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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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늙은이)
늙은이 1장
작성자 바보새 14-01-02 13:53 조회3,0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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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석 유영모의 늙은이 ]

[ 노자 도덕경 원문 ]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
故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요,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 박 영호선생의 유영모 늙은이의 한글 풀이 ]
길 옳단 길이 늘 길 아니고
이를 만한 이름이 늘 이름이 아니라.
이름 없어서 하늘 땅이 비롯고
이름 있어서 잘몬의 어머니
므로 늘 하고잡 없어서 그 야믈ㅁ이 뵈고
늘 하고잡 있어서 그 돌아감이 보인다.
이 둘은 한께 나와서 달리 이르(부르)니
한께 일러 감아, 감아 또 감암이
뭇 야믈ㅁ의 오래러라.

[ 박 영호선생의 유영모 늙은이의 한글 풀이 주석 ]
주(註)
잘몬: 잘은 우리말로 만(萬), 몬은 물(物)의 뜻의 우리말. '먼지'는 몬에서 떨어진 것을 뜻하는 '몬지'에서 변형된 말, 일본말 もの(物)도 몬에서 유래함.
하고잡: 욕망.
야믈ㅁ: 기묘한 것.
돌아감: 운행.
한께: 함께. 감아: 가맣다, 아득하다, 검다이 뜻.
오래: 문(門)이란 뜻의 순 우리말.  : 돌아다닐 요.




[ 함석헌 선생의 도덕경 풀이 ]



길 길할 수 있으면 늘 길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1.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길 길할 수 있으면 늘 길 아니요
이름 이름할 수 있으면 늘 이름 아니라
이름 없음이 하늘 땅의 비롯이요(없음을 이름하야 하늘 땅의 비롯이라 하고)
이름 있음이 모든 것의 어미다.(있음을 이름하야 모든 것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하고저함 없이 써 그 아득함을 보고(늘 없음은 써 그 아득을 보고저 하고)
늘 하고저함 있어 써 그 끝을 보나니(늘 있음은 써 그 갈래길을 보고저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이름은 다르나 같이 일러 까맣다
까맘의 또 까맘이
뭇 아득의 오래니라.

본래 처음의 노자에는 장(章)의 이름이 없다는 거야요. 후에 와서 1장, 2장, 하상공(河上公) 본에는 붙혔다 그러고, 본래는 후에 오다가 됐다는 거고, 있으나 없으나 뜻을 알면 되죠. 그런데 상편 하편으로 갈리는데, 상편 하편도 본(本)을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다르답니다. 다 81장인 것은 같구요. 그리고 도덕경(道德經)이라고 그러지만, 서양도 도덕경이라고 그렇게 알려져 있어요. 노자의 도덕경이라 그러는데, 도덕경은 사마천(司馬遷)이 말하는데도 도덕의 뜻을 말했다 그러지만 사실 내용을 보면 도덕의 뜻이 아니고, 자못 상편은 시작이 되기를 "도(道)"자로 시작이 됐고 하편은 시작이 되기를 "덕(德)"자로 시작이 돼서 그래서 도덕경이라 그랬는게, 이 몇해 전에 중국에서 한 7,8년 됐을까 저 장사현의 마왕퇴라고 하는 데서 어떤 여자의 무덤에서 노자 고본이 나왔어. 그거는 한대(漢代)초기라고 그러니까 당대(唐代)보다도 전인데, 당대에 들어와서는 이걸 경전으로 삼아가지고 "집집마다 한책씩 둬라" 그렇게끔 명령을 하리만큼 됐으니까 많이 됐겠지만, 처음에는 그런것도 아닌데 한대의 고본이 지금 나온 것과 대동소이해. 별로 틀린거 없어. 없어진 자도 있고 오자도 더러 있고 그렇긴 하지만 대체로 같다니까 그러면 벌써 서력 기원 전부터 상당히 유행이 됐던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책의 재미있는 거는 어째 그런지 덕(德)이 먼저 있고 도(道)가 후에 있어요. 그래 그건 한다면 덕도경(德道經)이라고 그래야겠는데(웃음)그러니까 도덕경이라는게 내용으로 된거 아니고 첫글자로 인해 된거라 그뜻이 아마 옳은가보지요. 지금은 보통 도덕경이라고 그래요. 그거는 글자가 그렇게 시작이 된걸로 그렇게 아시는거 좋을꺼고, 첫장을 읽어봅시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교

요걸보면 알 수가 있지만 노자가 다는 안그렇지만 많이 운문(韻文)으로 돼있어요. 운(韻)자로 짚어요. 도(道), 명(名), 시(始), 모(母), 묘(妙), 교(徼), 교(徼)자는 보통 흔히 쓰는자 아니지만 교(徼) 그랬어요.

此兩者 同出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그래서 많이 운(韻)자를 짚는다하는 것을 늘 염두에 두시는거. 꼭 그럭하지 않은데도 있지만 많이 그렇게 돼있어요. 염두에 두시오.

그런데 이것도 보시오. 어디서 떼냐? 한문자는 없어요. 그저 단어가 있을뿐이지 동사로 새길 수도 있고 명사로 새길 수도 있고, 형용사로 새길 수도 있고 그래 한문이 어렵잖아요. 아마 그거는 산스크리트도 그렇게 돼있는지 몰라. 내가 산스크리트 잘 모릅니다마는 이집트 글자도 아마 그럴꺼야. 우리나라 몽고계 몽고말이 중가운데 연락하는, 토씨가 있어서 "나는", 하기도 하고 "내가",하기도하고 그러지만, 그저 중국말로 하면"아(我)" 하던지 "오(吾)"하던지 그럴 뿐, 거기뭐 "나는"하는, 그거는 다른 문맥으로 미루어서 생각을 해야지 그건 없어요. 그러니까 새길라면 저번에 이민위민(以民爲民)하던 모양으로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이라야 사람이지"하는걸로 그건 우리말로, 중국사람은 자기가 쓰기에 따라서 그 의미가 터득되지. 그사람들은 우리 모양으로 그런뭐 토씨를 위한 강조되는거 없냐하면 그렇지는 않을꺼예요.

