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3

** Doheum Lee - 화쟁의 핵심은 개시개비가 아니다 - 도법 스님께. 20150818

Doheum Lee - 화쟁의 핵심은 개시개비가 아니다 


Doheum Lee 
20150818
  · 
화쟁의 핵심은 개시개비가 아니다

원효의 화쟁(和諍)을 모두 옳고 모두 그르다는 개시개비(皆是皆非)로 해석하는 담론이 상당히 세를 얻고 있다. 불교학에서 탁월한 한 교수가 이렇게 해석하고 이를 칼럼, 책, 강연 등을 통하여 수차례에 걸쳐 전파하고 도법 스님의 화쟁위원회가 이런 대응과 실천을 여러 해 지속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진영의 논리를 떠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는 실천에 편승하고 있다.   
<장아함경>이나 <우다나경>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비유가 나온다. 등과 다리와 꼬리만 만진 장님들은 각각 코끼리가 언덕처럼, 기둥처럼, 밧줄처럼 생겼다고 주장하며 서로 싸웠다. 부처님은 사이비인 육사외도의 주장이 이들 장님과 같음을 비판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활용하였다. 
원효는 이 비유를 끌어와 화쟁에 대해 설명한다. 누구든 코끼리를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므로 옳지만[皆是], 누구도 코끼리의 전모를 보지 못한 채 부분을 전체로 오인하고 있으니 그르다[皆非]는 것이다. 한 교수는 이를 근거로 화쟁의 핵심이 바로 개시개비이니, 다른 사람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는 ‘평화로운 다툼’의 과정을 통해 코끼리의 전모를 완성할 수 있다며 이를 4대강, 강정 등 한국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도 적용하자고 주장한다. 보수도 그래야 하지만 진보 진영도 정부쪽 이야기를 경청하라고 주문도 하였다. 도법 스님은 ‘진영의 감옥’에서 탈피하자며 4대강 문제 등에 정부쪽과 이에 반대하는 사람을 함께 불러서 토론회를 가졌고, 노동이나 종단 개혁, 최근의 서의현 사태에서도 이런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고 설핏 보면 균형을 갖춘 합리적 방식 같지만, 실제나 결과는 그렇지 않다.

화쟁이 개시개비인 것은 옳지만 화쟁의 핵심은 아니다. 개시개비는 화쟁의 출발점일 뿐이며 이는 관념의 해석일 뿐이다. 화쟁은 ‘대립물 사이의 연기적 깨우침’이다. 극렬하게 싸우던 두 집단이 서로 긴밀하게 의존하고 있어 상생하는 것이 모두 잘되는 길임을 깨우치면 싸움을 멈출 것이다. 

한 이야기를 예로 들자. 신병이 추운 겨울날에 찬 물로 세수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소대장이 이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식당에 가서 온수를 달래라.”고 했다. 신병은 그렇게 했다가 고참에게 군기가 빠졌다고 두들겨 맞았다. 다음 날 아침 인사계가 신병에게 “식당의 김병장에게 내가 세수할 온수를 달래서 가지고 와라.”고 시켰다. 신병이 그리 하자 인사계는 신병에게 그 물로 세수하라고 일렀다. 소대장과 인사계 모두 신병에 대한 자비심도 있었고 개시개비의 화쟁적 사고를 하였다. 하지만, 소대장은 여러 조건을 고려하지 못하고 신병의 실체만 보았다. 반면에 인사계는 고참과 신병, 자신과 신병 사이의 연기관계를 파악하였기에 소대장과 다른 사고와 행동을 한 것이다. 

세월호, 임금피크제, 서의현 사태 모두 마찬가지다. 대립자 사이에 놓인 조건과 인과관계를 무시하고 실체만 바라보고 개시개비하면, 관념은 가능할지라도 현실의 장에서는 화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양자를 불러다가 대화를 시켜서 도법 스님이 해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교수의 말대로 강간당한 소녀에게 가해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것은 화쟁이 아니라 폭력이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대립자 사이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 가운데 가장 강력한 요인은 권력이다. 권력이 심하게 기울어진 곳에서 화쟁은 가능하지 않다. 

정부나 종단이 압도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고 많은 진실을 은폐하는 상황에서 약자보고 진영의 감옥에서 벗어나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은 아무리 동기가 순수하더라도 강자를 편든 것으로 귀결된다. (미국 연방대법관으로 그의 이름을 딴 법학대학원이 뉴욕시에 있을 정도로 명판결과 명판결문으로 유명한 벤저민 카아도조(Benjamin N. Cardozo)가 “법관으로 재임 중 중립적이었다고 생각한 판결은 나중에 보니 강자에게 기울어진 판결이었고, 재임 중 약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한 것은 나중에 보니 중립적이었다.”라고 한 것도 이런 관계를 고려한 발언이다.)  이런 결과를 모르고 계속 개시개비를 주장한다면 무지한 것이고, 알고 그런다면 이는 사악한 것이다. 
그러기에 세월호든, 임금피크제든, 서의현 사태든 이 문제를 화쟁으로 해결하려면, 양자가 놓인 조건을 파악하고, 먼저 대화의 장만큼은 권력이 대칭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일에 실패하면 약자의 편에 서라. 그것이 바로 ‘공정한’ 화쟁을 이루는 길이다. 

