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와 도교 (道家, 道敎, Taoism)
개요
도가와 경전
노자와 도덕경
장자의 해석
도가사상
도가와 도교의 구분 이유
우주와 자연질서의 개념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개념
초기의 이론적 절충
도가의 역사
진·한 시대의 도교
중국의 신선사상 전통
황로(黃老) 전동
혁명적 구세사상
진·한(秦漢) 이후 도가사상의 발전
도교의 출현
천사도와 도교조직에 관한 국가의 인정
도교의 체계적 성립과 전통
도교 비교주의(秘敎主義) 문학
당·송 이후의 도교
당의 도교
송·원 시대의 도교
도가사상의 영향
중국과학에 대한 도가의 공헌
현세 문학에 대한 영향
다른 사상과의 관계
현대의 도교
한국의 도교
성격
수용과 전개
고려시대의 도교
조선시대의 도교
개요
중국의 전통적인 철학사상 및 종교.
도가사상은 유교사상과 더불어 2,000년 동안 중국과 그 주변국의 생활과 사상을 형성해온 중국 고유의 종교철학이다. 도가사상의 특징은 실용주의적인 유교와는 달리 현실세계에 대한 신비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론에 있다. 도가에 대한 엄격한 정의에는 3가지 측면이 있다. 즉 도가철학은 〈노자 老子〉 또는 〈도덕경〉, 〈장자 莊子〉·>〈열자 列子〉 등과 같은 경전의 사상, '도'를 숭배하는 종교로서의 도교, 도가를 모두 포함한다. 도가사상은 중국문화의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스며 있다. 종교로서 도교는 국교인 유교와 비정형적인 민간신앙의 중간에 위치한다. 도가사상과 도교는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아시아의 한국·일본·베트남 등지로 퍼져나갔다. 한대(漢代 : BC 206~AD 220)를 전후하여 이전의 위대한 도가사상과 이후의 미신적인 도교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실상 도교는 형성 때부터 고래(古來)의 주술사상과 관련이 깊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도교를 철학과 종교로 구분하는 것은 단지 서술의 편의를 위한 것뿐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도가사상과 유교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양자는 고대의 전통 속에서 인간·사회·군주·하늘·우주에 대해 많은 사상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공유점 위에서 유교는 중국의 도덕과 정치체제에 관심을 두었고 도교는 보다 개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부분에 관심을 나타내었다. 한편 불교는 개인의 자아를 부정하고 현실세계의 허망함을 주장하기 때문에 도교와 극히 대립적이다. 그러나 경쟁적인 포교과정 속에서 양자는 많은 유사성을 갖게 되었다. 송대(宋代) 이후 민간종교에서 도교와 불교는 명확한 구분없이 공존했다.
도가와 경전
노자와 도덕경
도교의 모든 이론은 노자에 의해 마련되었다. 노자에 대해서는 〈장자〉에서 처음 나온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에서 당시까지의 전설을 모아 그에 대한 체계적인 최초의 전기를 썼다. 이들에 따르면 노자의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이고, 주(周) 조정에서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史官)을 지냈다. 공자가 그에게 예를 질문했다고 하며 뒤에 은퇴하여 〈노자〉(또는 〈도덕경〉)를 지었다. 그러나 〈도덕경〉은 노자 한 사람의 저술이 아니고 여러 사람에 의해 BC 3세기경에 편찬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도덕경〉은 군주에 대한 지침서이다. 이 책에서는 "성인(聖人)만이 군주가 되어야 하고 성군(聖君)은 백성에게 어떠한 금지나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된다. 분별·도덕·욕심 때문에 모든 번잡한 문제가 일어나므로 성군은 백성들이 이것을 제거하도록 다스려야 한다"고 규정짓고 있다. 이 책에서 성인의 개념은 중국의 다른 경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왕의 권위를 둘러싸고 있는 신성한 영기(靈氣)는 여기에서 '무위'(無爲)로 표현된다. 이 무위는 우주론적 정향을 지향하는 것, 즉 부자연스런 행위를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강경함을 제압하는 정치의 한 방법으로 여성적인 유약함이나 소극성이 찬양되는 것이다. 또한 〈도덕경〉은 보편적인 도(道) 자체의 궁극적인 통일을 사회적 이상으로 본다. 문학에서는 당시대의 대화법과 일화를 소개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도덕경〉은 신비적인 주제들을 간결한 문장으로 명료하게 표현해낸 고도의 압축된 문체로 유명하다.
장자의 해석
〈사기〉는 장자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학문은 엿보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근본에서는 노자의 사상으로 귀결된다……" 이와 같이 장자는 노자와 도가사상을 계승했고 더 나아가 노자와 구분되는 사상적 특색을 가지고 자신의 독특한 철학사상 체계와 학풍, 그리고 문풍(文風)을 형성시켰다. 〈도덕경〉이 성군을 향한 것으로서 사회적·정치적 개혁을 목표로 했다면 〈장자〉는 개인의 생활·본성을 보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노자가 그의 책과 삶에서 도가의 기본원리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면, 몇 세대 뒤의 장자는 사회 참여를 일절 거부하고 궁극적인 관심을 소요유(逍遙遊)에 두었다. 〈장자〉에서는 또한 모든 가치의 상대성이 강조된다. 만물일제(萬物一齊)의 사상, 즉 "도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에서 귀하고 천한 것의 구분이 없다"(以道觀之, 物無貴賤)는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은 같으며 따라서 죽음 자체는 도에 합치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도가사상
도가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 다시 말하면 우주와 인간사회의 상호작용, 시간의 주기적 성격과 우주의 리듬, 복귀(反者道之動)의 법칙 등이다.