그런데가 문명이 났냐 못났냐 그걸 아는건데, 많이 읽어야 하지요. 그러니까 어디서 떼냐가 문제야요.

道可道非常道 
거기서 떼야합니다. 
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始, 有名萬物之母, 故로 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교, 此兩者同出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그러는데, 거기 뜻을 찾아서 다르게 붙이기도 해요.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그건 그런데 無名天地始 有名萬物之母,, 
이렇게 붙이는 사람도 있지만 "無" 名天地始, "有" 名萬物之母, 그렇게 "無名" "有名"으로 붙이기도 하고 "無" "有"로 해서 그렇게 붙이기도 하고 이따가 설명을 합시다마는 뜻이 그렇게 되면 다릇게 돼요.

그다음에 또

常 "無欲" 以觀其妙, 常 "有欲" 以觀其 , "無欲" "有欲"을 대로 놔서 常無欲以其妙, 常有欲以觀其 , 그렇게 붙일 수도 있는데, 또 어떤이는

"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 , 그래서 "無欲" "有欲으로 보냐? "常無" "常有"로 그걸 주로하고 보냐? 그걸 따라서 물론 대동소이지만 다르게 되는 점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있다하는걸 참고로 하고 생각을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해보는 거지요. 우리말대로 토를 붙인다면 道可道면 非常道요 名可名이면 非常名이라, , 또는 無名天地之始요, 有, 혹은 有名萬物之母라,고로 常, 無欲以觀其妙요 常, 有欲觀其교 라, 그거던지 常武,以觀其妙하던지 "常無欲" 欲字를 한데 붙여도 돼. 常無欲, 以觀其妙, 常欲以觀其 , 그랬는데, 지금은 듣기에 생각이 헷갈리기만 하는지 모르겠소. 하지만 여러번 여러번 보느라면 요렇하나 조렇거나가 의미가 어떻게 서로 다르냐? 그 관계가 어떠냐? 그걸 씹어보느라면 그말을 알게 되겠지요. 그래놓고는
此兩者同出異名이니 同謂之玄이라, 玄之又玄이 衆妙之門이라

이것은 뜻으로 하면 노자 전체의 뜻이 이 한 장에 있어. 이 장만이 아니고 어느장을 읽어도 노자는 노자의 전체의 사상이 다 들어 있다고 그럴 수 있어요. 간단하게 본래 말을 많이 안할려고 하는 분이니까. 知者不言이요 言者不知라. 아는 사람은 말 아니하는 법이고 말하는 사람은 모르는 법이다, 그러는 분이니까 말만 그러는 게 아니라 실천한 분이니까 남겨 놓은게 요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부득이 해서 말 도무지 안할 수는 없으니까 간단하게 요렇게 썼어. 간단한데 그 대신에 굉장히 함축이 있지 않아요? 그거는 자주자주 씹어봐야 하는데, 그걸 씹어볼라면 그것이 내것이 돼야 돼. 읽고 읽고 읽고 해서 늘 여러번 알거 같으면서 모를 것 같으면서 읽어서 자연히 언젠가 그것이 입에서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이렇게 나가게 돼야. 그러면서야 입이 저절로 외우는거고, 생각은 그러면서 내가 해보는거고, 이렇게 돼야 맛을 보게 되는 겁니다.

可道는 길 삼을만하다. 동사로 유선생님은 "길 옳다 할진대 늘 길이 아니고"그렇게 새기셨어요. 그대로 새기면 道可道 길삼을만하면 非常道 늘 길이 아님. 떳떳한 길이 아님. 그래도 좋고, 名可名, 이름할만 하면 非常名 늘 이름이 아님. 떳떳한 이름이 아닌, 無名天地之始 이름 없음에, 유선생님도 "이름 없음에" 그랬는데 이름 없음에 天地之始 하늘 땅에 비롯, 有名萬物之母 이름 있어서 잘몬, 잘은을 우리말로 잘 그리잖아요? 百은 온, 千은 즈믄, 萬은 잘, 兆가 즐, 옛날 우리말인데 지금은 쓰지 않아 그렇지. 만물이라 그래서 잘몬, 지금 말로는 만물이라고 그러는게 좋을런지도 몰라요. 천지만물이라 그러면 만개만도 아니지요. 모든거라고 하는뜻으로 하는 말인데, 이름 있는 것이 만물의 어미.

常無欲 하고자 함이 없어서, 상은 늘 하고잠 없어서 以觀其妙 그걸로서 妙를 보고 묘는 연전에 할 때도 그랬는데 상기도 우리말 적당한 말 모르겠어. 적당한 말이 없어요. 그저 묘라고 그래 둡니다.

常有欲 늘 하고잠 있어 以觀其徼 그 교(徼)를 본다. 교(徼)는 변자리라는 뜻도있고 작은 길이란 뜻도 있고 돌아간다는 뜻도 있고 그래요. 그런 걸 여러 가지 다 생각하면서 맛을 보세요. 묘에 대해서 교(徼), 묘(妙)는 뭘로 이름할 수 없는 신비로운 무슨 그 뜻, 그것인데 교(徼)는 그 반대로 현실에 나타난 현상계를 보고 하는 말이야요.

此兩者 이 둘은 同出異名 한가지로 나서 이름이 다르다.

同謂之玄 한가지로 일러서 까만건데 玄之又玄 까맣고 까맣고 또 까만 것이衆妙之門 모든 묘(妙)의 문이다.

