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과 무위(無爲) - 『노자』와 『장자』, 함곡관(函谷關)에서 종로(鐘路)까지
대학지성 In & Out 기자
승인 2020.08.02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9강>_ 김시천 상지대학교 교수의 「<노자> <장자> - 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과 무위(無爲)」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9강 김시천 교수(상지대 교양대학) 강연의 주요 대목을 발췌해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시천 교수는 노자(老子)가 지었다는 책, 『도덕경(道德經)』 혹은 그의 이름을 딴 『노자』와 그리고 『장자(莊子)』라는 “두 텍스트에 들어 있는 어떤 철학이나 사상을 소개”하는 대신, 주(周)나라 시절 함곡관(函谷關)에서의 『노자』와 20세기 한국 종로에서 강연을 통해 확산된 『노자』 사이 “차이와 간극을 보여주려” 한다고 이야기한다. “달리 말해 『노자』라는 위대한 ‘전통’의 기원이나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논리적 비약과 시대의 초월을 통해 우리의 ‘상식’과 그것이 터 잡고 있는 ‘현실’의 기반 위”에서, “한국에서 ‘노장(老莊)’ 읽기가 갖는 독특성과 현주소를 ‘무위(無爲)’를 중심으로 조망”해보고자 한다고 말한다.
▲ 지난 7월 4일, 김시천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9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노자』와 『장자』, 함곡관에서 종로까지
공자(孔子)가 살아 있던 시절의 어느 날, 주(周)의 수장실(守藏室) 사관인 노자(老子)는 함곡관(函谷關)을 나서 서쪽의 변경으로 길을 떠난다. 관문을 지키던 관리가 노자가 기이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노자는 ‘도(道)’와 ‘덕(德)’에 관한 두 편으로 된 5000여 글자를 남기고 훌훌 떠났다고 한다. 이것이 한(漢)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기록한 ‘노자’와 그가 지었다는 책, 『도덕경(道德經)』 혹은 그의 이름을 딴 『노자(老子)』에 얽힌 전설이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한국의 종로, 1970년 4월 19일 『씨알의 소리』를 창간한 씨알 함석헌은 1971년 7월부터 1988년 5월까지 『노자』와 『장자』를 주제로 공부 모임과 공개강좌를 진행했다. 이 강좌에서 함석헌은 “박정희가 유교의 충효를 강조한 데 반해 노장(老莊)의 자유 정신과 초월 사상을 강조했다.” 특히 『도덕경』은 씨알의 삶에 최소한의 간섭만을 하는 최상의 통치자의 모습으로 ‘무위(無爲)’를 주장하는데, 이는 곧 함석헌이 보기에 최소의 정부가 최선이며 소외된 소수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원칙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에게 『노자』의 ‘무위’는 무정부주의적인 정치의 모범이자 씨알의 사회 정치적 참여를 가능케 하는 것인 동시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넘어서서 서구 문명의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동양적’ 대안으로 보였다. ‘무위’가 무엇보다 치자들의 씨알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이자 씨알 저항의 토대였던 것이다. 사실상 이런 저항적 의미의 ‘무위’는 『노자』가 아닌, 오로지 『장자(莊子)』에게서 찾을 수 있는 이념이자 실천 논리였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노장 전통(老莊 傳統, the Lao-Chuang tradition)’을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
과연 함곡관을 떠나며 남겼다는 그 책이, 1970년대 종로 YMCA에서 함석헌이 강론한 책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문제가 많은 태도’이자 어쩌면 황당한 판타지 소설에 가까울지 모른다. 한자로 된 ‘원문(原文)’을 읽는 것이 곧 그 텍스트가 가진 ‘원(原, original)’ 사상 자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몰역사적인 시각 또한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노자』와 『장자』라는 두 텍스트에 들어 있는 어떤 철학이나 사상을 소개하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관심은 함곡관의 『노자』와 종로의 『노자』의 차이와 간극을 보여주려는 데에 있다. 달리 말해 『노자』라는 위대한 ‘전통’의 기원이나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논리적 비약과 시대의 초월을 통해 우리의 ‘상식’과 그것이 터 잡고 있는 ‘현실’의 기반 위에서, 21세기 한국에서 ‘노장’ 읽기가 갖는 독특성과 현주소를 ‘무위’를 중심으로 조망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2. 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을 찾아서
20세기 『노자』와 『장자』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새로운 문헌의 발굴 덕분이었다. 특히 1973년 마왕퇴(馬王堆) 백서(帛書) 『덕도경(德道經)』의 발굴은 『노자』에 대한 해석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변화는 『노자』에 대해 ‘도(道)’ 중심의 해석에서 ‘덕(德)’ 중심의 해석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도’가 고대 그리스의 ‘로고스(logos)’에 비견되면서 우주론, 인식론 등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 유사한 것으로 해석되던 경향은, 1980년대 이래 보다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해석과 사상사적 접근으로 전환되었다. 아마도 그 가운데 한국에서 가장 크게 주목받았던 것은 ‘황로학(黃老學)’에 대한 관심과 위진(魏晉) 현학(玄學) 논쟁이라 할 수 있다.
