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31

너름새 처소 도올 김용옥이 말하는 노자와 21세기(하)

너름새 처소

도올 김용옥 선생
도올 김용옥이 말하는 노자와 21세기(하)
노자와 21세기 (하)
도올 김용옥 지음
통나무 출판사
주현태
노자도덕경상편
칠장
천장지구,
천지소이능장차구자,
이기부자생.
고능장생.
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외기신이신존.
비이기무사야?
고능성기사.
일곱째 가름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너르고
또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자기를 고집하여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그 몸을 뒤로하기에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밖으로 던지기에
몸이 안으로 보존된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오히려
그 사사로움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설노
"천장지구!" '노자'의 일곱째 가름은 이 말로 시작하고 있다. "천장지구!" 우리
에게 퍽으나 낯익은 이름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덕화가 나오는 홍콩 액션무비의
이름이라는 것은 알아도, 이것이 정확하게 "노자"에 출전을 둔 심오한 철학적 개
념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은 드물다. 불량소년의 폭력적 삶과 사랑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제목의 이름은 분명 "노자" 제 7장의 첫머리에서 따온 것이다. 이와
같이 고전이라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삶속에 스며있다. 고전은 결코 우리
의 삶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불량배 유덕화와 청순한 오천련의
사랑을 그린 영화 제목이 "천장지구"인가? 주윤발의 "영웅본색"이나 정우성의
"비트"나 다 같은 주제의 영화들인데 여기엔 왜 이렇게 심오한 이름이 붙었을까?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철학이 우리 삶의 문제를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삶의 갖가지 양태가 저지르고 있는 문제들이 아무리 천박하게 보이는 것이라 할
지라도 그 속에는 반드시 심오한 철학적 주제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칸
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붙들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문제들이, 어느 순간엔가
몽롱한 노래방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사 한 구절에서 해결되는 체험을 할 때
도 있다 철학이 나의 삶을 리드할 수는 없다. 나의 삶의 본연에서 우러나오는 나
자신의 생각들이 철학이라고 하는 사유체계를 리드하는 것이 오히려 철학이 생
성되는 정당한 과정일 것이다.
사실 진목승 감독이 붙인 이 "천장지구"라는 이름은 별로 심각한 의미가 없다.
보석상을 터는 과정에서 우연하게 피치못할 운명으로 맺어진 두 젊은 남녀의 사
랑, 날카롭고 정의로운 인상을 주는 아화,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가냘프고 청
순한 죠죠, 이 두 어린 생명들의 극적인 사랑의 순간이야말로 "천지처럼 장구하
다" 즉 "영원하여라" 라는 예찬의 율로지에 불과한 것이다. 피튀기는 칼싸움에서
태연하게 죽어가는 아화는 하늘에서의 영원을 희구했을 것이다. 그 순간 웨딩드
| 도올 김용옥 선생 

너름새 2013. 3. 6. 15:33 http://blog.daum.net/busoong1/17336293
레스 차림으로 천주교 성당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죠죠는 이 땅에서의 영원
을 갈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빌고있는 순간의 영원은 사실 가장 비노자적
인 천장지구였다. 그러나 이러한 찰나적인 비극적 정조의 배면에 깔린, 인간이
동경하는 보편적 정서속에는 분명 하늘과 땅의 장구함이 배어있다.
꿈꿔왔던 청춘이
바람에 흩날리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엔
슬픔만이 가득찼네.
자연의 변화가
새 생명을 만든다지만,
처량한 비는
날 고독하게 만드네.
청춘의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는데,
슬픔의 그림자가
그대 얼굴에 드리워지네.
계절의 변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자연의 은혜가 없었다면
생명이 없었을 거예요.
의리를 위해 피투성이가 된
이를 보라!
사랑하는 연인이여
청춘은 죽음이 두렵지 않네.
청춘의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는데,
슬픔의 그림자가
그대 얼굴에 드리워지네.
"천장지구"라는 표현은 옛 한문의 레토릭 구사법의 한 전형을 이루는 스타일이
다. "천지"와 같이 하나의 개념을 이루는 단어를 분리시켜 그 사이사이에 형용사
를 삽입하는 것이다. 천지장구를 천장지구라 한 것이다. 정확한 댓귀는 아니지만,
우리가 쓰는 일취월장 같은 표현도 일월로 월장한다고 말해도 될 것을 취와 장
을 분리시켜 일과 월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 것과 유사한 용법이다. 그런데 보통
천지코스몰로지에서 천은 시간을 나타내고 지는 공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여기서 장은 앞의 2장에서 장단상교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공간을 나타
내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길다라고 표현치 않고 너르다라는 역어를 썼
다. 그에 비하면 구는 분명 지속을 나타내는 말로서 시간적 개념이다. 오래간다
는 뜻이다. 그렇다면 분명 천구지장이라 해야 옳다. 시간을 나타내는 하늘에는
시간적 형용사가 붙어야 하고, 공간을 나타내는 땅에는 공간적 형용사가 붙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천구지장이라 하지 않고 천장지구라 표현한 것이다. 왜 그
랬을까? 여기 벌써 명백하게 천지코스몰로지적 사고에는 음양의 착종이라고 하
는 음양론의 기본적 사유패턴이 개입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다시 말해서 천구 지
장이라고 한면 하늘이라는 시간과 땅이라는 공간이 실체적으로 유리되어 버린다
는 것이다. 하늘은 하늘로서 하늘이 되는 것이 아니고, 땅은 땅으로서 땅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은 땅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고, 땅은 하늘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하늘속엔 땅이 들어 있고, 땅속엔 하늘이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
늘이라는 시간속엔 땅이라는 공간이 들어 있고, 땅이라는 공간속엔 하늘이라는
시간이 들어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시,공의 불가분을 상대론적으로 증명하
기 이전에 이미 고대중국인들은 소박하게나마 시간과 공간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는 것, 주역의 괘상모양으로 착종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공간
은 공간으로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전제로 해서 존재한다는 것,
시간 역시 공간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동양인들은 소박
하게나마 인식하고 있었다. 어차피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것은 객관적인 존재
가 아니라 모두 인간의 인식의 측면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동양인들의 건축양
식이나 회화등의 예술적 경지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노자는 여기서 왜 천장지구라는 말을 했을까? 나는 이 말을 매우 구체
적인 세계관의 함의를 지닌다고 본다. 우리가 현재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천체물
리학의 지식에 비추어 본다면, 고대 중국인들이 말한 천원지방의 천지코스몰로지
란, 우선 천동설을 모델로 한 것이며, 그것도 지구생명체를 중심으로 생각한 것
일 뿐이다. 이것을 지동설적인 모델로 바꾸어 생각하면 실제로 이등이 말하는 천
이란 대기권의 규모를 벗어나지 않는다. 지란 대기권에 둘러 싸여 있는 지구다.
물론 천의 개념속에는 태양을 비롯한 전 우주의 갤럭시들이 포섭되지만, 이들이
생각한 천지란 실제로 지구생명체의 작동에 필요한 에너지의 순환체계를 벗어나
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천장지구란 우리 존재의 근원으로서 가장 장구한 최종적인 근거
는 천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천지를 생각할 땐, 미
생물학자며 세계적인 환경론자인 르네 드보가 편집한 유엔보고서, 한 작은 혹성
에 대한 관심과 관리라는 소제가 붙은 단 하나뿐인 지구라는 명저의 제목을 되
새겨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아주 소박하게 말하자면 동양인들이 말한 천지는
관념적인, 비그뱅으로부터 진화된 그런 거창한 시공계라기 보다는, 우리 이 지구
라는 태양계의 한 혹성을 둘러싼 바이오스페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천, 지, 인,
삼재가 모두 하나의 바이오스페어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 천지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천지야말로 우리 생명체
들의 최종적 근거일 뿐이다. 이 지구는 단 하나의 지구일 뿐이다. 이 하늘은 단
하나의 하늘을 뿐이며, 이 땅은 단 하나의 땅일 뿐이다. 이 땅과 하늘의 에너지
를 다 고갈시켜 먹고 딴 곳으로 도망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스페이스 커넥션의
망상을 우리는 하루속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21세기에 와서
어김없이 다시 노자를 배워야 하는 소이연이 있는 것이다.
천은 장하고 지는 구하다! 이것은 아화와 죠죠의 사랑의 장구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화와 죠죠의 사랑을 포함한 모든 사랑, 그러한 사랑을 잉태시키고 있
는 모든 생명체의 공동체의식, 그 공동체의식의 근거로서의 장구한 천지를 노자
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과 같은 환경론적 불안감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천지는 장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인이 아닌 졸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닌 당위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말한다. 모든 당위
가 구극적으로는 사실이다. 천지는 장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구하고, 또 장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어떠한 장난도 천지앞에서 무기력한 것이다.
그렇다면 천지는 어떻게 해서 장구할 수 있는가? 노자는 말한다. 천지가 장하
고 또 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불자생하기 때문이다. 문법적인 설명을 좀 하자면
기불자생 앞에 있는 이라는 글자는 "...때문이다"라소 새기면 된다.
자생하면 스스로 생한다의 뜻이 됨으로 노자사상의 맥락에서 좋은 뜻인 것처
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자생이란 그와 반대되는 뜻으로 자기를 고집
한다. 즉 자기라는 동일성의 체계를 고집한다는 뜻이다. 생이불유의 뜻이 되려면
불자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노자 7장의 자생의 문제는 후대에 중국에 들어온 불교 철학에서 그대로 자
성의 문제로 둔갑되었다. 이 자성이란 존재하는 것들이 항상 자기 동일성과 고유
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독립적으로 고립하고 있는 실체라는 의미
를 동시에 지닌다. 소승불교 즉 부파 불교의 대표적인 학파인 설일체유부에서는
매크로한 사물은 무아일지라도, 그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마이크로한 법은 자성
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대승불교는 바로 그 법, 다르마조차 무자성, 즉 자성이
없다라고 비판하는데서 출발하는 이론인 것이다. 어떠한 존재도 자기 동일성의
절대적 유지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존재의 궁극은 공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이론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승불교의 무자성의
이론이 이미 노자 7장의 불자생의 언어에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천지가 자기를 고집해서
생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러한대로 자기를 맡길 뿐이다. 스스로 그러한
대로 자기를 맡기는 것을, 왕필은 천지임자연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명나라 때의 탁월한 고승이었던 감산대사는 이를 주해하여 이기불자사기생, 고
능장생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천지는 그 삶을 이기적으로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장생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가을이면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진다. 그러나 그 나무는 낙엽을 자기만을 위하
여 사유하지는 않는다. 그냥 땅에 떨어져 굴러가는대로 내버려 둘뿐이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스스로 그러한 낙엽이 쌓여 다시 그 나무의 거름이 될 뿐이다. 그러
나 인간은 자기만의 목적을 위하여 그 낙엽을 긁어간다. 이것도 정도껏 인간과
자연이 공유될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자사의 목적을 위하
여 남김없이 낙엽을 긁어가고, 그것도 모자라 나무를 베어가고, 또 그것도 모자
라 땅까지 파 가버린다. 인간은 너무도 지나치게 천지라는 생태계의 에네지를 사
유하여 자기만의 문명을 건설해온 것이다. 노자는 다시 말한다.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사한 인간들이여! 어찌 천지처
럼 장구하기를 바랄손가!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이 지구상에서 장구하지 못하고 단멸할 수 밖에 없는
가? 그럴 수 없다! 여기에 노자는 천지를 본받아 사는 성인의 모습을 제시한다.
성인은 어떻게 하는가?
그러하므로 성인은 항상 그 몸을 뒤로 하기에 오히려 그 몸이 앞서고 항상 그
몸을 밖으로 던지기에 오히려 그 몸이 안으로 보존된다. 그 몸을 뒤로 한다는 것
은, 잘난 체하면서 항상 앞장 서고, 뭘 자기가 꼭 앞서서 리드해야 직성이 풀리
는 그러한 인격자세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몸을 밖으로 던진다는 것은 자기 일신
만을 지키는데 급급하지 아니하고 내 몸을 내던져 희생할 줄 아는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 요즈음같이 몸을 도사리기만 하며, 앞에 서서 자기현시하기만을 좋아
하는 시대풍조에 정말 노자의 말씀은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그런데 그 몸을 뒤
로 하는 것은 뒤로 함으로만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 몸이 앞서
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내 몸을 내던지는 희생적 행위는 희생으로만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 몸이 보존되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멋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자사함으로 생기지는 않는다. 인간의 멋이란
손해볼 줄 아는 것, 희생할 줄 아는것에서 생겨난다. 천장지구와 같은 모든 깡패
영화에 공통된 주제는, 주인공 깡패의 삶의 자세가 항상 범인을 초월하여 후기신
하고 외기신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들
이 비록 사회적으로는 불량한 행위의 범주속에 분류되고 있지만, 무엇인가 인간
에게 안타까운 느낌을 주는 멋을 발한다는데 있다. 비트 속의 정우성 역이 그러
하지 아니한가? 즉 사회적 악의 범주속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선의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대개 갱스타 무비장르의 제1주제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 노자철학의 아주 중요한 한 테마가 등장한다. 후기신의 후는 신을
목적어로 갖는 타동사이다. 그런데 신선의 선은 신을 주어로 갖는 자동사인 것이
다.
이것은 무슨 뜻이가? 다시 말해서 신선은 후기선의 스스로 그러한 결과라는
것이다. 자동사라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을 나타내는 동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을 목적어로 갖는 타동사는 후밖에 될 수 없으며 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신선을 위하여, 신선의 목적을 위하여 후기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우성
이가 비트 속에서 싸우러가는 순간, 자기가 살기 위해서 그 몸을 던지는 것은 아
니다. 그는 살겠다는 전제가 없어 그 몸을 던지는 것이다. 이것은 비록 불량한
깡패의 영화일지라도, 그 사회적 선, 악의 평가라는 장을 떠나 생각해 볼떄, 그
주제는 바로 모든 종교정신에 공통된 주제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이것을
무아라 표현했고, 기독교는 이것을 희생이라 표현했고, 유교는 이것을 살신이라
표현했고, 도가는 이것을 후기신,외기신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희생정신이 없이는 그 종교의 고등성을 확보할 길이 없다.
신선을 목적으로 해서 후기신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서 천지불인장에서 이야기
한 바 이 세계를 목적론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뜻과도 통하는 것이다. 지나친
목적론적 세계해석,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사주의의 모든 해악의 연원이라고 노
자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신선을 목적으로 해서 후기신하면 어떠할까? 신존을 목적으로 외
기신한다고 뭐가 덧나는가? 뭐가 그리 크게 안될 일이 있는가? 어차피 후기신하
고 외기신하는 인간의 행위 자체는 동일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러한 사유의
트랙을 따라 가다 보면 바로 병가와 만나게 된다. 중국의 모든 병가의 전술전략
이 이러한 노자사상의 왜곡된 해석으로부터 발전되어 나온 것이다. 신선하기 위
해서 후기신의 전술전략을 펴고, 신존하기 위해서 외기신의 전술전략을 펴는 것
이다. 이것이 바로 병가, 법가류의 술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7장을 이러
한 병가의 술수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왕필은 여기에 쐐기를 하나 박는다.
스스로 생한다 하는 것은 사물과 더불어 다툰다 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사물이 저절로 그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
사로움이 없다는 것은, 즉 내 몸에 있어서 함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스
스로 그 몸이 앞서고 보존되는 것이니, 그래서 노자가 결과적으로 그 사사로움을
이룰수 있다라고 말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왕필의 말에 대해서 우리는 좀 보조적 자료를 동원할 필요를 느낀
다.
노자를 생각할 때 영원히 빼놓을 수 없는 매력적인 인물, 중학교 3학년의 나이
에 이 위대한 영원불멸의 노작 노자를 남긴 우리의 주인공, 왕필이 쓴 책은 이
노자가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 왕필의 고전해석으로서 우리의 서재를 장식하고
있는 유명한 저서로서 노자주외로 동양의 코스몰로지의 가장 위대한 경전이라고
할 주역을 주석한 주역주가 있는 것이다. 주역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주역이라는 책을 우리가 읽으려 할 때 또 다시 거치지 않으면 아니되는 관문
이 바로 주역왕필주인 것이다. 노자에 대해 노자왕필주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주역에 대해 주역왕필주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주역왕필주는 또 다시 주역의
해석의 역사 전체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불멸의 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왕필은 분명 틀림없는 대천재요, 틀림없는 대석학이요, 또 역사적으로 매우 구체
적인 불후의 명작을 남긴 인물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왕필의 저작 연표에 있
어서 노자주가 앞서 있는가, 주역주가 앞서는가에 대해서도 학자에 따라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노자주가 주역주에 앞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
시 말해서 노자주의 생각이 주역주속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점
이 바로 왕필의 주역 해석학의 문제점으로 비판의 도마에 오르기도 한다. 즉, 주
역의 세계관을 노자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역이란 무엇인가? 주역이란 주나라 역이다. 그렇다면 역이란 무엇인
가? 역이란 변화를 뜻한다. 변화란 무엇인가? 변화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의
모습이다. 역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의 모습을 몇가지 도상으로 정리, 요약
해 놓은 것이다. 그 목적은 일차적으로 점을 치기 위한 것이었으나, 세월이 지나
면서 그것은 중국인의 우주에 대한 생각을 종합해 놓은 가장 위대한 우주론서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왕필이 중국역사에 있어 최초로 이 주역을 본격적인
우주론서로 인식하고 체계적인 해석작업을 벌린 사람일 것이다. 이 최초의 공로
때문에 주역은 오늘의 주역이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때 주역이라는 텍스
트의 심한 변형, 교정작업이 이루어졌으며 그러한 변형, 교정 작업의 결과가 오
늘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현 주역이라는 텍스트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늘 보통
주역이라고 말하는 텍스트는 왕필에 의해 그 모습이 개조된 것이다. 왕필은 주역
의 본경에 해당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주해를 했고, 설괴, 서괴, 잡괴의 소위 전에
해당되는 부분은 주석을 가하지 않았다. 왕필은 이 전들이 이미 경에 대한 주해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전의 부분에 대해서는 한강백이라는 사람이
주한 것을 쓴다. 그래서 우리가 주역의 주를 말할 때, 보통 그 책이름이 주역왕
한주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왕필과 한강백의 주가 합본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부터 주역왕필주를 얘기만 하려해도 한 일년의 세월은 소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하겠지만, 우리가 주역왕필
주를 말할 때 꼭 같이 기억해야 할 명저가 바로 주역약례라는 히대의 논저다. 주
라는 것은 고경의 문장 한 구절 한 구절에 즉해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한 구
절 한 구절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는 있지만 때로 그 전체의 논리적 얼개를 파
악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천재소년 왕필은 주역에 대한 주를
달아놓고 난후, 그 자신의 주해에 대한 전체적 입장을 경문과 상관없이 밝히는
쳬계적 논문을 따로 쓴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주역약례라는 희대의 명
저다. 주역약례라는 뜻은 주역 전체를 개략적으로 예를 들어 밝힌다는 뜻이며,
아마도 요새 말로는 아우트라인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현재 주역약례는 보통
주역왕한주 끝에 붙어 있어, 우리가 쉽게 그 논문을 읽어볼수 있다. 읽어보면 읽
어볼수록 글이 아름답고 명료하며, 왕필철학의 전체적 모습이 드러나 있다. 주역
해석학의 의리지학이 이로써 시작된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왕필이 노자를 주해한 사실에 관하여,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지
않은가? 주역주에 대해 자기 주해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밝히는 주역약례를 썼다
면, 또한 노자주에 대해서도 자기 노자주해의 전체적 입장을 밝히는 노자약례를
썼음직하지 않은가? 썼는가??? 썼다! 그럼 그 책이 있는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
게 썼다는 것을 아는가?

우리가 왕필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알 수 있는 전기자료는 이십오사중의 하나
인 정사 삼국지에 들어 있는 전기부분에 실려있는 왕필전기가 유일한 것이다. 그
런데 그 열전부분에 해당되는 곳에 왕필의 친구였던 금회라는 사람의 전기가 있
는데, 그 전기의 말미에 친구 왕필에 대한 언급이 있어, 그 언급 밑에 하수라는
사람이 쓴 왕필전이 주의 형식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사의 정식항
목으로 끼어 있지도 못한 셈이지만, 비교적 하수의 왕필전은 그 내용이 상세하
다. 그런데 그 하수의 왕필전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왕필은 노자를 주하였고, 또 지략을 지었다. 그리하여 정연한 이론체계를 갖추
는데 이르고 있다.

