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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강 『노자』의 소국과민 |
◆ 『노자』에 소국과민에 대한 다른 해석① 철학공부 하다보면 이상한 짓 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술 안 먹고도 취한 척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오늘 주제가 그런 얘기랑 비슷한 거예요. 소국과민. 우리가 듣기에 굉장히 아름답고 멋있고 이상적인 세상에 대한 노래라고 들어왔지만 과연 정말로 그러한가. 여러 가지 번역본들을 비교해봤지만 김용옥 선생님의 번역이 가장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고 맥락이 아주 쉽게 잘 드러나요. 보통 이 부분은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이라고 하는 식으로 우리말로도 잘 알려져 있는 부분이죠. 평화주의다, 노자의 유토피아다 이런 방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내용을 한 번 보죠. 【될 수 있는 대로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나라의 인구를 적게 하라! 그야말로 그냥 읽으면 아주 전원적인 풍경. 요즘에는 이런 방식의 느낌을 갖기 힘들거에요. 옛날에 그런 얘기하잖아요. 밤에 원두막 같은 데라든가, 보통 집 대문 있으면 밖에 커다란 마당이 있고 거기 큰 나무로 된 평상같은게 있고 거기서 밤에 앉아서 참외 깨먹고, 수박 깨먹고 그렇게 저도 초등학교 때는 지냈던 것 같은데. 그런 와중에 아주 멀리서 버스 소리라든가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십리 밖에서도 누가 오나보다 노인들이 하는 얘기가 있다. 그게 천이통, 그런 식으로도 얘기하죠. 실제로 보면 예전 분들이 귀가 훨씬 밝았던 것 같아요. 물론 이제 빨리 노쇠해지기 때문에 그러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저도 군대에 있을 때 하늘을 본 적이 있었거든요. 철원에서 보초를 설 때마다. 처음에는 군대에 끌려갔다는 느낌 때문에 가기 싫은거 간 것 아닙니까. 그래서 혼자 보초 올라가면 계속 노래를 불렀어요. 볼 수 있는 책도 없고. 이등병 때 책을 볼 수가 없잖아요. 편지를 쓰는 일도 쉽지 않고. 그러니까 제가 알고 있던 문자를 영유할 수 있는 것은 노래하는거에요. 그 다음에 나중에 일병 달고 상병 달고나니까 편지를 쓰게 되고. 그래서 친구들한테 하루에 두 통 세 통씩 쓰기도 하고. 몽고 사막 벌판에서 밤에 하늘을 보면 그렇게 멋있다고 그러더라고요. 우리가 겪었던 자연하고 과거의 사람들이 겪었던 자연하고는 근본적으로 몸에 대한 감각과 느낌이 다르다라고 할까요. 그런 느낌으로 이걸 보니까 이것이 그럴듯해 보이는거에요. 그런데 처음에 책을,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가 전제로 했던 것이 일단은 역사적인 접근을 취하자. 주석서를 이용하자고 했죠.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게 될 주석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왕필본이고 하나는 하상공본이에요. 왕필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 책의 근본적인 취지를 그대로 밝히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가적으로 전용하는 데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었죠. 하지만 원텍스트의 원의를 마구 왜곡할 수는 없어요. 본래의 텍스트로부터 제한을 당하니까. 하상공은 상당히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한다고 했죠. 그런 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이야기를 지금 우리 식으로 바꾸면 왕필은 상당부분 텍스트로써 읽으려고 해요. 하지만 하상공은 현실의 지침을 얻으려고 읽는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 속에 있는 구절들을 인간의 아름다운 이상향, 전원적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이러저러한 것이다라는 묘사문으로 보지 말고. 여기 문장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어떻게 어떻게 하라. 이렇게 번역을 들고 나온 것이 바로 김용옥 선생의 번역이 한국말로는 처음이에요. 그런데 영문판 번역에서는 이미 60년대부터 이와 같은 번역들이 무수히 나와 있어요. 왜냐하면 하여금 (사) 자가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사동형이거든요. 따라서 어떻게 어떻게 하라. 맨 마지막에는 그에 관한 정치적 혹은 효과가 서술되어 있는 방식으로 되어있죠. 그래서 그 효과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자르는 방식이 다르고. 왕필본과 하상공본이 다릅니다.
