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31

김용옥 ‘기(氣)’가 뭐길래? > 게시판 > 공지사항 | 청목서원

‘기(氣)’가 뭐길래? > 게시판 > 공지사항 | 청목서원

‘기(氣)’가 뭐길래?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공학 공부를 한 사람이다. 나와 비슷한 성장 배경의 사람들이 대개들 그러하듯이 나는 무당이나 점, 사주 등을 미신이라 생각해 왔으며, `기氣' 같은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었다. 우리 아이들의 엄마는 불교 신자 집안 출신으로 독실한 불교 신자이다. 또 본인의 말에 의하면 `기'가 강해서 웬만한 무당이나 복술인(卜術人)들은 자기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한단다. 사실 나는 온갖 방면에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서 단학, 명상, 기공에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읽어보았고 책을 따라서 흉내도 내 보았지만, 시작한 동기가 믿음이 없이 그저 호기심 때문이었던지라 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련기간을 가지지 못했다. 반면, 아이들 엄마는 기공이고 뭐고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잠시 정신을 집중시키고 두 손바닥을 마주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기를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분하고 억울하게'도 애들 엄마로부터 `기'도 느끼지 못하는 ‘하등동물’ 취급을 받아왔던 터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을 하기도 뭣한 일이고, 유행하는 `단丹'. `선 禪' 이런 것을 지도하는 학원엘 다니기에도 맘이 내키지 않았다. 왜냐 하면 수련 몇 달이면 '기`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과학적, 객관적 근거가 없는 '기`란 것에 대하여 미심쩍어 하는 불신감이 약간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UFO, 아틀란티스 등의 고대문명, 동서양 모두에 널리 퍼져있는 유령 이야기, 환생, 최면술에 의한 전생 기억 -- 이런 신비주의occult 이야기들처럼 말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파룬궁(法輪功)>이란 기공수련회가 규모가 너무 커지다 보니 중국 당국의 견제를 받게 되어서 무더기로 체포되는 소동이 있었지만, 사실 중국에 가보면 아침마다 공원에서 기공을 연마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유명한 기공사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한 번은 호텔에서 기공사에게 척추안마를 받아 본 적도 있지만 결과는 `글세, 이 정도라면 안 하니만 못 하쟎아?' 였다. 그 기공사가 엉터리였는지 아니면 내가 기감을 느끼는 능력이 너무 떨어져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해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일억 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집단최면에 걸려서 헛것을 믿고 느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다. 어느 주간지의 <기> 관련 특집기사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도 기공 수련 인구가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분명히 <기>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아직까지 나 같은 일반인들은 도대체 `기'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느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을 믿지 않을 도리도 없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최소한 궁금증이라도 풀어야 숨이 터질 입장이 된 것이다.


`기'의 원산지는 동양, 특히 우리 나라와 중국, 일본이지만, 서구에서도 `기'에 대한 연구는 오래되었다. 기뿐 아니라 여러 가지의 초능력 연구소들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조시대의 퇴계, 율곡 선생의 `이기론' 논쟁이 역사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오래되었고, 특히 요즘은 사회 곳곳마다 `기'가 유행이다. 곳곳에 수련도장 간판이 있고 서점에 가면 `기氣'자가 들어 있는 제목의 책들을 수십 종류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학계를 보더라도 이공학(理工學) 계통의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한국정신과학학회>가 설립되어 있어서 기 현상을 연구의 한 분야로서 다루고 있으며, 기에 대한 책도 내가 알기로 두 권이나 공동 저술(논문 모음)로 발행하였다. 그런데 대단히 죄송하지만 내가 알고 싶어하는 `기란 무엇인가?', 즉 󰡐기󰡑의 정체에 대한 이론적 근거에 대한 이야기는 책에서 찾아 볼 수가 없다. 기껏 `생체 에너지, 공간 에너지, 우주 에너지, 정보를 담은 에너지' 등의 과학적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한 ‘짐작’뿐이다. `기氣', `단丹', `선禪', `명상瞑想' 이런 유(類)의 서적들을 뒤져보아도 `기'에 대하여 납득할 만한 체계적인 설명이나 과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책마다 사람마다 제각기 설명과 주장이 다르다. 심지어 모 대학교수의 저서로서 `기과학'이라는 제명의 책도 그 내용을 보면 전혀 과학적이 아니다. 아래에 내가 인용한 일본 과학자인 마루야마 도시아끼 丸山 敏秋의 “기란 무엇인가? <氣-論語부터 신과학까지, 1986>”라는 책에도 동양 고전에 나오는 ‘기’에 대한 소개와 일반적인 기현상(氣現像)에 대한 소개뿐, 기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적 근거는 없다.


