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4

노자(老子)공부를 왜 하나? > 동양고전(1980) | 바보새함석헌

노자(老子)공부를 왜 하나? > 동양고전(1980) | 바보새함석헌

고전연구 | 노자(老子)공부를 왜 하나?
작성자 바보새 14-07-05 08:17 조회1,2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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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공부를 왜 하나?
 
 
이 시대에 안 맞는 노자(老子)
노자를 한다고 그러게 됐는데, 그러지 않아도 대개 아시겠지요. 그래도 요새 우리 사는 이 사회를 보고는 이게 잘 맞지 않는 겁니다. 왜 노자공부를 하나? 나는 물론 좋아하지만, 이렇게 여러분이 많이 오신다는 건 좀 의아해요. 어떻게 알고 오지? 오는 거 나쁘다는 말은 아니예요. 좋긴 좋게 생각이 되지만, 글세. 왜 그런고하니 이 시대하고 맞지 않아요. 맞지 않기 때문에 나는 기어이 또 읽어가고, 나는 아마 보는 중에 늘 언제든지 주로 이걸 많이 봐요.
또 시간을 맡아 이렇게 한다고 하니까 책임 있게 해야지 무책임하게 할 수도 없고 해서 자연히 그럽니다. 그런는 게 뭐 한 해 두 해만이 아니고 이제는 수십 년이 돼 오는데. 나는 그렇지만 여러분까지 이 시대의 형편을 본다면, 어느 의미로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좋게 생각을 한다면, 뭘 찾아보는 생각이 아무래도 상당히 계신 분들인가 보다, 그건 그렇게 생각이 돼요. 그건 좋아요. 그렇지만 과연 마지막까지 이걸 놓지 않고 흥미를 가지고 찾아나가실까? 사람은 많으니까 많은 편이 좋지요. 좋기는 좋지만 언제든지 좋다는 건 너무 그런 때도 많이 있어요.
 
지금 한국의 기독교가 자꾸 너무 왕성해가요. 일년에 뭐 얼마씩 늘어가요? 아주 굉장히 좋은 것 같지만 무슨 까닭이 있어요. 이것도 좀 그런 의미로 걱정이 있군요.
 
그럭하고 또 하나는 지금으로서는 할 수 없는 거지만, 힘을 단단히 쓰셔야 될꺼야요. 이게 한문인데 한문 중에도 어렵단 말이야. 장자(莊子)는 더 어렵구요. 노자(老子)는 비교적 글자는 쉬운 글자를 썼지만 그래도 역시 고문(古文)인지라 글자가 잘못된 것도 있고 여러 가지가 그래요. 현대문 같지 않아서 어려운데. 또 사상적으로는 이걸 순서로 한다면 유교의 적어도 사서(四書)라는 거,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 이거는 봤어야 얘기가 되지 아주 깊이는 못되더라도 그저 보통 상식으로라도, 대개로라도 알았어야 이걸 이해하기가 쉽겠는데, 그것도 못한 분이 아마 있지 않나? 그런 걱정이 좀 있군요. 내가 썩 잘한다면 아주 초신자라도 알아들을 수 있게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본래 자기가 하고자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어떻게 돼서 그런 준비가 못돼있다면 참 어려운 일이예요.
 
그러니깐 이왕 오셨으니까. “아이 그럼 나는 틀렸지” 그럭하고 물러간다는 거 아니라, 이왕 오셨으니까 단단히 주의하고 이 한문, 이것 때문에 아까도 변증법 얘기했지만, 보통 말이 이건 본래 유교 생각이 있어서 거기 대한 반대로 나온 사상이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말이야 맞든지 안맞든지 그건 별개의 문제이고, 하여간 그런 지식이 있어야……
유교에서 말하는 인(仁) 의(義) 예(裔) 지(智)라든지 그 가르침은 상식적으로 아는 줄로 알고 자연히 그걸 알아야 할 거니까. 또 우리는 지금 사는데 옛날 것을 다 알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럴는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니 그래요.
적어도 이 나라에, 동양의, 여길 다시 봐야해. 이 동양이라는 나무에 어느 한 가지라는 거. 동양전체가 하나의 큰 동양문화라고 하는 거는 하나의 큰 거목(巨木)인데, 그 거목에 두 가지 세 가지인지 모르지만, 그 어느 큰 가지에 속하는 거니까 그 밑둥을 모르고는 그 다음에 그 꽃이 핀다든지 그 가지가 잎이 핀다든지 그럴 수 없지 않아요. 그래서 그건 알아야 돼요.
 