김용옥이 한의학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한(漢) 초(初)의 종합적 사상 경향으로 황로학에 주목할 것을 촉구한 것과 더불어, ‘현학 논쟁’은 1990년대 한국의 도가철학회를 중심으로 ‘노장(老莊)’을 역사적으로 접근하게 해주었다. 특히 ‘유무(有無)’를 논하는 고원한 형이상학 담론으로 여겨지던 위진 시대의 현학 논쟁이 실질적으로는 제도와 본성을 둘러싼 논쟁이었다는 점을 환기시켜주었다. 그 이후 한국의 ‘도가’ 연구자들은 20세기 초반 중국의 철학사가들이 만들어낸 ‘철학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주석사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다.
백서 『덕도경』의 발굴이 가져온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는 『노자』와 『장자』를 별개의 텍스트로 분리해 보는 시각이 체계화되었다는 점이다. 『노자』가 황로학 계열의 문헌이라는 인식은, ‘도’ 중심의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관심에서 벗어나 ‘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사상적 텍스트로 이해하게 되면서, 나아가 ‘도’와 ‘법(法)’의 친연성을 눈여겨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용어인 ‘도가(道家)’ 대신 ‘도법가(道法家)’라고 부르는 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노자』는 이제 『장자』보다 『한비자(韓非子)』, 『회남자(淮南子)』 혹은 『손자(孫子)』와 같은 병가(兵家)와도 함께 해석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이러한 연구 경향의 반영이 이른바 ‘노학(老學)’ 또는 ‘장학(莊學)’으로 표현되었다면, 한국의 경우 주석사를 통해 『노자』와 『장자』를 구분하여 접근하는 새로운 흐름을 형성함으로써 ‘노장 전통’을 보다 객관적인 시야에서 조망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을 말하는 데 있어 기존의 논의에서 소홀히 취급되었던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그 하나가 조선 유학자들에 의한 『노자』와 『장자』 주석 전통이라면, 다른 하나는 20세기 기독교 계열 —유영모, 함석헌은 물론 오강남, 이현주 등 다수의 저서나 역서 그리고 대중적 독자층이 있는— 사상가들에 의한 『노자』와 『장자』 해석 전통이다. 내가 보기에 함곡관을 나서서 역사를 가로질러 서울의 종로에 이르는 『노자』로 이어지는 과정은, 논리적 방법으로 이해되거나 텍스트 연구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에서 여전히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노장 전통’은 중국 철학사와 한국 철학사의 연속적 서술을 통해 해명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베이징의 『노자』와 서울의 『노자』는 물리적 거리를 넘어서는 역사의 거리, 20세기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밴 살아 있는 역사의 산물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 터 잡고 있는 ‘노장 전통’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치 물리학의 퀀텀 점프처럼 해석학적 초월(the hermeneutical quantum jump)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3. 무위(無爲)의 기원과 『노자』 전승
20세기 한국인에게 『노자』 하면 가장 친숙한 표현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된 ‘무위자연’은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또는 그런 이상적인 경지”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리고 포털사이트에서 ‘무위자연’을 검색하면 언제나 ‘도가’ 또는 노자와 함께 검색어로 추천된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처음 등장한 ‘무위’는 노자가 아닌 공자가 최초의 발화자이며, 사전적 정의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의미는 『노자』와는 상관이 없고, 『장자』와 결합되면서—즉, ‘노장’ 전통— 등장하는 전혀 새로운 의미이다.
