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3

김시천 제6강 『노자』와 페미니즘 2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6_01.htm

제6강 『노자』와 페미니즘 2

◆ 노자와 페미니즘 ③


▲ 페미니즘, 다른 전략의 필요성

자료 13쪽 보시면, 이 글이 발표된 맥락을 조금 얘기한다면 실질적으로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세대가 있죠. 그 가운데서도 케어 에틱이라고 해서 돌봄의 윤리학(an ethics of care) 이라고도 하죠. 여성의 여성성 혹은 여성다움을 윤리적 가치와 연결시켜서 남성 지향적이고 권위적인 것을 치유 하는 역할, 특히 케어 에틱은 간호 윤리학에서 수용되는 논의거든요. 지금은 거기서 벗어나서,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의 “사이보그 선언”이라고 해서 희한한 담론을 펼치는.

그 양반은 논의 자체도 희한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도 굉장히 독특한 분이더라고요. 결혼을 여러 번 했던 것 같고 전남편과 현남편과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삶 자체가 굉장히 독특해요. 제가 반페미니즘적인 얘기도 하지만 저는 사실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반대하는 사람도 아니고 입장이 모호해요.

왜 모호할 수밖에 없느냐면, 제가 페미니스트라고 내세울 만한 어떤 이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한편으론 저한테 가장 큰 숙제가 와이프와의 관계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이길 수 없는 가장 큰 적. 하지만 헤어질 수 없는.

사적인 얘기를 좀 한다면, 와이프와 3월 2일에 만났어요. 제가 군대갔다 온 예비역 4학년 때 집사람이 입학 했죠.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한 학번 후배가 형, 잠깐만 기다리래요. 파릇파릇한 새내기 학생들을 데려오겠다면. 나가서 데려왔는데 여학생 두 명이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로 들어왔던 어떤 여자가 광채가 나면서.

실제로 제가 뭔가를 느꼈어요. 그 다음부터는 도서관에 안 가고 학생회실에 가서 죽돌이를 했죠. 어떻게 하면 얼굴을 한번 볼까. 공교롭게 3월 말에 MT를 가는데 같은 조에 편성됐고. 끝나고 돌아와서 제가 그 조에 조장을 했거든요. 뒷풀이 하면서 얘길하다가 도자기가 되기로, 도서관 자리 잡아주기로 했어요. 도서관 자리잡아주면서부터 4월인가 5월에 사귀자고 했죠. 대신에 나는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사귐은 원치 않는다고.

집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해서 결혼했는데, 정확한 날짜가 요맘때예요. 날짜는 정확하게 기억을 못 하는데, 한번은 제가 그 전날 술을 엄청나게 먹고 아침에 도서관 잡아주는 걸 못 했어요. 미리 얘기했죠. 오늘 내가 술을 많이 마시니까 과에 행사가 있어서 내가 내일은 도서관엘 안 간다. 전화가 왔네요. 집사람이 나중에 하는 얘기가 학교를 갔는데, 자기 자리로 없고 내가 없는 걸 보는 순간 마음이 텅 비는 것 같다는. 그렇게 우리의 연애는 시작됐죠.

첫 키스도 참 멋있게 하고 싶었는데. 이맘 때 했어요. 제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제가 당했어요. 술을 같이 먹고 학교 벤치에 앉아 있는데 집사람이 갑자기 취해서 덥쳐가지고. 그런 걸 보면서, 강하다고 하는 것에 대한 이미지가 역시 다른 것 같아요.

지난번에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물이 물을 이긴다는 표현방식과 비슷한 얘긴데. 그런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이 케어 에틱 쪽인데, 분명히 노자에서 부드러움,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성주의적 전략과 연결시킬 수 있느냐 하는 부분은 분명히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아까 얘기했던 것은, 곽점본에 의하면 그런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첫 번째 반론입니다. 따라서 그 후에 이와 같은 도교적인 것과 연결시킬 게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그래서 페미니즘적 담론을 노자와 연결시키는 것보다는 다른 요소에서 찾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소설 『홍루몽』.