노자(老子)를 한다고 하지 않더라도 사서(四書)가 어떤 건지, 다까지는 몰라도 그래도 중요한. 그중에 어느 거는 알아둬야 한다고 하는, 지금까지 못하셨거든 그것도 겸해 생각하셨다가 언제 아무래도 해야 될 거니까.
그리고 왜 고전(古典) 얘기를 그렇게 하냐 그러면 그거는 어제 저녁도 했는데 어제 저녁 안오셨던 분도 있어서 하는 말이요 그러니까 그거는 될 수록 간략하게 해서 중복이 되지 않는 정도로 다시 할랍니다.
 
빛은 동방으로부터
지금 우리는 대체로 말하면 서양문명을 주로하고, 동양은 동양대로 옛날 17세기 더러는 했지만 일반적으로 도대체 이렇게 교통이 편리하지도 않았지만 동, 서의 교통이 없어서 동양은 동양대로 가고 서양은 서양대로 갔고 그렇지 않았소? 그랬기 때문에 영국사람으로서 인도에 와서 산 어느 시인이라는 사람이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니까 이 두 쌍둥이는 영원히 만날 길이 없다” 그랬는데 지금은 쌍둥이가 상당히 달라져서 만난 셈이죠.
서양 사람들이 처음와서 오해를 해서 그랬지. 자기표준으로 하니까. 이제는 동양에서는 인도의 종교, 중국의 종교나 철학, 이런 데도 상당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그러는 사람들이 늘었어요. 미국도 많아요. 이 노자(老子)만 해도 벌써 영문으로만 독문(獨文)으로는 몇 개나 있는지 모르지만 영문으로 나온 건만 해도 몇 해 전에 하는데도 서른 몇 가지라 그랬어요. 요새는 더 많이 났는지 몰라요.
 
그러면 얼마나 관심이 많은가? 알 수가 있지 않아요?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동양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게 됐냐 그러면, 기독교가 중심이 돼서, 또 그 다음에 자기 민족 내에 고래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무슨 그런 거 합해가지고 이루어진 문화인데, 주로 그중에서도 세계적으로 한다면 앵글로색슨이 중심이 됐어.
 
라틴족도 있고 슬라브족도 있고 그렇지만 슬라브는, 요새 슬라브 민족이야 차별할 필요가 없지해도 요새 러시아로 저러는 거는 공산주의 밖에는, 그건 슬라브 민족의 전통은 아니지, 주로 앵글로색슨족의 문화인데, 그런데 그 사람 자신들이 이거 이러다간 이젠 안되겠다. 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든다, 그래서 벌써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부터 뜻있는 사람들 속에서는 “빛의 동방으로부터”, 그거 뭐 아주 본래 옛날에도 빛이 동방에서 시작했어.
 
종교란 종교는 다 동쪽에서 나서 서쪽으로 갔어요. 맨 처음에 우리가 역사적으로 제일 낡은 종교로 아는 조로아스트, 조로아스트 경전은 잘 알지도 못해요. 아주 처음에는 굉장한 뭣이 있었다는데, 그만 그 옛날 페르시아 나라가 망하고 그러는 바람에 그 경전이 타버리고 그 중에 일부만이 남아있는 것이 지금 배화교(拜火敎)라고도 하고 조로아스트교라고도 하는 건데, 뿌리로 한다면 그게 시작이 돼가지고 아마 인도의 것도 거기서 나오지 않았나?
 