그러면 이 텍스트를 우리가 그동안 지켜봐왔던 방식으로 굉장히 현실적인 눈으로 정치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은 어떤 것이냐. 여러분들이 정치가가 되었다라고 생각을 해보세요. 그러면 이러한 사회를 만든다는 관점에서 한 번 보시라는 겁니다. 지금 현대 사회에서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백성의 수를 적게 하라 인구수를 줄여라.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 식의 일들을 할 수 있었던 정권은 굉장히 적어요. 폭력적이고 군사적인 정권에 의해서 있을 때만 이런 것들이 가능하죠. 특히 코소보같은 데서 인종말살정책 같은 것을 한 걸 보면. 그것이 이른 바 민족이 다른, 상대 적측에 대한 행위일지라도. 당시에도 이미 적국의 백성은 내가 침략해서 얻으면 나의 백성이 되기 때문에 부쟁의 철학을 얘기 한다고 했죠. 노자에서는.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그 수많은 땅을 농사지을 노동력이 사라지게 되니까. 그럼 결국 손해에요. 다툼을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죠. 그런데 여기에서는 처음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인구를 적게 하라’ 요즘에는 자동차 안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일부러. 타던 사람도 놓고 다녀요. 주말에만 타죠. 평소에는 막히니까. 아니면 자동차를 몰다가도 지구 온난화 때문에 내가 이 지구를 망치는 일에 일조할 수 없다고 해서 안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꽤 많이 생겨나고 있어요. 에너지 문제 때문에도 그렇고.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이 당시에 어떻게 살았길래. 자동차, 자동차 아니면 뭐 타요. 전철이나 버스타고 다니는 거 아녜요. 그렇잖아요. 서울까지 출퇴근하면서 걸어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에너지 소비를 줄인다는 차원이지 낭만적인 방식의 과도한 해석을 하는 것은 지나친 거예요. 그 뒤의 얘기들이 다 그래요. 그렇다면 이것이 굉장히 우리에게 낭만적이고 그럴듯한 것처럼 생각을 해왔지만 사실 한꺼풀 접어놓고 보면 이것은 굉장히 낯선 표현입니다. 당시로서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것들이에요. 최백호씨의 낭만에 대하여가 아니라 불가능한 것들에 관하여 이렇게 번역을 붙이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한 제목이 될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 사회 어떤 문제로 전용하기 위한 방식이니까 문제가 있다라고 볼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제가 얘기했던 이런 증거들을 본다면 어떤 방식으로 봐야 되느냐. 왕필은 이 전체를 네 개의 단으로 끊으면서 주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죠.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으니(小國寡民) 이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기본적으로 취지가 역방향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부분이 몇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로는 우리는 국하고 민을 합치면 국민이라고 하죠. 이 당시에 국민이 있었습니까. 국민이라고 하는 표현은 근대국가의 출연과 더불어 생기는 것이에요. 그렇죠. 이 당시에 통치자와 관계, 민하고의 관계라는 것은 성립이 됩니다. 하지만 그 양자 관계로 다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귀족 계급들이 있고. 당시로 따진다면. 그리고 이 <노자>가 어느 특정시대에 지어졌느냐 하는 차원은 國국자의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느냐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어요. 예를 들면 보통 은조시대를 성읍국가라고 말을 합니다. 성읍국가라고 하는 것은 교두학파에 의해서는 도시국가형 체제라고 보통 얘기를 하죠. 그런데 그것이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이른바 군현제가 도입되면서. 군현제라고 하는 것은 왕이 파견한 관리가 직접적으로 다스리는. 즉 왕권의 실질적인 강화와 관련이 있고, 실효적인 통치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군현제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한초에는 다시 귀족세력들의 반발, 정권의 미약함 때문에 군국제라고 하는 것으로 다시 돌아서죠. 그래서 한신이라든가 수많은 왕들이 제후왕, 거의 독자적인 왕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국가적인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그 상위에 황실이 존재하는 방식이고. 이것이 한나라 초기부터 계속 진압하다가 나중에 무제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하를 통치하는 방식의 체제가 나름대로 달성이 되죠. 그렇다면 그런 역사적 변화 과정 속에서 국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일의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으니’ 이 말을 이렇게 묘사적인 방식으로 볼 때는 ‘과거에 옛날에는 나라가 아주 작았다.’ 이렇게 해석할수도 있어요. 하지만 앞에 번역처럼 ‘될수있는대로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백성의 수를 적게 하라‘ 이런 방식으로 한다는 건 뭘까요. 이것은 분명히 상당히 정치적 개입이 주어지는 상태에서의 표현이에요. 이것은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방식의 질서를 강압하는 방식의 의미가 동반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왕필은 여기에 약간 상이한 방식의 해석을 하고 있어요.