역사상 ‘무위’를 가장 처음 언급한 것은 공자의 『논어(論語)』이다. 공자는 “무위하면서 다스렸던 분은 아마도 순(舜)일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남쪽을 바라보았을 뿐이다.”(『논어』 「위령공(衛靈公)」)라고 말한다. 이는 「위정(爲政)」에서 덕치(德治)—더불어 군주가 덕으로 다스릴 때 모든 신하가 자신에게 주어진 적절한 예(禮)를 행함으로써 전체적인 조화가 이루어지는 예치(禮治)가 구현된 상태—를, 마치 가만히 있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뭇 별이 공전하듯이 도는 모습에 비유한 것과 연결되어 이상적인 통치를 묘사하는 말로 해석되곤 한다. 그런데 공자의 이 비유는 유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제자백가 공통의 유산이기도 했다.
가장 앞서 ‘무위’가 고대 중국의 역사 과정과 어떤 연관을 갖는가를 잘 보여준 것은 크릴(H. G. Creel)이다. 크릴은 『노자』의 무위의 기원을 소급하면서 공자를 언급하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은 신불해(申不害)로부터 기원하는 통치 행정과 관련된 기술로 이해한다. 달리 말해 고대 중국의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출현과 그에 따른 관료제의 발전의 근거를 ‘무위’와 연관 지어 이해한 것이다. 즉 신하의 유위(有爲)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국가 행정과, 이에 대해 인사권, 감찰권, 상벌권을 운용하면서 이루어지는 군주의 무위는 『노자』의 “무위를 행하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3장: 爲無爲則無不治)”라는 문장을 깔끔하게 이해시켜준다.
하지만 크릴의 설명은 고대 중국에서 관료제적 통치 체제로서의 ‘무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생, 발전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해명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도가적 무위’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숙제로 남기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노장사상’이 등장하는 배경이자 맥락이 된다. ‘노장사상’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나는 ‘노장사상’에 대한 정확한 의미 규정은 “유학자들이 『장자』를 통해 해석하는 『노자』 전승”이라고 보고 싶다.
4. 『장자』의 ‘무위’와 ‘노장 전통’
『노자』 계열의 문헌군에서는 ‘노장 전통’의 싹을 찾아볼 수 없다. ‘노자 전승’이란 『노자』라는 ‘텍스트’와 다양한 고사가 엮이는 과정이며, 다른 한편 한 초의 공자 전승과 노자 전승이 대립하는 정치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하지만 『노자』의 무위와 『장자』의 무위는 본래부터 전혀 상이한 의미와 맥락을 지닌 것이었다. 오늘날 『노자』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 된 첫 문장 “도를 도라 말하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에 대해 「도응훈」은 수레바퀴 깎는 장인인 윤편(輪扁)과 제(齊) 환공(桓公)의 고사를 인용해 설명한다.
성인의 글을 읽고 있던 환공에게 윤편이, 알맹이는 성인이 가슴에 품고 죽었으니 다만 찌꺼기만 남았을 것이라 조소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노자를 운운하며 “도를 도라 말하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를 인용한다. 이는 ‘존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언어철학보다는 노하우(know-how)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도응훈」이 보여주는 『노자』 이해는 매우 실제적이고 명쾌하며, 지극히 정치적이다.