여기 여성들이 많이 계신데, 『홍루몽』을 읽으면, 동아시아의 커다란 장편소설이지 않습니까? 번역된 걸로 읽어도 정말 섬세한 심리묘사, 서구에서 심리주의 소설이 많지만, 제가 고등학교 때 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읽었는데 느낌은 이 사람들 정신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상당히 불안하고 어딘가에 푹 빠져 있는 듯한. 그것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는데. 읽으면서 마치, 특히 무신론자들이 자기의 입론을, 그건 종교예요, 어떤 의미에서도 본다면. 심리를 파고드는 걸 본다면 무신론이 마치 종교적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지금 도킨스(리처드 도킨스) 가 무신론 논쟁을 다시 점화시키지 않았습니까? 서구 유럽이라든가 특히 미국 사회에서 반향이 센데. 유럽에서는 그다지. 그런 얘기를 해봤자, 이미 합리적인 문화가 정착돼 있기 때문에. 그런데 미국은 반향이 격하지 않습니까? 그게 미국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지금도 책을 보면 그런 소개를 하잖아요.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는 지지여론이 60%이상이라는 걸. 참 희한한 얘기란 말이죠.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 담론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논적은 오히려 ‘진화론’이 아닌가. 그런데 거기에 관심을 갖고 두각을 보이는 사람은 안 보이는 것 같아요.

도나 해러웨이의 주장이 독특하긴 하지만, 과연 그러한 방식의 학문적 혹은 사상적 전략이나 실천적 전략이 실제로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성들의 어려움을 극복해내는데 얼마나 커다란 힘을 줄 수 있을까.

물론 소수자를 통해서 그러한 화두를 던지고 논쟁을 점화시키는 건 바람직하지만, 실제로 여성들을 어렵게 하는 건 가정 내에서, 일상성 속에서 다가오는 억압이지 않습니까? 그건 고스란히 다른 한편으로 남자들한테 넘어가고. 보이지 않지만.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서구식의 전략보다는 다른 방식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오히려 『홍루몽』처럼, 삶의 파노라마가 그대로 이어지면서 굉장히 재미난. 그런데 그 시선자체가 굉장히 여성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톤과 시각을 갖고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노자 텍스트보다는 그런 텍스트를 통해서 뭔가 끌어낼 때 훨씬 더 생산적인 담론을 내지 않을까. 그리고 글자수가 많지 않습니까. 글자수 많은 게 이기는 거예요. 왜 논어가 대단한 큰 책이 되느냐. 논어 자체는 짧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주석서가 엄청나잖아요.

그런데 논어는 생산력 있는 게, 그 주석서가 축적돼요. 그런데 노자는 축적되지 않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어떤 하나의 해석 전통이 힘을 가지려면 축적의 전통이 있어야 하는데, 노자와 관련된 담론의 세계에서는 축적의 전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즉 양질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저 사람이 왕필을 하고 내가 하상공을 하기로 했다. 그럼 둘이 싸울 이유가 없어요. 다른 책이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원조라고 싸우는 거죠. 많이 보셨잖아요. 떡볶이집도 여기가 원조다, 여기가 원조다.

그런데 하이퍼텍스트가 세상을 판치는 지금 같은 상황 속에서, 원조라고 하는 논쟁의 가장 내부는 지적재산권이고,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자본주의 전략이 드러나는 게 아닌가. 내 얘기면 어떻고 네 얘기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입에 건전한 방식으로 오르내리느냐가 중요하지. 물론 표절은 안 됩니다. 농담이고요. 그래야 책을 사 보지, 판본을 하면 공부하는 사람은 굶어죽으니까.


▲ 노자를 확대하는 해석방식

마왕태에서 발견된 백서본 노자와 같이 발견돼서 크게 주목받았던 논문, 『황제사경』(黃帝四經) 또는 『황로백서』(黃老帛書) 라고 불리는 텍스트를 보면 「雌雄節」(자웅절)이라고 하는 소제목이 붙은 중요한 텍스트가 있어요.