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은 데도 오히려 옛날로 돌이킬 수 있거늘, 여기에서 옛날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거죠. 보통 복고 혹은 반고라고도 하는데 복고가 더 일반적인 표현이에요. 고古는 그 자체로 이상입니다. 고를 다스렸던 시대가 언제죠. 말을 안해도 나와야지요. 요순지치의 시대를 의미하는거죠. 反古 거기로 돌아간다. 이것은 왕필이 유가냐 아니면 도가냐 하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어요. 왜냐 장자와 같은 텍스트에서 요순시대를 비판하죠. 비판하면서 그 앞에 있던 황제 때부터 오히려 인의니 뭐니 하는 등등의 것들을 강조하게 되면서 자연스러운 질서. 이른바 혼돈과 같은 것들이 사라지게 되고 그래서 대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는 방식의 이야기를 하죠. 이것은 바로 유토피아 혹은 아르카디아에 대한 시간관적인 계기하고 맞물려 있는 내용인데 어쨌거나 그렇다 하더라도 장자에서 주장하는, 도가에서 흔히 말하는 걸 보더라도 이 古고는 황제 이전 시대를 얘기해요. 뭐 복희, 신농, 누구누구 해서 씨자로 대변되는 다양한. 군웅할거라고 하기 보다는 뭐라고 그럴까 원시적 지배체제. 혹은 원시적 이상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의 세계를 이야기하는데요. 상당히 농경적이고 전원적인 시대. 이 점은 똑같아요. 하지만 왕필이라는 사람의 입장을 유가적이라고 본다면 반고 反古는 선왕시대고. 요임금과 순임금이 사셨던 그 시대에요. 그리고 요임금과 순임금은 누가 이야기 했습니까. 바로 공자의 입을 빌어서. 이 고古라고 하는 것은 바로 공자가 말할 때 온고이지신의 고하고 통하는 거고. 그런 방식으로 해석한다면 이 의미는 달라져요. 본래의 맥락하고는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처음에 원문은 현재형이에요. 여기에서는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더라도 과거의 선왕시대를 회복할 수 있는데 나라가 크고 백성이 더 많은 상태라면 훨씬 더 용이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큰 나라를 말하지 않고 작은 나라를 들어서 이야기한 것이다. 이렇게 지금 왕필은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럼 이 말은 소국과민의 본래 취지와 상관없이 지금 왕필은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을 적게하라는 것은 하나의 예시적 표현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취지는 뭡니까. 反古. 고대 이상적 시대의 부활. 부흥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왕필의 정치적인 지향, 사상적인 입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부분이기도 하죠. 어쨌거나 우리는 이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텍스트 자체의 맥락과는 무관한 방식의 전용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 단락은 더 재미있어요. 번역 자체가 약간 과하긴 해요. 편리한 기계가 있어도 사용하지 않게 하고(使有什佰之器而不用) 그런데 이 부분이 왕필본하고 하상공본이 본래 원문 자체가 달라요. 십백지什伯之라고 하는 것은 열 가지, 백 가지의 이로운 기물, 문명의 이기. 이렇게 해석을 하죠. 문명의 이기가 있는데 쓰지 않게 하라. 여러분들이 정치가라고 생각을 해보세요. 과연 문명의 이기가 있는데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실효성이 있는 과거에. 문명의 이기를 쓰지 말게 하라. 여러분들이 치자라면 과연 그런 식의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문명 비판에, 유가가 제안하는 프로그램이 오히려 인간 본성을 억압하고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멀어져나가게 하는 그런 반인성적인, 반본성적인 삶으로 치닫게 만들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 대한 역설적인 저항의 담론이다. 그런 방식으로 해석을 하죠. 그걸 왜 저항을 해야 됩니까. 그것도 2500년 전에. 그런 방식의 해석의 상식성을 생각해보라는거죠. 이 부분을 왜 그렇게 해석을 해왔느냐. 이 속에는 뭐가 들어있느냐면. 장자에서 노인네가 물풀 때 쓰는 돌리면 도르레처럼 생겼는데 물을 퍼올리는. 기심설화라고 보통 얘기를 하죠. 기계의 마음機心해서, 편리를 추구하는 마음. 그런 기계들을 자꾸 쓰다보면 기심이 생겨서 본성이 훼손된다. 하는 방식의 이야기가 장자에 나오죠. 따라서 그러한 이기들, 이로운 기물들이라고 하는 것은 쓰지 않는 게 좋다고 하는 방식의 이야기가 여기에 분명히 나와요. 그런데 저는 이 부분도 비슷하지만 약간은 구분되는 방식으로 해석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속에 들어 있는 해석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한 해석입니다. 즉 장자 속에 나오는 그 표현 자체를 염두에 두고 편리한 것을 쓰면 쓸수록 자꾸 거기에 기대고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방식의 것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 자체가 오히려 인간에게 본성을 훼손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하는 전제로 해석 한거에요. 그러니까 이 번역을 하신 분은 그와 같은 요즘의 해석의 방식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편리한 기계가 있어도 라고 붙여놓은 거예요. 