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9

알라딘: 무위당 장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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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 - 생명 사상의 큰 스승   
이용포 (지은이)작은씨앗2011-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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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es Point :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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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판 확인일 : 201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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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본208쪽

책소개

故 리영희 교수가 "우리 사회에 이런 분 또 없을 것"이라 잘라 말한 사람. 이현주 목사가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분"이라 한 사람. 유홍준 교수가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고 한 사람. 모두 무위당 장일순을 두고 한 말이다. 원주에서 태어나 평생 고향을 지키며 힘없는 이들의 벗으로 남았고, 민주화 투쟁과 생명운동에 큰 발자취를 남긴 무위당.

2011년 5월 22일로 무위당이 세상을 떠난 지 17년이 되었다. 17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 현실은 어떤가? 무위당이 살아 있다면 우리에게 뭐라고 했을까? 원주를 생명운동의 구심점으로 만든 무위당에게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아름다운 지구인의 자취를 발굴해 널리 알려 온 지은이 이용포가 무위당 장일순에게 가르침을 청한다.


목차
추천의 글
저자의 말

교육 운동
선생님 가신다
하늘과 사람을 대하여 부끄럼이 없어야
사람이 곧 한울이라
줄탁동시

민주화 운동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밑으로 기어라!
함께 잘 사는 길
모든 길은 원주로 통한다

생명운동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음을
돌은 말이 없지만 나의 스승
모기가 불쌍해 등을 켜지 않노라
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어

장일순 선생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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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일보 Books 북Zine 2011년 5월 28일자 '한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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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용포 (지은이) 

1966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한양 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98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성자 가로등>이 당선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청소년 장편소설《느티는 아프다》,《뚜깐뎐》, 동화집《태진아 팬클럽 회장님》, 장편동화 《내 방귀 실컷 먹어라, 뿡야》,《왕창 세일! 엄마 아빠 팔아요》, 인물이야기《무위당 장일순》 들이 있다.
최근작 : <풍선 바이러스>,<최치원전>,<강림도령> … 총 2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무위당 장일순, 대한민국이 기꺼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고결한 사람
당대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스승으로 삼은 사람. 고(故) 리영희 교수가 “우리 사회에 이런 분 또 없을 것”이라 잘라 말한 사람. 이현주 목사가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분”이라 한 사람. 유홍준 교수가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고 한 사람. 모두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을 두고 한 말이다.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평생 고향을 지키며 힘없는 이들의 벗으로 남았고, 민주화 투쟁과 생명운동에 큰 발자취를 남긴 무위당. 올해 5월 22일로 무위당이 세상을 떠난 지 17년이 되었다.
17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 현실은 어떤가?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우리는 행복한가? 구제역으로 몰살당한 가축 300만 마리는 행복했을까? 이명박 정부가 파헤치는 4대강은? 순식간에 무너진 핵발전소 덕분에 우리는 이제 아무것도 마음놓고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무위당이 살아 있다면 우리에게 뭐라고 했을까? 원주를 생명운동의 구심점으로 만든 무위당에게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아름다운 지구인의 자취를 발굴해 널리 알려 온 지은이 이용포는 무위당 장일순에게 가르침을 청한다.


줄탁동시
무위당은 스물여섯 나이에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원주에서 교육 운동을 시작한다. 교육이 죽으면 미래가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1953년 무위당은 성육 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교육 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인간다운 삶을 함께 배우고 느끼는 의식의 상호작용이야말로 교육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엘리트 양성을 목적으로 한 교육에 반대했다.

교육이 특별히 뛰어나거나 잘난 몇 사람을 길러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격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 똑똑한 영재를 하나 키우겠다고 나머지 둔재를 버리는 것은 교육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무위당이 매를 든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학생을 때리려 든 매가 아니었다.

오늘은 너희가 나를 때려야겠다. 너희들이 이토록 공부에 열의가 없으니 이게 다 선생인 내 죄가 아니겠느냐. 1번부터 나와서 날 때리거라.