도가와 도교의 구분 이유
중국에서 도가와 도교는 구분하여 인식하는 것이 보통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철학유파로, 후자는 중국의 전통적인 종교와 교단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도가와 도교를 구분하는 데에는 3가지의 관점이 있다. 첫째, 중국학자들은 도교는 도가사상이 복잡한 다른 사상이나 신앙을 섭취함으로써 본래의 순수성을 잃은, 타락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도가 속에 도교가 포함된다. 둘째, 프랑스학파를 중심으로 한 서구의 학자들은 도교는 도가사상의 발전형태로 이해해야 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도교가 도가사상의 타락한 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기준에 의거하여 도가와 도교를 구분하지 않고 다오이즘(Taoism)의 한 단어로 양자를 모두 호칭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도가를 철학적 다오이즘(Philosophical Taoism)이라고 불러, 도교와 구분하기도 한다. 셋째, 일본학자들은 도가와 도교를 명확히 구분하여 전자를 철학, 후자를 종교라고 한다.
우주와 자연질서의 개념
① 우주론 : 노자는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불변한 도가 아니요,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라고 했다. 이는 중국 고대사상 중에서 안정된 사회를 이룩하려면 각자의 이름[名 : 신분]에 걸맞는 내용을 갖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명론(正名論)과는 그 범주에서 다르다. "무명(無名)은 천지의 시초요 유명(有名)은 만물의 모태(母胎)이다." 즉 무명과 유명, 무와 유는 상호의존적이며 영원한 도의 양 측면이다. 무는 아무 것도 없음이 아니라 감지할 수 있는 질(質)이 없음을 의미한다. 노자에게서 무는 유보다 상위개념이다. ② 소우주와 대우주 개념 : 인간은 대우주에 대응하는 소우주이다. 인간과 우주 사이에는 그 체계에서 일치하는 점과 연관성이 존재한다. 인간과 자연질서가 통일적으로 융합되어야 한다는 신비로운 사상은 중국사상의 고유한 특징이며 도가가 특히 이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③ 도에로의 복귀 : 자연질서로서 도의 법칙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이 애초에 시작한 시점으로 계속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휘어지면 온전하게 되고 굽으면 곧게 되고 움푹 패이면 꽉 차게 되고 낡으면 새롭게 되고…… 등등은 모두 "되돌아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다"(反者道之動)라는 법칙에서 나온 말이다. 삶과 죽음은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무'에서 '유'로, 다시 '무'로 반복되는 영원한 변화 속에 놓여 있지만 그 기초가 되는 최초의 합일성은 상실되지 않는다. ④ 발전과 분화 : 〈주역 周易〉의 5행(五行)과 64괘의 이론에 따르면 변화 자체는 어떤 체계를 가지고 일어나며 또한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창조에 대한 장자의 생각은 도공과 장인의 활동, 즉 '형성시키고 변화시키는 것'(造化)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동일한 과정의 두 국면이다. 즉 미지의 도가 태초의 혼돈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우주를 형성시킨다. 그리고 음(陰)과 양(陽)의 반복에 따른 우주의 영원한 변화(밤과 낮, 겨울과 여름 같은 것)는 동일한 도의 바깥면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개념
① 무위 :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과장하지 않음을 뜻한다. 무위는 억지로 하지 않고 인공의 힘을 가하지 않은 자연스런 행위를 뜻한다. "완전한 행위란 그뒤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모든 자연의 과정에서 인위적인 것이 끼어들게 되면 그것은 항상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되거나 실패로 끝날 것이기 때문에 무위 없이는 진정한 성공이란 있을 수 없다. ② 도가 원시사상의 사회적 이상 : 초기의 도가사상에서는 계획적인 인간의 간섭은 자연의 변화과정의 조화를 깨뜨리게 된다고 믿었다. 원시농경사회의 자연적인 리듬과 자연의 커다란 움직임 속에서 사심없이 공동체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도가가 이상으로 여기는 사회이다. 장자는 유가에 의해 찬양되는 문화영웅이나 문화·제도의 창시자, 사회의 의식과 규범을 만든 성현들까지도 비난했다. 심지어는 '지식욕'까지도 그것이 경쟁심을 자아내고 물욕을 자아내어 분쟁을 일으킨다고 하며 비판했다. ③ 지식과 언어에 대한 사상 : 장자는 중국의 논리학자인 혜시(惠施)로부터 자극을 받아 그의 지식과 언어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켰다. 도가의 관점에서 모든 존재와 만물은 근본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의견대립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전체적인 시야를 갖지 못하고 부분적인 진리를 절대적으로 간주할 때만 일어난다. 