사실 이러한 해석의 기조는 『노자』의 ‘무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우리에게 오늘날 친숙한 ‘무위자연’의 개념이 『노자』에는 없다. 『노자』에서 ‘무위’의 주체가 성인 혹은 후왕(侯王)이라면 ‘자연’의 주체는 만물이다. 즉 일반적인 구조는 “주체인 성인의 무위를 원인으로 객체인 만물의 자생성(자발성)이 결과로서 도출된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형성된 ‘무위’는 모두 통치 행위와 관련되지만 유일하게 이에 대한 저항적 혹은 비판적 의미의 ‘무위’가 등장하는데 이는 『장자』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사상이다. 이 무위는 『장자』의 ‘소요(逍遙)’와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서 일종의 자유 혹은 불간섭의 상태와 같은 맥락을 보여준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의 마지막 이야기에 나오는 혜시와의 대화에서, 혜시(惠施)가 장자의 말은 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다며 박에 비유하고 나무에 비유하며 조롱하자 장자는 이렇게 답한다.
장자가 이에 대해 말하였다. “그대로 살쾡이를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몸을 바짝 낮추고 엎드려서 나와 노는 작은 짐승들을 노리고 또 먹이를 찾아 동으로 서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덫에 걸리기도 하고 그물에 걸려 죽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저 이우(斄)는 그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으니 이 소는 크기는 하지만 쥐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 이제 그대에게 큰 나무가 있으면서도 그 나무의 쓸모없음이 걱정이 된다면 그것을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고을, 끝없이 펼쳐진 광원막대한 들판에 심어놓고 그 옆에서 자유롭게 거닐면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지내고 그 아래에서 유유자적하면서 낮잠이라도 자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彷徨乎無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 이 큰 나무는 도끼에 잘릴 염려도 없고 아무도 해칠 자가 없을 것이니 세속적인 쓸모가 없긴 하지만 괴롭게 여길 것 하나도 없다.”(『장자』 「소요유」)
장자의 무위는 여기서 앞서 등장했던 군주의 통치 행위와 전혀 상이한 맥락으로 바뀌어 있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림[無爲]”은 ‘방황(彷徨)’과 짝하고, “누워서 잠자기[寢臥]”는 소요(逍遙)와 짝하며 서술된다. 실상 여기서 묘사하는 ‘방황’과 ‘소요’는 현대의 해석자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절대 자유의 경지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아무도 해칠 자가 없는 상태”에서 오는 여유로움, 즉 전쟁으로 점철된 시대에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고 농사짓는 농사꾼이 한낮에 가질 수 있는 잠시의 빈둥거림처럼 보인다.
이러한 전란(戰亂)과 정치적 갈등으로부터 오는 부정적 심리는 장자에게서 인간에 대한 무정한 태도를 촉발한다. 혜시가 장자에게 ‘무정’의 의미를 따지자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자네의 말은 내가 말하는 ‘정’이 아니라네. 내가 ‘무정하다’고 하는 말은, 사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정으로 안으로 자신을 해치지 않고, 늘 자연을 따라 ‘타고난 생명[生]’에 무언가를 더 보태려 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라네.”(『장자』 「덕충부(德充符)」)
『장자』의 후학들에게서 염담(恬惔), 적막(寂漠), 허무(虛無), 무위(無爲) 등으로 표현되는 정신적 태도는 자유에 대한 갈구 이전에 상처받지 않고자 하는 본능이며, 자신을 복속시키려는 외부의 강력한 힘을 통제하지 못할 때 스스로의 내면으로 침잠하여 스스로의 감정만이라도 다스리고자 하는 일종의 자기 치유였다. “마음의 죽음[心死]”(「전자방(田子方)」)이라도 모면하고자 하는 처절한 외침이다.
이런 ‘무정’과 ‘무위’는 군주에서 개체로, 정치에서 삶으로 그 축을 뒤흔들어 놓는 주체의 변화를 가져온다. 전국에서 한 초의 혼란기에 저술된 『장자』의 편들은 하나로 묶이긴 했지만, 오랫동안 서가에 잠든 채 읽히지 않다가 진퇴(進退)의 고뇌를 다시 겪어야 했던 위진(魏晉) 사대부(士大夫) 사이에 유행하게 되면서 『장자』가 널리 읽히고, 오히려 『노자』를 『장자』를 통해 해석하며 새로운 흐름으로서 ‘노장 전통’을 세우게 된다.
