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6

옛글 고쳐 씹기 > 동양고전(1980) | 바보새함석헌

옛글 고쳐 씹기 > 동양고전(1980) | 바보새함석헌

고전연구 | 옛글 고쳐 씹기
작성자 바보새 13-12-31 13:37 조회1,706회 댓글0건
----

오늘날 씨알이 씨알 노릇을 하기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의 하나는 옛글 곧 고전을 고쳐 읽는 일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양의 옛글입니다. 이날까지 서양 문명, 더구나도 물질주의적인 문명이 주가 되어 인류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래서 동양은 오랜 정신적인 특색을 가지는 문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 눌려서 거의 그 값을 인정받지 못했고 동양사람 자신까지 동양의 생각을 업신여겨 왔습니다. 더구나 종교에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서양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들었고, 인류의 장래를 위해 참되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동양 소리를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동양사람 자신이 도리어, 발등 밑이 어둡다고, 그런 생각을 못한다면 우스운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버려진 유산을 다시 찾아서 새로운 마음으로 고쳐 씹어서 거기서 새 뜻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는 문명의 새 방향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날까지 서양적인 것이 모든 방면에서 오직 하나의 옳은 길인 것처럼 그 길은 자동적으로 행복에 이르는 것처럼 생각해 왔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서양사람 자신이 당황하고 비관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깊은 생각을 하는 것 없이, 자, 벌어라, 벌어서 먹고 마시고 유쾌하게 놀자, 하는 식이라면 말할 것 없지만 적어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엄숙한 문제입니다. 덮어놓고 하는 낙관주의는 허락이 않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대세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때껏 달리던 길을 멈추고 방향을 한번 바꾸어 찾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데 서양이 만일 아니라면 찾아볼 길은 동양 밖에 없습니다. 물론 동양 서양을 분명히 금을 긋기는 어렵습니다마는, 토론을 위해 토론을 하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대체로 동양은 동양이요 서양은 서양으로 구별되는 점이 있습니다. 또 모르면 모를수록 동양의 옛 것에 찾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새로운 가치체계를 세우기 위해, 동양 옛글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지금이 위기라, 전환기라 합니다. 왜 위기인가? 위기인 까닭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이날까지 써 오던 가치의 체계가 쓸 수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원인은 하나로 말하기 어렵지만 오늘날은 사람의 살림이 갑자기 심히 달라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 그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사는 것인데, 그 점이 짐승과 다른 점인데 의미는 어떤 보람을 느낄 때에만 있습니다. 보람을 느끼려면 행동에 어떤 목적이 서고 표준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가치입니다. 시대가 이상적으로 잘 나간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행동의 목표와 표준이 분명히 서 있어서 누구나 거기 따르기만 하면 개인과 전체의 발전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기라는 것은 그것이 깨진 때입니다. 달리는 차가 급커브를 돌면 탄 사람이 그냥 제자리에서 있을 수 없듯이 시대가 급작히 변하면 옛날에 있던 전통적인 교훈을 가지고는 살아나갈 수가 없어집니다. 