따라서 장자가 생각하는 성인(聖人)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등과 같은 관념의 상대성을 완전히 인지한 사람이다. "그대가 변론(辯論)할 때면 그대가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다.가장 위대한 도는 어떠한 이름도 갖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훌륭 한 변론에서는 어떠한 것도 말해지지 않는다." ④ 삶과 죽음의 동일성 : 신비로운 깨달음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구분을 없앤다. 이러한 사상은 죽음에 대한 장자의 태도를 규정지었다. 삶과 죽음은 단지 낮과 밤, 여름과 겨울처럼 쌍으로 이루어져 있는 주기적인 단계의 하나에 불과하다. 인간 자체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은 거대한 베틀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베틀에서 나와 베틀로 돌아간다." 일상적인 지(知)의 분별을 잊은 망(忘)의 상태에서 본다면 생시의 장자와 꿈에서 나비가 된 장자를 구분하기 어려운 것처럼 생과 사를 구분하기 어렵다. ⑤ 인간의 종교적 목표 : 유교에서 성인(聖人)은 고대의 의례를 회복하는 길을 가르친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도가의 성인개념이 정적주의(靜寂主義)를 통해서 세상을 도의 길로 인도하는 외왕(外王)에 의해 분명해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가에서의 성인은 내성(內聖)이다. 보통사람은 세속적인 탐욕과 부, 특히 일상적인 지(知)에 의해 흐트러지고 자신의 힘을 마르게 하지만 성인은 "통일성을 파악하고", "하나를 굳게 잡는다"(抱一). 즉 성인은 의식의 기초를 이루는 태초의 혼돈상태의 도를 가지고 통일성을 희구한다. '통일성의 파악'은 또한 자기 자신 내부의 음양의 조화를 유지하고 혼(魂)과 백(魄)을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혼백을 보존하고 조화시키는 것은 육체적인 생활을 위해서와 똑같이 인간의 실재 전체를 통일시키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옛 도가의 진인(眞人)들은 오랜 삶을 통해 스스로를 함양함으로써 성인이 되었다. 그들의 장수(長壽) 자체야말로 그들의 성인다움과 도와의 일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오묘한 성찰 속에서 장자는 육체적인 수행을 통해 장수와 불사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혐오했다. 그렇지만 육체적 불사는 도교 신비주의가 전개됨에 따라, 그리고 이전부터 오랫동안 도가의 목표였다. ⑥ 상징주의와 신화 : 도가들은 그들의 좌망(坐忘) 상태에서의 통찰력을 상징과 우화를 사용해 표현했다. 예를 들면 도는 골짜기와 같이 낮으며 수동적이고, 물과 같이 유연하며 생명력을 주는 것이다. 도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만물의 어머니이며, 신비에 싸인 듯한 여성과 같은 것이다. 또한 수레의 축이며, 들보이고, 바퀴의 비어 있는 중심이라고 했다.
많은 고대 중국의 신화는 도가에 의해 보존되었는데 그들은 도가의 사상을 예시하기 위해 신화를 끌어들였다. 신비로운 낙원, 구름을 타고 다니는 여행, 날아다니는 용에 대한 꿈은 혼백의 방황, 도의 깨달음, 꿈과 현실의 동일성에 대한 은유이다.
초기의 이론적 절충
① 음·양과 기(氣)의 사상 : 음과 양은 모든 중국철학의 공통된 줄기이다(→ 색인 : 음양오행설). 음과 양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교대로 일어나는 상호보완적이고 상호의존적인 2개의 원리 또는 국면이다. 음·양은 우주의 모든 대립쌍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상징이다. 음·양의 변화와 상호작용은 만물을 생성시키는 것이다. 음과 양은 자주 2개의 '기'라는 표현으로 쓰인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에게 부여된 원초적인 생명력의 한 부분인 '기'를 갖고 있다. 사람이 할 일은 그에게 주어진 생애를 모두 마치기 위해 '기'를 강하게 하고 다스리며 키워나갈 수 있도록 분별있는 생활을 해 '기'를 해치지 않는 것이다.음양가(陰陽家)와 관련해 또다른 중요한 개념으로는 오행과 오덕(五德)이 있다. ② 양주(楊朱)와 열자(列子) : 양주(BC 400경)는 '사회를 개선하려는 공자의 열정을 비웃은' 초기 도가 운둔자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다. 양주는 모든 사람은 어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생명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세상을 다 준다 하더라도 자기의 머리카락 한 올도 희생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사상은 〈열자〉에 잘 나타나 있다. 열자는 많은 고대전설 속에서 영혼의 여행을 했다고 하는 유명한 인물로 나오며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활동작용 전체를 기계론적으로 파악한 철학자였다. ③ 관자(管子)와 회남자(淮南子) : 도교의 색채가 들어 있는 〈관자〉의 몇몇 부분은 '심술'(心術)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 있다.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듯이 '심'은 육체를 다스린다. 〈회남자〉는 그당시까지에서 가장 정교한 우주철학, 즉 대우주 속의 인간의 위치, 사회 질서, 인간의 '성인다움'을 지향한 이상에 대해 논했다.