내가 요구하는 ‘과학적’이란 것은 일반 과학 이론들처럼 현상과 기존의 이론을 토대로 하여 합당한 논리와 알려진 물리법칙에 의하여 만들어진 가설을 말한다. 그 가설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 결과까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표된 책들에 나와 있는 ‘기’에 대한 설명, 주장들은 그에 대한 근거가 너무나 막연하다. 그저 옛 글에 이러저러하게 나와 있으며, 기공하는 사람들의 느낌이 이러저러한 것 같다는 말뿐이다. 이래서는 ‘기’의 실재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기’란 그저 집단 내지 자기최면에 의한 가상적 효과이거나, 두뇌의 작용에 의하여 우리 신체가 신경생리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반증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과학은 관찰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 가설을 수립하고, 그 가설을 실험으로 확인(검증, 반증)하는 과정이다. 먼저 <기 현상>을 기존의 물리법칙으로서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논리적이나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며, 확인할 수 없는 것은 과학적일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비슷한 예로서 󰡒무슨 띠는 금(쇠 金)이요 무슨 띠는 목(木)이므로, 목이 금에게 장가가면 안 된다(金克木)󰡓라는 식의 사주팔자 풀이는 `무슨 띠가 어째서 금인가?󰡒하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적, 사실적 근거가 없으므로 과학적이지 않은 것이다. 물론 사실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원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도대체 `기'란 무엇인가? 어떤 것인가? 지구상의 수억 이상의 사람들이 믿고 또 느끼고 있다는 `기'가 어째서 이러저러한 것이리라 하는 설명조차 찾을 길이 없단 말인가? 서양 사람들이 `기'를 무시한다고 `기'분(氣分) 나빠할 처지가 못 된다. 나는 공학을 전공했던 사람이며 평소에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과학적 근거가 없으면 믿을 수 없다. 내가 요구하는 과학적인 근거란 관련 현상을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가설로서, 물리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기'란 것이 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확실한 것이라면 `기'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타당한 가설 정도는 세울 수 있을 것 아닌가? 그 존재의 근원에 대한 `가설'조차 없는 것을 실재(實在)라고 믿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들을 동원해서 `기'의 과학적 근거를 유추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가설의 수준이다. 그러나 과학 이론들과 합치되고 논리적으로 타당한 가설이라면 이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기의 존재와 작용'을 믿을 수 있다.


그런데 반신반의로서 시작된 연구가 뜻밖에도 내가 가진 과학지식과 그리고 여러 가지 초자연적 현상들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주장(종교의 교리를 감히 이렇게 표현함은 과학의 기본인 객관적 입장을 지키고자 해서이다)들'까지도 `기'에 의해서 상당부분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기'를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기'에 대한 글을 쓰기까지에 이르게 된 동기이다.






가설의 도입과 그 전개에 있어서는 `나의 생각과 추측'을 최대한 배제하고 나름대로 과학적 이론과 사실만을 그 근거로 삼고자 노력하였으며, 인용과 참고에 있어서는 그 근거가 확실한 자료와 해당 부분의 공신력이 충분히 인정된 학자들의 저술만 채택하였다.