여기서 지략은 분명히 주역약례와도 같은 노자지략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자지략은 세상에 전해지질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책이 이름만
남아있을 뿐 실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짜자잔! 또 위대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1956년, 대만에 이주해 사시던 금세기 노자 서지학 연구의 최고봉이라 말할 수
있는 엄영봉선생께서 정총도장이라는 방대한 서물의 더미속에서 노자미지예략이
라는 저자연대 미상의 한 책을 발견해낸 것이다. 엄영봉선생은 나의 대만대학 석
사논문 지도교관 중의 한 분이셨다. 나는 선생의 서재를 자주 방문할 기회가 있
었는데 그 방대한 고서들의 서향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미지례략의 둘째 넷째
글자를 합치면 지략이 된다. 하수가 말한 지략은 바로 미지예략이었던 것이다.
지와 지는 통한다. 략례와 예략은 같은 뜻이다. 정총도장이라는 것은 불교의 대
장경을 모방하여 도교에서 편찬한 도교의 대장경인데 서,송대를 거쳐서 명나라
영종 정총연간에 그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그 방대한 서물의 더미속에 바로 잃
어버린 왕필의 노자지략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 문자의 비교검토를 통해 도장
경본의 노자미지례략이 바로 왕필의 노자지략이라는 것이 의심할 바 없이 드러
났다. 그래서 요즈음은 왕필의 노자주와 더불어 같이 참고하는 책이 바로 노자미
지례략인 것이다. 그 책을 열면 다음과 같은 왕필의 무의 선언문이 펼쳐지고 있
다.
대저 사물이 생겨나고, 공이 이루어지는 것은 반드시 무형에서 생겨나는 것이
요, 무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형무명이라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하느
님이다. 그것은 따뜻할수도 없고 차가울 수도 없는 것이요, 궁음으로 한정될 수
도 없고 상음으로 한정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고, 보
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만져도 만져지지 아니하고, 맛을 보아도 맛보아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물됨이란 혼돈스러울 뿐이요, 모습됨이란 형체가 없을
뿐이요, 음됨이란 소리가 없을 뿐이요, 그 맛됨이란 드러남이 없을 뿐이다. 그러
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형체를 가진 만믈의종주가 될 수 있는 것이며,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어 그를 거치지 않음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을 읽는 즉시 전문가라면 이것은 피치 못하게 왕필의 문장이라는 것을 알
아차릴 수 있다. 생각의 기조가 노자왕필주의 문장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기 때
문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현학의 선언문과도 같은 것이다. 귀향현학이 바로
이 선언문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현풍의 주 테마를 우리는 보통 숭므론이라고
말한다. 유에 대하여 무를 더 본원적인 것으로 숭상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왕필
의 무는 유와 대적적으로 군림하는 상대적인 무가 아니라 유를 포괄하는 무, 유
를 통하여 자기를 드러내는 무인 것이다. 즉 무는 유의 비한정적 형태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7장의 해설에서 미지례략을 운운한 것은 바로 지략의 말미부
분에 7장과 관련된 왕필의 명연설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대저 강함을 미워한다는 것이 곧 강하지 아니함을 원한다는 것은 아니다. 억지
로 강해질려고 하면 오히려 강함을 잃어버린다 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함
을 끊어라 하는 것이 곧 인하지 아니함을 원한다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 인자해
질려고 하면 오히려 위선이 생겨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질서를 유지
하혀고 노력하면 오히려 어지럽게 되어버리고, 평안함을 보지할려고 노력하면 오
히려 어지럽게 되어버리고, 평안함을 보지할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노자가 그 몸을 뒤로 하기에 몸이 앞서고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때 몸이
앞선다 하는 것은 몸을 앞세움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또
그 몸을 밖으로 던지기에 몸이 안으로 보존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때 몸이 보존
된다 하는 것은 몸을 보존시킬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공이라 하는 것은 취할 수 없는 것이요, 아름다움이라 하는 것은 쓸수가 없는 것
이다.
왕필은 명료하게 내가 말하는 자동사와 타동사의 논리를 인식하고 있지 아니
한가? 신생은 선신의 소능이 아니다. 신존은 존신의 소위가 아니다. 신생의 생은
자동사요, 선신의 선은 타동사인 것이다. 신존의 존은 자동사요, 존신의 존은 타
동사인 것이다. 여기서 왕필은 병가적 논리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신선과 신존은 그냥 스스로 그러한 결과일 뿐인 것이다. 목적론적 대상이 되어서
는 아니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신선, 선존 운운한 이 구절이 황서 갑, 을본에 다 실려
있고 왕본과 약간의 출입이 있다.
왕본은 기본적으로 황본과 일치한다. 갑본의 예기신의 예는 을본의 퇴와 같은
의미로 보아야 한다. 퇴기신과 후기신이 결국 같은 의미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
다. 예에는 납의 의미가 있어 어떤 의미에서 외와 상대적인 뜻으로 썼을 수도 있
다. 예와 퇴는 현재 발음으로는 첩운이 되지만 상고음에서는 첩운이 되지 않는
다. 그러므로 발음상의 연결은 전혀 없다. 을본에서 중간의 외기신이신선이 연문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연문이 아닐 수도 있다. 예기신이신선을 퇴
기신이신선으로 고치면서 외기신이신존과의 중간에 완충적 고리로서 한번 더 의
미를 중복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왕필은 퇴기신이신선을 아예 후기신이신선
으로 명료하게 만들면서 외기신이신선을 예문으로 간주 생략시켰을 것이다. 그렇
다면 이 삼자간에는 삽본에서 을본에서 왕본으로의 발전경로가 생기지만, 물론
이것은 이 삼자의 초사의 원본이 모두 다른데서 생기는 문제일 수도 있다. 하여
튼 이렇게 다른 판본을 비교해보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다. 절본에는 이 7장은 나
타나지 않는다.
나의 7장 해설은 여기서 끝내기로 하겠지만, 우리가 새삼 다시 인식해야할 사
실은 노자의 문장이 한 장 한 장 소략하고 단순하고 상식적이기 그지없이 보이
지만, 그 이면에는 수천년의 쌓인 지혜로운 생각들이 끊임없이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노자 하나의 이해를 통하여 우리는 보이지 않는 우리의 사유의 형성경
로를 정확히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이다.


팔장
상선약수.
수선리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
거선지,
심선연,
여선인,
어선신,
정선치,
사선능,
동선시.
부유부쟁, 고무우.
여덟째 가름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믈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살때는
낮은 땅에 처하기를 잘하고,
마음 쓸 때는
그윽한 마음가짐을 잘하고,
벗을 사귈때는
어질기를 잘하고,
말 할 때는
믿음직하기를 잘하고,
다스릴때는
질서있게 하기를 잘하고,
일 할 때는
능력있기를 잘하고,
움직일때는
바른 때를 타기를 잘한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어라.
설노 아마도 우리나라 인사동골목이나, 아니, 굳이 그런 고색 창연한 구석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뭐 고관대작님의 삐까번쩍하는 집무실이나 회의실 등지에 가
장 많이 걸려있는 액자 문구를 하나 뽑으라면 아마 상선약수라는 이 구절이 최
다득점 금메달 깜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우리같이 한문이 익숙한 사람들에게
는 사방에 붙어있는 것이 고전글귀인데,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어느
곳에든지 꼭 노자 문구들이 많이 걸려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걸려 있는 문
구가 바로 이 상선약수인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같이 노자를 좋아해서
노자말씀을 사방에 걸어놓고 살고 있지만, 예수 말씀만큼 이래도 노자말씀을 이
해하는 자는 없고, 우리 역사는 노자가 말하는 미덕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만
치닫고 있으니 우쩔 것인가!
아마도 20세기 한국역사야말로 가장 비노자적인 역사라 해야 할 것이지만, 그
러기에 오히려 노자의 말씀이 매력적으로 들리는 아이러니의 역사풍진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이 도올이 이렇게 대중 앞에 서있질 아니한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5, 16혁명이 났다. 사실 우리는 그때만 해도 쿠데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해독하기 어려운 무슨 암호인 것처럼 들렸다. 하여
튼 그날 아침 조간신문엔 거대한 글씨들이 박혀 있었고, 탱크사진들이 있는 것으
로 보아 심상치 않은 변화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나의 장형 김용준은 돈암동집
툇마루에 나와 앉아 신문을 읽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떡이며 무거운 표정만 짓고
있었다.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를 갔다. 계엄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도 우리는 몰랐다. 큰형은 가방들고 집문을 나서는 나에게 그냥 조심하라고만 일
러 주었다.
당시 우리국민의 장면이라는 사람에 대한 인상은 크게 나쁠 것이 없었다. 독실
한 카톨릭신자였고, 그 양반댁이 바로 혜화동에서 보성학교 올라가는 개천길 오
른쪽에 있는 아담한 한옥집이었는데 상당히 검소한 생활을 하시는 분이었고, 또
인상에서 느낄수 있듯이 매우 얌전하고 깨끗한 분이었다. 단지 4, 19학생혁명이
후 어지러운 정국의 상황에서 볼 때, 그는 어떤 과단성있는 카리스마를 과시하기
에는 역부족인 인물이었을지도 모르고, 또 권력의 자기 베이스를 갖고 있지 못하
다는 것만이 흠이었을 것이다. 내가 중학교 때 공민선생이 수업에 들어오셔서 여
자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나 하셨으면 편하게 사셨을껄이라 한 표현이 생각나는
데 이말도 크게 빗나가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다녔던 보성학교에는 참으로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았다. 학식과 인덕을
겸비한 개성있는 굵직굵직한 큰 인물들이 많았다. 1961년 5월 16일, 국사시간! 나
에게는 참으로 인상깊은 한시간이었다.
반쪽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던 국사선생님, 어떻게 생각하면 사람의 생김새를
놓고 별명을 짓는다는 것은 좀 가혹한 느낌도 들지만, 어찌 생각하면 아예 정직
하고 소박한 별명일지도 모른다. 정확한 얘기인지는 몰라도, 6, 25전란 때 크게
부상을 당하셨다는데, 하여튼 얼굴이 반쪽이 날라가고 없었다. 김덕빈선생님, 목
소리조차 쳇불을 걸러 나오는 듯 아주 가냘픈 허스키에 카랑진 음성, 키는 훤칠
했고 모습은 한없이 인자하였건만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 옹글진 진리의 이슬방
울과도 같았다.
여러분! 오늘 우리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역사가 새롭게 전개될지라도 지금 제가 하는 말을 꼭 가슴깊이 명심하여 두십시
오. 쿠데타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질서라는 명목아래 혼돈을
말살해서는 아니됩니다. 지난 일년동안 우리역사는 매우 무질서했고 혼돈스러웠
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역사가 단군이래 처음 맞이한 민주의 가능성이었습니
다. 혼돈의 과정이 없이 민주의 성립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이 시점에서 말살
되기보다는 조금 더 지속되었어야 할 혼돈이었습니다. 참으로 애석하게 생각합니
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여러분들게 이런 말을 다시 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역사라는 것을 배웠다. 김덕빈선생님은 나에게 국사를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산 역사를 가르쳐주셨던 것이다.
나는 중, 고등학교시절을 통해 조금도 우수한 구석이라고는 한군데도 없는 너
무도 평범하고 별볼일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 중, 고등학교 동창생들을 만
나 이야기해보면 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나와 분명히 한 클라스에서 김덕빈
선생님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던 학우들이 어느 누구도 이 생생한 증언을 특별
히 기억하고 있질 못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항상 우리 주변에서 물 흐르듯 지나
가 버린다. 어쩌다 나뭇가지라도 만나면 잠시 걸치는 거품처럼 우리 뇌리를 스치
는 모양이다. 인연이 닿지 않으면 망각 속으로 묻힐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옛
스승들은 역사의 장면장면에서 진리를 설할줄 알았던 것이다. 그는 국사선생이기
전에 지사였고 선각자였고 교육자였다.
나는 사실 이렇게 전율이 스며드는 순간들을 통해 이미 노자를 배웠던 것 같
다. 우리는 모두 질서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혼돈을 추하다고 생각한다. 질서만
이 선이요 혼돈은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혼돈이야말로 선이
라고 생각한다. 혼돈은 결코 무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혼돈은 질서의 가능
태요, 노자철학의 전문술어를 빌리면, 그것은 질서의 허다. 질서는 분명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질서가 혼돈의 이면을 갖지 못하고 고착되면, 그것은 질서가 아
니라 질곡이다. 바로 김덕빈선생님은 평범하기 그지 없었던 보성중학교 3학년 도
올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위대한 지혜를 혁명의 아침에 가르쳐주셨던 것이다. 그
것은 좀 더 유지되었어야만 했던 혼돈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는 창조성이 고
갈된 질서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6, 3데모! 나는 당시 고등학교 학생이었지만 우리의 대학생들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싸워야만 했는지, 김덕빈선생님의 그 한마디 때문에, 너무도 잘 알고 있
었다. 한일회담! 한일국교정상화! 쏱아져 들어오는 차관! 물론 이러한 20세기의
물결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우리민족의 역사가 구조적으로 거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필연적 진통이긴 했지만 당시 우리 젊은 학도들의 공포감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그러한 외재적 요구에 의한 제2의 개항이 궁극적으로 우
리나라의 종속도를 높이고, 우리문명의 모습을 영원히 의존적인 구조로 틀지워버
릴것이라는 공포감! 이 공포감은 궁극적으로 서양제국주의가 제시하는 문명적 형
태에 대한 반문명적 정의감이었다.
재건합시다! 재건복을 입고 차렷, 경넷을 붙이기 시작한 우리 국민들! 박정희대
통령께서 직접 만드셨다는 새마을 노래가 울려퍼지고 새마을 운동의 열기가 한
참 달아오를 시점 나는 대학생이었다.
1983년 깐느 그랑프리를 획득한 이마무라 쇼오헤이 감독의 희대의 명작, 나라
야마부시코오라는 영화를 보면, 나라야마라는 산골마을의 한 도둑집이 동네재판
을 받고 식량이 다 털리게 되니까 그곳에 살던 구렁이가 빠져나가는 장면이 나
온다. 아마도 지금 이런 영화장면을 보는 젊은이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집에 식량을 쌓아두면 쥐가 끓게되고, 쥐가 들끓면 반드시 구렁
이가 산다. 옛날에 구렁이는 사람에게 이로운 동물이었다. 내가 살던 천안집에도
지붕 서카래에 거대한 구렁이가 넌출넌출 늠름한 자태를 걸치고 우리와 같이 살
았다. 자연의 에코체인의 너무도 평상스러운 모습이었다.
새마을 운동! 뉴 빌리지 캠페인! 좋다! 어차피 역사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누
가 해도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새마을을 만든다는 것이 어떻게 해서, 그
고향의 상징이던 덕수궁담부터 허물고, 몇천년의 우리의 삶의 정서가 깃든 초가
지붕 걷어 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된단 말인가? 초가지붕을 걷어내면서 거기에
둥지틀고 살던 새들이 집을 잃고 구렁이들은 이제 자취를 다같이 감추어 버렸다.
그들과 더불어 우리 삶의 지혜로운 방식과 꿈이 다 같이 사라져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몰론, 우리는 지금 얄팍한 감상적 낭만을 얘기해서는 아니된다. 근대화의
적이 초가지붕이라면 물론 초가지붕을 걷어내도 좋다. 그러나 막상 그 대안으로
제시된 스레이트 지붕, 방온, 방풍의 작용이 전무하고 비마저 줄줄새는, 게다가
보기싫게 새파랗고 새빨갛게 형셩색색으로 페인트를 입힌 천박한 모습들은 근대
화, 산업화의 대가로 치루기에는 너무도 억울하고 졸렬하고 옹색한 역사의 퇴보
였다. 새마을 운동은 우리민족의 문화 전체의 격조를 하락시키기 시작했고, 우리
민족이 수천년 동안 자연스럽게 지녀왔던 슬기로운 삶의 방식을 단순한 생산선
의 제고라는 미명하에 여지없이 파괴시켰다.
나는 대학교시절에 우리민족의 진정한 이념의 대결은 좌, 우에 있지 않다고 판
단했다. 좌든 우든 그것은 모두 근세 서양계몽주의의 말류적 발상에 불과한 것이
다. 보다 근원적인 대결은 좌, 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 서양에 있다고 생각했
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동, 서란 동양과 서양이라는 막연한 지역적 개념이 아니
다. 여기서 말하는 서양이란 모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의 편의적 문명을
건설하려는 유위적 드라이브를 총칭한다. 산업, 과학, 예술, 종교, 경제 그 모든
것이 이 유위적 드라이브를 위해 총동원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동양이라고 하
는 것은 그러한 유위적 드라이브에 역행하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공생을 모색
하는, 그러면서 인간의 욕망의 억제를 감내하는 어떤 슬기로움, 즉 유위적 드라
이브에 맞불을 놓는 무위적 드라이브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무위적 드라
이브의 허망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역사의 전개는 좌, 우 이념의
파상적 충돌로써 점철될 뿐이며, 근원적 무위의 드라이브는 그 충돌의 수레바퀴
밑에 깔려 숨소리도 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나
에게 노자는 하나의 구원이었다. 양보할 수 없는 지혜의 기둥이었다. 그것은 내
가 부둥켜 안고 울고 또 울 수밖에 없었던 나의 영혼의 의지처였다.
나는 대학교 때 학교신문에 새마을 운동은 문화박멸운동일 뿐이라는 논지의
글을 발표했다가 뼈아픈 곤욕을 치루기도 하였다. 윤필용 사건! 위수령! 고려 대
학 교정에 장갑차 진입! 나는 학우들과 군인들의 군화발에 채이고 곤봉으로 피나
게 두드려 맞으며 수경사에 짐짝처럼 끌려가 온몸에 피멍이 들어야 했지만, 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5, 16혁명 첫날 국사선생님의 카랑진 목소리, 우리민족은
혼돈의 지혜를 더 배워야 한다고, 외치셨던 그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 들려줄 수 없는 양심의 소리를 나는 노자를 통해 이 역사에 들려주어야 한다
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60년대 나의 영혼을 좌, 우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 떠
맡겼다면 나는 분명 좌익사상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혁당 동지들과 더불
어 형장의 한 이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목숨을 부지해서 살아남은 노자사
상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60년대, 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이 고리
타분한 동양의 고전에 매달렸던 당시의 심정은 형장의 이슬 못지않게 반작였던
절박한 그 무엇이었다는 것만은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그토록
절박하게 동양의 고전에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렇게 방대한 고전의 세계
를 넘나들며 20세기와 21세기 두 세기를 총괄적으로 관망할 수 있는 나 도옥 사
상가의 모습은 이 역사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나 개인
의 학식의 과시가 아니라, 학문이란 본시 그 시대정신의 소산이라는 것을 확실히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노자라는 서물의 전공자로서 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
요, 지금 내 강의를 듣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왜 내가 노자를 말해야하는지, 그
공유된 역사의 진실을 더불어 회고해 보자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의 노자는 우
리역사의 한 필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자가 도를 말할 때, 가장 우리 가슴에 쉽게 와 닿는 이미지가 바로 이 물이
라는 것이다. 물은 타오르는 불처럼 아래서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물은 항상 자
신을 겸손하게 낮춘다. 항상 위에서 아래로 자신을 낮추지만 사실 아니 올라가는
곳이 없다. 산꼭대기 봉우리에도, 저 드높은 청천 하늘 꼭대기에도, 물은 아니 가
는 곳이 없다. 모세관작용을 통해, 기화작용을 통해, 물은 훨훨 타오르는 불구덩
에까지 없는 곳이 없는 것이다. 자신을 항상 낮추면서도 무소불재한 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이 자신을 낮춘다 함은 자신을 비하시킬줄 아는 것이다. 비하시킨다 함은 남
들이 싫어하는 저 더러운 수채구멍 시궁창에까지 아니감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예수가 말구유간에서 태어나는 신화구조속에서 등장했어야 하는지, 왜
중광같은 스님이 자기를 걸레중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지 그 지혜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의 이미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쟁이다. 이미 3장의 불상현의 논리에서
나왔던 부쟁의 이미지가 여기 8장에서 물의 이미지로 보다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물은 자신을 낮추며 흐른다. 그러다가 암석을 만나도 암석과 다투지
않고, 암석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지도 않는다. 점잖게 스윽 비켜지나갈 뿐이다.