제일 주되는 것은 "무(無)"에 있다.

여기서 제일 주되는 것이 무(無)라는 글자지요. 그러니까 無爲라 無名이라 無이라 無의 뜻을 어떻게 해석을 하나? 하는게 서로 아는 정도가 달라지지 않아요? 보통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은 더구나 그런거야요. 無라면 아주 무서워해요. 그저 허무(虛無)하다. 아무 것도 없다, 없다면 무서워하는데, 노자는 그렇게 생각을 안해요. 뭐 우리만이 아니고 도대체 사람이라면 다 그럴는지 모르지요.

첫장이 이제 도(道)를 끄집어내면서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길을 길삼을만 하면, 길이 있어야 가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마치 우리몸의 길이 있어야 내 갈곳을 찾아갈 수 있는 모양으로 사람의 살아가는 것도 정신적인 그 살림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걸 도(道)라고 그래요. 물론 그거는 중국사람으로서도 언제로 부터 말하기 어렵지만 본래는 길을 걸어가는 그 길에서 나왔을 것이요. 나온 말이지만 이렇게 되면 이거는 그걸 초월한 우리 정신 속의 살림에서 하는 말인데, 상(常)은 우리말로는 "늘"이라 혹은 "덧덧"이라, 그러니까 우리 지금 쓰는 말로하면 영원불변하는, 영원무한한, 지금 쓰는 문자로 하면,
도라고 하는 말을 쉽게 말을 한다면 지금 말로 하면 "진리"라 그래도 좋을런지 몰라요. 어쩌나 우주의 궁극의 자리니까 사람이란, 사람치고도 가지가지 있으니까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있지만 무슨 종교를 믿던지 과학을 하던지, 또 과학을 하던지 안하던지, 어쩌나 사람인 다음에는 사람의 근본되는 거는 뭘 찾아요. 뭔지 모르는거를 자주 찾는거 있어. 찾는게 뭘 찾나 그러면, 가만 반성을 해보면 근본되는 것, 근본이란 생각도 못하는 때도 많이 있지만 내가 스스로 내 일을 반성을 해봐도 사람이란 왜 그렇지? 왜 그렇지? 어린애일수록 왜 그렇지? 왜 그렇지? 자꾸 묻지 않아요?

그래 젊을 때 일수록 호기심이 많아. 그거는 누가 그러라고 해 그런 것도 아니고 자연히 그런데, 그건 왜서 그럴까? 찾아들어가면 뭔지 모르는 걸 찾는데, 그럼 뭘 찾느냐? 그러다 보면 찾는게 뭐냐? 요새 말로 하면 "뿌리"라고 그러는게 좋을지 몰라요.

뿌리찾는 건데, 뿌리찾는 거를 우리 집안의 뿌리는 어디있냐? 이씨는 이씨, 김씨면 김씨의 뿌리는 어디 있냐? 그래 옛날은 그거를 가장 뭘한 것으로 알았으니까 서로 자기네 족보자랑, 세상에 나와서 출세해 다닐려면 남의 집 족보라도 알고야만 상놈인지 양반인지 자기 조상이 어떤지? 그런걸 알아야 된다. 또 그래 종교라고 그래도 우리는 아주 제일 알기쉽게 선조의 영에다 제사로 지내, 그러면 선조의 영이 복을 준다. 부모의 은덕으로 살아간다, 그러잖았어요.
그랬는데 그건 아무래도 그걸로만이 만족이 돼요? 그래서 그 뿌리의 뿌리는 뭐냐? 그 뿌리는 뭐냐? 그뿌리는 뭐냐? 그러면 결국은 "민족"이란 소리도 하고 "인류"라는 소리도 하고, 그러다가 마지막에 알 수 없는데로 가는데,

공자님은 오셔서 그때 실지 형편에 가장 적당한 걸로 하느라고 해서 중(中) 보통 말을 해주면 알아듣는사람, 그러니까 일반사람 아니요? 또 사람 중에는 말을 해주기 전에 벌써 자기가 상당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또 말을 해줘도 좀체로 못알아들어서 많이 여러번 일러주고 자기가 힘을 써서야 알게 되는 사람있고, 그러니까 상근(上根)으로 났냐? 중근(中根)으로 났냐? 하근(下根)으로 났냐? 불교에서 말하면 근(根)이라고 그러잖아요. 아주 근(根)을 천지(天地)라 그러기도 하고 기근(基根)이라 그러기도하고, 타고나기를 천품을 어떻게 타고났냐? 그거는 뭐 내 임의대로 내 마음대로 하는거 아니지요. 내가 타고나는거니깐. 그런 의미로 하면 사람은 역시, 불교에선 그래요. 나는 내 부모의 은혜, 내 마을의 은혜, 내 민족의 은혜, 나라의 은혜, 다섯가진가 네가지 은혜로 기도 하고 그러지만 사실은 거기 뭐 은혜라고하는 생각도 들어갈 여지가 없지. 누가 은혜를 주고싶어 주는 것 아니지만 내가 생각을 하면, 나는 내가 한 것 없이 이걸 받아가지고 왔으니까, 찾노라면 그런 생각이 날껀데,

공자같은 이는 상당히 현실적으로 생각을 해서 그러니까 인제 중(中)사람을 표준으로 하고 실제로 맞게 그때에 앞을 가려서 어떡하면 이 일이 옳을지, 저 일이 옳은지 그걸 가리도록 실지 지도를 해주자는 것, 그거 주로 목적이었으니까 유교는 그렇게 나온 거고