그런데 왕필은 機心 왕필의 노자 해석의 방법 중에 하나가 장자 속에 들어 있는 부분들을 동원해서 하는 것이 이 위신시대의 유행입니다. 이 부분까지는 그래도 적어도 용인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노자 본문의 맥락 자체가 그러한가는 하상공을 보면서 따져봐야 되요. 다만 이 부분에 대한 우리들의 해석은 순수하게 그렇게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장자라고 하는 즉, 노자를 장자라고 해석하는 전통인 노장전통적인 해석 방식이 깔려 있는 해석이다. 그리고 그것이 상식이라고 하는 점을 회의적으로 봐야 된다는 점은 기억하고 넘어가야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백성으로 하여금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옮겨 다니지 않도록 한다.(使民重死而不遠徙)
그리고 옛날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 얼마 전에는 의료사라든가 그런 것들을 했던 분들하고 토론할 자리에 제가 참관하게 된 일이 있었는데. 그 분이 19세기하고 20세기 즉 근대로 넘어서면서 한국 사회에서 건강과 관련해서 가장 커다란 차이가 있다면 무엇이냐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멀고 낯설고 이질적인 경험이라고 해요.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죽음은 아주 가까이 있는 것, 언제라도 내 친구처럼 나와 만날 수 있는 것이었대요. 이게 무슨 말이냐. 자식을 열을 낳으면 그 중에 한, 둘만 살아남고 다 떠나잖아요. 그리고 평균수명이 얼마나 됐습니까. 보통 한 40, 50. 그리고 처참한 19세기 노동자같은 경우에는 30대 초반이 영국 노동인구의 평균 수명이었다고 해요. 평균이 그랬다면열 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일을 시작해서 20년동안 노동을 하다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리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다가 그냥 가는거죠. 그에 비하면. 요즘 건강, 웰빙담론이 엄청나게 큰데. 그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오신 선생님이 저도 생각도 못했던 얘기를 반론해서 던지는데 현대인만큼 건강하고 오랫동안 사는 인간의 시대가 없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현대인들이 건강에 대해서 가장 관심이 많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거의 목숨 받쳐서 산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들의 입장에 따라서 죽음을 중히 여긴다는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 표현이에요. 죽음을 중시 여긴다. 쉽게 생각해보세요. 죽음을 무릅쓴다라고 생각해보세요. 죽음을 무릅쓴다. 언제 죽음을 무릅씁니까.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다 할 때 죽음을 무릅쓰는 거죠. 하필이면 그것이 ‘멀리 이사 다니지 않는다.’ 우리들에게는 이사 다니는 일이 굉장히 흔하죠. 그렇잖아요. 더군다나 갈수록 노동이 유연화 되고 하면서 직장이 수시로 바뀌는 때가 되면어떻게 합니까. 이사 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과거에 농경 토착 사회에서는 내가 태어난 땅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실향민이에요. 그것은 엄청난 사회적 고통, 신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란 말이죠. 그런데 왜 떠납니까. 동일한 표현이라는 거죠. 그런 표현들이 여기에 등장하는 까닭은 굉장히 무언가 당시에 현실에 대한 리얼한 고발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당연히 치자들에게도 엄청난 문제가 있는 거죠. 그 다음 번엔 좀 깁니다. 읽은 거니까 다 읽을 필요는 없어요. 다만 ‘배와 수레가 있지만’ 앞에 김용옥 선생님의 해석이 왕필본을 저본으로 한 해석이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왕필이 여기에 대해서 딱 한마디로 끊어 버려요. ‘바라거나 구하는 것이 없다’ 간단하죠. 좋은 세상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런데 누가. 그 주체는 불분명한데 아마도 백성들이겠죠. 이것은 우리가 분명히 생각해봐야 되는 겁니다. 유가라고 하는 지식인들이 지금처럼 계몽적인 지식인으로 돌변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유가는 적어도 송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귀족과 같은 개념이라고 보시면 되요. 신분개념에 가깝습니다. 어떤 특정한 난세시대에만 그것이 세습으로써 되지 않을 뿐이지 실제로 이 사람들은 세습이라고 하는 제도를, 자신들이 한 번 획득한 지위나 신분을 계속 세습하는 것에 노력을 많이 했었죠. 하지만 이것이 송대 신유학이라고 하는 학문사조와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 많아요. 더군다나 일반 백성들에 대한 계몽이라고 하는 의식을 펴기 시작한 때가 바로 그 때라고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무슨 차이냐. 백성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우리가 조선시대 어떤 유교적 풍습 가운데 높게 평가하는 것 중에 하나가 향약운동같은 것을 치죠. 