가치체계가 무너진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은 가지가지이므로 행동을 지시하는 가르침도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가 서로 충돌이 되지 않는 조화를 이루도록 종교와 철학과 도덕과 예술과 경제와 정치 사이에 하나의 체계가 서 있어야 사람들은 안심하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깨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치 급커브를 도는 차안에서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 모양으로 어쩔 줄을 모르고 왔다 갔다 하며 서로 맞부딪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대를 건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창조적인 살림을 해갈 수 있게 하려면 우선 새로운 가치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어디서 그것이 나올 것이냐? 빈들에서 길을 잃은 사람 모양으로 모든 방면을 다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희망 있는 곳이 동양 아닐까? 서양은, 이날껏 서양의 학문 종교가 있는 힘을 다해 자랑하며 나가다가 이렇게 됐으니 거기서는 거의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거기도 절대로, 희망이 없다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완전한 것이 아님으로 늘 남겨 놓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도 다 써먹었다 할 수 없고, 희랍 철학, 중세 사상도 다 써 먹었다 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미처 알아내서 써 보지 못한 보물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양의 유산 자체 속을 더 더듬을 필요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동양은 휠씬 더 우선권을 가집니다. 이때껏 거의 전적으로 내버려 두었고, 또 방향이 거의 정반대로 다른 점이 있으니만큼 우선 먼저 여기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로는 새 마음을 위해서입니다. 나가는 방향도 고쳐야 하고 행동의 표준이 되는 가치체계도 새로 세워야지만, 또 그것들을 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새 마음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셋은 서로서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서 새 방향 새 행동이 나오기도 하지만, 또 새 방향을 더듬고 새 행동을 시험해 보는 동안에야 새 마음을 얻게도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에는 지난날의 것이 거의 전적으로 소용이 없어졌으니 만큼, 말하자면, 기적이 일어나야하는데 기적이란 말은 바꾸어 말하면, 아무것도 가진 밑천이 없이, 단지 마음 하나 가지고 새 창조를 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때에는 자연 마음에 그 우선권이 가게 됩니다. 마음이야말로 무에서 나오는 유입니다. 마음이야말로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새 일이 있기 전에 새 마음이 필요합니다. 무에서 나온다 했습니다마는 아무것도 없는 무일 수는 없습니다. 마음은 부정함으로만 있을 수 있습니다. 있음에 대해 부정을 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면 부정하는 무 속에서 다른 하나 곧 새 있음이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이 막다른 골목에 든 서양적인 것에서 살아나려면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해 봄에 의해서만 새 마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잃은 자는 얻고 얻는 자는 잃는다는 말은 이러한 뜻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작용은 곧 반작용입니다. 서양이라는 현재를 박차려면 동양의 언덕에 등을 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막혀 버린 배를 서양이라는 죽음의 진탕에서 떼내려면 죽은 듯이 서 있는 저 언덕의 동양바위를 한사코 박찰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하나의 감정, 감정이기보다도 하나의 체험적인 직감입니다. 이론에 말라붙는 사람은 결국 못할 것입니다. 고기 잡자는 낚시꾼이 사실은 도리어 고기에 잡히듯이 이론도 그러할 것입니다. 케케묵은 듯한 옛글을 되씹고 앉았는 것은 서양적인 학문 방법에서 보면 이해가 아니갈른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화는 언제나 논리적으로 나간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돌변화는 늘 직감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에 우리가 깊이 반성해야 하는 것은 소위「근대화」라는 것입니다. 근대화란 결코 국민적인 지혜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일부 지배 계급이 씨알의 인권을 짓밟고 씨알을 몰아 자기네의 권력과 향락을 위한 짐승 같은 일로 몰아치면서 그것을 속이기 위해 내건 구호입니다. 물론 모든 구호는 그럴듯이 뵈는 점이 있기 때문에 내거는 것입니다. 허지만 생각해 보면 거기 속이는 것이 있음을 곧 알 수 있습니다.