도가의 역사
진·한 시대의 도교
중국의 신선사상 전통
진·한 시대(BC 221~AD 220) 동안 도교사상과 수행의 발전은 주로 황실이라는 유리한 장소에서 발전했다. 권력의 공고화와 확대를 열망했던 황제들은 자연히 비법가(秘法家)를 우대했다. 동부 해안지역[山東]으로부터 일련의 비법가들이 진과 전한의 조정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신선들이 사는 섬들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 섬은 장자가 말한 바 있는 섬이었다. 그들 동부인들은 황제의 건강과 장수를 보장해주는, 신선에 대한 제사의식 등을 제국의 수도에 끌어들였다. 여기에서 최초로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신선방술이 복잡하게 발전했다.
황로(黃老) 전동
황로사상가란 전설상의 황제(黃帝)와 노자의 숭배자를 말한다. 그들은 노자를 완전한 통치술을 밝힌 사람으로 존경한다. 사마천(司馬遷)이 황제의 치세와 더불어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기술했듯이 황제(黃帝)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다스림으로써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한다. 황로사상의 가르침은 산둥[山東] 지방에 있던 제(齊) 왕실에서부터 곧 모든 지식인과 관리들에게 확산되었다. 전한시대의 많은 정치가들은 황로사상의 가르침에 따라 무위(無爲)로 통치하려고 노력했다. 한 무제(武帝 : BC 141/140~ 87/86) 때에는 직접적인 정치적 관련성은 상실했지만 이상적 통치와 장수비결에 대한 황로사상의 가르침이 계속해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는데,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도가운동이라 할 만하다.
혁명적 구세사상
감충가(甘忠可)의 〈태평경 太平經〉에서부터 나온 혁명적 구세사상(救世思想)은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을 물리치고 후한을 세우는 데 기여했지만 후한이 쇄락해가자 민중들은 더이상 한의 부흥을 바라지 않았다. 황로사상을 신봉한 운동이었던 황건(黃巾)의 난(184)은 결국 실패했다. 이후에도 이와같은 혁명적 구세사상에 따른 반란은 역사상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과 운동은 후한 말기에 종교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한 도교의 활동과는 무관한 것으로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진·한(秦漢) 이후 도가사상의 발전
3~4세기에 도가는 3방향으로 발전했다. 첫째, '현학'(玄學)으로 왕필(王弼 : 226~249)의 〈노자주 老子注〉나 곽상(郭象 : ?~312)의 〈장자주 莊子注〉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왕필은 송학(宋學)보다 앞서 이(理)를 말했고, 곽상은 자연을 중심개념으로 서술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성인은 부자연스러운 행위는 조금도 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완성된 생활을 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이 생각하는 최대의 성인은 노자가 아니라 공자라는 것이 특징이다. 둘째, 열자가 출현하여 숙명론적 자연주의를 말했다. 셋째, 세속적 가치를 멀리하는 청담사조(淸談思潮)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 사조는 2세기 중엽부터 6세기초까지 계속되었다. 11세기에 도가사상은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성리학자들이 도가의 정적주의와 무위사상을 호되게 비판한 결과, 도가사상은 11세기 이후에는 철학체계로 존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정서에서는 중국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지 않았다.
도교의 출현
진·한(秦漢) 때의 신선방술(神仙方術)과 황로지학(黃老之學)이 도교의 전신이다. 후한의 순제(順帝) 때 장릉(張陵)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창시하여 노자를 교주로 삼아 도교를 형성시켰다. 또한 후한의 영제(靈帝) 때에 장각(張角)이 세운 '태평도'(太平道)는 초기 도교의 중요한 파벌을 형성했다. 이때부터 신비한 방술로 장생불사를 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파종단(敎派宗團)으로서의 도교가 시작되었다. 태평도란 후한의 간길(干吉 : 혹은 于吉)이 창시하고, 그후 184년 장각을 중심으로 하여 황허 강[黃河] 이북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황건적(黃巾賊)이 신봉하던 종교이다. 〈태평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들은 병의 치료, 권선(勸善), 수일(守一 : 靜坐에 의한 정신통일), 천·지·인(天地人)의 조화 등을 꾀했다. 오두미도는 그 교문(敎門)에 들어갈 때 5두(斗)의 쌀을 바친다고 하여 오두미도라 불리게 되었다. 나중에는 천사도(天師道)라고 했으며 13세기부터는 정일교(正一敎)라고 불렀다.
천사도와 도교조직에 관한 국가의 인정
장릉이 죽은 후에, 아들 장형(張衡)과 손자 장로(張魯)가 그 술(術)을 전했다. 이들을 3장(三張)이라 하고 각각 천사(天師)·사사(嗣師)·계사(係師)라 불렀다. 장릉은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천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2세기 후반까지 그의 자손들의 지도하에 천사도는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독립적인 종교·정치 조직으로 발전했다. 215년에 장릉의 손자 장로가 조조(曺操)에게 투항했다. 이후 조조가 세운 위(魏)에서 천사도는 하나의 국가적인 종파로 인정되었다. 그대신 천사도는 위를 한을 대신한 왕조로 합리화해주었다. 이와 같이 국가와 타협함으로써 도교의 교리 또한 체제 인정의 이데올로기로 변했다. 천사도는 위와 서진(西晉)의 궁중에서 3세기말까지 꾸준히 발전했고 북조(北朝) 여러 나라의 많은 권세가들이 교도가 되었다.