노자 같은 이는 그런데 대해 불만이야. 그것만 가지고 되냐? 그건 노자의 시작이 아닐껍니다. 그 위에서부터 있지. 그건 찾아 올라가도 노자가 공자나 마찬가지로 주역(周易) 또 그 다음 올라가면 황제(黃帝), 이런 아주 간단한거지만 거기서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그렇게 말해야 옳을꺼야요. 그러니까 때로해서 누가 먼저 났냐? 후에 났냐? 그것만이 아니라 후에 났으면서도 그야 본래 오던 근본적인 그 생각을 많이 할 수 있고, 또 전에 났으면서도 보통적인 일상적인 주점을 거기 둘 수도 있고, 그런거니까 같지는 않을꺼예요. 헌데 노자는 하여간 그때 나서 그때 필요로 보고하는데 유교에서 모양으로 그런 것만 가지고는 안되지 같은 도(道)라는 글자를 쓰는데 공자님의 도(道)는 깊이 깊이 뿌리라기 보다도 그런 의미도 있지요. 없지 않아요. 그거는 중용(中庸)엘 가야. 그러니까 논어(論語)에는 그런게 별로 잘 나와 있지 않지만 그후에 증자(曾子)를 거쳐서 자사(子思)로 해서 맹자(孟子)에 전했다 하고는 중용사상에 들어가면은 상당히 깊은데 있어서 도선도 나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중용에서 말하는거 보면 천명지위성(天命知謂誠)이요 솔성지위도(率誠知謂道) 수도즉위교(隨道卽謂敎)라, 그랬는데, 그거는 상당히 논어에서 보통보는것보다는 깊이 봤다고 그럴 수가 있지만 노자는 같은 글자를 쓰면서도 그 시대가 이러니까 그저 제앞을 가릴 수 있게 현실지도를 하는 것이 제일 급선무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 가지고 이 시대에, 지금 시대가 전환이 될려고 이러는데, 여기서 그런거 해가지고 되냐? 아무래도 이것은 맨처음에서부터 고쳐찾지 않으면 안된다, 노자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보지요.

여러분이 지금 우리 현실을 놓고 그 생각을 해 보시면 같은 문제를 보면서도 아주 현실주의로 기울어져서, 그러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 철학적으로 기울어져서 사상적으로 근본을 파고 들어가는 데 갈 수 있고, 그럴겁니다.
대체로 하면 수가 어느게 많으냐? 그러지만 수로 결정이 되는 수도 있지만 그다음에 가서 보면 누가 과연 그시대에 옳게 했냐? 그런거 자연히 판단이 날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위대한 종교를 시작했다고 하는 분들을 보면 많이 밑뿌리를 파는데 현실문제를 눈을 감기 위해 그러는게 아니라 그걸 모르는거 아니지만, 생각을 하면 까닭이 있어 나오는거니까 그래 그런가 보지

여기 도는 그러기 때문에 굉장히 공자님의 말씀에서 그것보다 도(道)는 같은 글자인데 많이 깊은 데서 생각한거라고 그걸 알으셔야 돼요.

이행도(易行道)와 난행도(難行道)

그러니까 도란 궁극에 어떻게 나왔냐? 그거는 이제 날더러 말하라면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나는 기독교인이니까 기독교 신앙에서 실지로 당했던 문제로 내가 잘 아는, 기독교에서는 우리 젊었을때는 무엇이 문제가 됐냐하면 "종교냐? 과학이냐?" 종교는 과학에 반대되는거냐? 그게 문제가 됐어요. 그래서 젊었을 때 제일 토론이 하나님이 있냐? 없냐? 한다든지. 하나님 믿어가지고 나라가 건져지냐? 안되냐? 그리고 말들을 많이 하는데, 지금에 오면 그문제는 그 보다는 많이 더 현실적으로 기울어졌다고 그럴 수 있지 않아요? 그럴 때 과연 그럴까? 그거는 뭐 내가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내리올꺼라,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때에 나는 그랬어요. 제일 문제가 지금도 저번에 진화론이 문제라고 그걸 말합니다마는, 그건 또 그럴듯도 해요.

생각을 깊이하기 시작을 하면 도대체 사람이라는거 뭐냐? 사람은 어느 사람도 사람이라 생각이지만 사람은, 내 또 사람의 뿌리는 어디냐? 요새말로 뿌리를 찾을 수 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과학자들은 요새 하는 말을 보면 따지고 따지고 들어가면 "그건 우연히 그렇게 됐다" 순전히 물리적인 주로 요새말하는, 복잡한 단백질이 화합이라든지, 효소의 화합이라는지, 이런걸로 설명을 해서 무엇이 누가 목적이 있어 그런 것보다, 가다가 어떻게 그렇게 됐어. by chance라 자주 그러는데, 과학자들은 그렇게 안심이 되는지 몰라 하지만 사람은 또 그렇게 돼요? 대세가 이러면 남들이 하는대로 거기 대해 어려운거니까 그저 남하는대로 좋게 따라가자, 쉽게 그런 점도 있지만, 그건 안일주의지. 그래서 옛날도 이행도(易行道), 난행도(難行道)보다는 이행도, 쉬운 길을 따라가.

사람이 될 수록은 쉬운 길을 따라 가려고 그래요. 그렇지만 사람이 개인적으로 우열은 있지만 그럼 쉬운길 이행도만 따라가면 되냐하면 그렇게 안되는 점이 또 있어요. 그러니까 훌륭하게 났다는 이, 석가면 석가, 예수면 예수, 소크라테스라면 소크라테스라는 이들은 다 뭔고하니 이행도가 아니고 아주 어려운 길 내놓고 말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을 쉽고 평탄하게 가는길이 많지만 생명으로 가는 길은 험하다" 하고 한 것은 일부러 남을 불행하게만들기 위해서 그랬겠어요? 자기가 생각하고 생각해 보니까 힘이들어. 힘이 들지만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하는데서 나왔을 것 아니요?
그런데 일반사람은 뭔고 하니 "아이고 그걸 누가 합니까?" 그러니까 사람은 모순이에요. 언제까지든지 내가 어떻게? 내가 주인의 되자고 하는 것이 있기는 있으면서도 또 어떠냐 하면 하니 "아이고 주인이 되려면 어려워. 그저 남 따라가는 것이 제일 좋다." 그래 그런 의미로 하면 민주주의는 본래부터 되기가 어렵게 생겨 먹은건지 몰라요.