말로는 설명을 이리저리 할 수 있지만 사실상 근대화는 곧 서구화입니다. 동양은 동양으로서의 한국은 한국으로서의 역사가 있고, 개성이 있고 환경도 제 환경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서구화라 하면 말부터 잘못된 것을 알기 때문에 근대화라고 붙였지만 서구의 모방이 나 추종이 아니고 동양이나 한국 제 자리에서 내다본 무엇이 있나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정치 방식이 서양 것 아닌 것 있습니까? 그 교육이 서양 것 아닌 것이 있습니까? 그 생활 내용에 무엇이 우리 자리에서 근대적이려 하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들에게 머리가 없습니다. 머리가 없는 것은 정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한국을 살리자는데 있는 것 아니라, 무슨 보람 있는 문화 창조를 하자는데 있는 것 아니라, 다만 권력과 돈에만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타가지고 나오기는 마찬가지로 단군 할아버지 이래의 유전에서 타가지고 나온 유전 인자지만 그것이 작용을 제대로 못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는 것마다 어리석습니다. 백보 천보 양보하여 나라 생각 문화 생각에 했다하자, 서양의 뒤를 따르는 것이 무엇이 잘하는 일입니까? 잘이라는 것은 그 목적이 바로 놓였을 때의 말입 니다. 살 곳으로 향했을 때 빠른 것이 자랑이지, 죽을 데로 향했는데 빠른 것이 무슨 공이요 자랑입니까? 오늘 서양 사람더러 말하라면 서양 자신이 죽게 됐다는 것입니다. 신문 보지 않습니까? 미국이 우리보다 낳은 것이 무엇입니까? 데모 학생에게 총을 쏘는 것을 우리게서 배워가는 처지입니다. 그럼 핵무기 비행기에서 우리보다 앞 선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데모크라시의 챔피언인 것을 자랑해 오던 미국이 학생에 대해 총을 쏘게 된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그 핵무기 그 비행기 그 달러에 있습니다. 그럼 선진국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날까지 앞섰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우리보다도 뒤진 부분이 있어서 이날껏 싸워오댓는데 이제 그 악한 부분이 선한 부분을 누르게 됨으로 인해 획 거꾸로 서게 됐습니다. 이제 워싱턴, 제퍼슨, 헤밀턴, 링컨, 에머슨, 소로, 에디슨의 미국이 아닙니다. 그런 미국을 배우겠다면 반대할 이유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화라는 이름 안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표시 되는 서양문명은 이제 망하게 된 문명입니다. 미래에 대해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가 무조건 반항을 하는 것은 살기 위해 미국만 아니라 인류를 건지기 위해 하는 반항입니다. 그런데 그 멸망의 근대화를 부르짖으면서「민족중흥」이다! 이 나라에는 사람의 자식은 하나도 없고 몰아치면 도살장으로도 달려가는 송아지 새끼만 있는 줄 아는 모양입니다.
씨알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근대화가 결코 사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민족도 나라도 모르고 일본의 종노릇 미국 독일의 종노릇을 해서라도 살아만 가면 그만이라는, 동족을 죽여서라도 부귀를 하면 그만이라는 것들에는 근대화가 살 길이겠지만 씨알에게는 아니 그렇습니다. 사실을 보십시요 근대화를 부르짖어서 농민은 살았습니까 죽였습니까? 노동자는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설혹 당장에 이익이 난다 가정을 하더라도 역사의 달리는 방향을 볼 때 이것은 멸망으로 우리만 아니라 전 인류가 멸망으로 놓여 있습니다. 한강의 인도교가 끊어져서 앞에 가던 사람은 한강에 빠지는데 뒤에서는 그것이 살길이라 내 밀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발 앞에 뵈는 것이 반드시 사실이 아닙니다. 전체를 내다봐야지. 세계 1차 대전도 2차 대전도 다 소위 그 근대화 정신의 결과로 온 세계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민족중흥이라면서 한다! 지배자는 또 씨알 생각 본래 아니 하는 것이니 말할 것 없습니다. 신문 잡지까지 그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씨알은 이제 신문 잡지를 믿을 수 없습니다. 라디오를 잘 이용하십시오. 남의 나라에서 세계에서 무엇이 돼 가고 있나 거기 주의해야 합니다.