여기를 보시면, 우리가 첫 시간에 회남자를 통해서 지기웅, 수기자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봤죠.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논문 형태로 나온 글이 나옵니다. 14쪽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수컷의 절도와 암컷의 절도: 황제는 부단히 길흉의 일정함을 헤아려서 이를 통해 암컷과 수컷의 절도를 가려낸다. 그리고 나서 화복의 향방을 구분한다. 뻔뻔스러울 정도의 오만함과 교만한 태도를 일컬어 수컷의 절도라 하고, □□하고 공손히 낮출 줄 아는 자세를 일컬어 암컷의 절도라 한다. 무릇 수컷의 절도는 거침이 없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암컷의 절도는 겸허하게 낮추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 무릇 사람이 수컷의 절도를 쓰기 좋아하는 것을 일컬어 생명을 함부로 한다고 말한다. 대인은 무너질 것이고 소인은 스스로를 망치게 된다. 무릇 암컷의 절도를 쓰기 좋아하는 것을 일컬어 봉록을 잇는다고 말한다. 부자는 더욱 창성할 것이고, 가난한 자는 먹는 것이 충족될 것이다]

낮출 줄 알아야 한다. 이게 단순히 겸손이 아니라 전략적 행동이라는 걸 앞에서 살펴봤죠. 이건 지기웅, 수기자라는 태도가 어떤 배면의 논리를 갖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여기는 여성적 태도 혹은 여성적 가치를 쓸 수 있지만 이걸 행하는 주체는 성인 남자 통치자라는 거죠. 아까 하던 얘기를 한다면, 춘추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역사 사례, 연구에 의하면 남존여비 시각은 일반화돼 있지 않았던 것 같아요.

춘추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전통 가운데 하나가, 첫 째 자식은 다 죽였어요. 엄마의 배에 잉태된 상태에서 10개 월 있다가 아기가 태어난다고 하는 의학적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었고 어느 정도 배에 있는지 몰랐어요.

그래서 결혼했을 때, 이 아기에 내 아기인지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죽인다는 사례가 나오거든요. 이건 달리 말하면, 여성과 남성의 만남이 우리가 생각하는 육아적 이미지와는 상당히 달랐고, 유교가 지배하던 시기에도 반드시 그렇진 않았다는 겁니다.

특히 장자 세속권 등등의 세속특권과 관련된 문제에서 결혼이라고 하는 시스템이 요구되었지 일반 시민에게까지 그게 요구되지는 않았고. 많은 성 풍습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둔탁하지 않았다고 얘기되지 않습니까.

달리 말하면, 성 문화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패턴이 달랐다는 거죠. 도덕적 엄격주의를 어디까지 적용해야 하는가. 많은 부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오히려 최근에는, 저도 대학 다닐 때만 하더라도 남자와 여자가 길거리를 다닐 때 손잡고 다닌다고 하는 게 드물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군대갔다와서 90년대 초중반에 놀랐던 사실이, 지하철을 탔는데 남자가 앉아있었고 그 위에 여자가 포개져 앉아서. 막차였으니까 사람들이 많진 않았어요. 거기서 키스를 한다. 봤을 때 충격적이었어요. 영화에서나 볼 장면인데, 영화가 현실이 되었다는 게.

그게 계속 세월이 지나고 지나다보니까 자연스러워졌단 말이죠. 그리고 여성이 담배피는 것. 지금은 자유롭게 피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어디서 폈나요? 화장실에서. 참 안 좋잖아요. 냄새도 나는데서 담배연기까지 포함되면 안 좋은데. 오히려 저는 밖에서 당당하게 피지 왜 그렇게 피냐.

한 번은 제가 선배 두 분을 꼬셔서 담배가 얼마나 좋은 건지 여자 두 분을 흡연자로 동참시켰어요.

그래서 여성적인 어떤 의미라고 하는 것을 살릴 수 있는 방식이 케어 에틱을 어떤 부분에서 긍정해요.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여성주의 전략으로만 치환시킬 것이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특히 대한민국 남자들 상당히 딱딱하지 않습니까.

남학생들은 웃어야 할 때와 진지하게 할 때는 구분 못 해요. 내내 무덤덤, 진지모드로만 들어요. 달리 말하면, 남성들의 감성지수가 현격하게 떨어진다는 거고 구태여 싸워야 되지 않을 부분에도 주먹이 나간다는 것이거든요.