권력도 그렇지만 생각을 깊히 하는 것이 좋은 줄은 알긴 알면서도 조금하다가 "아이 그걸 누가 알아요. 몰라요. 설명해주세요." 그래 조금 찾다가 생각도 안해보고 "그거 왜 그렇습니까? 뭘 설명해주면 "고맙습니다" 그럭하고 안심이 되는 사람이 있지만 사람 중에는 또 그걸로 안심이 못되는 사람이 있지 않아요? 수는 적을는지 모르지만 그걸로는 못되는 사람이 있어. 그럼 그다음에 지내가서 보면 인류의 가는 길목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사람이 누구냐? 그러면 굉장히 어려운 걸 지적을 해서 저리로 가다가 고생만 많이 하겠지. 하지만, 그걸 지내고서. 사람의 방향을 새 방향을 늘 찾아내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것 아마 부인할 수 없을꺼예요. 같은 기독교, 불교, 안에서도 난행도(難行道)냐? 이행도(易行道)냐? "아니 그저 내가 할라는 것보다는 하나님 한테 내맡기고 내모든 것 다 맡기는 것, 예수의 공로로,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그게 제일 좋은 길입니다. 그게 이행도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다 "아이고 은혜스런 말씀이라"하고 "목사님 말씀 들으니까 해결이 된 것 같습니다. 속이 시원합니다" 그리고 따라오지만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게 가서 해결이 될까?

해서 쉽지만 어느 점 결정적인 관문에 가서 마지막에는 별수 없이, 그러니 되고 안되고가 어디가 결정이 되는고하니 문턱에 가서야 결정이 되지 않아요?

날보고 주님, 주님 했지만 정작 문턱에 오면 문이 닫혀있어. 안돼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 그러잖았어요. 그런 단호한 말이 어디 있어요. 그렇지만 그거는 그렇게 말을 해줘야 알기 때문에 그랬는데, 지금 이시대가 이렇게 되면 사람이 다 어드런고하니 이걸 생각을 해서 "방향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길이 옳습니까?" 그건 다 찾을려고 하지만 쉽지 않아. 쉽지 않으니까 어디라도 가서 당수한테라도 돈이라도 주고해서 당수(黨首)라고 그러고 그런데 가 붙으면 어떻게 어떻게 쉽게 지내가면 그게 쉽지않으냐? 하지만 그런 사람 민주주의 못하고 만단 말이야. 민주주의를 땅 위에서 정치하는데 민주주의를 못한다 그런다면 하늘나라 못들어 갈꺼요. 하늘나라가 민주주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구경 마지막에는 내가 주검을 가지고라도 뚫고 들어간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겠는데, 그 생각 아니해. 그러노라니 얼마나 하면 여기서 노자가 무(無)하고 그랬겠어. "없다" "무다" 그러니까 대개 사람은 "아이구 그걸 누가 해요"했는데 그렇지만 중국역사에 있어서 노(老).장(莊)의 사상 아니고 오늘날 까지 올 수 있겠나? 안그렇다는 말이야.
그건뭐 많이 사상사를 연구하는 사람도 다 그러니까 지금은 도리어 공자의 말하는 거는 차차 적어지는 경향이지만, 노.장 얘기는 도리어 지금 와서 자주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이 어렵다면 참 어려운 길인데, 왜? 자기가 철저히 "내가 생각 하지 남의 생각 가지고 가는 건 아니라" 하는, 그렇게 돼 나오니까 이 도(道)란 보통이 아니니까. 노자가 말한 거는 갈 수 있는 데까지 부딪칠 수 있는 벽에까지 가 부딪쳐요. 절대의 벽이예요. 절대의 벽이니까 나오는게 뭐겠어요? "없다", "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뭘 하겠어요. 그저 그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지. 그래 순(順)자, 순종하는 그대로.

이제는 함곡관(函谷關)도 없다

첫장에서 이걸 이해를 하신다면 그 다음에 다른 장 읽어 가시긴 쉬울꺼야. 그러나 물론 마지막까지 읽어야 또 그 의미를 다 짐작을 하게 되지, 하나만 알겠어요?
하지만 이 도(道)라는 거의 절대의 지경인데, 그래서 아까 내가 지낸 얘기를 부득이 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랬소만, 그래서 과학이냐? 종교냐? 그러지만, 그거는 차원이 다른건데 왜 혼동을 하냐? 나는 그렇게 해결해요. 지금은 여러분한테 참고가 되겠는지 안되겠는지 모르겠소마는, 과학이 종교의 반대된 것 아니야. 과학은 과학의 세계 따로 있고 종교는 종교의 세계를, 차원이 다르다. 마치 이우주에 3차원, 4차원, 그러는 모양으로 어떤 사람은 5차원이란 말도 하는 사람도 있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5차원에 산다" 그런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줄을 모르게 되니까 과학하고 종교하고 충돌이 되는 것이, 현실하고 모순 또 우리 속에 이 내적 살림하고가 충돌이 되는 것같이 알지만 차원이다른 건데, 그럼 차원이 달라서 별개 거로 있나? 별개 거가 아니지. 마치 뿌리하고 줄기하고가 환히 다른 거지만 뿌리 다릇코 줄기 다르냐? 뿌리없이 줄기있고 줄기없이 뿌리있냐? 그런 건 없어요. 없는데 그걸 볼 때는 확실히 뿌리 다르고, 뿌리는 겉에 드러나서는 안되고 또 줄기는 땅 속으로 들어가서는 안되는 거고, 들어가 있는 것과 밖에 나와있는 것의 역할이 다르지만 그래도 사는 것이 어디에 있나 그러면 뿌리에 있다고 그래야지, 그러니까 뿌리는 아까 얘기대로 어렵다면 어려운 길이지요.