나의 가설은 현상으로서의 ‘기’로부터 출발하지만 물질의 ‘식(識)’을 거쳐 의식과 영혼 그리고 사후세계에 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단순히 ‘기’에 대한 생각이라면 언젠가 과학이 밝혀 줄 것이라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영혼과 사후세계에 까지 관련되는 것이라면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왜냐 하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매 순간마다에 직접적으로 가장 필요한 지식인데, 내가 죽기 전까지 과학이 이 모든 것을 밝혀 내어서 내게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은 긴데 인생은 너무 짧다. 그러니 비록 ‘가설’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 나름대로 가장 가능성이 크고 타당해 보이는 것을 찾아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의 조그만 소망은 <기>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기'의 근원과 작용기전이 확실하게 밝혀지기를 바란다. 현대 과학의 진보 속도를 보면 그리 머지 않아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2. 동양 사상(東洋 思想)에서의 기氣.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기'라는 말에 대한 검토와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서점의 수많은 `기'에 대한 책들과 또 일상용어로서의 `기'의 다양한 의미가 서로 헛갈려서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기'에 대해서 혼란을 느꼈던 가장 큰 이유이다. 물론 아직까지 `기의 학문`이 정립되어 있지 아니하여 사람들마다 제각기 그 사용하는 의미가 조금씩 다르므로, 나의 독단으로 내린 정의는 잘 못된 것일 염려도 있다. 다만 내가 내린 바 '기`에 대한 결론과, 통상적으로 쓰여져 내려온 '기`의 정의가 그리 다르지 않으므로 이렇게 서두에서부터 '기`의 정의를 감히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 전단계로서 고전(古典)에 나오는 ‘기’라는 말과 그 의미를 살펴보자.






`기'란 말은 동양문화권에만 있는 개념으로서 오래 전부터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중국에서는 이미 춘추전국 시대부터 찾아 볼 수 있다. 더 오래 된 갑골문자 시대에는 찾아 볼 수가 없으며(주;‘三’자 비슷한 모양으로서 맨 아래의 가로 ‘一’의 끝이 아래로 처져 있는 글자로서, ‘바라다’라는 의미의 글자를 ‘氣’자로 보는 견해도 있어나, 다수 학자들은 ‘걸 乞’자의 원형으로 본다), 논어(論語)에서는 식기(食氣;식욕), 사기(辭氣;말씨, 말투) 등의 예 이외에 혈기(血氣)라는 용례가 있을 뿐이다. 맹자(孟子)에는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기‘의 본산이요 종주라 일컬어지는 도가(道家)의 시조인 노자(老子)에는 ’기‘가 불과 3회밖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춘추전국시대의 공자, 맹자, 노자 시대까지에는 ’기‘가 뚜렷한 실체나 개념으로 체계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기’라는 말과 개념이 정립되어 많이 사용되는 것은 장자(莊子)부터이다. 도가(道家)의 노자(老子)를 이은 장자(노자의 약 2백년 후의 인물)는 기를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기본이며, 나아가서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기초 원소라 생각했다. 생과 사를 기의 취산(聚散;모이고 흩어짐)으로 보는 생각이 여기서 나온다.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故曰 通天下一氣耳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기의 모임이다. 기가 모이면 생명이 되고 흩어지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옛부터 이르기를 천하에 ‘기’ 하나뿐이로다 한다”


후한(後漢) 시대의 왕충(王充)은 모든 것이 `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도 인간도 `기'의 변화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 생각했다. `기'를 `음(陰氣)'과 `양(陽氣)'으로 나누는 음양설과 `기'의 변화를 금, 수, 목, 화, 토의 다섯 가지로 분류 분석하는 오행설도 대략 이 무렵에 확립되었다(전국시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음).