그러는데, 그 다음 희랍에서 있었고 로마로 전했고, 그를 통해서 서양으로 퍼진 것이 서양문화라는 거 아니요? 웨스턴 컬처(western culture)라 하는 거, 웨스턴(western)이라 그럴 때는 미국까지를 넣어서 모두 그 계통인데, 그게 지금 말대로 그중의 특색이 철학도 있고 물론 종교도 있지만 특별히 과학이 발달이 돼가지고 과학적인 문명으로 갔는데, 거기서 모순이 드러나는 것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이것도 이제 새로운 뭣이 나오기 전에는 건져지지 않을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새삼스럽게 동양에 대해서 처음에는 모르고 깔보고, 동양에 무슨 참 의미의 역사나 종교가 있으랴? 종교나 철학이 있냐? 참 의미의 철학도 종교도 있다면 서양에 있지 동양에는 없다,
 
그랬던 건데 차차 가서 자기네가 식민지로 만들고 착취를 해 먹기는 먹으면서도, 그중에 뜻있는 사람들이 보니까 아니 그렇다. 새로 눈을 부비고 동양걸 연구하게 됐는데, 지금처럼 이렇게 제2차 대전 이후처럼 서양문명의 모순이 이렇게 지독하게 폭로되기 전에 있어서도 벌써 이미 슈팽글러라는 사람이 “서양의 몰락”이라고, 내가 젊어서 20대 서양의 몰락이라는 소리가 나오게 됐으니까 매우 많이 그런 쪽에 주의를 하고 그랬고, 그 후에 토인비 같은 사람은 더욱 범위를 넓게 했고 했소마는, 그런 영향도 있고 해서 동양의 고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동양 사람은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고 우리는 옛날 동양 사람이 과학적인 점에 결함이 있어서 이 현실사회에 있어 지식이 너무 몰랐다가 정신면에 있어서는 물론 상당히 높은데 간 것이 있지만, 이제 그런 면에는 없어요. 그랬다가 이렇게 참혹한 운명을 당해서 수천 년 역사를 가지는 나라로서도 서양 사람의 식민지로 전락이 되고 말았으니까 ……
서양문명 배워야지. 내가 어렸을 때는 일색으로 그거요. 될 수록은 우리도 개명(開明)해야 돼요. 개명해야 된다는 건 뭔고하니 서양식으로 해야 된다, 옷도 이제는 다 그러게 돼서 아주 양복도 우리 옷이 됐소마는, 나는 일부러 하는 것 아니고 이때까지 입던거니까 그렇지, 지금 이렇게 있는 사람이야 어디 입게 됐어요?
그것도 하나의 심볼이지만, 생각도 역시 종래 거를 내버리는 거 보다는 찾아볼 필요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에 이렇게 됐어요. 그 생각은 이제 제2차 대전 전부터 사실은 하더랬는데, 2차대전 이후로는 더구나 그런 생각이 나서 동양고전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인포메이숀(information)과 트랜스포메이숀(transformation)
그 얘기는 내가 하는 것보다 서양 사람의 말을 빌려 하면, 여기 재미있게 읽고도 이름이 잘 생각이 안나는데, 인도철학을 연구한 독일 사람인데, 첫머리에 다 이런 얘기를 했어요.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이 다른데 지금 서양 사람은 아주 동양 사람이 옛날에 했던걸 그거를 우리는 이제부터 배워야 되게 됐다” 그러고 말을 해요. 특색을 말하면 뭔고 하니 서양문명이란 인포메이숀(information), 넓은 의미로는 교육이니까 인포메이션이 목적인데, 우리나라 말로 하면 문견(聞見)이라 그러야지요. 사람은 문견이 넓어야 해. 듣고 보는 게 많아야. 왜 그런고 하니 안다는 거 남에게 배우지 않고 알아요? 그러니까 서양 사람은 그저 인포메이숀, 어디가나 인포메이숀이 잘돼 있나? 없나?
 