도교의 체계적 성립과 전통
① 방술(方術)의 발전 : 도교의 사상과 방술은 4세기 진대(晉代)에 와서 갈홍(葛洪)의 〈포박자 抱朴子〉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갈홍은 내편(內篇) 2권과 외편(外篇) 50권 속에서 신선양생술(神仙養生術)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서 도가사상과 신선설이 결합을 보게 된다. 또한 이때부터 태평도와 오두미도는 천사도로 총칭되었다.
구겸지(寇謙之)는 천사도를 계승하여 북위(北魏)의 세조(世祖) 때에 국교화시켰다. 그는 장로의 방술을 닦았고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는 대신(大神)에게서 〈운중음송신과지계 雲中音誦新科之誡〉를 받고 천사의 자리를 물려받아 장릉 이후의 천사도를 쇄신하라는 명을 받았다. 구겸지는 유(儒)·불(佛) 양교에 대해 자신들의 종교를 처음으로 '도교'라 칭했다. 여기에서 도교는 하나의 종교교단으로서 성립을 본 것이다.
6조(六朝) 도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양(梁)나라의 도홍경(陶弘景 : 456~536)을 꼽는다. 그는 각지를 순례하고 도교를 체계화했으며 도교사상을 집대성했다. 37세에 구용(句容)의 마오산 산[茅山]에 은거했고, 이때 양의 무제(武帝)가 산 속에 있는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그의 저작으로는 마오산파에게 강신(降神)한 진인(眞人) 말씀의 필사본을 교정한 〈진고 眞誥〉와 〈등진은결 登眞隱訣〉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포박자〉가 선인이 되는 방법으로 금단(金丹)의 제조나 복용을 강조한 데 반해 도홍경은 수일(守一)의 실제적인 수양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마오산파에 속해 있으면서 조정의 관리였던 허매(許邁)와 그의 아들 허목(許穆)은 강력한 신(新)도교 계시의 주요한 수혜자였다. 허씨 부자의 봉사 속에서 양희(楊羲)는 상청(上淸)의 하늘에서 온 진인들의 방문을 받는 영예를 얻었다. ② 제의(祭儀) : 도교의 핵심은 주기적인 제의를 거행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은 극히 적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1년중 특별히 1, 7, 10월에 올리는 축제인 제초(齊醮)이다. 또한 도첩(道牒)을 처음 받거나 도량[道場]을 봉헌할 때 하는 제의도 중요한 것이다. 이들 제의는 상황에 따라 정성의 정도가 다양하다. 제의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합기(合氣)라고 하는 공동의 성적(性的) 제의인데 매달 거행된다. 불교에서는 이를 극히 방탕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 제의는 고대 농경사회의 축제 등의 관습이 통합된 형태로 보인다
도교 비교주의(秘敎主義) 문학
① 주석가들 : 〈도덕경〉에 대한 많은 주석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왕필이 쓴 것이다. 그는 현학파(玄學派)의 시조이다. 〈장자〉에 대한 주석은 곽상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 책은 원시유교적 경향이 농후했다. 행정관리의 입장에서 도가사상의 도전에 직면했던 그들은 도교경전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취하려 하지 않았다. 정관주의(靜觀主義)적인 도교경전에 대한 해석적 주석서는 계속하여 씌어졌는데 이때의 해석에는 불교를 포함한 매우 다양한 철학들이 동원되었다. ② 신선들 : 〈장자〉에 나오는 신선들은 한대까지 보편적인 흥미의 대상이었다. 전설적인 신선들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체계적으로 모은 책은 2세기초의 〈열선전 列仙傳〉이다. 이 책은 72명의 제자가 등장하는 〈논어 論語〉와 같이 72명을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고, 신선들 각각의 전(傳) 끝에는 짧은 찬(讚)이 붙어 있다. 전기문학의 이러한 형식은 이후 시문의 발전단계에서 시에 산문이 섞인 형태의 발전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③ 노자숭배의 경전 : 중국의 종교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 가운데 하나는 노자가 성인(聖人)에서 신으로 바뀌어가는 현상이다.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노자변화경 老子變化經〉은 노자를 모든 생의 기원으로서 어느 때나 나타날 수 있는 전능한 우주적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당·송 이후의 도교
당의 도교
중국을 재통일한 당이 들어서자 도교는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 고조 이연(李淵)은 노자와 성이 같다고 하여 자신을 노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당의 거대한 영토 전역에 걸쳐 도교가 널리 전파된 사실은 둔황의 석굴에서 발견된 수많은 도교 서적에서도 증명된다. 도홍경의 맥을 이은 왕원지(王遠知)가 남북의 도교를 종합하여 당대 도교의 기초를 다졌다. 중국의 극서지방에 위치한 둔황은 중앙아시아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여기에서 도가들은 불교를 비롯하여 교의상으로 매우 다른 조로아스터교·마니교와도 접촉했다. 〈장자〉의 사본이 토번(吐蕃) 왕에게 보내졌고 카시미르 왕의 명에 의해 산스크리트로 번역되었다.
