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6

함석헌과 노장사상-김성수 > 연구논문2002

함석헌과 노장사상-김성수 > 연구논문 | 바보새함석헌

By Sungsoo Kim
Ham Sok Hon and the Philosophical Taoism of Lao-tzu and Chaung-tzu
https://blog.daum.net/wadans/7786721
김성수 함석헌과 노장사상 2002. 한국문화연구 제2호(이화여자대학교)

Abstract

Ham Sok Hon (1901-1989) is little known outside Korea. However, within Korea he has been given several descriptive names through his life: "Conscience of Korea", "Prophet in the Era of Suffering" and "Crying in the Wilderness". As these names imply, he was a religious thinker, civil rights activist and prolific writer of history, politics, religion and society. Ironically however, he never attained the position of an "official" religious scholar, politician, journalist or historian. 
  • This thesis examines Ham's understanding of the philosophical Taoism of Lao-tzu and Chuang-tzu. In categorical terms, Ham was an Oriental-Christian thinker, yet his ideas and life style changed according to the historical circumstances both within Korea and the around the world. 
  • The thesis explores the inter relationships between philosophical Taoism and Western Christianity through a study of his tumultuous life and kaleidoscopic thoughts. It examines him as an intermediary between East and West and assessed how he idea was shaped by and responded to the terrible challenges of his time.

In this respect. 
  • firstly I will examine how Ham began to know the philosophical Taoism of Lao-tzu and Chaung-tzu and the general characteristic of Taoism in relations to formation of his philosophy.  
  • Secondly I will look into how the philosophical Taoism contributed as a part of Ham's identity.  
  • Finally I will compare and contrast Ham's philosophical as well as pragmatic response as against military dictator Park Chunghee's reimpositions of Confucian ideology, and how Ham overcame outward strength with his inward mildness.



함석헌과 노장사상

김 성수

목차

I. 서론
II 함석헌의 노장인식
III. 함석헌의 정체성으로서 노장사상
IV. 함석헌의 노장사상과 박정희의 통치 이데올로기
V. 함석헌의 노장풀이: 약으로 강을 제함 
VI. 결론

서론

“노자 장자의 도는 길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다” (함석헌전집 20, p.28)

함석헌은 6살 때부터 기독교를 접했다. 죽는 날까지 기독교인으로 살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 동양사상, 좁게는 노장사상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착은 특별했다. 그가 노장사상을 대하게 된 것은 20대 초반에 유영모를 통해서였다. 이때부터 노장사상은 그에게 동서문명을 이어주는 사상적 교두보 역할을 했다.  
기독교는 비록 그 뿌리가 중동에서 연유되었지만 지난 2000년간 서구문명 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쳐왔다. 반면 노장사상은 기원4-5세기 경 중국에서 연유되어 주로 동북아시아에서만 그것도 주류가 아닌 '비주류' 사상으로, 어떻게 보면 유불교에 의해 종종 견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웃사이더'로서 끊임없는 사상적 영향을 미쳐 왔다.  그럼 기독교와는 이렇게 다른 역사적 길을 밟아 온 노장사상에, 왜 함석헌이 특별히 기독교인으로서, 깊은 관심과 정열을 지니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먼저 노장사상의 사상적 특징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장사상은 중국사를 통하여 권력자로부터 '이단자' 취급을 받아왔다. 그러나 비 권력층으로부터는, 즉 사회의 노약자들, 가난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반란자들 혹은 비밀결사회 등 사회의 기득권 층들에 의해 탄압 받는 이들에게 노장사상은 정신적 '피난처' 역할을 해주고 저항력을 공급해 주었다. (Chan, Wing-tsit. "Taoism", Encyclopedia Americana, vol.26, New York: American Corporation, 1974, p.276) 한국역사를 통해서도, 노장사상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유가(儒家)에 의해서 많은 박해를 받아왔다. 전통적으로 유교는 통치이념과 관료, 학자의 종교였던 반면 도교는 상민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으며, 이러한 상민의 종교, 도교는 유교 지도층에 의해서 역시 중국의 경우처럼 '이단' 취급을 받았다. (차주환. 『한국 도교 사상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3, pp.262-273). 특히 신 유교, 성리학(주자학)이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유가에서는 공식적으로 도교를 이교(異敎)로 낙인찍기도 했다. (de Bary, William Theodore 외. The Rise of Neo-Confucianism, New Yo가, Columbia U.P., 1985, p.80)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장사상은 서민층에게는 민속적인 종교의 형태로 환영받아 왔다. (정병조. 『한국 종교사상: 불교, 도교』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1, pp.190, 194, 195)
그럼 이렇게 역사적, 사상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서 '이단' 취급을 받아 온 노장사상에 왜 함석헌은 매료되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노장사상이 함석헌의 사상형성에 준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려고 한다.