그 사람 말은 동양 사람은 인포메이숀이 목적이 아니다, 왜? 지식이 왜 필요한고 하니 이 나를 가지고 어떻게 이 사방에서 내게 대해오는 토인비의 말을 빌리면 찰렌지(challenge 도전) 해오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리스폰스(response 응전)를 하느냐? 도전해 오는 환경에 사람이 어떻게 대처해 가느냐? 그걸 알아야지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그걸 찾고 분석해보고 종합해보고 여러 가지를 하지 않아요? 그거 나온 게 인포메이숀이에요. 짐벨인가. 그 사람 말이 동양 사람은 태도가 근본부터 달라서 이걸 가지고 내가 어떡하면 저 환경에 잘 극복을 해갈 수가 있을까? 여기다 둬요. 저쪽에 뒀나? 이쪽에 뒀나에 따라서 달라요.
그러니깐 그걸 재미있게 트랜스포메이숀(transformation)이라고 그랬어. 하나는 인포메이숀이라는 대신에 트랜스포메이숀이라고 그랬어. 변화, 동양에서는 그걸 기질의 변화라고 그랬어. 기질(氣質)이 변화해야 된다, 기질은 우리 타고나는데 이 육신, 몸과 마음, 이것을 기질이가고 기(氣)와 질(質), 이것은 육신으로 타고난 거지만 사람은 언젠가 가서는 이것이 한번 변화해서 마치 누에란 놈이 뽕을 먹고 다 자라면 한 번은 번데기가 됐다가 나비가 돼 날아가는 모양으로 그러면 번데기가 돼가지고 변화하면 누가 그게 누에에서 나왔으리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게 정말 트랜스포메이숀인데, 그렇게 공중에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그런 모양으로 사람도 그래야 돼.
 
그러니까 이 부족한 유한(有限)한 나지만 이건 날 때 본래 무한(無限)이 아니예요. 우리는 어느 특수한 시간에, 어느 특수한 곳에, 어느 특수한 전통 속에 어느 민족으로 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완전히 내 마음대로 어디 돼요?
그러는 거를 어떻게 유한한 이걸 가지고 극복을 해 가느냐? 밖에서 오는 여러 가지 자극을 말이야. 그러니까 저걸 어떡하면 변경을 시켜서 빨리 가도록, 사람의 다리로 부족하면 그럼 짐승이라도 잡아타야지. 짐승이 안된다면 수레라도 만들어 봐야지. 수레라도 부족하면 자동차라도 만들어야지. 증기차라도 만들어야지. 그 사람들은 저쪽에다 대고 고쳐가는 데, 그것도 거의 무한(無限)이지 않아요?
우리는 그걸 다 생각을 안하고 어느 정도는 그럭하지만, 중점이 어디 있는고 하니 그러면 이 유한(有限)한 다리를 가지고 가면 어떡하지? 내가 어떡하면 내가 거길 적응을 해가지? 그게 그 사람들과 다른 것인데, 이제 서양문명이 이렇게 나가면 다 자동적으로 문제가 해결이 돼, 문명이 발달해서 인간이 아주 자동적으로 완전한 지경까지 가는 걸로 생각을 했었는데, 그거는 이제 하나의 착각이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건 다 알고 있지 않아요?
 