수다를 떨 줄 아는 남자들은 잘 안 싸워요. 수다에도 법칙이 여러 가지 있잖아요. 수다에도 법칙이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여성성이라고 했을 때 그런 걸 강조하는데, 수다떨 때 앞에 있는 여자 분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사람이 많은가? 보니까 안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굉장히 공감하는 척하며, 맞아맞아 어머어머 하는 맞장구라는 문화가 수다에서 굉장히 중요한데. 마치 하나도 공감 안 하면서 공감하는 척. 그런 부분이 여기서 자기를 낮추는 게 일상화된 방식의 전략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남자들은 무게 잡고 충고만 하려고 해요. 되게 심리전하면 이런 얘기 많이 하잖습니까. 남자들은 상대방이 이야기하면 마치 자기가 위에서 굽어보듯이 충고를 하고, 조언을 하는 방식으로만 한다는 거죠. 동감자나 공감자가 되지 않고.

달리 말하면, 남성들의 문화 속에 굉장히 권위주의적인 게 체화돼 있다는 거죠. 그게 되게 피곤하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도 스트레스가 많고.

그래서 이런 부분들이 단순히 여성주의 전략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요구할 수 있는, 일반화시킨다면. 그런데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한비자에서는 훨씬 더 끔찍한 방식으로 서술을 해요. 14페이지를 보면,

[만약 군주가 둘이 된다면[主兩] 군주는 자신의 밝음을 잃어 남자와 여자가 권력을 다투고 나라에는 반역을 꾀하는 군대가 일어난다. 이를 일컬어 망한 나라라고 말한다. (...) 만약 군주가 둘이 된다면 남자와 여자가 위세를 나누게 되니 이를 일컬어 크게 미혹되었다고 한다. 나라 가운데 무장한 군대가 있게 되니, 강한 나라는 분열되고 중간 규모의 나라는 망하고 작은 나라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정부인은 음란하고 태후도 추행을 쌓아 조정과 궁중이 뒤섞여 통하며 남녀의 구분이 없게 되는 상태를 가리켜 군주의 실세가 둘 있다[兩主]고 한다. 군주의 실세가 둘 있을 경우 그 나라는 멸망하게 될 것이다.”]

많은 분들이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심리연구를 할 때 가장 독특한 연구 대상으로 파헤쳐볼 만한 인물이, 첫 번째로 ‘내시’ 궁중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성 자체가 차단된 내시와 여자 궁인들의 심리 상태가 어떨까.

무협 영화에서 많이 소재로 나오는 위충현 같은 사람. 모르세요? 위충현. 영화 <신용문객잔>을 보시면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 있잖아요. 동창의 대부인. 동창이라는 것이 황관들이 운영했던 정찰조직 같은 거죠. 말하자면 적절한 비유는 아닌데, 내시들이 소유하고 있던 군대이자 경찰이고, 그 세력들은 후대에 걸쳐 여기저기에, 말하자면 러시아에서 스파이를 미국에 보내서 몇 세대 이후까지. 동창에서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관리했는가하는 게 최근 무협사극에서 많이 나오거든요. 이 사람들 정신세계 아주 독특할 것 같거든요. 또 여자 궁녀들도 마찬가지고.

특히 전국시대 문헌 가운데서 ‘자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자식이 반역을 꾀할 경우에 주의해야 한다는 표현. 특히 자기 부인 및 그쪽 세력을 경계하는 표현들은 무지무지하게 많이 나오고. 나라를 망치는 가장 첫 번째다.

그래서 어떻게 보느냐면, 여성주의 얘기가 나오는 맥락이 사실 그런데서 나오거든요. 일상적인 삶의 방식이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여성적인 것에 대한, 특히 백호통 같은 한 대의, 백호관에서 논쟁한 것들을 모아둔 게 백호통이라고 하는 저술이죠.

거기에서 음은 악이고 양은 선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와요. 그 이전에는 없던 방식의 표현이거든요. 그런 게 왜 나오느냐. 그런 건 외척에 대한 규정이에요. 그런 게 일반화된, 마치 유가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확대하는 해석방식은 곤란한 거고. 텍스트마다 가지고 있는 배경들을 충분히 읽어낼 때 훨씬 더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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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와 페미니즘 ④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6_02.htm

▲ 주체로서 갓난 아이

그 다음 15쪽을 보면, 이건 55장인데. 그럼 여기서 이야기하는 음양 혹은 암컷의 절도, 수컷의 절도를 실천하는 주체는 누구냐. 당연히 제왕이지만 사실상 거기에 걸 맞는 사람은 성인이거나 갓난아이라는 주체입니다.