宋代에 기의 개념이 사상적으로 전개되어. 정이천(程伊川)과 주자(朱子)가 기의 변화를 가져오는 내재적 원리로서 <리(理)>를 내세워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주자는 理는 그 자체로서 형질도 없고 움직이지도 정지하지도 않지만 기의 내재적 원리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모든 사물은 理와 氣의 상호작용에 의거하며, 理는 형이상(形以上)의 통일의 원리이고 氣는 형이하(形以下), 즉 존재하고 변화하는 실체로 보았다. 당시의 성리학(性理學)에서는 음양이 서로 작용하는 원리를 <이(理)>라하고 <이(理)>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기(氣)>라 하였다. 주자(朱子)는 이선기후(理先氣後)라 하여 이가 기를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주자의 생각은 <식이 기의 근원>이라 생각하는 나와 유사하지만, 그후의 다른 학자들의 생각은 다소 차이가 있다. 대체로 리기일원(理氣一元)을 지지하는 편이었으며, 理보다는 氣에 더 비중을 두었다. 이것은 理를 개념적인 것으로, 氣를 실재하는 우주만물의 존재와 변화의 기본적 원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氣의 배경으로서 理가 도입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理는 곧 자연의 법칙, 즉 현대 과학 용어로 하자면 물리(物理)법칙이다. 서양의 과학이 법칙을 추구함으로서 현재와 같은 성과를 이룬데 비해서 동양에서는 법칙을 밝히는 일에 소홀하였고 따라서 과학의 발전이 늦어진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도 법칙의 존재와 필요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주;理라는 개념은 ‘법칙’을 넘어서 氣가 실재할 수 있는 논리적 바탕을 제공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점에서 기의 배경에는 식(識)이 있어야 한다는 나의 가설과 상통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유학(儒學)에서의 理는 識과는 차이가 있다. 실은 그 ‘차이’가 이 책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동양사상에 있어서 氣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 또는 기능의 근원”(마루야마 도시아끼)이며, 물질의 원소, 생기(生氣), 정신기능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물질, 생명, 마음의 三界가 모두 기의 소행이고, 자연의 모든 변화는 기의 움직임(動靜)이다.


이러한 생각을 현대 물리학에 비교하면 기는 물질(소립자), 에너지와 모든 상호작용(물리학에서는 ‘힘’을 포함한 상호작용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을 합친 개념이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온 생기론(生氣論)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3. 氣란 무엇인가? -- 氣의 정의(定義)






이처럼 동양의 고전(古典)에 나오는 기는 그 개념이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어서 그러한 상태로서는 과학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기라는 개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질과 에너지는 이미 현대과학에서 거의 구명되었으며 생명력으로서의 생기(生氣) 역시 생리학과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과학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전에 등장하는 넓은 ‘기’의 개념에서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아니한 부분은 무엇인가?


‘기’를 ‘氣’만이 아니라 ’理‘를 합친 개념으로서 파악하되, 거기에서 물리학적으로 규명된 물질과 에너지(힘)를 제외하면 <상호작용(변화)에 대한 의지>만 남게 된다. 근래 우리 나라의 <기철학>의 주창자인 도올 김용옥 선생은 저서 <기철학 산조>의 머릿글 “탄현술(彈弦述)”에서 <기는 물(物)의 의지(意志;꼴림, 하고자 함)>이라 정의하고 있다. 나는 김용옥의 기에 대한 정의가 가장 정확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일상의 생활 용어로서 주로 사용하는 `기'는 `경향'이라는 의미와, 생체 작용으로서 느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생기(生氣), `살기(殺氣)', `한기(寒氣)', `끼(氣)가 있다' 등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기'는 그냥 수동적인 `어떤 상태'가 아니라, 그 `어떤 상태'가 능동적으로 외부로 표출되거나 작용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상태의 주체'는 `생기', `살기'에서처럼 인간이나 동물 등의 생물이기도 하고 `한기'에서처럼 무생물이기도 하다. `경향'은 좀 더 상세하게는 `의지의 표출, 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도올의 “기는 의지(꼴림, 하고자 함)”라는 말과 합치하고 있다.