I. 함석헌의 노장인식

첫째, 노장사상은 함석헌의 인간이해, 인식변화 그리고 세계관 확립에 두드러진 영향을 남겼다. 노자에 따르면, 다듬지 않은 자연적 소박함을 통해 인간은 참된 자아, 진실 된 자신의 모습을 성취 할 수 있다. 이 ‘자연적 소박함’은 현대적인 의미로 때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표현 될 수 있고, 영국의 계관시인 William Wordsworth(1770-1850) 의 "The Rainbow"라는 시에 나오는 "천생의 경건함(natural piety)"으로 표현 될 수도 있을 것이다.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원하노니 내 삶의 하루하루가 천생의 경건함으로 이어지기를). 소위 문명이나 세련된 사회라는 것은 인간을 극도로 약아 빠지고 지나치게 기교적인 한낱 부속품으로 전락시킬 수 가 있고, 결국 이것은 타고난 인간의 고유한 전인성(全人性)과 손상되지 않은 순진한 본성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이 노자의 자연과 인간관이다. (Chan, Wing-tsit. A Source Book in Chinese Philosophy,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P., p.147, p.154) 
이러한 노장사상의 영향인지 함석헌은 종교 혹은 사상의 지나치게 기교적인 체계화 그리고 첨예하게 조직화된 힘이나 제도화된 인위적 권위를 거부했다. 독일의 마리아 레마르크(Remarque, Erich Maria: 1897-1970)는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서부전선 이상 없다』(Im Westen nichts Neues) 라는 그의 저서에서 막강한 조직의 힘 앞에서 철저하게 무너져 가는 한 개인의 사상을 이렇게 탄식한바있다: "내가 이 곳(군대)에서 배운 것은 쇼펜하우어의 4권의 저서보다도 잘 손질된 단추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처음엔 놀랬다. 그 다음 번엔 그런 현실에 대하여 분개하였다. 마지막엔 방관적인 태도에서 인간의 정신이란 것은 결국 결정적인 것이 아닌 것 같다고 체념해 버렸다. 즉 중요한 것은 정신이 아니고 구둣솔이며, 사상이 아니고 조직이며, 자유가 아니고 훈련인 것이다."  군사독재체제를 살아온 20세기 한반도에서 함석헌의 삶이 레마르크가 묘사한 ‘군대’에서와 같이 숨막히고 통제 받는 삶이었지만, 함석헌은 막강한 조직보다도 한 인간의 독창적인 사상이 더욱 중요하고, 기계적이고 맹목적인 군사훈련보다는 한인간의 정신적 자유가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을 포기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조직화된 힘이나 첨예화된 권력은 언제나 잠재적인 폭력의 근원이었다. 그는 일제시대를 통해서 뿐 아니라, 북한 소련 군정, 남한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하에서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조직화된 힘과 권력이 얼마나 씨알에게 가혹한 폭력을 남용하는가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렇게 함석헌 자신과 한국인이 체험한 숨막히고 경직된 정치와 사회 역사적 환경 속에서, 그는 노장사상이 그의 건강한 영적 생활을 위해 어떠한 공헌을 해 왔는지를 밝힌바 있다: "이 몇 십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썩 잘함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것에 좋게 잘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있으려 한다. 그러므로 거의 도에 가깝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干道. 『도덕경』 8장) 하는 노자의 말을 듣지 못했던들 씨알을 잊어버리고 낙심을 했을지도 모르고, 아침저녁으로 장자를 따라 무용(無用)의 대수(大樹)를 아무도 없는 동리나 넓은 광야(無何有之鄕 廣漠之野)에 심어 놓고 그 옆에 한가히 서성이며 그 밑에 거닐며 누워 잘 줄을 몰랐던들(『장자』, [逍遙遊]), 이 약육강식과 물량 퇴폐의 독한 공기 속에서 벌써 질식이 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함석헌전집20』, p.26) 이렇게 노장의 초월사상은 20세기 흑백논리와 폭력이 난무하던 한반도에서 함석헌의 정신적 안내자, 휴식처가 되었고 그의 영적인 숨통을 후련하게 터놓았던 것이다. 