그날 무위당의 종아리엔 피가 맺혔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들은 무위당에 감화되기 시작한다. 훗날 무위당은 이 일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젊었을 때는 조급한 마음에 ‘날 닮아라, 날 닮아라’ 했지. 허나 이젠 그때 일이 후회스럽구먼. ‘줄탁동시(?啄同時)’라는 말이 있잖은가. 무어냐 하면, 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 껍질을 안에서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새끼가 알에서 나오는 걸 돕기 위해 바깥에서 쪼는 것을 ‘탁(啄)’이라 하거든. 그 둘이 맞아야 된다, 이 말이야. 어린 아이가 신이 나서 하게 해야지, 부모가 억지로 당긴다고 되나? 안 되지!


모든 길은 원주로 통한다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틀 뒤에 무위당이 체포되었다. 그가 평소에 주장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었다. 무위당은 8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와 춘천 형무소에서 3년을 복역한다.
출소 뒤 대성학원 이사장으로서 교육 운동에만 전념할 생각이었지만, 역사는 무위당을 비껴가지 않았다. 1965년 대성 고등학교 학생들이 고등학생으로서는 전국 최초로 한일회담 반대 집회를 연 것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원주 시청까지 행진했다. 군사정부는 이 일을 이유로 무위당을 대성학원 이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만든다.
이즈음 무위당은 평생 뜻을 함께한 지학순 주교를 운명처럼 만난다. 1965년 원주 교구 설립과 함께 지학순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이후 무위당과 지학순 주교는 재해대책사업위원회, 가톨릭 농민회 운동, 신용협동조합 설립 등에 힘을 모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원주캠프’가 싹트게 된다. ‘5●16 장학회 부정부패 사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거치면서 원주는 ‘70년대 원주, 80년대 광주’라고 할 정도로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가장 강력한 지원지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이 있었다.


모기가 불쌍해 등을 켜지 않는다
1980년대 민주화 세력이 정치 투쟁에 몰두해 있을 때 무위당은 자신의 운동 방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 끝에 생명운동으로 한 단계 도약한다. 그는 기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명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한다.

땅이 죽으면, 인간도 죽어. 생명을 기르는 땅이 죽는데, 인간인들 별 수 있겠어?
1983년 도농 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이 출범한다. 무위당과 원주캠프의 생명운동이 구체화된 것이다. 조합원 36명이 낸 출자금 36만 원으로 시작한 한살림은 20여 년 만에 회원 15만 세대를 확보했다. 이제 한살림 운동은 시민●사회운동으로 발전해, 모든 사람이 함께 이루어 가는 공존공영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무위당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해월 최시형이다. 무위당은 억압받던 이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해월만큼 거룩한 모범을 보여 준 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데 의지하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느니라.
사람은 밥에 의지하여 그 생성을 돕고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여 그 조화를 나타내는 것이니라.
《해월신사법설》 중에서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해월의 가르침은 무위당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다. 무위당이 평생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모든 사람을 소중하고 평등하게 대한 것은 해월의 가르침이 준 깨달음 때문이었다. 무위당은 평생 삶을 통해 ‘모심과 섬김’을 실천한 사람이다.

돈을 모시지 말고 생명을 모시고, 쇠물레(기계)를 섬기지 말고 흙을 섬기며, 눈에 보이는 겉껍데기를 모시지 말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알짜로 값진 것을 모시고 섬길 때만이, 마침내 새로운 누리가 열릴 수 있어요.

무위당은 말년에 수많은 강연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생명인 자연을 훼손하지 말고 귀하고 고맙게 여겨야, 너도 살고 나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만 잘살겠다고 발버둥 치면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경고였다.