이외에 `기'는 `기가 막힌다', `기운(氣運)' 등으로 생체나 우주 내의 어떤 `힘'의 흐름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과 그 때의 의미는 근본적인 것 즉 `정의'가 아니라, 2 차적인 것이라서 부(副)현상적인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어 일단 제외한다. 나중에 <생체 내의 기>에서 다시 검토될 것이다.






그렇다면 <의지;경향, 꼴림>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의식을 <지, 의, 정>, 즉 이성, 의지, 감정으로 분석한다. 여기에 의하면 의지는 의식의 한 부분(작용)이다. 그러나 <의식>이라는 말은 그리 쉬운 말이 아니다. 과학 특히 요즘의 첨단분야인 인공지능 연구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기계(思考機械)>의 가능성까지 인정하는 추세이며,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가?'하는 문제에는 아직까지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좀 더 상세하게 검토해 볼 것이다.


일단 <의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단순한 기계(조건반사)적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있게 하며,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외부의 원인과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






요는 의지란 인과율에서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개입 작용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목적성 - 한마디로 `주체성'을 가진 것이다.


주의할 것은 <기 = 의지>라는 것은 아니다. 도올 선생께서도 괄호를 붙여놓았듯이, `꼴림, 하고자 함'은 `의지에서 발휘되어 나오는 것'이지 의지 그 자체는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의지`는 주체적으로 내부에서 외부로 󰡐경향; 꼴림󰡑이라는 형태로 '기`를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계(조건반사)적'이 아니고, 외부에 대하여 `요구'를 작용시킬 수 있으려면 추가적인 어떤 `능력'이 필요하다. ‘의지’란 어떤 목적이나 의도, 즉 방향성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의 설정 내지 지향을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정보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맹목적인 ‘꼴림’이 되고 마는데, 맹목적이라면 ‘의도’나 ‘방향성’이 없는 것이다. 이 정보처리 능력을 인간에 비유한다면 분석, 판단하고 선택하는 지적 능력이 될 것이다. 이 <분석, 판단, 선택>은 심리학 용어로는 `이성'에 가장 가깝다. 사실에 있어서 이성은 의지의 바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과 의지와 감정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의식'의 각기 다른 면일 뿐이며, 항상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므로 `의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의미의 의식도 너무 좁다. 부족하다. ‘기’--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육체적 본능과 무의식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의식보다 더 폭 넓은 무엇--우리 인간의 삶의 이유와 목적에 관련되는 모든 <경향>이 의지와 기의 배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가장 유사한 개념이 불교의 유식설(唯識說)에서 설명되고 있는 바와 같이 의식과 본능을 포함한 <식 識>이다. 나는 `식'이란 말이 마음에 든다. 식이란 ‘안다’는 뜻이며, ‘안다’는 곧 ‘구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상과 다른 것의 차이를 알 수 있으며, 그 차이가 행동의 선택의 바탕이 되는 기초적인 판단능력을 말한다. 나는 앞으로 모든 물질--소립자들까지도 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 식에 의해서 기를 발휘한다는 내 생각의 근거를 제시할 것인 바, 그러한 내 생각은 `범식론(凡識論)'이라 할 수 있겠다. 범식론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서 범심론(汎心論)이 있다. 모든 물질에는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다.


`식(識)'이란 말의 의미는 상당히 포괄적이다. 철학에서의 가장 큰 두 개의 주제인 인식론(認識論)과 실체론(實體論)의 근저에 있는 동양적 개념이 식이다.