지배자는 향락주의 생존경쟁에 근거를 두는 서양식 살림이 좋아서 그럴 것이지만, 또 거기 붙어먹는 정신 썩어진 지식인도 그럴는지 모르지만, 얻어먹는 것이 없는 씨알은 파리했기 때문에 지방질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서양 말고 동양에야말로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다시 찾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호랑이 털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놈의 발톱 이빨이 남을 잡아먹는 담에는 그 아름다움이 소용이 없습니다. 서양에 좋은 점이 있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철학, 과학은 그 군국주의 제국주의 상업주의 때문에 가치를 발휘할 수 없어졌습니다. 눈물을 아니 흘리고 고추를 먹을 수 없듯이 씨알을 죽이지 않고 서양 문명을 배울 수 없습니다. 동양은 사람을 힘의 표준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한동안 전쟁 방법을 발달시킨 서양에 깔려 종살이를 했지만 이제 그 의미가 들어나는 날이 왔습니다. 전쟁 잘못하는 것이 결코 후진국 아닙니다. 과학 떨어진 것이 결코 야만 아닙니다. 여러 십년을 속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근본적으로 고쳐 생각해 봐야하는 때가 왔습니다. 근대화라 떠들어대는 사람들은 우리게 어떤 고상한 것이 있었던지, 우리의 문화유산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않고, 다만 일본 사람 서양 사람에게서 전쟁 기술과 소위 정치랍시고 사람을 어떻게 하면, 속일 수 있고 얽을 수 있는지, 죄악을 어떻게하면 하고도 아니한 척 교묘하게 할 수 있는지 그것만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육신으로 우리 민족이지만 우리 민족이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지. 그 소리를 들어서는 아니 됩니다. 너, 나만 아니라「우리」를 살리는 길을 우리 조상들은 어질게 찾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제 시대가 달라져 그대로 그냥 쓸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것을 다시 찾아보노라면 오늘의 길이 스스로 밝아질 것입니다.
그 다음 또 하나 생각할 문제는 젊은이의 반항입니다. 옛글을 고쳐 씹자는 데 젊은이는 아마 반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 깊이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우선 먼저 잊어서 아니 되는 것은 사람은 역사적 존재라는 점입니다. 엄정하게 말하면 사람만 아닙니다. 생명의 진화가 역사적입니다 진화는 두 큰 힘, 곧 유전과 변화로 이루어집니다. 옛 없이는 이제 없습니다. 모든 새 것은 옛것을 토대로 하고 나옵니다. 생각하는 인간에서는 더구나도 그렇습니다. 먼저 사람의 생각한 것 없이 전연 새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역사는 새 것을 찾는 데서 발전을 하지만, 역사를 전적으로 무시하고는 자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 단순한 호기심의 만족을 위한 변천이라면 모르지만, 모든 건설적 창조적인 사상은 반드시 과거를 존경하고 그것을 밑천으로 해서만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른바 溫古知新입니다.
옛글의 예는 결코 죽어 버린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감을 따라 낡아 버리는 것 있고 낡아버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낡아버리는 것은 우연적인 것이요 낡아 버리지 않는 것은 근본적인 본질적인 것입니다. 길게 몇 백만 몇 천만년을 두고 하면 근본이니 본 질이니 하는 것은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설혹 그것도 변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천천히, 다른 말로 하면, 극히 큰 스케일로 되어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그 근본 되는 것을 붙잡는 것이 가장 중요 합니다. 예란 시간을 뚫고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수천 년 동안에 변동이 많은데 그것을 뚫고 오늘까지 와서 사람이 그것을 찾지 않으면 아니 될 때는 거기 상당한 까닭이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가면 세콰이어라는 나무가 있어 그 나이 3천년 넘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나무가 다 불과 몇 백 년에 죽어 버리는데 그 나무만이 그렇게 장수하는 데는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있은 후 여러 가지 사람이 여러 가지 생각을 했는데 그리고 다 잊어져버렸는데 그중에 석가, 공자, 노자, 예수 하는 분들의 말만이 오늘도 사람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거기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옛것, 古란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古典이라 할 때 典자는 책을 말하는 것입니다. 册자는 옛날 종이가 발명되지 않았을 때 대나무를 쪼개서 그것을 가죽 오리로 엮고, 그 위에다 옻으로 글자를 썼는데 그 대쪽은 엮은 모양을 그린 것입니다. 