그런데 현대 문명이 최고의 가치로 설정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떻게든지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까지도 최대로 이용해서 각자의 이득을 챙기고 사욕을 채우는 그것이란 말일세. 서로가 서로를 이용 상대로만 보고 그래서 결국 미쳐 돌아가는 거라. 여기서 오늘의 심각한 공해 문제라든가 생태계 파괴가 발생하는 건데, 사람들이 서둘러 도(道)와 덕(德)으로 삶의 축을 세우고 자연의 도리에 따라서 살아갈 때 비로소 그런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겠지.


선생님 가신다, 선생님 이제 다시 오신다
1993년 3월 12일 평생 동지인 지학순 주교가 세상을 떠난다. 무위당도 그해 9월 병세가 나빠져 입원한다. 1994년 5월 22일, 무위당은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17년이 지났다. 그 긴 세월에도 무위당을 아는 사람들은 그이가 사무치게 그립다고 한다. 신자유주의가 더욱 판을 칠수록, 사람들이 타자화될수록, 자연이 더 악랄하게 착취당할수록 그이가 더 보고 싶어진다고 한다. 왜 그럴까? 무위당은 비틀거리는 자에게 용기를 주고, 모색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고, 의심하는 자에게 신념을 주고, 방황하는 자에게 철뉙할수준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무위당에게 배워야 한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과 망가지는 생명 앞에서 무위당에게 물어야 한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람이 곧 한울이니 한울님을 속이지 말라. / 한울님을 거만하게 대하지 말고, / 상하게 하지 말고, / 어지럽게 하지 말고, / 일찍 죽게 하지 말고, / 더럽히지 말고, / 굶주리게 하지 말고, / 허물어지게 하지 말고, / 싫어하고 불안하게 하지 말고, 춥고 굶주리게 하지 말라.
<십무천>, 해월 최시형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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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을 만들려고 세게 당기면 내 것이 되지 않고 쏟아질 뿐이야.˝ 장일순 선생이 무언가 자기 것이라 주장하며 가지고 싶어하는 아우 화순에게 물이 가득 담긴 대야를 당겨 보이며 한 말이다. 선생의 말은 쉽다. 
한방블르스 2012-01-1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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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곁에 없어도 곁에 있는 듯한 우리들의 선생님 새창으로 보기
무위당 장일순.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넘었는데도 더욱 그리워지는 분. 

살아 생전 한 번도 뵙지 못하고, 사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름 한 번 들어보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분. 

원주에 살면서도 원주에 머무르지 않고, 드러내지 않는 삶을 삶으로써 자신을 드러낸 분. 

녹색평론을 통해 알게 되었고, 그리고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를 통해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했고, "좁쌀 한 알"이란 책을 통해, 그 분의 일화를 접하고, 삶이란, 위대한 삶이란, 결코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때 사람들에게 책을 선물할 일이 있으면 그래서 이 "좁쌀 한 알"을 선물하곤 했는데... 

"좁쌀 한 알"이 일화를 중심으로 해서 장일순의 삶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조금은 힘들 수 있다면, 이 무위당 장일순 책은 전기문의 형식을 취해, 누구나 쉽게 장일순을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전개된다. 

한국의 현대사와 장일순이 삶이 작가 이용포에 의해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어 스승을 그리워하는 어른들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도 훌륭한 스승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책이다. 

스승이 없는 시대, 어른이 없는 시대라고 하지만 주위를 잘 살펴보면 어른들, 스승들은 늘 우리 곁에 있다. 바로 이 무위당 장일순처럼. 

다만 스승은 우리들이 찾으려할 때 찾아지지, 그냥 왜 없을까 하며 지내면 스승은, 어른은 결코 찾을 수 없다.  

교육운동가에서 사회운동가로, 그리고 사회운동가에서 생태운동가로 꾸준히 자신을 변모해가는 데는 평등, 평화주의라는 기본 사상이 밑받침되어 있고, 위를 보고 운동을 하지 않고, 아래를 보고 운동을 하는, 아니 아래와 함께 할 때 운동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신 분이 무위당 장일순이다.  