그렇지만 결국 물 앞에 당할 것은 없다. 한 방울의 낙숫물이 억만년의 바위를 뚫
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 물의 이미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즉 다투지 않으면서도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물이 없으
면 만물은 고사해버리고 만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무책상조차도 죽어있는
듯이 보이지만, 적당한 수분이 없으면 이 꼴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살
아있는 나무 한 그루야!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물이 없으면 땅도 갈러지고, 모든
농작물이 타 죽는다. 그러나 물리 흐르게 되면 어느 곳이나 사망의 골짜기라 할
지라도 다시 생명이 소생한다. 물이 있으면 곧 모든 생명이 춤춘다. 습기가 있는
곳은 고망이가 슬고 썩는다 함도,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생명이 끊임없이
활발히 순환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기는 생명의 충만태요, 물을 만나기만
하면 그 가능태는 현실태로 변하게 마련이다. 물처럼 모든 것을 이롭게 하는 것
이 또 어디 있으랴! 사막에서의 물 한방울처럼 우리에게 고마운 것이 어디 또 있
으랴! 그것은 물이라는 화학물질이 아니고 바로 생명 그 자체인 것이다. 물은 곧
생명이요, 물은 곧 신이다. 다투지 아니하면서 모든 것을 이롭게 하고 모든 것에
생명을 부여하며 무소불재한 것! 그것은 곧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랴!
하느님이 곧 도요, 도가 곧 하느님인 것이다.
본 장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노자에서 그리고 있는 물의 또 하나의 중요한
모습은 평형작용이다. 그것은 지나가면서, 높은 것을 깍아내고 낮은 것을 돋아준
다. 물은 평형의 상징이다. 모든 것의 호라이즌이 곧 수평이다. 물은 어느 곳, 어
느 상태에서든지 수평을 지향한다. 수평의 지향이 곧 물의 활동성의 과정이다.
이러한 물의 이미지가 노자에게 있어서는 사회적 평등관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다. 노자는 칼 막스처럼 계급의 평등을 말하지 않는다. 노자는 오직 물의 평등
을 말할 뿐이다. 사회적 평등의 개념은 인간의 경제활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모든 정신적 가치에도 포괄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개념인 것이다. 그래서 물의
평등은 단순한 계급적 획일주의나 노동가치의 분배의 평등을 초월하는 포괄적인
평등인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이론이 아니요, 우리가 살면서 터득하는 모든
가치의 포섭적인 평등의 체계인 것이다.
이러한 길과 물의 이미지는, 직선적인 발전만을 추구하고, 무차별적인 경제적
진보만을 추구하고, 따라서 모든 사회적 불평등의 현실을 묵살하는 군사독재정권
의 압제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나에게, 새마을운동이라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문화박멸운동의 수레바퀴 밑에서 끔찍스럽도록 증오스러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
던 나에게, 그것은 참으로 위대한 구원의 빛이었다. 물의 소리 없는 흐름은 비록
다툼이 없을지라도 우리 민족을 그러한 천박한 쟁의 문화로부터 다시 탈출시키
고야 말리라는 소망을 던져주는 어떤 근원적인 역사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거선지로부터 시작하는 일곱구절은, 상서본에도 거의 비슷한 형태로 실려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방식은 너무도 다양한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같은 글자에 대해서도 동사, 형용사, 목적어의 다양한 변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다른 번역의 가능성이 있겠지만,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번역해도 어
느 것이 더 정답이라는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일곱 구절은 물의 덕성을, 도를 구현하는 인간의 삶의 방식에 비유하여 말
한 것이다. 이 구절이 시작되기 전에 노자는 물의 모습을 묘사하고, 그것을 정돈
하는 자리에서 고기어도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여기 기어라는 표현은 ...에 가깝
다라는 뜻이다. 여기 숨은 주어는 물이다. 수기어도! 이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여기에 우리의 천재소년 왕필은 또 하나의 기발한 주석을 남겨놓고 있다.
나는 이러한 옛사람들의 언어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좀 소름이 끼친다. 너무도
현대철학의 다양한 주제들이 이미 이 간략한 옛사람들의 언어속에 아주 명료하
게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매한 구석이 없이 아주 진솔하게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말부르크 신칸트학파의 한 사람이며, 나치의 압제를 벗어나 영국, 스웨덴을 전
전하다가 나중에는 미국 예일, 콜럼비아대학에서 날카로운 지성의 혜망을 휘날리
며 생애를 마감했던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카씨러는 그의 주저, 인간
론에서 인간을 상징적 동물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상징이라 함은 인간의 개념
적 인식이 가지고 있는 상징화의 능력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바라보고 있는
모든 세계, 그러니까 과학 뿐만 아니라, 신화, 종교, 언어, 예술, 역사 등등의 모든
세계가 하나의 상관된 상징의 체계라는 것이다. 상징화란 곧 상징적 표상이다.
상징적 표상은 곧 우리의 오성적 인식의 본질인 것이다.
카씨러에게 있어서 상징과 싸인은 매우 다른 것이다. 싸인이란, 기호라는 물리
적 체계와 그것이 지시하는 의미체계와의 관계가 거의 1:1의 관계이거나 지극히
협애한 통로속에 제한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교통신호는 빨간불=멈춤, 파란불=
감이라는 지극히 협애한 대응관계에 국한되는 싸인일뿐이다. 그것은 상징체계가
아니다.
그러나 상징의 특징은 이러한 협애한 대응관계를 초월하는 보편적 적응의 원
리를 가지고 있다. 상징과 상징이 지시하는 의미체와의 관계는 1대1이 아니라 1
대 다의 관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자가 말하는 물은 물이라는 물체가 아닌
하나의 상징이다. 그 물이라는 상징은 저기 저 흐르는 물의 물리적 사실이 아니
라, 도의 무한히 다양한 성격을 표상하는 현상을 기능적으로 지시하는 의미의 체
계인 것이다. 싸인이란 물리적 세계에 속하지만, 상징이란 인간의 의미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싸인은 조작체이지만, 상징은 지시체인 것이다. 싸인은 물리적 존
재이지만, 상징은 기능적 가치인 것이다.
바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기호가 아닌 상징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
력을 소유하고 있다는데 있다. 개나 새도 기호적인 언어를 소유하지만, 그 언어
는 상징적 언어의 형상적이고도 보편적인 힘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인간의 지능은 개념으로부터 출발하며, 개념은 모두 상징적 표현에서 완
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형상의 창조의 총체가 곧 인간의 문화라는 것이
다.
바로 이러한 현대철학의 핵심적 과제를 노자는 암시하고 있고, 이 암시를 왕필
은 보다 현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노자는 왜 물을 말하면서 도에 가깝
다, 즉 가깝다라는 표현을 썼을까? 이에 대하여 왕필은 너무도 명료한 해답을 제
시하고 있다.
도는 무며, 수는 유다.
그러므로 가깝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왕필이 말하는 유라는 것은 물리적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필이 말하는 무
라는 것은 상징적 체계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이라는 물리적 유적 사실이
도라는 상징적 무적 체계와 정확히 대응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껏해야
가깝다라는 표현밖에는 쓸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무엇인가 도와 물의 관계가 매우 명료하게 드러나는 듯이 보이지
만,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에른스트 카씨러의 상징주의적 입장과 노자나 왕필의
입장은 전혀 반대되는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는 보다 심층적으로 재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카씨러에게 있어서 상징적 체계는 상징적 형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은 곧
우리의 개념이요, 관념이며,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플라톤의 이데아를 지칭
한다. 카씨러에게 있어서 형상이란 부정되어야할 것이 아니라 긍정되어야 할 것
이다. 그러나 노자에게 있어서 형상이란 가도지도의 세계며, 그것은 긍정되어야
할 세계가 아니라 부정되어야할 세계인 것이다.
왕필이 물은 있고, 도는 없다라 했을 때, 있음은 단순한 물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이라는 유는 이미 인간의 언어에 의하여 고착된 질서로서의 한정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도는 없다라 했을 때의 없음은 그러한 언어적 고착에 의
하여 파악될 수 없는 무한정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 무한정자의 세계야말로 우
리의 언어적 세계를 뛰어넘어 존립하는 사실의 세계이다. 그 사실이야말로 노자
에게 있어서는 상의 세계인 것이다. 즉 노자의 실재는 카씨러가 말하는 상징적
체계가 아니라, 그러한 상징적 체계를 뛰어넘는 끊임없이 변하는 사실로서의 세
계인 것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초월이란 바로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적 사실로의
복귀인 것이다.
비교해 보면 우리는 매우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그 대응되는 언어가 완전히
정반대로 뒤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두 개의 도표를 동
시에 오버랩시킴으로서 동, 서양을 소통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수는 분명 유며, 물리적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물리적 사실이라고 말
하는 것은 엄밀하게 분석하면, 그것은 이미 언어화된 사실이며, 그 언어는 고착
된 질서속에 갇혀있다.
도는 무다. 우리의 감관으로 쉽사리 파악할 수 없는 궁극적인 사실의 세계이
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의 세계는 우리에게 상징의 체계로서 밖에는 드러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왕필주석에 대한 최종적 해석은 이러하다. 물은 이미 하나의 상징체계
이며, 그러한 상징체계는 끊임없이 상징체계를 벗어나 있는 도 즉 무의 세계에
끊임없이 근접할 수는 있을 지언정 영원히 일치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
리의 사실 인식은 끊임없이 언어의 제약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인류역사상 노자도덕경의 최초의 주해서라 할 수 있는 한비자의 해노편에는
도와 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만물이 도를 얻어 죽을 수도 있고, 또 도를 얻어 살 수도 있다. 만사가 도를
얻어 패망할 수도 있고, 또 도를 얻어 성공할 수도 있다. 도는 비유하건대 물과
도 같은 것이다. 물에 빠진자가 물을 너무 많이 마시게 되면 곧 죽을 것이다. 심
히 목마른 자가 적시에 알맞게 물을 마시면 곧 살아날 것이다.
여기에 왕필이 후대에 도무수유라 말한 그 논지의 맥락이 이미 극명하게 드러
나고 있다. 제2장의 가치론에서 말했듯이, 도는 인간의 상대적 가치에 국한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만물의 죽음과 삶, 성과 패는 상황적인 상대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도는 그러한 상대적인 현상에 국한되는 그러한 성격의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의 철학자 율곡선생이 말했듯이 물은 동그란 컵에 담으면 동그란 것이요, 세
모난 컵에 담으면 세모난 것이다. 그것은 무자성이다.
물이라는 물적 현상 그 자체는 상황적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맥락을 띠
고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올 여름 폭우가 쏟아질 때, 연천, 문산에 있
었던 사람들에게 물이란 결코 노자가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는 그러한 선리만물
이부쟁하는 의젓한 모습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이요, 사망이요, 무차별파괴
이다. 그것은 바로 불인한 천지의 모습이다. 그러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목마른 대상들에게 물 한방울은 생명이요, 소생이요, 죽음의 퇴치다. 이와
같이 동일한 물체가 상대적 물은 생과 사, 성과패의 일면을 속성으로 해서 나타
나는 유이지만, 도는 생과 사, 성과 패를 초월하는 무인 것이다. 여기 우리는 한
비의 주석과 왕필의 주석의 내재적 맥락의 연속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1. 거선지
여기서 지는 아무래도 중성적인 의미의 땅이라기 보다는, 겸양의 뜻을 나타내
는 낮음의 가치가 포섭되어 있는 말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일찍이 길과 얻
음에서 이 구절을 살때는 물처럼 땅을 좋게 하고라고 번역했는데, 요번에는 살
때는 낮은 땅에 처하기를 잘하고라고 번역하였다. 전자는 선을 좋게한다로 해석
한 것이고, 후자는 선을 잘한다로 해석한 것이다. 잘함의 가치내용을 지가 설명
하는 것으로 풀이한 것이다.
2. 심선연
심은 마음가짐이요, 연은 선의 가치내용이 될 것이다. 연은 물이 깊이 있어 그
윽한 모습이다. 이아 석고에 연심지라 하였고 석천에 연,장지라 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그윽한 물과 같이 맑고 깊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구룡폭포 밑의 깊은
웅덩이처럼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3. 여선인
금본은 여선인 혹은 여선인으로 되어 있는데, 백서 을본에는 이것이 분명하게
여선천으로 되어 있다. 와전된 경로를 보면 천에서 인에서 인이 된 것 같은데,
인은 분명히 노자 텍스트의 오리지날한 모습이 아니고, 후대의 사람들이 유가의
영향을 받아 고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보통 여는 벗을 사귀는 것으로 해
석된다. 그래서 벗을 사귈 때는 인자하기를 잘한다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통례로
되어있다. 그러나 여는 준다로 새길 수밖에 없다. 더불어한다로 새겨서는 아니될
것이다. 왜냐하면 백서 두 본에 모두 분명 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선인은
분명 여선천의 글자의 의미와 자형의 유사성에 의한 와전이다. 그런데 천은 여기
서 인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여선천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자기
를 잘 주면서도 하늘과 같은 넓은 마음으로 자기가 준것에 거하려 하지 않는다.
공수신퇴의 하늘과 같은 미덕을 나타낸 말이다.
4. 언선신
고대 한자에 있어서 신의 뜻은 믿음이나 신앙의 뜻이 없다. 그것은 신험 가능
하다. 즉, 증명가능한 신실한 것이라는 뜻이 그 일차적 함의로 되어 있다. 신은
verification의 뜻이다. 인간의 말은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 신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믿음직스러워야 하는 것이다.
5. 정선치
고자에 있어서 정과 정은 한 글자이다. 그런데 뜻도 통한다. 정은 정치요 다스
림이다. 그런데 다스림이란 곧 사회를 바르게 함이다. 정은 곧 정이요, 정은 곧
정이다.
다스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보통 치를 다스릴
치라고 훈하는데, 실제로 요즈음 말로 다스린다 하는 것은 정이 바르게 해당되는
것이고, 치의 본 뜻은 다스려짐이다. 즉 치는 란과 대립되는 질서를 말하는 것이
다. 정치란 바로 사회의 질서와 기강을 세우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항상 난한
다로 치우치기 쉬우므로 그것을 정하여 치한 상태로 가게 하는 것이 곧 정치인
것이다. 질서를 세우지 못한다면 어찌 다스린다 할 수 있으리오?
6. 사선능
여기 사라는 것은 섬긴다는 뜻과 그냥 일한다 즉 아르바이트의 의미가 담겨
있다. 생각해보라! 칼 맑스의 아르바이트의 개념을! 그러나 물의 노동은 단순히
생산을 위한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창출을 위한 모든 다양하고도 미묘한
자연의 움직임을 포섭하는 것이다. 물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보라! 무엇으로 더러
운 것을 씻을 것이며, 무엇으로 만물에세 영양을 공급할 것이며, 무엇으로 문명
의 에너지를 일으킬 것인가? 물처럼 능력이 높은 것이 없다. 따라서 물과 같은
사람은 일할 때는 물처럼 능력있게 모든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다.
7.동선시
동과 시라고 하는 것은 동양사상에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 상관개념
이다. 움직인다 하는 것은 반드시 때를 바르게 타야하는 것이다. 겨울에 장마가
질 수는 없는 것이다. 장마가 여름에 오는 것은 바로 만물이 물을 머금을 수 있
는 때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 바위가 물을 먹고 있으면 갈라지게 마
련이다. 따라서 저기 저 우뚝 서있는 뫼악도 거저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 되면 월동준비를 한다. 여름내내 머금었던 수분을 내기 시작하고 따라서
가을이 되면서 산속에서 우러나온 시냇물이 졸졸 흐르기 시작한다. 여름엔 비가
그치면 오히려 계곡에 물이 마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은 춘하추동 각기 때를
따라 움직인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로, 물의 미덕을 터득한 사람은 움직일 때
는 반드시 때를 고려하여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을 출마할 것인가, 아
니할 것인가? 직장을 더 다닐 것인가, 그만 둘 것인가? 이사를 갈 것인가, 말 것
인가? 시집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 모두가 바른 때를 탈 줄 알아야 하는 것
이다.
이 상선약수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나고 있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어라.
역시 노자가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있는 물의 덕성은 역시 부쟁의 미덕이다. 물
은 다투지 않는다. 다투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에 생명을 부여하고 모든 것을 이
롭게 성취시킨다. 우리네 인생도 다툼이 없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면 얼마
나 좋을까? 중동 사막문명의 사람들은 본시 사막의 각박한 환경에서 물을 모르
고 불만 보고 자랐기 때문에 광포하고 흉포하다. 그래서 그 사막에서 태어난 종
교는 마찬가지로 광포하고 흉포하고 불과도 같다. 성경의 메타포를 보면 떨기 불
이니 불기둥이니 심판의 불이니 지옥의 불이니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둥,
강렬한 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불의 종교라 한다면 노자의
가르침을 물의 종교라 할 수 있을까? 기독교에 의하여 우리의 20세기 개화가 주
도외어 왔다면, 이제 한 발자국 물러서서 생각해보자! 불같은 구원의 경쟁에서
물같은 겸양의 부쟁으로 물러서는 지혜로 배워볼만 하지 않은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을진저!
본 8장은 백서 갑, 을본에 모두 정연하게 실려 있다. 그런데 현행 왕본과 백본
이 차이나는 검을 몇 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우선 상선치수의 치라는 단어의 선택이 다르다.
갑본의 치수의 치는 사의 의미다. 그러므로 비슷하다라는 뜻이 된다.
2. 다음 수선이만물은 세 본이 다 공통되지만 그 다음의 부쟁이 큰 차이를 보
인다.
갑본의 유정은 의미가 확실하다. 그것은 물의 정직인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고요하다의 뜻이 된다. 물의 고요함과 만물을
이롭게 하는 동적인 성격이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을본이다. 을본은 일단 정이라는 글자를 베끼는 과정에서 앞의 푸를 청자
를 빼먹어서 쟁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유쟁은 의미가 통할 수 있지
만, 그것의 오사인 유쟁은 노자철학의 맥락에서 전혀 다른 뜻이 되어버린다. 그
것은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 만물과 잘 다툰다는 엉뚱한 뜻이 되어버리
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초사의 오류인 것이다.
따라서 왕본은 그 유를 불로 고쳤다. 그래서 부쟁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초사
의 오류과정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변천되어 갔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유정에서 유쟁에서 부쟁으로
이것은 초사의 오류과정이 발생시키는 재미있는 의미의 변천의 한 과정을 나
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이러한 초론은 정당성이 없다. 왜
냐하면 같은 장 속, 바로 제일 끝 구절에 중복되는 의미가 있고, 그 텍스트의 모
습이 이러한 추론을 정당화시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분명 갑본과 을본
이 모두 유정 유쟁이 아닌 부정 부쟁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역시 노자철학에 있
어서 물의 이미지는 그 정적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부쟁의
성격에 있음이 확연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정과 쟁은 노자 백서초사 당시에는 동
음동의의 다른 글자였을 뿐일 것이다. 그리고 앞의 유는 불의 단순한 오류로 간
주되어야 한다. 최소한 갑본의 경우 을본과 초사의 전승이 다른 것이므로 그 판
본에는 유정의 가능성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의미의 맥락이 결착되는
부분에 부정으로 되어 있음으로 유정은 역시 부정의 오사로 보는 것이 가장 정
당하다. 이와 같이 옛사람들이 한 책을 초사할 때 상당히 엉성하게 책을 베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요즈음의 일본 장인정도만 되어도 이런 오류는 발생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중국사람은 역시 마마호호한 구석이 많다. 그러한 단순한
초사의 오류를 가지고 대단한 학설을 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런 것들이 모
두 노자 판본을 펴놓고 들여다 보면 재미있게 읽혀질 수 있는 휴면 드라마인 것
이다.
그런데 이 물의 비유, 노자의 도를 말하는 없어서는 아니될 이 물의 비유를 말
하는 8장이 죽간에 있는가, 없는가? 있는가? 없다!
노자는 전체 여든 한 장 속에는 물을 비유로 해서 말한 장들이 이 8장 말고도
또 많이 있다. 정말 노자에게서 물의 상징이란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의 상징성을 담은 다른 장들은 죽간에 나타나는가? 신비롭게도 죽간에는 그런
장들이 모두 빠져있다. 극히 간접적인 비유로 연결지을 수 있는 내용을 제외하고
는 물에 관한 언급은 죽간에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 우리는 이런 가설을 세
워볼 수 있다. 노자의 물의 비유는 노자라는 서물의 고층대에 속하지 않는다. 물
과 도의 상징적 연관은 어떠한 물의 철학의 학파의 사상과 노자가 결합함으로써
전국시대 후기에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가설이다. 이
러한 가설을 반증할 수 있는 논리는 무수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첫째, 현대 광점죽간은 초사본일 뿐이며, 당시에 초사의 대상이 된 노자라고
하는 어떠한 프로토텍스트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었고, 또 그 프로토텍스트 자체
가 갑,을, 병 모두 다른 전승의 것이라고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자
학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거의 확실시 될 수 있는 가설이다.)