5. ‘도화원기(桃花園記)’와 조선조 『노자』의 ‘도’
사실 ‘노장 전통’을 보다 잘 보여주는 것은 철학보다는 문학과 예술이다. 진(晉) 태원 연간의 전란기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귀거래(歸去來)’를 읊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가 이런 정조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노장 전통’이라 부르는 일종의 문화적 감수성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이르러 완성된다. ‘노장 전통’은 단지 『노자』와 『장자』라는 텍스트 속의 관념으로 이루어진 사상 체계가 아니라, 정치와 전쟁이라는 험난한 삶의 체험이 갈마들고, 조(朝)와 야(野)를 넘나드는 진퇴(進退)의 부침 속에서 피어난 일종의 심태(心態)이자 문학과 예술로 표현되는 내면의 풍경이기도 하다.
이는 송유(宋儒)에 의해 왕필(王弼)의 『노자』가 재발견되고,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면서 유사한 체험을 지닌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공동의 유산이 되었다. 비록 이단(異端)으로 치부되었음에도 널리 읽혔던 『노자』와 『장자』는 조선에서 5종의 주석서를 남기는데, 그런 조선조 ‘노장 전통’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계기는 ‘도’가 ‘리(理)’가 되고, 둘 다 ‘자연(自然)’으로 수렴된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한국인들이 지닌 『노자』에 대한 이해에 가장 가까운 저서는 실상 홍석주의 『노자』이다.
도(道)란 저절로 그런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도로 여겨야 한다고 하면 인위적인 것으로 헤아린 것이니, 내가 말한 저절로 그런 도가 아니다. 도는 하늘서 나왔고, 이름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왔다. 그러나 실질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있게 되었다면 또한 저절로 그런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이것을 이름으로 여겨야 한다고 하면 이름과 실질이 나뉘고 지(知)와 교묘함이 일어나니, 또 내가 말한 저절로 그런 이름이 아니다.
상(常)이란 저절로 그런 것을 말한다. 사람의 힘으로 작위하는 것은 반드시 오래갈 수 없다. 오래가도 변하지 않는 것이 오직 저절로 그런 도이니, 이를테면 하늘이 높고 땅이 두텁고 해와 달이 빛나고 산악이 우뚝 솟아 있고 강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것들이며, 사람에게는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신하, 지아비와 지어미 사이의 윤리가 만고에 구하여 변할 수 없는 것들이니, 모두 저절로 그런 것일 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항상된 것이다.(『정노(訂老)』, 김학목 역, 2001: 33-34)
홍석주의 『노자』 이해에서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와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의 원리는 『노자』의 도에서 하나가 되고, 그것은 다시 리(理)로서 일종의 섭리처럼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섭리의 대명사로 ‘자연’은 최고 상위의 원리처럼 이해되어 나간다. 이제 이러한 ‘도’ 혹은 ‘자연’은 하나가 되어 20세기 한국의 『노자』 이해의 기반이 되고, 모든 인위에 대립하면서 궁극의 지위 혹은 신의 섭리와 같은 위상으로 올려지게 된다.