II. 함석헌의 정체성으로서 노장사상

둘째, 노장사상에 대한 함석헌의 애착은 압도적으로 밀려오는 서양적인 것만을 우선하는 물량적인 가치관, 혹은 무조건 서양적인 것만을 따라가는 것에 대한, 한국인 크게는 동양인으로서 그자신의 사상적 정체성 회복을 위한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가 살아야 했던 제국주의 시대는 늘 국가간의 무력주의,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가치만이 판을 치던 세상이었다. 이런 가치관 혼돈과 도덕 몰락의 시대에, 동아시아의 기독교인으로서 자아의식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를 그는 노장사상을 통해서 찾고자 했다. 이런 맥락에서 동서사상의 융합과 조화는 그의 삶의 큰 과제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그리고 군사독재가 판을 치던 국제정세의 외적 혼란 중에서도 그는 노장의 평화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국제관계에서 평화의 절실함을 호소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특히 1942년과 1943년에 걸쳐 일제의 한국민족 탄압정책은 점점 가혹해져 갔다. 일찍이 이때부터 함석헌은 무력을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는 국제관계의 약육강식의 논리를 정당화 해주며 세계를 자국의 이익만 추구하는 국가주의로 몰아간다고 지적했다. 현대 국가는 본질적으로 강한 군사력 위주의 전투적인 국가이다. 이것은 특별히 오늘날 미국 부시정권의 국제사회를 무시한 독선적이고 오만한 국제정책에 잘 나타나 있다. 오늘날 경제적 의미에서 이건 군사적 의미에서 이건 각 국가는 서로 긴장 대치 되어있다. 이 긴장 대치 상황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현대 국가는 끊임없이 거대하고 강력한 국가체계, 군수산업체계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Bakunin, Michael. Statism and Anarchy, Cambridge U.P., 1990, p.13) 결과적으로, 강한 국가주의의 사회에서는 전체 민족과 국가가 철저하고 강력한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오늘날 미국에서 국가안보의 가치라는 미명하에 씨알의 알권리, 언론자유의 가치보다 우선 시 되는 현실의 작태가 그것을 명확히 반증한다. 
이래서 강력한 국가주의의 근본은 이타주의라기보다는 강한 집단이기주의, 자국이익중심주의를 그 근본으로 한다. 이런 집단 이기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국가주의에 대해 함석헌은 일찍부터 경고하고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국가주의를 반대했고 국가와 민족 인종을 초월한 노장의 세계주의, 초월주의 그리고 차라리 무정부주의적 경향에 공감을 느꼈다. 
함석헌은 이러한 국가주의의 그늘에 가리워 있는 인류를 구원할 사상으로 서양의 고전철학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대를 걸지 않았다. 서양철학은 이미 서구의 문예부흥, 종교개혁, 산업혁명에 영향을 미쳤고, 그러므로 이미 과거에 그 사상적 역할과 공헌을 다했다고 본 것이다. 결국 현대 세계의 자본주의나 물질주의는 서양 철학과 서구문명의 소산이고, 인류의 미래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사상에는 더 이상 의지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함석헌. 『전집 3』, p.157)
    이런 면에서 그는 서세동점의 역사를 통해서 무시, 경시되어 왔던 동양철학을 이제는 재조명,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Ham, Sokhon. Queen of Suffering, London Yearly Meeting of Society of Friends, 1985, p.17) 그러나 동북아시아가 역사를 통해 이미 과거로부터 유교의 강한 영향권아래 있어 왔던 것을 고려하여, 함석헌은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 할 수 있는 동양의 고전철학으로서 유교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대신에, 정체성 위기에 빠져 있는 인류에게 새로운 문명의 사상적 안내자가 될 수 있는 고전철학으로 그는 노장사상을 사상적 대안으로 역설했던 것이다. (『함석헌전집 20』, p.3) 그는 이렇게 노장사상의 유연함과 초월성에 매료되었고, 이러한 노장철학을 그는 아직 인류를 위해서 제대로 쓰여진 적이 없는, 감추어지고 경시되어 왔던 사상적인 보물창고로 생각했다. 
함석헌은 그가 속했던 역사적 시대의 정치적 통제와 사회적 불의 그리고 구조적 악에 대항해, 인간의 침해당할 수 없는 존엄성, 자유 그리고 평화주의를 부르짖었다. 그는 노자와 장자가 주장한 가치들이 보다 나은 인류전체의 향상된 질적인 삶을 위해, 물질, 물량주의가 앞세운 제국주의나 자본주의의 이념이 옹호한 가치들을 확실히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국제간의 분쟁을 넘어선 평화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는 이렇게 노장의 평화사상에 흠뻑 빠졌고, 급기야는 노자를 인류 최초의 평화주의자라고 선포했다: "노자는 전쟁의 무익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폭력이 국가의 정책으로 쓰여서는 안되고, 국가간에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함석헌전집 20』, p.31. 
    노자의 평화적인 태도는 『도덕경』을 통해 많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 한 예를 살펴보자: "큰 나라는 겸손함으로써 세계를 통일 할 수 있다. 큰 나라는 겸손함으로써 작은 나라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작은 나라는 겸손함으로써 큰 나라의 좋은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으로써 큰 나라와 작은 나라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큰 나라가 먼저 겸손해야 한다.『도덕경』 61장. "최고의 성취는 성취욕구로부터 해방되는 것. 그럼으로써 항상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 최저의 욕구는 성취욕구에 집착 해 있는 것. 그럼으로써 결코 성취감을 느낄 수 없는 것."『도덕경』 38장. 위에 글은 노자의 평화에 대한 애착, 그리고 각 국가와 각 정부사이의 이상적 관계에 대한 그의 염원을 반영한다. 노자가 제시하는 교훈은 결국 겸손한 태도는 개인간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꼭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거만하고 독선적인 부시정권의 양상과는 정 반대되는 덕목이고 가치관이다. 그리고 이렇게 겸손한 태도를 상실한 부시정권이 오늘날 인류에게 가져온 것은 노자가 2500년 전에 예측한 것처럼 국가간의 전쟁, 불안감, 긴장감, 공포다. 