따라서 곽점죽간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나타나지 않는 부분이 곽점죽
간 당대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에 관한
노자의 부분이 다른 전승으로서 별도로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 있다. 곽
점죽간 노자는 앞서 말했듯이 갑, 을, 병의 삼초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병조의
끝부분에 노자 병조와 분리할 수 없는 14개의 죽간이 붙어 있는데 그 내용이 현
재의 노자 본속에 들어있지 않은 생소한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자가 태일
생수라고 하는 마치 요한복음 첫구절을 연상케하는 그런 오묘한 말로 시작하고
있어 이 14개의 죽간을 학계에서 편의상 태일생수라고 부른다.
지금 이 태일생수편을 놓고 학계에는 다양한 가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 내용
이 우리가 선진문헌에서 보기 어려운 우주발생론의 매우 체계적인 그랜드한 내
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14개의 죽간은 양단이 평제하며, 길이가 26.5 센티
미터에 달하는 것으로 그 형제와 서체가 노자 병조와 완전히 동일하다. 그리고
병조와 태일생수가  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연속해서 묶여있는 합편
인 것이다. 혹자는 이 태일생수 자체가 노자 병조의 일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태일생수가 노자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하여튼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왈가
왈부하기 전에, 태일생수는 죽간 노자와 동일한 계열의 사상체계를 이루는 당대
의 도가 문헌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헌의 주제가 바로 물이라
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렇다면 곽점죽간시대에 노자 사상 속에 물의 사상이 없었
다는 가설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우주론적 사유
가 이미 전국초기에 형성되어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태일생수의
문헌학적 성격에 관하여 내가 확고한 견해를 제출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당대의 문헌과의 충분한 비교검토의 과정을 요하는 것이다. 단지 이 자
리를 빌어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그 도입부분의 언어를 정확한 우
리말 해석과 함께 여기 싣는다.
태일은 물을 낳는다. 생하여진 물은 생하는 태일을 오히려 오운다. 그리하여
하늘을 이룬다. 하늘 또한 자기를 생한 태일을 오히려 도운다. 그리하여 땅을 이
룬다. 이 하늘과 땅이 다시 서로 도와서 신명을 이룬다. 신과 명이 다시 서로 도
와서 음양을 이룬다. 음과 양이 다시 서로 도와서 네 계절을 이룬다. 춘, 하와
추, 동이 다시 서로 도와서 차거움과 더움을 이룬다. 차거움과 더움이 다시 서로
도와서 습함과 건조함을 이룬다. 습함과 건조함이 다시 서로 도와서 한 해를 이
루고 이로써 우주의 발생이 종료된다.
이것은 분명 소박하지만 우주의 발생을 말하고 있는 매우 체계적인 우주론의
한 전형이다. 우리는 중국인의 우주발생론을 말할 때는, 흔히 주자학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송나라 초기의 대유학자 주렴계의 태극도설을 연상하지만, 그것은 보
통 불교의 우주론적 인식론이 들어온 후, 그것에 의하여 계발된 후기 도교의 어
떤 도식에 의하여 흥기한 이론이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러한 발생론적 우
주론이 명료하게 선태문헌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사실 유례가 없는 사건이다.
태극도설의 앞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극이면서 태극이 있도다 태극이 움직이여 양을 낳고, 그 움직임이 극에 달하
면 고요하게 된다. 태극이 고요하면 음을 낳고, 그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인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한 것이 서로 뿌리가 된다. 그렇지만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져 두 극이 세워진다. 양이 변하면 음이 그에 합하여져서
수, 화, 목, 금, 토를 낳는다. 다섯 기가 골고루 배포되어 네 계절이 성립하게 되
는 것이다. 오행도 결국 하나의 음, 양이다. 음, 양도 결국 하나의 태극이다. 태극
은 본래 무극인 것이다.
물론 이 간단한 도식과 언사속에는 일반독자들이 헤아리기 어려운 엄청난 논
쟁들이 숨어있다. 신유학이라고 부르는 송, 명 유학 전체가 바로 이 한 도설 하
나에서 연화된 것이라 말하여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조선조
문명이 이 한 구절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조금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도식
의 개념의 연쇄를 살펴보면 자그만치 2,300년 동안을 땅속에 숨어 있다가 1993년
에나 우리 육안에 드러난 이 신비스러운 죽간자료, 태일생수와 모종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태극도설의 도식적 설명은 분명 어떤 일방적인 시간의 흐름을 전제로 하고 있
다. 그러나 그 흐름의 종착역이 바로 사시라고 하는 이 사실에 그동안 대부분의
태극도설의 논쟁자들이 주목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태극도설의 우주발
생론적 흐름은 사시에서 종료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태일생수의 우주발생론의 종구가 바로 성세이지로 끝나
고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이것은 과연 무슨 소린가?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우주의 발생이란 우리가 보는 물리적 환경이나 물체, 즉
만물의 창조를 의미하지 않는다. 누누이 말했듯이 동양인들이 말하는 물이란 고
정된 것이 아니라 동정의 과정일 뿐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창세기에서 말하는
식의 창조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불행하게도 물을 실체로 파악했기 때문에 물
아닌 어떤 것에 의하여 그 물이 창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동양
인들에게는 물이란 근원적으로 창조의 대상이 아니다. 만물이란 천지의 끊임없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객형일 뿐이요, 그것은 끊임없이 생멸하는 과정태일 뿐이다.
그러면 창조의 대상은 무엇인가? 창조는 바로 시간의 창조인 것이다. 변화하는
시간의 창조인 것이다. 만물의 생성을 질서지우고 있는 시간의 창조인 것이다.
따라서 태일로부터 시작되는 전 과정이 세로 끝나고 있다는 이 사실은 곧 세라
는 시간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요, 바
로 생명적 시간인 것이다. 그것은 크로노메타로 재어질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이
아니라, 삶의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시간을 누가 창조하는가? 이 시간의 창
조자가 청세기에서는 하나님이요,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다. 서양인들이 말하는
창조주는 바로 로고스인 것이다. 그것은 곧 인격적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태일생수는 말한다. 시간의 창조주는 로고스가 아니라, 물이다. 물이 곧 시간이
요, 시간이 곧 물이다. 물이 곧 생명이요, 생명이 곧 물이다. 시간이 곧 생명이요,
생명이 곧 시간이다.
태일생수의 도식에 있어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의 주요 대립개념이 모두
물의 시간의 측면들일 뿐이다.
천지, 신명, 음양, 사시, 열창, 조습이 모두 수의 변화태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각 항이 모두 1년이라고 하는 시간을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1년
이라고 하는 시간을 단위로 해서 순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년은 우리 삶의 시
간의 전부이다. 창세와 종말이라고 하는 더 이상의 시간의 스트레치를 가질 필요
가 없다.
우리가 태극도설에서 중시해야 할 것은 바로 일동일정, 호위기근이라는 이 한
마디다. 즉 태극의 동과 정에서 양과 음이 생겨나지만, 이 동과 정은 1회적 사건
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으로서 서로가 서로의 뿌리가 된다는 것이다.
일자가실체적인 뿌리로 고정되어 있어서, 그 뿌리에서 가지로 일방적으로 뻗어가
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뿌리가 된다는 것이다.
동과 정, 음과 양의 이러한 극한적 성격, 상편적 성격이 재미있게도 태일생수
에는 모든 생성의 단계에 명료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시간의 방
향성이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이라는 것이다.
태일은 복잡한 해설이 필요없다. 노자 자체 텍스트 속에도 일의 개념이 계속
나온다. 일에다가 크다고 하는, 그 근원성과 포괄성의 의미를 나타내는 태를 붙
이는 것은 인간사유의 공통적 특성이다. 모든 고대문명의 신화적 언어에 공통적
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태일은 한마디로 노자가 말하는 도의 별칭이다. 그것은
하나님이요 하느님이다. 그러나 태일은 생성의 주재자가 아니요, 무로부터의 창
조를 지시할 수 있는 초월적 말씀이 아니다. 태일은 상이요 락이요 우주의 실상
이다. 따라서 태일이 수를 생했다 해서 태일이 창조주가 되고 수가 피조물이 되
는 그러한 논리는 쌍방적 관계에서는 성립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한다면, 동시에 이 세계는 하나님을 창조하고 있는 것
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인간이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인간이야말로 창조주요
신이야말로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무제약자요 인간이 제약자라고 한다면, 인간이
야말로 무제약자요 하나님은 제약자다. 하나님이 초월자요 인간이 내재자라고 한
다면, 인간이야말로 초월자요 신이야말로 내재자이다. 하나님이야말로 유일자요
인간이 다자라고 한다면, 인간이야말로 유일자요 하나님은 다지인 것이다. 도대
체 인간으로부터의 피드백이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신이라는 것, 도라는 것
은 도무지 허깨비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과 세계, 도와 만물의 관계는 일방적
일 수 없는 것이며, 쌍방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학생으로부터의 피드
백이 없는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주기만 하는 선생이라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
가? 군림하고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선생은 곧 허깨비선생이 되고 말 것이
다. 살아있는 선생이 아니라, 죽어있는 이름뿐인 추상체가 되고 말 것이다. 내가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하는 행위의 모든 순간 순간에 기의 교감이라고
하는 피드백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과 세계, 신과 인간의 관계가 모두 그
러한 것이다. 신은 칸트가 말하는 물자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상으로부터 그
생성의 원인을 제공받는 과정체인 것이다.
태일은 물을 생하지만, 피조물인 물은 거꾸로 창조주인 태일을 생한다. 이렇게
상호적인 창조의 관계를 태일생수는 반보 복상보라 부르고 있다. 현대물리학에서
도 A라는 소립자가 B라는 소립자를 생성시킨다고 하는 사건은 곧 B라는 소립자
가 A라는 소립자를 생성시킨다고 하는 것과 동일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방적인 시간 위에서 실체화 될 수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다. 유무상생인 것이다.
이와 같은 A로부터 F까지의 과정은 한 과정의 단계가 한 시간의 단위로서 분
리될 수가 없다. A와 B의 관계, B와 C의 관계,C와 D의 관계, D와 E의 관계, E
와 F의 관계, 이 모든 관계들이 착종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할 뿐이다. A는 또다
시 B, C, D, E, F와 착종될 것이요, B는 A, C, D, E, F와 착종될 것이다. 이러한
착종의 관게를 태일생수는 복상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상투적 관계는 착종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 한열, 오한이 언급
되어 있는 것은 수분의 변화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계절이라고 하는 시간의 변
화상과도 관련되지만 나중에 이것은 오운육기의 사상으로 발전하는 모태사상임
을 알 수 있고, 장한론등의 한의학적 인체관의 프로토 모델이 되는 사상유형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특히 한의학적 인체관과 관련된 우주
모델의 수론적 성격을 나타내는 고대문헌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근자라는
뱅대한 서물속에 수록되어 있는 수지라는 일편이다. 수지편의 성립이 많은 학자
들이 태일생수보다 앞서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 나는 그 선후를 가리기 어렵다고
본다. 태일생수의 성립을 수지편의 영향으로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편은 대강 동시대에 성립한 것이 거의 확실하며 얼마나 중국고대인들이
우주론적으로 물을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물이 시간의 창조자요, 하나님의
로고스적 기능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오늘과 같이 물을 홀대할 수 있
을까? 교회에 걸려있는 십자가보다 물이 더 성스럽고, 그들이 경배하는 하나님보
다 물이 더 신적이라고 한다면 과연 오늘날과 같은 몰상식한 물의 학대, 천시가
있을 수 있겠는가?
땅이라는 것은 만물의 본래 근원이요,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뿌리요 터전이다.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불선, 어리석음과 현명함이 모두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다.
물이라는 것은 땅의 피요, 기다. 그것은 우리의 몸에 근육과 혈맥이 있어 모든
것을 소통시키고 흐르게 해주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물이야말로 모든 가능성
을 구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함을 우리는 알 수 있는가? 말한
다! 대저 물은 부드럽고 유약하여 깨끗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더러움을 씻어
주기를 좋아하니, 인자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깊은 물을 쳐
다보면 검푸르지만 손바닥에 떠서 보면 무색투명하다. 이것이 물의 청순하고 정
미로운 성질이다. 물을 됫박에 잴 때 위를 고르는 막대기를 쓰지 않아도, 그것은
됫박에 차면 스스로 멈춘다. 이것이 물의 바른 미덕이다. 물은 차이가 있을 때는
흐르지 않는 법이 없다. 그러나 평균에 이르게 되면 스스로 멈춘다. 이것이 물의
의로움이다. 사람은 모두 한결같이 위로 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물은 자기 홀
로 항상 밑으로 간다. 이것이 물의 겸양의 미덕이다. 낮춤이라는 것이야말로 도
가 깃드는 곳이요, 왕자의 그릇이다. 물은 진정코 항상 낮은 곳으로 모이는 것이
다. 수평이야말로 모든 형량의 으뜸이다. 물의 무색이야말로 모든 색깔의 바탕이
다. 물의 담박함이야말로 모든 맛의 중용이다. 그러므로 물이야말로 만물의 기준
이며, 모든 생명을 살리는 담박한 체액이며, 모든 시비와 득실의 바탕이다. 그러
하므로 물은 채우지 아니함이 없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물은 하늘과 땅에 가
득하며, 만물 어느 것에도 깃들지 아니함이 없고, 쇳덩이, 돌바위에도 생하지 아
니함이 없고, 모든 생명을 활성화시키지 아니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물
하느님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웅장한 수지편의 물의 예찬의 서사시를 읆어보라! 이제 독자 여러분들은 노
자의 물이 고대인들의 어떠한 우주론적 생각의 틀속에서 태어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은 물이 아니다. 물은 곧 신인 것이다! 수신의 예찬! 우리가
너무도 우리의 일상적 삶의 체험속에서 잃어버린 기도요 믿음의 송가가 아니던
가? 물은 곧 하느님이다! 물은 만물지존이요, 자생지약이요, 시비득실지질이다.
어찌하여 이 하느님을 그다지도 천시하고 학대하고 못살게 구는가? 현대인들이
여!
현대 생화학의 지식을 동원해 보아도 지구의 진화의 역사는 물의 진화의 역사
다. 생명이 곧 물에서 탄생한 것이다. 생명이란 세포막을 통하여 물의 삼투성을
조절하는 기능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의 몸은 곧 물의 순환의 체계이다.
우리의 피가 곧 물이요,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흘린 대속의 피가 곧 물이
다. 어찌하여 이러한 물을 그다지도 성스럽지 않게 바라볼 수 있는가? 우리나라
민중의 철학을 대변한 동학의 성자, 해월 최시형선생의 이 한 말씀을 다시 한번
새겨보자. 하늘과 땅이 모두 하나의 물 덩어리다. 물이라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어미다. 모든 종교의 제식은 청수 한그릇으로 족하니라!
나는 이 상선약수의 8장을 해설함에 있어서 우리 고대인들의 물과 관련된 자
료를 몇가지 나열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소박한 자료의 나열에 불과하다.
이것을 앞으로 연구하려면 다양한 가설과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 노자라는 서물
의 세계는 이와 같이 무궁하다. 우리나라의 젊은 학도들어여! 컴퓨터 자판만 두
드리고 있지 말고, 이렇게 무궁하게 재미있는 고전의 세계에 한발자국 한발자국
심취해봄이 어떠할지! 한문의 어학설력을 길러 이러한 고문헌의 세계를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주기를 빌고 또 고대하나이다.
9장
지이영지, 불여기이
취이절지, 불가장보
금옥만당, 막지능수
부귀이교, 자유기구.
공수신퇴,
천지도.
아홉째 가름
지니고서 그것을 채우는 것은
때에 그침만 같지 못하다.
같아 그것을 날카롭게 하면
오래 보존할 길 없다.
금과 옥이 집을 가득 메우면
그를 지킬 길 없다.
돈많고 지위높다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길 뿐이다.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는 것,
하늘의 길이다.
설노 장자라는 서물은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그 이름은 들어 익히 알 것이다.
노자와 더불어 같은 계열의 지혜의 서로서 병치되기 때문에 흔히 우리는 이 두
권의 책의 사상을, 그 앞머리 글자를 따서 노장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장자 역시 노자와 같이 그 역사적 실존성이 의심시되는 애매한 인물이지만, 최
소한 오늘의 장자라고 하는 서물의 어떤 오리지날한 고층대 파편의 저자로서의
그 누구가 실존했으리라는 가설은 정당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보는 장
자라는 책은 분명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전집과 같은 것으로 전국시대로부터
한대까지의 문헌을 포통하고 있다. 장자학파의 대선집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
울 것이다.
최근까지도 노자와 장자의 관계에 대한 제설이 난무하였다. 심지어 노자가 장
자이후에 성립한 책이라고까지 주장한 대석학들이 많았으나, 최근 죽편의 발굴은
이러한 논의를 완전히 불식시켰다. 장자는 분명 노자의 사상이 발전되어, 장자라
는 어떤 실존인물을 낳았고, 그 실존인물의 학풍을 중심으로 여러 전승이 다시
시작되었고 그것이 후대에 편집된 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장자라는 희대의 지혜
의 서라고 보라면 별 탈이 없을 것이다.
노자는 논설이다. 노자는 한 인간의 사유의 결정으로서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편 책이다. 그러나 장자는 좀 성격이 다르다. 노자가 말한 철학적 사유를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펼친 것이다. 노자를 펼치면, 도를 도라 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
니다라고 시작하지만, 장자를 펼치면, 옛날옛날에 북쪽바다에 물고기가 있었다라
고 시작한다. 그 성격의 차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자는 노
자의 사상을 보다 폭 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위대한 이야기책임에
틀림없다.
그 장자라는 책 대종사라는 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꼭 그대로는 아
니지만 어려서 내가 외할아버지께 들은 기억대로 재미있는 한 이야기를 여기 전
하려 한다.
어떤 부자가 코이누르와도 같은 어마어마하게 값진 보석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감추기 위해 벼라별 지혜를 다 짜아냈다. 우선 그는 세상에
서 가장 단단한 금고를 장만했다. 무쇠를 겹겹으로 싸서 만든 엄청난 금고였다.
그 금고를 다시 어마어마한 철문방에 집어놓고 잠그었다. 그리고 집을 다시 단단
한 철책문으로 싸았고, 다시 어마어마하게 높은 담벼락을 둘러쳤다. 그리고 그것
도 모잘라 그는 이 집을 큰 강 한복판에 있는 섬속에 지었던 것이다. 천연의 호
를 이용한 셈이다. 그 부자는 이제는 분명 한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당대
의 도둑 기술로써는 이러한 천혜의 장벽을 뚫을 길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어마어마한 거인도둑놈이 어느 날 섬채 들고 달아나 버
린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메타포다. 그러나 바로 이 이야기의 주제는 천하에 우리가
진정으로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너무도 쉽고 명명백백한 사실을
재미있게 전달해 주고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라스포사의 이야기도 작은 것을 감
추려다 큰 것을 잃고마는 이야기의 한 전형인 것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이런
이야기가 돈다. 부인이 한번 옷을 잘못 입으면 남편이 옷을 벗는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천하를 천하에 감추어라!
그리하면 숨길 바가 없을 지니,
이것이 만물의 큰 이치로고!
나는 어려서 이 이야기를 한학에 능하신 외할아버지로부터 들었다. 천하를 천
하에 감추어라! 이 얼마나 장쾌한 이야기인가? 어렸을 때, 이 한 이야기를 진정
으로 깨닫는다면 그 인간의 삶의 태도가 어떻게 형성될 것인가? 한번 잘 생각해
보라! 아무리 금, 옥이 집안에 가득 차도, 그것이 없어질려면 하루아침에 사라지
고 마는 것이다. 금, 옥을 지키는 것은 철책이 아니요, 세콤이 아니다. 금, 옥을
지키는 무기는 바로 나의 삶의 가치관속에 내재하는 것이다. 노자의 아홉째 가름
은 바로 이 장천하어천하의 설화의 모태를 이루는 논설인 것이다.
1. 지이영지, 불여기이
채우는 것은 때에 그침만 못하다는 것은 바로 허의 사상에서 도출된다.