불교(유식론)에서 말하는 식은 우리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느끼는 다섯 개의 식(전오식; 눈, 귀, 코, 혀, 피부의 다섯 감각)과 의식, 말라식, 아뢰야식 등의 팔식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식’이란 글자의 의미는 ‘식별’, ‘인식’ 등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안다’의 범주에는 ‘느낌(感覺)’도 포함되어 있다. ‘안다’와 ‘느낀다’를 합하면 ‘정보를 받아들인다’라는 말이다.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cybernetics 이론과 섀넌의 정보(communication) 이론 등에 의해서 1940년 대 말경에 등장한 ‘정보’는 현대 물리학과 철학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어 있다.)


동사로서의 ‘식’은 ‘정보를 받아들임‘이지만, 명사로서의 ‘식은’ ‘지식’ 그리고 ‘아뢰야식’ 등의 용례에서와 같이 ‘정보 그 자체’이다. 이로서 ‘식’은 <‘정보 그 자체’와 ‘정보를 교환(처리)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도구로서 사물을 인식할 때에 명사와 동사의 복합적 의미로 인식하는 경우는 매우 흔히 있는 일이다. 영어 단어에서 대부분의 동사는 동시에 명사이라는 것이 그 증거이다. 철학, 물리학에 있어서도 ‘질료와 형상’, ‘체(體와 용(用)’, 즉 ‘존재와 현상󰡑을 과연 분리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의 `상상'의 출발점은 기였지만, 기의 성질과 이론적 근거에 대한 검토에서 기의 배경이 되는 무엇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얻은 결실이 <식識>이었다. 실제로 이 글은 <기>에 대한 글이 아니라 <식>에 대한 글이다. <기>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내가 얻은 결론은 <식>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를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기의 정체에 대하여 납득할만한 가설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나는 <기>의 배후에 있는 <식>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전에 나는 <식> 역시 <기>처럼 하나의 애매 모호한 개념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기>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식>을 깨우치게 된 것이다. 사실 <기>의 수준에 그치는 생각이었다면 나는 굳이 이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식>의 깨우침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으며, 삶의 목적을 알게 해주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의 자만심'이겠지만, 나는 다른 이들이 오랜 공부와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얻은 것을 함께 나누려 하는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느낌으로서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기’라는 작용이 있다(實在한다).


작용으로서의 ‘기’가 있으려면 그 근원인 ‘식識’이 있어야 한다.


`기'는 `식'이 외부에 대하여 발휘하는 ‘의지(꼴림, 경향)일 것이다.>






기는 식에 의해서 발휘될 수 있다. 따라서 식은 기의 전제조건이므로 기가 있으면 식이 있어야 한다. 또한 식은 그 자체 만으로서는 존재의 의의가 없으므로(외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식이 있으면 기도 있다. 즉, 기와 식은 상호보완적이며 함께 있는 것이다. 식 그 자체는 물리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식이 물질을 포함한 외부에 작용하는 수단인 기는 물리적이라야 한다. `물리적'이라 함은 물리법칙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 `법칙'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아니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기’의 작용은 알려진 물리법칙에 어긋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기는 물리적인 어떤 것일까?


기는 에너지가 아니다. 기는 힘도 아니다. 에너지나 힘이라면 물리적으로 측정이 가능할 것인 바, 아직 아무도 그 측정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기’를 옛 선현들의 정의와 같이 물리적인 힘, 그리고 소립자의 여러 근본적 성질을 포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리학에서 밝혀 낸 소립자의 성질은 일단 제외하고서 ‘식’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유형의 물질이 아닌 무형의 것으로서, 에너지와 힘을 제외한다면 어떤 가능성이 남는가? 물리학 책을 다 뒤져보면 딱 한 가지가 남아 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나오는 엔트로피다. 엔트로피는 `무질서'라는 말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가장 폭 넓은 의미로서는 `정보'의 개념이다. 기는 식이 외부 대상에 전달하는 정보일 것이다. 즉 ‘경향, 꼴림’은 외부에 정보의 형태로 작용한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정보>는 이 책의 주 연구대상의 하나이다.