* 1999년에 그때까지는 제가 가장 존경했던 스님인 도법 스님께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책을 드린 후 여러 차례 화쟁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화쟁위원회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위원들과 스님들께 조성택교수와 둘이서 화쟁에 대해 강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도법스님께서 화쟁이 개시개비란 논리에 빠져버려 ‘진영의 감옥’ 운운하며 이런 식의 대안만을 고집했습니다. 4대강과 봉은사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서의현사태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지만 전혀 수용되지 않아, 공개적으로 한겨레에 기고하였습니다. 페북에는 9.3매에 맞추느라 생략했던 문장도 살려서 올립니다. 
도법스님께서 화쟁의 핵심이 개시개비란 미망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염원합니다.
[왜냐면] 화쟁의 핵심은 개시개비가 아니다 / 이도흠
HANI.CO.KR 201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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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comments

최국태
맞는 말씀! 개시개비가 이변비중으로 가야 화쟁이 일어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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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y
이은경
이도흠 교수님~ 역시 늘 기대를 갖게하는 파워교수님 (^-^)v
글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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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운
잘 읽었습니다. 깊이 공감합니다. 퍼가겠습니다 널리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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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y
조근형
갈등조정과 해결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칫 기계적 중립 밖에 안되지요~~절대적 선악 구별이 분명하고 대자연 사회 인간사 전체를 해치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는 화쟁 개시개비와 조정만의 대상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너무 진영의 감옥에 갇히는 것도 문제입니다. 자기 진영에 갇혀 전체를 열린 양심적 사유로 보지 못하거나 진영의 권력구조에 눈치보거나 침묵하거나 실천하지 못하니깐요~ 그래서 우린 대자연과 인간사 전체를 위한 진정 해법 찾기를 해야합니…~ 그건 기계적 중도는 결코 아닌 중용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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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y
Edited


최광식
고맙습니다
화쟁이라는 명분에 속아
순례길 따라 나섰다가 여러날을 행군으로 허비한 작은 쓰라임이 아직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여쭙지않고 덜렁댔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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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y
정철모
원래 화쟁은 없다
단지 진리만 있을뿐이다
진리가 없으면 지혜라도 있어야한다
위에 것이 없으면 자기의 모순에 빠집니다 다른 말로 타인에게나 자기에게 이익이 오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용이 중요합니다 모든 결정은 중용으로
선악의 경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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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y
Byoung-Gook Choi
아... 그렇군요. 그리고 그런 사정들이 있었군요. 도흠 형이 화쟁 오래 전부터 파고 들었다는건 얼핏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 글을 보고 이 깜깜이가 공부하고프단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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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y
정호정호
이도흠교수님의 글에 깊이 공감합니다. 화쟁은 시비의 주체를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임제의 화두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치열한 자세로 진리를 모색하고 대면하는 과정이다. 그 결과 당사자 모두 시비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 도법(스님)이 화쟁위원회라는 감옥에 시시비비를 가두었을 뿐이라는 도흠(교수님)의 지적, 일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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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이도흠 (지은이)한양대학교출판원1999-10-05



503쪽
책소개
원효의 화쟁사상을 바탕으로 '화쟁기호학'이란 새로운 인문학 이론을 펼친 책.

저자는 이 책에서 실증주의, 맑시즘, 해체비평 등 다양한 서구 문예비평이론의 타당성과 그 한계를 밝히며 서구 이론의 한국적 수용에서 나타나는 오류 등을 분석했다. 

또한 화쟁의 의미를 설명하고 자신의 이론을 향가에서부터 현대시, 소설에 이르기까지 여러 텍스트에 적용해 새롭게 분석하고 있다.


목차


1. 화쟁기호학의 이론
1). 서구 문예비평 이론의 방법과 한계, 그리고 한국적 수용 문제
2). 문예비평 이론의 쟁점
3). 화쟁의 의미
4). 화쟁기호학

2. 화쟁기호학 비평과 실제
1). 향가 : (제가매가)
2). 속요 : (동동)
3). 시조 : 홍랑의 (묏버들가)
4). 현대시 : 김수영의 (풀)
5). 현대소설 : 이상의 (날개)
6). '모죽지랑가'의 창작배경과 수용의미
7). <삼국유사>의 구조 분석과 의미 해석
8). <삼국유사> 소재 어휘의 의미 분석
9). 문학 테스트에서 현실의 반영과 굴절의 문제
10). 문학에서 텍스트 와 사상의 관련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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