6. 함석헌과 ‘노장 전통’: 성인의 무위, 씨알의 무위
『노자』 60장에 보면 “치대국(治大國), 약팽소선(若烹小鮮)”, 즉 “큰 나라 다스림이 작은 생선 지짐 같다”는 말이 있다. 사실 이 말은 있는 그대로 보면 정치의 신중함을 조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70년대 종로 YMCA회관에서 씨알 함석헌이 들려주는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생선을 지지는 법인즉 건드리면 못쓴다. 건드리면 다 부스러져 그 맛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작은 생선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작은 생선을 지지는 사람은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나라는 큰 것이지만, 잘못하면 상하기 쉬운 것이 작은 생선 같으니, 정치하는 사람이 특별히 마음을 써서 국민을 절대로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 그러니 정치하는 사람은 이 점을 깊이 생각해서 재주보다 원리 원칙을 믿어야 하고, 국민은 또 이것을 알아 설혹 정치가 건드리고 못살게 굴더라도 절대 건드림을 받지 않는 정신을 길러야 할 것이다. 즉 스스로를 작은 생선으로 알고 지켜야 한다. 그 작다는 데 깊은 진리가 있다.”(함석헌)
오늘날 우리가 ‘노장’ 해석에서 상식적으로 강조하는 자연주의, 평화주의, 불간섭주의의 지향과 그 보편적 의의를 강조하는 태도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볼 때 역사적ㆍ현재적 해석 갈래와 차별화되는 함석헌의 ‘노장 이야기’의 특징이다. 따라서 2000여 년에 걸친 역사상의 수많은 노장 해석의 갈래에서 보면 함석헌의 노장 이야기는 독창적이지만, 우리에게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함석헌의 이야기를 들을 때 너무나 자연스러운 『노자』 해석으로 받아들인다. 함석헌에게 ‘건드리지 말라’는 것은 권위주의적 정부가 씨알을 간섭하는 것, 인위적 개입[有爲]으로 자연성을 파괴하는 것,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논의이다. 이러한 함석헌의 이야기는 198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 붐을 타고 일어난 ‘노장’의 생태주의ㆍ환경철학적 해석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20세기가 저물어갈 때 도올 김용옥은 이를 ‘허(虛)의 무위론’으로 발전시킨다.
노자는 그 컵을 채우려는 인간의 행위를 유위라고 부른다. 유위란 곧 존재에 있어서 허의 상실이다. 그러니까 그 반대 방향의 행위, 즉 빔을 극대화(極大化)하는 방향의 인간의 행위를 바로 무위라고 부르는 것이다. (…) 노자에게 있어서는 마음을 채우는 방향의 우리의 심적 작용이 곧 유위요, 마음을 비우는 방향의 심적 작용이 곧 무위인 것이다.(김용옥)
도올의 해석에 따르면, 『노자』는 “빔(emptiness)=가능태(potentiality)”의 철학을 천명한 동양 자연주의의 중요한 한 전형이며, 전통 동아시아 사상의 핵을 이루는 중요한 고전이다. 이러한 도올의 해석은 이미 함석헌의 ‘이야기’ 속에 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일반적으로 『노자』는 유위 : 무위, 문명 : 자연, 간섭 : 아나키, 사회적ㆍ규범적 가치 : 자연적ㆍ소박한 사회 모형에서 후자를 주창했으며, 정신의 자유를 주창한 철학 전통이라고 이해된다.
이와 같은 함석헌의 이야기는 『노자』 해석의 전통에서 볼 때 연속적이기보다는 불연속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노장 전통’은 하나의 선형적인 주석 전통이 아니라, 『노자』는 『장자』를 통해 재해석의 과정을 거치고 역사와 삶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해석학적 초월’을 함으로써 오늘의 ‘노장 전통’에 이른 것이다.
적어도 함석헌의 노장 이야기는 서구 과학과의 화해를 긍정하였고, 또한 ‘근대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관점에서 『노자』를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화의 정도에 비례하여 함석헌의 노장 이야기는 전통과 불연속적이며,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삶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의 노장 이야기는 “눈으로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의 자리에서” 읽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노자』에는 인권, 민주주의, 권리와 같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노자』를 읽던 제왕과 그 측근들의 손에서 벗어나 『장자』를 통해 읽어온 사람들이 사대부, 씨알로 변천하면서 형성된 ‘노장 전통’은 오늘 지금 여기 씨알의 자리까지 와 있다. 거기서 우리는 대자연의 섭리이든 신의 명령이든 “건드리지 말라”로 압축되는 일종의 비판철학에 마주하고 있다.
‘무위자연’은 애초부터 하나의 말이 아니었으나, 이제 한국의 현실에서 ‘무위자연’은 정치와 평화, 생태와 환경, 더 나아가 삶의 안정과 정신적 내면 상태를 호위하는 강력한 무기로 호명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베이징의 『노자』와 서울의 『노자』가 다른 지점일 수 있고, 우리에게 펼쳐질 미래를 결정할 커다란 힘이 될 수도 있다. 그 의미가 어떻게 규정되는가는 바로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실천에 달린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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