오늘 저녁은 그 얘기하다가 시간도 다가고 하니까 말겠습니다만 해도, 날더러 말을 하라면 하나는 의미의 세계이고, 종교라, 어느 구체적인 종교를 말을 하면 그건 또 전도가 되니까. 종교로서야 전도하는거 옳은 일이지 나쁜 일이겠소. 그러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그건 또 남의 종교의 침범이 되니까. 남 믿는 종교가 번민이 돼서 "난 죽을지 살지 모르겠소"하면 모르지만, 남 뻔히 믿는 종교있다는데 가서 "네 종교는 버리고 내종교를 따라와야 된다" 그런말 할 것 없어요. 왜 남의 믿는 걸 방해를 해요? 그러니까 전도가 좋기도 좋은 일이지만 어떻게 되면 도리어 남에게 나쁘게도 될 수 있잖아요? 그 설명하자는 건 아닙니다마는 하여간, 차원이 다른데 현실문제는 현실문제고 사람은 두 차원에 사니까 어쩔 수 없이 그건 왜 그러냐? 할 수 없어.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탄식이 나오지 않아요.

그렇게 어려운 무엇을 겪은 바울이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그러는거는 이 현실을 이 시간에 사람으로써 하니까 자주 이런 말이, 이건 노자하고는 직접으로 관련이 없는 말이 자주 나오는군요 해도, 우리는 지금 방향을 결정을 못해 이러는데, 방향 결정해야 하느데, 방향은 물론 현실 문제지, 현실에서 어느길로 가는 것이 옳겠냐? 그 방향이겠지만 그러나 뿌리의 그 세계, 의미의 세계에 관련 안되고 현실이란게 어디 있나요? 그러니까 그걸 혼합을 할 수는 없지요. 노자는 그때 당시에 사는 사람이면서도 자기도 남들 하는 모양으로 먹고 사는 직업도 해야 된다고 도서관에서 서고 지키는 일 하지 않았어요. 별 아무 것도 아닌 하급관리니까 누가 이름이나 알았겠어요. 허지만 생각은 깊이했던 사람이고, 그리고 있다가 함곡관(函谷關)을", 거기 관이라 그랬지만 이 관인지 저관인지 대개 중국사람이 그때 관을 넘어서 간다하면 함곡관인데, 함곡관을 넘으면 저쪽으로 가서 산골이야요. 아주 문화세계와는 딴 곳인데, 그리로 갈라고해서 가는데, 또 어떻게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가 "선생님이 거기 가시면 다시 오실 수 없는데 우리를 위해서 무슨 말씀을 해주시고 가셔야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2년 동안을 머물러 있으면서 써준게, 전설로 돼서 몰라요. 도덕경이라는 5천문이다, 그런다는데 꼭 요거이겠소? 들고 나고가 있고 없어진 것도 있고 다른 데서 들어온 것도 있을는지 모르지만 어쨌건 그게 이제 노자의 글인데.

다 신화만이 아니고 어느정도 사실적인 뭣이 있어서 된 걸 겁니다. 그러면 그건 그때 사람으로, 요새 그때를 그대로 갔다가 형용을 할 수는 없지만 그는 그때 전국시절에 있어서 부국강병(富國强兵)주의가 나와서 사람을 알기를 개나 닭이나 아는 모양으로 몰아치워서 "전쟁에 이리 나가거라. 저리 나가거라"말대로 부려먹다가 거기서 죽으면 내버리고 와서 전쟁으로 얻은 이득은 위에서 정치한다는 놈들이 앉아서 먹고 그러는 꼴을 보고 "좋다 좋다"하고, 거기서도 또 해먹기 위해서 소진(蘇秦)이요 장의(張儀)요 하면서 말을 달려가지고 이 임금한테 가보고 저 임금한테 가보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묵자(墨子)같은 사상을 가지는 사람도 있고, 순자(荀子)같은 사상을 가지는 사람도 있고, 한비자(韓非子)같은, 가지 가지야. 서로 제각기 사상이 나와서 "이리 가는 것이다, 저리 가는 것이다" 방향을 제시하지 않아요.

그런 가운데서 공자 같은 이는 고심많이 한 이지. 그거 어느 그렇게 그런 것도 아니고 그래도 깊은 성현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는 성현이란 말 몸소 하지는 않았지만, 한마디로 민(民)이라하는 걸 가르치면서 그래도 어떡하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를 가르쳐주겠나? 그래서 노자보기에는 그런 것이 말은 옳긴 옳은 말인데 그것은 조금 잘못하다가는 아주 형식적에서 걸려버려 가지고 도리어 잘못이 될 우려가 많이 있어. 그러니까 아마 어떤 때는, 노자는 그리 말 않했소만은 그다음에 장자는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지내온거니까 그런 걸 염두에 두고 그것을 이 현대에 어떻게 살릴 수 있나? 여기서도 지금도 그때와는 다르지만 현실 속에 아니 살수도 없고 또 사는 의미가 뭐냐? 뿌리를 안캘 수도 없고 그걸 나더러 캐달라고 그래서 그저 우리는 쉽게 쉽게, 돈벌이는 해먹으면서도, 주일날 쯤 목사님이 말을 해주면 그걸로 마음을 안심을 시켜서, 그건 이행도(易行道)요, 그러니까 내가 1950년대 그적에 말할 때 루터는 캄풀주사 주고 바울은 몰핀준다고 그랬나? 루터가 그러잔말 아니고 바울이 그러자는 건 아니지만 지금 루터나 바울이 말을 갔다 쓰는 것이, 불교에는 적당한 이름이 모르니까 모르지만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일꺼야. 기독교보다 더 할는지 모르지. 임시 임시로 몰핀줘서 이게 진통시키는 것 아니야? 병을 고치는 것 아니라 진통시키니까 그때는 시원한 것 같은데 그 다음에는 자주 불량이 늘어가. 늘어가면 마지막엔 죽고마는 거요. 아편쟁이가 그래 죽는 건데, 그러니까 진통을 시킨다든지, 강심제를 준다든지, 마취제를 준다든지 그게다 그런데, 현실의 종교라는거 그런 역할 안하는 거 있을까?