그는 자신의 다른 이름인 호를 여러 번 바꾸는데, 처음에는 맑은 물처럼 살고 싶다고 청강이라는 호를 쓰고, 다음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삶으로 무위당이라는 호를 쓰고, 그리고 자신은 아주 작고 낮은 존재이지만, 그 존재 속에는 온 우주가 들어있다고 하는 뜻의 일속자(즉, 좁쌀 한 알)라는 호를 쓴다. 이렇듯 호는 바로 당시 장일순의 삶을 대변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요즘처럼 4대강이다, 뉴타운이다 하여 개발만이 살 길이라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이 시대에 무위당의 말 하나, 글 하나,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는 우리들에게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인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큰 스승, 무위당 장일순. 

드러내지 않아 드러났던 그 분.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어도, 생전에 뵙지 못했어도 지금 나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늘 생각하게 해주는 스승으로 남아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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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ye91 2011-05-28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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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부조리에 맞서 새로운 시대를 꿈꾸며 기존세력에 저항하고 하찮은 미물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사상을 고취해 왔던 장일순의 일생과 업적등을 전반적으로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또한 그가 사회적으로 맹활약을 보여 주었던 1970,80년대의 한국 국내상황과 그가 이루고자 했던 '생명 사상'등은 대조적이었지만 뜻있는 사람들에겐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주리라 생각한다.

흔히 의식적으로 깨우치고 불의에 저항하며 함께 더불어 잘 사는 길을 고민하며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인내천 사상과 맞물려 돈에 걸신들리고 돈을 쫓아 버겁게 살아가야만 하는 현세태를 보면서
과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해방후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 세력에 맞서고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면서 갖은 자든 못 갖은 자든 함께 살아가는 길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몸소 실천으로 옮겼던 장일순선생은 처음 교육 사업부터 시작하여 1970년대
유신헌법 반대운동,산업개발로 인한 생태파괴,환경 오염등으로 인한 지구의 위협등을 실천적 지성인으로 일관된 삶을 보여 주고 있기에 계몽주의적이고 미래를 넓게 내다보는 천리안의 지혜를 갖은 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원주에서 한살림 운동을 벌였던 그는 모두가 함께 모든 생명을 함께 살려 내고,생명의 가치관.세계관으로 온 생명이 한집 살림을 살 듯 더불어 살자는 의미로 세계 문명이 핵무기,공해 등을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데 자연을 착취하는 생산,한정된 자원의 무분별한 사용등으로 결국 인류가 언젠가는 대재앙을 받는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설파하고 있으며 부모가 자식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하듯 사람을 사람답게 대해야 하며 상대에 대한 존경과 귀히 여기는 겸손의 정신등을 한살림에서 보여 주고 있다.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근원지 원주가 장일순,지학순,김영주,김지하등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그가 남긴 '인내천'사상을 교육사업과 민주화 운동,한살림등을 통하여 그의 뜻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현실 문제에 깊게 동참하면서도 틈틈히 붓을 들어 난을 치고 글자를 썼던 그의 서체는 치악산 바위틈에서 솟아 나오는 석간수처럼 청정한 삶이 슴배인 그림이요 글씨였다고 한다.