당시 사림사회가 조선시대에서 득세를 하고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이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600년이라고 하는 장고한 조선왕조를 건립할 수 있었던 까닭을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고 해요. 예를 들면 농담처럼 제가 생각했던. 혹시 잔치라는 것 아시죠 잔치. 이 잔치라고 하는 문화가 마빈 해리스 책에서 보면 포트레치(potlatch)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재미있게 설명이 되죠. 그것이 말하자면 부의 재분배 과정의 일환이다. 그래서 포트레치를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을 하죠. 잔치라고 하는 문화도 비슷해요. 이것이 노래 가사에도 나오는데. 예를 들면 최진사댁 셋째 딸이라고 하는 이은하씨의 노래있죠. 왜 하필이면 최진사댁 셋째 딸인지 생각해보셨나요?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책 중에서 경상도 쪽에 유명한 최부자집 이야기에서 나오는. 몇 대에 걸친, 부의 세습과정이라든가 이 사람들의 자신들의 지역적 기반들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그 지역에서 얼마만큼의 지역적인 노력을 했는지가 고스란히. 명문가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재벌이라든가 이런 방식과는 상당히 다른 본래의 의미들을 얘기 하는데. 그 때 최씨 집안이 굉장히 유명했었나봐요. 그래서 나중에 「토지」에서는. 상당히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합니다. 저기까지 가서 용정을 개척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경상도 출신 지식인들이 거기에서 있는 것이 불편하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일부 가족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개척한 쪽이 간도라고 하는 얘기는 역사학계에서 많이 하는 얘기니까요. 거기에서도 최씨 아닙니까. 그렇죠. 토지의 집안도 최씨 집안 이야기고. 최진사댁 셋째 딸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데. 잔치를 하면, 지금 우리가 할 때는 청첩장 받아서 가서 밥 먹고 피로연 가서 뒤풀이하고 끝이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몇 마리, 몇 십마리까지는 모르겠지만 소도 잡고 돼지도 엄청나게 잡고, 닭 엄청 잡고. 그 근처 사방 백 여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 와서 먹고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읽었는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잔치를 준비할 때 첫 날부터 둘째 날인가 며칠까지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다 와서 잔치 음식을 마련하는 거잖아요. 그 집에 음식이 하나도 안 남는답니다. 왜냐하면 잔치 음식을 만드는 분들이 만들어서 다 갖고 가는 거래요. 그리고 며칠 있다가 주변 마을 사람들이 오시기 시작해서 보통 보름, 한 달 동안 잔치를 하는데. 그것이 뭐랑 관련이 있냐면. 마빈 해리스는 그것을 육류, 고기에 대한. 인간은 잡식성이기 때문에 고기를 섭취하고싶은 욕구가 강한데 잔치 때는 꼭 고기 음식이 올라가고 그래서 주변 사방 백 여리 사람들이 와서 고기를 먹고 가는 거랍니다. 거기서 제가 읽어봤을 때 나온 얘기 중에 하나가 지구는 고기로 넘쳐나고 있잖아요. 그래서 비만 때문에 문제가 되는데. 과거에는 고기를 안 먹으면 무언가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줘야 되는, 즉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해야 되는데. 잔치 때 가서 배터져라 먹으면. 지금 우리는 영양학적으로 보면 먹어봤자 일정한 양만 흡수가 되고 나머지는 배설되기 때문에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 --- --- 그런데 마빈 해리스의 책에서 제가 본 것 같은데. 과거에는 육류를 섭취하는 일이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 배터지게 먹으면 엄청나게 잡아 둔대요. 그런 방식으로 말하자면 사회적인 위화감. 그래서 야노마노족같은 경우에는 고기 때문에 전쟁을 한다 그런 식의 어떤 설명이 나오고 하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실제로 의사선생님한테 여쭤봤어요. 실질적으로, 임상적으로, 과학적으로 맞는 얘기이냐 물어봤더니 충분히 가능한 얘기라고 대답을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했겠죠. 어디에서 하다가 그 얘기로 샜죠. ‘바라거나 구하는 것이 없다.’ 바라거나 구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어떤 눈으로 봐야 되느냐면. 오늘날 정치에서는 시민들의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으로서의 욕구, 그것이 가장 낮은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인권이라고 얘기를 하고. 나머지부터는 사회적 요구라고 보통 표현을 하죠. 거기에 대해서 충족시켜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자 기능이라고 보통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는 말하는 표현이 ‘욕구가 없는 상태이다’ 라고 하는 표현이 나와요. 