2. 취이절지, 불가장보
취를 갈다라고 해석하면 절은 분명 날카롭게 한다는 뜻이 될 것임으로, 이것은
예의 오사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칼이 무딘 것과 날카로움을 비교해보면, 항상
날카로운 것은 무딘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진행한다. 무딘 것이 날카로운것에 비
해 허가 더 많은 것이다.
날카로움은 무딘 것보다 오래 보존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간의 성격도 너무
날카로운 사람은 허가 없어 자신을 들볶게 마련이다. 에도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
시가 무딘 목검으로 당대의 최고 검객 사사키의 날카로운 진검을 쓰러트린 이야
기도 결국 이 노자의 허의 사상을 무술에 적용시킨 대표적인 사례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이 죽간 갑본에 유이선지, 불하장보로 되어 있다. 이 죽간의문
자를 충실하게 해석하면 여기저기 긁어모아 쌓아 두면 오래 보존할 수 없다의
뜻이 된다. ppp91 을본에는 ppp91로 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왕본에 가까운 것으
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여튼 ppp91의 변천과정은 오ppp91와 의미의 변천과정을
시사한다.
3. 금옥만당, 막지능수
이 구절은 장자의 고사를 빌어 이미 충분히 설하였다.
4. 부귀이교, 자유기구
옛말에 부라는 것은 경제적 부를 말한다. 귀라는 것은 옛 관료체계에 있어서
벼슬의 높음을 의미한다. 부귀를 정확히 번역하면 Wealth and Power다. 즉 부와
권력이다. 그런데 인간의 부와 권력에 항상 같이 따라 다니는 요물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이다. 교만은 반드시 화를 자초한다. 이것은 긴세의
정리요, 역사의 정칙이다. 교만은 반드시 스스로 허물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평
생 남을 정죄하기만 하고 살아온 검찰총장도 가벼운 일로 정죄당하는 부끄러운
허물을 남길 수 있는 것이요, 빛고을의 양민들을 학살하여 고귀한 지위에 오른
사람도 결국 영어의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 역사는 그래도 노자가 말하
는 도의 이치를 실천해가고 있는 것이다.
5. 공수신퇴, 천지도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난다는 것은 바로 2장에서 말한 공성이불거의 다른
표현이다. 바로 그러한 모습은 인간이 실천해야 할 도덕성인 동시에, 천지자연의
스스로 그러한 길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졸렌은 항상 자인의 어떤 측면에서 우러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아홉째 가람은 죽간 갑본의 맨 끝에 붙어 있는데 오늘날의 왕본의 모습과
대차가 없다. 이 9장처럼 비교적 비개념적이고 평이하고 서술적인 이러한 장이
노자의 고층대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장
재영백포일,
능무리호!
전기치유,
능영아호!
척제현람,
능무자호!
애민치국,
능무지호!
천문개합,
능무자호!
명백사달,
능무위호!
생지,
축지.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부재,
시위현덕.
열째 가름
따의 형체를 한 몸에 싣고
하늘의 하나를 껴안는다.
그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기를 집중시켜 부드러움을 이루어
갓난 아기가 될 수 있는가?
가믈한 거울을 깨끗이 씻어
티가 없이 할 수 있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앎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힘에
암컷으로 머물 수 있는가?
명백히 깨달아 사방에 통달함에
함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도는 창조하고,
덕은 축적하네.
낳으면서도
낳은 것을 소유하지 않고,
지으면서도
지은 것을 내뜻대로 만들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자라는 것을 지배하지 않네.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덕이라 하네.
설노 이장은 성격이 매우 추상적이고 서술적이며 그 의미맥락이 매우 다양하
여 편하게 해석이 되질 않는다. 물론 텍스트비평의 관점에서 보면 고층대에 속하
기 어려운 프라그먼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곽점 죽간에는 물론 나타나지 않지
만, 놀라웁게도 ppp 에 거의 왕본의 내용이 그대로 다 실려 있다. 약간의 문자의
출입이 있을 뿐이다.
1. 재영백포일, 능무리호:
인간의 몸은 하늘과 땅의 묘합이다. 몸의 하늘을 넉이라 부르고, 몸의 땅을 넉이
라 부른다. 우리말에 "혼났다," "넋 잃다," "넋이 빠졌다," "넋이 나갔다" 등의 표
현은 잠시 혼이 백에서 분리되는 현상을 뜻하는 것이다. 훈몽자회는 넉,넋이라
훈했는데 우리 고대말에서는 혼과 백이 그리 명백하게 분화되지 않은 듯 하다.
혼과 백이 분리되면, 혼은 제 고향인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제 고향인 땅으로 돌
아간다. 혼은 무당들이 하늘에 제식을 올리고, 백은 장례자들이 땅에 묻는 것이
다.
영은 고대인의 인체관에서 위와 상대되는 말인데, 영은 몸의 내부를 운영하는
영혈을 의미한다. 위는 몸의 밖으로부터 보위하는 위기를 의미한다. 즉, 영위는
기혈론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을 천지론적 도식으로 설명하면 역시 영은 땅이 되고 위는 하늘
이 된다.
따라서 여기 재영백은 모두 땅과 관련된 말들임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인간
의 유형의 형체를 말한 것이다. 영백을 싣는다라는 뜻은 즉 내 이 비계덩어리를
가지고 산다는 뜻이다. 그런데 반하여 여기 일이란 유형이 아닌 무형자요, 포괄
적인 도의 별쟁이다. 태일생수에서 말한 태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암암리 영혼이
땅의 함의가 강함으로 일을 하늘의 뜻으로 대비시켰다. 인간의 신적 세계를 말하
는 것이다. 능무리호?라는 것은 일이 영혼에서 떠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느냐?는
의미다. 우리는 어차피 비계덩어리를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란 이
비계덩어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이 비계덩어리와 하늘의 무형의 기운
이 같이 떠나지 않고 있을 때만 존속되는 것이다. 일이란 우주 전체, 즉 태일의
기운이다. 이 전체의 기운을 내가 끊임없이 받을 때만이 나는 생동할 수 있는 것
이다.
2. 전기치유, 능영아호
이것은 우리나라의 모든 단전호흡이나 국선도, 기공등의 원리가 다 여기 이 노
자에게서 나온 것임을 말해주는 구절이다. 전기란 기를 오로지 한다라는 뜻으로
내 몸의 기를 전이하게 집중시키는 것을 말한다. 기를 집중시킨다는 것은 단전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운영이 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특히 우리가 먹는 것, 성생활하는 것, 자는 것, 식색의 모
든 것을 깨끗하고 청결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요즈음 세태와 같이 음식점에서
화학조미료를 퍼넣고, 남의 침이 묻은 더러운 반찬을 계속 회전시키고, 그릇을
하이타이로 적당히 씻고, 온갖 유전자조작 식품으로 요리를 하는 식생활환경 속
에서는, 기를 전이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매일 아침 단전호흡학원에 나가
온갖 수련을 다해도 낮엔는 더럽게 외식하고 저녁에는 주색에 곯아보리는 상황
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전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치유다. 내
몸이 뻣뻣해진다는 것은 내 몸의 삶의 부분을 죽음의 부분이 이기고 있다는 증
표이다. 전기는 오로지 내몸이 부드러움에 이르는 현상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
는 것이다. 허리가 부드럽고, 목이나 온갖 관절이 자유롭게 돌아가며, 근육이 보
들보들하면서 탄력성이 있는 몸, 그것을 우리는 어린애와 같은 몸이라 부르는 것
이다. 노자는 묻는다. 전기치유하여 영아와 같은 몸을 유지할 수 있는가? 조선
민족이여! 늙지 말자! 항상 어린애 같은 몸을 유지하자!
3. 척제현람, 능무자호
여기 현람이란 우주적 거울을 말하는데 그것은 곧 우리의 마음을 뜻할 것이다.
백서 갑본에는 람이 람으로 되어있고, 을본에는 람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모두
자형으로 보아, 그릇에 물을 떠놓고 자기를 비추어 보는 형태의 갑골자에서 비롯
된 것이다. 장자 천도에 물의 고요함이 이와같이 맑게 비추거늘, 하물며 성인의
마음의 고요함이랴! 그것은 천지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귀감이요, 만물의 거울이
다라 한 것이 바로 노자의 구절과 상총한다 할 것이다.
척제란 우리가 세척이란 말을 쓰듯이, 내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씻어 한 티끌
도 없이 하여 만물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
기 이전에 이미 노자에게 이러한 대승기신론 등지에서 말하는 불교의 심진여상
적 총찰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아무 티끌도 없는 마음
의 거울, 그래서 끊임없이 생성하는 상도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 언
설상을 떠나고, 명자상을 떠나고, 심록상을 떠난 여여의 세계! 그것을 노자는 이
미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4. 애민치국, 능무지호
애의 본 뜻은 아낀다이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뜻은 그 사람을 아껴준다는 뜻이
다.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으로 하여금 무지무욕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백성을
무지무욕하게 만드는 당사자야말로 무지무욕하여야 하는 것이다. 백서 을본에는
능무지호가 능단이지호로 되어 있다. 백서의 표현이 원의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
다. 왕필의 주에도 능무이지호, 즉민불벽이국치지야로 되어있다.
5. 천문개합, 능무자호:
백서 을본에는 천문계합, 능위자호?로 되어 있다. 백서가 정확하다. 무자는 위
자의 오인이다. 왕필주에도 암컷이란 본시 부르는데 응할 뿐 자기가 주창하지 아
니하고, 무엇에 원인이 되어줄 뿐 자기가 능동적으로 하지 안는다. 천문이 열렸
다 닫혔다 함에 능히 암컷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은 곧 만물이 스스로
질서지우며, 그 처함이 스스로 편안해짐을 말한 것이다로 되어 있다. 암컷은 무
위의 덕성의 상징이다. 천문개합을 왕필은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하늘의 문이란, 천하의모든 것이 그것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일컫는다. 개합
이란, 다스려집과 어지러움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열렸다가 어떤
때는 닫히면서 하는 아래를 질서지운다. 그러므로 천문개합이라 말한 것이다.
왕필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여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여 이러한 추상적 주석
을 달았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제는 분명히 여성의 문제이다. 여성됨을 말
하고 있고, 이것은 분명히 여체의 변화를 빌어 유기체적 우주의 생성을 말한 것
이다.
여기서 천문이란 추상적인 말이 아니다. 이것은 여체의 부분을 말한 것이다.
하늘의 문, 그것은 여체에 있어서의 만물의 생성의 문이다. 그것은 곧 여자의 성
기를 의미한다. 문이라는 표현과 성기의 이미지와의 상응성은 리얼하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천문개합이란 바로 고대 여성들에게서는 아주 명료하게
나타났던 에스트루스 성징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배란기며, 자궁에 있어서
의 증식기와 분비기가 엇갈리는 때인 것이다. 이 때는 외음순이 도톰하게 되면서
핑크빛이 더돌고, 검으티티한 색깔이 나면서 분비물이 많아지고 사향과 같은 냄
새의 발동이 심해진다. 그리고 음순과 크리토리스가 뻑뻑해지고 뿌듯해지면서 성
욕이 발동하고 입술과 입술 사이가 더 벌어지면서 구멍이 열리는 현상이 일어난
다. 이때가 소위 말하는 천문이 개하는 시기인 것이다. 멘스트루알 싸이클에 있
어서 그 반대되는 시기가 합의 시기가 될 것이다. 여자의 몸의 천문이 개합하는
것이 곧 생성의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달의 기울고 차는 모습, 계절의 변화. 태
일생수 말대로 조습, 한열의 변화가 모두 생성의 시간이요 리듬인 것이다. 그러
한 리듬의 흐름속에서 지배적이고 조작적인 남성적인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아
니라, 포용적이며 순응적인 여성적 가치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고 노자는 우리에
게 묻고 있는 것이다. 여기의 이야기들은 노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삶의 숙제들인
것이다.
5. 명백사달, 능무위호:
명백이란 외계사물,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명철한 이해를 말하는 것이다.
사달이란 사방에 통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능무위호?란 백서 을본에 능무이지호?
로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그 뜻은 명백하게 사물을 인식하여 사통팔달하는 그
러한 경지에 도달하면서도, 지식을 사용함이 없는 그러한 순수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겠냐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런데 왕필 자신의 주에 능무이지호?로 되어 있
는데, 그 뜻은 조작적인 함으로써 하지 않는다가 될 것이다. 왕필본은 이 구절이
본시 능무이지호였을 것이다. 따라서 백서 을본과는 그 전승이 다른 것이다.
6. 생지, 축지
왕필은 생지에 대해서는 불한기원야라는 주를 달았고, 축지에 대해서는 불금기
성야라는 주를 달았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구절이 문맥의 흐름에서 너무 돌연하
게 들어와 있음으로 착간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였지만, 백서의 발굴로 과거에
착간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구절들이 제자리에 제대로 있는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생지, 축지는 결코 추상적으로 얼버무릴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것은 노자의 사상을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강령이요, 중용과 같은 기타 유가문헌
과도 연속적 관계에 있는 매우 중요한 사상을 반영하는 명구절이다. 생지란 도의
측면을 말한 것이요, 축지란 덕의 측면을 말한 것이다. 도란 보편자요, 우주적 원
리요, 상대적 언어개념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변화하는 현상 그 자체이다. 도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바로 이 세계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생성력 그 자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도의 작용은 생에 있다 생이란 곧 창조력이다. 그런데 생
에다가 갈 지자를 붙인 것은 생이 일시적 고정적 창조가 아니요, 끊임없이 진행
되는 과정임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창조적인 창조력이다. 창세기의 하
나님처럼 이 세계를 월화수목금토에 하루 하루씩 창조하고 힘이 겨워 하루를 쉬
어야 하는 그런 고정된 시점의 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창
조의 과정이다. 도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 있어라하고 명령하는 로고스가 아
니요, 말씀이 아니다. 도는 끊임없이 생성하는 우주의 과정이다. 생에 지를 붙임
으로써 그러한 진행형의 의미가 생겨난다.
그런데 덕이라는 것은 바로 개별자의 문제다. 왕필은 덕을 일컬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는 길이요 덕은 얻음이다. 얻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도라는 보편자의
생성의 모습에서 내가 얻어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도에서 내가 얻어 가지는 것,
이것을 송명 유학자, 조선조의 유생들은 분수라고 표현했다. 도라는 보편자에서
나 도올이라는 개별자가 얻어가지는 것, 그 얻음이 곧 나의 덕인 것이다.
나의 덕은 곧 내가 도로부터 분수받은 것, 내가 얻어 가진 것이다. 서양말의
이 버츄에 해당되는 희랍어는 아레테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아레테는 모든 사물
이 그 나름대로 가지는 좋은 상태를 의미한다. 이 좋은 상태라는 것은 그것이 가
지는 기능, 즉 노자가 말하는 용, 즉 특유의 기능과 관련된 말인 것이다. 이러한
기능의 훌륭한 상태, 영어로 엑셀런스라고 표현하는 바로 그 훌륭함, 좋음이 곧
덕인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말한다. 덕이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
시 축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축이란 덕을 이루는 과정이다. 그것은 내 몸에 쌓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느질 하나도 어려서부터의 축적이 없으면 그 엑셀런스에 도달할 수 없다. 밥짓
는 것 하나도 오랜 시간의 축적된 경험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축 역시 일시
의 축적이 아니요, 끊임없이 축적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그 역동적 과정
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갈지자를 붙인 것이다.
생지, 축지. 이 한구절은 노자철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적 사상을
형성하는 것이며, 노자가 말하는 무위가 단순한 함이 없음이 아니라 축지의 과정
을 통하여 도달된 훌륭함의 덕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7.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부재
버트란드 럿셀이 이 세 구절을 "production without possession," "action
without self-assertion," "development without domination" 으로 번역한 것은 이
미 소개한 바와 같다. 위이불시를 죽본에 쓰여져 있는 대로 위이불지로 고쳐 풀
이한다면, 럿셀의 "action without self-assertion,"라는 번역의 의미가 그 정확한
원의를 반영하고 있다할 것이다. 그런데 백서본에는 위이불시가 빠져있다.
8. 시위현덕
현덕하며는 삼국지의 한 주인공이 떠오를 것이다. 촉한의 건국자, 백제성의 패
주로 비운을 막게 되는 소열제, 유비! 그의 현덕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 노자 이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왕필의 주석을 한번 보라!
그 근원을 막지 아니하니 만물은 스스로 생한다. 그러니 뭔 공을 운우날 필요
가 있겠는가? 그 본성을 억압하지 아니하니 만물이 스스로 질서지운다. 그러니
뭘 기댈 건덕지가 있겠는가? 만물은 자기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족함을 얻는다.
만물은 결코 나의 주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덕은 있으면서도 주재자 하나
님이 있지 아니하니 어찌 가믈타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대저 가믈한 덕이라
하는 것은 주재함이 없이 그윽한 데서 스스로 그 덕성이 우러나오고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왕필의 주석대로 유현덕은 현덕 그 이름에 걸맞은 덕성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타인을 주재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충직하도록 부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삼고초
려란 곧 물과 같이 자기를 낮추는 현덕의 지혜다. 그래서 제갈 공명과도 같은 천
하의 지혜인을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대세는 반드시 지혜로운 자들에게
돌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논해야 할까?
십일장
삼십복공일곡
당기무, 유거지용
선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착호유이위실
당기무, 유실지용
고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
열한째 가름
서른개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으로 모인다.
그 바퀴통 속의 빔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든다.
그 그릇의 빔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든다.
그 방의 빔에
방의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있음의 이로움은
없음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설노 이 장은 노자의 빔를 말할 때, 가장 잘 인용되는 유명한 장이다. 노자라
는 서물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장 중의 하나이지만, 죽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장도 역시 그 성격이 추상적이며, 매우 이론적이라 할 때, 역시 후대에 성립
한 층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백서에는 거의 왕본과 동일한 형태로 실려 있
다. 이 장의 대강의 뜻은 이미 넷째가름에서 허를 말할 때 충분히 논술한 것이
다. 넷째 가름을 안본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가름을 읽고 이 장을 읽어야 할 것
이다.
1. 삼십복공일곡, 당기무, 유거지용 :
평소 이 구절은 내 머리속에 명료한 그림을 그려놓지 못했다. 그 다음에 나오
는 말들이 모두 삶의 공간을 의미하는데, 수레의 공간이라고 하면 일차적으로 사
람이 타는 곳을 생각하게 될 것 같은데, 이 문장은 전혀 그런 주제를 다루고 있
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요즈음 내 생각으로는 "유거지용"의 거는 실제적으로
"수레바퀴"의 의미로 새겨야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복"이란 수레의 바퀴살이다. 지금도 자동차는 우리 삶의, 없어서는 아니되는
주요한 주제를 형성하는 이기다. 그리고 자동차는 자기 삶의 모습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자기 삶의 생활방식이나 습관에 따라 자동차모델이 선택된다. 그리고 자동
차는 한사람의 부나 권력의 표상이다. 초라한 소형 자동차! 삐까버쩍하는 대형
자동차! 액센트와 에쿠우스는 역시 크나큰 신분의 거리가 있다. 이러한 상황은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중국고전에는 수레에 관한 이야기가 매우 많이 나온다.
그것이 언급되는 상황도 다양하다. 그런데, 이 수레에 대한 관심은 모두 바퀴에
모아져 있다. 그리고 이 수레의 가장 핵심적 부분이 바로 이 곡이라는 것이다.
이 곡은 많은 바퀴살이 박히는 자리요, 또 축이 끼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데 현실적으로 한 바퀴의 살이 30개라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가 어
렸을 때 본 달구지, 똥구루마를 연상하면 살이 열 개정도면 끽일 것이다. 오늘
자전거 바퀴의 살 개수를 생각해봐도 육중한 수레의 바퀴 살이 30개라는 것은
좀 쉽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터졌다.
진시황! 육국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고 동아시아역사에 가장 거대한 제국을
세운 정! 13세에 진왕이 되었고 38세에 황제에 등극한 그는 인간적으로 아주 고
독한 사나이였을지도 모른다. 하남의 대상인 여불위가 사랑하는 애첩에게 임신시
켜, 몰래 자초의 부인으로 들이어 정을 낳았음으로, 진시황의 실부는 여불위였다.