[덕이 두텁게 머금은 사람은 갓난아이에 비길 수 있다.
벌이나 독충이나 독사도 물지 않고
발톱이 억센 새나 사나운 짐승도 후려치지 않는다.
뼈는 약하고 힘줄은 부드러운데도 쥐는 것은 억세고]

이런 것들이 상징하고 있는 게 뭔가. 이런 것들이 상징하고 있는 메시지들은 상당히 비슷한 편이죠. 이것이 바로 노자가 서양권에 소개될 때 굉장히 주요한 역할을 했어요. 그래서 영문판 노자는 성서의 구절을 상당히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번역했거든요.

그런 부분들이 노자라는 텍스트를 어떻게 소개하느냐가 중요하단 겁니다.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오면, 현빈이라는 표현을 할 때, 사실 빈은 소입니다. 소라는 할 때 당연히 생각해야 하는 건 현자가 붙었다는 것까지 얘기한다면 뭔가 신비한 거죠.

뭐와 연결해야 하느냐면, 제사와 연결시켜야 해요. 자연스럽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번역하기 애매한. 특히 현 자가 붙어있으니까. 그래서 뭐라고 번역하느냐.

mysterious feminity. 아까 김종미 선생님의 번역과 마찬가지로 현빈을, 암컷을 mysterious feminity라고 변역하면 신비로운 여성성. 이렇게 연상적으로 가기가 되게 쉽죠. 이건 기교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고 나름대로 선택일 수가 있는데. 60년대에 여성주의 운동이 상당히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이런 것도 에너지원으로 쓰일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죠.

하지만 이것 자체는 해석의 산물이고. 그것이 계속 축적되는 전통으로 이어져야 하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 했을 때.

[암수의 교접을 알지 못하면서도 고추는 성나 일어서니 정기의 지극함이다.
하루종일 울어도 목이 메이지 않으니 조화로움의 지극함이다
조화로움을 적당함이라고 하고
조화를 아는 것을 밝다고 한다
목숨을 더하려는 것을 요망하다고 하고
마음이 기를 억지로 하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만물은 억세지면 곧 늙어 버리니
그를 일러 도가 아니라 한다
도 아닌 일을 행하면 일찍 죽을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도’예요. 그리고 이건 도술에 관한 이야기고 이 도술을 행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겁니다. 이 맥락 속에 들어있는 실제 배면의 논리는 죽음과의 투쟁이에요.

죽음과의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해야될 것은 갓난아이와 같이 하는 것. 갓난아이와 같은 완전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 벌이나 독충이나 독사도 안 문대요.

그게 얼마나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런 것 있는 것 같아요. 개 종류도 여러 가지 있지만, 저는 개를 되게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개도 저를 싫어하더라고요. 제가 경계심을 있어서 그런지 가면 으르렁 거려요.

그런데 애들은 무턱대고 쫓아가잖아요. 사나운 개가 아니면 그렇게 해도 별로 거부감 없이 어울리더라고요. 그걸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게 얼마나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는 몰라요.

여기서 이야기하는 게 관자 책에서는 형이상학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표현되느냐면, 내가 다른 사람을 접대할 때 선한 의도, 선한 기운을 갖고 대하면 상대방이 그걸 감지해서 선하게 온다는 거예요.

육감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기라는 것이, 이건 분명히 기론에 바탕한 것이고 기본적인 배면의 논리는 그걸 전제하고 있어요. 나중에 기와 덕을 이야기할 때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지만.

일단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갓난아이라는 것. 갓난아이는 여성도 남성도 아닙니다. 갓난아이는 온전한 덕을 갖고 있어요. 온전한 덕은 부쟁과 연결됩니다. 다투지 않음. 노자의 철학을 평화의 철학이라고 하는데, 그건 틀린 말이고 부쟁의 철학이에요. 전쟁이 있어요. 그런데 가급적 안 싸우는 거죠.

왜. 싸우면 다치니까. 서로 다치지 않습니까. 서로 다칠 일을 왜 하느냐는 거죠. 그래서 불가피할 상황이 아니면 안 싸워요. 대신 불가피하게 싸워야 할 땐 어떻게 싸워라? 기습. 그게 노자에 나오는 전략입니다. 정규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대 세계의 전쟁이 그렇게 참혹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어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초창기에 어떻게 전쟁하느냐면, 성을 둘러싸요. 그 앞에서 막 이렇게.