도대체 이와같은 사람들이 지향했던 것이 과연 이상적으로 볼 때는 보기 좋을지 모르겠지만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피지배층에게 상당한 정도의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의 것들을 이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봤던 이 당시의 시대적 한계라고도 볼 수 있죠. 이와 같은 생산력이 부족한 그래서 움집같은데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작은 나라 적은 백성, 왔다갔다 안하고, 그런 사회들을 이상적으로 본다고 하는 우리네 시각은 과연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정당한가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어요. 이것이 왕필의 해석입니다. ---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7_02.htm ◆ 『노자』에 소국과민에 대한 다른 해석② 그런데 읽고 나서도, 사실은 왕필이 지향하는 세계가 분명히 무엇인가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아요. 그러면 하상공은 어땠는가. 하상공은 훨씬 더 실천적인 방식으로 해석을 하고 단구별로 끊어져있습니다.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보죠. ‘나라를 작게 여기고 백성을 적게 여기며’ 번역의 때깔이 완전히 바뀌어 있습니다.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의 수를 줄이고 이런 의미가 아니라 ‘나라를 작게 여기고 백성을 적게 여기며.’ 대한민국이 작은 나라가 아니죠. 더군다나 남북한이라든가 경제규모,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는 혹은 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공간까지 따진다면 굉장히 넓어요. 지금 미국이 또 그러하죠.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리나라가 작은데. 미국은 얼마나 크겠어요. 예전에 영국을 보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하는 명칭을 쓰지 않았습니까. 나라를 작게 여긴다고 하는 것. 나라를 작다라고 여길 수 있어요? 그런건 있죠. 20평 집에 살다가 식구가 늘어나면 좁죠. 30평집으로 이사했어요. 40평 집에 갔더니 우리 집이 좁아보여. 우리가 생각한 느낌은 이런 방식으로 느끼는 것이 우리의 문명의 감각이에요. 거대한 땅덩이, 나라가 작다. 백성이 적다. 사실 같이 살고 있는 마누라 한 사람도 감당이 안되고 나를 닮은 내 아들래미가 하는 짓도 이해하기 힘든데 그 수많은 인간들을 적다고 여겨라.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해요. 하상공의 주석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인은 이상적인 치자를 의미하는 거죠. 비로 큰 나라를 다스린다 할지라도 오히려 작게 여겨, 검소함을 보이고 사치하지 않는다. 이 말은 아주 나쁜 의미는 아니에요. 노자의 원문에 보면 큰 나라를 작은 생선 다루듯이 하라. 예를 들면 고등어, 동태, 명태를 넣고 찌개를 끓이면 잘 안부서지요. 그런데 붕어 같은 걸 넣으면 더 잘 부서지고. 특히 동태같은 경우 찌개 할 때보면 크게 썰어서 하니까 국자로 휘저어도 고기가 바스러지고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런데 조그만 붕어 같은 경우 끓이면 국자 때문에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고 형체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따라서 나라를 다스릴 때는 아주 조심조심하는 마음으로 해야 된다. 그 뜻을 여기서 지금 전용하고 있을 뿐이에요. ‘검소함을 보이고 사치하지 않는다.’ 이것은 뒷부분과 바로 연결 됩니다. 많으니까 일벌여도 되겠지가 아니라 아무리 많더라도 몇 사람 있듯이 여겨야지.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에만 제대로 치자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 얘기랑 같은 것이거든요. 소국과민이라고 하는 것이 실질적인 크기가 아니라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해라 이 메시지에 지나지 않아요. 굉장히 실천적인 방식이죠. 맨 마지막에 표현은 나중에 또 나오지만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다’ 요즘 수고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광화문에도 가야되고 시청 앞 광장에도 가야되고. 이런 일들이 수고로운 거예요. 평소에 내 행동반경을 벗어나는 일들을 하는 것이 수고로운 일이라는 겁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죠. 수고로운 것이 뭡니까. 두 가지입니다. 전쟁터에 끌려 나가는 것하고 부역에 동원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내 몸 자체가 막 이렇게 해서 노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떨어지면 불 꺼졌기 때문에 못해요. 지금처럼 야간작업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거죠. 과거에 기름 등잔불 켜고 산다는 것은 엄청난 부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은 상식이지 않습니까. 지금은 초값이 싸졌지만. 혹시 초 안 꺼트리고 불 켜는 방법 아세요. 