그것을 두루마리로 말아두었기 때문에 冊을 헬 때에 한 編, 한 卷 합니다. 典자는 그 책을 상위에 올려 논 모양입니다. 책중에도 보통 책이 아니고 귀중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典자는 經典, 法典하는 존중하는 책에만 묻혀 씁니다. 經이라는 자는 날이란 말입니다. 천을 낳을 때에 먼저 날이 있고 거기다 씨를 씁니다. 어진이의 말씀은 천의 날 같이 첨부터 끝까지 언제나 있어서 끊어져서는 아니 된다는 뜻으로 그렇게 쓴 것입니다. 그것이 古典이 뭐냐 하는 뜻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생각이 허다하지만 그 허다한 생각 중에서 골리우고 정돈된 것이 말이요, 말 중에서 또 골리우고 정돈된 것이 글인데, 글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때 쓰일 글, 길게 두고두고 쓰일 글입니다. 그때 그때에 관한 글 개개의 물건과 일에 관한 글은 한 동안 씌우고 그 시기가 지나가면 잊어져 버립니다. 고전이란 주로 사람의 사람관계에 대한 지혜와 행동에 관한 것으로 오래 두고두고 소용이 될 글 들입니다. 자라나는 세대는 그것을 통해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적 유산을 받아 살게 됩니다. 만일 옛글이 없이 새로 나는 사람마다 제각기 새로 출발해서 자기로서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한다면 문화 발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글이 아니고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도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사람의 지어낸 것을 문화라 글월이라 하리만큼 글은 중요합니다. 이것은 아프리카의 역사를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흑인은 아주 바탕이 떨어진 인종인줄 알았지만 이제는 과학적인 실험에 의해 그들이 결코 바탕이 떨어진 것 아님이 밝아졌습니다. 사실 오늘날 위대한 흑인 종교가, 철학가, 예술가, 정치가가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그런 흑인이 왜 이날껏 문화에서 뒤졌던가? 자연의 여러 조건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마는 아마 그 중 가장 큰 원인은 글자가 없었던 것일 것입니다. 어째 그랬는지 그들은 글자를 발명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글이 없습니다. 그러면 씨알의 교육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천재가 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여간 그래서 글 중에서도 글인 고전은 반드시 모든 지식에 앞서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적으로 젊은 세대가 어른 세대에 대해 반항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문제가 핵무기의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시대가 급작히 변해서 전 세대까지 그 가치를 발휘해왔던 가치체계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격분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전 세대와 아주 단절을 하고 앞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여기 어른 된 세대의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변한 것은 어느 개인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늙은 세대 전체가 힘을 쓰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중에서 가장 먼저 할 것이 옛글을 오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고쳐 해석하는 일 아닐까? 옛날 하던 식대로는 아니 됩니다. 가령 예를 든다면 옛날은 청년시기에 들면 대개 한번은 죄 문제 때문에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 나 지금 젊은이에게는 죄를 부르짖어가지고는 날카롭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다 타락이 돼서가 아닙니다. 기성세대는 물론 그렇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보다 동정하는 생각으로 보면 그들은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져서 그럽니다. 그들도 종교적 요구가 있지 없지 않습니다. 그 증거로는 환각제를 먹어서까지 전엣 사람이 이르렀던 종교적 체험에 가자고 합니다. 그 방법은 물론 잘못됐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겠느냐? 절대로 아니 될 것입니다. 그 겨누는 지경은 같습니다. 그 방식이 다릅니다. 시험해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으로부터 만년 수만 년 전 인간도 문제를 죄라는 것으로 제출했을까? 아닐 것입니다. 그럼 우리도 변천하는 도중에 우리의 종교의식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람을 타락이라고만 보지 말고, 또 타락이면 타락일수록 그들의 병에 맞는 처방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영원히 맞는 처방이란 없습니다. 종교는 만병통치약인듯 생각했던 것은 구식입니다. 그것으로 세상 건지지 못할 것입니다. 