왜 그러냐면, 가만히 보세요. 전국시대에 들어서야 철기가 보급됩니다. 춘추시대는 청동기 시대예요. 청동기 시대라는 건 모든 사람들이 청동기를 갖고 칼싸움하는 시대가 아니라 전부 죽창 들고 싸우는 시대예요.

청동기라는 건 실질적으로 상징물에 가깝죠. 귀족들 몇몇 빼놓고는 다 청동기로 무장한 게 아니에요. 일부만 그렇게 무장한 거고.

그리고 전쟁 자체가 士을 중심으로 하는 거잖습니까. 士라는 건 기본적으로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뜻이에요. 그들만의 귀족이니까. 일반 서민들은 못 차요.


▲ 用(용)의 문제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일반국민개병제가 도입되면서, 이것이 바로 부국강병의 요체입니다. 지난 시간에 장자 얘길 하면서 용(用) 얘기를 했죠. 군주 입장이라는 누구를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

특히 법가적인 시각에서, 노자도 마찬가지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특히 남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여자는 재생산 두 번째는 길쌈이에요. 남자는 첫 번째는 농사, 두 번째는 군사력.

그래서 인간의 가치인 휴머니티는 전혀 없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가치는 노동물을 통해서 생산물을 낼 수 있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전쟁에 나가서 나를 위해 싸워줄 수 있는 것.

그래서 이 당시에 내가 정복한 나라의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나의 백성으로 변화시킬까 하는 7개년 계획이 황제사경 책에 나와요. 맨 마지막 7개년 계획의 결론이 뭐냐. 나를 위해 전쟁에 나가는 것. 그게 내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것이 용의 의미고요. 그걸 노자는 아자연(我自然)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서 노자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한다면, 아자연이라는 말은 끔찍한 거예요. 한 때 노자 철학이 우민정치의 효시라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그건 맞습니다.

노자 책에는 우민화라고 하는 전략이 깊이 숨어 있어요. 왜. 아는 놈들만 반항을 합니다. 모르면 반항을 하지만 어떤 방식의 반항이 효과적인지 몰라요.

그리고 문자의 힘은 대단한데, 면대면의 관계는 직접 만나서 설득해야 해요. 그런데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대자보나 견문을 써서 돌리면 한꺼번에 일어나잖습니다. 문자의 힘이 놀라워서 지식의 소유에 대한 과거 전통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생각은, 따라서 보는 시각이 다른 거죠.

위험한 책은 유통시키지 않는다. 당연한 전략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런 책도 보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가진 힘은, 여기서 제왕의 철학을 얘기한다고 할 때 그 제왕 대신에 사회적인 한 사람을 투영시키는 게 아니라 개인을 두어야 한다는 거죠. 나.

따라서 노자라는 텍스트는 과거에는 특정 신분집단에게만 효용있는 전술서라면 노자라는 철학이 지금은 누구나 써먹을 수 있는 처세 전략이 될 수 있다는 거죠. 다만 저는 그 방향을, 우리끼리가 아니라 저들한테라고 생각하는 거죠. 즉, 우리가 비판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그와 같은 전략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특히, 18쪽에 있는 부분만 보고.

이건 지난 시간에 회남자를 보면서 많이 얘기했던 거죠. 저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걸 소개하기는 했지만.

[장차 움츠러들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벌리게 하고
장차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하며
장차 없애려면 반드시 먼저 높이고
장차 빼앗으려면 반드시 먼저 줄 것이다.
이것을 미묘한 데서 밝다고 하니]

유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고기는 못을 벗어날 수 없으니
나라의 좋은 물건을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미명이라는 표현이 음흉한 전술이라는 건 분명하죠. 하지만 이 음흉한 전술이라는 것이, 이건 그냥 무덤덤한 객관적 표현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다만 그 칼날을 누구에게 향하느냐에 따라서, 지금은 우리가 속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는 짓 다 드러나 있고. 따라서 우리 사회에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해서 이와 같은 방식의 전략, 전술을 펴는 거죠.

다만 이런 게 개개인에게 침투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하는 방식이라면 곤란하죠. 그리고 대개 이런 논의가 정치라는 큰 틀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상적인 삶의 논리는 아니에요.