과학에선 아주 그건 안그래. 그저 현실 문제만을 들여다 보고 하니까 잔혹하다면 잔혹한 현실 문제만을 얘기하니까. 그러니까 거기서는 그런거 없으니까 "뭐 죽든지 살든지 뭐 하다가 죽더라도 싸워라도 봐야 옳지 않느냐?" 그런 이론이 나올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사람이 또 그걸 현실에만 그러냐? "죽으면 다냐? 그러면 또 그렇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시대가 달라서 외양으로 많이 달라졌어도 노자가 그때 당하고 공자님이 그때 당한 것대로, 뿌리도 안캘 수도 없고 현실문제를 무시할 수도 없고, 그런 중에서 어떤 걸로 살아가느냐? 노자는 그땐니만큼 그러다 그러다 할만큼 말하다가 "나는 이제 간다" 그리고 또 들어가면 됐지. 그럴 수가 있는 시대야. 허나 우리는 이제 그런 함곡관이 없지. 거길 넘어가면 이쪽 세상으로 들어오지 못할 그럴 때가 있다면 혹 그래도 좋을는지 몰라요. 하나 지금 그럴 데가 없지 도피를 어디로? 도피를 할 수가 있소?
그러니까 여기서 이 현실에 있으면서 이 문제를 어떡하냐 그럴 데는 부득이 예수나 소크라테스가 보여주신 모양으로 증거해 놓으면 나는 죽더라도 죽지 않을꺼다. 후의 사람은 이 길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을꺼다. 어느 무슨 그런 심정에 노자는 분명히 그래서 그랬을꺼예요.

만일 처지를 바꿔서 요새 노자가 와있다 그런다면 함곡관 넘어서 어디로 갈려고 그래도 갈데가 있나? 어디로 간단 말이요. 중국을 간다면 아직도 산골이 있는지 모르지만 손바닥만한 우리나라에서는 들어갈 산골도 이제는 없어졌어. 산골이 있다면 가서 해도 괜찮아요. 왜? 그게 현실주의자들 한테 너는 도피를 하냐? 너는 아주 무책임하지 않냐? 그럴는지 모르지만, "너는 그럼 책임있게 해봐. 얼마나 하나?" 야당이랍씨고 나가서 그럼 네가 책임대로 하는거야? 현실에서 타협을 어느정도 해가지고라도 그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아요? 말은 좋지만 들어가서 호랑이 잡아온 놈 있더냐?(웃음)들어가야 잡잖아요. 그러지만 들어가면 먹혔지(폭소) 호랑이는 어떻게 됩니까? 호랑이는 그 다음에 다른 호랑이가 또 잡아먹을꺼요. 그렇게 끝나는거지(웃음).

말로 할 수 없는 까만하늘(玄天)