반항하는 젊은이를 알아주도록 그들과 대화가 성립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생명이란 본래 불효자입니다. 나가는 아들입니다. 젊은 세대가 제 말을 버리고 낡은 세대에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역시 아버지가 아들의 말을 배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씨알의 할 일이 여기 있습니다. 중류 이상 귀족주의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어려울 것입니다. 젊은 세대의 이해는 역시 무식하다는 씨알의 층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이날까지의 옛글에 대한 모든 해석은 권위주의, 절대주의, 귀족주의, 고정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것을 해방하기 전은 젊은 세대에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옛글을 고쳐 씹는데 있어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지금 있는 종교로부터 올 반대입니다. 종교 경전의 말은 옳습니다. 글자 그대로 하나님 말씀이라 잘못이 없다 하는 말 조차도 그대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럴 때 제일 문제 되는 것은 권위 문제일 것입니다. 예로부터 그래서 보수주의가 늘 정통으로 옵니다. 그러나 그 점에서는 석가나 예수의 태도를 배우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결코 형식에 거리끼지 않았습니다. 또 저쪽을 승인시키자는 것이 목적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권위는 영에 있었지 글이나 제도에 있지 않았습니다. 깨쳤다면 잘 깨쳤습니다. 일부러 깨쳤습니다. 그러나 그 깨치는 목적이 종교 제도나 교리를 지키는데 있지 않고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새 해석을 하고 깨쳤습니다. 그리고는 옛날의 전통을 한 점 한 획도 무시하지 않노라고 했습니다. 눈으로 경전을 읽는 것 아니라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혼자서 읽는 것 아니라 그 시대 전체로부터 읽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느 의미로는 천 년 전 그 이들이 나섰던 때보다 더 심한 변동입니다. 그때보다 사람의 헤매임이 더 규모가 크고 더 복잡하고 더 심각합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종교도, 도덕도, 중류이상 지배 계급의 것이지 정말 일하는 씨알의 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예수도 돈 있어야 믿겠더라」하는 말이 우리를 도망의 여지없이 심판하고 있습니다. 맑스(마르크스)의 말이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부분 옳은 것이 있습니다.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합니다. 깊은 종교적 체험에 들어가면 아니 그렇지만 적어도 보통 말하는 생각이니 사상이니 하는 정도에서는 존재야말로 의식을 결정 합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없는 사람과는 생각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孟子가 “恒產이 없고서도 恒心을 가지는 것은 君子 뿐이고, 보통 사람은 桓產없으면 恒心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뒤집어 말하고 싶습니다. “돈이 있으면 良心이 없어지고 돈이 없으면 良心이 살아난다.”고 하여간 돈이나 세력이 있고 없는 것을 따라 절대는 아니지만 사람의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럼 그럴 때 성경에 대한 생각이 같을 수 있을까? 성경이 하나가 아닙니다. 둘입니다. 부자의 성경과 가난한 사람의 성경. 하나에는 사업의 성공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적혀 있지만, 다른 하나에는 그것은 하나님의 벌로 적혀 있습니다. 다 같이 모세와 예언자에게서 받은 성경이지만 바리새 교인의 성경과 예수의 성경과는 같은 성경이 아니었던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살린 것도 성경이었지만 십자가 위에 무참히 죽인 것도 성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까닭이 어디 있느냐 하면, 부자냐 가난한 사람이냐 하는데 있었습니다. 산상수훈 첫머리에 “가난한 사람 복이 있다, 하늘나라 그 사람 것이다”하는 말씀을 하고,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기보다 어렵다”한 것은 결코 그저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또 한 번 부자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들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을 위해 하늘나라 문을 여는 새로운 성경 해석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씨알도 2천 년 전 씨알 중의 으뜸 씨알인 그가 그랬던 것 같이 전체를 살리기 위해 성경을 제멋대로 고쳐 씹어 읽고 그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야 할 것입니다. 어느 의미론 벌써 시작 됐다 할 수도 있습니다.
 
씨알의소리  1970. 5월  2호
저작집30; 24- 19
전집20; 2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