함석헌이 몇 번이고 씨알을 위해서 가르치고 또한 읽기를 좋아하던 『도덕경』의 요점은 한마디로 정치인이나 정치가에게 주는 철학가 혹은 종교인의 조언이라고 요약 될 수 있다. 노자가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것은 어린 아기, 여성 그리고 물로 대표 될 수 있는 부드러움과 유약함, 유연성이다. 노장사상은 이렇게 연약함, 겸손함, 부드러움, 마음의 평정, 정염(情念)의 순화 등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는데 (Siklos, Bulcsu. "The Philosophical Taoism of Lao-tzu and Chuang-tzu", The World's Religions, London, Routledge, 1988, p.545) 함석헌은 이런 경직되지 않은 노장의 부드러움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물은 가장 낮은 계곡을 따라 흐르면서 만물에 근원적인 생명을 보급한다. 어떤 생명도 물이 없이는 살 수 가없다. 『도덕경』의 한 예를 통해서 우리는 또한 노자의 무서운 낙관론을 엿볼 수 있다: "세상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어. 그러나 부드러운 물이 단단한 바위를 뚫지. 결국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정복하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정복해. 진실은 역설(逆說)적이야."(『도덕경』 78장). 그러므로 노자에게 있어서 물로 표시되는 약(弱)은 곧 강(强)이 될 수 있는 것이다. (Chan, Wing-tsit. "Taoism",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4권, New York, The Free Press, 1967, p.391) 이렇게 강을 약으로 제하는 법이나 원수를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다루는 방법은 함석헌이 노장사상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또한 그는 기독교나, 불교나 도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그 근본에서 하나라는 확신을 가졌다. (Ham, Sokhon. Kicked By God, Baltimore, Md., AFSC, 1969, p.15) 여기서 함석헌 이야기하는 종교는 제도, 조직화 된 것으로서의 현상적인 종교가 아니라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본질적인 의미의 종교였다. 그는 종교적 이해 관계에 얽힌 당파심이 없었고 인류의 모든 주요종교를 평등하고 포괄적으로 포용하고 이해하려 힘썼다. 그는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진리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곧잘 이렇게 표현했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만 볼 것이 아니라 노자, 공자, 불경도 봐야 합니다." 그는 다양한 종교의 진리를 통해서 전체 진리의 세계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함석헌에게 노장사상 그리고 종교적 관용성은 아주 중요했다.
    노자는 중국인이었고 예수는 유대인이었다. 그 두 인물의 시대사이에는 500년 이상의 시대 차이가 있었고, 중국 황하(黃河)문명과 중동 히부류(Hebrew)문명 사이에는 문화의 차이도 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와 예수의 가르침 사이에는 놀랍게도 많은 공통점과 유사성이 있다. 함석헌이 기독교인으로서 노장사상에 심취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시대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선 궁극적인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자와 예수 사이에 가르침의 유사성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자: "힘을 하나로 집중해서 유연함의 덕목을 성취한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을까?"『도덕경』 10장  
예수: "너희가 변화되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18:3 
(맹자(孟子) 또한 같은 말을 했다, "위인은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Mencius (London: Penguin, 1970), p.130.
--
노자: "선한 이 들을 나는 선하게 대해준다. 선하지 않은 이들은, 역시 선하게 대해준다." 『도덕경』 49장     
예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 [마태] 5:44 
(맹자: "군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이 들을 돕는 것". Mencius 위의 책, p.84.
--
노자: "크고 강한 것은 낮은데 처하게 될 것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높은 데로 올 리 울 것이다." 『도덕경』 76장    
예수: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누가] 18:14
--
노자: "현명한 이는 자신을 뒤에 놓지만, 앞에 처하게 됨을 발견한다." 『도덕경』 7장   
예수: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끝이 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가] 9:35
--
노자: "부유하고 높은 자리 에 있는 이가 교만하면 불행을 자초한다." 『도덕경』 9장    
예수: "재산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정말 어렵다." [누가] 18:24
--
노자: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는 이는 탁월한 이다." 『도덕경』 22장
예수: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곧잘 옳은 체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누가] 16:15
--
노자: "폭력을 쓰는 이는 화를 당해 괴롭게 죽을 것이다" 『도덕경』 42장
예수: "칼을 쓰는 사람은 다 칼로 망한다." [마태] 26:52
--
노자: "하늘이 구하고자 하는 이는 사랑으로 보호받는다." 『도덕경』 67장
예수: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들은 행복하다. 하나님도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마태] 5:7
--
노자: "내 말은 아주 이해하기 쉽고, 실행하기도 쉽다." 『도덕경』 70장
예수: "내 멍에는 메기 쉽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30
--
이렇게 노자와 예수 가르침 사이의 다양한 공통점과 유사성을 고려하면, 함석헌이 왜 동서양 종교의 본질을 같은 것으로 이해했고 보편적 시각에서 포용하려고 했는지 이해 할만도 하다.  그는 그의 보편적 종교관을 이렇게 이야기 한 바 있다. 