쩔쩔매는 서양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럼 어떡하지?” 동양에 거기 한번 찾아보면 어떠냐, 이제 그런 생각을 하게 돼서 동양 얘기를 자꾸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서양 사람이 문예부흥 때 자기네 고전을 찾아서 교회라는 제도 밑에서 그때도 우리 동양이나 비슷해서 학문이나 이런데 연구의 자유가 없던 것이 이상하게도 도리어 교회 속에서 과학이라든지 그중에 더구나 화학이 먼저 발달이 됐소만, 화약도 교회 속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그럭해서 이렇게 됐지만.
우리는 우리 고전을 두고도 도리어 옛날에는 우리가 상당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양 사람들한테 이 현실적인 이것 때문에 눌려서 그만 자신을 잃은 다음에는, 우리 스스로도 그만 "우리 동양은 뭐 형편이 없는 걸“로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러질 말고 이거는 상기도 수천 년 긴 역사를 가지고 돼온 전통인데 옛날의 지혜가 여기 있고,
우리 선조들은 이것대로 살아 부족을 느끼지 않고 살아갔는데, 그럼 서양 사람한테 기운이 너무 눌려서 밖에 것에만 인포메이션에만 목적으로 하는 문명에만 미쳐서 그러질 말고, 그것도 지금은 또 어느 한계에 가 부딪쳐서 자기네도 어쩔 줄을 모르고 그러니까 우리 이편을 좀, 서양 것을 버리진 않아야지. 그 과학적인 그것도 참작을 해야지만 너무 그 사람들이 또 그 대신에 속에 것을 무시했던 그 까닭으로 저 사람들이 쩔쩔매게 됐으니까, 우리는 이제 우리가 이 동양의 옛날 우리들의 선조들이 남겨놨던 지혜를 찾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하는 것 보다는 우리가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런대 조금 더 자세하게 말을 한다면 기독교신앙으로 나는 본래 어렸을 때부터 교회 속에서 자라났으니까 그런데, 기독교를 믿는 사람까지도 “동양적인 것 가지고는 안된다”, 거기에 반발이 조금 있었어요. “그렇지 않지?” 그거는 종교라는 건 밑뿌리가 다 하나일건데, 발표형식이 다를 뿐이지.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내버리고 도리어 먼지 속에 묻혀 있었던 우리의 옛날 그 종교를 찾아들어가노라면 거기 뭐 지금 이 시대의 든 병을 고칠 거 거기서 나오지 않을까? 그래 다야 할 수 있소? 나이도 들고 그러니까 하지만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것이 노자. 장자(老子, 莊子) 그래서 읽고 그러게 됐던거요.
그러니까 아까 말대로 본래 공자(孔子)라는 이는 가르쳐도 중류이하, 사람으로 한다면 타고나기를 상(上)으로 타고난 사람, 중(中)으로 타고난 사람, 하(下)로 타고난 사람, 그렇게 구별해 말할 수 있지 않소? 그거는 상중하란다고 거기 우열감(優劣感)을 가지진 마세요. 그거는 못 쓰는 생각이고 사실이 타고나는데,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야요. 그거는 알아야 돼요. 내가 잘 타고났단다고 자기의 자랑일거 없지. 그렇게 낳아줬으니까. 낳아줬다는거야 어머니 아버지의 재간으로 된거 아니지. 어머니 아버지의 살점을 조금 거기 빌려줘서 그럭해서 났을 뿐이지 그 사람의 소질이라든지, 가령 아인슈타인이면 아인슈타인의 두뇌라, 뉴턴의 두뇌라 그 정신이 어디서 났냐?
그거 반드시 부모가 낳았다고 그러겠어요? 그러니까 그거는 종교적인 말로 하면 참 어떻게 오는지 하느님이라고 그럴까. 어떻게 어디서 주은 것인데.
 
공자(孔子)와 노자(老子)
그보다 알아듣기 쉽게 말을 하면, 내려오는 역사에, 그 역사에서 받은 유산이 말하자면 통장에 들어가 있는 저금 모양으로 돼있는 그것을 어떻게 돼서 그 선이 나에게 닿아서 내가 그걸 쓸 수 있는 자리에 간거니까 그거는 전체의 소유지. 나 혼자가 그걸 독점해서 내 마음대로 누릴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상중하라고 그럴 때에 상층사람 중류사람 하류사람 그렇게 생각을 하지마시고 본래 소질이 아주 풍부하게 모든 면이 아니라 어느 면에서 아주 특별히 타고나는 사람, 중쯤 타고나는 사람, 아랫 사람 있는 것만은 사실이요, 그러니까 그러면 그걸로 해서 높이고 스스로 자랑을 한다든지 나는 낮다고 해서 또 자멸감(自蔑感)에 빠진다든지 그러질 말고, 내가 가장 높이 탔으면 높히 탄 이것도 전체의 명령이요 전체가 내게 주는 거니까 전체를 향해 써야하니까 떨어진 사람을 이끌어갈 책임이 내게 있다, 그렇게 보는 거고, 또 내가 떨어졌으면 떨어진 걸 부끄럽게 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낸 것이니까 나는 나 할 노릇을 하면 또 나보다 풍부한 사람들이 잘 아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걸 배워가면 그만이지 그렇게 생각을 해가는 그게 종교란 바로 그 점을 겨누는 것일 것인데, 그 종교에서까지도 그렇게 잘 되지못합니다만, 하여간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게 중요해요.
 
적어도 우리가 이만하면 중(中)은 되지 않소? 중 이상까지 가는 사람 있겠지만 더러 많지는 않을꺼고 적어도 중은 되는데, 공자 주로 이 사람들, 그러면 세상을 대부분 차지하고 역사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중 되는 사람이니까, 아주 현실적인 생각이야요. 공자님은 실지로 그러니까 높고 심오한 무슨 그 체험이 있지 없는 이 아니요. 여러 가지로, 공자님을 본다면 그런 이지만 일반사람 이걸 볼 때에 이걸 가르쳐줘야지. 그러니까 아주 실제 실천도덕을, 실천지식을 그 사람들에게, 그때는 도덕만이 아니요. 그게 전부니까 과학도 거기 있고 예술도 거기 있고, 공자님은 음악에 얼마나 취미가 있었던지 아시오?
 