이런 게 삶의 에토스로 번지는 것에 대해서 유가는 그렇게도 배척했던 거죠. 더구나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지금은 개개인이 힘을 크게 갖고 있죠.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한 개인이 펼칠 수 있는 힘의 파장이 상당히 크지 않습니까.


▲ 노자와 페미니즘의 새로운 관계

이렇게 해서 보면,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 속에 들어있는 페미니즘과의 만남은 니담이라고 하는 책 속에서 이루어졌던 논의, 그 다음에는 중국에서 인류학이나 역사학에서 고대사나 원시시대에 대한 연구와 연결되고 그곳이 도교 연구와 접목하면서 자료가 풍성해졌는데.

문제는, 다 노자 이후의 자료들이고 거꾸로 결론이 난다는 거죠. 그럼 노자와 페미니즘은 관계가 없느냐.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서, 왕필인지 기억은 못 하겠는데, 현학의 시대에, 현학의 시대는 기본적으로 유학의 시대이지만 기본적으로 도가 텍스트와 유학적 텍스트가 만나던 시대였죠.

이 당시에 이런 질문을 한 지식인이 받아요. 유가와 도가가 만날 수 있느냐? 라고 하니까 그 대답은 ‘장차 같아지지 않겠습니까’ 라는 표현이 나와요.

달리 말하면, 노자가 페미니즘적이다 친하다 혹은 안 친하다는 결론보다는, 장차 만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뉘앙스의 표현이 오히려 생산적인 전략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왜 이런 전략이 좋다고 생각하느냐면, 『철학에서 이야기로』로 작업을 하면서 얻게 된 생각인데 그럼 20세기 내내 노자든 혹은 동양학이든 이른바 근대화라고 하는 쪽으로 계속 동아시아 전통을 해석하려고 했던 노력의 흔적은 서구인 닮기에 지나지 않고 아무런 의미 없는. 역사를 왜곡하고 전통적인 사회를 왜곡하는 음해의 기능만 했던 것이냐?

오히려 그게 아니라, 그 나름대로 그 속에는 의미와 가치가 들어 있는데 그 의미와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설명해 낼까 하는 콘텍스트를 우리가 만나지 못 했다 하는 차원의 논의로 바꿔야 한다는 거죠.

따라서 콘텍스트를 주기 위해서 제가 노자와 관련해 만들었던 것이 바로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 라는 표현이에요. 원조 노자 하지 말고 하나하나가 어떤 얼굴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예를 들어 페미니즘과 만나고 싶다고 싶다면 그 가운데서 어떤 얼굴을 선택하고 이야기 속에 회자되도록 만드는가 하는 전략적인 선택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

그걸 자꾸 원조나, 무의미한 방식으로 접목시키려고 할 때 한 번의 해프닝으로 지나갈 소지가 많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사실은 시간 얘기를 하려고 정리해서 왔는데, 시간 얘기는 다음 기회에 한 시간 정도 따로 잡아서 얘기해 드릴게요.

추상적인 단위의 관념들에 대해서 굉장히 서구적인 적용을 마구잡이로 하고 있기 때문에 텍스트 해석에 있어서 난해한 부분이 있어요. 다음 주에는 주제 논의는 그대로 가지만 시간에 관한 것 특히 다음 주가 유토피아 논의를 하다보면 당연히 시간에 관한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동양은 어떤 시간관이고 서양은 어떤 시간관이라고 하는 이중 잣대는 다 버려야 해요. 어느 세계나 시간관은 다양한데 마찬가지로 동아시아도 굉장히 다양한데, 동아시아 시간관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은 정권의 시간관이라는 우주의 시간을 규정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또 한 가지 방식은 삶의 시간관이라고 하는, 몸의 시간관이 있는데.

그런 부분들이 우리가 곱씹어 볼 때 굉장히 재미있을 수 있다. 유토피아 논의와도 굉장히 긴밀히 연결돼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노자 80장 소국과민 해석을 검토하면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철학에서 이야기로』 3장 부분을 보시면 그와 같은 내용이 나와 있어요. 특히 장자를 가지고 했는데, 큰 틀에서 도가적인 이상향에 대한 몇 가지를 분석해 둔 게 있으니까 혹시 갖고 계신 분들은 혹은 서점가서 읽어 보세요. 안 사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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