"하나님의 영(靈)을 
공자의 인(仁), 
노자의 도(道), 
힌두교의 브라만(범梵 - 우주의 근본 원리)등
탈 인격적 개념으로 생각 할 수도 있다. 
우리의 의식(意識)과 인식이 커짐에 따라, 우리의 생각도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Ham, Sokhon. "War is the Most Extreme Luxury", Madang, 1983년 5월, p.24) 

결국 인간은 개인으로 시작하지만 자아발견을 거친 자아실현 과정을 통해서 개인적인 차원보다는 사회전체, 우주 전체적인 차원을 추구해야 한다고 함석헌은 보았다. 그는 또 하느님의 존재가 인격적일 뿐만 아니라 인격을 넘어선 탈 인격적 그리고 초월적으로 현실에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러한 것들을 신앙심, 삶의 활력, 의지(意志), 원래 그대로의 오염되지 않은 자연, 영화(靈化), 완전하기를 갈망하는 인간의 욕구, 그리고 영원성을 추구하는 마음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함석헌의 하나님 관에서 우리는 또한 그가 노장사상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을 볼 수 있는데, 노자는 최고의 궁극적인 것(하느님)은 탈 인격적인 존재이고, 이러한 궁극적인 존재는 인간들이 규정, 정의 또는 관찰하기조차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노자의 도라는 개념은, 형상 만들기나 어떤 규정짓기를 거부한다. 노자로 인해서 비로소 종교적 인격개념에 반대하는 과격한 거부운동이 최초로 시작되었던 것이다.(Wilhelm, Richard. "Commentary: The Teaching of Lao Zi", Tao-te Ching, p.65) 기독교와 비교해서, 신 혹은 절대자의 개념은 노장사상에 있어서 직관적이고 탈 인격적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사고구조에만 익숙한 서구인들에게는 탈 인격적인 신이나 절대자의 개념이 아주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다. 
   『성경』과 『도덕경』의 공통적인 예를 통해서 함석헌은 인간이 진리를 발견하고, 깨닫는 일이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 주고자 했다. 그는 기독교와 노장사상에 어떤 연결점, 공통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런 탄식을 하기도 한다: 
"기독교의 하느님이나 노장사상의 도는 개념적으로는 다르겠지만, 궁극적으로 참 믿음 의 표현이라는 데서는 같은 것이지 않을까." (Ham, Sokhon. Madang, p.9) 
『성경』과 『도덕경』의 유사성을 제시함으로써 그는 인간이 궁극적인 진리의 세계를 오직 하나의 종교만을 통해서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역설했다. 

기독교의 하느님과 노장의 도의 개념을 그는 이렇게 비교한다: 
  • "모든 있음은 있음 아닌 데서 나온다.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 모세가 당신이 누구십니까 했을 때 온 대답이 '네가 왜 내 이름을 묻느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했다. 
  • 천지 만물은 자기 주장을 아니하는 이, 자기를 무한히 내주는 이, 스스로 희생하는 이가 있어서만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노자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 했다." (『전집 20』, p.46)