좋은 음악 들은 다음에 그게 너무 좋아서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몰랐대. 삼월부지육미(三月不知肉味)라, 그러면 공자님이 얼마나 음악에 뭣이 있었던지 알 수가 있을꺼야요. 하여간 공자의 가르침이란 그런거야요. 그런데 그러나 중류사람을 가르친다 해도 중류사람이 실 살림에 필요한 그것을 주도할 때면 뿌리는 어디 있냐 그러면, 뿌리는 역시 보이지 않는, 보다 깊다면 깊고 높다면 높고 어느 무슨 그런, 자연히 그건 형이상적(形而上的)인 거야. 동양 말로는 형이상(形而上) 형이하(形而下), 서양말로 하면 메타피직(metaphysics)이라고 그러지? 도리어 피직(physic)다음에 와서 메타피직 이라고 그러는데, 한문으로 번역하면 형이상(形而上), 형(形) 위에 있는거지. 그런데 그게 뿌리가 돼야 알건데, 그걸 말해 줄라면 언제 이걸 실지 훈도(訓導)를 해요? 실지로 필요한 일을 우선 줘야지.
 
노자(老子)는 그 중에서도 어려운 시대에 났어요. 공자도 어려운 시대에 났지만 공자님은 그리 심치는 않어. 주(周)나라 때가 옛날 봉건시대에서 아주 전형적으로 발달된 문화란 말이야. 통일문화로 다 모든 것이, 아주 완전은 아니지만 비교적 모든 게 잘 짜임새 있게 조화가 돼서 살아가던 그 문화가 한 4-5백년 계속이 됐댔는데, 그게 이제 점점 어느 정도를 지내니까 부패되게 되고 잘못되는, 어지러워졌어. 그런 때 나서 공자님은 어떡하면 잘못된 것을 전시대 모양으로 다시 한번 재통일을 해서 그런 시대에 가볼까. 그런 노력을 하시던 이고, 같은걸 놓고 노자도 대개 같은 시대에 난 것 같은데 전통으로 내려오는 여기서 하면 공자님보다 한 50년, 적어도 한 30년은 앞서 난 이가 아닌가 그렇게 추산이 되는데 그거는 분명한 게 없어요.
 
참 아는 사람은 말 많이 안한다
옛날 기록이 없으니까 근래의 학자들이 동양사람 서양사람 다 연구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대부분이 대개 보기를 그것은 글이 이렇긴 이렇지만 사상적으로 봐서 이것은 공자 후에 된 책이다, 공자 후에 난 사람이다, 왜 그런고 하니 아까도 변증론 얘기했지만 벌써 무슨 데시시(thesis)가 있고야 앤티데시시(antithesis)가 있지 않냐? 노자는 앤티(anti), 강하게 본래 있던 생각에 대해서 비평하는, 앤티데시시로 나온 거니까, 그전에 있던 유교가 있어 가지고야 되는 거니까 연대가 후일꺼다, 이런 근거 밑에서 이걸 공자 보다 후에 사람이 쓴 거고, 노자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렇게 보기도 하는데, 중국에 본래 중국 사람으로서는 자기의 문화의 오래라고 하는 거를 또 그편을 생각해 그러는지,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지만 대체는 공자보다 먼저 있다고 하는 전통적인 그거를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그래요.
 