밖에 나가서 뭐 하실 때. 요즘은 종이컵 쓰잖아요. 신문지를 둘둘 말아서 맨 끝에 촛농을 한 두방울을 떨어뜨리고 그걸로 붙이세요. 그 다음에 그걸, 양초의 끝 심지보다 약간 위로 올라가게 해서 거기에 불을 붙이면 그 밑에 약간 공간이 생겨서 촛농이 젖어요. 바락이 샤악 불어도 이 쪽이 안 꺼지고, 이 쪽이 안 꺼지고 그래서 다시. 실제로 해보니까 바람이 굉장히 강풍이 불어도 안 꺼져요. 이런 걸 생활의 지혜라고 하죠. 지금 왜 제가 초를 예로 들었나면. 정치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촛볼이 한 번 촤악. 요즘 텔레비전 프로그램 보면 코로 촛불 쫙 세워놓고 끄는 그런 것도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쉽게 꺼진다는 얘기에요. 정치인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노심초사라고 할 때. 마음이 타들어간다 초가 타들어간다. 비유가 많이 쓰이잖아요.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 이 속에는 노심초사하는 치자의 마인드가 굉장히 들어가있는 겁니다.
그 다음 구절이 압권입니다. 보시면 십백什伯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고 기器가 나와요. 십백지라고 되어있으니까 더군다나 인지라고 되어있어요. 이것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면 안 됩니다. 이런 경우는 역사적 고증적으로 뚫고 들어가야돼요. 주석을 보죠. ‘백성으로 하여금 각각 10명이나 100명 단위의 조직을 만들어, 귀한 자와 천한 자가 서로 침범하지 않게 한다. 기器는 농사꾼을 가리킨다.’ 기는 번역이 잘못됐네요. 농사꾼이 아니라 ‘농사꾼이 쓰는 그릇, 기물을 가리킨다. ‘이불용’而不用란 농사꾼을 징발함으로써 농사 때를 빼앗지 않는다는 뜻이다.‘ 使民各有部曲什伯, 貴賤不相犯也. 器, 謂農人之器. 而不用, 不徵召奪民良時也 그런데 그 주석의 본 문장을 보면 놀랄 일이 무엇이냐면 부곡部曲이라는 표현이 나오죠. 부곡. 이 부곡은 책세상문고에 機心을 다룬 책 한 권이 나와 있을 정도로 독특한 주제입니다. 물론 그 후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이 부곡이라는 것은 일반서민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조직화 되어있는 특수한 단체. 그래서 용병으로 불려 쓰이기도 하고, 반정부적인 활동을 하기도 하고, 어떤 특정 세력과 제휴해서 도와주는 막후세력이 되기도 하고. 독특한 역할을 하는 것이 이 부곡이라는 집단인데. 이 부곡의 원래 표현은 한나라 때 만들어진 용어고 그리고 사전을 보면 뭐라고 나와 있느냐면 한나라의 군사편제단위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럼 什伯십백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죠. 뭐겠습니까. 部曲什伯부곡십백이라고 했어요. 십백은 성서에 많이 나오는 얘기죠. 십부장 백부장. 십부장, 백부장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백명의 장정을 거느린 지휘관이라는 뜻이고 십부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분대장, 소대장 정도에 해당되는 그런 개념이라고 보면 되요. 그럼 부곡십백이라고 하는 표현은 뭡니까. 전 나라를 행정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파악이 되어 있고 즉, 등재되어있다는 뜻입니다. 등재되어있다라고 하는 것은 조세의 의무를 지는 사람이 파악되어 있다는 뜻이고 또 이 사람들이 전시에 징발될 군, 군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속에 들어있는 얘기는 사유십백使有什伯이라고 하는 말 한 마디가 무엇을 함축하느냐. 문명에 이로운 기물이 있어서 쓰지 않는다 이것이 아니라 군현제의 달성을 얘기한다는거죠. 그런데 소국과민이라는 표현을 연결시켜 해석할 때 과연 낭만적인 해석이 가능할까요. 여기에서 보면 전체가 귀천이라고 하는 신분제도를 분명하게, 이것은 16등작 등등, 전국시대 때부터 발달되어온 이른 바 등급제, 품수제같은 것들을 포괄하는 얘기에요. 등급에 따라서 행동 등의 제한을 받게 되는 것이고 당연히 국가에 대해서 지는 의무가 달라지고. 또한 전체가 열 명 단위 백 명 단위. 보통 진나라에서 병법을 시작할 때 오가작통제 혹은 오호작통제라고 얘기를 하죠. 제가 가장 싫어하는 용어 중에 하나가 연좌제라고 하는 말인데 거기에서 나왔잖아요. 다섯가구 단위로 묶어서 상호감시하게 하고 한 집이 도망가면 그 집이 못 물어낸 세금을 나머지 네 집이. 네 집 도망가면 한 집이 다 독박을 쓰는 거죠. 이것이 바로 연좌제, 상호 감시 제도이면서 개별적인 인간, 하나의 가 단위로 집안을 통제했던 군현제의 실체입니다 이것이. 이 속에는 바로 그와 같은 방식의 즉 국가적 권력이 마을 단위 부락 단위로 가능했던 시대를 넘어서서 개개 인간을 향한 국가의 권력이 작동하는 국가 체제에 대한 표현이 들어가 있는 것이에요.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아름답고 낭만적이고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치자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하나의 국가 시스템이 여러 개로 분할되어 있으면 결국은 전체를 통일하려고 하는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전쟁을 줄이는 방식이기도 해요. 그래서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다음. 백성으로 하여금 죽음을 무겁게 여기게 하고, 멀리 이사하지 않게 한다.(使民重死而不遠徙) 이 얘기는 아까 우리가 불투명하게 하고 넘어갔지만 백성으로 하여금 죽음을 무겁게 여겨라, 여기게 만들어라, 이사 다니지 않게 하라. 