궁극적인 진리란 결국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나 공간의 벽 속에 단단히 가두어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고정관념과 사고의 경직성을 깨는 탄력성 유연성 있는 사고가 진리를 광범위한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노자와 장자는 기존의 고정적이고 엄격한 관념을 타파 해 가며, 인간의 무한한 영적 자유를 추구했다. 함석헌도 그래서 궁극적인 진리를 깨닫는데 있어서 하나의 길을 고집하기보다는 보다는 다양한 길을 통해서 도달 하고자 했다. 그에게는 진리란 어느 한 개인이나 한 집단에 의해서 독점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렇게 독점될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모험, 도전, 변화를 두려워하고 이미 확보해 놓은 기득권과 현상유지를 바라는 인간의 본성은, 남이 만들어 놓은 고정된 길이나 교조 화된 종교적 교리를 통해서 궁극적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것이 쉽고 수월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고통 없이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no gain without pain).
사랑한다는 것, 사랑의 본질은 결국 아픔을 가지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조국을 사랑했기에 그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쓰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며 그의 고뇌를 절규했으며, 자신이 속한 기독교를 철저히 사랑했기에 그는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라고 통렬히 꾸짖고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련다”는 아픔의 함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기성교회의 교리는 중세 계급신분사회의 유산이다. 중세는 평등이 중요한 사회가 아니었고 수직적인 주종의식(主從意識)이 강조되는 사회였다. 그 유산으로 우리는 지금도 주님(주인님)이란 용어를 교회에서 별 부담 없이 사용한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이 중요시되는 현대 민주사회의 풍토에 맞게, 완고하고 답답한 군주적인 냄새가 풍기는 종교적 교리나 용어도, 현대사회의 고민과 시대정신 그리고 흐름을 탄력 있게 반영해야 21세기에 생존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II. 함석헌의 노장사상과 박정희의 통치 이데올로기

셋째로 함석헌의 노장사상에 대한 애착은 유신체제아래서 박정희가 내세운 절대적 복종윤리를 강조한 유교의 충효논리에 맞서는 사상적 대체물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박정희는 1인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유신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 시켰다.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노동자와 심지어 초등학생에게까지 유신체제의 정당성과 충효윤리를 따를 것을 강요하고 세뇌시켰다. 필자도 초등학교 시절 “10월 유신, 한국적 민주주의제도” 라는 제목의 포스터를 그려 자랑스럽게(?) 우수상을 받던 기억이 난다. 여기서 박정희가 강조한 ‘충’이라 함은 소아(피치 자, 서민)가 대아(권력자, 즉 박정희 자신)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일컫는다. 유가에서 개인은 소아(小我)로서 보조적인 존재인 반면 통치자는 최고의 주권을 가진 대아(大我)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유교에서 소아나 개인을 강조하는 것은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소아란 존재도 자연히 중요성을 부여받지 못했고, 이러한 소아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대아 즉 주권자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반면에 대아는 막대한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주권자로서 비행(非行)이나 악행도 특별한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박정희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서 함석헌은 씨알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고 자유, 평등, 저항정신을 길러 주기 위해 사상적으로는 노장공부모임,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민주수호 국민회의등의 민주화와 인권운동 단체의 창설에 온몸으로 참여했다. 
함석헌이 박정희의 유교 충효사상 강조에 대항에 노장의 자유사상을 강조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1971년 7월부터 1988년 5월까지 함석헌은 『노자』와 『장자』의 공개강좌를 진행했다. 그의 공개강좌를 통해 함석헌은 사회적 신분이나 종교적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역설했다. 더불어 그는 인간의 가치를 박정희가 주창한 “잘살아 보세”나 “부국강병” 혹은 경제 제일주의의 원칙에 반대했고, 잘살기보다는 “바르게살기” 나 “같이 살기” 그리고 도덕제일주의의 가치를 내세웠다. 그럼으로써 그는 유신체제 하에서 피폐해 가는 한국의 사회-정치적 상황을 종교적 도덕성을 통해서 개혁하고자 했다. 그의 시각에는 도덕성을 상실한 종교는 미신이나 광신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함석헌전집 12』, p.87)  
   이처럼 박정희가 유교의 충효를 강조한데 반해, 함석헌은 노장의 자유정신과 초월사상을 강조했다. 중국역사를 통해 도가에서 유가의 규율이나 속된 태도를 엄중하게 비판한 것처럼 (Chan, Wing-tsit 편. "The Natural Way of Lao-tzu", A Source Book in Chinese Philosophy,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P., p.136) 함석헌은 박정희가 유신체제와 더불어 권위주의적 요소가 짙은 유교이념을 재 강조하는 것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유교에는 계급적 의식과 숙명론(宿命論)적 개념이 강하고, 이는 개인의 모험심이나 도전 심을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유교에서는 충효를 모든 덕목의 근본으로 간주한다.(Deuchler, Martina.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 Cambridge Mass, Harvard U.P., 1992) 유교의 윤리는 또한 개인적인 관계에 서뿐 아니라 개인과 통치자와의 관계를 계급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로 규정한다. 이러한 유교의 이념을 선별적으로 강조함으로서 1970년대 박정희는 또한 한국 노동운동에 정치적 탄압의 고삐를 조였다.(김영명. 『한국 현대 정치사』, 서울 을유문화사, 1993, p.323) 