그래서 생각을 하면 그런 문제는 나는 상관을 안하는 사람이지만 역사적으로 있기는 있었던 인물이겠지 없었지 않을꺼요. 그리고 이 책이 그럼 노자라고 하는 한 사람이 다 쓴거냐? 불과 한 5천자 밖에 안되는데. 이게 어떤 사람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걸 모은 거다, 그런 의견도 있대요. 그런데 모은 거라고 하는 거는 물론 고증을 다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하게 그렇게 그럴 수는 없고, 그런데 이걸 보면 첫장에서부터 81장이라고 그랬는데 1장 2장하는 장 수도 후에 와서 붙은 거지 본래는 그것도 없었다는 거요. 없었다는 건데 그다음에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쳐서 다 고문(古文)이 돼 모르게 됐던거를 찾아내고 이럭해가지고 지금은 고전이 된 책이지만 그런데 81장을 전체를 놓고 봐도 그게 다, 노자(老子)의 특색은 어느 장을 쳐들어도 그 소리야요. 81장이 새소리가 없어요. 이걸 봐도 저걸 봐도 그러니까 소금 집어먹기 같아. 여기서 집어먹어도 짜고 여기서 집어먹어도 짜고, 한 숟가락 먹어도 짜고 한 알 먹어도 짜고, 그러니까 사실은 노자의 1장을 잘 이해를 한다면 그 다음에 거는 저절로 돼요. 그 소리가 그 소리.
그런데 그게 그렇게 똑같은 하나의 하나의 소리인데, 그거를 이렇게 쓰고 이렇게 쓰고 해도 지루한 맛도 없고 그것도 또 그것대로, 그래 사상이라는 거는 재미있잖아요? 깊은 사상일수록, 깊지 않고는 그럴 수가 없는데, 여러 가지가 있어요. 복잡한, 그런데 그런 것이 81장의 성격이야요.
 
본래 노자 자신이 말 많이 하자는 사람이 아니야. 잘 알지 못하니 말 많이 하지. 잘 아는 사람은 말 안한다. 그리고 또 듣는 사람을 위해서 말 많이 해주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도 아니해요. 읽어가면서 알겠지만 그래서 된 요건데, 차이가 그렇게 있어.
노자가 공자보다 전인지 후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춘추시대는 혼란의 시작이고, 그 다음에 춘추시대가 한 200년 지나가고 후에 오는 300년이 맹자가 나서 살았던 그 시대가 더 혼란해졌어. 요새 우리 사는 이 전환기에, 아주 전적으로 새로워지려고 해서 어지럽게 된 이때니까 통일이 없어. 제각기 제각기 그러고 나라끼리 서로 부국강병(富國强兵)주의를 가지고, 아주 피나는, 문자 그대로 참 전쟁을 해가는 시대인데, 장자(莊子)는 물론 그 시대에 난 사람이고 노자는 그 시대나 그 시대 전에, 조금 전에 났던거니까 그런데 있어서 같은걸 놓고 공자는 이런 어려운 때니까 어떻게 제가 앞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실지 지도를 해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에 하니까 실천도덕을 중심으로 해서 실지지식을 가르쳐주는 거고, 노자의 생각은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해서 어찌 되는냐? 근본에서 잘못돼서 그러는데 이제 그 근본을 다시 찾아 돌아가기 전에는 어찌 그럴 수가 없지 않으냐? 보다 더 생각이 깊은 거요. 그러니까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어.
 
아주 그 심오한 높은 지경을 직역하면 그만이니까 말수가 적지 않아? 그렇지만 후에 보면 유교가 한 때는, 한 때만이 아니지 마지막까지 내려 오도록까지는 중국 정치역사에 있어서는 늘 언제든지 등뼈노릇을 해서 내려온 거지만, 이 중국역사에서 노자사상 없었더라면 못 내려왔을꺼예요. 물론 이 노자사상이 있고, 불교 들어왔고, 불교와 노자가 통하는 데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다가 참 의미의 고등종교라고 할 수 없지만 노자 장자의 그 영향을 입어서 또 그걸 고약하게 잘못된 편으로 만들어가지고 도교(道敎)라는 거 생겨났고, 그래서 지금까지 중국역사를 이루어오니까 이거 없이는 이룰 수 없는거. 중국역사가 있었을 수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깊은 의미에서 하면 도리어 역사의 교훈을 주기는 공자보다도 어느 의미로는 이게 더 깊다고 그럴 수 있지 않냐? 그래서 지금은 도리어 중국은 우리가 가보지 않으니까 모르겠소마는, 서양 사람들의 찾는 거를 보면 공자도 중요하게 알지만 그보다 노자나 장자를 더 흥미를 가지고 찾고 있는거요.
 