386세대의 한사람으로서 학창시절 민주화 운동의 절정에 있을때 우리에게 지성과 지혜,겸손과 검약,자애등을 가르쳐 주고 세상을 밝게 보며 미물인 벌레도 함부로 다루지 않으며 가장 소중한 인간이 하늘이다라는 생명 사상을 불어 넣어 주신 장일순선생의 뜻이 물질에 쪼들려 살아가야만 하는 요즘 세대들에게 소중한 귀감이 될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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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 2011-06-21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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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수많은 위인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에 대한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아마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선생님처럼 자신의 소신껏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하신 분들이 역사적으로 참 많을 것 같아요.
특히나 우리들이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은 것처럼 말이죠.
사실 제목만 보고 어떤 분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참 궁금하더라구요.
그리고 부제로 달린 생명사상의 큰 스승이라는 부분에서 생명사상?
혹시 생명공학쪽으로 유명하신 분인가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은 교육운동을 평생에 걸쳐서 해오면서 우리의 근현대사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네요.
무위당 선생님이 살았던 시기는 아무래도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에 서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라든지, 생명의 소중함, 자연을 사랑하는 법 등.
어떻게 보면 그 당시에 이미 선구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신 것 같아요.
그것이 어쩌면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한 번 돌아봐야 하는 점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책의 이야기를 크게 나누어보면 교육 운동, 민주화 운동, 생명 운동으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많은 유명 지식인들이 기꺼이 스승으로 삼은 분.
올해로 돌아가신지 17년이 지났다고 하네요.
그 당시보다 지금 우리들이 삶이 더 좋아졌을까요?
교육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교육 운동에 헌신적이었지만 정작 특별한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해지는 교육에 뜻을 두었던 것 같아요.
한 사람의 천재가 아니라 다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인간적인 교육.
어쩌면 지금 우리들의 교육은 단순히 순위로 사람을 평가하고 서로가 어울려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보다는 먼저 경쟁을 통해서 누군가를 이겨야한다는 것을 부추기는 교육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또한 그가 주장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으로 인해서 옥살이를 하고, 지학순 주교를 만나 원주의 민주화 운동의 중심점이 되기도 하는 등 어쩌면 그 자신의 뜻이라기 보다는 역사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서 기억되고 있다는 그만큼 인생을 열심히 살았다는 뜻이 아닐까 싶네요.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한 번 무위당 선생님에게 물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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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야루 2011-06-23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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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

 

 

      인간 속에 있으면서 영향을 끼치고 변화를 시키면서도 본인은 항상 그 밖에 있는 것 같고,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고, 밖에 있으면서 인간의 무리들 속에 있고, 구슬이 진흙탕에 버무려 있으면서도 나오면 그대로 빛을 발하고 하는 그런 사람은 이제 없겠죠.' ( p. 22. 고 '리영희' 교수님의 말씀 )

 

     누구라도 선생님을 말할 때  한마음으로 따르고 싶은 사람, 그저 모든 것을 존경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름만 말하면 누구라도 알만한 유명인사들의 입에서, 마음에서 평생 스승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무위당 장일순.  그저 간단한 선생님의 활동만을 알고 있다가 드디어 선생님에 대해 많은 삶의 모습과 여러 생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책을 통해 만나면서  나 역시  왜 그렇게 많은 지식인들이,  범인들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마음깊이 사모하는지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우리에게 너무도 소중한 분이자, 누구나 쉽게 그렇게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아무도  그 분 처럼 그렇게 살지 못할 것임을.

 

     책을 읽어가면서  선생님이 겪어 오신 여러가지 일들을 만나게 된다.  한국 전쟁 중에 겪은 일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쟁이 벌어지고  학업을 중단하고 동생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민군에게  발견된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위기를 모면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이번에는 국군에게 붙잡혀  머리를 민 선생님의 모습 때문에 인민군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다시 총살을 당할 위험에 처한다. 바로 자신이 총살을 당하게 되는 순간 천주교를 믿었던 선생님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말없이 성호를 긋게 되고, 그 모습을 본 국군 소위는 풀어주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소위의 명령에도 선임하사는 풀어주지 않고 이리 저리 포로가 되어 끌려 다니게 되는데,  우연히 예전에  조부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 국군 중령이 되어  만나면서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이 일을 겪으면서 선생님은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고, 미래는 현재의 결과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현재가 과거의 결과이자, 미래가 현재의 결과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도 크게 다가와 이 사건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하는 화두가 되는 내용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원주에서 교육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으로 학교를 만들고 평생을  후학을 기르는 일을 해오신 선생님은, 지금처럼 서로가 경쟁만을 통한 교육,  누군가를 이겨내는 우등생을 길러내는 교육을 반대하셨다.  함께 더불어 가는 삶을 지향하셨던 분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던 선생님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모습을 아이들에게서 발견하시고  잘못 가르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면서  자신의 종아리를 치게 하시는 참 교육자 셨고,  시간이 지난 후 그런 행동을 했었던 자신의 모습 또한  돌이켜보며 후회스러워 하신 분이시다.  여러 사회 운동과  민주화 운동으로 시련을 겪기도 하고,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도  항상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오신 분이었다.