        특별히 흥미 있는 것은, 중국인이 이해한 개인주의(個人主義)라는 것은 “각자가 각자를 위하여”라는 부정적인 의미이고, 자유(自由)라는 것은 “조절되지 않은 충동”으로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역시 부정적이고 체제 도전적인 개념이다.(박명석. 『동과서: 그 인식 구조의 차이』, 서울 탐구당, 1979, p.16) 
그러므로 중국의 학자가 존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유명한 저서인 『자유론』(On Liberty)을 중국어로 번역했을 때 『권계론』(權界論)으로 번역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중국인 학자는 서구의 자유라는 개념을 “권력에 한계와 제한을 가하는”개념으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서구의 Liberty나 Freedom의 개념이 역시 중국인이나 크게는 동아시아인 에게 그저 ‘自由’ 라고 만 막연히 인식되고 번역되는 것 또한 눈 여겨 볼만하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 그리고 법 앞에서 통치를 하는 자나 통치를 받는 자가 모두 동등하다는 개념은 유교에서는 역시 기괴한 개념이었다. 
공자에게 정치인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고 그러므로 그는 강력한 가부장적인 정권을 이상형으로 보았다. 이러한 공자의 사상은 유교의 역사를 통하여 변하지 않는 근본적 교리로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집고 넘어갈 것은 공자자체는 위대한 인본주의자 이었다는 것이다. 유교 역시 동아시아 역사를 통해서 철학적, 사상적으로는 큰 공헌을 했다. 공자의 의도는 전제군주의 독재정치에 이념적 정당성을 마련해 주자는 것이 아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이 정치-사회적 혼란과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었을 때 공자는 사회적 질서와 정치의 도덕률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제적인 왕조는 공자의 사상을 자신의 정권을 합리화하는 이념적 도구로 이용했던 것이다. 박정희 역시 공자의 가부장적 교리를 자신의 독재정권을 강화시키고 뒷받침하는 이념적 무기로 이용했다.

IV. 함석헌의 노장풀이: 약으로 강을 제함 

노장사상을 통해서 함석헌은 외부적 고난과 시련을 내적으로 극복하는 낙관론을 배웠고 종교의 역할과 불 의한 정치권력과의 관계를 생각했다. 

노장사상과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보이는 한국의 "도사사상" 혹은 신선사상에선 기존의 동아시아 가치체계에 대한 역으로 된 가치체계를 보여 준다. 그 예를 하나 들면, 신선설화에 등장하는 신선은 많은 경우에 여(女)신선의 초능력이 남(男)신선의 초능력을 훨씬 앞지르고 제압한다. 동아시아의 사회가 남성위주의 사회이고 남존여비(男尊女卑)의식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가부장적 구조를 전통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고려할 때, 신선설화의 여강남약(女强男弱)의 경우는 동아시아 사회와 역사에서 역으로 된 가치체계를 보여 준다. 
또한 초기적 여성 해방론(feminism)의 형태를 우리는 신선설화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신선설화에 등장하는 신선은, 권위주의적 질서체계를 받아들이기를 전적으로 거부하고, 차라리 그로 인해 다가오는 수난을 그대로 감수한다. 

함석헌이 일제시대나 군사독재시절을 거쳐 불 의한 권력에 협조 순응해서 안락한 삶을 보장받기보다는, 권위주의 질서체계를 거부하고 기꺼이 고난의 길을 택한 것도 동양의 ‘현대판 신선’의 모습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함석헌은 공자의 교조적인 철학보다는 노장의 초월적인 사상에 매료되었다. 노장사상의 본질은 현실 초월적인 경향과 정치권력의 간섭으로부터 각 개인의 자유스러운 삶을 추구하는데 있다. 반면에 유학에 있어서는, "공부하는 것과 동시에 정부의 관리직을 차지하는 것은 유교의 군자가 반드시 취해야 할 두 가지 덕목“이었다. (Lau D.C. "Introduction", Confucius: The Analects, p.31) 함석헌은 노장사상과의 관계에서 유교의 교조적인 면과, 예수와의 관계에서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율법학자이며 교조주의자인 바리새인과의 관계를 이렇게 비교했다: 

"예수가 바리새적인 길 [율법적인 길]로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을 알았던 것같이 노자, 장자도 유교의 가르침으로 춘추전국시대가 건져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집 20』, p.29)