당나라 때 여행을 했던 엔닌이라고 하는 일본승려가 <엔닌구법순례행기> 라는 책. 번역도 나와있고 라이즈너라고 하는 사람이 그 책을 소재로 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썼어요. 우리나라에도 번역이 되어있는데. 거기에 의하면 이 사람이 신라 사람들의 배를 타고 가요. 중국에 도착해요. 중국에 도착을 해서 거기서부터 장안까지 가는데. 마을 하나를 통과할 때마다 행정서를 끊고 허가를 받아서 통과를 한단 말이죠. 당나라의 제도가 문물 정비되어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걸 얘기합니다. 옛날하면 막 이렇게 생각을 하고 아무런 시스템이 없고 그렇게 생각하기 십상인데. 마을에서 마을을 통과할 때 그 사신. 분명한 나름대로의 비자가 있는 거예요 말하자면. 비자를 발급받은 사람이. 지금 비자 발급받으면 다 돌아다닐 수 있잖아요. 특히 유럽같은 경우는 유럽연합이 되어 있어서 하나 받으면 통과 아닙니까. 그런데 이 당시에 이 승려가 했던 절차가 하나하나 넘어갈 때마다 통행증을 교부받아서 넘어갔다라고 하는 구절이 나와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만큼의 행정력이 완비되어있다는 뜻으로 봐야 된다는 거죠. 바로 이런 속에서 구현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면 그와 같은 국가 체제 시스템을 완성하려는 노력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바로 이것을 표현하는 말이 황제전제, 혹은 황제지배체제 라고 하는 표현.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과거에 제민지배체제라고 표현을 했고 이것이 바로 천하일통의 세계를 의미하는 겁니다. 황제권의 관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개개인이 느끼는 현실의 힘으로 느낀다면 이와같은 걸 얘기하는 거예요. 군주가 백성을 위해 이익을 일으키고 해를 제거하여 백성이 각각 자기 자리를 얻게 할 수 있으면, 백성은 죽음을 무겁게 여기고 삶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정치와 법령이 번잡하지 않으면 백성이 자신의 직업에 편안히 종사한다. 그러므로 백성은 자신이 늘 거처하던 곳을 떠나 멀리 옮겨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상태의 사회가 있기 위해서 해야 될 일들. 첫 번째 전쟁이 없어야 됩니다. 전쟁이 없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적국이 없어야 된다는 얘기죠. 적국이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됩니까 황제 한 명이어야지만 가능한 얘기가 되는 거죠. 그렇죠. 그 다음에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겁게 여기고 삶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그렇게 하게 된다면. 죽음을 무겁게 여긴다고 하는 것은 아까 제가 우회적인 표현으로 했다시피 죽음을 무릅쓴다고 하는 것은 불만이 없는 거예요. 황제에 대해서. 최소한 먹고살만하고. 역심을 품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죠. 특히 백성이 자기가 살던 근거지를 떠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까처럼 국가의 부름, 즉 국가에 의한 동원. 전쟁에 나가거나 부역에 나가거나. 또 한 가지는 자발적으로. 제도적 용인되는 것이 있고 안 되는 것이 있어요. 하나는 시집, 장가가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죠. 그런데 안 좋은 것이 있어요. 온가족이 몰래 야반도주하는 것. 야반도주하는 것. 지주의 착취로부터 몰래 도망가거나 아니면 국가의 세금, 부역으로부터 도망가거나. 그래서 마을이 텅텅 비죠. 그런 상황을 생각한다면 죽음을 무릅쓴다거나 삶을 탐한다,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이것은 지금 우리처럼 웰빙일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먹고 살만하다 근근이 버틸 수 있는. 그래서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역사학자가 유목민족들이 농경민족들을 착취했고 그 다음에 지배자들이 시스템을 만들면서 농민들을 착취하는데. 착취의 수준은 피착취자들이 견뎌낼 수 있는 마지노선까지 착취를 다 해왔다고 해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죠. 그나마 노동운동, 여러 가지 시민운동들에 의해서 많은 부분들이 조금 나아진 것 같지만. 사실은 요즘 세계화 얘기하면서 이른 바 선진산업국에서 이루어졌을 착취가 상대적으로 좋아진 반면에 그 착취의 구조가 저개발국으로 오히려 전이되는 방식으로 세계화가 되고 있기 때문에. 요즘 책 많이 보면 제3세계의 어린이 노동, 심각한 문제라고 고발하는 책 많이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근본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거처하던 곳을 멀리 떠난다’는 표현은. 지금 우리는 평수 늘려가면서 이사 가는 것은 무척 좋은 것이고. 직장 때문에 이사 간다, 승진해서 가는 것이니까 좋은 거고. 하지만 이사 가는 것은 사실 기본적으로 피곤한 것이지 않습니까. 짐 옮겨야 되고. 특히 저처럼 책이 많은 사람들은 이사갈 때 꼭 아저씨들한테 좀 더 주거나, 따로 고깃값을 줘야 되요. 몇 배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교수하고 목사하고. 이런 사람들을 정말 싫어한데요. 귀찮은 일이죠. 그 다음부터 단이 바뀌면서 맥락이 상당히 바뀝니다. --- --- |