영적(靈的). 정신적으로 해석한다
교재는 내가 하는 이거는 원체 그러니까 노자에 대해서 주석이 많아요. 많은데 그중에서는 고래로 옛날 사람은, 요새와는 또 달라요. 옛날 사람으로서는 노자익(老子翼)이라는 걸 제일 편리하다, 왜 그런고 하니 각 사람의 주(註)를 다 보려면 일일이 그걸 언제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그러겠지만 그럴 새가 있어요? 그런데 이거는 초횡(焦吰)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중에 여러 사람 중에서, 이 사람도 상당히 재주가 있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모든 걸 골라서 자기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말도 이따금 나오지만, 자기만이 아니고 남들의 좋은 주(註)를 모아서 여기다 냈어요.
이 책의 특색은 본문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본문을 한 사람이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개중에 그래도 누구누구라고 하던 주로 좋은 걸로 몇 개를 골라서 그 요점되는 거를 같이 실었으니까, 이 사람 저 사람의 거를 볼 수가 있어. 그래 편리한 거야. 이름도 노자익이라는 건 왜 익(翼)이라 그랬는고 하니 마치 새에게 나래가 있으면 잘 날 수 있는 모양으로, 우리가 옛날의 이런 정신이 있으면 이걸 알아가는 데, 이런 주(註)가 있으면 날개가 되는 것 같아서 덕(德)을 우익(羽翼)한다, 호랑이에 나래붙은 사람이라 그러잖아요. 노자의 이것을 잘 알기가 쉽게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좋은 주를 붙였다, 그런 의미로 노자익(老子翼)이라 그래요. 익(翼)은 날개란 말인데, 우익도덕(羽翼道德)이라, 도덕을 날개 붙여서 도와간다, 그런 의미로 한거야요.
 
그다음에 세세한 거는 읽어가면서 할건데, 미리 내가 얘기하는 건 나는 고증(考證)하는 그런 거는 취미도 없거니와 또 할래도 할 수도 없어. 이제는 벌써 나이도 그랬고 일일이 다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거는 상관 안하고 하니까, 그런 점에 흥미가 있는 이는 다른데서 그걸 찾아서 하시는 거 좋겠고, 나는 그저 이것을 쉽게 말하면, 우리 마음에 정신의 양식으로 삼도록, 그러니까 고증으로 노자가 먼저 났냐? 공자가 먼저 났냐? 알면 물론 알아서 더 밝히면 더 좋지만 그거 못하더라도 괜찮고, 또 여기 있는 말도 이대로 본문이 다소 차이도 있는 거 있고 해서 어떻게 해석할꺼냐 하는데, 주로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그걸 기독교 신학의 말로 빌어하면, 컴멘타리(commentary),이런 고전이 있으면 주석 책이 있잖아요. 컴멘타리가 있으면 어떤 주류로 하느냐? 어원적으로 이 본문텍스트를 문법적으로 연구를 해서 하는 걸 텍스츄얼크리티시즘(textual criticism)이라고, 그중에서도 기독교에서는 하이어크리티시즘(highercriticism), 우리 젊었을 때 한창.
 
이제는 하이어(higher)라는 말도 빠지고 말았습니다마는, 옛날 고대의 영감들이 하던 그런 것만이 아니고 아주 신식 어학적으로 돼가면서 이걸 역사적으로 비판하는 걸 하이어크리티시즘이라고 그랬는데, 지금은 아주 그게 곧 신앙인 것처럼 그렇게 됐소만, 그런 것도 해도 물론 좋지만, 그럭하지 않는 대신에, 번역이면 번역본, 부족하면 부족인 줄을 알면서도 그대로 이걸 보면서, 그걸 그대로 정신적으로 해석을 해서 우리 마음의 양식으로 하자고 할 때는, 그걸 디보쇼날(devotional)이라고 그러지. 영적(靈的)으로 해석한다 할까 정신적 해석이라 할까. 그런 견지에서 나는 하는 거니까 다른 학문적인 그런 거는 다른 데서 참작을 하시고, 될 수 있으면 여기 그걸 해가는 데 필요한 건 물론 내가 아는 한은 말하겠소마는, 혹 그런 것이 부족하더라도 그런 줄 아시고 하자고하는 그런 말만 해둡니다.
 
 
씨알의소리 1990년 8월 115호(노자강의 녹음테이프를 녹취한 것)
저작집30; 24-45
전집20;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