이며 신비로운 문양들이 가득한 종교적 기호들과 한때 유럽 대륙을 지배했던 무슬림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은 십자군 전쟁 때부터 생긴 것이라는 저자의 친구인 역사학자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갔다
십자군 전쟁~
유럽의 나라들이 처음으로 하나가 되어 뭉친 전쟁으로 당시 교황의 부채질과 각국 왕들의 영웅심리가 빗어낸 이 재밌는 전쟁은 괘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났다
몇 년 전에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를 재밌게 읽어서 십자군 전쟁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상세히 알고 있다
살라딘과 슐레이만 대제~
이슬람의 승리로 이끈 장군과 왕의 이름이다
특히 슐레이만 대제는 지적이며 합리적이며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매력만점인 황제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세계의 모든 것이 서구 유럽을 기준으로 되어가고 있는 요즘 그저 낙후되고 비문명인 것처럼 보이고 이슬람의 진정한 모습에 눈을 뜬 저자가 그 서구 문화의 중심에서 자란 사람의 시선에서 보는 이슬람교와 그 종교를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나름의 감명을 받는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었다
종교라는 것이 가지는 커다란 힘에 대해 알지 못 했던 이슬람 교리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알 수 있었던 책이었다
이 책을 읽는다고 감명을 받아서 저자처럼 무슬림이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알지 못하면서 가지고 있던 이슬람에 대한 선입견은 걷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글은 책콩서평단으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 접기
에르피스 2014-12-27 공감(0) 댓글(0)
Thanks to
공감
메카로 가는길
반 기독교 또는 야만으로 치부되는 이슬람 문화에 대한 편견을 작가는 '십자군 전쟁'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는 기독교 성지를 장악한 '사악한 인종'을 상대로 전쟁에 나서자고 촉구했다.
전 유럽은 모두 뭉친 기독교를 대표하고 그에 반하는 이슬람 문화가 그때부터 왜곡되고 매도당하면서 알려고 하기보다 배척하기 시작됐다고 이 책을 시작한다.
유럽에서 태어나 이슬람 국가 곳곳을 누비고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파키스탄 건국과정에도 참여했던 무함마드 아사드는 그런 편견을 히석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은 마치 극한의 곳을 여행하는 여행가의 책같기도 하고, 극한 모험을 시도한 한 사람의 모험스토리같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새로운 곳에서의 만남과 깨달음에 관한 책인것 같기도 한 그런 느낌의 책이다.
사막이 얼마나 지독히도 외롭고 잔인하도록 위험한 곳인지 그의 모험담이 말해주고, 며칠만에 만나는 끝없는 사막에서의 새로운 만남이 얼마나 기적같은지도 말해준다.
모래퐁풍으로 기억했던 길이 더이상 길이 아닌 새로 탄생한 지구같은 느낌의 사막은 경이롭지만 무서움이 더 컸다.
친미경향인 우리나라에는 특히나 이슬람에 대해 무턱대고 싫어하거나 태러리스트라고 모함하는 경우도 많은데, 기독교의 구약을 공유하는 이스람은 기독교와 그 뿌리가 같다. 나도 잘 몰랐던 이슬람 문화와 사람들 그리고 그곳의 자연환경에 매료되는 시간이 되게 해준 책이었다.
- 접기
stoneangel 2014-12-23 공감(0) 댓글(0)
Thanks to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