송·원 시대의 도교
① 중국 내에서의 발전 : 송(宋 : 960~1279)과 원(元 : 1271~1368)에서 도교는 종교적으로 크게 활기를 띠었다. 이것은 송대에는 부분적으로 이민족 침입에 자극받은 것이고, 원대에는 몽골 지배층에서 당시 유행하던 금강승(金剛乘)으로부터 자극받은 것이다. 남송시대가 되면서 이민족에게 점령된 북부 중국에서 많은 수의 새로운 도교 종파가 생겨나고 이들은 급속히 세력을 확대시켰다. ② 도교 서적의 발전 : 일찍이 570년경 모든 도교학파의 학설을 알기 쉽게 이해할 필요성에 따라 최초로 방대한 도교 백과사전이 편찬되었다. 이것은 갖가지 서적에서 추출된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러한 편찬서들은 송·원대에 상당히 많이 저술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운급칠첨 雲 七籤〉(1022경)으로 송 이전의 도교를 총괄한 것이다. 전교(傳敎)를 위한 교훈적 소책자는 한층 대중적인 양식을 갖추었다. 또한 모든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수많은 비문(碑文)이 있는데, 이것은 도가와 그들의 후원자에 대한 중요한 역사자료이다. ③>금단(金丹)의 발전 : 학식있는 전문가들이 연단술(鍊丹術)을 정제하면서 내단(內丹)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제약용어인 내단은 몸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말할 때 쓰인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연단술에 대한 은유는 매우 일찍부터 생리학에 적용되어왔다. 예를 들면 갈홍은 정액을 '음(陰)불로장생약'으로 불렀다. 그러나 송대에 오면 체계적으로 내밀화되고 세련된 연단술이 매우 넓게 퍼져나감으로써 더 일찍부터 씌어진 외단(外丹)에 관한 모든 책이 이때부터는 내단에 대해 쓴 것으로 믿어졌고 또한 이때까지 진짜 불로장생약을 만들려던 시도들을 더이상 속임수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④ 학설의 융합 : 유교는 이미 불교로부터 많은 점을 수용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도가들 또한 뒤늦지 않게 선종(禪宗 : 수행에서 직관을 강조함)와 성리학(性理學 : 지식과 이성을 강조함)의 학설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것과 종합했다. 또한 민간 도교의 성격을 띤 3교(三敎) 절충의 움직임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도가사상의 영향
도가는 선진(先秦)시대의 중요한 학파 중의 하나로 중국 고대철학의 전체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역사상 도가철학은 정통 유학에 비판적인 인물들인 한대(漢代)의 양웅(揚雄)·왕충(王充) 등의 사상을 변화시켰으며, 송·명(宋明) 이학과 같은 관변유학에 흡수되기도 했다. 또한 한대 초기의 황로학(黃老學)이나 위·진 현학(魏晉玄學)에서와 같이 통치철학이 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도가철학은 도교의 종교철학체계 수립과 불교의 사상발전에 기여했다. 한대나 위진남북조 시기의 불교는 종종 도가사상을 원용해 인도의 불경을 해석하기도 했다. 양진(兩晉) 시기의 불교인 반야학(般若學)은 도 (玄學)·불 결합의 산물이다.
중국과학에 대한 도가의 공헌
도가의 생리학 연구기술 그 자체에는 신앙적 성격이 없다. 의학자와 똑같이 건강을 지키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이들의 최대관심사였다. 의학은 1세기경부터 독립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많은 도가 치료자와 위생학자들이 의학지식을 더해 주었다. 전설적인 선사(仙師)가 황제(黃帝)에게 말한 가르침을 기록한 〈황제내경 黃帝內經〉은 현존하는 최초의 의학서이다. 도가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전통의 권위에 의존하는 유교와는 반대로 도가들이 물(物)의 성질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과 경험을 중시했던 사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세 문학에 대한 영향
전국시대와 전한시대부터 도교에 대한 내용은 이미 다른 학파의 저술 속에서 나타난다. 직접적인 인용과 분명한 모방이 자주 발견되며 〈도덕경〉과 〈장자〉로부터의 인용은 이후 모든 시대의 중국문학에서 풍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의 문체와 내용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많다.
신선술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았다. 많은 시에서 신선과 불로초를 찾아다닌 경험을 직접 또는 은유적으로 쓰고 있으며 불로장생약을 지으려고 했던 사실을 묘사했다. 방술상의 많은 용어들이 시어의 기본이 되었다. 마오산파의 저술들은 중국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唐詩)에서 특히 마오산파의 문헌을 그대로 언급한 것이 많다. 이백(李白)과 같은 위대한 시인도 마오산파에 정식으로 입문했다.
