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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이 있음에도 우리는 본래 부처다
등록 :2021-05-19
부처님 오신 날, 부처가 부처에게 말한다.
사진 실상사 제공
1. 허물이 있는 부처
“나는 허물이 있는 부처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 좌복에 앉는 순간 문득 번개처럼 이 말이 떠올랐다. 아니 가슴을 뚫고 솟구친다. ‘허물이 있는 부처’라니, 형용 모순인가? 아니면 진실을 드러내는 역설인가? 모르겠다. 각자 알아서 해석하든가, 그냥 음미해보시라. 유영모 선생이 말씀하신 “없이 계신 하느님”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허물의 정체는 도둑이고 손님이다”
다시 이렇게 사족을 달아본다. 도둑과 손님의 같은 점은 외부 방문자이다. 내가 문을 열어 주면 들어오고 초대하지 않으면 도둑과 손님은 내집에 들어올 수 없다. 도둑과 손님은 본래부터 내 집에 살고 있지 않다. 내가 방심할 때 찾아든다. 내가 “이제 그만 나가 주시지요”라고 하면 나갈 수 밖에 없는 약자이다. 물론 좀 질기고 교묘한 도둑과 손님은 이래저래 버티고 밀당하며 나가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결국 그들은 추방당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도둑과 손님은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탐욕, 분노, 증오, 교만, 의심, 질투, 게으름, 기만, 뽐냄, 비굴, 우울, 무기력, 비겁 등이다. 이들 도둑과 손님은 적게는 108개의 이름을 가졌고, 많게는 8만4천 개라고도 한다.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자면 ‘번뇌’라고 한다. 번뇌는 내 삶을 짓누른다.
“허물이 있는 부처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
‘허물이 있는 부처’는 모든 생명들이다. 번뇌가 있는 부처는 바로 너와 나다. 동시에 너와 나는 허물이 본래 없는 부처이기도 하다. 여기서 허물, 혹은 번뇌가 ‘있음’은 실로 유전 인자와도 같은 ‘있음’이 아니다. 당사자의 선택과 의지의 과정으로서의 ‘있음’이다. 그러니 번뇌는 ‘있음’과 ‘없음’에 구속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본래 부처이기도 하다”
나는 허물이 있는 부처이므로 허물이 없는 부처이다. 부디 잘 생각해 보라. 그리 어렵지 않다.
사진 실상사 제공
2. 허물이 없는 부처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가슴에 새겨본다.
“나는 허물이 있는 부처다. 그러니 애써 닦으려 하지 말고 다만 물들이지 말라”
고요하고 맑은 호수는 평온하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오염 물질이 들어가면, 호수는 사납고 혼탁하다. 그대 고요하고 맑은 호수의 평온을 누리고자 하는가? 애써 바람을 불러오지 않으면 된다. 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다. 그래서 옛 스승들이 말했다. 평상심(平常心) 그대로가 깨달음의 일상이라고.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그건 그리 어렵지 않다. 침몰하지 않고 기울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패망의 길이 뻔히 보이는 헛된 가치를 붙들고 휘둘리는 길을 버리는 일이 평상심이다. 둘로 나뉘어 대립하고 어느 쪽에 서지 않는 일이 평상심이다. 풀이하자면 이렇다. 재화를 많이 충족하여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삶이 행복하다고 하는 생각을 버리고, 정신과 마음이라는 말에 묶여 노동을 무시하고 감각과 감정을 죄악시하고 혐오하는 생각을 버리는 일이 평상심이다. 또 있다. 나의 이익과 취향에 맞는 일은 즐거이 수용하고, 힘들고 싫고 이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거부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좋고 싫은 느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슬기롭게 대처하는 삶이 평상심이다. 그러니 애써 닦으려 하지 말고, 오직 오염되기 이전의 마음을 순정하게 지키는 일이 바로 평상심이고 수행이다. 그래서 청허당 휴정이 이렇게 말했다. “본래의 그 마음 자리를 지키는 일이 제일가는 정진이다” 이게 바로 ‘본래 붓다’의 삶이다.
사진 실상사 제공
3. 다시 허물이 있는 부처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부처의 본래 모습이 무엇입니까?”
스승이 답했다.
“지금 당장 그대의 모습부터 보시게”
내가 나를 ‘허물이 있는 부처’라고 발언하고, 그러고 내가 나를 ‘본래 부처’라고 확언한다면,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 나의 무수한 허물을 정직하고 바라보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이 길이 ‘허물 있는 부처’의 진면목이겠다. 이 출발점에서 ‘본래 부처’를 회복하는 길이 열린다.
다시 확인한다. 번뇌라는 이름의 무수한 허물은 비롯함이 없는 시초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가 내게로 온 어둠이 아니라는 것을. 어둠이 실로 처음부터 있었던/있는 어둠이 아니라 빛의 차단으로 ‘만들어진 어둠’이라는 것을 통찰하자. 그래서 이 어둠은, 어둠을 만든 조건이 사라지면 즉시 사라진다. 사라지는 시간은 조금도 그 양과 길이를 측정할 수 없다. 아니 측정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이걸 ‘돈오’(頓悟)라고 한다. 어둠의 조건을 만들지 않고 밝음에 있는 자가 ‘본래 부처’이다. 그래서 허물이 있는 정직한 부처는 늘 이 어둠의 조건을 주시한다.
그러므로 게으름, 애매모호함. 초심이 흐려지는 태도, 인정을 갈구하는 욕구, 무엇과 비교하여 열등과 결핍의 감정을 만들어내는 망상적 삶, 이 세계는 모두가 중심일 수 있는데 나만이 중심이고자 하는 어리석은 교만, 진리대로 살면 복되고 평안하다는 이치에 의심을 갖는 마음, 이 모든 허물과 번뇌들을 살피고 인정할 때, 나는 비로소 ‘부처인 중생’이지 않겠는가? 그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새로운 길, 본래의 길이 열린다.
이 새로운 길, 본래의 길을 어렵지 않게 가는 방법이 있다. 본래 부처를 속이는 허물들의 정체가 도둑이고 손님이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아는 일이다. 이 지점에서 내게 확신과 용기가 필요하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 자신이 업보중생이라고 생각 없이 굴레를 쓰는 사람, 그는 자신을 ‘허물 많은 중생’으로 규정한다. ‘허물 있는 부처’가 자신을 ‘허물 많은 중생’으로 착각한다. 그런 그에게는 후회와 한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사람의 참회는 새로운 거듭남을 향하지 않는다. 후회와 참회는 잠시의 평온에 이어 불안을 불러 온다. 그리하여 그는 시지포스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자학이 도덕이고 신앙인줄 착각한다. 착각에서 깨어나면 그 자리가 ‘각’(覺)이다.
4. 마침내 나는 본래 부처
역설적으로 말한다. ‘본래 부처’는 ‘허물이 있는 부처’를 잊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허물이 있는 부처’는 ‘본래 부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허물이 있는 부처’가 ‘허물이 있는 부처’의 ‘허물’을 사랑하는 날이다. 그래서 여기 있는 부처님들은 훗날의 부처님을 기다리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렵지 않는 이치!
글 법인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