미국 네바다 대학의 <의식 연구소> 소장인 딘 대린 Dean Darin은 "The Conscious Universe” (“의식의 세계”, 도서출판 양문, 1999. 주;이 책의 영문 제명은 “의식의 세계”가 아니라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우주”라는 의미이다)에서 염력(念力)을 “의식과 사물과의 상호작용”이라 정의하면서 아울러 “실험에 의하면 염력은 의식으로부터 물질로 정보가 이동하는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식과 기는 어떤 형태의 실재일까? 소립자의 가장 자연스러운 존재 형태가 파동적이라는 점과, 기를 감지하는 사람들이 대개 기를 파동의 형태로 느낀다는 점에서 기도 일종의 파동과 유사하거나 같은 형태라고 보는 것이 가장 오차가 작을 것이다. 이 생각은 기, 즉 식의 작용이 홀로그래피와 같을 것이라는 가정의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물리학이 밝힌 바와 같이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파동이다. 존재의 정의는 ‘차이(差異)’이다. 주변 혹은 다른 존재와의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차이에 의해서 주변과 다른 존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정의한다. 물론 ‘차이’와 ‘영향력’은 동일한 것이다. 파동은 순수하게 ‘차이’만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파동의 그림인 사인sin 곡선은 어떤 무엇이 주기적으로 차이를 나타내는(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단순한 존재의 형태이다. 현대 물리학의 최첨단 이론으로서 모든 존재와 힘을 한꺼번에 해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도 소립자와 힘 모두를 극히 미세한 끈의 진동으로 해석하려는 이론이다. 그러나 식과 기를 수학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지금으로서는 굳이 그 `형태'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파동이든 입자든 장(場)이든.






소립자--물질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기론>은 그리스 시대부터 있어 왔던 생각이며, 유명한 철학자 베르그송 등에 의해서 주장되었고, 금세기 초에도 생물학자 한스 드리슈 등이 신봉하던 이론이었다. 그리고 <기>라는 개념 또는 그 존재는 동양에서는 보편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를 의지 또는 식의 외부 작용수단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생각은 찾아보기 어렵다.(이경숙 저 “마음의 여행”에는 “기는 바로 영혼의 실체인 정보의 활동이며....‘서로를 알리려는 힘’이라 나와 있다. 정신세계사, 1999, P258). 물론 본질인 식과 현상인 기는 별 개로 나누어 생각할 수도 있고 하나로 통합하여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식과 기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의식과 사후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기라는 개념에 가까운 것 만으로서는 부족하며, 식이라는 기의 근원이 되는 실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기일원“이냐 ”이기이원“이냐 하는 옛 논쟁에 비유한다면 나의 생각은 ”식(이)일원론“이라 하겠다. 그러나 <기>라는 말과 개념이 이미 널리 익숙해져 있으며, 본질과 현상은 굳이 서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글에서 앞으로 <식>과 <기>가 다소 혼용될 것임을 미리 사과 드린다


참고로, 오랫동안 생명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철학이었던 <생기론>과 나의 생각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겠다. <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다.


<생기론>은 물질에 생명(생기)을 부여하는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다. 물질에 생기가 작용하면 생물이 되고, 작용하지 않으면 그대로 물질--무생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이 생각은 그 역사가 매우 길다. 이와 유사한 생각으로 물활론, 범신론, 범심론 등이 있는데, 그 중에 특히 이 책과 관련하여 인용할만한 이론으로서 띠야르 샤르댕Teilhard de Chardin(1881-1955)의 물활론이다.