그런데서 어떡하면 이 고전을 지금에 살려서 볼 수가 있을까. 이걸 놓고 이렇게 생각을 할 때, 무(無) 무섭긴 참 무서운 무(無)자인데, 참 무자는 옛날은"仟"요렇게 쓴건데, 이건 근원을 알 수가 없어요. 지금은 "無"이렇게 쓰는대, 진시왕 때에 와서 많이 간섭을 해서 고쳐 쓰고 그러고 했어요. 학자라는건 없고 옛날 글 베낀다는 사람이 있어서 글씨 쓰고 이렇게 하니까 거기 많이 달라지고 그래서 그때부터 "無"자로 왔는데, 고자로는 "무"이렇게 무자를 썼대요.
요뜻을 말하면 내가 이자 한 그말을 하면 요걸 보면 알거니까 그래 한거야요. 도(道)라 한 거는 궁극의 세계, 어디서 나왔으면 어디로 가는지? 나온대로 그리로 가는 거야요. 나온 데가 어느 장소라면 뭐 할라고 그리로 또 돌아가겠소? 하지만 그건 나온 데라 하고 또 돌아가는, 그럴 수밖에는 우리 이 정신으로는 그 이상을 발표할 수 없어요. 하나님 한테서 나왔고 하나님 한테 돌아간다. 부처님 한테서 모든 게 나왔고 부처님께로 돌아간다 한다든지, 도(道)에서 나와서 도(道)로 간다 한다든지, 그건데 본래를 말하면 말이 부족해 그러지 돌아갈 제자리가 있겠소, 제자리라는 거 없어요. 그 자리에 가면. 그러니까 하나님을 과학적인 그 태도에 서서 알아볼려고 그러는 거는 그 사람들 해도 그거는 모를꺼요. 그러니까 과학은 과학에서 맘 놓고 쉽게 생각하게 됐어. 허나 이왕 생각하는 부분을 내마음에도 맡은, 누구만이 하는건 아니지만 맡은 사람인 다음에는 어려워도 내식으로 생각을 해봐야. 생각을 해보느라면 노자는 노자대로 생각을 해 뚫은 거야. 그러니까 말한댓자 그 말이 통치 않을줄 아니까 지자불언이요 언자불지라, 아는 사람 말 안하는거고 말하는 사람 모르는 사람이다, 그랬는데 생각을 하노라면 상당히 내가 알 수 있는데가 있을꺼야.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 이름없는 것이 천지의 시작이요, 有名萬物之母이름있는 것이 만물의 시작이라.
본래 시작은 아무 것도 없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없지만 없는데서 만물이라는 거 쏟아져 나온거다, 그런데 또 다르게 새기면,
無, 그걸 이름을 지어서 천지의 시라고 이름을 해. 無, 그것을 천지의 비롯이라 이름하고, 有, 그것을 만물의 어미라 그렇게 이름한다. 그러니까 有와 無가 다른가? 有와 無가 하나인데 하나는 無라 그러고 하나는 有라 그러야 돼. 손바닥의 이짝 저짝 있는 모양으로, 하나는 빛이라 그러고 하나는 어두움이라고 그래야지만 본래 빛도 아니고 어두움이 아닌 근본되는거 있어서 빛이라는 것도 있고 어두움이라는 것도 있게 되지 않았어요. 그러면 참빛이란 빛아닌 빛, 그건 어두움이겠지, 또 어두움은 어두움 아닌 어두움, 그건 빛이라고 그러야겠지. 그렇게 돼지 않아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율배반적으로 사고하기를 상대적으로 사람인 다음에는 예수도 별 수 없어, 석가도 별 수 없고, 상대적으로 생각을 하게 됐는데, 상대적으로 생각을 해야지만 모르니까 어떡하면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그걸 초월하냐? 그러는 데서 無자도 해봤다가, 맘이란 없다. 그래 봤다가, 그러니까 그말에 여러분이 취하질 말고 그 자리가 뭐냐? 어째서 그 소리가 나왔겠냐? 그 심정을 더듬어 보는거요. 허면 그거는 일조일석에 되는 거 아니고, 외람한 말이지만 나도 확실히 그 자리에까지 가 잘못하고 하는 말이지만, 어렴풋이 짐작되는 걸 보면, 그러노라면 어느 그 자리가 뭔지 그..
그 이상은 내가 하면 거짓말이 될꺼니까 하진 못하지마는, 그렇게 알으시고 無와 有가 다른걸. . .
比兩者同出異名이라, 한데서 나왔지만 이름이 다르다. 뭣 때문에 다르냐? 有欲無欲으로 가서 하고자 하느냐? 하고자 하지 않냐? 그걸 常無라 하나 常有라 하나 常無欲이라 하나? 常有欲이라하냐? 또 常, 有欲이라하냐? 常, 無欲이라 하냐? 有欲, 無欲으로 붙일 수도있고, 有, 無로 붙일 수도 있고, 常無, 常有로 붙일 수도 있고, 그걸 이렇게 저렇게 맛을 보면서 여러 가지로 해 보세요. 그러면서 常無欲以觀其妙요, 어쩌나 妙자리로 봐야 하데, 妙라는게 말로 하기 어려운데, 우리말로 "묘한데", "참 묘한데"했지. 지금은 우리 옛날 조상의 말을 잃어버렸어. 모르겠어. 그거 있었겠지 없었을 리가 없어요. 한문자로 쓰니까 한문자가 좀더 실감있게 발표가 되는 것 같아서 한문만 하니까 그랬갔지, 모르고 그저 그래버렸어. 일본사람은 그게 "다이 (妙)묘하다고 할 때 다이나루라 하는데, 뭔지 모르겠어, 오늘 사전을 찾아보다 그 이상은 없어서 못 찾고 왔군요. 그래도 영어로 한다면 "신비로운"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겠지요.

그렇게 有欲 無欲으로 갈라 얘기하고는 그것만으로는 안되니까 比兩者는 出異名이라. 이 둘이 사실은 하나야. 하나는 나왔는데 이름이 다른거야. 하나는 절대(絶對)고 하나는상대(相對), 요새말로 하면 절대. 상대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同謂之玄이라 근본을 찾아 올라가면 까만거. 이것도 까망 저것도 까망, 말로 할 수 없는 지경이니까 까맣다고 玄이라 그랬어. 현(玄)은 하늘, 푸른 하늘이라고 그러다고 그러다가 높다가 높다가 묘해서 마지막엔 까만 하늘, 현천(玄天)이라 그랬어. 여기 노자는 현(玄)자를 좋아서 (德)도 현덕(玄德)이라, 보이는 덕이 아니고 알 수 없는, 있는 듯 없는 듯한, 그거는 생각을 얼마나 깊이했냐? 그걸 표시하는 거야요. 玄字를 좋아서 쓰는거.
상(常)이라고 常이라면 남들은 다 싫어하는, 우리말로 보통 상놈, 일상, 날마다 있는 거, 늘 있는 거, 노자는 "常"을 좋아해요.
이 집에서도 이름을 붙혀서 "全眞常"이라고 붙혔어. 누가 붙혔는지 노자사상을 상당히 아는 사람이 붙인 모양인데, 누가 붙혔는가 그러니까 어느 신부님이 붙혀주셨다고 그래요. 그니가 생각이 깊은이요. 10년도 넘은 모양이야. 여기 집지을 때 이름을 지어달라니까 全眞常이라고 그랬어. 全자도 노자가 좋아하는 이름, 常도 그렇고 眞도 그렇고 다 그런건데,
玄之又玄이 衆妙之門이라, 까맣고 까만데 모든 묘한 것이 거기서 나온다.
이거는 시니까 자꾸자꾸 읽어보시오. 그래 뭘 이렇게 느껴지면 되는 거지요.
오늘 저녁은 말 많이 했지만 될 수록은 적게 하고, 이걸 주(註)도 더러 다 읽기가 지루하면 읽어 가면서, 목적은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을 하는데 쉬운 길은 아니니까 어려운 길인 줄 알고 가도록 하시오.
씨알의소리 199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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