   전통적인 중국의 유교개념에서는 이름(名)이나 칭호를 부여하는 것은 한 개인이 통치자(皇帝)아래 한 계급적 위치에 귀속되어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Chan, Wing-tsit. "Taoism",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4권, p.391) 그러나, 노자가 이야기하는 도(道)는 이러한 계급적 관계, 즉 통치자 아래 속하기를 전적으로 거부한다. 그래서 노자는 도에다 어떤 이름이던지 부여하기를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고, 그래서 도에는 이름이 없는 것이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결국 노자의 도는 통치자(皇帝)가 속해 있는 시공조차 초월해 있는 것이다. 동시에 도가에서는 왕권신수(王權神授)의 이념 혹은 도를 억압하거나 등급을 매기는 어떤 종류의 정치권력도 거부하고 차라리 무정부주의의 경향을 띄우는 것이다. 

   공자가 또한 예(禮)와 도덕적 행실을 강조 한데 반해, 노장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적인 도의 길을 따름으로서 내적 조화와 평온을 양성(養成)할 것을 권장하였다. 

도덕경에 의하면,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는 씨알들의 생활에 최소한의 간섭만 하기 때문에 씨알들이 그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통치자를 노자는 무위(無爲)의 도를 실천하는 참된 지도자로 보았다. 노자나 장자에 있어서 무위개념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해 가는 자연과 우주 속에서 자신을 내 세우지 않고 조용하게 조화를 이루며 행동하는 개념이다. 
이렇게 노장의 무위는 완전한 무 활동이나 게으름의 개념이 아니다. 무위의 정책을 실천하는 통치자와 씨알들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조화되고 흡수되었기 때문에 씨알들은 통치자의 영향력과 공헌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노자는 이러한 통치자를 이렇게 표현한다: "공적을 세운 지도자는 그가 공을 세운 장소에 머무르지 않는다(功成以不居)."(『도덕경』, 77장). 이것은 또한 마치 최고의 숙련공이 다듬은 옥이나 수정은 후에 거친 흔적 하나 없이 말끔하고 깨끗한 상태를 보여 주는 것과 같다. 
이러한 노장의 무위는 기독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너의 착한 행실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라"([마태] 6:3)이고, 
이것을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최소한의 정부가 최고의 정부다"(the least government is the best form of government)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을 종교에다 대고 표현을 하면 최소의 조직을 가지고 있는 종교가 최고의 종교다(the religion with the least institution is the best form of religion)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노자의 좀더 직접적인 표현으로는 "좋은 산수가(算數家)는 주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도덕경』 27장)로 이야기 할 수 있고, 장자의 표현으로는 "편안한 신발을 신고 걸으면 발을 잊는다. 허리띠가 편안하게 잘 맞으면 허리를 잊는다"(Chuang-tzu, London: Penguin, 1996, p.163)로 묘사될 수 있다. 

함석헌이 이러한 노장사상, 특히 무위사상에 깊이 매료 되어있는 이래, 독재적이거나 비민주적인 정권은 그의 본성과 양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교사상의 절대적 가부장주의를 재 강조하는 박정희의 충효이념은 함석헌이 익힌 노장의 자유-초월사상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론

노장사상이나 동양철학을 통해서 서구 기독교나 하나님의 개념을 재조명 해 보려는 함석헌의 시도는, 경직화된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고 심지어는 심한 비방과 경멸을 받았다. 그들은 함석헌의 기독교관이 너무 동양적이고 보편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의 시각엔, 기독교인은 당연히 기독교-중심적이어야 하고 인간의 영혼은 오직 기독교의 하나님에 의해서만 구원받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보수적 한국교회 교단 측에서는 함석헌을 `이단자'로 낙인찍었다. 카테고리 상에 그는 기독교인이었지만, 한국인으로서 그는 유교, 불교, 노장사상, 그리고 전통 한국의 무속신앙과 친숙했다. 함석헌의 보편적 종교관은 아마도 간디의 표현을 빌어서 적절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란 다이아몬드의 표현처럼 수많은 면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오직 그 중의 몇 면만을 흘끗 볼뿐이다." (Brown, Judith. Gandhi: Prisoner of Hope, p.81) 노자가 이야기한 도의 본질처럼, 하느님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차별하지 않는 이가 아닐까. 오늘의 세계는 점점 좁아져 간다. 이제 인류는 싫건 좋건 나와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이웃과, 서로 다른 문명,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나서, 교류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 또한 한국인이 불교, 유교, 도교, 샤머니즘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혼합 수용해 가며 오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기독교인으로서 타종교, 타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고자 하는 함석헌의 인간적인 노력과 종교적 관용성은, 한반도는 물론 더 나아가서는 오늘을 사는 세계인의 사회 문화적 정서에 아주 적절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