여불위는 이러한 음모로 상국이 되었고 중보라 불리울 정도로 온갖 권세를 걸머
지었지만, 결국 진시황은 실부 여불위에게 자살의 독배를 마시게 해야만 했던 것
이다. 아마도 진시황은 여불위가 자기 실부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 고독한 사나이는 지상의 모든 세계를 정복했다. 그가 정복해야 할 마지막
세계는 죽음의 세계였다. 그는 죽음의 세계, 저 지하의 세계에 또 하나의 제국을
건설했던 것이다.
1974년 3월 29일, 섬서성 서안시 남쪽 자락에서 양지발이라는 한 시골청년이
극심한 가뭄 때문에 물을 얻고자 내리친 곡괭이의 운명이, 그 어마어마한,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진시황의 암흑의 세계의 모습을 두 밀레니엄 후
에나 빛의 세계로 드러내게 한 것이다. 그 장쾌한 태용의 모습은 내가 여기 새삼
언급할 계제가 아니다.
진시황은 천하 사방을 순행하였다. 결국 그는 다섯번째 순행길에 죽었다. 그는
어떠한 수레를 타고 다녔을까? 발굴팀의 관심은 도용에서 수레로 옮아갔다. 1980
년, 진시황제의 묘가 있는 서쪽에서 드디어 두 개의 수레가 발견되었다. 동으로
만든 사두마차 두 개가 발견되었는데 흙더미의 압력에 일그러져 1500개 이상의
조각으로 부서져 있었지만, 그 온전한 형태의 복원이 가능한 상태로 묻혀 있었기
때문에 2천여년이 지난 오늘 그 정교하고도 찬란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 것
이다. 앞에 잇는 1호 동거마는 좌식의 승객수송차의 모습이다. 그것은 실물싸이
즈의 반으로 축소제작된 것인데 그 실물의 모습을 매우 정교하게 구현하고 있다.
1호 동거마의 경우, 놀이가 1.68m, 말을 포함한 전체 길이가 2.25m에 이른다. 이
전차 안에는 많은 무기들이 실려있었는데 이것은 황제호위의 기능을 하였던 전
차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이 두 동거마의 수레바퀴에 집중된다. 두
수레가 모두 놀라웁게도 정확하게 30개의 살이 일거에 박혀있는 모습을 과시하
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노자』의 문헌적 언금이 결코 허언이 아닌, 당대의 실
제 기물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임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주나라의 문물제도로서 수레바퀴가 30개의 바퀴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여
러 문헌에서 언급되어 왔으나, 실제 30개의 살이 하나의 살통에 박힌 실제상황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진시황릉의 동거마는 고대문헌의 언급이 결
코 관념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그 정교한 모습이 우리의 찬
탄을 금치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30개의 살이란 한달을 30일 기준으로 생각한 월륜의 시간을 의미한다. 즉 수레
바퀴는 시간의 수레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는 "연륜이
쌓인다"는 식의 표현도 바로 바퀴를 시간의 상징으로 생각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인도문명에서도 짜끄라는 태양의 수레의 바퀴를 의미하며, 곧 시간의 수레바퀴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슈누 신의 원반형의 무기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적진
에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분쇄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전륜성왕의 이미
지와 결부되어, 인간의 번뇌를 좌파시키는 지혜의 상징으로 쓰였고, 또 불교에서
는 석존이 설파한 법이 위광을 가지고 인세에 퍼져가는 모습을 상징하는 법륜으
로 쓰였다.
그러나 노자의 관심은 참 해괴한 곳에 있었다. 30개의 바퀴살이 한 개의 바퀴
살통에 꽂힐려면 그 바퀴살통의 속이 비어있어야먄 한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
빔의 지혜를 하필이면 살통의 속의 빔에서 찾으려 했는지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노자는 바로 그 곡의 속의 빔에 곧 수레의 쓰임이 있다고 보았는데, 내가 생각
하기에 이때의 수레란 곧 바퀴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 허가 있기 때문에 삼십복
이 곡을 공유할 수가 잇고, 또 그 빈 곳으로 축이 지나갈 수 있어 수레전체의
"굴름"이란 현상이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왕필은 이를 주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살통이 30개의 살을 능히 통일할 수 있는 것은 그 빔 때문이다. 그 빔으로써
사물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능히 적음으로써 많음을 통어
할 수 있는 것이다.
왕필에게 있어서는 살통의 의미가 살을 통괄한다고 하는 기능에 포커스가 맞
춰져 있고, 그 기능을 그 원심의 빔으로 본 것이다. 이것은 마치 논어, 위정에 북
극성이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면 모든 별이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라고 한 의
미롸 상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십복이 일곡을 공유한다고 하는 것은 곧
그 곡의 중심의 빔의 자리가 삼십복을 돌리고 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것
이다. 그 곡의 중심의 빔은 무의 세계요, 삼십복은 곧 시간의 변화선상에서 현상
하고 있는 유의 세계의 상징이다.
2. 석식이위기, 당기무, 위기지용
선이란 우리말로 이긴다, 빚는다의 뜻이다. 식이란 찰흙이다. 도자기를 만들 수
있도록 가공된 최후의 흙을 도공들은 질이라고 부른다. 식은 곧 질을 기리키는
말일 것이다.
여기서 무는 없음이 아니라, 허를 의미한다. 그 무를 당하여, 기의 용이 있다고
했으니,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얻는다.
없음은 곧 빔이요, 빔은 곧 있음의 쓰임이다.
3. 착호유이위실, 당기무, 융실지용
호는 자형을 보아 쉽게 알 수 있듯이 여닫이 문의 반쪽이다. 그것이 두 쪽이
다 갖추어지면 문이 된다. 유는 창이다. 호는 door로 유는 window로 영역될 것
이다. 착은 원래 끌질하다는 동사이다.
4. 고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
있음의 이됨은 없음의 용됨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동양인들이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모든 존재는 존재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
라, 그것의 이로움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로움은 없음의 쓰임 때문인 것이다.
이 장은 전체적으로 허의 존재론인 동시에 도의 생성론을 말하는 매우 이론적
인 장으로서 잘 인용되고 있으나, 그 성격으로 보아 후대에 정리된 느낌이 강하
다 할 것이다.
십이장
오색영인목맹
오음영인이농
오미영인구상
치빙전렵영인심발광
난득지화영인행방
시이성인위복불위목
고거피취차
열두째 가름
갖가지 색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하고
갖가지 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하고
갖가지 맛은
사람의 입을 버리게 한다
말달리며 들사냥질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든다.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행동을 어지럽게 만든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배가 되지 눈이 되질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설노 말초감각을 자극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에 대하여 이처럼 통렬
한 비판의 소리는 듣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이장의 언어를 대할 때, 쉽사리 이 장이 죽간에는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상정을 할 수 있다. 왠가? 오색, 오음, 오미등의 벌써 정식화된 표현은 죽간시대
의 표현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오행학파의 성립시
기와도 관련되는 문제일 수도 있다. 즉 오색, 오음, 오미 등의 표현은 오행사상의
팽배해진 시대의 사고구조의 소산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죽간의
시대에 이미 오행론이 성립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행론은 음양
론보다도 성립시기가 늦은 전국말기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당대에 유행
한 오행론의 신봉자였다.
오색은 문자 그대로 다섯 색으로 번역하면 아니된다. 그것은 인간의 시각을 자
극시키는 모든 색깔이다. 현란한 강남여자들의 옷을 연상하면 쉬벡 이해될 것이
다. 오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한다. 실제로 요즈음 젊은 아이들은 하루종일 귀에
다 레시바를 꽂고 살고 있다. 무엇을 해도 그 오음의 자극을 테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인체의 반응은 점점 무디어져 감으로 자극은 날로 날로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뻔하다. 고막의 손상이나 파열이 초래되는 것이다. 참으로 어리
석기 그지없는 세태인 것이다. 오음! 맛도 요즈음의 세태는 답백의 묘미를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 그래서 마늘, 파, 생강, 고추, ... 과도하게 자극적인 양념은 날
로 날로 강화되고, 게다가 온갖 화학조미료가 판을 치는가 하면, 음식점에서는
사람들의 맛을 길들이기 위해 짜게하고 들큰하게 설탕을 치게 마련이다. 왜 우리
나라 음식들은 그다지도 담백하고 깨끗하고 청초한 맛을 잃었는가? 왜 그렇게도
들척지근하고 니길니길하고 맵고 짜고, 화학조미료로 혓바닥을 도배질해서 뒷골
이 쑤시게 하고,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쑤아하게 허화가 뜨는가 하면, 입안에서
는 오만가지 더러운 시궁창 냄새가 뱃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는가? 우리나라 식품업계의 맹렬한 반성을 촉구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외식
업소문화의 통렬한 반성을 촉구한다! 과연 그대들은 그대의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음식들을 손님들에게 팔고 있는가? 과연 그대들은 손님들의 건강을
나의 건강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나라 음식점의 더러움이란 이루
다 형언 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 온갖 오미의 잔치를 연출하여 돈만 긁어대면 그
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치빙전렵령인심발과! 치빙은 말달리기다. 전렵은 사냥이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도 오늘날과 같은 스피드의 자극은 여전한 것이었다. 중국말로 빨리오라는 말은
마상래라고 한다. 이때 마상이란 fast라는 부사이지만, 그것은 직역하면 말타고라
는 의미다. 말을 타고 달리는 기분!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체게 만들기에 충분
하다. 더구나 전렵의 취미 또한 사람을 끊임없이 미치게 만든다. 아마도 치빙전
렵이라는 이 장의 표현은 요새말로는 오토바이 폭주족이나 스포츠카, 레이스타의
광란, 고스톱, 카지노, 경마, 증권... 이 모든 자극과 스릴과 스피드와 도박의 광란
을 총칭하는 말일 것이다.
난득지화 역시 사람의 행동을 묘연하게 만든다. 라스포사의 비싼 옷이 이토록
한 나라의 정국을 뒤흔들줄이야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평소때는 연루된
당사자들도 건전한 상식을 가질 수 있는 인테리들이요, 교양있는 사람들일 것이
다. 그런데 어떻게 그토록 그들의 행동이 어지러워질 수 있었겠는가? 끊임없이
난득지화를 산출하고 그러한 가치속으로 휘말리는 것을 조장시키고 있는 우리
문명의 가치에 대한 근원적 반성을 노자는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배가 될지언정, 눈이 되질 않는다. 이것은 또 뭔말인가? 이
미 우리는 3장의 허기심, 심기복에서 심과 복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또
다시 복이 목과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제2장의 아름다움과 추
함을 말하는 자리에서 우리의 시각 중심의 인식구조의 허망함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복과 콘트라스트를 이루는 목이란 불교의 용어로 말하자면 제1식에 해
당되는 것이다. 제1식은 인간의 8식 중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직접적이며 가
장 또렷하고 가장 즉각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하기에 가장 에러의 가능
성이 높고, 가장 이 세계를 왜곡되게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왜곡을 환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환유요, 환유요, 환작이요, 환술이요, 환염이요,
허환이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서 인식하는 대표적인 작위다. 지나가
다 놓여있는 새끼줄이 뱀으로 꿈틀거리기도 하고, 세워놓은 때묻은 빗자루가 도
깨비로 변하여 나와 씨름을 벌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제1식의 천박함
에서 비록되는 것이다.
그러한 눈의 인식에 비한다면 배의 인식은 보다 근원적이요, 보다 막대하며,
보다 무차별적인 것이며, 보다 지속적인 것이다.
노자의 최종적 결론은 이러하다. 거피취차!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 저것
이란 나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다. 이것이란 나에게서 가까이 있는 것이다. 여기
서 저것이란 눈이요, 이것이란 배다. 저것은 나에게서 멀리 있는 모든 것이요, 이
것은 나에게서 가깝게 있는 모든 것이다. 저것이란 플라톤적인 관념이요, 가도지
도요, 피안적인 모든 이상이다. 이것이란 항상 변화하는 이 세계의 생성이요, 상
도의 세계며, 피안적인 모든 현실이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 이것은 동
양인의 실천주의적 삶의 가치의 전범인 것이다. 그리고 노자적인 실용주의 가치
관의 구호인 것이다. 나는 노자적인 실용주의를 미국의 프래그머티즘과 구별하여
프랙티칼리즘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러한 노자적인 프랙티칼리즘의 구조속에 이
미 금강경의 대승적 지혜가 마련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피안이니 차안이니
하는 불교용어도 바로 이 12장의 거피취차의 피,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피안 그 자체를 부정하고 차안의 현실을 긍정하는 대승의 지혜도 이 12장의 노
자철학의 구조속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번뇌의 이 현실이 바로 저 보
리의 깨달음인 것이다. 보리가 곧 번뇌요, 번뇌가 곧 보리인 것이다. 이 말은 곧
번뇌의 현실 속에 깨달음이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리의 저 피안을
버리고, 번뇌의 이 차안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번뇌즉보라고 하는 대승불교의
핵심적 사상이 이미 노자의 거피취차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왕필은 말한다.
배가 된다고 하는 것은, 사물로써 자기 몸을 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눈이
된다고 하는 것은, 사물에 자기 몸이 부림을 당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
로 성인은 눈이 되지 않는다.
그 얼마나 함축적인 통찰인가!
십삼장
총욕약경,
귀대환약신
하위총욕약경?
총위하
득지약경, 실지약경
시위총욕약경
하위귀대환약신?
오소이유대환자, 위오유신
급오무신, 오유하환!
고귀이신위천하, 약가기천하
애이신위천하, 약가탁천하
열셋째 가름
총애를 받으나 욕을 받으나
다같이 놀란 것 같이 하라.
큰 걱정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총애를 받으나 욕을 받으나
다같이 놀란 것 같이 하란 말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총애는 항상 욕이 되기 마련이니
그것을 얻어도
놀란 것처럼 할 것이요,
그것을 잃어도
놀란 것처럼 할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총애를 받으나 욕을 받으나
늘 놀란 것 같이 하라 한 것이다.
큰 걱정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몸과 같이 하란 말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나에게 큰 걱정이 있는 까닭은
내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이 없는데 이르르면
나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기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천하를 귀하게 여기는 자에겐
정녕코 천하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몸을 아끼는 것처럼
천하를 아끼는 자에겐
정녕코 천하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설노 항우에게 패잔의 고배를 마시게 한 한고조 유방의 서자 유장의 아들 중
에 유안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러니까 한고조 유방의 손자인 셈이다. 그 아버
지 유장은 모반을 일으켜 유배당하는 도중 죽었다. 그 10년 후 유안은 아버지의
영토 일부를 계승받아 회남왕이 되었다.
이 회남왕 유안은 대단한 박학지사였으며 문필의 재능이 뛰어났다. 그래서 이
회남왕 주변으로는 많은 문인과 임협지사들이 모여 들었다. 형초의 구문화를 보
수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이 회하유역의 화님왕국에 모여든 이들은, 대부분이 한
제국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참여할 수 없었던 비판적 지식인들어었고, 통일제국의
체제 그 자체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방외인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육교를 중심으로 춘추제가의 잡학을 통일시키려는 패러다임에 반대하여, 기본적
으로 도가사상을 중심축으로 해서 제자백가의 잡학을 통일시키려는 모종의 틀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남긴 책이 유명한 회남자라는 희대의 서물이다. 회남자는
노자철학의 한 역사적 발전이다.
이 책의 인문훈이라는 데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대저 화가 나에게 오는 것도 내가 스스로 그것을 생하게 한 것이요, 복이 나에
게 오는 것도 내가 스스로 그것을 이룬 것이다. 화와 복이란 본시 한 문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리고 조금 지나가면, 근한상지인, 유선이자...라는 구문으로 시작되는 한 고사
가 나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말하고 있는 새옹지마라는 관
용구의 출전이다. 인간만사새옹마라는 표현도 있고, 새옹실마라 하기도 하고, 새
옹득실이니, 새옹화복이니 하는 등등, 다양한 표현이 쓰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새옹은 고유명사처럼 되어 버렸지만 본시 고유명사는 아니다.
어느 변경요새에 살았던 세상을 달관한 늙은이라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새
옹이야말로 바로 이 노자 13장의 정신을 구현한 한 역사적 늙은이였던 것이다.
이 새옹은 말을 잘 길렀다. 그리고 아주 사랑하는 애마가 한 마리 있었다. 그
런데 어느 날 이 애마가 홀연히 국경넘어 오랑캐 땅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것을
안 동네사람들이 그가 크게 상심하리라고 생각하여 애통한 마음으로 위문을 왔
다.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그러나 새옹은 조금도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곤 태연하게 다음과 같
이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화가 내일의 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요, 지금의 슬픔이 어찌 곧 기쁨이
라 말할 수 있지 않으리오?
수개월이 지났다. 새옹의 예언대로, 그 잃어버린 말이 북방 오랑캐지역의 아주
훌륭한 준마를 한 마리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잔치분위기
였다. 모두 들뜬 가슴을 안고 노인에게 경하를 하러 몰려왔다. 그러나 그 노인은
조금도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곤 또 차분히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
다.
오늘의 복이 내일의 화가 될 수도 있는 것, 지금의 기쁨이 어찌 곧 슬픔이라
말할 수 있지 않으리오?
그 새옹의 집엔 외아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말을 잘 길렀기 때문에 그는 말타
기를 좋아했다. 새로 들어온 준마는 그에겐 너무도 싱싱한 매력이었다. 그 외아
들은 어느 날 준마를 타고 달렸다. 그러다가 그만 낙마를 하고만 것이다. 비골이
크게 부러져 영영 다리병신이 되고 만 것이다. 온동네가 상갓집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모두 찾아와 노인의 슬픔을 위로했다. 그러나 새옹은 조금도 슬
픈 표정을 하지 않았다. 그리곤 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화가 내일의 복이 될 수도 있는 것, 지금의 슬픔이 어찌 곧 기쁨이라
말할 수 있지 않으리오?
그리곤 일년이 지났다. 그런데 변경의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들어왔다. 대 전
쟁이 벌어졌고, 장정이란 장정은 모두 징발되어 나갔다. 그리고 열 중 아홉이 목
숨을 잃었다. 그러나 새옹의 외아들은 다리병신이었기 때문에 징발되지 않았고,
부자가 다 제명을 보전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그래서 회남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복이 화가 되고 또 화가 복이 되는 것은, 그 변화가 불측하여 그 끝
을 알 수가 없고, 그 이치가 깊고 깊어 이루 다 헤아릴수가 없다.
이 새옹지마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미 다 아는 이야기라고 쉽게 흘려 버릴 수
있는 한 고사가 아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의 미래는 한치도 앞을 내
다볼 수 없는 상황이 많다. 참을 수 없는 불운한 처지에 이유없이 당하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고, 또 그러한 고통과 불운 속에서 예기치 못한 행운과 기쁨을 만날
수도 있다. 세속적으로 엄청난 행운과 성공을 거둔 자의 삶의 순간에 이미 불운
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새옹지마의 고사는 기본적으로 노자 13장의 총욕약경을 배경으로
해서 생겨난 것이다. 행운과 불운에 대해 다 놀란 것 같이 하라는 것이다. 그런
데 이 구절의 이해에 있어서 우리가 매우 조심할 것이 있다. 신약성서에 보면,
환난을 극복한다든가, 의를 위히야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든가, 나로 인하
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이 이와 같이 핍박당하였다는 등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노자가 말하는 총욕약경이란 오늘의 환난을 내일의 영광으
로 이끈다고 하는 역경극복의 노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사고야말로 서구적 가치관의 대표적인 것이고, 또 오늘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
분의 삶의 태도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팽배된 기독교
적 가치관 속에서는 오늘의 이승에세의 고난을 잘 참아내면 내일의 저승에서의
영광과 보상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식의 고난극복 태도도 우리 삶에서
꼭 배제되어야 할 가치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구인과 요즈음 한국인의 생각
은 너무도 천박한 것이다.
내일의 보상이 있기 때문에 오늘의 고난을 인내하고 극복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기기만적인 편협한 생각이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의 설교의 수준이 여기에 머무
르고 있는 것이다. 회남자의 첫 머리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불교가 중국에 들어
오기 전의 중국적인 생각인 것이다.