다른 사상과의 관계
유교와 도가사상이 '사회 참여'와 '사회 초월' 사상으로 대조를 이룬다고 하는 기존의 평가는 〈역경〉과 같은 유교경전에서 나타나는 비(非)사회적 측면을 간과하는 것이다. 도교에 대한 평가도 도가철학의 사회사상과 도교의 정치적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
중국불교는 인도종교가 전파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중국 종교의 나무가 인도의 자극을 받아 개화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중국적 특징을 보존하고 있다. 중국에서 불교가 가장 먼저(AD 65) 언급된 곳은 황로사상을 신봉하던 한 도가의 저술 속에서였다. 따라서 불교는 처음에는 단순히 도교의 다양화로 간주되었다. 붓다의 깨달음은 득도(得道)로, 불교의 성인들은 진인으로, 열반(니르바나)은 무위(無爲)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AD 166년 한의 황제는 노자와 붓다를 함께 제사지냈다. 초기의 도교조직·문헌·의식이 불교로부터 영향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4세기경에는 도교 문헌의 문학적 형식 속에서, 그리고 최고 수준에 달한 도가들의 철학적 표현 속에서 불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상호적인 것이어서 도교가 불교와 다른 외래종교의 영향 아래 사상의 폭을 넓혀갔다면, 불교는 중국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도교화'를 진행시켰다. 도교와 불교의 궁극적인 통합은 선(禪) 사상에서 이루어졌다. 도교의 불로장생이라는 종교적 목적과 불교의 윤회사상은 서로 유사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융합되었다. 선불교의 사상은 '도학'(道學)이라고 일컬어진 송대 성리학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일찍이 당대부터 '3교'의 통합이 나타나고 있고 이것은 송과 명대에 이르러 대중적인 운동이 되었다.
현대의 도교
20세기 도교의 중심지는 타이완이다. 타이완의 도교는 17~18세기 푸젠 성[福建省]에서 옮겨간 대규모 이주민 때문에 비롯된 것이지만, 새로운 발전은 제63대 선사(仙師)인 장언푸[張恩溥]가 1949년 피난온 것 때문이다. 타이완의 도교는 여전히 전통적 형태로 남아 있다. 오늘날 선가(仙歌)의 음송은 장도릉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1960년대에 타이완의 도교는 부흥기를 맞았다. 도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 또한 서양학자까지도 참가하여 진행중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도교가 앞으로 크게 발전하여 서양에까지 전파될 것을 기대하게 된다. 현재는 장위안셴[張源先]이 64대 천사로 있다.
Macropaedia| 趙京蘭 참조집필
한국의 도교
한국의 도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특별히 교단을 형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교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봉건 권력이나 지식인뿐 아니라 민간신앙에도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성격
일반적으로 도교의 역사는 삼국시대의 중국도교 유입이나 고려시대의 의례 중심의 도교, 그리고 조선 중엽의 여러 인물의 행적이나 저술에서 드러나는 수련적 도교, 즉 내단(內丹)을 중심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에 비해 한국 도교의 원류를 고유의 신선사상에서 찾는 입장도 있다. 즉 단군신화를 비롯한 건국신화를 신선사상의 표현으로 보거나 중국 도교의 발생이 해동(海東)의 신선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조선 중엽에 조여적(趙汝籍)이 〈청학집 靑鶴集〉을 저술하며, 조선 단학(丹學)의 계보를 밝히는 데서 잘 드러난다. 조여적은 조선 단학의 계보가 광성자(廣成子)-명유(明由)-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문박(文朴)-영랑(永郞)-보덕(普德)-도선(道詵)-최치원(崔致遠)-위한조(魏韓朝)-편운자(片運子)를 거쳐 자신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이는 신빙성은 없으나 조선 중기 도교적 수련에 관심을 지닌 지식인들의 민족의식과 연관된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이같은 입장은 〈조선도교사 朝鮮道敎史〉를 쓴 이능화(李能和)에게서도 두드러지며 오늘날에도 많은 호응을 받고 있으나 그 사실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수용과 전개
한국 도교의 시발은 624년(영류왕 7)에 당(唐) 고조가 고구려에 도사(道士)를 파견하여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론하게 한 일이다. 이전에도 중국의 오두미교를 고구려인들이 신앙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643년(보장왕 2)에는 연개소문이 도교를 들여와 천하의 도술을 다 갖추어야 한다는 건의를 하여 당으로부터 숙달(叔達) 등의 도사와 〈도덕경〉을 들여오고 도교를 유교나 불교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고구려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승려 보덕(普德)이 백제 땅이던 완산주(完山州)의 고대산(孤大山)으로 이주하는 등 불교측의 거센 반발이 일기도 했다. 신라에서는 김유신(金庾信)이나 그의 증손인 김암(金巖) 등이 도교적 방술에 능통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보다는 신라 하대 유당학인(留唐學人)들에 의한 수련도교(修練道敎)의 유입이 보다 중시된다. 도교가 극성하던 당에 유학한 신라 하대의 지식인들 중 김가기(金可紀)·최승우(崔承祐)와 승려 자혜(慈惠)는 천사(天師) 신원지(申元之)의 알선으로 종리권(鍾離權)으로부터 여러 도서(道書)와 구결(口訣)을 전수받고 수련하여 단(丹)을 이루었다. 이중 김가기는 중국의 도교전적인 〈운급칠첨〉 중 속선전(續仙傳)에 의하면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당에서 백주등선(白晝登仙)했다고 하며 유당학인인 최치원과 이청(李淸)에게 구결을 전수했다. 최승우와 자혜는 신라에 돌아와 후인들에게 도요(道要)를 전수했다. 이로써 한국에 처음으로 중국의 수련적인 도교가 전해져 이후의 도맥(道脈)을 형성했고, 이러한 한국 도맥의 서술은 조선 중엽에 한무외(韓無畏)가 저술한 〈해동전도록 海東傳道錄〉에 의한 것으로 그 실제적인 전승과 내용은 신빙성이 약하다.