띠야르 샤르댕은 프랑스의 신부였으며 철학자, 고생물학자로서, 물질과 정신(자연과 인간) 사이에 있는 간격을 설명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새롭게 정의한다. 물리학에서 에너지는 스칼라 양, 즉 그 크기만 있고 방향성을 가지지 않는 양이다. 샤르댕은 에너지가 방향을 가진 벡터 양이라 가정한다. ‘방향성’은 앞에서의 <기 = 꼴림, 경향>이라는 정의와, 그리고 ‘기’가 방향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식이 뒷받침해야 한다는 나의 가설과 동일한 논리 위에 있다. 에너지의 ‘방향’은 곧 에너지의 ‘의지, 생기’이다. 샤르댕은 에너지(모든 물질의 존재와 그 변화의 근본은 에너지이라는 물리 기초를 염두에 두시라)에 진화를 추구하는 방향성으로서 의지, 즉 ‘기’가 있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서 생물 그리고 인간은 이 에너지의‘정신적 벡터’의 작용 결과이며, ‘정신적 벡터’는 우주 전체에 작용하는 것이므로 우주(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최후의 완전 진화한 상태를 지향하여 나아가는(진화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는 이 최종적인 상태(목표)를 <오메가 포인트>라 하였다. 이 생각은 불교에서 모든 존재가 그 불성을 찾아서 해탈(성불)하게 되는 것이라는 교리와 같은 것이다. 이 것은 나의 <식--기> 가설과 상당히 일치한다. 다만 샤르댕은 ‘정신적 벡터’의 방향, 즉 그 본질이 ‘지고(至高)의 선(善)’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것은 다소 비약이 아닐까 한다. 소립자가 가지고 있는 미소한 에너지, 그것도 그 일부분에 우주 전체의 궁극적인 목표가 이미 담겨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기에는 논리에 비약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검토는 <사후식의 세계> 편에서 다시 생각해 보겠다. 샤르댕의 <오메가 포인트> 가설은 나름대로 물활론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제안된 가설로서 현대에도 신과학 방면의 과학자들이 즐겨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가설들은 물리법칙이나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관점만으로는 도저히 생명현상(생명의 탄생과 진화)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가설이지만, 현대에 들어서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부정되고 있다.


샤르댕을 제외한 다른 <생기론>이 물질과 생기가 독립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데 비해서 나의 생각은 모든 물질--그 근원인 소립자는 <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 그 자체는 분명히 물리적인 존재로서 물질과 분리될 수 없다. 다만 소립자와 소립자의 집합체인 생명체 사이에는 그 <식>의 수준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것은 <범심론 panpsychism>과 비슷하다 하겠다.


생기론 또는 물활론을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물의 <합목적적 성격>을 인정하는 가 아닌가에 달린 것이다. 모든 생물은 전체로서는 물론, 그 기본 단위인 하나의 세포까지도 어떤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목적성>이 어떻게 해서 생겨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명의 탄생과 진화의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물론 ‘목적’을 가진다는 것은 곧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논리적인 전제로 한다. 유물론적 환원주의자들의 생각은 ‘우연’과 ‘자연도태’에 의해서, 통합(전체)주의자들의 생각은 복잡계의 제2차 법칙적 특성(창발)에 의해서 생겼다는 쪽이다. 양측 공히 자신 있게 내 세울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없다. 나의 가설은 <식>, 즉 능동적으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소립자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식>은 곧 <정보>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정보’란 말의 의미처럼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현대 과학 철학에서 말하는 바, <정보는 정보를 낳는다>라는 명제와 같이 능동적인 <정보>인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최첨단인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상호 결합되는 접점에서는 물질의 존재, 즉 ‘객관적 실체’와 ‘정보의 초광속 전달’은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상보성인 것이다. 상세한 것은 <소립자> 편에서 아인슈타인의 EPR 상상실험과 보아의 “하나의 통합체”이론, 그리고 이 둘을 결합하여 밝힌 죤 벨 Jhon Bell의 정리 및 그 실험 결과를 통해서 말씀 드리겠다.






이상이 내가 생각하는 <식과 기의 정의>이다.


이제 과학적 사실들이 위와 같은 기의 정의와 부합되고, 그리고 과학 이론들이 <기>에 대하여 알려진 여러 가지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