 

     1994년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미래를 위한  교육을 걱정하셨던 삶,  모두가 함께 사는 삶,  나누는 삶, 자연을 사랑하는 생명운동을 펼치셨던 삶을 늘 몸으로 실천하시며  평생을 자신이 지은 작은 집에서 살아오시며 자신을 좁쌀 한 알의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었다. 자신은 좁쌀 한 알의 존재일 뿐이라고 말씀하시며,  드러내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을 큰 어른이라고 하는 이유가 너무도 많기만 하다. 

 

    " 내 것을 만들려고 세게 당기면 내 것이 되지 않고 쏟아질 뿐이야." 세상 만물 중에 자기 것은 없었다. 내 옷, 내 집, 내 돈 ...... .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살지만, 따지고 보면 착각에 불과했다. ' ( p. 135 )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이거늘,

분명 그대는 나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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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라~ 2011-06-22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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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 새창으로 보기
'우리가 평생 배워서 아는 것이 한 그릇의 밥을 아느니만 못하느니라.'

 

무위당 장일순의 말이다.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고 습득하게 되는데 그런 세상 속에서 정작 중요한 것들을 깨닫지 못하게 되고 잊어버리게 된다.

장일순은 그런 우리들에게 이 같은 글을 통해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우치라 말하고 있다.

 

부끄럽지만 책을 읽어보기 전까지 무위당 장일순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책 겉표지에 실려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저 농촌진흥을 위해 일하신 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장일순이라는 인물이 참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느꼈다. 조선시대에나 있을 법한 올 곧은 사람이 현재에도 저렇게 실존하구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평생 교육운동과 민주화 운동 나아가 생명운동에 몸바친 장일순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쓴 책 바로 '무위당 장일순'이다.

 

장일순은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태어났다. 당시 그의 집은 원주에서도 알아주는 부자였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망설임이 없는 집안이였다. 조부 장경호가 그러했고 아버지인 장복흥도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런 집안의 환경 속에서 장일순 역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26살이 되던해 도산 안창호의 대성학원의 맥을 계승한다는 의미의 대성학원을 설립하여 많은 사람들을 교육의 길에 이끌게 되었고 평생의 동료인 지학순 주교를 만나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섰으며 과도한 개발운동으로 인해 점점 피폐해져만가는 농촌을 살리기 위해 한살림이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생명운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한다.

 

그의 인생도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한국전쟁 당시 여러번의 죽을 위기를 겪기도 하였고 민주화 운동으로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었다. 그런 가운데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그의 노력은 꺾이지 않았다.

이런 그의 다짐은 그의 호에서도 알 수 있다. 60년대는 깨끗한 사회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청강(靑江)이라는 호를 사용하였고

70년대에 들어 무위당(無爲堂)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소유의 욕심을 버리고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겠다는 그의 의지였다.

80년대는 한 알의 작은 좁쌀이라는 의미의 일속자(一粟子)라는 호를 사용한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사람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한쪽에 치우쳐서 살아가다보면 세상은 살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협을 하고 살아가는 것인데 장일순은 그런 면에서 선(善)쪽으로 치우쳐 살아간 사람이다.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장일순이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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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해가저물면 2011-06-09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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