오늘의 나의 고난 자체가 가만히 잘 생각해보면 내가 스스로 지어낸 고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진짜 고난이 아닐 수도 있다. 순교자가 순교를
당하는 상황도 어찌보면 자기가 스스로 자초한 연극적 상황일 수도 있다는 것이
다. 물론 나는 지금 순교자 개인의 진실을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총욕약경이란 이 천하의 명언은, 나의 환난과 나의 영광 그 자체에 대한 나의
분별적 인식을 해소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새옹의 담담한 인생자세이
다. 말을 잃어버리나 말을 얻으나, 복을 얻으나 복을 잃으나, 다 그것을 화, 복이
라는 인간의 가치술어로 이해하고 즐거워하고 애통해하지 않는 삶의 담박한 자
세인 것이다. 총욕약경이란 바로 노자 2장의 가치론에서 이미 연역되어 나오는
가치관인 것이다. 즉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곧 추함일 수도 있고, 선이
라고 생각하는 것이 곧 불선일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유, 무니, 난, 이니, 장, 단
이니 하는 따위의 우리의 상대적 개념 자체가 상보적 관계로서 파기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불운이니 행운이니 하는 따위가 근원적으로 우리 인식의 개념적 조작
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노자의 이야기를 근원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인생에서 오히려 많은
환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우리가 환난을 당했을 때 먼저 체크해봐야
할 것은 과연 이 환난이 진정으로 환난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관념이 만
든 픽션이 아닌지? 대립하고 싸우기 이전에, 한발작 물러서면 아무것도 아닌 시
시한 이야기가 되어벌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자의 지혜요, 구약
의 욥의 지혜다. 욥은 터무니없이 억울한 환난도 근원적으로 환난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욥기의 지혜문학도 순순하게 노자적 관점에서 해석되
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혜는 극기가 아니다. 지혜는 극기의 기 그 자체를 근원적
으로 해소시키는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한다.
내가 몸이 없는데
나에게 무슨 환난이 있으리오?
여기 무신이라 함은 나중에 불교문학에 있어서는 물론 무아로 이해되었지만,
도가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연단류의 신체단련과 관련된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무신이라 할 때의 신은 기본적으로 부귀공명을 추구하는 욕망의 주체로
서의 신이다. 이 신을 단련하여 무지무욕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근원적으로 나의
삶의 환난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선지자나 예언자나 순교자의 진실도 때로는
그것이 자신의 욕심에서 기인된 환난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진리를 우리는
버려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자는 말한다. 천하를 내 몸과 같이 귀하게 여기고 아끼는 자에게
는 천하를 맡길 수 있다. 오늘날의 정치인들에게 한번 물어보자! 과연 그대들은
그대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자체를 내 몸처럼 아끼고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여기 몸이 없다와 몸을 아끼고 귀하게 여긴다는 상충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은 노자에게서는 동일한 언어다. 내 몸이 없어지는 것이
곧 내 몸을 아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큰 환난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이 말에 대해 내개 할 말이 있다. 나는 평생을 관절염과 더불어 살았다. 내가
생각이 얕은 기독교 신자였을 때는 나는 항상 주님께 기도하고 매달렸다.
오 주여! 이 환난을 극복할 힘을 주소서! 주님께서 이 나의 고통을 치유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당신의 종이로소이다. 아멘!
그러나 내가 노자를 난나고 나서부터는 내 기도가 달라졌다. 더 이산 나는 나
의 관절염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관절염이라는
나의 신체현상을 내가 정복해야할 대상으로 대적시하지 않게 되었다. 관절염이야
말로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고 가장 대접해야 할 위대한 친구라는 것을 발견하
게 된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오른쪽 무릎이 심하게 시리다. 평
생을 이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나의 관절염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리하면 언젠가 서서히 관절염은 소리없이 사라질 것이다. 30년 이상
나를 괴롭혔지만 그 위대한 나의 친구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의 모습은 존재하
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관절염이야말로 나의 모든 낙관과 비관과 열정과 통찰과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 귀한 친구가 없었더라면 나는 평범한 건강인이 되었을지
는 몰라도 오늘과 같이 깊은 통찰의 지혜를 만인과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는 도
옥 김용옥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의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의 고통과 환난과 아픔을 극복하려하지 말라! 그
것을 내 몸과 같이 귀하게 여기어라!
본 장은 백서에도 있고 요번에 출토된 곽점죽간에도 거의 온전한 상태로 들어
있다. 뜻의 큰 변화가 없어 죽간이나 백서의 해석을 생략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바로 이 13장이야 말로 노자라는 텍스트의 가장 오리자날한 성격을
대변한다는 사실이다. 노자는 원래 이러한 양생의 지혜로부터 출발한 서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재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십사장
시지불견, 명왈이
청지불문, 명왈희
박지부득, 명왈미
차삼자, 불가치힐
고혼이위일
기상불교
기하불매
승승불가명, 복귀어무물
시위무상지상, 무물지상
시위홀황
영지불견기수
수지불견기후
집고지도, 이어금지유
능지고시
시위도기
열넷째 가름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라 하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미라 한다.
이, 희, 미 이 셋은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로 삼는다.
그 위는 밝지 아니하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아니하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데
이름할 수 없도다.
다시 물체없는 데로 돌아가니
이를 일컬어
모습없는 모습이요
물체없는 형상이라 한다.
이를 일컬어
홀황하다 하도다.
앞에서 맞이하여도
그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에서 따라가도
그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옛의 도를 잡어
오늘의 있음을 제어한다.
능히 옛 시작을 파악하니
이를 일컬어 도의 벼리라 한다.
설노 이 장은 노자 전 텍스트 중에서도 아주 이론적이고, 매우 인식론적이며,
형이상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주 깊이 있는 장이다. 이런 장이 죽간에 있겠
는가, 없겠는가? 물론 이 14장은 죽간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백서에는 거의
그대로 다 들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장의 깊이를 사랑한다. 노자철학을
만들어 간 사람들의 아주 조직적인 통찰력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이 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꼭 알아야 할 고사가 하나 장자라는 책에 실
려있다. 몰론 장자의 이런 고사도 노자의 14장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생겨난 것
임을 우리는 쉽게 알아 차릴 수 있다. 동양인의 인식론, 그리고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중국인들에게 고유했던 인간의 세계인식방법, 그리고 인간의 감관에
대한 생각의 전형을 이 고사를 통해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장자의 내복의 제일
마자막 편인 제7편 응제왕이 끝나는 부분에 이 혼돈의 고사가 자리잡고 있는 것
이다.
보통 현재 우리 한국말로 혼돈이라고 하면, 어지럽고 정돈안되고 정보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혼돈스럽다는 것은 즉 무질서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중국고
전, 특히 도가 계열의 책속에서 이 혼돈이라는 말은 그렇게 부정적인 맥락에서
쓰인 말이 아니다.
희랍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질서있는 세계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코스모스
라는 말은 피타고라스가 제일 먼저 사용했는데, 그것은 수학적 비례의 질서, 조
화를 갖춘 세계라는 뜻이었다. 바로 이러한 코스모스에 반대되는 말이 카오스이
다.
그런데 사실 카오스라는 의미는 희랍인들의 세계관에 있어서도, 그것은 단순한
무질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코스모스가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 즉
규정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희랍인들은 카오스의 상태보다, 물론 가치론적으로 코스모스의 상태를
더 우위에 놓는다. 희랍인들은 카오스에 대해서 코스모스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
런데 노자는 기본적으로 코스모스보다 카오스를 더 사랑하는 것이다. 노장사상은
한마디로 카오스의 철학인 것이다. 희랍인들이 말하는 카오스가 바로 장자에게서
혼돈이라는 말로 나타나고, 그것은 일반명사가 아닌 신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거대한 바다, 태일생수가 말하는 물의 세계! 저 남쪽 바다에는 숙이라는 이름
의 신이 살고 있었고, 저 북쪽바다에는 홀이라는 이름의신이 살고 있었다. 그런
데 남, 북을 가릴 수 없는 그 중앙 한가운데 혼돈이라는 신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 홀과 숙이 혼돈신의 땅인 중앙에서 만나 놀게 되었다. 그런데 중앙의 신인
혼돈이 이 홀과 숙을 극진하게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홀과 숙은 어떻게 이 혼돈
신의 융숭한 대접에 보답할 수 있는가를 의논하였다. 그들은 기나긴 숙고 끝에
아주 기발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본시 사람들은 얼굴에 일곱구멍이 있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먹을 수 있
고, 숨쉴 수 이다. 그런데 혼돈신에게는 이러한 구멍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생
각해낸 것이다.
여기 일곱구멍이란 눈구멍 두 개, 귓구멍 두 개, 코구멍 두 개, 입구멍 하나를
뜻한다. 이것은 중국인들이 생각한 시각+청각+후각+미각의 감각기관을 총칭하는
것이다. 즉 희랍인들이나 인도인들은 인간의 감관을 안, 이, 비, 활, 촉의 5관이라
고 개념적으로 생각했지만, 중국인들에게는 5관이라는 개념대신 일곱구멍이라는
내, 외 통로개념의 현상적 인식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홀과 숙은 혼돈의 신에게, 자기들이 감관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미루어, 일곱구멍을 선사하는 것이 최대의 보답 선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곱구멍을 뚫어주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일곱구멍을 하루에 한꺼번에 뚫
게되면 무리가 될 것 같아, 하루에 한 구멍씩만 뚫기로 했다. 드디어 하루에 한
구멍씩 뚫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구멍씩! 하루에 한 구멍씩! 자아 어떻게 될까?
중앙의 혼돈의 신은 이제 뭇 인간이 누리는 감관의 쾌락을 누릴 수 있게 될 것
인가? 드디어 구멍이 열릴 것인가? 모든 구멍이 다 열린 일곱째날, 혼돈은 죽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이 위대한 장자의 신화의 마지막 말이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첫말 빛을 둘째날 하늘을, 셋째날 마른 땅과 푸른 움을, 넷
째날 밤과 낮을, 다섯째날 물고기와 새를, 여섯째날 온갖 짐승과 사람을 창조하
셨다. 그리고 일곱째날은 편안히 쉬셨다.
이 장자의 설화가 말하는 일곱구멍의 창조는 거의 창세기의 창조신화와 맥을
같이 한다. 일곱구멍을 뚫는다 함은 곧 일곱구멍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세계의 창
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세기 신은 일곱째날 편히 쉬셨는데, 응제왕의
혼돈의 신은 일곱째날 죽음을 맞이했다. 즉 코스모스의 창조는 카오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코스모스의 질서의 탄생의 기쁨이 아닌 혼돈의 죽음
의 비극적 장송곡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남해, 북해에 대하여 중앙이란 설정부터가 재미있다. 이 중앙은 바로 우
리가 논의해온 허, 즉 무위적 질서의 상징이다. 중앙이란 곧 무규정성을 의미하
는 것이요, 무한한 가능태를 의미한다. 중앙의 혼돈의 신에게 일곱구멍이 없다는
것은, 곧 일곱구멍으로 파악되는 코스모스 이전의 어떤 원초적 카오스가 그에게
충만한 가능성으로서 생동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남,
북의 규정된 신들은 그에게 바로 그 규정성의 상징인 일곱구멍을 선사하기로 마
음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일곱구멍의 뚫음은 곧 카오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
이다. 여기서 장자나 노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감관의 인식이 얼마나 편
협한 것인가를 말하려는 것이다. 감관적 세계의 거부! 그리고 혼돈의 질서에로의
회귀를 이 신화는 강력히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바로 이 칠규
의 비극인 것이다. 그리고 노자가 말하는 도의 세계는 이러한 칠규의 한정성이나
욕망 이전의 진실임을 명료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혼돈신의 세계야말
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이, 희, 미의
세계인 것이다. 이, 희, 미는 그 의미상으로 보면, 튀쳐남이 없이 평탄하고, 희박
하고 가믈가믈하며, 미묘하다는 뜻을 내포하지만, 이 세 글자가 모두 같은 음을
밟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이희미의 세계야말로 가믈가믈하고 미묘
한, 명료한 인간의 감관인식이 미칠 수 없는 그 이전의 혼돈의 상태인 것이다.
이는 무색의 세계며, 희는 무취의 세계며, 미는 무형의 세계인 것이다.
1. 차삼자, 불가치힐, 고혼이위일
이, 희, 미 삼자의 세계는 치힐될 수 없다. 그것은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는 것
이다. 여기 치힐이란 카오스는 지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이다. 그것은 분명 현대 영미분석철학적인 논리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
다. 그것은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침묵의 세계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은 침묵의 세계를 비판하는 사상가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애호하는 사상가인 것
이다. 비트겐슈타인이야말로 20세기 도가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희미 3자는 하나하나 분석되어 따져질 수 없음으로, 그것을 뭉뚱그려 하나로
만든다라고 했을 때 뭉뚱그린다라는 단어가 바로 혼돈의 혼자인 것을 생각하면
혼돈신화의 배경을 잘 알수 있을 것이다. 하나로 만듬의 하나는 곧 중앙이요 혼
돈이다. 그것은 우리의 개념적 인식으로 분석되기 이전의 온전한 전체인 것이다.
하나가 곧 도요, 그것이 곧 태일생수의 태일인 것이다.
2. 기상불교, 기하불매
주역 계사에 형이상자와 형이하자라는 말이 나온다. 아마도 여기의 기상, 기하
라는 표현은 계사의 형이상자, 형이하자와 같은 맥락의 말일 것이다. 그러나 우
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기상, 기하는 도라는 물체가 있고 그위, 그 아래라는 뜻
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라는 일은 전체며, 전체는 곧 그밖의 상, 하라는 개념을
거부한다. 따라서 상, 하는 도라는 일자내의 사태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
다. 그렇다면 도내의 상, 하의 구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 상은 분명히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세계며 따라서 어두울 것이요, 그 하는 분명히 우리에게서 가까이 있
는 세계며 밝을 것이다.
그러나 상은 어둡고, 하는 밝다라고 하면 이러한 표현에 있어서는 상과 하의
이원적 분할이 일어나 버린다. 이러한 이원적 분할을 막는 표현은 바로 양자를
엇물리게 하는 부정의 방법으로 양자를 비실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표현은 이와 같이 바뀐다.
이러한 방식으로 노자는 철저하게 이원론의 오류를 피해가고 있는 것이다.
3. 승승불가명, 복귀어무물
그 위가 밝지 않고, 그 아래가 어둡지 않은 도는 시공의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
요, 이 시공의 전체란 하나의 연속태이다. 그것은 스페이스, 타임 콘티니엄이며,
그것은 라이프 콘티니엄이다. 이러한 콘티니엄을 노자는 승승이라는 시적은 언어
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승승이란 새끼줄이 계속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모습이
다. 이미 6장 곡신불사장에서 면면이라는 말로 언급한 적이 있다.
연속체는 존재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공의 구현의 가능태이며 궁
극적으로 인간의 개념적 언어로 이름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연속태는 구체적 물적 존재의 연속이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무물이다. 다석
선생은 무물을 없몬이라 번역하셨는데, 좀 억지스러운 우리말 번역이다. 무물이
란 구체적 물상이 근원적으로 해소되는 모든 물의 가능태이다.
4. 시위무상지상, 무물지상
이를 일컬어 모습없는 모습이요, 물체없는 형상이라 한다. 무장지장, 무물지상
이라는 표현은 노자의 파라독스를 잘 표현하는 말로서 너무도 잘 인용되고 있다.
모습이 없으면 모습일 수 없다. 그런데 노자는 모습없는 모습을 말한다. 물체가
없으면 형상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노자는 물체없는 형상을 말한다. 그것은 모
습이 없다 말할 수도 없는 것이요, 모습이 있다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모습이
없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모습이요, 그것이 곧 모습이 있는 것이다. 모습이 없
는 것이 곧 모습이 있는 것이요, 모습이 있는 것이 곧 모습이 없는 것이다. 어느
일곡에 치우칠 수 없다. 이것은 현대 양자역학의 이론들이 말하는 제 현상을 잘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요, 있는 것이 곧 없
는 것이다. 왕필은 앞의 6장과 이 14장에 이러한 존재론의 거부에 관한 재미있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6장의 주석은 앞서 해설한 바 있다.
14장의 왕필주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없다고 말하려 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있고, 있다고 말하려하
면 그 형체를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모습없는 모습이요, 물체없는 형상이라 말한
것이다. 이것과 관련되어 노자의 현존하는 최초의 주석자인 한비자는 다음과 같
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한비자의 말을 인용하기 전에 우리는 여기 텍스트
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한글자를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 글자는 바로 무
물지상의 상이라는 글자다. 이 상에 대한 한비자의 해석은 오늘날 카씨러가 말하
는 상징성에 관한 모든 논의의 인식론적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상이라는 글자는 우리가 보통 코끼리 상 자라고 훈한다. 상아도장이니, 상아젓
가락이니 하는 것을 기억하면 그 일상적 의미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이라
는 글자를 옆으로 뉘여보면 그것이 그 모습 그대로 하나의 코끼리의 상형자임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중국에는 고래로부터 코끼리가 있었다는 자연사적 사실을
이러한 글자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코끼리라는 뜻의 정확한 상형
자가 어떻게 해서 모습 즉 심볼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한비자는
너무도 기발한 주석을 노자를 해석하면서 달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코끼리를 직접 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대개 죽은 코끼
리 뼈를 얻어 그 전체 도상을 그려보고, 그 산 모습을 상상해내는 것이다. 그러
므로 뭇 사람들이 의식으로써 상상해내는 것을 모두 일컬어 상이라 하는 것이다.
지금 도는 비록 산 코끼리처럼 직접 보고 들을 수는 없어도, 성인은 그것의 드러
난 공능을 잡아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노자가 말
하기를 모습없는 모습이요, 물체없는 형상이라 한 것이다.
한비자의 법가적 현실주의는 노자의 해석에 있어서 조차도 역력하다. 무장지장
이라는 아이러니칼한 표현속에서 노자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무장에 있다. 그러
나 한비자의 강조점은 무상이 아닌 장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한비자의 주석에 있어서 놀라운 것은 상을 의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는 것이다. 즉 현실적 물체의 모습이나 형태를 즉물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
라, 어디까지나 우리의 의식으로 구성한 심볼릭 레퍼런스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
이다. 이것은 선전철학의 한 도약이다. 즉 즉물적 형체의 개념에서 비즉물적, 이
념적 상징성으로 비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개념이, 한비자
의 철학에 있어서 이라는 개념과 연결이 되고, 또 이것이 바로 후대의 송명유학
이기론의 남상을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을 한번 기억해둠직 하지만, 이 문제는 또
하나의 거대한 주제임으로 여기 그 일단을 시사하는 것만으로 그치는데 만족해
야 할 것이다.
5. 시위홀황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황홀이라는 말이 원래 노자라는 텍스트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황홀이나 홀황이나 중복되
는 의미의 형용사적 단어의 배열의 문제일 뿐, 완전히 동일한 표현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황홀이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 신체에 퍼져있는 신경의 말
단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의 자극에 의한 어떤 변화된 의식의 상태, 즉 우리
가 흔희 트란스라고 부르는 몽롱한 느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때로 의식이나
인지 능력의 저하를 의미할 수도 있고, 때로는 주변의 이지가 감소되는 어떤 특
정한 포카스의 과도한 집중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자가 말하는 황홀이란
매우 우주론적인 기술이다. 상, 하와, 밝음, 어두움이 구분되지 않는 토탈한 우주
의 상태, 모든 존재가 생성되는 비존재의 상태, 모습없는 모습의 그근원적 인식
을 가티켜 황홀, 홀황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의식에 명료하게
구분되어 나타나는 모든 명언 이전의 무차별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불교적 해
탈도 하나의 황홀이다. 그래서 그것은 앞에서 맞이하여도, 그 머리를 볼 수가 없
고, 뒤에서 따라가도 그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선, 후의 시간조차가 해소되는 그
시간 이전의 상태를 노자는 황홀이라 표현한 것이다.
6. 집고지도, 이어급지유
옛 길을 잡아 지금의 현존재를 콘트롤한다는 생각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
히 하는 생각일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도 오늘이 곧 과거의 역사라는
뿌리에서 내려온 연장상태라고 한다면 그 근원이 되는 과거역사를 배워 오늘의
문제를 파악한다 하는 것은 조금도 어색한 일이 아니다. 치수를 할 때도 아무리
말류에서 제방공사를 해봤자 곧 터지고 말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하다.
항상 그 근원부터 물흐름을 잡아나가야 할 것이다. 고지도를 집하여 금지유를 어
한다는 것, 노자의 도에 대한 생각을 생각할 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즉 도
는 드러나는 만물의 말류적 현상에 대해 보다 본원적인 근유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재미있는 하나의 텍스트의 문제가 발생했다. 백서
갑,을본에 모두 이 구절이 명확하게 다르게 쓰여있는 것이다.