고려시대의 도교
고려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왕실의 복덕을 비는 국가의례 중심의 과의(科儀) 도교가 성했다고 평가된다. 기록으로는 현종 때부터 재초(齋醮)가 행해졌다고 하나 가장 성행한 것은 예종 때이다. 예종은 송(宋) 휘종(徽宗) 치하의 문물제도를 거의 받아들였는데, 휘종은 대단한 도교 애호가였다. 예종의 대표적인 도교숭상 사례가 복원궁(福源宮)의 건립과 30여 회에 걸친 재초의 시행이다. 복원궁 건립은 고려시대 최대의 도교 연구자인 이중약(李仲若)의 건의에 따라 건립되었다. 이중약은 어려서부터 〈도장 道藏〉을 즐겨 읽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도서를 읽고 수도생활을 했으며 도교적 의술도 연구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도교는 이처럼 국가와 왕실의 소재초복(消災招福)을 비는 의례 중심의 도교로서 수련적 도교에 대한 기록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단순히 국가의례 중심의 과의적 도교였던 것만은 아니며 의학의 발전과 수경신(守庚申)과 같은 민간 풍습의 형성 등 이후의 일상생활에 미친 영향이 컸다.
조선시대의 도교
조선시대에 와서 고려시대의 과의적 도교는 초기에 왕실의 비호 아래 어느 정도 명맥을 유지했으나 성리학적 이념과 의례를 절대시하는 유림의 득세 이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감히 제후의 나라에서 천지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재초를 거행할 수 없다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림의 끈질긴 요구에 따라 1518년(중종 13) 재초 담당 관청인 소격서(昭格署)가 혁파(革罷)되었다.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도교적 흐름은 수련도교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저술은 한무외(韓无畏)의 〈해동전도록〉이다. 한무외는 이 저술에서 조선의 도맥이 태상노군(太上老君)-위백양(魏伯陽)-종리권(鍾離權)-최승우(崔承祐), 자혜(慈惠)-최치원(崔致遠), 이청(李淸), 명오(明悟), 김시습(金時習)-서경덕(徐敬德), 홍유손(洪裕孫)-곽치허(郭致虛)를 거쳐 자신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중 태상노군은 노자(老子)를 가리키며, 위백양은 후한(後漢) 사람으로 연단(煉丹) 중심의 당 도교에 〈주역〉과 황노(黃老), 즉 황제와 노자의 도를 배합하여 그 이론적 성격을 강화하는 한편 도교의 양생법(養生法)을 강조한 〈참동계 參同契〉의 저자이다. 이 〈참동계〉는 주자(朱子)도 관심을 갖고 〈참동계주석 參同契註釋〉을 펴냈다. 종리권은 금대(金代)에 성립된 전진교(全眞敎)의 종조(宗祖)인 여동빈(呂洞賓)에게 도를 전한 인물로 금단도(金丹道), 이른바 본성적 단학(丹學)의 시조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이처럼 조선 중엽의 저술에서 주장되고 있는 도맥은 실재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당시 도가적 수련에 심취한 지식인들의 가탁(假託)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이들 도맥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신라 하대와 조선시대 사이의 실존인물이 없다는 점에서 명백해진다. 즉 조의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이는 보다 합리적이고 수련지향적인 전진교 계통의 도교를 받아들인 이 시기 지식인들이 유교적 도통론(道統論)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계통을 밝힐 필요성을 느낀 데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 조선에서 수련도교나 도교적 은둔생활의 기풍이 형성되고 그것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저술이나 의식은 큰 의미를 지닌다. 이후 조선에서의 단학의 도맥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도교와 연관된 인물 등의 각종 이적(異蹟)을 기술한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 海東異蹟〉이나 도교 관계의 각종 변증설(辯證說)을 수록한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 등 도교 관계 저술들이 연이은 것으로 보아 지식층의 관심이 지대했고, 그러한 생활양식이나 수련법이 꾸준히 맥을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도교는 이외에도 민간신앙이나 의학 및 민간풍습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도교가 민간신앙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성수신앙(星宿信仰)이다. 이는 특히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신앙으로서 고려시대의 팔성당(八聖堂)에서 보듯이 도교적 성수신앙과 고유한 산악숭배가 결합된 조선 특유의 신앙을 형성하였다. 또 민간에서 가신(家神)의 하나로 숭배되는 칠성은 바로 이 도교적 성수신앙의 직접적인 영향이다. 수련적 도교는 본디 예방의학적인 양생법이기에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결과 유명한 허준(許浚)의 〈동의보감 東醫寶鑑〉에는 도교적인 양생법과 세계관이 깊숙한 영향을 미쳤다. 또 도교 계통의 위경(僞經)인 〈옥추경 玉樞經〉은 질병을 낫게 해준다는 내용 때문에 민간은 물론 불교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한편 유·불·도 3교를 배합하여 선행을 권장하는 선서(善書)가 조선 초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널리 보급되었는데, 그중 선행[功]과 악행[過]을 각각 점수로 매기는 〈공과격 功過格〉이 널리 유포되어 민간의 생활윤리를 앙양하는 데 일조를 했다.
金鎬德 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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