갑,을 본이 일치하는 상황에서 집금지도의 금이 고의 오사일 가능성은 거의 전
무하다. 다시 말해서 백서 노자본의 명료한 의미는 오늘의 도를 잡아, 오늘의 유
를 제어한다는 뜻이다. 즉 노자 원텍스트에는 고지도라고 하는 복고적, 근원회고
적 시간개념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도와 유의 관계가 꼭 고
와 금의 관계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고와 금의 시간적 관계가 전제되지 않는
다 해도 도와 유의 관계는 이미 근원과 말류의 관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면 왕본은 다음에 나오는 고시라는 전제 때문에, 금지도를 고지도로 바꾸어 그
일관된 맥락을 유지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서본으로 추정해 보건대 노자의
원래 의도는 금지도를 잡아, 금지유를 제어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고시를 알 수
있다 라고 하는, 보다 역동적인 의미 맥락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의 구절의 첫 시작이 되는 접속사가 매우 중요하다.
왕본은 그 앞에서 일단 문맥을 끊고, 능으로 접속시켰지만, 을본은 앞의 문맥
을 받아 그렇게 함으로써라는 뜻의 이로 접속시킨 것이다. 그러나 하여튼 이 장
의 최종적 결론은 명료하다.
옛시작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도의 벼리인 것이다. 시간에 대한 통
관적 이해가 없이, 우리는 오늘의 질서를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의 젊은
이들이여! 그대들의 존제의 역사를 알라! 그리고 그 근원을 파악하라! 그 근원의
파악으로부터 모든 말류적 현상을 포섭해야 하는 것이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속
에서 도의 벼리가 다 찾아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입력된 사태의 출력일 뿐인 것
이다.
십오장
고지선위사자,
미묘현통, 심불가식
부유불가식, 고강위지용
예언, 약동섭천,
유혜, 약외사린
엄혜, 기약용
환혜, 약빙지장석
돈혜, 기약박
광혜, 기약곡
혼혜, 기약탁
숙능탁이정지서청?
숙능안이구, 동지서생?
보차도자불욕영
부유불영, 고능폐불신성
열다섯째 가름
예부터 도를 잘 실천하는 자는
세미하고 묘하며
가믈하고 통한다.
너무 깊어 헤아릴 길 없다
대저 오로지
헤아릴 길 없어
억지로 다음과 같이 형용한다.
머뭇거리네
겨울에 살얼음 냇갈을 건너는 것 같고
쭈물거리네
사방의 주위를 두려워 살피는 것 같다.
근엄하도다
그것이 손님의 모습과 같고
흩어지도다
녹으려하는 얼음과 같다.
도탑도다
그것이 질박한 통나무같고
텅비었도다
그것이 빈 계곡과 같네
혼돈스런 모습이여
그것이 흐린 물과도 같도다!
누가 능히 자기를 흐리게 만들어
더러움을 가라앉히고
물을 맑게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능히 자기를 안정시켜 오래가게 하며
천천히 움직여서 온갖 것을 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도를 보존하는 자는
채우려 하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채우려하지 않기에
그러므로 능히 자기를 낡게하면서
새로이 이루지 아니할 수 있는 것이다.
설노 이 장의 느낌은 한 편의 시인 동시에, 또 노자라는 책을 쓴 사람의 인격
적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아주 리얼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생생한 느낌,
개념적이 아니면서, 아주 개인의 삶의 태도와 직결되어 있는 어떤 수양론적 멧세
지를 담고 있는 이런 장이야말로 노자라는 책의 고층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 장은 죽간 갑본의 다섯 번째에 실려있
다. 마지막의 부유불영, 고능폐불신성이란 구절만 없다. 그러나 이 마지막 구절도
죽간에는 없어도 백서에는 나타나고 있음으로 왕필의 첨가라고 볼 수는 없다.
1. 고지선위사자, 미묘현통, 심불가식
전통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위사자라는 표현이 어색하다 하여, 위도자로 바꾸어
해석하였다. 그리하면 선위도자는 도를 잘 실천하는 사람의 뜻이 될 것이다. 그
런데 과연 백서본이 나오면서 이러한 판본의 문제가 입증되기에 이른 것이다. 백
서본에는 고지선위도자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왕필본의 선위사자는 선위도
자로 바꾸어 해석되어야 한다는 설이 정설로 굳어지는 듯 했다. 그런데 일이 터
진 것이다. 즉 죽간이 나온 것이다. 죽간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죽간에는 또
다시 왕본과 동일하게 선위사도로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노자라는 텍스트의 전승문제에 관하여 확실한 새로운
근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즉 마왕퇴 백서본의 발견으로 인하여 왕본의 가치
를 저하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백서본과 전혁본은 거의 동일한 전승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왕본은 또 다른 전승의 소산이며, 백서본에 근거하여 왕본을 후대의
발전으로 간주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 선위사도에 관하여 왕본과 죽
본이 일치한다고 해서 왕본이 죽본과 동일한 전승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부분에 관하여서는 왕본 텍스트가 백서 텍스트보다 보다 고형을 보존
하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위도자는 도를 구현하는 사람이며, 그것은 매우 추상적인 후대적 개념이다. 여
기 노자의 고층대 텍스트에서는 분명히 보다 구체적인 상황을 지칭하고 있는 것
이다. 사는 자형으로 보면, 갑골문에서는 남자의 성기를 나타내는 모습으로 나타
나고, 후대의 금문에서 도끼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에 대한 해석의 역사는
다양하다 그것은 본시 평범한 사내를 의미하는 데서 출발하여, 전사의 개념으로
발전하였고, 또 사대부와 같은 특정 계급으로 발전하였다가 또 우리말의 선비에
해당되는 지적인 리더그룹을 의미하는 말로 쓰여지기도 하였다.
고선지위사자는 아주 직역하면 예로부터 아주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있어서 훌륭한 전사의 이미지는 이상적 인간의
이미지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플라톤이 말하는 이상적 인간상속
에는 반드시 전사라는 개념이 들어있는 것과도 같다. 폴리스야말로 전국이었던
것이다.
미묘현통은 꼭 주역의 원형이상처럼 노자의 인간상의 대표적 특징을 묘사하는
네 개의 형용사적 개념일 수 있다. 미는 이미 14장에 나왔고, 묘와 현은 제1장에
서 선보인 것이다. 통은 백본과 죽본이 모두 달로 쓰고 있다. 통과 달은 요즈음
의 우리말로 통달한다는 말이 함의하는 바대로, 비슷한 두 개의 개념이다. 통하
면 달하고, 달하면 통하는 것이다. 통은 주역 계사의 표현을 빌리면 감이수통의
통이다. 즉 감통의 뜻이다. 그것은 우주적 감통의 뜻이다.
예로부터 정말 싸움을 잘 하는 사람들은, 즉 위대한 리더들은 아주 미세하고
오묘하고 그윽하고 통달한 인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인격의 깊이가
너무도 깊어 도무지 파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병가적 표현일 수
도 있다. 제갈공명의 작전적 깊이를 묘사하는 말일 수도 있다.
심불가식! 이 표현이 죽본과 백본이 모두 심불가지로 되어 있다. 지와 식은 상
통한다. 지도 의식의 지향성을 말하는 것이다. 불가지란 의식의 지향성 속에 포
착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이 깊어야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반대로 물이얕으면 소리
가 시끄럽다. 노자는 얕은 물이 아니다. 깊고 깊어 헤아릴 수도 없는 깊은 물이
다. 우리는 얕은 20세기를 살아왔다. 데카르트가 clear and distinct를 말한 것은
심불가식에 대하여 명료하고 뚜렷한 인식을 과학적 인식의 제1원리로 내걸은 것
이다. 사실 20세기를 통하여 우리는 과학이라는 미명아래 어떻게 하면 얄팍해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이 너무 깊으면 잴
수가 없고, 또 계측할 수 없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논리
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모두 헤아릴 수 있도록 얕고, 얇고, 명료하
고, 맑고, 뚜렷한 것만을 우리의 20세기는 지향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모두 얄팍해져 버렸다. 과학이라는 미명아래, 인간들이 모두 빤할 빤자의 인간들
이 되어버린 것이다. 빤할 빤자의 인간들의 특징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또 다
시 자기처럼 빤할 빤자의 인간들인 것처럼 파악한다는 것이다. 빤할 빤자의 척도
로써 모든 것을 빤할 빤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빤할 빤자로 비판하고
판단을 내릴 뿐이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더욱 더 빤할 빤자의 인간이 되어갈 뿐
이다.
그들은 심불가식의 세계를 상상할 수 조차 없다. 여기를 찌르고 들어가면 저켠
에 우뚝 서있고 저기를 쑤시고 들어가면 이켠에 우뚝 서있는, 신출귀몰하는 불가
식의 인격을 생각할 수가 없다. 인간의 헤아림으로 다 헤아릴 수 있고, 그 무엇
이 남지 않는 인간을 우리는 체도자라 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반면을 동시에
포용하는 다면적 인격을 너무도 상실하여만 온 것이다. 이제 21세기에는 좀 심불
가식한 인간들을 우리역사도 배출시켜야 하지 않을까?
강위지용이란, 불가사의, 심불가식한 세계를 언어적으로 개념적으로 형용한다
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억지로 형용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강은 억지로의 뜻
이다. 억지로 형용할 때에 쓸 수 있는 방법은 논리적 분석이나 어떤 실체적 대응
이 아니다. 결국 알레고리적인 사태를 나열하는 것이다. 이 장은 그러한 알레고
리적 사태를 예언, 유혜, 엄혜, 환혜, 돈혜, 광혜, 혼혜, 라는 일곱 개의 감탄사로
해서 나열 하고 있다. 하나의 아름다운 시라 해야 할 것이다.
예언의 예는 문자 그래로는 거대한 코끼리의 뜻이다. 거대한 코끼리가 살얼음
덮인 냇갈 앞에서 주저주저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면 좀 노자적 인격의 느낌이
다가올 것이다. 노자적 인간은 똘똘하고 명석하고 판단력이 빠른 인간이 아니다.
아둔한 듯이 보이고 우물쭈물하는 듯이 보이고 흐리멍텅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노자의흐리멍텅함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모든 명석, 판명성을 포용하는 사태임을
망각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유혜의 유 역시 일종의 원숭이를 뜻하는 글자다. 원숭이는 겁이 많다. 주변을
살피기를 잘하고 두려워하기를 잘 한다. 유는 여기서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
는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의 한 표현은 역시 두려움이
다. 두려움이란 위기적 상황에 대한 공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자가 말하는
두려움이란 양면성을 포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심려를 뜻한다. 두려움은 존재
의 여백이요, 포용의 여지다. 두려움은 남김이다.
엄혜는 역시 근엄한 모습이다. 이 근엄성은 여기 손님이란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다. 왕본의 욕은 객의 오사로 간주된다. 손님은 항상 주인과 상대적으로 대비
되는 개념이다. 노자적 인간은 주인이 아니요, 손님이다. 손님은 조심스럽다. 자
기가 주관해서 일을 도모하지 않기에 에러의 가능성이 적다. 그리고 손님은 스스
로 그러한 사태의 추이에 자신을 맡긴다. 그것을 자기의 주관에 따라 조작하려하
지 않는다. 손님의 궁극적 의미는 이것이다. 우리 인생은 천지자연에 대한 하나
의 손님인 것이다. 건곤의 무대에 던져진 하나의 손님인 것이다. 손님은 손님다
웁게 왔다 가야하는 것이다. 손님이 주인인척 모든 것을 주관하면 엉망이 되어버
리는 것이다. 인생은 나그네길!
환혜의 환은 끓는 물에 던져진 얼음덩어리의 모습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 얼음이 흐트러지는 모습이 바로 석이다. 우리가 보통 해석한다는 것
도 엉켰던 것이 풀린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 환의 이미지에서 우리
는 노자철학의 근원적인 디컨스트럭션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노자철학 그 자체
가 하나의 해체요, 노자가 말하는 인격 그 자체가 하나의 해체인 것이다. 그러나
노자의 디컨스트럭션은 컨스트럭션에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노자에게 있어서
는 디컨스트럭션 그 자체가 하나의 컨스트럭션이다. 해체가 하나의 허로서 전체
의 컨스트럭션에 끊임없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돈혜의 돈은 박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통나무는 화로서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통나무란 존재의 가능태이다. 통나무가 조각되어 온갖 그릇이 탄
생되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가능성을 함장하는 상태가 곧 통나무이다. 통나무는
돈독하다. 통나무는 도타웁다. 통나무는 질박하다. 여기서 도타웁다는 뜻은 결국
모든 가능성이 함장되어 있다는 뜻이다. 인격의 위대성도 어떠한 그릇으로 규정
될 수 없는, 그릇 이전의 통나무 상태에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이 한 그릇으로 판
명이 되고 나면 그 인간은 매력이 사라지고 만다.ㅏ 빤할 빤자가 되어버리기 때
문이다. 한 그릇의 용을 뛰어 넘는 원초적 가능성의 다면성을 우리 인격은 계속
보지해야 하는 것이다.
광혜는 넓고 또 텅 빈 모습이다. 이 광이 곡과 연결 되어 있는 것은 이제 욕신
불사장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잠깐 욕신불
사를 해석하고 있는 왕필주를 잠깐 한번 들여다 보자!
계곡의 하느님이란 계곡의 텅 빈 중앙을 말하는 것이다. 그 곳에는 계곡이 없
다. 형체도 없고, 그림자도 없다. 거꾸로 올라감도 없고 거스림도 없다. 자신을
낮추면서 움직이지 않는다. 고요함을 유지하면서도 시들지 않는다. 계곡이 바로
이 때문에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아~그 얼마나 지극한 물
체인가!
혼혜와 탁의 이미지는 이미 혼돈신의 고사에서 충분히 해설하였음으로 쉽게
그 풍부한 그림들을 머리에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리
고 노자적 인생관을 얘기할 때 많이 인용되는 한 구절은, 다음에 이어지고 있는
흐린 물의 비유다.
2. 숙능탁이정지서청?
나는 이 말을 생각할 때, 요즈음은 백담사에 기거하고 계신 중광스님을 머리에
떠올린다. 나는 개인적으로 중광스님과 오랜 교분을 맺어왔다. 얼마전에도 백담
사에 가서 밤을 지새우며 서로 먹물장난하고 서로 시쓰고 유쾌하게 깔깔대고 웃
어 제키고 돌아왔다.
왜 중광스님은 걸레스님인가? 그는 인생의 어떤 계기에 걸레의 의미를 깨달았
을 것이다. 그 걸레의 의미는 바로 이 노자의 15장 이 구절에서 출발하는 것이
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항상 혼탁한 모습을 지녀왔다. 옛 성인
들의 말씀을 들어보아도 옛날에는 이러이러했는데 지금은 이러이러하다고 말할
때, 지금과 관련된 모든 언급이 예외없이 부정적이다. 이 말은 곧 예나 지금이나
항상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혼탁했고 개탄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유토피아는 역사에, 인간세에, 단 한순간도 존재해본적이 없는 것이다. 단지 유토
피아에 대한 끊임없는 인간의 갈망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혼탁한 세상은 어떻게 맑게 하는가? 혼탁한 세상을 맑게 한다고 할 때,
우리는 흔히 한 줄기의 맑은 샘물을 생각한다. 한 줄기의 맑은 샘물이 솟아나오
면 그 샘물로서 점차 흐린 물이 맑아지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물리
적 사태로서 두눈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그대로
닉네임 비밀번호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세에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흐린 물, 그리고 그 속의 나는 맑은 샘물, 우선 이 따위 2분법이 인간세
상 이치에는 적용될 수가 없다. 흐린 물과 맑은 물의 2원적 경계가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과연 사회적 탁륫속에 있는 내가, 나 홀로 고립적으로 청류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걸레는 걸레이다. 걸레는 더러운 것이다. 그러나 걸레는 자신을 더럽히면서 주
변을 깨끗하게 만든다. 나의 깨끗함과 고고함이 이 사회를 깨끗하고 고고하게 만
드는 유례는 없다. 나의 깨끗함과 고고함 자체가 이 사회의 더러움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너 자신을 먼저 흐리게 만들라!
그리고 자신의 흐림으로 탁류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탁류 그 자체를 가라 앉혀라!
그리하면 너와 네 주변이 같이 깨끗함을 얻으리라!
바로 예수의 생애도 십자가를 걺어졌다는 것은 곧 자신을 탁류로 만든 것이다.
예수가 자기만을 세상의 탁류에 대한 청류로 규정했다면 오늘의 예수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더불어 술마시고 더불어 발을 씻고, 더불어 화내고 더불
어 싸웠다. 그리고 강도들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오늘 우리 20세기를 회고해볼 때, 우리 20세기의 최대의 죄악은 바로 악마와
천사라고 하는 얄팍한 기독교적 사유속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던 윤리적 2원성이
다. 나는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 그래서 죄는 너의 것이다. 이 사회의 죄악은 모
두 너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나는 그 죄악의 피해자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너
를 저주하노라! 그 저주를 받지 않으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과연 우리
민족은 구원을 얻었는가? 20세기 기독교 선교사의 결론이 무엇인가? 거대한 교
회건물, 기도원에까지 수천만원짜리 코트를 입고 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어리석은 여인들! 그것이 우리 20세기 기독교선교사, 순교사의 총결이었던가?
3. 부유불영, 고능폐불신성
이 대목은 전통적으로 고증학적 논란이 많았던 대목인데, 이 부분이 착간이라
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이 대목이 죽간에는 빠져있다. 그렇다면 착
간이라는 설이 정당한가? 그렇지는 않다. 백서본에는 이 부분이 고스란히 보존되
어 있기 때문이다. 즉 왕본의 현체제가 그렇게 함부로 구성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백서는 여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우선 죽간에 이 구절이 빠져있어도, 그 앞
에 보차도자, 불욕영에 해당되는 부분이 있음으로 결코 이 내용을 의미적으로 결
하고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요번 죽간에서 새롭게 읽어지는 사실은 영자에 대
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다. 죽간에는 영자가 오자로 되어 있는 것이다. 죽간
본에 의하면 이 구절의 뜻이 이와 같다. 이 도를 잘 보존하는 사람은 드러나기를
숭상하지 않는다. 여기 이 도를 보존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도릉 자각하여 실천하
는 사람이다. 불교에도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여 사소한 논쟁들이 끊이지 않
지만, 노자철학에서 보면, 인간의 깨달음의 시점과 무관하게 인간의 수행이란 항
상 지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보차도자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도를 지속적으로 실
천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자는 불욕영하게 되면, 자신의 허를
채우려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되고, 불욕상오하게 되면,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
기를 좋아하지 안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간의 발견으로 후자의 의
미가 노자의 오리지날한 맥락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노자 전문가들
에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구절은 최후의 능폐불신성이라는 구절이었다. 능히 낡
아빠질 수 있고 새로 이루지는 않는다라는 의미가 왠지 부정적이고 나른하고 그
말끔한 맥락이 닿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여기 저
기 출전을 대어 이것은 능폐이신성의 오사라고 주장해왔다. 즉 불자는 이자를 자
형이 비슷해서 잘못 전사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뜻은 보다 근사하게
된다. 항상 자신을 낡게 할 수 있음으로 새롭게 생성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고
증가들의 고증이 맞았는가? 백서의 출현은 이렇게 쓸데 없이 자기의 좁은 소견
에 따라 원문을 개작하는 고증가들의 장난이 얼마나 허망한 짓이었나를 여실하
게 보여준 것이다. 자구의 약간의 변화는 있으나 의미의 변화는 전혀 없다. 즉
아니불자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로써 왕본의 판본이 얼마나 정
확한 진실을 보존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자신을 낡게 할 수 있고 새롭게 이루지 아니한다는 약기지, 강기골만 한번 연
상해도 쉽게 해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우주의 객의 모습으로 사는 사람
은 정당하게 낡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지 아니한다. 어차피 우주의 엔트로
피는 시간의 추이에 따라 증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나의 생명은 낡아버리는
것이다. 그 낡음에 대하여 무리하게 뜻을 세워 유위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
이다. 얼굴이 늙는다고 성형수술을 하는 어리석은 여자들, 그러다가 몇 년 후에
얼굴이 더 폭삭 삭아버리는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하지 않는 것을 여기서 불신성
이라 표현한 것이다. 여인의 젖가슴이 납작하다고 수술해서 그 속에 프라스틱 젤
라틴을 쑤셔넣고 산다니! 참 이런 흉측한 의술을 과연 과학의 진보라 말할 수 있
겠는가? 그것이 우리의 신생인가? 이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날 생각말자! 21세기
는 낡게 태어날 생각도 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